언제나 소중한

제빈과 현미가 포켓몬들을 위한 리본을 만듭니다.


“…이봐, 오늘이 어린이날이래.”

“어린이날?”

현미는 심드렁한 얼굴로 탁자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며 말을 거는 제빈을 슬쩍 보았다. 아까부터 색종이로 뭔가 하는 것 같더니, 손 안에 들려있는 걸 자세히 보니 종이로 만든 리본이었다. 의외로 제빈은 손재주가 있었는지, 형태가 곱게 잘 잡힌 리본은 잘 구운 찰흙같은 손에 담겨서 그의 파스텔 색감이 더욱 돋보였다.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보통 사람에게도 뻔히 보였다.

그 기념으로, 직접 만든 어버이리본이야? 그런셈이지. 언제부터 그렇게 만든거야? 꽤 됐어. 제빈의 두랄두돈이라고, 알아? 몰라, 그런거……시답잖은 잡담이 오가다가 어느순간 툭, 끊겼다. 현미가 먼저 잡지 않는다면, 제빈이 현미에게 무언가 놀릴거리를 찾지 못한다면, 그들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소꿉친구라기에는 너무 건조했고, 라이벌이라기엔 어느곳에서든 격차가 있었다. 단순 배틀센스나 넓은 아량 같은 게 아니다. 전하는 마음이 없었다. 언제나, 가까이, 그런 말을 할 때면 다른 사람이 떠오르면 떠올랐지 이 사람이 먼저 떠오르는 일은 절대 없었다고 할까.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그 녀석은’ 같은 말도 제대로 나누지 않는 어설픈 사이였다. 당연히 어렸을 적 우리 같은 것도 기억하기 어려웠다. 현미는 그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열받을 때도 있었고, 언제는 그게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어쩐지 머리가 둔해진다. 현미는 조용히 탁자에 가서 제빈과 꽤 떨어진 자리에 앉아 짐을 풀었다.

*

*

어린이날.

현미는 배틀부실을 빌려 과제를 하러 온 것이었지만, 어쩐지 계속 집중이 되질 않아 가만히 펜촉을 노트에 쿡 찍었다. 오늘은 어인 일인지 소란스럽던 사천왕 나머지도, 그 까탈스런 챔피언도 보이질 않는다. 사각,사각 스치는 소리. 제빈은 여전히 리본을 접고 있는 듯 했다. 흰 종이에 눌린 펜 끝에서 새카만 원이 번져나갈 때 즈음, 이번에는 현미가 잠잠한 침묵을 비집고 다시 말을 꺼낸다.

“...리본 만드는 거.”

“으응?”

어딘가 붕 뜬 말투. 제빈은 여전히 리본의 포인트를 접느라 바빴다. 현미는 말을 거는 동안에도 그쪽을 보고 있지 않았기에 다만 개의치 않았다.

“가르쳐 줘. 나도 리본을 만들래.”

“어디에 쓰려고?…음, 뭐. 색종이는 충분하니까.”

리본은 포켓몬들에게 전해줄 생각이었다. 어린이날이라고는 하지만, 집을 바다 건너에 두고 아카데미 생활을 하고 있자니 현미는 자신이 어린아이라는 자각보다도 소중한 포켓몬들이 먼저 떠올랐다. 레벨로 따지자면 이미 다 자랐을지 모르지만, 어쩐지 서로의 얼굴이나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 포켓몬이 항상 여전히 그 어느 시절의 아기포켓몬처럼 느껴진 탓일까.

딸깍이는 소리와 함께 펜과 노트를 정리하고, 의자를 들어 적당히 제빈의 곁으로 옮겼다. 어쩐지 자존심이 묘했지만, 오늘따라 아련해진 기분에 현미는 변덕을 누르고 기왕 내뱉은 말을 지키기로 했다.

“자아, 그럼! 어디부터 가르쳐줄까?”

“–당연히 처음부터!! 알면 너한테 물어봤겠냐!”

“흠, 그렇게 발끈하지 말고 모른다는 걸 솔직하게, 덤덤히 인정하는 것도 중요한 삶의 자세라고~.”

“너 자꾸 그러면 리본 대신에 널 매듭짓는 수가 있어.”

“앗, 무서워졌다. 그럼 농담은 이쯤에서 하고~…. 색부터 골라볼래? 자, 아이보리, 라벤더, 블루, 핑크, 레드, 그린. 몇 개 안 되지만 그래도 취향껏 골라보라구. 여차하면 여러색을 써도 좋아. 난 지금 리본이 마지막이니까.”

“…블루. 블루부터 쓸래.”

“그 색이란거지? 그럼 우선 이 색종이를 손가락 한마디 너비로 잘라봐. 그리고…….”


……만들었다! 기어코, 만들어냈다! 의자를 박차고 서서 환한 얼굴로 6개의 리본을 들어 올려다보는 현미를 기진맥진한 기색의 제빈이 의자에 걸터앉은 채 고개만 들어 쳐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렇게 손재주가 서툴 줄은. 제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웃음을 흘렸다.

실패한 리본은 제빈이 까놓고 내버려둔 과자 봉지들과 비등비등할 정도로 많았다. 그래도 그 긴 우여곡절 끝에, 겨우겨우 알록달록 가지각색의 리본 6개를 만드는 것을 성공했다. 제빈은 긴 한숨을 내쉬며 작은 언덕처럼 쌓인 색종이 조각들로 시선을 옮겼다. 포기하지 않는 자세가 제일 신기했지만… 너덜너덜해진 손으로 리본을 소중하게 쥔 채 부실을 서성이는 현미가 보였다. 제빈은 무심코 지금까지 신경쓰지 않았던 구급 상자가 어디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세러모니는 어느정도 끝난거지? 그 리본은 포켓몬들한테 달아줄거야? 만약 달아준다면, 언제?”

“아…. 뭐, 그, 엄, 그렇지.”

현미는 후련함이 어느정도 가신 얼굴로 어색하게 답했다. 리본을 만드는데 제일 노심초사한 것은 물론 자신이었지만, 제빈도 기대 이상으로 도와줬다. 그 제빈이, 그랬다니. 뭔가 상상이 가질 않았지만 어찌됐건 평소처럼 퉁명스레 답하기가 어려웠다.

“언제, 냐고 묻는다면……으음.”

“고민하는 얼굴이네. 만일 더 시간이 있다면 지금은 어때? 사천왕들도 각자 에리어에 갔고, 우리 챔피언이야, 뭐… 아마 캐니언 에리어 쪽으로 가셨으려나? 아마 폴라에리어 쪽이면 여유로울거야. 자아, 따라오라고~”

“뭣, 아니, 그렇게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나아가면 시간이 있든 없든 상관 없단 거 아냐!? 야! 야!!”

제빈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었고, 현미는 그 앞에 서기만 하면 으레 그렇듯 버럭 화를 내며 얼굴에 날카로운 가시가 돋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뿌리치진 않았다. 그 미묘한 차이를 둘은 안다. 하지만 그것 이상은 딱히 바라지도, 알지도 못 했다. 그래서 단정짓기도, 부르기도 모호한 사이.

*

*

결국 현미는 폴라에리어에 이끌려왔다. 처음엔 투덜거렸지만, 본인이 추위를 그렇게 타는 체질도 아니었을 뿐더러 경치가 꽤 나쁘지 않았다. 설산과 빙산이 있어 주변에는 새하얗고 약간은 파란 능선이 구불구불 늘어서있고, 또 멀지 않은 곳에 유빙이 떠다니는 깊은 물 위에서 잠방질하는 라프라스 몇마리도 보였다. 언제나처럼 찬 바람을 타고 전해진 에리어의 오르골 사이에서 드문드문 포켓몬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현미는 잠시 말을 잃고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다, 한껏 기지개를 켜는 제빈에게 눈이 닿았다. 이 장소는 그의 안목일까? 음, 그렇게 생각해주기는 싫어서 그저 운이 좋았던 탓이라고 치부하기로 했다.

“읏-차.. ..자, 어때? 폴라에리어! 오늘은 눈보라도 오고 간 뒤라 날씨도 적당할거야.”

“…알고 있어.”

그제도 어제도 찾아왔었으니까. 눈보라가 어제 그쳤었다는 것 쯤이야 잘 알았다. 현미는 제빈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몬스터볼들을 한데 모아 꺼내들었다. 자, 오늘도 부탁해. 현미는 몸을 살짝 굽혔다 펴고 일제히 포켓몬들을 꺼냈다. 금방 박 터뜨리듯 뻥 뚫리는 소리들이 울리며, 현미의 포켓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일 먼저 갸라도스가 우렁찬 포효를 울렸고, 따라 탱탱겔과 레어코일이 웅웅대는 울음소리를 내며 트레이너를 반겼다. 알로라 텅구리, 악비아르, 잠만보도 저마다의 인사를 건넸다. 그 중 조금 가까이 서 있던 제빈에게 아는 척을 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친근하게 비벼오는 악비아르의 주둥아리에 살짝씩 밀려가며, 미소 지은 채 악비아르를 몇번 쓰다듬던 제빈은 리본을 손에 쥐고 머뭇대는 현미를 보고 입을 열었다.

“리본, 달아주려던 거 아니었나?”

“다, 당연히 달아줄거야! 응. 그런데…, 처음 만든 리본이라 역시 모양도 어색하고. 별로 맘에 들어하지 않으면 어쩌지 싶어져서.”

…어쩐지 답지않게, 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았지만 제빈은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현미가 속내를 전하는 것이 서툰 또래라는 것쯤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기껏 만든 건데, 얼른 전해주지 않으면 아깝잖아. 제빈은 피식 웃고는 다시 말을 이어간다.

“괜찮아. 네 포켓몬들은 좋은 녀석이니까 분명 기뻐해줄거야. 한번 믿어봐, 난 너와 이 녀석들과 자주 배틀해온 사이잖아?”

으윽, 어딘가 찔린 듯 신음을 흘리면서도 현미의 표정은 그리 나빠보이지 않았다. 말투가 약간 얄밉다, 정도였을 뿐. 현미는 미리 정해두었던대로 각양각색 리본에서 하나씩 골라 포켓몬들에게 달아주었다. 영문을 모르거나 놀라워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포켓몬들에게, 현미는 뒤에 있는 제빈을 애써 무시하고 최대한 진심을 눌러담은 미소를 보인다.

“어린이날, 선물이야.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쭈욱… 같이 있어줘.”

분명 저 앞에서 하기엔 부끄러운 고백이었을텐데도 결국 용기를 냈다. 무릎을 꿇고 마지막으로 리본을 건네받은 텅구리를 끌어안는 현미를 조금 멀찍이서 바라보던 제빈은 폴라에리어로 가던 길에서 들었던 리본의 간단명료한 이름을 떠올렸다.

언제나 소중한 포켓몬.

따지자면은, ‘언제나 소중한 갸라도스’, ‘언제나 소중한 텅구리’ 라고 부르면 될 것이다.

끌어안은 모습 그 사이, 언듯 해맑은 미소가 보였다. 현미는 역시 알기 쉬운 녀석이라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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