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익은 햇빛 한 점
파아란 하늘에 무지개 한 조각
들으며 쓴 노래
눈을 뜨면 눈두덩을 따뜻히 비추던 햇빛이 흐린 정신을 톡 쏘는 아침이었다.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느릿하게 눈을 꿈벅이던 이는 두어번 뒤척이며 그 따스한 빛을 즐기더니 이내 눈을 부비며 일어나 앉는다. 익숙히 이어지는 머리를 정리하는 손길, 그리고 다가온 이에게 폭닥 안기면 느껴지는 포근함. 부드럽고 익숙한 살결의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는 마치 종소리를 들은 강아지마냥 헤 웃으며 단단한 배 위로 잔뜩 뺨을 부비고 만다. 그리곤 좋은 아침ㅡ, 하고 채 다 뜨지 못한 눈으로 굿모닝 인사를 하는 것이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침은 무슨. 얼른 일어나서 점심 먹어.”
“엘리가 안아주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헤헤.”
엘리, 그러니까 엘리엇은 갓 눈을 뜬 연인의 이마통을 콩, 내려친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도 이놈의 지긋지긋한 애칭은 사라지질 않으니까. 그런건 자기같은 사람에게 붙이기엔 너무 귀여운 이름이라며 -애초에 다 큰 성인 남성이 불리기에는 이상하지 않은가- 한없이 고사했으나, 자신을 귀여워 마지않는 이 사람은 애칭을 고치겠다 약속해놓곤 단 한 번도 지킨 적이 없다.
“아파아파. 엘리, 엘리~ 얼마나 귀여운 이름인데~”
“그건 됐고 마리네 씨, 애써 뜬 무지개가 사라지기 전에 일어나지 그래.”
“뭐어? 무지개?”
우당탕탕!
또 애칭을 불러주지 않았다며 잔소리에 잔소리를 이을 것 같았던 표정은 어디가고, 무지개가 떴다는 말에 이 작은 소년은 쌩하니 나가고 없다. 디 엘리엇은 이럴 때만큼은 층고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자신을 칭찬하게 된다. 마리네가 좋아하는 하늘, 무지개, 아름다운 구름과 새들… 이곳에서는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탓이다. 서로의 은밀한 취향을 타인에게 들킬 일도 그다지 없고. 하늘을 날아오거나 굳이 헬기를 띄워 오지 않는 이상 어떻게 자신들을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잠시 협탁 위에 놓아두었던 커피잔을 들고 느긋하게 연인의 뒤를 좇는다. 성급히 굴지 않아도 그는 넓은 테라스에 나가있을 것이 뻔했으니까.
“마리, 좋아?”
“당연하지! 묘하게 젖은 냄새가 난다 했더니 새벽에, 아니 아침에 비가 왔었구나!”
“새벽에도 아침에도 비가 왔어. 네가 일찍 잠들었던 것 뿐이지.”
“그래? 그래도 무지개가 지기 전에 일어나서 다행이야! 오늘은 행운의 날이네!”
“뭐, 그런 거겠지.”
엘리엇의 시큰둥한 답변에도 마리네는 방방 뛰며 기뻐했다. 이곳은 비가 자주 내리는 곳도 아니거니와 무지개가 뜨는 일은 더 잘 없으니 행복한 모양이었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돈 그는 거실 한 켠에 놓아둔 사진기를 들고 와 몇 번이나 셔터를 누르더니,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엇에게 안겨온다. 그래, 네가 좋으면 됐지. 엘리엇은 제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온 짙은 청회색 머리칼에 시선을 고정한다. 사람의 머리칼보단 고양이의 털같은 질감. 그는 마리네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금세 엉망으로 흐트러트린다.
“아 뭐야, 엘리~ 다시 예쁘게 해줘~”
“싫은데. 바보 고양이같아서 웃기잖아.”
“뭐? 진짜 바보 고양이가 뭔지 보여줘?”
삐죽대는 입모양을 하던 소년이 잽싸게 엘리엇을 밀어넘어트리더니, 어느새 그 위에 올라탄 것은 거대하고 날렵한 모양새의 표범이다. 인간의 방식대로 씨익 웃고있는 그것은 앞발로 상대의 명치를 가볍게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그 무게에 가볍게 기침하던 엘리엇은 되려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어보였다. 이 모습이 보고 싶었지. 환하게 열린 커튼 사이로 비친 햇빛에 어두운 남빛의 털이 옅은 푸른색으로 반짝였다. 그가 슬쩍 손을 들어 제 손등에 입 맞추자면, 털에 녹아든 듯한 푸른 눈의 표범이 고개를 숙여 손바닥에 제 콧등을 댄다. 그러면 엘리엇은 그제야 팔을 뻗어 부드러운 머리통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이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들에게는 그저 일상인.
“엘리엇은 참 솔직하지 못해. 바보같으니.”
“마리는, …쿨럭. 무겁다. 너무 솔직해서 탈이야.”
“탈이라니. 좋아하면서.”
한참 엘리엇의 손길을 느끼던 그는 휙 옆으로 몸을 기울여 눕는다. 거대한 몸이 무너지니 큰 소리가 날 법도 한데, 어느새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마리네가 저 알아서 엘리엇의 품에 꼬물꼬물 기어든다.
“엘리, 엘리한테 햇빛 냄새 나.”
“너 일어나기 전에 베란다에서 책 봤거든.”
“커피 냄새도…”
“커피는 아직 덜 마셨어.”
그렇구나, 속삭이던 마리네의 주변에서 옅은 흰색의 안개가 둘을 휩싼다. 금이 간 것 같다고 느꼈던 갈비뼈가 느릿하게 붙는다. 숨을 쉬는 것도 보다 편해진다. 병 주고 약 주고… 작게 한숨쉬던 엘리엇은 결국 웃고만다. 마리네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지만 그도 곧 히죽 웃는다. 햇빛 한 점, 무지개 한 조각. 고작 이런 것들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할 따름이었다. 너와 같이 있으면 뭐든 그랬다. 뭐든. 모든 것이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 하루가 돼.
기껏 정성스레 만들어둔 토스트가 식탁 위에서 식어가는 것도 잊은 채, 둘은 눈을 감는다. 이대로 짧은 낮잠을 자도 괜찮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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