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3부 26화

남부에서: 1499년 12월

“못 하시겠습니까?”

교황의 말에 카리타스는 고개를 들었다. 카리타스의 얼굴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교황과 카리타스, 두 사람 사이엔 손목을 뒤로 묶인 채 꿇어 앉혀진 사내가 있었다. 그는 두려운 눈으로 카리타스를 올려다보았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겁을 먹은 듯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고스란히 그 감정을 받아낸 카리타스가 겨우 입을 뗐다.

“성하, 사특한 이단이 교회 내부에 있을지도 모르니 그들의 조직명을 기밀로 다루시 건 이해합니다.”

피데이스가 이끄는 이단 심문관 조직, 비르 베리를 언급한 카리타스는, 그 이름을 피데이스에게서 교황에게로 전달한 사내를 흘끔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성하께서 명령만 하시면, 영영 입을 다물 것인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교황이 헛기침하는 소리에 바짝 긴장해 그대로 얼어붙었다. 집무실의 거대한 창으로 햇살이 환하게 쏟아져 내렸다. 덕분에 교황이 쥔 지팡이는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다채로운 색으로 반짝였다.

그런 광경에 카리타스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고 교황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교황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런 환상을 깨트렸다.

“얄팍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자는 이미 그들의 이름을 묻지 말라는 제 명령을 어겼지요.”

사내를 노려보지 않으려고 애쓴 카리타스가 지지 않고 물었다.

“하지만 질문이 있습니다. 비르-베리의 존재 자체는 회의에 참석한 모두가 알고 있는데 그들의 이름만 이렇게 숨겨봤자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유 없는 행동을 제가 무하려 하겠습니까?”

“말씀해주십시오.”

“말할 수 없습니다.”

뻔뻔한 대답에 카리타스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고 재차 질문하려던 때, 교황이 손을 들어 발언을 막았다.

“위대하신 분께선 재물을 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한데 세쿠리스 사제는 어땠습니까?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신도들의 소중한 재산을 중간에서 쥐새끼처럼 빼먹고 있지 않았습니까?”

갑작스레 생뚱맞은 이야기를 들은 카리타스는 소매 속의 손을 말아쥐었다. 곰곰이 교황의 말을 곱씹은 그는 그제야 왜 이런 일에 자신을 불렀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교황이 여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는 그때 성녀께서 어떻게든 그의 죄를 증명하려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아직 어리셔서 그런지 마음이 여리시더군요. 마무리가 어설프셔서 그자를 사지 멀쩡히 내보내는 것으로 그치셨잖습니까. 덕분에 조금 번거로운 일을… 다른 이들이 성녀님 대신 맡았습니다.”

카리타스는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세쿠리스가 아이들을 괴롭혔으니 죗값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그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세쿠리스는 교황을 돕기 위해 그런 일을 도맡아 했던 이였다.

‘그런 사람도 쉽게, 잔인하게 내치다니.’

교황이 사내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가까워진 거리에 카리타스는 긴장했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이 자를 처리하는 것은 저에게도 당연한 일이지만, 성녀님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겁니다. 이 이는 당신을 위해… 희생이라는 단어가 적절하겠군요.”

“희생이라니요, 이건 살인입니다. 성하.”

누군가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카리타스는 뒤돌지 않았다. 꼿꼿하게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카리타스를, 마찬가지로 마주 보며 교황이 말했다.

“희생입니다.”

“…못합니다. 저는 이 사람을 죽일 자격도 의지도 없습니다.”

카리타스가 교황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자 교황은 바닥을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올려 어딘가를 가리켰다. 카리타스의 등 뒤에서 나온 메릭이 천천히 걸어가 사내의 옆에 섰다.

“주인이 못하겠다 하면 아랫사람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검을 쓰지 마시게, 피가 튀면 곤란하거든.”

그 말에 메릭은 검에서 손을 떼고 장갑을 꼈다.

“메릭, 멈춰요.”

카리타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메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사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내는 위험을 직감하고 버둥거렸지만, 허벅지와 종아리가 함께 묶여 있어 일어설 수 없었다.

양손을 앞으로 들어 올린 메릭이 사내의 목을 감싸 쥐었다. 사내는 어떻게든 메릭을 방해하려고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었지만, 이미 목이 잡힌 상황에서 그런 저항은 무의미했다.

“그만하라고 했잖아요. 내 말이 말 같지 않나요?”

이젠 분노한 목소리로 카리타스가 외쳤다. 맞은편에선 그의 분노를 부추기는 말이 들려왔다.

“명령에도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아주 충성스러운 호위를 두셨군요.”

“그만!”

그 순간 메릭의 양쪽 팔이 아래서 솟아오른 하얀 나뭇가지에 꿰뚫려 멈췄다. 잡혀있던 목을 빼낸 사내가 다급히 숨을 들이마셨고 교황은 실망한 듯 입꼬리를 내렸다.

“…이리 나약하시다니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 의견은 변함없습니다.”

카리타스가 뻗었던 손을 내리자, 나뭇가지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메릭은 구멍 하나 없는 제 양팔을 보다가 무릎 위로 손을 얹었다. 마치 처분을 가리키는 듯한 자세에 교황이 그에게 가보라는 듯 손짓했고 그제야 메릭은 일어나 카리타스의 등 뒤로 돌아갔다.

재차 다리에 힘을 준 카리타스는 교황을 향해 고개를 치들었다.

“저는 성하께서 이 자를 처벌하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었다면 재판을 통해 벌을 받는 게 당연하고 죄를 짓지 않은 자라면 이렇게 구속해두어서는 안 됩니다.”

말없이 카리타스를 내려다보는 교황의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그는 아주 침착해 보였고, 동시에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카리타스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려는 공포감을 억누르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데 메릭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갑작스레 닿아온 손에 카리타스가 고개를 돌렸고, 메릭은 자신의 행동에 놀란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일이 번거롭게 되었군요. 아직 성녀께서 이런 일을 하기 힘들다는 걸 본인이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잠시만요. 그 사람한테 손대지 마십시오. 메릭, 이거 놔요!”

다시 나무를 소환하려던 카리타스는 철컥 소리에 다시 교황 쪽을 바라보았다. 교황이 손수 사내의 구속을 풀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카리타스도, 메릭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사내가 일어섰다. 그는 비틀거리며 창가로 향했고, 굳게 닫혀있던 창문을 열어 그 밖으로 그대로 몸을 던졌다.

카리타스가 메릭을 뿌리치고 창가를 내다보았을 때, 사내는 이미 목이 꺾인 채 바닥에 누워있었다. 쿵-하는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사내를 에워쌌다. 보통 사람들이었다면 대체 사내가 어디에서 떨어져서 이렇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고개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고개를 드는 대신 시신을 수습하기 바빴다.

‘어째서 여길 올려다보지 않지?’

교황이 기침하자 그의 시종이 카리타스를 뒤로 데려오더니 창문을 닫아버렸다.

“성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질문은 더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서늘한 목소리로 교황이 명령하자 집무실 문이 열렸고, 카리타스는 그대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말없이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고 시종에게 한 시간 동안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고 명령했다.

두 사람은 아까 교황과 카리타스가 사내를 두고 마주 보았던 것처럼 테이블을 중간에 두고 앉았다.

“….”

침묵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성하께서 명령하시면 뭐든 따르는 건가요?”

질문이었지만, 질문이 아니었다. 고저 없는 목소리엔 희미하게 분노가 담겨있었다. 메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때론 말보다 침묵이 더 강한 의견을 내포하는 법이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알아챌 수 없었지만, 카리타스는 적막함이 길어질수록 절망에 빠졌다.

“만약 제가 쓸모없어져서 그분이 저를 처리하라고 명령하신다면, 당신은 나를 죽일 건가요? 아까 그 사내를 죽이려던 것처럼?”

“아닙니다.”

아까의 침묵이 없었던 것처럼 바로 튀어나온 대답에 카리타스는 이를 갈았다. 황급히 메릭이 말했다.

“그자는 죄를 지은 사람이지 않습니까. 당신께선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으시니….”

“죄가 있고 없고를 누가 판단했는지 방금 보고도 모른다고요?”

“….”

“성하의 명령을 따른 것에 후회는 없나요?”

잠깐 망설이던 메릭이 대답했다. 혹여 카리타스가 말을 끊을까 봐 그는 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없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성하께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서 대신 행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카리타스는 그를 내보냈다. 메릭은 자신이 반발할 만한 지위가 안 되었다고 더 변명하긴 했지만, 카리타스는 그런 초라한 변명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저녁 식사 전까지 이곳을 나갈 생각이 없으니 그때 다시 돌아오라고 이야기했을 뿐, 그 이후로 카리타스는 말없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 눈을 감자 아까의 상황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메릭이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잠시 후, 카리타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시도폰을 위해 심어두었던 꽃들은 이미 시들어 뽑혀나간 지 오래였다. 언젠가 메릭은 카리타스에게 매년 자잘한 꽃을 심기보다는 꽃이 피는 나무를 심는 게 어떻겠냐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카리타스는 해마다 달라지는 정원을 시도폰에게 보여주고 싶었기에 제안을 거절했었다.

‘시도폰이었다면 달랐겠지.’

메릭이 들었다면 상당히 억울해할지도 모르는 말이었다. 그야 지금의 시도폰은 집행자, 인류의 등불이니까. 하지만 카리타스는 지금의 늠름한 기사단장이 아닌, 제게 꽃을 주었던 소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애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는걸. 뭐, 교황한테까지 대들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얀한텐 한 방 먹였으니까.’

생각난 김에 카리타스는 편지 보관함을 열었지만, 새로 도착한 편지는 없었다.

‘바쁘겠지.’

계속 편지를 보내는 게 의미가 있을까. 불쑥 고개를 든 생각에,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보내두면 언젠간 읽겠지. 소식이 없으면 불안해할지도 모르니까.’

그가 시도폰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나니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카리타스는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메릭의 목소리가 저녁 식사시간임을 알렸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틈으로 제게 물어오는 메릭에게 카리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릭은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오더니 문을 닫았다. 의자에서 일어난 카리타스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살폈다.

‘식당으로 가야 하는데 문을 왜 닫았지.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려고 그러나?’

예상대로였다. 풀죽은 목소리로 메릭이 말했다.

“윤리적으로 판단하면 당연히 성녀께서 하셨던 것처럼 성하의 명령을 거부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같은 말을 할 거라면 더 말할 필요 없어요.”

카리타스는 메릭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그의 말을 끊었다. 완전히 무시당했지만, 메릭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 말했다.

“저는 기사로서 성하께 충성하라는 교육을 더 오래 받은 사람입니다. 보편적인 윤리나 도덕은 분명 성서에 나와 있지만, 그건 솔직히 지식으로만 느껴질 뿐 행동의 원리나 제약으로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메릭만 그런 건 아니었다. 아마 대부분의 성기사들이 같은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윤리는 책 속의 문구일 뿐이고, 명령은 현실에 존재하는 압력이니 그들이 둘 중 무엇을 우선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잠시 머리를 식힌 카리타스는 잠자코 메릭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니 가르쳐주십시오. 앞으로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진지한 눈으로 메릭이 말했다. 거짓은 아니었고, 상황을 모면하려는 변명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말도 허점이 있었으니, 카리타스는 이 점에 대해 메릭이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했다.

“메릭, 그렇게 바뀌려는 모습은 좋아요. 한데, 만약 제가 당신에게 그런 걸 가르친다고 하면 명령하는 사람이 성하에서 저로 바뀌기만 할 뿐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메릭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짧게 고민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만약 성녀님의 명령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때 제가 말하는 걸 들어주십시오.”

드디어 카리타스가 기다리던 대답이 나왔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것. 카리타스는 얼굴에 힘을 주었던 것을 풀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사실, 남에게 업무 외에 그런 걸 가르쳐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은 없어요. 그리고 저도 아직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완벽하게 판단할 수 없을 테니 같이 공부해봐요.”

대화를 끝내고 카리타스는 식당으로 이동했다. 사람들의 대화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걸 보면 사내의 죽음은 아무도 모르게 처리된 것 같았다.

‘지금 가도 시체는 물론이고 핏자국 하나 남지 않았겠지.’

입맛이 썼다. 카리타스는 억지로 단것을 먹으며 교황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길 것이다. 한 번 실패했으니 다음 일은 더 가혹할 수도 있다.

 

‘이럴 때 신은 뭐 하는 거람.’

 

문득 든 생각에 벼락 맞은 것처럼 눈앞이 번쩍였다. 교황의 명령에 따라 신의 예언을 왜곡한 자신이 메릭에게 무어라 할 자격이 있었나?

속에서 올라오는 구역감을 참은 카리타스는 평소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황의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그는 카리타스를 붙잡지 않고 보내주었다. 식당에서 멀어져 인적이 드문 복도에 도착해서야 메릭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시신을 보신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카리타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아뇨, 시신은 6년 전에 몇십 구는 봤는걸요. 사지가 온전히 달려있고 목만 꺾인 시신에 겁먹을 이유는 없죠.”

그답지 않게 누군가를 비웃는 듯한 어조로 이야기하자 이번에 메릭은 자신 때문이냐고 물었다.

“그것도 아니에요. 당신은 잘못이 없죠.”

그러면 도대체 그가 왜 이러는가. 더 물을 수 있는 것이 없었던 메릭이 입을 닫자 둘 사이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대화가 다시 시작된 건 카리타스가 집무실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그는 그때까지 웃고 있었다. 스스로가 너무 우스워서 참을 수 없었다.

“메릭,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요.”

메릭은 카리타스를 보며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해명을 바라는 것처럼 기다렸지만, 카리타스는 거기서 더 말할 수 없었다. 교황이 자신에게 그런 명령을 내려왔다는 걸 메릭이 알게 된다면, 내일부터 메릭은 산 사람이 아니게 될 테다. 표정을 갈무리한 카리타스가 평소처럼 냉랭한 얼굴로 돌아왔다.

“제게 주어진 일을 하지 않아서 당신에게 그런 끔찍한 일이 넘어갈 뻔한 건데 당신을 탓했잖아요. 그게 제 잘못이지 누구 잘못이겠어요.”

거기에 메릭이 그런 명령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대답하고 나서 그대로 대화가 끝났다. 카리타스를 방에 데려다준 메릭은 문을 닫자마자 제게 다가온 시종을 따라갔다. 아까 카리타스의 불안한 상태 때문에 그는 계속 카리타스의 방을 돌아보았다. 익숙한 길을 걸으며 메릭이 어떤 변명을 할지 생각하는 동안 시종은 으레 가던 길과 다른 곳으로 발을 돌렸다.

“집무실로 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메릭이 묻자 시종은 고개만 끄덕일 뿐, 어디로 향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하고 나서도 시종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다급한 목소리로 메릭이 그를 말렸다.

“잠깐, 뭔가 착오가 있으신 거 아닙니까? 이곳을 나서면 교회 밖으로 나가게 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저희는 지금 밖으로 갈 거니까요.”

‘성하께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거지?’

마침내 도착한 곳은 어느 공동묘지였다. 메릭은 가지런히 놓인 무덤들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시종은 미로를 빠져나가듯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메릭을 안내했고, 그들은 삽을 들고 있는 누군가를 만났다. 그는 어두운색의 로브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고 있었다.

시종이 그에게서 삽을 받아 메릭에게 건넸지만, 메릭은 바로 받아들지 않고 로브를 쓴 이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로브 아래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분을 따라 하는 겁니까? 당신이 감히?”

어느새 메릭은 삽을 들고 있었다. 로브 속 목소리의 주인은 꽤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는 분노가 깔린 어조로 땅을 파라고 명령했다. 그의 발치에는 두껍고 뭉툭한 상자 같은 것이 놓여있었다.

“성하, 어찌 그런 명령을….”

그렇게 대답하던 메릭의 다리가 움직였다. 그는 교황이 가리킨 땅 앞에 서서 부지런히 삽을 놀렸다. 초겨울의 퍽퍽한 대지를 삽질하며 땀을 비 오듯 쏟은 그는 적당한 깊이가 되자 손을 멈췄다. 메릭은 시종과 함께 길쭉한 상자를 구멍에 놓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삽을 잡았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무덤가는 고요했다. 그 적막감 속에서 메릭은 묵묵히 작업을 끝냈다. 그는 왜 교황이 자신에게 이런 일을 시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교황은 삽을 넘겨받은 시종을 데리고 등을 돌렸다.

“그분께서 당신에게 뭐라고 했는지 대충 알겠군요. 하지만 당신이 그분과 다르다는 건 본인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

“한낱 인간이 끝없는 이상을 추구했다간 태양에 날개가 녹아 추락하듯 떨어지고 말 겁니다. 내 말을 명심하길 바라요.”

그 말을 끝으로 교황은 묘지를 벗어났다. 메릭은 혼자 무덤 앞에 남아, 이름도 없는 무덤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동이 틀 무렵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는 평소와 다른 바 없는 얼굴로 카리타스를 대했지만, 카리타스는 그의 신발에 묻은 진흙을 봐버렸다.


얼마 후, 피데이스가 이단이라는 의심을 받기 시작해서 카리타스도 바빠졌다. 카리타스는 주변의 시선이 있으니 직접 피데이스를 변호할 수 없었지만, 시도폰이 변론서를 쓰는 데 필요한 자료는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하 감옥을 불시에 검문하여 가혹 행위는 없는지 감시했다.


[피데이스는 무사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 사람은 이단이 아닐 거야. 몸조심하고, 잘 지내.]

시도폰에게 보낼 편지를 쓰던 카리타스는 문득 펜을 멈췄다. 울컥 솟아오른 생각을 무시하고, 그는 편지 끝에 이름을 썼다. 시종에게 편지 봉투를 내민 카리타스는 애써 무시했던 생각을 조심스레 다시 꺼냈다.

‘내가 너무 일방적인가? 그 애가 바쁜 걸 알면서 답장이 빨리 오길 바라는 내가 이상한 거야?’

시도폰의 일이 방대하다는 건 몇 년에 걸쳐 익숙해진 사실이었다. 지금은 경계를 확장하는 일 때문에 더 바쁜 것이었고, 그 전이라고 해서 딱히 편지가 자주 오는 건 아니었다. 카리타스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고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익숙한 일인데 왜 이렇게 힘들까.’

답이 어렴풋하게 떠올랐지만,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바쁜 사람을 붙들고 나를 돌아봐달라 외칠 순 없다고 생각하며 버텨왔지만, 이젠 한계일지도 모른다. 카리타스는 이럴 때마다 그는 편지를 새로 쓰거나, 진심을 쓰기 전에 편지를 끝맺어버렸다. 재가 되어 사라진 편지 속엔 보고 싶다는 기대와 언제 올 수 있겠냐는 독촉과 약간의 원망이 묻어 있었을 것이다.

그가 편지를 보내고도 답답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자, 메릭은 그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어둑해지는 하늘을 창문 밖으로 확인한 카리타스는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메릭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시도폰의 연락 부재에 카리타스가 익숙해진 것처럼 메릭도 카리타스의 이런 상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억지로 나오긴 했지만, 카리타스는 메릭이 진지하지 않은 이야기를 열심히 하는 걸 들으며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걸 느꼈다.

 


피데이스의 일도 마무리되었고 북부에 갔던 수행단도 돌아왔다. 카리타스는 교황이 시도폰에게 오순절 참여 여부를 물었다는 걸 듣고 내심 재회를 기대했지만, 이미 제망까지 진격해, 돌아오기는 힘들다는 답장을 받고 적잖이 실망했다.

집행자를 대신해 오순절에 참석한 프라이에는 카리타스와 만나서 시도폰은 아주 건강히 잘 지내며 바빠서 자주 연락하지 못해 미안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렇구나, 말해줘서 고마워. 아무 일 없으면 됐지.”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은 프라이에가 솔라와 함께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은 곧장 피데이스에게로 향했다. 웬만한 고위 사제나 귀족들과 전부 인사를 나눈 카리타스는,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아페를 생경한 눈으로 바라봤다.

교회 행정 업무 인수인계가 끝난 뒤로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거의 없었으니 아페도 이렇게 찾아온 것이 조금 민망했는지 카리타스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은 각자 벽에 등을 대고 앞을 보며 이야기했다.

“집행자께선 올해도 안 오셨네요.”

아페의 말에 카리타스는 ‘그렇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이번엔 뭐라고 하려고 온 거 아니니까.”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뭐, 평소에 그런 대화를 하긴 했으니까.’

“그냥… 당신은 평소에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서요. 처음 일을 배울 땐 이걸 익히느라 매일매일 바쁘고 힘들었는데, 익숙해지니 너무 지루하네요.”

저와 비슷한 심정을 토로하는 아페에게 카리타스는 독서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가 그마저도 지루하면 산책이거나 체력 단련뿐이라고 덧붙이자, 실망한 아페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두 사람 다 표정 관리의 귀재라 다른 이들이 보기에 그들은 담백하게 대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번에는 카리타스가 먼저 말했다.

“제가 당신께 업무를 가르칠 때 많이 미숙했습니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사과드려요.”

이번엔 아페가 당황해 말을 절었다.

“갑, 갑자기요?”

“사과받는 게 싫으십니까?”

“아뇨! 그럴 리가요.”

‘아세쿠토레가 북부로 가기까지는 2년 정도 남았나. 정말 얼마 안 남았으니까, 더 늦기 전에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어깨를 편 아페가 올라간 입꼬리를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기뻐하자, 카리타스는 그 모습을 보며 진작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고 반성했다. 하지만 그는 아페가 왜 갑자기 사과하냐고 물어본 질문엔 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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