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내리는 저택

1화. 봄볕, 산들바람, 그리고 체육복 (1)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형태가 없는 것을 사랑했던 소녀가 있었다. 달콤한 도넛을 한입 베어 물었을 때 퍼지는 감정을 사랑했다. 여름 방학 당일 친구들과 공원에서 뛰어놀던 때의 기쁨을 사랑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부모의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사랑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소녀는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 소심한 성격과 어린아이다운 사소한 이유로 친구들에게 시기 질투를 사 따돌림을 당했다.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은 소녀를 한쪽 길로 몰고 갔고, 같은 일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 어떠한 결단을 내리기에 이른다.

상처받은 아이의 선택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었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나면 또 죽였고, 손끝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일 때마다 머리를 내리쳐 ‘나’를 죽였다.

결국 과거의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피처럼 흩어져 남은 것은 그녀가 사랑했던 감정의 잔재들뿐이었다.

다시 태어난 소녀는 형태가 없는 것을 믿지 않았다. 감정을 믿지 않았다. 우정을 믿지 않았고 사랑을 믿지 않았다. 애정이란 부질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기를 시작했다. 사교적이고 누구에게나 인기 많을 법한 아이, 그러나 눈에 띄지 않게 적당히 조용한 성격을 유지할 것.

권여루는 그렇게 새로운 학교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번잡한 도심에서 구석진 동네에 위치한 고등학교로 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조용한 곳에서 자아를 연기하며 살아가면 ‘이번 삶’에는 실패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이번에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권여루에게는 삶을 이어 나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자신은 과거에 죽인 ‘내’가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이번’의 내가 옳았다는 걸 인정받아야 했다.

누구에게 인정받느냐고? 글쎄,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남은 건 누구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다짐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여태껏 죽여온 수많은 ‘나’에게 고개를 들 수 없지 않겠는가. 마음속 어딘가에 산처럼 쌓인 시체 더미의 의미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내 거 빌려줄까?”

“...응? 나? 나한테?”

“체육복. 필요한 거 아니야?”

누군가 내 삶의 변수가 되려 하고 있었다.

*

교장인지 교감인지, 어느 선생님의 지루한 훈화 말씀이 끝나고 아이들이 삼삼오오 교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입학식 전에 미리 잡아둔 자리에 가서 앉는데, 옆자리에 누군가의 가방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어차피 인원수에 맞게 채워질 자리였으니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이 다 들어오도록 자리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일진이라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칠판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교실의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리고 한 여학생이 현란하게 등장했다. 여학생은 제게로 시선이 모이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뭘 그렇게 쳐다봐? 안녕, 친구들! 아는 얼굴도 있고, 모르는 얼굴도 있구먼! 반가워~.”

이런. 파워 인싸였다. 저런 애랑 친구가 된다면 인생이 피곤해지겠지. 괜히 시선을 피하며 못 본 채하고는 책상 위에 엎드렸다. 아이들은 곧 흥미를 잃었는지 다시 떠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담임 선생이 들어오기 전까지 좀 잘까. 아, 그래도 친구는 사귀어 두어야 학교생활이 편할 텐데...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 덕분에 쉽사리 잠이 들지 못해서 거의 눈만 감고 있는 상태.

그때, 자리의 주인이 드디어 왔는지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얼굴은 확인해야 할 것 같아 상체를 일으켜 상대를 보는데, 말문이 막혔다.

“...”

“안녕?”

아까 그 여학생이었다. 탈색한 짧은 금발에 양쪽 옆 머리카락을 갈색으로 물들인, 독특한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빤히 얼굴을 쳐다보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여학생이 갑자기 양손으로 팔을 붙잡는 바람에 눈길을 다시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난 유소연이라고 해. 넌 이름이 뭐니?”

“난... 권여루.”

얼떨결에 대답을 해버렸다. 반짝거리는 눈빛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초면에 대뜸 호감을 보이는 태도에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루는 은근슬쩍 잡힌 팔을 빼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 이것 좀 놓고 얘기할래?”

“아, 미안 미안! 헤헤, 이름이 여루구나. 이쁘다. 여루야, 너 나랑 친구 할래?”

“엥?”

너무 뜬금없는 요청이라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버렸다. 소연은 미소를 잃지 않고 방실거리며 여루를 재촉했다.

“나랑 같이 다니자! 너, 유리랑 친구 아니야?”

“어? 어떻게 알았어?”

“나도 유리 친구야! 나래중 나왔지? 유리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

설마 친구의 친구였을 줄은.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알아보고 말을 건 걸까? 살짝 의구심이 들었다.그리고 그것은 이어진 소연의 말로 인해 쉽게 해소되었다.

“유리가 네 사진 보여줬었어. 그래서 바로 알아봤지.”

“아...”

“그리고 같은 학교가 되었다는 소식도 들었고. 설마 같은 반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 이거 완전 운명 아니니?”

흥분해서 뭐라 뭐라 주절대기 시작하는 소연이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며 여루는 생각했다. 일상에 귀찮은 게 하나 더해졌다. 그래도, 이 정도면 ‘평범함’을 연기하기에는 안성맞춤 아닐까.

시작이 좋았다. 소연이를 친구로 삼아 이번에는 과거와는 다른 삶을 이어 나갈 것이다. 반드시 쟁취해낼 것이다. 남들과 같은 평범한 인생을.

소연의 수다를 애써 웃으며 들어주는 여루의 대각선으로 멀리 떨어진 책상. 한 남학생이 학생 여럿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었다. 주위에 있는 학생들은 주로 여학생들로, 둘러싼 남학생에게 질문을 퍼붓고 있었다.

……너 진짜 연습생이야? 소속사가 어딘데? 채주현, 너 금수저라는 거 진짜임? 주현아, 얼마 전에 데뷔 조에 들었다며? 축하해!……

소연이의 수다와 교실 내의 소란스러움으로 인해 질문의 내용은 여루에게까지 들리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미소로 학생들의 질문에 응하던 남학생이 순간 시선을 창가 쪽으로 향했다. 미세한 움직임이었고, 곧 시선을 거두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변화였다. 시선이 향했던 창가 쪽 자리에는 소연이 여루에게 신나게 말을 퍼붓고 있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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