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내리는 저택

프롤로그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을 죽여왔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가슴 속에서, 그리고 기억 속에서. 내게 또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학살자가 될 것이다. 그도 그럴게, 나는 여태껏 수많은 ‘나’들을 죽여왔으니까.

변명을 하나 하자면 나는 내 마음의 목소리를 따랐을 뿐이었다. 그 결과 어떤 자아는 자살하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자아는 살해당했다.

어쩌면 내겐 더 이상 ‘나’라는 정체성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내가 죽었다. 마음속에 속삭이던 누군가의 음성 덕분에. 그 누군가는 당연하게도 나였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이 지난한 살인에 끝은 있는지, 목적이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저 나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그리고 도피하기 위해. 세계에 나를 맞춰 넣기 위해. 이건 아주 의도적이고 정기적인 살인들이었다. 어느 날은 목소리를 들었다.

─이번에도 실패했네? 그럼 오늘까지의 나는 죽이고,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어서 죽어. 그래야 다시 도전할 수 있지.

마음속의 목소리는 오늘의 나를 유혹했고, 나는 내일의 나를 위해 자살했다. 타의적 자살. 내가 의도했지만, 의도하지 않은 죽음. 내일의 나─아니. 또 다른 ‘나’는 실패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다시 노력할 것이다. 세계라는 틀에 자신을 구겨 넣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하라는 대로만 하면, 남들처럼만 살면. 그럼 내게도 보상처럼 평범한 일상이 주어지지 않을까.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실패한 것으로 치부했다. 실패한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아서 사랑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곧 삶의 한 부분을 포기한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해도 미련하게 그런 엄마를 사랑해버리는 아빠처럼. ...목소리가 떠든다.

─그래, 너는 저렇게 살지 마.

수려한 외모와 남들보다 조금 뛰어난 능력들로 인해 어린 나이에 따돌림받은 것. 평균 이상은 되지만 천재는 아닌 애매한 위치. 아이들의 시기는 유치했고 의외로 골이 깊었다. 나는 어린 시절 따돌림을 받았고, 그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마음의 문을 닫았다.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스스로가 고정된 틀에 자신을 맞추지 않는다면. 그래서 나는 평범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마음속으로 실패한 ‘나’들을 죽이며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를 끊임없이 부여했다.

자신을 깎아내린 끝에 남은 건 바닥 난 자존감. 성격을 죽이고, 개성을 죽이고, 말투를 다듬고. 그건 결국 나 자신의 개성을 죽이는 일이었다.

99명째의 나를 죽이던 어느 날,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신의 계시처럼. 아니, 그건 신의 계시가 아니었다. 결국 그 또한 내가 만들어낸 나 자신의 의지니까. 수많은 ‘나’의 시체로 쌓인 산 위에서 나는 내일도 다짐할 것이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말아야지.

──부디, 이번이 마지막 다짐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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