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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외전

솔라의 어느 날: 오순절 이후~남부의 지원(아페의 자원)이전

“솔라, 괜찮나요?”

누군가가 조심스레 제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손짓에, 솔라가 눈을 떴다. 책상 위에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운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크로마를 보고 시도폰이 자신을 불렀냐고 물었다.

“아, 아뇨. 단장께서는 딱히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어째서 이곳에 오신 겁니까?”

난감한 얼굴로 크로마가 대답했다.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올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요, 음… 그냥 일이랑 관련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왔어요.”

그렇게 말하고도 크로마는 영 자신이 없었는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부관이라는 이유로 엔간한 행정 업무는 솔라와 크로마 두 사람이 거의 맡고 있었으니, 일 이외의 일상이라고 할 게 존재하지 않았다.

이디스도 행정 업무에 조금 손을 뻗을 수 있었지만, 아직 일을 배우는 단계였으니 제일 바쁜 건 역시 이 두 사람이었다. 말하고 나서야 그걸 깨달은 크로마가 급하게 덧붙였다.

“물론 일 이야기도 괜찮아요. 그걸 이야기하는 동안은 일을 쉴 수 있으니까. 당신도 지금 피곤한 것 같은데 말이라도 하면 잠이 좀 깨지 않겠어요?”

일리 있는 말이라며 솔라가 미간을 꾹 눌렀다가 뗐다. 조금 멍했던 눈이 점차 초점을 잡고 자신을 바라보자 크로마는 밝은 목소리로 조잘거렸다.

“사실 아까 막사에 들어왔을 때, 당신이 자고 있길래 업무를 대신할까 했는데, 그걸 좋아하진 않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무례인 걸 알지만 당신 몸에 손을 댔어요. 미안해요.”

손을 댔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가벼운 접촉이었기에 솔라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대답했다. 사실 크로마도 그렇게 죄책감이 있다거나 하진 않았으니 그 일은 마무리 짓고, 두 사람은 자연스레 일 얘기를 이어나갔다.

“참, 오순절 때 따로 한 건 없나요? 물론 피데이스님 안위를 확인하러 간 거긴 하지만, 남부는 볼 게 많았을 테니까요.”

그 말에 솔라는 딱히 한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피데이스에게 들은 이야기를 곰곰이 되뇌어보느라 밖을 돌아다닐 생각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사단 환영 연회가 끝나고 혼자 피데이스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연회장에서와 다르게 피데이스는 아주 또렷한 눈으로 솔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는 폐인처럼 계시더니 연기였습니까? 프라이에님이 걱정을 많이 하시던데요.”

“아, 이런 그건 미안하게 됐어. 사람들을 속여야 했으니까 멀쩡하게 보이면 안 됐거든.”

두 사람은 피데이스의 개인 숙소에서 접선했다. 사무실은 사람이 들를 위험이 있다는 이유였지만, 솔라는 책상 위에 널린 술병을 보고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솔라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헛웃음을 지은 피데이스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맨정신으로는 못할 이야기라 조금 마셨어. 너도 이제 성인이던가?”

그는 빈 잔을 하나 솔라에게 건넸지만, 솔라는 고개를 저었다. 대화 당사자 두 사람이 다 취하면 제대로 된 대화가 이어질 리 없으니까.

“보자,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까.”

피데이스는 술을 한 모금 넘기고 처음 이단 심문관을 만났을 때부터의 일화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교황의 주도로 모인 이들이었으니 당연히 이들은 교황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랐다.

하지만 피데이스는 종종 교황의 방침과 다른 작전을 세웠고, 처음엔 단원들이 반발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내가 누구야? 어? 집행자님이랑 너를 키운 사람 아니냐? 당연히 이 사람들도 곧 내 말을 잘 들어주더라고.”

“작전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그것도 힘들었겠죠.”

솔라는 피데이스가 내민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스승이 안주도 없이 술만 퍼마시는 게 안타까웠던 솔라는 여분의 마른 식량을 꺼내어 대충 피데이스의 손에 쥐여주었다.

“연회 때도 연기하느라 뭐 안 드셨던 것 같은데, 그렇게 빈속에 들이부으면 속 버립니다.”

“고마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그래 그래서 그 사람들이랑은 금방 친해졌어. 싸운 것도 아주 초기 이야기였는데 그걸 나중에 이단 재판 때 끌고 오니까 어이가 없었지.”

다소 횡설수설한 이야기였지만, 솔라는 진득하게 그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

요약해보자면, 피데이스가 교회의 세력 다툼을 확인하고 수상한 자금 흐름이나 사병의 움직임 같은 것들을 파악하다가 교황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고, 그런 활동을 방해하려는 누군가에게 이단으로 고소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를 고소한 사람은 당연히 교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고, 피데이스는 자신이 무고하다고 계속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며 술을 한 잔 더 따랐다. 가만히 그걸 지켜보던 솔라는 그를 말릴까 고민하다가 내버려 두었다.

“그래도 일은 잘 해결된 줄 알았는데요. 상태를 보니 완전히 의심이 해소되지는 않았나 봅니다.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까?”

솔라의 물음에 피데이스는 히죽거리며 웃다가, 술 때문에 따뜻해진 손으로 솔라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는 당분간은 숨죽여서 살 테니 도울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네가 뭣도 모르는 꼬맹이였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이렇게 커서는…. 단장은 잘 도와드리고 있겠지? 그분이 지금의 교황 성하처럼 되어선 안 돼. 물론 그럴 분이 아닌 건 알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법이니까, 네가 잘 해야 한다.”

“말하지 않아도 잘 하고 있으니 본인이나 챙기시죠.”

딱딱한 대꾸에도 피데이스는 술 때문인지 지적하지 않았다. 그는 솔라를 앞에 두고 혼자 술을 마시다가 까무룩 잠들었고, 솔라는 그를 부축해 침대에 눕혀주고 방을 나왔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창문으로 나왔는데, 이는 피데이스가 지시한 사항이었다. 연회장에서 그가 프라이에와 솔라에게 조심스레 말한 것이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사제 관계라고 하지만 개인 숙소니까, 네가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알려지면 곤란해. 그러니까 창문으로 들어오고 나가.’

‘헛소리를… 방이 2층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프라이에한테 물어봐. 방법을 알고 있을 거야.’

그 말에 프라이에는 이마를 짚었다. 그는 그 방법을 쓰려면 자신 외에 한 사람은 더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피데이스가 그 말을 듣더니 솔라가 내려갈 때 자신이 먼저 문을 열고 나가 있겠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피데이스는 술에 취해 잠들어버렸으니 솔라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뛰어내리자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프라이에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고, 작은 목소리로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 아니, 안 괜찮은 것 같습니다. 발목이 삐었어요. 하지만 스스로 치료할 정도는 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네 상관보다 더하네…, 부축해줄게, 여기서 상처를 치료했다간 신성력 때문에 들킬 거야.”

그렇게 두 사람은 무사히 숙소로 돌아와 부상을 치료했다. 솔라는 그 이야기를 크로마에게 말한 적이 없었으니, 남부에서 무얼 했는지 물어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걸 말해야 할까? 크로마가 궁금해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 같은데.’

솔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피데이스는 무사하지만, 여전히 그를 주시하는 눈이 있으니 폐인 연기를 하고 있다고만 말했다.

크로마가 이것저것 캐물어서 밤중에 피데이스의 방에 단둘이 있었다든가, 대화에 술이 곁들여져 있었다든가 같은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보단 이게 나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크로마는 심란했을 만했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다.

“솔라, 시간 있어요? 물어볼 게 있어서요.”

이디스의 목소리였다. 솔라는 들어오라고 대답하면서 살짝 실망하는 듯한 크로마의 표정을 보았다. 하지만 크로마는 이디스가 문을 여는 동시에 입꼬리를 올려 자상한 미소를 지었고, 이디스의 질문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해답을 주었다.

“아!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솔라는 피곤해 보이는데 오늘은 일찍 자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 사람과 같은 말을 하는군요. 그렇게 제 안색이 안 좋습니까?”

솔라의 물음에 이디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안색의 문제라기보다는 눈빛의 문제라고 할까요…. 평소보다 흐릿한 눈으로 저흴 보고 있는 것 같거든요.”

이디스의 말에 크로마가 동의의 눈빛을 보냈다. 두 사람의 협공에 결국 솔라는 일찍 잘 테니 걱정하지 마라며 둘을 밖으로 내보냈다. 예상치 못한 강제 퇴출에 크로마는 아쉽다며 툴툴거렸지만 버티지 않고 물러났다.

두 사람이 대화하며 멀어지는 소리가 문밖에서 들리자 솔라는 한숨을 쉬며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너무 오래 앉아있었나.’

그의 허리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확실히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니, 오늘은 일을 미루고 일찍 잠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솔라는 촛불을 끄려다가 서류 묶음 하나를 발견하고 도로 의자에 앉았다.

그건 피데이스에게서 받아온, 남부 교회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맨 첫 장엔 별 볼 일 없는 말단 사제들의 이름과 인적사항이 적혀있었다.

‘신 것을 먹지 못함. 같은 건 왜 써둔 거야.’

알아서 손해 보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정말 소소한 것이었기에 솔라는 거침없이 뒷장으로 넘어갔다.

중간에 세쿠리스라는 사제의 이름 옆엔 [파면]이라는 붉은 글씨가 적혀있었다. 행방이 묘연하여 여러 사람에게 그의 행적을 물어보았지만, 교회 직영 직물점에서 근무한 기록이 마지막이었고 횡령죄로 재판을 받은 후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 역시 솔라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조용한 방, 촛불 아래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만 사락거리고 있었다.

‘이 사람이 성녀의 호위 기사… 딱 봐도 도련님 같은 느낌이었는데. 누굴 지키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건지 모르겠군.’

솔라는 잠깐이긴 했지만, 메릭을 관찰했는데 개인적인 호감이 있어서는 당연히 아니었다. 그가 원래 보려던 이는 카리타스였지만, 카리타스는 솔라가 은근히 그쪽으로 시선을 돌릴 때마다 기가 막히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면 아예 시선을 마주치든가.

그래서 솔라는 상대적으로 둔한 메릭을 살펴보게 된 것이었다.

솔라는 이디스나 크로마와 자주 함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들이 각자의 상관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과 비교해서 메릭은, 분명 호위 기사로서가 아닌, 다른 이로서의 감정을 품고 카리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감정을 알아차리자마자 솔라는 불쾌감을 느끼고 메릭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모셔야 할 사람을 그런 불경한 눈으로 본다는 건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집행자든 성녀든 신께 선택받은 이라는 점에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감히 그런 존재를 숭배 이외의 감정으로 대하는 걸 봐버렸으니 그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근래엔 두 분 사이의 연락이 적었는데, 그자 때문이었나. 아니, 아직은 확신할 수 없지. 집행자께서 바빠서 연락을 소홀히 하긴 했지만, 성녀께선 서신을 꽤 자주 보내셨으니까.’

솔라는 메릭의 인적사항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꽤 명망이 높은 귀족 가의 자식인데 첫째가 아니라서 가문을 이어받지 못했고, 이런 와중에 다행히 신성력은 있어서 기사로 입단한 이였다.

‘귀족 가문 출신의 남성인 데다 교황의 신뢰를 얻은 이라고 하면 분명 성녀께도 이득이겠지. 멀리 떨어져서 편지로만 연락할 수 있는, 평민 출신 여자랑은 다르게.’

만약 그이가 정말로 카리타스와 각별한 사이가 된다고 하면 그건 그것대로 솔라의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집행자께서도 감히 말하지 못한,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다른 이가 고백한다고? 바스락 소리와 함께 종이가 구겨졌다. 솔라는 그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집행자께서도 더는 그런 마음을 먹지 않으시겠지. 그분의 힘과 자격을 의심하는 자들도 생기지 않을 거야. 두 사람이 멀어지면, 성녀께서 뭘 하든 이쪽과는 관련이 없을 테고.’

침침한 눈을 억지로 뜨려고 허벅지를 꼬집던 솔라는 구겨진 종이를 펴고 촛불을 껐다.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그는 다음 날 아침, 매일 일어나던 시각에 눈을 떴다.

“좋은 아침이에요!”

솔라가 가장 먼저 마주친 이는 크로마였다. 평소 같았으면 식당에서나 만났을 텐데, 어쩐 일인지 그는 솔라의 방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입니까.”

“부단장께서 조만간 본부로 돌아가셔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셔서 아침에 잠깐 회의하고 왔어요. 아침 먹으러 갈 거죠?”

크로마는 아침 햇살처럼 싱그럽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솔라를 식당 쪽으로 데려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솔라는 크로마와 단독으로 있는 시간이 늘었다. 주로 솔라는 가만히 있고 크로마가 찾아오는 편이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건 솔라도 그를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디스가 일을 배우러 자주 찾아오면서 그 시간이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일을 도와주는 건 편하지만, 이 사람은 나랑 뭘 하고 싶은 거지?’

만약 연인 관계로 발전할 법한 느낌의 호감뿐이었다면 솔라도 진즉 그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결이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어, 솔라는 섣불리 크로마의 마음을 넘겨짚을 수 없었다.

이런 애매한 상태로 몇 주가 흐르고, 두코는 크로마를 남겨둔 채 본부로 떠났다. 그가 돌아가고 나서 프라이에의 상태가 이상했지만, 그는 곧 회복되어 멀쩡하게 일정을 처리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두코가 없어졌으니 프라이에의 일이 늘어나, 여유롭게 궁상을 부릴 시간이 없었던 것이었다.

상관을 따라 이디스도 바빠지는 바람에 크로마는 아예 솔라의 집무실에 눌러앉다시피 했다. 말없이 계획을 짜던 솔라는 탁, 소리가 나게 펜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크로마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며 고개를 들었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솔라를 마주쳤다.

솔라는 이리저리 돌려 말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크로마가 상대라면 더더욱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신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이렇게 물어보면 동료라고 대답하고 말겠군요. 저와 아니면 저를 통해서 무엇을 하고 싶은 겁니까?”

“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는 그냥 당신이 혼자 과로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도와주고 싶은 것뿐이에요.”

첫마디를 더듬긴 했지만, 뒤에 이어지는 말의 어조가 평탄했기에 솔라는 그게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궁금한 건 그 아래에 숨어있는 또 다른 진심이었으니 솔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 그것뿐입니까?”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굳이 이렇게 내 입으로 들어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지레짐작하는 것만으로 그 속이 예측되는 사람이었다면 굳이 묻지 않았겠죠.”

크로마는 그 말에 솔라의 시선을 피했다. 솔라는 그의 옆얼굴을 보다가 바짝 달아오른 귀를 보곤 한숨을 쉬었다. 다급해진 크로마는 다시 고개를 돌려 솔라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알겠어요. 말할 테니까 듣고 유치하다 생각하지 말아요.”

“네.”

“처음엔 당신이 존경스러웠어요. 단장님을 보조하는 것뿐만 아니라 본인이 해야 할 일도 잘 했으니까. 그래서 저도 당신을 보고 많이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숨을 잠깐 들이쉰 크로마가 말을 이었다.

“맞아, 분명 그래서 당신을 보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계속 봐서 그런가? 나중엔 그런 생각도 없이 습관적으로 당신을 보고 있더라고요. 부단장님께 들켜서 혼났죠.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을 좋아해요. …이런 곳에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를 안 줬을 것 같네요.”

크로마는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비참한 얼굴을 했다. 원인이야 딱히 멀리 가서 찾을 필요도 없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걸 듣고만 있는 솔라를 본다면 누구나 쉽게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답 없이 침묵이 이어지자 크로마는 거절이라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솔라가 말했다.

“그건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어요.”

“저를 더 불쌍하게 만들지 마요. 제가 한 고백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치워지는 건, 아무리 당신을 좋아해도 견디기 힘들거든요.”

“무시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군요. 미안합니다.”

크로마는 그걸 고백에 대한 거절이라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이어지는 솔라의 말에 놀라 다시 눈을 떴다.

“저는 당신이 싫지 않으니 고백을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런 미지근한 대답이 싫은 거라면 이번에 당신이 절 거절하면 됩니다.”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크로마가 자신을 쳐다보자 솔라는 대답을 독촉하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여전히 그의 얼굴엔 변화가 없었다.

‘지금은 이렇게 덤덤하지만, 계속 곁에 있다 보면 솔라도 언젠가 바뀌지 않을까? 지금도 나를 대하는 건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거랑 다르기도 하고….’

크로마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자신도 거절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솔직하게 말하겠다며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이야기했다. 솔라는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너무 허무맹랑한 목표라서 부끄럽다는 크로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제가 도울 수 있으면 좋겠네요.”

“…당신이 도와준다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어요. 고마워요.”

훗날 크로마의 소원은 정말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의 기대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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