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1부 3화

카리타스 편

시도폰을 배웅하고 문을 닫았다. 일기장을 찢어서 준 건 계획에 없었는데 뭐라도 쥐여주고 싶은 마음에 어느새 내 손이 어제 일기를 뜯어다가 손수건 속으로 감추고 있었다. 보여줄 생각 않고 쓴 글이라 너무 날 것의 진심이 담겨 있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구냐고 불쾌해할지도 모른다.

모두가 잠자리에 들어 문밖이 고요해질 즘까지 방안을 서성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발이 멈췄다. 그래도 이미 전했으니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전하고 나니 후련하기도 했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면 좋겠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고 꿈속에선 그날의 일이 연극처럼 펼쳐졌다. 신탁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아 또 혼이 났던 일, 지치고 아파서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다 도착한 정원에서 참지 못하고 울어버린 일, 그러다가 폰을 만난 순간.

모든 일은 내가 다시 겪는 것처럼 생생했다. 폰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내 생활에 변한 것은 없었다. 신은 나를 괴롭혔고 아일렌의 위로는 나에게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아일렌의 시대, 과거의 선했다던 인간들은 어딜 가고 멍청하게 찬송가만 부르면 신의 사랑을 받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만 남았나. 현실에 환멸이 날 때면 어김없이 너를 처음 만난 그때의 햇빛과 향기가 내 손을 붙잡고 추억으로 이끌었다.

비 온 뒤의 풀 냄새, 산들거리며 살아있는 녹색, 그 풀 사이로 피어있는 들꽃의 냄새, 네 손에 들려있던 붉은 꽃, 방금 씻고 나왔는지 은은하게 났던 비누 냄새, 태양을 등지고 나를 보며 환하게 웃던 얼굴은 생생하고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유일하게 기억나지 않는 것은 자신이었다. 그 아이를 보고 있던 자신의 표정, 몸짓, 향기는 어땠을지, 손수건을 받는 모습이 이상하지는 않았을지, 너는 나를 기억하고는 있을지.

꿈에서 깼다.

전날의 걱정이 무색하게 너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고 다시 만난 나를 보며 웃어주었지. 노을이 지지 않아도 붉은 기가 도는 머리카락은 기쁘게 이리저리 팔락거렸고, 그걸 뒤에서 지켜보며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신이 나에게 이런 행운을 주다니. 그날 우연히 날아간 손수건이 들판으로 향했던 것과 그것을 주운 사람이 너였다는 것은 솔직히 믿지 못할 행운이었다.

일어난 김에 책상 위에 둔 꽃이 잘 있는지 다시 살펴보았다. 두꺼운 책 속의 빨간 꽃은 푸른 달빛 때문에 검은색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잘 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도로 책을 닫고 무심코 옆에 있던 손수건을 쥐었다.

어젯밤에만 시도폰의 손수건을 쥐고 잤는데 그새 익숙해졌나 싶었다. 어이가 없어 손에 힘이 풀렸고 그대로 휘적휘적 걸어가 침대에 다시 누웠다. 아일렌의 혼은 이상한 행동을 하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지만 내가 웃어 보이자 마주 웃어주었다.

이 푹신하고 안락한 침대는 과거 아일렌의 시대에 환자들을 위해 썼다고 하지만 지금은 고위 성직자를 위한 물건으로 쓰이고 있다. 침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침대에 누운 채로 볼 수 있는 풍경 속엔 아무리 생각해도 청렴과는 거리가 있는 물품들이 많았다. 귀족들이 바친 공물 중 일부인 보석, 어딘가의 장인이 만들었다는 깃털 펜, 향수, 레이스 등, 좋게 봐도 사치품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끔찍하다. 문득 푹신한 베개에서 깃털들을 뽑아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그랬다간 아까의 꿈을 영영 잊어버릴지도 몰랐다. 꿈속에 갇히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며 잠들었고 꿈이라곤 전혀 꾸지 않은 채 푹 자고 일어나 아침을 맞았다.

분명 오래 잔 것 같은데도 피곤했다. 할 일이 갑작스럽게 많이 생긴 걸 몸도 느꼈는지 침대에서 도저히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시도폰에게 거주관을 바꾸겠다고 호기롭게 말한 것치고는 딱히 계획이라고 할 게 떠오르지 않아서 이불 속으로 가라앉고 싶었다.


"얼마 전 폐하의 탄신 연회가 있었잖습니까?"

문득 어제 대주교와의 대화가 기억났다. 그의 방은 들어가자마자 이질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교회 외부 물건, 특히 이국의 물건이 많이 놓여있었는데 악마와의 전투로 이국과의 교류에 소극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이상했다. 내가 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들뜬 목소리로 연회의 분위기를 묘사하며 눈을 반짝였다.

"제가 본교의 대표로 참석하게 된 것이 신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훌륭한 연회였습니다. 교회 성가대의 합창과 비견될 만한 노래가 끊임없이 흐르고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춤과 노래를 즐겼지요. 개중에는 이국의 상인과 귀족도 있었는데 이런 전시에도 이국과 교류가 멈추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아직 교회 밖을 나가지 않아 그런 곳은 잘 상상이 되지 않네요. 이국이라 하면 어떤 곳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이곳 테르미너스에서 남쪽 바다를 건너면 볼 수 있는 나라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저희와 같은 종교를 믿는 쿠나블라 같은 나라가 있습니다. 그곳과는 성기사단 파견이나 교리 해석 같은 종교적인 부분부터 직접적인 물건의 교역까지 자주 이야기하였지요.

서쪽은…. 성녀께서도 아시다시피 악마들에게 점령당한 지 꽤 오래되었으니 이름을 기억한다고 한들 의미가 없겠군요. 그러고 보니 서쪽에서 쿠나블라나 이곳으로 탈출한 사람들도 몇몇을 보았습니다만 그들은 연회를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 말을 걸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서쪽을 구제할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요…."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저희가 이 대륙의 최남단 테르미너스에서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다들 서로를 공격하기보다 보듬을 줄 알아야 하는데 참…. 이런, 제가 너무 많은 말을 했군요. 나이를 먹을수록 고목처럼 고상해져야 할 텐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이들이 적어지니 이렇게 기회만 되면 자꾸 입이 트입니다. 자, 마저 드시고 선물도 받아 가시지요."

이미 반쯤 베어 물고 있던 다과를 한입에 다 넣자 대주교는 흐뭇하게 웃으며 손수 내 잔에 차를 따랐다. 호의는 감사했지만, 배가 부른 상태에서 차를 더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뻑뻑한 다과 때문에 목이 막힌 것만 아니었어도 차는 물렀을 것이고 폰과 함께 신전으로 올라갈 때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직접 만나본 대주교는 인간적으로 호감인 사람이었다. 귀족이 아닌 서민들의 삶도 진심으로 걱정할 줄 알았고 지나치게 교회 세력이 강대해져 그들을 신앙적인 삶에 목매게 만드는 것도 경계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수도사들에게는 엄격하여, 거주관에서 그의 권력은 막강했고 폰의 증언에 의하면 신전에서 파악할 수 없는 자체적인 규율도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수도사와 일반 민중의 구분을 철저히 하여 수도사는 그들만의 청빈한 삶을 꾸리길 원했고 나 또한 그의 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의 인간성이나 됨됨이는 지금 당장 나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교황에게 소극적으로나마 반대하는 왕당파였고 내가 이용해야 할 요소는 그것뿐이었다.

국왕이 탄생일 연회에서 성기사단의 지원을 늘리겠다고 약속하였으나 단순한 물적 지원이 아니라 인적 지원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신전이 얼마나 들썩였는지 모른다.

전대 국왕이 세운 학교의 귀족 출신 사제들이 지원할 것이 분명하다며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귀족 출신이면서도 교황파인 사제들은 괜한 눈치를 보며 몸을 사렸다. 생각해보니 귀족 중에서도 교황파 왕당파가 갈려서 그쪽도 난리였겠다 싶었다.

아무튼, 이것으로 거주관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이쪽에서 거주관을 압박할 명분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자 다리에 힘이 생겼다.

이불을 걷어내고 평소보다 빠르게 주어진 일과를 처리했다. 일상적으로 하는 업무라고 해봐야 별거 없었고 다 하면 할 일이 없어 심심했기 때문에 평소엔 천천히 처리했던 일들인데 저녁 시간을 비우려고 하니 은근히 할 게 많았다.


"시간이 되셨습니다."

교황의 시종이 문을 가볍게 두드리며 약속 시각이 되어감을 알렸다. 내가 생각한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저지른 일이니 어떻게든 끝이 나겠지-라고 생각해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왕당파나 교황파의 파벌 싸움에 관심도 없어 보이던 어린 성녀가 갑자기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게 이상해 보일 테니까. 문이 열리고 교황은 자신의 집무용 책상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나를 맞이했다. 문이 닫히자 그는 고갯짓으로 내 자리를 가리켰다.

'대주교님은 직접 의자까지 빼주셨는데.'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그는 본론부터 말하는 것을 좋아하니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은 통하지 않겠지.

"제가 오늘 온 것은…."

교황은 말없이 왼손을 들어 손바닥을 잠깐 보였다가 내려놓았다. 집무가 끝나지 않았으니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럴 거면 왜 지금 불렀나 싶었다. 체감으로는 이십 분 정도 흐르고 난 뒤에야 교황은 손에서 종이를 내려놓고 양손을 모아 턱 아래로 괴었다.

"그래, 드디어 성녀께서 내 편이 되려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저에게 도움이 되어 주실지 듣기 전에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궁금한데요."

두툼한 풍채에 맞지 않게 간사한 웃음이 살짝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의 등 뒤로 노을이 지자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무서워하면 아무것도 안 돼. 시도폰의 이름만 나오지 않으면 그 애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거다.

"이번에 교황께서 보내주신 거주관에선 이곳의 사제님들과 다르게 신성력이 아직 미숙한 아이들이 미리 수도원 생활을 하듯 공동체를 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과 신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신앙생활을 수행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오토 대주교는 신실하신 분이시지요. 그런 분의 지휘하에 있는 거주관이라면 미래에 훌륭한 사제님들을 배출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예. 저도 그분과 면담하며 그분의 신앙심과 식견에 감탄했습니다. 다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천천히 거주관의 문제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지적했다. 어린 나이의 아이들이어도 과중한 노동을 시키는 것, 엄격한 규칙을 남용해 사람들이 서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분위기, 지나친 처벌 등을 여러 사람에게 들은 것처럼 이야기했고 이는 코지와 시도폰, 그리고 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 사람들의 것이니 날조는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확실히 지나치게 엄격한 생활은 되려 악을 부를 수도 있는 법이니 성녀께서 이를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턱을 받치던 손을 풀고 일어났다. 뒤돌아 창문을 향한 그에게는 아마 거주관 전체가 보일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은 있습니까?"

"짧은 식견으로 제안 드릴 수 있는 것은 거주관 시찰이지만, 더는 생각나는 것이 없으니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내가 스스로 낮추는 것이 흥미로운지 가소로운지 그는 콧소리를 짧게 내고는 턱을 매만졌다.

"대주교의 장부를 털어봤자 지금 이야기한 문제가 발견되지는 않을 겁니다. 시찰은 비밀리에, 말단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시행해야겠지요."

'뭐?'

당황했지만 되묻지 않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고 다음 사제 회의 때 논의해 보겠다며 나를 내보냈다. 교황은 누가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러니 폰과 코지가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을 거다. 그래야만 했다. 만약 그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복도를 걸어오는 내내 그런 생각에 숨이 막혔다.

코지라면 누군가가 그런 걸 물어볼 때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의중을 따져볼 것이다. 문제는 폰이었다. 반골 기질 때문에 사제가 그런 것을 직접 알려달라고 한다면 거절하기 쉽겠지만 또래가 접근한다면 경계심 없이 독방에 갇혀있던 일까지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음 사제 회의까지 남은 기한은 3일이지만 교황이 언제 그걸 물어볼지는 모르지. 최대한 빨리 폰에게 편지를 써서 이걸 알려줘야겠어.'

그런데 내 방문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성가대 일원 중 하나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알렸다. 응급 환자가 생겼으니 봐달라며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발걸음을 옮겨,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도 자기 전까지 무슨 일이 계속 생기는 바람에 편지를 보내는 건 어쩔 수 없이 미뤘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편지를 보내려던 시도는 그대로 좌절됐다. 수취인이 누구인지 말하면 바로 들킬 테니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교황이 그들에게 관심을 두질 않기 바라며 손톱이나 물어뜯는 것이었다. 어제의 일이 계속 머리 주변을 맴돌아 답답했다. 천천히 걸어가도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것 하나 전달할 수 없다니.

주변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이를 갈며 아일렌의 석상이 있는 복도까지 왔을 즘, 누군가 맞은편의 복도 끝에서 잠깐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녹색 머리에 키가 작아 보였는데 성가대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무언가 하고 있었나 싶어 복도의 석상이나 바닥을 둘러보아도 별다른 점은 없었다.

그때 바람이 강하게 불어 봄꽃과 잔디의 향이 복도를 휩쓸었다. 내 불안도 순간 향에 녹아들어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번엔 무슨 고민이 있어,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요?"

익숙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내 시선과 눈높이를 맞춰 인사를 건넸다.

"아일렌."

"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나에게 존대를 해준 성인은 아일렌뿐이었다. 다른 성인들은 언젠가 자신들도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으로 보이지만.

"부탁이 하나 있어요. 신전 밖의 거주관에 전해야 할…."

"미안해요. 나는 신전 밖으로 나갈 수 없답니다."

내 말이 다 흘러나오기도 전에 깔끔하게 잘렸다. 아일렌은 답지 않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 것치고는 눈치를 보는 태도였다.

"나뿐만 아니라 동상에 남은 영혼들은 모두 신전을 나갈 수 없답니다. 그분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다른 가능성도 없다고 상냥하게 확인시켜준 아일렌은 그것 외에 부탁할 것은 없느냐고 물었다.

"딱히 그게 아니라면 지금 당장은 생각나는 게 없어요."

"정말인가요?"

바로 고개를 끄덕이려다 노을이 복도 끝을 비추는 것을 보고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까 이곳을 지나가던 녹색 머리의 아이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심심풀이로 던진 질문에서 의외의 답이 나왔다.

"그 아이는…. 어딘가로 급하게 뛰어가는 것 같았어요. 처음 보는 아이라 신기해서 쳐다보다가 그대가 오는 것이 느껴져 이곳으로 왔지요."

"처음 보는 아이요?"

성가대 소속도 아닌 아이가 신전 내부까지, 그것도 급하게 뛰어들어갈 일이 뭐가 있지? 게다가 그쪽에 있는 방은 교황의 집무실을 비롯한 신전 중요 구역뿐이다. 장난으로라도 들어갈 곳이 아니었다. 의심이 끝도 없이 퍼져나가자 머릿속이 복잡해져 도대체 뭐가 그럴듯한 진실인지, 말도 안 되는 거짓인지 구분도 못 하는 상태가 됐다.

아일렌은 나더러 쉬라며 등을 떠미는 동작을 취했다. 지난번에 내 어깨를 토닥여준다고 손을 댔다가 그대로 내 몸을 통과해버린 뒤로는 멀찍이 서서 그런 동작을 하는 체하기만 한다. 내 의식에 누군가 들어온 듯한 이상한 기분이었지.

"알았어요. 생각 그만하고 쉴 테니까 아일렌도 돌아가요."

"그래요. 고민이 있다면 또 이곳으로 와주세요."

아일렌이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찜찜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라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았고 걷는 속도도 체감 가능할 정도로 느렸다.

노을이 져버리고 음침해지는 하늘을 한 번, 거기에 물들어 늘어진 잔디를 한 번 보고 한 발짝 떼는 수준으로 걸어 겨우 방에 도착했다. 내일 비가 오려나. 몸이 늘어져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간 건지 모르겠다. 한 달 전 일을 재검토하라고 뜬금없이 일이 생기질 않나. 교황파 귀족이 갑자기 아프다며 치료를 요청하지 않나. 사제 회의 전까지 계속 이렇게 일이 밀려들어 오면 아무것도 해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프게도 내 예상대로 사제 회의 거의 직전까지 일은 계속 밀려들어 와, 서류에 묻혀 반쯤 시체가 되었을 때 수행원이 사제 회의에 참석할 시각이라고 알렸다. 믿을 수 없었지만, 수행원이 나에게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눈빛을 숨기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표정을 호수에 비춰보지는 못했지만, 도축장에 끌려가는 짐승의 표정 같지 않았을까. 심정은 비슷할 것 같았다. 아는 것도 없고 내 몸 하나, 내 사람 하나 지킬 수단도 제대로 가지고 있지 않은데 쓸모는 있어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꼴이니.

"도착하셨군요,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수행원이 내 도착을 알리자 문이 열리며 점심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고 그곳에 딱히 어울리지 않는 음울한 낯의 성직자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교황은 나에게 자신에게서 두 번째로 가까운 자리를 내주었다.

거절은 당연히 불가능했고 반항이라고 해봤자 의자의 범위 안에서 교황에게 최대한 멀어지는 곳에 앉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지난번 복도에서 혼자 뭉그적거리던 것처럼 천천히 걷는 것도 불가능했다.

사제 회의는 처음 참석해 보는데도 교황은 나에게 시키는 것들이 많았다. 쿠나블라 시골 마을에서 생긴 이단 집단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겠나. 진정으로 궁금해하는 것도 아니면서 이것저것 의견을 물어보는 통에, 앉아만 있어도 기가 다 빨렸다.

당장이라도 네 발로 걸어나갈 수 있을 법한 분위기 속에 아닌 척 시계만 계속 바라봤다.

"참, 오토 대주교님."

"예, 성하."

교황은 자신이 무언가를 쓰고 있던 책을 덮었고 그 행동에 다른 성직자들도 펜을 내려놓고 나무판을 뒤집거나 종이를 둘둘 감았다. 심지어 서기조차 같은 행동을 하며 교황의 시선을 따라 오토 대주교를 바라보았다. 일순간에 집중된 시선에도 대주교는 의연한 모습이었지만 손이 조금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일전에 국왕 폐하께서 성기사단에 지원을 해주시겠다 약조하신 것을 다들 기억하고 계신다 생각합니다. 이것의 시작으로 교회와 왕실의 우호를 위해 폐하께서 3 왕녀님을 오토 대주교님의 거주관에 의탁해달라 부탁하시었지요."

왕위 계승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데다가 나이까지 어린 왕녀 하나를 보내는 게 무슨 지원이라고 그런 말을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충 표정들을 둘러봐도 그다지 좋은 뜻은 아니었나 보다.

사제 서품을 받는 대부분 귀족은 신전에 잠깐 들어와 생활하고 나가긴 했지만, 신전이 아니라 거주관으로 보내는 것이 큰 문제인가 싶었다.

"왕녀님을 모시게 된 것은 영광입니다. 하나, 그분께선 아직 태어나신 지 일곱 해가 채 되지 않지 않았습니까? 왕궁에서 자라신 여리고 귀한 분이 청빈한 수도사의 길을 버티실 수 있을지 걱정되는 마음뿐입니다. 저보다는 아무래도 성하의 신전에 위탁하시는 것이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저 또한 그런 의견이었습니다만, 폐하께선 대주교님께 강한 믿음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역시 오토 대주교의 신실함은 왕궁에서도 익히 알려진 모양입니다."

대주교는 드물게 당황한 말투로 손을 내저었다.

"성하께서 농담을 다 하시다니요. 제가 어찌 감히 성하 앞에서 저의 신실함을 비견하겠습니까."

칭찬하는 말이 오고 갔지만 느껴지는 분위기는 살얼음을 걷는 듯 초조했고 누구도 이것을 기록하지 않고 있었다. 이건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비밀이 되는 거구나.

교황이 가늘게 뜬 눈으로 좌중을 훑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갈색일 눈에 노을이 비치자 금빛이 돌았다. 본 적도 없지만 익숙한 느낌. 소름 돋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제된 금빛이 싫었다. 폰과 같은 갈색의 눈일지라도, 같은 노을이 비친다고 해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하여, 3 왕녀께 폐를 끼치지 않도록 거주관에 관해 이야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교황은 내가 폰과 코지로부터 전해 들은 사안들을 조금은 흐릿하게 전달했다.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발설자의 신원을 밝히지 않는 쪽으로 시기도 조정해서 말하는 그의 이야기에 나는 불안감을 조금 내려놓았지만, 오토 대주교가 사안을 하나씩 들을 때마다 낯빛을 잃어가는 것을 보고 새로운 죄책감이 돋아났다.

그에게 동조하는지 내 몸도 덩달아 떨렸고 이만하면 다 얘기하지 않았나 싶을 즘, 떨궜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5구역의 아이 하나가 3구역의 아이를 폭행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거주관은 아이들이 자는 구역이 나누어져 있었다. 폰과 코지는 5구역, 얀과 센은 3구역이었는데 단순히 관리용으로 나뉜 게 아니었던 건가?

"사소한 아이들 간의 다툼입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니 그렇게 부딪히면서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치곤 독방으로 보내버리지 않았나요?'

교황은 자신의 턱을 문지르며 말꼬리를 늘렸다.

"3 왕녀께서 거주하실 곳에 그런 문제가 생기면….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신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한들 신성력과 믿음의 차이로 신에게 봉사할 수 있는 정도는 인간마다 다른 법입니다."

"5구역의 아이라고 해서 믿음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같은 신도를 폭행한 아이인데 어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신도 간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데 무엇으로 믿음을 증명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토 대주교는 침묵했고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거주관의 규제가 지나치게 엄정하다고 이야기했고, 교황도 알아듣고는 이것을 이용해서 대주교를 압박하겠다고 한 것 아니었나? 교황의 이야기는 되려 규제와 차별을 더 엄격히 해야 한다는 것으로 들렸다. 3구역은 5구역보다 신성력이 높은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이었구나. 신성력과 믿음이 전혀 관계가 없다는 걸 내가 아는데도 교황은 그 둘을 차별의 근거로 댔다. 아무도 반박하지 않고 그저 침묵 속에 시간이 흘렀다.

"물론 성녀께서 거주관에 잠깐 들르셨을 때 그 아이에게 거주관의 안내를 받은 것을 보면 아무에게나 행패를 부리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또 그런 일이 없도록 아이들에게 엄격한 교육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 명심하겠습니다."

덜덜 떨면서 고개를 숙이는 오토 대주교가 잠깐 시야에 들어오긴 했지만, 상이 맺히지 않았다. 어떻게 그것까지 알고 있지? 폰과 코지의 안내가 끝난 다인실 앞에 5라는 숫자가 쓰여있긴 했지만, 수행원과 거리를 두고 이야기해서 폰이 폭행과 연관 있다는 사실은 듣지 못했을 텐데.

교황은 곧 자리를 파했다. 다들 일어나서 차례대로 문으로 향했고 오토 대주교도 수행원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나 때문에 대주교뿐만 아니라 폰도, 아마도 코지도 위험해졌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폰의 믿음에 보답하는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제가 모르는 것은 없습니다."

등 뒤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고 강한 목소리였다.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너무 친하게 지내지는 마십시오. 5구역의 아이가 아무리 그대에게 특별하다 한들, 별로 도움이 되지는 못할 테니."

웃으며 나를 스쳐 지나간 그는 어디론가 향했고 문을 닫으려는 수행원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굳어있는 나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주위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집무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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