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3부 27

북부: 시작의 땅(1)

“드디어, 도착했다!”

제망의 수도, 시작의 땅에 입성한 기사와 인부들은 이전과 다를 것 없는 폐허에 그닥 감흥이 없었지만, 시도폰과 니옌의 표정은 달랐다. 시작의 땅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표기된 지도나 안내판 따위 없이도 시도폰은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이건…,”

니옌을 비롯한 일행은 돌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문양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코가 시도폰에게 대체 이걸 어떻게 찾아냈느냐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시원찮았다.

“나도 모르겠네. 그냥 이곳으로 가면 나올 것 같아서 와본 건데.”

“신께서 인도해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솔라가 중얼거렸다. 그것 외에는 딱히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으니,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시도폰은 기사들에게 이 근방에 묵을 장소를 마련해두라고 명령한 뒤, 거대한 문양으로 다시 돌아왔다.

9개의 동심원 사이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여태 제망의 땅을 지나면서 본 적이 없는 문자였으니, 제망이 세워지기 이전에 있었던 나라의 문자였으리라.

‘이걸 해독할 수 있으려나.’

“단장님, 니옌 자매님께서 오셨습니다.”

시도폰이 바닥에서 시선을 떼 고개를 들자,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니옌과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평소와는 다르게 들뜬 솔라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왔군. 니옌 자매, 이 문자를 알고 있나?”

“다행히 알고 있는 문자입니다. 하지만 동심원에 새겨져 있으니 문장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해독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솔라가 니옌에게 물었다.

“이 문자는 언제, 어느 나라에서 사용된 것인가요?”

니옌은 잠깐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감았다.

“과거에 브리오소와 제망이 한 나라였을 때가 있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두 지방이 통합되었던 때였죠. 당시의 사람들이 이제 인간들이 화합의 시대를 누리게 될 거라고 환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초대 집행자 요한께서 그 문자를 사용하셨다는 건….”

“네, 그때 처음으로 악마들이 등장했습니다. 인간들이 그런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나타났으니 사람들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고 합니다.”

시도폰은 옛 기억을 더듬어서 한 마디 얹었다.

“다행히 악마들이 등장하고 얼마 안 되어서 요한께서 신의 계시를 받아 그들을 제압하기 시작했고, 그분을 따르는 기사들도 많았다고 배웠네. 그런데 시작의 땅에 인간형 악마들을 봉인한 후, 요한께서 하늘로 솟은 것처럼 사라지셨고….”

어느새 동심원의 중심에 도착한 세 사람은 그곳에 자란 거대한 나무를 보고 말문을 잃었다.

초대 집행자 요한이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창으로 변용하여 사용했으며 그가 사라진 이후에 나뭇가지만 그곳에 덩그러니 남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나무는 그 나뭇가지가 자라난 것이 틀림없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시도폰이 말했다.

“자네들, 이 나무가 원래 여기 있었던가?”

“아까까진 없었습니다. 동심원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솔라의 대답에 니옌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을 둘러본 니옌이 손을 흔들어 인부 한 명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자네, 여기 뭐가 보이나?”

시도폰의 질문에 인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거기에 뭐가 있냐고 되물은 플뢰르는 시도폰이 장난이라고 이야기하자 희귀한 식물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며 성을 내고 돌아갔다.

그가 얼마나 식물을 좋아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기에, 세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무를 바라보았다.

“신성력이 있는 이에게만 보이는 나무라면, 그 난리에도 왜 멀쩡하게 잘 자란 건지 이해가 되는군요. 아마 플뢰르 씨보단 프라이에님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솔라가 그렇게 말하며 시도폰에게 프라이에를 불러올까 물었지만, 시도폰은 고개를 저었다.

“나무는 섣불리 건드리지 않도록 말해두게. 잘못 만졌다가 봉인이 풀리거나 잘못될 수도 있으니. 니옌 자매, 해독을 부탁하네, 인력이 더 필요하면 말하고.”

아까부터 부지런히 종이에 문자를 옮기고 있던 니옌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시도폰은 솔라를 데리고 일행에게 돌아갔다.

“루카! 프라이에는 어디 있나?”

“프라이에님은 이디스님이랑 주변 정리하러 가셨어요. 시작의 땅이라고 해도 악마한테 점령당한 곳이니 안심할 수 없다고 나가셨어요.”

루카가 가리킨 방향을 보고 시도폰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린 저쪽으로 가지. 니옌 자매가 해석을 다 하기 전까진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으니까.”

 


그날 저녁, 니옌은 동심원을 따라 기록한 문자를 큰 종이에 옮겨적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 뒤에서 함께 종이를 바라보던 시도폰은 니옌에게 문장의 시작점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걸 찾기만 하면 해석엔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고대 문자라고 해도 각 문자에 대응하는 현대의 문자가 있으니까요. 물론 몇몇은 현대에 유실된 문자인 것 같지만… 다른 문자로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크니까 며칠만 좀 고생하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상형 문자가 아니라서 다행이군요.”

아무리 살펴봐도 고대 문자를 모르는 시도폰이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시도폰은 니옌에게 시간은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 정확하게만 해석해달라고 부탁하며 떠났다.

그는 자신의 막사로 돌아가 곧장 남부로 보낼 편지를 썼다. 당연히 요한께서 악마를 봉인하셨던 시작의 땅을 드디어 수복했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였다.

‘악마의 기운이 흘러나오진 않으니 봉인은 여전히 잘 유지가 되는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으니 니옌이 문장을 다 해석하기 전까지는 이건 비밀로 해둬야지.’

시도폰은 동심원의 중심에서 보았던 나무를 떠올렸다. 가장 커다란 동심원까지 가지를 뻗어낸 나무는 그 종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고, 나무의 몸통은 사람 두 명이 양팔을 뻗어서 안아야 할 정도로 두꺼웠다.

‘사실 그 정도의 가지를 버티려면 더 두꺼워야 하지 않나 싶긴 하지만. 그랬으면 니옌 자매가 해석해야 할 문장도 몇 배로 늘어났겠지.’

니옌이 그 문자들을 다 해석해서 시도폰에게 들고 온 것은 6월 말이었다. 거의 2주가 걸린 작업이었고, 그동안 기사들은 시작의 땅에 몰려든 악마들을 퇴치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시도폰은 니옌이 들고 온 해석본을 받아들었다.

[아홉의 제단을 쌓아 감히 신께 도전하려던 교만을 뉘우치지 않은 까닭으로, 사악한 이들의 우두머리들을 잡아 이곳에 가두었노라. 받은 임무를 다 하였으니 이 창을 자물쇠로 삼고 열쇠가 될 육신은 위대하신 분께 바치노라. 이것들은 영영 빛을 보지 못하리.]

찬찬히 문장을 마음속으로 읽어내려간 시도폰은 다 읽고 나서 니옌에게 물었다.

“콘피테오르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조금 다른 것 같군.”

“맞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장이 후대에 발전해서 콘피테오르가 된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초대 집행자였던 요한께서 하시는 말씀은 딱히 콘피테오르 같은 형식을 갖추지 않아도 그 말씀 자체에 신성력이 실려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기사들은 그분만 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테니 이런 형식이 발전하게 된 것이겠지요.”

시도폰이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니옌이 두 번째 구절을 짚으며 말했다.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 그 나무는 요한께서 창으로 쓰셨던 그 나무가 맞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이곳이 시작의 땅인 걸 나타내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봉인이 유지되도록 하기도 했군요.”

“자네가 문자를 해석하는 동안에도 봉인엔 아무 문제가 없었네. 악마들이 그곳을 여전히 뚫고 나오진 못한 모양이야.”

“다행입니다.”

니옌이 안도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시도폰은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혹시 지루하셨나요?”

“아니, 아닐세. 요새 조금 피곤해서.”

시도폰의 체력은 기사단 중 제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기겁하는 니옌에게 시도폰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몸을 앞뒤로 젖혔다.

“잠을 못 잔 건 아니네. 그런데 우리가 시작의 땅을 도착하고 나서부터 악마들의 공격이 평소보다 거세진 느낌이야. 착각이었으면 좋겠지만, 평소보다 부상병도 늘어났고 전투 시간도 길어졌어.”

“저희가 시작의 땅을 수복한 게 특히 마음에 안 들었나 보군요….”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시기가 그렇다 보니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지금은 당장 요새를 쌓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지만, 공격이 뜸해지는 시기가 올 테니 그때부터 작업에 착수해야 겠지.”

“문자 해석이 끝났으니 저도 미력하지만 돕겠습니다.”

“고맙네. 그럼, 가보지.”

두 사람이 막사를 나오자 루카가 바로 시도폰에게 일이 생겼노라 보고했다.

“무슨 일인가?”

“이디스님의 부상이 심각합니다. 아까 있었던 교전에서 공격당했는데 당시에는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느라고 본인의 상처는 대충 지혈만 하고 돌아다녔답니다. 아까 막 교전이 끝나고 나서 쓰러지려던 것을 주변 기사들이 부축해서 눕혀놨습니다.”

루카가 시도폰과 니옌을 데리고 급히 가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다른 치유 사제들은 어떻게 되었나?”

“그쪽들도 상처를 입어서 당장은 회복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비교적 상태가 좋은 사제들이 이디스님을 치료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전투가 끝난 직후다 보니 그들에게도 신성력이 많이 남지 않아 치료가 더딘 상황이에요.”

시도폰은 이디스가 어디에 있냐고 굳이 묻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향했고, 인파를 헤쳐서 그 중심에 도착했다.

이디스는 이미 피를 많이 흘린 듯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누워있었다. 그 옆엔 다른 치유 사제들과 함께 신성력을 쏟아붓고 있는 프라이에가 있었다. 그는 제 이마를 타고 흐르는 피를 닦지도 않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니옌 자매, 프라이에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한 시도폰이 급하게 사람들을 물리고 소매를 걷어 올려 이디스의 환부에 손을 댔다. 니옌은 시도폰의 명령대로 프라이에를 뒤로 당겨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었고, 뒤늦게 도착한 솔라가 치료를 거들려다가 시도폰을 발견하고 멈춰섰다.

‘제가 지금 가르쳐 드릴 건 신성력으로 손실된 혈액을 보충하는 법입니다. 본래라면 집행자께선 이런 것까지 배우지 않으셔도 될 텐데요.’

‘아뇨.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는 모르니까요. 대비해둘 수 있는 건 다 해두려고 합니다.’

시도폰은 슈바헨에게 치유술을 배워와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섬세하게 힘을 쏟아부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디스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고, 호흡도 안정적으로 돌아왔다.

뻗었던 손을 거둔 시도폰이 이디스를 막사 안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소매로 대충 피를 닦아낸 프라이에가 시도폰에게 물었다.

“이디스는 괜찮아졌습니까?”

“내상까지 회복은 된 것 같네. 그런데 치료를 견디는 동안 기력이 떨어졌으니 보충할 시간이 필요할 걸세. 어쩌다가 이디스까지 다치게 된 건지 알고 있나?”

“면목 없습니다.”

“질책하려는 건 아니네. 원인을 알아야 대처할 수 있지 않겠나. 여태까지 이디스가 이렇게 심하게 다친 적은 없었으니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프라이에는 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는 곤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희는 평소와 비슷하게 전투에 임했습니다. 날씨가 특별히 나빴던 것도 아니었고 말들의 상태가 이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전투가 버겁다고 느껴졌는데…, 근거 없는 추측이긴 합니다만, 악마들이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그것 외에는 예상되는 원인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구나.’

“잠깐 들어가서 이야기 좀 하지. 루카, 두코를 불러와 주겠나?”

“넵.”

본래라면 본부에 있어야 할 두코는 가끔 전선을 살핀다는 핑계로 막사를 방문하곤 했다. 시도폰은 그런 그를 거절하지 않고 마음껏 일을 맡겼고, 그러면 두코는 툴툴거리면서도 본부로 돌아가지 않았다.

뒤늦게 막사에 도착한 두코는 핏자국이 얼룩덜룩하게 묻은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프라이에는 어쩌다 이렇게 많이 다쳤냐고 기겁했지만, 두코는 고개를 저었다.

“내 피가 아니야. 전투 중에 악마들이 치유 사제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더라고. 그래서 부상을 치료할 인력이 부족해서 나까지 동원됐지. 그러는 너는? 머리를 다친 거 아냐?”

“아, 이건 괜찮아. 치료했어.”

어색하게 웃으며 프라이에는 두코의 시선을 피했다. 시도폰은 작게 기침해 두 사람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나와 프라이에는 단순히 악마들이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치유 사제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니 이건 신기한 일이군. 어떻게 알았나? 크로마는 괜찮고?”

“우선 간단한 것부터 답변드리겠습니다. 크로마는 무사합니다. 지금은 저를 대신해서 기사들을 통솔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전의 질문은… 저희가 보통 전투 대형을 설 때, 치유 사제들은 후방에 서지 않습니까? 이번 전투 대형은 원형이라 그들은 원의 내부에 있었습니다.”

두코는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여태까지 전투에서 악마들은 자기들에게 무기를 휘두르는 기사를 일차적으로 공격했지만, 이번 놈들은 달랐습니다. 계속 안으로 파고들려고 하더군요. 기사들의 공격은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길래 처음엔 발광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기사들이 회복되는 속도가 느리길래 유심히 봤더니 치유 사제들의 부상 정도가 심했습니다. 그래서 알았죠.”

“이디스가 다친 것과도 연관이 있는 이야기 같군.”

시도폰의 말에 두코가 깜짝 놀라 물었다.

“이디스가 다쳤다고요? 지금은 좀 어떻습니까?”

“괜찮네. 내가 직접 회복시켰어.”

“단장께서 직접 하셨다는 건 그쪽 치유 사제들 상태도 말이 아니라는 거군요.”

시도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니옌이 동심원에 적혀있던 문자를 해독했다며 뜻을 알려주었고, 프라이에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었지만, 두코의 반응은 그에 비하면 시큰둥했다. 시도폰이 그 이유를 묻기도 전에 두코가 말했다.

“나무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것 외에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없다면 여태 여기까지 오면서 들인 노력에 비해 성과가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그렇네. 동심원의 문자가 훼손된 흔적도 없어서 악마들이 그곳을 탈출했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었지.”

프라이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여태 인간형 악마들이 계약자를 통해 세상으로 나온 적은 몇 번 있지 않았습니까? 캐서린도 그렇게 나왔을 텐데, 악마들이 그곳을 탈출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건 이상한 일인 것 같습니다만.”

그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자리에서 일어섰고, 앉아있던 두 사람에게 당장 나무로 가보자고 이야기했다. 시도폰은 솔라에게 가서 크로마를 도와주라고 부탁하고 막사를 나왔다. 바깥은 아까보다 상황이 나았기에 세 사람은 곧장 나무로 향했다.

 

“여태까지 가본 적이 없었던 건가?”

시도폰의 질문에 프라이에는 아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계속 전투가 있어서.”

빠른 걸음으로 나무가 있는 동심원의 중심에 도착한 프라이에는 나무의 뿌리부터 몸통까지 꼼꼼히 살폈다. 그러다 그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앗’하고 소리쳤고, 뒤에서 지켜보던 두 사람이 다가오자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여기, 보이시나요? 이렇게 갈라진 틈에 곰팡이처럼 뭔가 있지 않습니까?”

프라이에는 가뭄이 든 땅처럼 쩍쩍 갈라진 나무의 외피를 가리켰다. 그곳엔 진갈색이라 나무와 잘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확실히 곰팡이처럼 생긴 무언가가 있었다.

시도폰은 그것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지 않냐고 물었다. 눈을 가늘게 뜬 두코도 그에 동의하며 그것이 연기처럼 일렁거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연이어 서너 개를 더 발견한 프라이에가 시도폰에게 물었다.

“여태 인간형 악마가 몇이나 나왔는지 알고 계십니까?”

“니옌에게 들었는데 역사에 기록된 건 6건이라고 하네.”

곰팡이 같은 자국은 정확히 6개였다. 캐서린의 사례는 아직 기록이 되지 않았으니 만약 캐서린이 인간형 악마였다면 자국은 7개 이상이어야 했다. 당황한 시도폰이 더 없냐고 물었지만, 두 사람은 뿌리까지 다시 살펴보아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캐서린이 인간형 악마가 아니었다면 그건 대체 정체가 뭐였던 거야.”

시도폰은 인상을 쓰며 이마를 짚었다. 망설이던 두코가 그 곰팡이 같은 자국에 손을 대자마자 바람이 일어났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손을 뗐고 바람은 금방 가라앉았다.

“이 자국이 악마와 관련 없이 단순히 나무에 생긴 병일까 봐 손대 본 건데, 확실히 그건 아닌 것 같군요. 미약하지만 악한 기운이 확실히 느껴집니다.”

두코의 손이 멀쩡한 걸 확인한 시도폰이 말했다.

“신성력이 있는 이들에게만 보이는 나무니 다른 악마들이 와서 훼손했을 리도 없네. 그럼 이 자국은 억지로 인간형 악마들이 계약을 통해 나간 걸 상징하는 게 맞다는 건데.”

당초 목적과 반대로 캐서린의 정체가 더 모호해지는 바람에 세 사람은 침묵에 잠겼다. 침울한 정적을 깬 사람은 프라이에였다.

“일단 그건 좀 있다가 생각하시고, 봉인을 보수할 방법을 찾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문자들이야 훼손된 곳 없이 멀쩡해 보이니 괜찮다지만, 이 나무는 상처를 많이 입은 것 같아서요.”

“확실히, 이대로 두면 갈라질지도 모르겠군.”

돌에 한 자 한 자 새겨진 글자들은 팬 곳 없이 멀쩡했지만, 프라이에의 말대로 나무는 조금 불안해 보였다. 나무를 빤히 바라보던 시도폰은 손을 뻗어 조심스레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치유술 쓸 때랑 비슷하게 하면 되려나.’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자국에 남아있던 악한 기운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신성력이 부족했나 싶었던 시도폰이 더 많은 힘을 쏟아부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두코는 이미 늦은 게 아니냐고 말하며 제 볼에 남은 작은 흉을 가리켰다.

“악마들이 이곳을 뚫고 나간 지는 꽤 오래되었을 겁니다. 이미 흉이 진 상처는 신성력을 쏟아도 사라지진 않으니 이것도 그런 것이겠죠.”

“보강할 방법도 없다니 그럼 어떻게 해야….”

프라이에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무를 새로 심어야 하나?”

무심코 시도폰이 중얼거린 말에 두코가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덥석 동의하고 나섰다. 프라이에는 말이 되냐고 반박하려다가 피데이스가 식물을 다룰 수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나중에 남부 일이 끝나면 피데이스를 불러오는 건 어떻겠습니까? 나무를 심어야 하는지 집행자의 무기를 꽂으면 되는지 정확하겐 알 수 없으니 둘 다 해보는 거죠.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기존에 있던 이 나무를 뽑아야 하니 위험이 크겠습니다. 일단 당장 해볼 건 아니겠네요.”

프라이에의 제안에 나머지 두 사람은 이 일을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시도폰은 곧바로 솔라를 불러 이 일을 요약해서 이야기했고, 피데이스에게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지 물어봐달라고 말했다. 속사포로 말을 마친 그는 급하게 다시 막사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 있으셔서 그렇게 급하게 가시는 겁니까? 바쁜 일이시면 저도 돕겠습니다.”

“그것부터 처리하고 있게. 악마들이 쳐들어온 건 아닌데 순찰 나갈 인원이 부족해서 내가 직접 가려고 하네.”

솔라가 붙잡을 새도 없이 시도폰은 말 위에 올라타 쌩하고 달아났다. 솔라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시도폰은 카리타스의 편지에 답장하지 못한 지 2주나 지났다. 그런 상황에 피데이스에게만 편지를 쓰기엔 양심이 찔렸다.

‘둘 다 내가 쓰기엔 시간이 없는걸. 승전보만 보내도 내가 안전하다는 건 알릴 수 있으니까.’

단신으로 순찰하는 건 금지되어 있었으니 시도폰은 상대적으로 한가해 보이는 기사 둘을 데리고 3차 경계로 향했다. 본래 경계라고 하면 브리오소와 공국 사이의 그곳을 가리켰으나, 이후 시도폰이 경계를 확장하여 요새를 여럿 지었기에 각 위치를 구분하기 위해 그곳은 1차 경계로 불렸다.

지금 시도폰이 향하는 3차 경계는 시작의 땅을 포함해 제망 수도 권역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세 사람은 말을 타고 3차 경계의 끝에서 끝까지 살폈으나 특이한 점은 없었다. 그러던 중 호셰가 망아지를 타고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달려오자, 시도폰이 무슨 일이냐고 큰소리로 외쳐 물었다.

“정화! 정화가 필요합니다.”

“요새를 짓는 곳은 전부 정화를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새로 발생한 오염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들어온 신입 중 두 명이 거기에 살짝 닿은 것 같습니다. 몸이 새카맣게 변해서….”

시도폰은 동행하던 기사들에게 정화를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하려 했지만, 그들을 데리고 거기까지 갔다간 이미 늦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세 사람은 그대로 호셰를 따라갔고, 검게 변한 대지와 그 옆에서 새카맣게 변해 발버둥 치는 이들을 발견했다.

“자네 둘은 오염을 정화하게. 이쪽은 내가 맡지.”

“넵!”

힘차게 대답한 두 사람은 다행히 ‘정화’를 해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다.

“[더럽혀진 것들을 침식에서 건져와 마땅한 형태로 되돌리게 하소서.]”

대지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걸 확인한 시도폰은 괴로워하는 두 사람의 이마를 짚었다.

‘저곳을 밟았으면 밟자마자 죽었을 텐데, 스치기만 해서 그나마 다행이군.’

기사도 아닌 이들이 시도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틴 것도 용한 일이었다. 기사들이 대지를 정화한 후 한참 뒤에야 시도폰은 손을 뗄 수 있었다. 그가 땀을 닦으며 일어나자 기사들은 바닥에 누워있던 이들을 하나씩 등에 업었다.

그들을 말에 싣고, 한 기사가 시도폰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시도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 올라탔다. 사실은 신성력을 오래 사용하느라 두통이 약간 있었지만, 그는 티 내지 않고 무사히 막사까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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