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4부 1화

“남부와 기후가 비슷하다더니, 겨울은 제외하고 인가 봐요?”

두꺼운 외투를 걸친 아페가 막사 밖의 의자에 혼자 앉아있는 시도폰에게로 걸어왔다. 아페는 시도폰이 일어나려는 걸 막고 그의 옆에 약간 거리를 두고 앉았다. 시도폰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말했기에, 아페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머물러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눈이 내려서 더 추울 겁니다. 돌아가세요.”

“단장 곁에 있으면 따뜻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인 걸요. 왜 혼자 밖에 나와 있으신 거예요?”

아페가 시도폰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숙이자 시도폰은 시선을 아페를 바라보지 않는 쪽으로 돌렸다.

“걱정하실만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남들한테도 굳이 설명하지 않으려고 나와 있었던 것뿐이에요.”

자신을 열심히 피하는 시도폰에, 아페도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걸 포기하고 정면으로 몸을 돌렸다.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하기엔 단장의 표정도, 루카의 태도도 심상치 않았는걸요. 안에서 루카가 많이 걱정하고 있길래 제가 이야기하러 온 거예요.”

“루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 걸, 당신께 말할 거로 생각하셨다고요?”

“주제에 따라서 그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법이니까요. 어쩌면 제가 들어드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제야 시도폰이 웃었다. 하지만 유달리 힘이 없이 뱉듯이 지어낸 미소에 아페는 직감적으로 누구와 관련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시도폰이 이런 표정을 할 정도로 그를 흔들 수 있는 이가 달리 있을까? 예상대로 시도폰은 그의 이름을 말했다.

“카리가…아니, 성녀께서 연락하지 않으신지 벌써 두 달이나 되었습니다. 물론 게이트가 이쪽까지 만들어지지 않아서 연락이 늦는 건 이해를 하지만, 이렇게까지 안 오는 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운하신가요?”

시도폰이 고개를 젓다가 멈췄다. 아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저는 걱정됩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아니 정확하게는 걱정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서운했던 게 맞는 것 같네요. 감히 그럴 자격도 없으면서.”

시도폰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받은 카리타스의 편지를 왼손에 쥐고 있었다. 빈손은 힘줄이 튀어나와 보일 정도로 세게 힘을 주고 있었으면서, 편지를 쥔 손은 행여나 그게 구겨질까 싶어 최소한의 힘만 주는 것처럼 보였다.

아페는 살며시 시도폰의 오른손에 손을 얹었다.

“단장께서는 근래에 악마들 때문에 바쁘셨잖아요. 그 이후로는 경계가 안정되면서 다시 자주 연락을 드렸고요. 이번에는 그쪽도 바쁜 일이 생긴 거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물론 아페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느슨해질수록 자신에게 유리해진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도폰이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시도폰은 아페가 제 손을 잡은 것을 보았지만 굳이 손을 빼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페는 말을 이었다.

“아까, 제가 오기 직전까지 손을 긁고 계셨죠? 모르는 척하려고 했는데…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으면 안 놓아드릴 거예요.”

짐짓 화난 표정을 짓는 아페에, 시도폰이 무심코 웃어 보였다. 이번엔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진 웃음이었다.

“흔적도 없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당신께 말을 걸기 전부터 그걸 보고 있었으니까요. 누가 오는 걸 눈치채지도 못하고 손등을 긁고 계신 걸 보고, 제가 어떻게 그냥 돌아갈까요.”

시도폰의 말대로 그의 손엔 약간의 상처 자국도 남지 않았지만, 아페는 이미 모든 것을 보았다. 시도폰은 할 수 없이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양손으로 살며시 편지를 잡은 시도폰이 아페에게 물었다.

“원래 이 시기의 남부 교회는 평소보다 바쁩니까?”

아페는 잠깐 고민했다. 연말의 남부 교회에서 바쁜 이들은 내년 초에 있을 북부 수행과 관련된 이들이거나 회계 장부를 정리해야 하는 이들뿐이었으니까.

카리타스는 후자에 반쯤 속해있었는데, 말단 관리들이 12월 내내 그 서류를 정리한 것을 1월쯤에 훑어보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금 카리타스가 바쁘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아페가 속으로 성호를 그었다.

‘위대하신 분께 사죄드립니다. 이번 한 번만 거짓말을 허락해주세요.’

“그럼요, 연말엔 항상 회계 자료들을 정리하느라 바빴어요. 이번에 경계 확장 건 때문에 정리할 거리가 더 늘었나 보네요.”

뒤이은 아페의 말에 시도폰의 안색이 더 나빠졌다. 영문을 모르는 아페를 두고, 시도폰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편지에 얼굴을 묻었다.

“그건… 결국 저 때문에 바빠진 건데 제가 괜한 오해를 했다는 거군요. 부끄러우니 잠시 혼자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이번만큼은 아페도 버틸 수 없었다. 그는 시도폰에게 자책하지 말라고, 재차 당부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부터인지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만, 아페는 일어나고 나서야 그걸 깨달았다.

‘이렇게 추운데, 몰랐구나.’

혼자여서 추운 건지, 시도폰이 곁에 없어서 추운 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둘 다인 것 같으니 아페는 굳이 그것을 구별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잠시 루카에게 들러 시도폰은 조금 후에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하.”

아페는 여러 번 사람들에게 ‘저하’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다들 그 말을 잊은 것 같았다.

‘왕녀’의 자부심은 왕실에서 퇴출당하다시피 교회로 보내졌을 때 반쯤 길바닥에다 버려뒀고, 카리타스에게 교육받으며 나머지 반을 버렸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에게 경칭을 썼다.

시도폰은 아페가 왕녀라는 사실을 애써 자각하는 편에 가까웠다.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동료라고만 생각할 때도 있었고, 뒤늦게 그가 왕녀였다는 걸 깨닫고 일을 시키려다가 망설일 때도 있었다.

시작의 땅에 뿌리박은 나무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아페에게 일을 맡기지 않으려고 하다가 아페가 지원하고 나서야 허락해주지 않았던가.

‘서운해하지 말자. 외부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제발 왕실에서 이상한 짓거리만 하지 않길….’

그는 조금 더 눈을 맞으며 돌아다니다가 자신의 막사로 들어갔다.

 

1501년 1월.

 

“제가 할 만한 일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두코가 시도폰의 막사를 방문하자마자 한 말이었다. 작년 12월 초, 프라이에가 본부로 이동해 수행단을 담당하기로 하고 두코가 3차 경계로 올라왔다.

아페 덕분에 시작의 땅에 뿌리박은 나무는 안정적으로 악마들을 억누르고 있었고, 날뛰던 악마들의 기세도 한풀 꺾여있었다. 두코는 다행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이 활약하지 못해서 아쉽다고 말했다.

“그런 자네한테 딱 맞는 일이 있지.”

시도폰이 싱긋 웃으며 서류 한 무더기를 내밀었다. 억지로 그것을 받아든 두코는 맨 위에 얹어진 서류를 읽어내려갔다.

“이주 신청서라… 귀찮아지겠군요. 왕실에서 직접 보내다니, 이런 일은 드문데요.”

“아페 저하께서도 이걸 보시고는 왕가의 서류가 맞는지 세 번이나 확인하셨네. 웬만하면 이런 문제는 교회의 손을 빌리지 않을 테니까.”

교회에서 빈민을 구휼해오긴 했지만, 일시적인 경제적 지원의 영역에서 행해졌다. 이런 대규모 이민정책 같은 것을 왕실이 제안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시도폰도 처음 이 서류를 받자마자 당황했었다. 두코는 빠르게 서류를 넘겨보더니 말했다.

“제안서치고는 너무 두껍다 싶었는데 이미 신청자의 인적사항도 받아뒀군요. 거절하면 이쪽을 원망하도록 미리 손을 쓴 건가.”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단순히 사람들의 간절함을 보여주기 위한 거라고 하기엔 과한 감이 있네.”

시도폰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본부를 이쪽으로 옮기는 게 결정된 이후로 게이트 공사도 진행되고 있는데 아직 초기 단계야. 게이트를 설치할 위치는 이미 잡았으니 이제 게이트를 만들 석재를 조각하고 있는데, 그걸 다 만들면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군.”

“게이트를 만드는 데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이민자들도 이 계절에 움직이긴 힘들 겁니다. 봄이나 되어야 시작할 수 있을 테니 조급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빠르게 훑은 서류 더미를 다시 책상에 내려놓은 두코가 말했다.

“그 사람들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잖습니까. 기존에 기사단 본부가 있던 마을, 그 마을 사람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하겠냐고 물어봤던 거 기억하십니까?”

시도폰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 본부가 이전하면 그것이 있던 마을에서 중요한 자금원이 사라지게 된다.

기사들이 평소에 마을에서 구매했던 식량과 생필품이 얼마나 되었는지 계산해보고 시도폰은 깜짝 놀랐었고, 말없이 본부를 이전해버렸다간 마을 주민들의 생계가 위험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고 하던가? 남부나 중부로 이민할 생각이라면 기사단에서 게이트 이동을 지원하겠다고 했고 계속 남아있겠다고 하면 왕실과 이야기해서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었지. 평소에 기사단이 쓰던 만큼 말이야.”

“예, 그런데 그 사람들은 선택지 외의 제안을 저희에게 하더군요.”

두코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을 이었다.

“자기들도 이쪽으로 이주를 하겠답니다.”

“아직 제대로 개척도 안 된 곳을 오겠다고?”

턱을 괴고 있던 시도폰은 눈을 크게 뜨며 자세를 바로 했다.

“농사를 짓든 가축을 기르든 이곳보다는 이미 개간이 되어있는 남부나 중부가 좋을 텐데. 굳이 그런 기회를 마다하고 여기 온다고 했단 말인가?”

“저도 안 믿겨서 다시 물어봤는데 제가 잘못 들은 것도, 그들이 잘못 말한 것도 아니더군요. 나중에 마을 이장이랑 이야기하면서 대충 이유를 들었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두코가 말을 이었다.

“남부로 내려갈 때 주는 지원금으로는 생활비만 충당할 수 있고 농사지을 땅을 구매하진 못해서, 어딘가의 소작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답니다. 북부에 있을 때는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짓던 사람들이 갑자기 남의 땅을 빌려서 작물을 길러야 한다고 하니 납득할 수 없었겠지요.”

“자금은 넉넉하게 지원하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게, 왕실에서 준 지원금에는 이민 비용이 포함되는 거랍니다. 그러니까 짐을 실을 마차와 말을 빌리는 비용까지 전부 거기에 포함되어 있어서, 그 돈을 내고 나면 생활비밖에 남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일을 왜 이딴 식으로 하는 건지.”

시도폰은 예전에 자신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마를 짚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피데이스 때였구나. 그때는 남부 교회고 이번엔 왕실이라니.’

올해 예산 배정안과 이번 달 예산 지출을 곰곰이 되짚어보던 시도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게이트 때문에 이쪽에서도 더 떼어줄 수 있는 예산이 없는 거로 알고 있네만.”

대화를 듣고 있던 솔라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세 사람은 잠깐 침묵하며 각자 대안을 생각해보았지만, 왕실이 지원금을 늘리거나 아예 농지를 무상으로 지원하지 않는 이상 이 문제는 해결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시도폰이 중얼거리듯 힘없이 말했다.

“왕실에서 빈민들을 방출하고자 이민정책까지 제안한 마당에, 이쪽 사람들을 더 지원할 여유는 없으리라고 보네. 북부 주민들은 이곳으로 오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겠지.”

두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왕국 남부나 중부로 갔다가 빈민이 되어서 여기로 다시 올라오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이곳으로 오는 게 차라리 낫겠지요.”

그러자 솔라가 두코에게 물었다.

“그곳에 머무르면서 왕실에서 지원을 받는 건 어떻게 된 겁니까? 그 방법이 몸도 편하고 지금과 같은 일상을 지킬 유일한 길일 텐데요.”

두코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었다.

“지원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왕실에서 반쯤 독립된 상태로 기사단과 상생하면서 살아가던 마을이었네, 자존심 때문에라도 왕실의 지원으로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이지.”

살짝 눈살을 찌푸린 솔라는 금방 태연한 얼굴을 하고 이해했다고 대답했다. 시도폰은 두코에게 이민 건을 맡겨두기로 하고 회의를 끝낸 뒤 크로마를 불렀다.

“북부 이민을 먼저 받을 생각이네, 그들이 이쪽까지 오는 데는 남부보다는 시간이 덜 걸릴 것 같으니까. 두 사람이 수고 좀 해주게.”

“네!”

둘을 내보낸 시도폰은 뒤이어 들어온 기사에게 순찰 보고를 들었다. 오늘도 이상이 없다는 말에 기사를 물린 후에야, 이민 서류에 묻혀서 읽지 못했던 편지들을 읽어내려간 시도폰은 오순절 행사 참석을 묻는 교황의 편지를 발견했다.

“…올해는 가실 생각입니까?”

솔라의 질문에 시도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숲에서 깨끗한 연못을 발견한 여행자처럼, 그는 미소지으며 답장을 써 내려갔다. 티 나지 않게 그걸 흘깃거리던 솔라는, 피데이스가 준 명부의 메릭 항목에서 마지막 줄을 떠올렸다.

 

[교황에게 무언가를 보고하러 자리를 비우는 일이 종종 있음.]

 

그는 아직 그 명부를 시도폰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피데이스가 시도폰에게 전달해달라고 말한 적도 없거니와, 시도폰이 이런 일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성녀는 호위 기사조차 제 편이 아닌 건가.’

솔라는 성녀가 집행자의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지만, 어쩐지 메릭이 더 불쾌하게 느껴졌다. 만약 집행자와 성녀가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면, 아니 적어도 단순한 친구 사이이기만 했다면 솔라는 성녀를 동정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두 사람이 뭘 하든 집행자께만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야지.’

그런 솔라의 속내를 전혀 모르는 시도폰은 오늘따라 글자가 잘 써진다고 기뻐할 뿐이었다.

“어이! 그건 이쪽으로 날라야지.”

“어이쿠, 곧 가네.”

창밖에선 새로운 본부를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사람들은 드디어 막사를 벗어나서 제대로 된 건물에서 잘 수 있겠다고 좋아하며 공사에 박차를 가했고, 요새를 지을 때보다 훨씬 재밌다고 이야기했다.

시도폰이 볼 때는 벽돌을 쌓아야 한다는 점에서 요새나 본부 건물이나 별다른 게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굳이 그런 말을 하진 않았다.

“다 썼네, 루카를 불러주게.”


* 아페와 시도폰 사이의 대화, 옛날에 써뒀던 거랑은 분위기라든가 둘 사이의 관계가 많이 달라졌더라고요? 근데 그때 분위기도 맘에 들었어서 올려둠.

*왕녀는 카리타스를 먼저 만나서 신전에서 생활하고 시도폰이 있는 북부로 자원한다. 카리타스/@/왕녀 순으로 신성력이 강해서 북부로 갈 수 있었음. 카리타스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말릴 핑계도 없었고 시도폰이 덜 힘들 거라는 생각으로 승인함. 왕녀는 많이 성장하고 난 뒤에 북부로 가는 것.

*시도폰은 편지를 쓰다가 답답해서 밖에 나와 산책하는 경우가 있음. 어느 날 처음 울었는데 하필 그걸 왕녀에게 들키고 만다. 그런데 이미 까발려졌으니 털어놓자는 심정이 되어서 아무것도 모르는(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왕녀에게 편하게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저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적어도."

잠깐 숨을 몰아쉰 시도폰의 안색이 창백했다.

"... 아닙니다. 사정이 있는 것이겠지요."

"또 연락이 잘 오지 않나요?"

저를 내려다보는 왕녀를 보지도 않고 시도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짓씹듯 내뱉는 말엔 편지에는 절대로 담을 수 없고, 담아서도 안 되는 감정이 그득그득 담겨있었다.

"머리로는 카리타스가 얼마나 바쁜지, 감당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는데도... 그 애가 연락 한 줄 없다는 게 견디기 힘듭니다. 마지막 편지가 온 것이 한 달이 더 되었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을 수가 있나요. 혹시 무슨 다른 일이 생긴 거라면."

아까처럼 말을 흐리며 끝낸 시도폰은 자신의 손을 긁기 시작했다. 왕녀는 아마 집행자의 이런 모습을 보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어느 누가, 집행자가 고해성사를 하듯 사람을 붙들고 감정을 쏟아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까.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니는 부관도 이때는 그의 곁에 다가올 수 없었다. 시도폰은 항상 솔라가 잠들고 난 뒤에 편지를 썼으니까. 그리고 그 시간은 아직 왕녀가 잠들지 않는 시각이기도 했다.

왕녀는 시도폰이 자신을 동료로 생각하지 않으니 망설임 없이 절절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되려 낯선 사람이기에 쏟아낼 수 있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친해지는 것은 그 뒤에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왕녀는 시도폰이 자신에게 솔직하게 구는 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내색하지 못했다.

시도폰의 왼손은 상처가 생겨나고 치유되길 반복하며 발갛게 달아오를 뿐, 손톱에 긁힌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왕녀는 시도폰이 앉은 의자 옆에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아 그의 오른손을 잡았다.

왼손은 아까의 일이 없었던 것처럼 멀쩡한 모습으로 굳어 제 주인의 가슴 앞에 멈춰있었고, 그제야 시도폰은 왕녀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처럼 크게 눈을 떴다.

"죄송합니다, 왕녀 저하. 또... 못 볼 꼴을 보였습니다."

"괜찮아요. 집행자께서 한낱 신자에게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 때문에 조금이라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셨다면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시도폰은 그런 말씀 마시라 답하곤 시선을 피했다. 호수에 비쳐보진 못했지만 제 얼굴이 말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잡힌 제 손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또 긁지 않으신다고 약조하시면 놓아드릴게요."

그는 입을 다물고 동의의 표시로 고개만 끄덕였다. 왕녀가 손을 놓자 시도폰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먼저 들어가 보겠다 인사하고 돌아섰다.

남아있던 사람은 의자 한 쪽을 쓸었고 식어버린 나무의 감촉만 느낄 수 있었다. 의자는 한 사람만의 온기로 쉽게 데워지지 않았다.

"춥다."

그는 일어나 시도폰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왕녀는 자신이 보았던 카리타스를 떠올렸다. 분명 시도폰보다 오래 보았던 그 사람을. 인간이 맞긴 한 건지 의심될 정도로 차갑게 굳은 표정과 말투로 설교하던 성인이었다.

조각된 것들보다 더 조각된 듯한 생물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에 모범 답안으로 내놓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가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바다 같고 그는 하늘 같다고 했지.'

언젠가 시도폰이 아무렇게나 한 말 중에 카리타스와 저의 눈을 비교한 것을 떠올린 그였다. 어쩌면 그 비유는 꽤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바다는 하늘 아래에 있어 절대로 그와 동급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바다가 새벽의 별과 저녁의 해를 모두 품을 수 있는 것처럼 흉내는 낼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인간이 실제로 닿을 수 있는 것은 바다였다. 저 혼자 고고하게 떠있는 하늘 따위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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