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창작_6월

행간2

3주차의 가지 않은 길과 행간에서 이어집니다.

도시에 돌아오고 나서도 렉스 코널은 한동안 바쁘게 지내야 했다. 상부에 제출할 대부분의 서류가 렉스의 중간 결재를 거쳐야만 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건수를 잡은 각다귀처럼 달라붙는 리처드를 상대해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델타-8의 리처드 하워드는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인사로, 실전 경험이 많은 엘리트로서 대위 직급을 달고서도 남을 대할 때 소탈하게 굴어 많은 이들에게서 쉽게 호감을 얻었으나, 렉스 코널은 그를 싫어했다. 그건 두 호노스를 향한 적개심과는 다른 부류의 감상이었다. 렉스가 리처드를 아주 많이 부담스러워한 것이다.

리처드가 렉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쯤이야, 그가 이곳에 처음 방문한 날 렉스가 안내를 맡았을 때부터 숨기지 않고 드러내 온 일이라 누구나 익숙해했다. 몇 번에 걸친 리처드의 절절한 고백을 렉스가 전부 거절했고, 그들이 친구 사이조차 되지 못했지만, 직장 동료로서는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기로 했으며 그걸 핑계로 가끔 리처드가 렉스에게 들이댈 때가 있단 건 철지난 가십에 불과하다. 저 불도저의 되도 않는 플러팅에 익숙해져 버리고 만 렉스가 이제 시도 자체는 거절하지 않을지언정 사람에겐 무심해진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나 항간에 떠도는 소리와는 달리, 렉스는 고백과는 별개로 리처드라는 인물 자체에 대해선 제법 신경을 쓰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리처드는 그의 집안 방계 쪽 사람이다. 즉, 리처드 하워드는 예전부터 렉스 코널을 알고 지내왔으며, 그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다. 그의 일방적인 호감과 경외, 애정은 거기에서 기인했다. 그건 렉스가 리처드가 뭘 하든 내버려두기로 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리처드가 정말 렉스를 성애적으로 어쩌고 싶어 하더라도, 렉스가 바라지 않는다면 그는 렉스의 손끝 하나 건드릴 수 없을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또 렉스는 그런 방식의 고백에 대해선 제법 익숙했다. 이미 평생 들어온 것이므로.

그러니 정정한다. 그가 리처드를 부담스러워하는 진짜 이유는 다름 아닌 그가 가문의 끄나풀이라서다. 어쩐지 그렇게 뛰쳐나왔는데도 가만 내버려둔다 싶었지. 렉스는 저들이 리처드를 붙이는 것으로 자신의 행동에 제약을 두지 않기로 했다는 걸 알았다. 그가 뭘 하더라도 가문에 소속한 자로서는 제어할 수 없으니, 뭐라도 당장 내치지 않을 만한 것을 하나 붙여둔 쪽에 가까웠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정도의 간섭이야 조금 거슬릴지언정 아주 신경 쓰이는 일은 아니었고, 렉스로서도 가문의 그림자에서 완벽하게 숨어들 수 있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럭저럭 납득하고 있었다.

가문의 처분과는 별개로, 렉스가 무르게 구는 데엔 리처드가 렉스를 의심 한 톨 없이 순수하게 우러러본다는 점도 한몫했다. 리처드는 파문의 길을 걷고 스스로 죽음을 택해야 할 순간이 오더라도 가문을 배신하지 않을 것처럼 충성심이 깊었지만, 가문과 렉스를 저울질해야 하는 상황에선 망설임 없이 후자를 선택할 사람이기도 했다. 렉스는 남의 호의를 믿지 않았지만, 신앙에 눈먼 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진 잘 알았다.

지난 업무와 관련한 주요 허가와 편의를 제공해 준 대가로 리처드는 렉스에게 몇 번 식사를 함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건 렉스에게 있어선 썩 유쾌하지 않은 요구였으나, 몇 번 부딪히며 렉스의 성깔을 알게 된 리처드가 이제 섣불리 자신의 감정을 밀어붙이지 않을 정도로 얌전해지기도 했고, 메뉴 선정에 늘 자신의 취향을 일 순위로 반영해 주었기 때문에 렉스는 군말 없이 자리에 참석해 왔다.

그러니까 오늘이 세 번째 만남이다. 부대 내에서 만난 건 세지 않는 게 나을 정도로 잦았지만 —정말이지, 렉스는 같은 알파 부대도 아닌 리처드가 어쩜 그렇게 자주 고개를 드미는지 알 수 없었다.— 사복을 입고 레스토랑에 마주 앉아 와인잔을 기울인 게 저번 임무가 끝난 뒤 세 번째라는 뜻이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커트러리를 들어 잘 구워진 스테이크를 썰던 렉스는 문득, 대가를 지불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당시 경황이 없어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보고자 먼저 연락한 건 렉스였지만 덕분에 리처드는 지난 며칠간 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들이댈 수 있었다. 게다가 최근 그는 거의 제가 렉스의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이대로 내뒀다간 저 입에서 무슨 헛소리가 나올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기 때문에, 렉스는 생각한 것을 그대로 내뱉기로 했다.

“이봐,”

“그러고 보니, 지배인이 코널 씨가 좋아하시는 빈티지를 들였다고 하더군요. 13년산으로 말입니다. 잔으로는 아쉬울 게 분명하니 병으로 시킬까요?”

“…그래.”

리처드가 의도하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끊어가자, 일순 울컥한 렉스가 눈썹을 추켜세웠으나, 이어지는 말엔 그도 뭐라 불평하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처드가 말한 빈티지라면 그가 가문에 있던 적 즐겨 마시던, 이 도시에서는 구할 수 없는 와인일 테다. 그걸 무슨 수로 얻었는진 몰라도, 아니, 사실 알 것 같았지만, 렉스는 성질을 내며 거절하기보단 모르는 체 받아 마시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리처드도 렉스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알겠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직원을 불러 와인을 가져다 달라고 요청했다.

서버가 따라준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렉스가 못내 만족스러워하며 느른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본 리처드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어진다. 괜히 시선을 피한 렉스가 작게 헛기침했다.

“괜찮네.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딱 세 병을 들였다 하더군요. 다른 두 병은 이미 예약이 끝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렉스 씨가 바라신다면 다음 식사 자리에도 내놓을 수 있도록 조치를 해두겠습니다.”

“됐어. 네가 여기 지배인인 것도 아니고.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데 키핑해서 뭐해.”

“언제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코널 씨가 바라신다면요.”

리처드는 렉스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작금의 렉스 코널은 명예도 지위도 재력도 없는 처지인지라 그는 헛웃음조차 짓지 않았다. 그러나 다 버리고 도망쳐 나와 없는 셈 치고 사는 자신과는 달리, 눈앞의 사내는 명정明淨한 가문의 일원으로서 저 말을 지킬 힘을 가지고 있다. 렉스는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됐다니까, 하며 답을 일축했다. 눈치 빠르게 의도를 잡아낸 리처드도 더 권유하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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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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