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창작_6월

잊혀진 ■■■

잊혀진 선지자. 행간2에서 이어지는 주간창작_6월 연작의 마지막 글입니다.

렉스가 좋아하는 와인은 포도주치고도 도수가 제법 높았다. 오랜만에 마신다는 핑계로 절제하지 못해 2/3병가량을 마셔 버신 렉스는 취기에 흥이 올라 리처드의 추천대로 하우스 와인을 몇 잔 더 비웠고, 적당히 마시다 눈치껏 귀가하겠다는 처음의 다짐이 무색할 정도로 취해버렸다. 리처드의 부축을 받아 겨우 기숙사로 돌아오니 제법 늦은 시각이었다. 부대의 일원이지만 어디까지나 협력 관계로 외부에 거주지를 따로 두고 있는 리처드는, 이제 됐다며 손사래를 치는 렉스를 걱정스러워하는 낯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제가 방 앞까지 부축해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됐어…됐습니다. 제가 알아서 합니다. 들어가시죠. 버스 끊깁니다.”

“정 걱정된다면 재워주신다는 선택지도 있는데 말이죠.”

취한 와중에도, 그래도 시설 내부라고 식당에서와는 달리 거리감 있는 경어를 쓰는 이의 옆모습을 가만 내려다보던 리처드는,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라며 작게 중얼거리듯 덧붙이는 목소리에 그만 소리 내 웃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재워줄 거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여기에 두고 가는 건 길바닥에 버리고 가는 꼴이라 위험할 것 같았고, 부축해 올라갔다 오자니 저 취객을 두고 문 앞까지만 갔다 돌아올 자신이 없어 말마따나 막차를 놓칠 것 같았다.

사실 리처드는 이 정도 거리야 그냥 뛰어가거나, 정 뭣하면 택시를 타고 가도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렉스가 엄격했다. 이 도련님은 언제 이리 검소해진 건지, 가문 사람이라면 반목하겠다고 으르렁거리더니 그래도 저 좋아하는 술 사준 건 감안해 선심 쓰는 모습은 좀 신선하기도 했다. 어쨌든 렉스의 탓하는 소리만큼은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리처드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때였다. 막 시설에서 나오던 자가 아는 체를 하며 다가왔다. 닐이었다.

“우와, 술 냄새. 왜 이렇게 많이 마신 거야?”

“시끄러워….”

렉스를 살펴보던 닐이 고개를 돌려 리처드를 돌아봤다. 분명 웃는 낯인데 눈빛이 서늘했다.

“내일도 일해야 하는 사람인데 너무 마시게 한 거 아닙니까?”

“말렸는데 듣지 않으시더군요.”

“그래요? 돌아온 뒤론 싸우지 않았는데. 렉스, 정신 좀 차려봐.”

“토할 것 같아….”

시시각각으로 안색이 나빠지는 모양새를 바라보던 닐이 거리낌 없이 렉스를 붙잡아 안아 들었다. 이미 몇 번 상대를 탈것으로 부려 먹은 전적이 있는 주정뱅이는 놀라지도 않고 얌전히 안겨들었고, 리처드 또한 렉스를 안아 든 상대가 누군지 잘 알았기 때문에 말리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면목이 없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다음부터는 좀 말려보시죠.”

“유념하겠습니다.”

닐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상대가 그걸 다 알면서도 ‘귀족처럼’ 답했다는 것도 말이다. 빙빙 꼬인 소릴 듣는 건 연회장에서 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게 싫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눈치 없이 지껄이는 말을 듣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나. 그는 질린 나머지 리처드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지도 않고 곧장 뒤돌아 건물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닐은 리처드가 뭘 하는 사람인지 알았다. 알고 싶어서 알게 된 것도, 따로 찾아본 것도 아니었다. 발령 초, 누가 새로 오긴 했는지조차 몰랐던 닐에게 리처드가 먼저 정중하게 인사를 하러 찾아왔었다. 그는 자신이 어느 가문에 속해 있는지 숨기지 않았으며, 도움이 필요해진다면 언제든 협력할 것임을 밝혔다. 닐은 딱히 그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저쪽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초 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일단 고개를 끄덕여 두었다.

렉스의 가문은 렉스 코널을 끔찍이도 아꼈다. 정작 렉스는 그걸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리처드는 렉스의 열렬한 신봉자였고 가문의 신실한 광신도였다. 만일 리처드가 렉스의 의사보다 가문의 의지를 조금이라도 더 신경 썼더라면 진작 내쳐졌을 테지만, 그는 바다의 잊혀진 선지자를 열광적으로 경애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어떤 부분에서 면죄부를 얻어내기까지 했다. 게다가 최근엔 도움을 준 것을 빌미로 건수 잡은 각다귀처럼 —이 비유는 닐의 사견이 아닌 렉스의 언급에 기반함을 밝힌다.— 시시때때로 렉스에게 들러붙고 있지 않았던가.

닐은 항간에 떠도는 소문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렉스와 리처드의 사이에 대해 어떤 말이 돌아다니고 있는지는 알았다. 무심하고 둔해 어떤 소문이 돌아다니는지도 모르는 렉스와는 달리, 리처드는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답하며 그 소문이 퍼지는 것을 내버려두고 있다고 씹어대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신기하기도 하지. 렉스 코널은 리처드 하워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지나가다 힐끔 보는 것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렉스는 자길 더 좋아하지 않았나? 핫팩을 주는 것도, 이렇게 몸을 내맡기는 것도 제게만 허락된 일인데.

상념 없이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렉스의 방 앞이었다. 닐은 숙취에 시달리느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렉스 대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렉스는 제 집 비밀번호가 털린 지 오래란 것을 알아채지도 못한 눈치였다.

“렉스, 씻고 자야지.”

“물….”

“렉스는 정말 어리광쟁이구나?”

렉스를 소파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둔 닐이, 성큼성큼 걸어 냉장고에서 뜯지 않은 생수 한 병을 들고 돌아왔다. 주정뱅이는 그 짧은 시간도 견디지 못한 듯 소파에 드러누워 늘어져 있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받아 든 물통으로 이마의 열을 식히던 렉스가, 비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목 넘김 몇 번으로 순식간에 물의 반이 줄어들었다.

“어…죽겠네. 내일 반차를 쓰든가 해야지.”

“적당히 마시지 그랬어.”

“간만에 마신 거란 말야.”

“그래, 그래.”

“너 내 말 안 듣고 있지.”

“잘 듣고 있는데 왜?”

싱긋 웃는 닐을 본 렉스가 뭐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얼굴을 구기며 시선을 돌렸다. 얄미워서 한 대 때리고 싶은데 도와준 걸 알아서 참는다는 눈치였다. 닐은 숨기지도 않고 소리 내 웃었다.

“늦었으니까 가서 자라.”

“렉스, 새벽에 속 뒤집어지면 어떡해. 저번에도 만취해서 들어왔다가 구급차 부를 뻔했잖아.”

“오늘은 안 그래.”

“거짓말, 이렇게 약해선. 렉스는 운동을 좀 더 열심히 해야 한다니까.”

“나더러 약하다고 지껄이는 놈은 네가 유일할 거다, 망나니 운동광 닐 호노스야.”

“자고 갈까?”

“저거 또 내 말 안 듣고 있지?” 성질내며 으르렁거리던 렉스가, 취기 때문인지 이내 귀찮다는 듯 눈을 감았다. “마음대로 해. 아니, 넌 바닥에서 자라.”

“그래. 그래도 렉스는 침대 가서 자야지.”

“귀찮아….”

인상을 쓴 채 도로 흐물흐물하게 무너져 내리는 집주인을 받아든 닐이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씻고 자기엔 힘들어 보이니 일단 재워두면 내일 아침에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싶었다. 이불을 목 아래까지 잘 덮어준 닐은 렉스의 구깃한 얼굴을 잠깐 구경하다가, 무드 등을 끈 뒤 도로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드러누워 있자니 한 뼘쯤 열린 문 너머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한참 듣고 있던 닐도 느리게 눈을 감았다. 조용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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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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