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3부 25화

막사 안엔 착잡한 표정의 세 사람이 있었다. 솔라는 익숙하게 봉투를 받아들었고, 시도폰이 먼저 읽어보라는 뜻으로 손짓하자 잠깐 머뭇거리더니 봉투를 뜯었다. 전령은 이제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구석에 앉았고, 솔라는 [사제 피데이스의 이단 혐의 공소장(재수정안)]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몇 주간 이런 지루한 공방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 시도폰은 밀린 편지의 개수를 세어보다가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그는 반론을 작성하는 틈틈이 어떻게든 슈바헨과 카리타스의 편지에 답장을 썼지만, 절대적인 시간이 모자랐다.

그런 노력 끝에 결국, 피데이스의 이단 혐의는 벗겨졌다는 답장이 돌아왔고, 전령은 날듯이 기뻐하며 시도폰과 솔라에게 작별 인사를 올렸다.

‘카리타스가 요새 편지를 잘 안 하네…. 그럴 만도 하지, 내가 자주 못 했으니까. 그래도 이젠 저 일이 끝났으니까 시간이 좀 남겠지? 생각난 김에 지금 써야겠다.’

야심 차게 편지지를 펼친 시도폰은 받는 이의 이름을 쓰고 나서 문제에 봉착했다.

‘나 그동안 한 게 뭐지? 매일 요새 짓는 거 감독하고, 최근엔 피데이스 때문에 반론문 쓰느라 바빴고, 중간중간 악한 기운 정화하러 돌아다닌 거 말고는 딱히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는 다급히 일기장을 펴들었다. 방금 떠올린 것들 외에 특별한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던 그는, 잠시 후 소득 없이 일기장을 덮었다.

‘없어.’

시도폰이 소리 없이 단말마를 지르고 천장을 한번 쳐다보더니 자세를 바로잡았다. 다행히 솔라는 또 돌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듣고 나간 참이었고, 루카는 인부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느라 바빴다.

‘없으면 뭐 어때, 솔직하게 바빠서 쓸 만한 일이 없었다고 해야지. 그나저나 카리타스는 요새 뭐 하고 지내려나. 이단 문제에만 집중하느라 남부에 다른 일이 없는지 물어보질 못했네.’

다행히 마음을 편하게 먹으니 글은 잘 써졌다. 그는 편지를 다 쓰고 나서 두코가 보낸 보고서를 펼쳐 들었다. 피데이스 건으로 다투는 동안 북부 기사단 본부에선 수행단의 훈련이 이루어졌고 이젠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거지. 처음 경계를 넘은 뒤로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가다니.’

수행단이 성장하는 동안 요새는 점점 더 전진했다. 시도폰은 솔라와 함께 기사들을 이끌었고, 제망의 수도 근처까지 성공적으로 도달했다. 시작의 땅이 제망의 수도에 있었으니 여정 자체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땅이 넓어진 만큼 관리하는 게 힘들어졌다.

북부 기사단에 인력 충원을 요청해서 구역마다 배치하였고, 해당 구역 담당자들에게 받은 보고서들도 매달 쌓여갔다.

‘아, 저것도 봐야지.’

두코의 보고서를 다 읽고 확인 서명을 한 시도폰은 시야에 들어온 보고서들을 끌고 왔다. 어느새 돌아온 솔라도 옆에 앉아 함께 업무를 보았고,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올해 오순절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건조한 눈을 비빈 시도폰이 낮은 목소리로 못 가겠지-라고 대답했다. 카리타스를 보지 못한다는 건 아쉬웠지만, 이미 기사단장 임명식도 끝났고 시작의 땅까지 진격하고 있기까지 하니 매년 열리는 행사에 시도폰이 굳이 갈 필요는 없었다.

솔라는 그에게 조금 쉬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시도폰은 어깨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생각이네, 다 망가진 건물 구경이라도 하면서 돌아다녀 봐야겠어.”

“동행이 필요하십니까?”

“괜찮네.”

잘 다녀오라며 고개를 숙인 솔라는 피곤한 내색 없이 서류에 집중했다. 그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시도폰은 제망의 시가지로 향했다.

브리오소보다 다소 투박하다고 할 수 있는 장식품이나 건물 양식이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이니 미추에 상관없이 그저 흥미롭기만 했다.

그러던 중 그는 꽤 부유한 집을 발견했다. 시도폰이 문에 손을 대자 무언가 바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문이 집의 안쪽을 향해 쓰러졌다.

“…많이 낡기는 했나 보다.”

어쩌면 악마의 기운에 상한 걸지도 몰랐다. 그는 자기가 힘을 줘서 부서진 건 아닐 거로 생각하며 조심스레 집안으로 발을 디뎠다. 명패는 이미 다 닳아서 이름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집안에 장식된 검이나 방패 등을 보면 집의 주인은 기사였던 모양이다.

“성기사는 아니었던 모양이네.”

집행자가 등장하기 시작한 이후로 악마들을 상대하는 성기사에겐, 그 자격을 상징하는 나뭇가지 모양의 훈장이 내려졌다. 시도폰은 본인이 집행자이니 그런 것을 받지 않았지만, 다른 기사들은 직위에 따라 다른 훈장을 받았다.

집안 곳곳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훈장은 물론이고 성기사로 임명받을 때 함께 주어지는 임명장도 없었다.

“쿨럭.”

시도폰이 부지런히 돌아다닌 탓에 오랫동안 바닥에 쌓여있던 먼지가 일어났다. 그는 기침하며 소매로 입을 가렸고, 창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창문의 문짝이 그대로 떨어져서 낙하했다.

들려올 끔찍한 소리를 예감하고 시도폰이 귀를 막았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미약하게 그의 귀로 흘러들어왔다.

‘온 집안 살림 다 부수겠다.’

물론 주인이 복수하러 돌아올 리는 없었지만, 시도폰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우연히 마주친 초상화에 허리를 숙여 사과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탐험을 멈추진 않았다.

문짝이 다 떨어져 나가긴 했지만, 이정도로 멀쩡한 집은, 그것도 부유한 이들의 가구나 미술품이 남아있는 집은 거의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2층에 도착한 시도폰의 눈에 기사의 갑옷이 들어왔다. 광이 났을 갑옷엔 먼지가 소복하게 앉아있었고 꼿꼿하게 서 있는 갑옷의 옆엔 기다란 검이 세워져 있었다.

자신이 전투에 나가서 공을 세웠다는 걸 나타낼 생각이었는지 검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어차피 남을 베는 데 사용하는 검이니 굳이 깨끗하게 둘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그와 대조적으로 기사의 허리춤에 달린 작은 칼은 가죽으로 잘 감싸져 있었다.

‘꼭 송곳처럼 생겼군. 대거(dagger)의 한 종류인 것 같은데.’

혹여 갑옷도 문짝처럼 떨어질까 봐 시도폰은 조심스레 단검을 뽑아냈다. 예상대로 깨끗한 검날이 드러났다. 신성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콘피테오르가 새겨진 흔적도 없었다. 길지도 않은 데다가 쓴 흔적이라곤 없는 검이었으니 시도폰은 이것의 용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생활용으로 사용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기사가 무사하길 바라며 들고 다니는 상징물이라도 되는 건가. 베론은 알고 있으려나.’

당장 물어볼 만한 사람이 그뿐이었다. 주변에 있던 아무 천이나 찢어다가 단검을 감싼 시도폰은 집안을 더 돌아보다가 막사로 돌아왔다. 솔라는 이미 자리에 없었고 루카가 그를 맞이했다. 시도폰이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루카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부관께서는 일을 끝내시고 본인 막사로 돌아가셨습니다. 다 처리하신 서류는 이쪽에 두었다고 하셨고요.”

과연, 루카가 가리킨 곳엔 서류가 쌓여있었다. 자리에 앉은 시도폰은 루카에게 베론을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론이 막사에 도착했고 단검을 보자마자 어디서 그런 걸 주워 오셨냐고 물었다.

“시가지 쪽에 갔었네. 거기서 일반기사, 그러니까 신성력 없는 기사의 집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있더군. 다른 것들과 다르게 피도 묻지 않고 사용 흔적도 없길래 신기해서 들고 와 봤다네.”

“그림 자료로는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기억이 났다면 묻지도 않았겠지.”

당당하게 모르겠다 말하는 시도폰을 보며, 베론이 잠깐 말을 멈췄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말을 이었다.

“제망에서는 뭐라고 불렀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이것을 미제리코르데(misericorde)라고 부릅니다. 성기사들은 사용하지 않았고 신성력이 없었던 일반기사들이나 사용했던 검입니다. 그래서 아마 직접 보신 적은 없으실 겁니다.”

베론은 단검, 미제리코르데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사용자가 전혀 전선에 나선 적이 없는 뜨내기거나 아주 잔인한 사람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 검을 사용한 흔적은 없지만, 그 옆에 있던 대검은 피가 잔뜩 묻어 있었네. 그런 거로 보면 출전한 적은 분명 있다는 거겠지. 왜 잔인하다고 생각한 건가?”

“아까 성기사는 이 검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지요. 이 검은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나 당장 죽지는 못하는 이들을 위한 검입니다. 전장에서는 이 검을 갑옷 틈새에 찔러 넣어서 상대를 즉사시키곤 했다더군요. 그래서 이름에 자비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전장에서 한 번도 이걸 사용하지 않았다는 건… 상대방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에 관심이 없었거나 일격에 적을 죽일 정도로 강했다는 뜻입니다.”

시도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용도라면 확실히 성기사들에겐 필요가 없었겠군. 즉사에 이르지 않는 상처는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테고 우리의 상대는 악마니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지. 흠, 초상화를 볼 때는 꽤 인자한 성격으로 보였는데 그런 건 아니었던 건가.”

베론이 그에게 단검을 돌려주었다. 용도와 상관없이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던 시도폰은 그것을 보관하기로 했다. 어차피 망한 나라니 이런 것 하나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리라.

‘제망이 망하기 전부터 망한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쓰인 적 없는 검이라는 점이라는 거잖아. 안전을 기원하는 것 같기도 하니까. 그리고… 이 검이 쓰일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의미도 될 거야.’

“용건은 그게 전부입니까?”

멀뚱히 서 있는 베론에게 시도폰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돌아서려던 베론은 할 말이 막 생각났는지 다시 시도폰을 바라보았다.

“솔라에게 오순절 행사에 내려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맞네. 지금은 이쪽이 더 급하니까… 큰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내가 갈 필요가 없지 않겠나.”

헤일로 단장도 그러지 않았냐고 말하려던 그는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불과 얼마 전이 단장의 기일이었다. 굳이 그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시도폰은 얕게 기침을 했다. 베론은 급하게 물을 건넸고, 시도폰은 손을 흔들어 사양했다.

“그럼 오순절 행사엔 누굴 보내실 겁니까?”

막연하게 두코를 생각하고 있던 시도폰은 이어지는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몰라서 말씀드립니다만, 두코는 이미 거절 의사를 밝혔습니다.”

“어, 어째서인가?”

베론이 예상했다는 듯 한숨을 쉬며 팔짱을 꼈다.

“전 약혼자라는 사람이 꽤 끈질긴 모양입니다. 지난 기사단장 임명식 때 기어이 두코를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별일이 없긴 했지만, 아무래도 불편할 수밖에 없겠죠.”

“…프라이에를 보내야 하나?”

“나쁘지 않죠. 말해두겠습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급하게 막사로 들어왔다. 솔라였다. 그가 이렇게 침착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일을 거의 없었기에 시도폰과 베론은 놀라서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혹시 악마가 침입하기라도 한 건가?”

시도폰의 질문에 솔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결심을 굳힌 듯 허리를 곧게 세웠다.

“늦게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부관으로서 할 말이 아닌 건 알고 있지만, 이번 오순절 행사에 참석하고 싶습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시도폰은 혹시 피데이스 때문이냐고 물었다.

“맞습니다. 이단 혐의는 벗겨냈지만, 사람이 멀쩡한지는 알 수 없으니까요.”

남부 교회를 의심하는 말에 눈살을 찌푸린 베론이었지만, 그는 솔라의 의심을 부정하지 않았다. 턱을 괸 시도폰이 흔쾌히 말했다.

“자네가 가면 피데이스도 힘을 낼 것 같네. 허락하지. 사실 왜 보내달라고 하지 않는지 궁금해하고 있던 참이었어.”

솔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감사합니다. 이디스에게 미리 말해두어 행사 때도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디스가 자네를 대체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나?”

시도폰이 농담으로 던진 질문이었지만, 솔라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대답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농담이었네. 아무튼, 잘 다녀오게. 자네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두고, 누가 뭐라고 하면 내가 시켰다고 하는 걸 잊지 않도록.”

그 말에 솔라는 잠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다시 한번 고맙다고 시도폰에게 고개를 숙이고 막사를 나갔다. 베론도 용건이 끝났으니 이만 가보겠다며 나가버렸고, 막사엔 시도폰 혼자 남았다. 달리 할 것도 없었으니 시도폰은 서류를 다시 읽었다.


시간이 흐르고, 두코의 주도하에 북부 수행단이 무사히 훈련을 마쳤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곧이어 수행단도 별 탈 없이 남부에 도착했으며, 북부엔 교황이 시도폰의 오순절 행사 참여 여부를 묻는 편지가 도착했다.

시도폰은 자신의 대리인으로 프라이에를 보낸다고 답장했고, 오순절 행사도 무사히 지나갔다. 솔라는 복귀 후 피데이스가 건강하다고 보고했다.

“프라이에 부대장의 도움을 받아 신체검사도 진행했습니다. 다행히 고문 흔적 같은 건 없었습니다만, 남부로 가기 전보다 왜소해진 것 같았습니다.”

“마음고생이 심했을 테니…. 참, 이단 심문관들과는 사이가 좋아 보이던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피데이스는 혼자 돌아다녔고 이단 심문관이 어딨냐는 질문엔 답하지 않더군요. 무슨 일을 하는지도 당연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비밀리에 일을 처리하는 건 이해가 되지만 혼자 돌아다녔다는 건 좀 특이하군. 교회 밖이면 몰라도 안에서까지 그렇게 거리를 둬야 하나?”

솔라는 시도폰 몰래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사실 그것도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대답을 못 하시더군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더 물어보진 못했습니다.”

손으로 턱을 매만지던 시도폰은 한숨을 쉬고 솔라에게 쉬라고 명령했다. 루카는 시도폰에게 차를 따라주며 솔라를 걱정했다.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처음 봐요. 외적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어도 여전히 걱정되실 텐데 계속 거기 있을 순 없으니 안타까워요.”

시도폰은 루카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조금 다른 생각을 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걱정만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가 솔라를 보면서 느낀 또 다른 감정은 분노였다. 어떻게든 억누르고 삭히려고 한 것 같지만, 시도폰은 그와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해서 그걸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나도 화가 났으니까 알아챈 건가? 헤일로 단장이, 아니 역대 단장들이 다들 북부와 거리를 둔 데에는 이유가 있었구나. 무슨 일을 이런 식으로 하는 거지?’

시도폰은 찻잔에 손을 대지 않았지만, 찻물 표면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걸 눈치챈 시도폰이 신성력을 억눌렀고, 루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프라이에가 남부에서 사 온 다과를 접시에 옮겨 담았다.

“고맙네.”

태연한 목소리로 시도폰이 다과를 베어 물었다. 시도폰의 손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솔라가 가져온 보고서를 읽으며 태워버리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피데이스가 이단이 아닌 것으로 판정되긴 했지만, 그런 의심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그의 자존감과 명예가 크게 실추되었을 것이다. 부하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시도폰은 직접 남부로 내려가서 따져 물을 수 없었다.

이미 경계를 넘어선 것만으로 남부에서 불만이 나오고 있다는데, 시도폰이 자리를 비운 동안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여론이 어떻게 될지 뻔했다. 결국, 보고서를 다 읽지 못하고 시도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안한 눈빛으로 그의 옆을 지키던 루카는 성난 발걸음으로 나가는 시도폰을 붙잡지 못했고,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내어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 시도폰은 조금 진정하며 악마에게 오염된 대지를 정화하러 다녀오겠다고 답했다.

“알겠습니다. 다녀오세요.”

시도폰은 천천히 막사에서 나왔다. 기사나 인부들이 지나가는 그를 보며 공손하게 인사했고, 시도폰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적어지는 곳으로 갈수록 그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정화’가 필요한 공터에 도착했을 때 시도폰은 거의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악마들의 사악한 기운으로 오염되어 검게 변한 대지에선 아무것도 자라지 못했다. 신성력이 없는 평범한 인간들은 그 땅에 닿자마자 악에 잠식당해 생명력을 빼앗기고 얼마 안 되어서 사망한다. 그러면 그 대지는 인간의 시체를 먹고 자라나는 것처럼 더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땅에, 시도폰은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더럽혀진 것들을 침식에서 건져와 마땅한 형태로 되돌리게 하소서.]

그의 발끝에서부터 하늘색 불꽃이 타올랐다. 불꽃은 잎맥처럼 퍼져나가 검은 대지 곳곳을 불살랐고, 그 불꽃의 한가운데에서 시도폰은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시도폰의 키만큼 높아진 불꽃이 조금 더 높게 솟아올랐다.

‘이러니까 꼭 하늘에 떠 있는 기분이네.’

어느새 깨끗하게 원래의 색을 되찾은 대지를 보며 시도폰은 신성력을 거둬들였다. 돌아가서 지도에 표시해둬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문득 루카가 했던 제안이 떠올랐다.

 

‘주제넘은 제안일 수도 있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그때 시도폰은 한창 이곳의 토양을 정화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참이었다. 루카는 머뭇거리더니 시도폰의 허락을 받고 말을 이었다.

‘정화된 땅에 꽃을 심으면 어떨까요?’

생뚱맞은 질문이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산에서 멀어져서 기후가 온화해져 키우는 것은 문제가 없었고, 농사보다는 부담이 덜 하면서 기사들의 정신을 치유해 줄 만한 취미 활동으로도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어떤 꽃을 심으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솔라가 들어와 정화 계획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와서 그 제안은 뒤로 밀려버렸다.

 

‘어떤 꽃을 심으면 좋을까?’

그는 카리타스를 보러 갈 때마다 꽃을 선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정원 조성 같은 것에 일가견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카리타스한테 어울릴 법한 게 보이면 샀으니까…. 인부들한테 물어볼까?’

확실히 경험자를 찾아가는 건 옳은 선택이었다. 유달리 식생을 잘 알았던 인부를 붙잡고 이곳에 어떤 꽃을 심으면 잘 자라겠냐고 물어보니, 질문을 들은 인부는 ‘저도 제망은 처음이라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이라고 서두를 뗐다.

그는 그동안 경험한 제망의 기후와 이곳의 지형, 땅의 성질 등에 관해 이야기했고, 시도폰은 절반쯤 못 알아들었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자 시도폰은 적당한 때에 끼어들었다.

“플뢰르, 그러니까 자네 말은 이곳의 기후가 브리오소 서남부와 비슷하다는 뜻인가?”

다행히 플뢰르는 불쾌한 기색 없이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이해하셨네요.”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됐잖아.’

그런 생각을 했지만, 시도폰은 열성적으로 설명해준 사람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플뢰르가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서 제가 추천하는 종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참 후, 드디어 대화의 목적을 달성한 시도폰이 플뢰르가 내민 종이를 받아들었다. 삐뚤빼뚤하게 적혀있는 이름과 다르게 꽃을 묘사한 그림은 섬세했다. 그중에선 카리타스가 좋다고 했던 히아신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도폰은 티 내지 않고 기뻐하며 종이를 프라이에에게 주었다. 나중에 기사들이 이곳에 꽃을 심으면 어떻게 피어날지 기대가 되었다.

 

“…하.”

사람들이 돌아가고 혼자 남은 시도폰은 깨끗해진 대지를 다시 마주하고 답답하다고 느꼈다. 꽃 때문에 카리타스가 생각났고, 아까까지 남부의 일로 골머리를 앓았던 것으로 생각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왜 인간을 상대하는 게 악마랑 싸우는 것보다 힘들까. 아니, 생각해보면 당연한 사실이네. 악마들은 없애버리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아무리 짜증 나고 이해가 안 되어도 끝까지 말로 설득해야 하니, 더 피곤한 게 당연하지.’

무심코 허리를 짚은 시도폰의 손에 무언가 걸렸다. 인간을 죽이기 위한 검, 미제리코르데였다. 깜짝 놀란 시도폰은 불에 덴 것처럼 급하게 검에서 손을 뗐다.

그는 피데이스의 제자이자 성기사의 단장이기 전에 수많은 인간을 악마에게서 지켜내야 할 집행자다. 인간을 미워해봤자 사명에서 멀어질 뿐이었다. 세차게 고개를 저은 시도폰은 뒤돌아 막사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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