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3부 28화

북부: 시작의 땅(2)

이후 몇 주 동안 악마의 공격이 평소보다 거세게 몰아쳤다. 두코는 이런 상태의 기사단을 두고 본부로 돌아가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본부를 오래 비워둘 수도 없었으니 그는 크로마를 두고 홀로 돌아갔다.

치유 사제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바빴고, 그만큼 많이 다쳐서 돌아왔다. 시도폰은 전투와 치유 모두에 능숙한 데다 신성력도 남들보다 많았으니 여기저기 동원되었고, 매일 지쳐서 잠들기 일쑤였다.

어느 날 시도폰은 건조한 눈을 비비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며 잠시 엎드려 잠을 청했지만, 고민이 있어 편히 잠들 수 없었다.

‘대체 왜 갑자기 악마들이 강해지고 똑똑해지기까지 한 걸까? 시작의 땅엔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어째서?’

물론 회의를 여러 번 했지만, 가설만 난무할 뿐 명확한 원인은 아무도 알아낼 수 없었다. 누군가가 악마와 계약해서 그들을 조종하고 있으니 더 강해진 것이리라고 추측하긴 했지만, 이곳에 기사단과 인부 외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 의견은 기각되었다.

‘여기가 1차나 2차 경계 근처였다면 몰래 들어온 누군가가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악마들은 계속해서 3차 경계 너머에서만 쏟아지고 있는걸. 거기까지 넘어가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인간이 있을 리가 없지.’

원인을 알 수 없다면 그걸 계속 붙들고 있는 것보단 대책을 세우는 게 나았다. 시도폰은 두코에게 연락해 본부에 남는 일손이 있는지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쉽게도 ‘크로마를 포함해서, 이미 쓸 만한 놈들은 다 올려보냈습니다. 지금 있는 녀석들까지 올려보내면 여긴 유지가 안 될 겁니다.’였다.

“정 그러면 남부에도 연락을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처리된 서류를 가지러 온 크로마는 엎어져 있는 시도폰을 보고 놀랐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솔라에게 시도폰이 왜 저러는지 물었고 솔라는 요새 일이 많아서 잠을 잘 못 주무셔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프라이에도 비슷한 상태였기에 크로마는 고민하다가 시도폰에게 저렇게 제안했다.

“피데이스님의 일 때문에 그렇게 부탁하기 싫은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계속 이런 식이면 다들 악마랑 전투하다가 졸아서 죽을지도 몰라요.”

시도폰이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솔라가 말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다른 방법이….”

“얼마 전에 저한테 조는 걸 들켰으면서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크로마가 솔라의 말을 자르며 따지고 들었다. 심상치 않은 크로마의 어조에 시도폰이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솔라, 눈 피하지 말고. 크로마의 말이 사실인가?”

마지못해 솔라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전혀 몰랐어. 크로마, 말해줘서 고맙네. 당장 남부로 연락을 넣어야겠어.”

솔라는 괜찮다고 재차 말렸지만, 시도폰은 자신도 피곤했다며 남부에 증원 요청을 넣었다.

‘조금 뻔뻔해 보이려나? 그래도 일하다가 죽는 것보단 낫지.’

답장은 금방 돌아왔다. 기꺼이 보내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확인한 시도폰은 그 자리에서 팔을 쭉 뻗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스무 명이나 보내줄 수 있다고 하니 다행이군. 이제 한숨 좀 돌리겠어.”

루카도 기뻐하며 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곧 여름이 오니까 상큼한 차로 바꿔봤어요. 입에 맞으실까요?”

시도폰은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들이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찻잔이 받침에 닿는 소리가 달그락하고 울렸고, 순풍이 막사의 천막을 흔들고 지나갔다.

“너무 바빠서 봄꽃은 구경도 못 했는데 벌써 여름이라니 시간도 참 빠르지.”

“그러게요. 처음 출전했던 가을이 엊그제 같은데요.”

제망의 수도까지 인간의 영역을 넓힌 기사단은 다음 목표를 아직 정하지 않았다. 3차 경계선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것과 어디까지 악마들을 몰아내야 인간들이 안저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륙 전체에서 그것들을 몰아내면 비행형 악마들 외에는 상대할 필요가 없어지니 확실히 안전해질 것이었다. 시도폰은 찻잔 손잡이를 툭툭 건드렸다.

‘하지만 그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함부로 그렇게 하자고 이야기하긴 힘들어. 1차 경계처럼 인간과 악마가 대치할 수 있는 적당한 지점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요?”

“아, 지금 있는 곳이 안정되면 그다음 목표는 뭐로 잡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네. 이건 남부에서 보낸 건가?”

“네, 답장이랑 같이 보낸 건데 포장을 뜯는 게 조금 오래 걸렸어요.”

평소 먹는 것보다 화려한 디저트가 올라오자 시도폰이 망설이다가 포크를 들었다.

‘맛있긴 한데, 이쪽이 인력을 보충해달라고 부탁한 상황에서 왜 이런 걸 보내준 거지.’

시도폰의 의심에 루카는 피데이스의 일이 미안해서 그런 게 아니겠냐고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며 시도폰은 휴식을 즐기다가 전투가 발생했다는 소식에 창을 들고 뛰쳐나갔다. 혼자 남은 루카는 식은 찻물을 버리고 시도폰이 나가면서 떨어뜨린 서류를 정리해 책상 위에 두었다.

 

“그래서 그 맛있다는 디저트는 어디 있습니까?”

전투를 끝낸 프라이에가 물었다. 남부에서 그것을 보낸 의도가 무엇일지 상의하려고 이야기를 꺼냈던 시도폰은 어이가 없어서 ‘내가 다 먹었네. 지금쯤이면 소화가 다 되었겠지.’라고 대답했다. 프라이에는 툴툴거리며 다른 사람들을 챙기러 일어섰다.

‘정말 피데이스 건 때문일까? 그걸 사과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나 싶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이유가 없어.’

하지만 지원 인력을 맞이하고 나서 시도폰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스무 명의 지원군, 그 맨 앞에 선 사람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시도폰에게 잘 부탁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시도폰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하는 수 없이 시도폰은 잘 오셨다고 말하고 마주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두코가 알면 큰일 나겠어.’

 


“아페 저하, 자원하셨습니까?”

예상과는 다르게 시도폰이 그를 반기지 않자, 아페는 바짝 긴장해 무릎을 오므렸다. 지원군을 환영한 뒤 시도폰은 아페를 자신의 막사로 데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아페가 잘 지냈냐고 물었는데, 시도폰은 그에 대답하지 않고 아페에게 방금의 질문을 던진 것이다. 아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열네 살밖에 안 되셨잖습니까. 올 수 있는 나이도 아닌데 어떻게 오신 건지…. 남부에 그렇게 인재가 없었습니까? 열여섯도 안 되는 저하를 여기까지 보내는데 아무도 반대를 안 했다고요?”

물론 시도폰이 자신을 걱정해서 그렇게 말하는 건 알았지만, 아페는 자존심이 상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페가 입을 꾹 다물고 침묵하자, 시도폰은 답답한 마음에 이마를 쓸어올렸다.

“후…. 아닙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바빠서 누구의 도움이든 필요한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전면에 나서진 마세요. 항상 제 옆에서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그, 그러면 저는 중간조에 합류하게 되는 건가요?”

머리카락을 정리한 시도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페는 금방 밝아진 얼굴로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고 막사를 나갔다. 조용히 시도폰 곁에 서 있던 솔라가 말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하는 제가 전담할 테니, 본래 하던 일에 집중하시면 됩니다.”

“고맙네. 자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런데 아페 저하를 담당하면서 내 전투 보조까진 힘들지 않겠나?”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솔라의 표정이 무덤덤해 보였기에 시도폰도 별다른 걱정을 얹지 않았다. 이후 아페가 참전한 전투에서 정말로 솔라는 두 역할을 다 해냈고 부상자도 눈에 띄게 줄었다.

‘솔라야 평소에도 잘 했으니 크게 놀랍진 않아, 오히려 아페 저하가 더 신기하지….’

호수에 돌을 던졌을 때 수면이 일렁이는 것처럼, 아페의 신성력이 사람들 사이를 흐르며 부상을 치유했다. 분명 지상에 발을 딛고 있는데도 물속에 들어간 듯한 감각이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시도폰은 악마의 머리통을 박살 내고 남아있는 악마들의 수를 눈대중으로 가늠해보았다.

‘이정도면 금방 끝나겠어. 확실히 지원군이 오니 전투는 빨리 끝나네.’

지칠 법도 한데 아페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치유하고 있었다. 경력이 풍부한 다른 치유 사제들과 다르게 조금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제 할 일을 하는 모습에 시도폰도 걱정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전투에 집중했다.

 

"감사했습니다. 첫 전투였는데 제 예상보다 훨씬 잘해주셨습니다. 오시기 전에 혹시 훈련을 따로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전투가 끝나 대지까지 정화한 뒤, 시도폰이 아페에게 다가가 물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아페는 잠깐 시선을 피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떻게 훈련했는지 묻는 시도폰의 말에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시도폰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훈련이 고되셨나 봅니다. 저하께서 받은 훈련을 저희 쪽 치유 사제들도 받을 수 있으면 부상자가 줄어들 것 같아서 여쭤봤습니다. 정말 알려주실 수 없는 겁니까?"

"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아페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단 그의 말문이 트이자, 시도폰은 눈을 반짝이며 아페에게 말했다.

"그럴 리가요. 그리고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훈련을 해보고 나서야 알 수 있는 법입니다."

"저 그럼 조금만 더 가까이 와주실 수 있나요?"

"기꺼이요."

시도폰은 아페의 옆자리에 바짝 붙어 앉아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아페는 이렇게까지 가까이 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지 얼굴을 붉혔지만, 금방 침착함을 되찾았기에 시도폰은 그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성녀님께서 도와주셨어요."

"예? 어떻게 말입니까?"

"성녀님의 하얀 나무를 기억하시겠죠. 그 나무가 땅에서 끊임없이 솟아나서 저를 공격했습니다. 저는 그걸 다 피하면서 성녀께서 던지는 공에 정확하게 신성력을 맞추는 훈련을 했어요. 남부에서 출정하기 전날까지 계속됐죠."

그런 훈련을 견딘 아페도, 신성력을 운용하며 물체를 따로 움직인 카리타스도, 둘 다 과연 범인은 아니었다. 시도폰은 알려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면서도 이걸 치유 사제들에게 그대로 적용하긴 힘들겠다고 속으로 혀를 찼다.

저 멀리서는 솔라가 만들어낸 낙뢰가 악마들을 불태우고 있었다.

 


"정리가 다 되었습니다. 부상자는 전부 회복했고 지정 반경 내 악마들의 움직임도 1시간 동안 관측되지 않았습니다."

솔라의 보고에 시도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솔라에게 수고했다고 철수를 준비하라고 말하며 아페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말씀드린 게 정말로 도움이 될까요?"

"네. 하지만 저희 쪽엔 성녀님처럼 온건한 형태의 신성력을 가진 사람이 없어서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저와 부단장만 하더라도 각각 불과 바람이라 형태 자체를 갖추기도 힘들고… 이디스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훈련이 필요한 사람이 이디스라 고민을 좀 더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온건하다고?'

시도폰의 말에 아페는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말해봤자 의미가 없을 것을 알았기에 말하지 않았다.

'그 나무들은 나를 당장이라도 찔러죽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런 건 말해봤자 믿지 않으시겠지.'

아니, 시도폰뿐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 말하더라도 그런 건 믿지 않을 것이다. 아페가 말을 삼키고 그저 웃자, 시도폰도 마주 웃어 보였다. 그는 사제들을 통솔해 본진으로 돌아가면서 프라이에에게 언제 두코와 교대하냐고 물었다.

"내년 북부 수행단을 제가 맡아야 할 테니 아마 12월 초쯤에 교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심심하다고 난리를 치더군요."

"심심하다라… 오면 생각이 달라질 텐데."

시도폰이 눈은 그대로 둔 채 입꼬리만 올리자, 프라이에는 무섭다고 손을 내저었다.

"농담일세. 아, 아까 아페 저하와 이야기하면서 치유 사제들이 할 만한 훈련법을 들었네. 나중에 이야기 좀 하지."

"네, 이디스도 동석하라고 말해두겠습니다."

척하면 척이었다. 하지만 늦은 밤, 그는 시도폰에게 훈련 방법을 듣고는 '이건 그냥 기사 훈련이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옆의 이디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기사들은 악마의 공격을 정면으로 맞서서 싸우는 훈련을 하지, 이렇게 피하는 걸 훈련하진 않지 않나. 요즘 악마들은 기사를 지나쳐서 치유 사제를 직접 공격하려고 드니까 이 사람들도 피하는 걸 훈련해야지."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것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누구에게 훈련을 부탁하실 생각입니까?"

"그게 고민이네. 마땅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

솔라는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지만, 낙뢰는 아무래도 악마의 공격과는 한참 거리가 멀어서 기각되었다. 크로마의 화살은 치유 사제들이 피하기에는 너무 빨랐고, 프라이에는 딱히 속성이라고 할 게 없었다. 다시 솔라가 손을 들었다.

"단장께서 옛날에 제게 해주셨던 훈련은 어떻습니까?"

"내가 자네한테 해줬던 거라고 하면, 불덩어리를 던져줬던 그걸 말하는 건가? 확실히 그거라면 속도도 내가 조절할 수 있으니 꽤 괜찮은 훈련이 되겠어. 요새는 그렇게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아서 생각이 나지 않았네."

시도폰이 직접 훈련을 주관하겠다는 말에 이디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시도폰의 일이 늘어나는 것 같아 죄송하다는 말로 어떻게든 그를 말려보려고 했지만, 시도폰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자네들이 안전한 게 가장 중요하네. 악마들이 옷자락도 스치지 못하게 하겠어."

오랜만에 눈을 빛내며 의욕이 넘치는 모습에 프라이에는 이디스의 어깨를 도닥였다. 앞으로 꽤 고생할 테니 힘내라는 뜻이었다.

"말 나온 김에 당장 해보지. 솔라, 치유 사제들을 불러주게."

"오늘 전투가 있었으니 내일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오히려 오늘 해야 하네. 전투에 임하면서 스스로 부족한 부분들을 느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모아두겠습니다."

그날 밤, 시도폰은 치유 사제들의 운동신경이 얼마나 나쁜지 알게 되었다. 그의 옆에서 공을 던지고 있던 프라이에는, 공을 던지는 족족 맞아서 단말마를 지르는 사제들의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여태까지 전투에서 살아남은 게 기적이지 않을까? 두 사람은 말하지 않고도 서로의 생각을 읽었다.

"공을 피하는 게 아니라 신성력으로 맞춰야 하네!"

시도폰의 말에 사제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지와 몸뚱어리는 여전히 따로 놀고 있었다. 잠시 후, 사제들은 체면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는지 들판에 그대로 누워버렸고, 그들에게 줄 야식을 챙겨온 루카가 그 광경을 보고 말을 잃었다.

"다들 살아있으신 거죠."

"설마 내가 죽였으려고."

시도폰은 태연한 얼굴로 루카에게서 물을 받아 마셨다. 프라이에가 늘어진 사제들을 일으켜 세우는 동안 시도폰은 이런 식으로 훈련을 얼마나 해야 이들이 전투에서 다치지 않을지 고민해보았다.

"우선 일주일은 해봐야겠네."

그의 말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바닥에 떨어진 공을 줍던 프라이에가 매일 하냐고 묻자 시도폰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풀썩- 소리가 들리더니 사제들은 도로 바닥에 드러눕기 시작했다.

여름을 맞아 길게 자란 잔디가 그들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고, 풀벌레 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무언의 항의에도 시도폰은 굴하지 않고 일주일 동안 사제들을 꼬박꼬박 굴렸다.

“과연, 훈련이 효과가 있었어.”

일주일의 훈련이 끝난 뒤 벌어진 전투에서 부상이 확연히 줄었다. 시도폰은 뿌듯한 얼굴로 창을 휘둘렀고, 악마에게서 뿜어져 나온 검은 피는 땅에 닿기도 전에 불에 타 사라졌다.

하늘에선 크로마의 화살과 솔라의 낙뢰를 맞은 악마들이 우박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추락했고, 그들을 기다리는 건 시도폰의 푸른 불꽃이었다.

아페는 그런 광경을 보고도 전혀 겁먹지 않았고, 그의 담력에 감탄한 시도폰은 전투가 끝난 후 그를 찾아와 칭찬했다.

“그럼 저랑 정화도 해보죠. 콘피테오르는 외우고 계십니까?”

아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투가 벌어져 까맣게 변한 대지를 훑어보다가 오염된 땅이 너무 넓지 않냐고 물었다. 그에 시도폰은 그래도 안 할 순 없다고 대답하며 아페를 이끌고 여기저기를 누볐다.

“집행자께선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으신 것 같아요. 기사들이 더 많았으면 이런 일을 나눠서 했을 텐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뭐, 없는 사람을 만들어 낼 순 없으니 그런 게 아쉽진 않습니다. 이런 걸 하라고 위대하신 분께서 제게 이런 강대한 힘을 주신 것이겠죠.”

아페가 속으로 ‘나도 이분을 본받아서 열심히 해야겠어.’라고 다짐하는 건 꿈에도 모른 채, 시도폰은 정화를 끝냈다. 두 손을 옹골지게 말아쥔 아페는 시도폰에게 시작의 땅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던 시도폰은 아페의 빛나는 눈을 보고 별말 없이 그를 시작의 땅, 9개의 동심원 위로 데려갔다. 아페는 아래의 고대 문자를 내려다보며 시도폰에게 뜻을 물었다.

“…말씀 그대로 봉인식이었군요. 그런데 이 문양들 사이의 줄 말인데,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무슨 줄을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각 동심원의 둘레를 이어주는 선이 군데군데 있잖아요.”

바닥에 쪼그려 앉은 아페가 문자들 사이사이에 그어진 줄을 가리켰다. 새삼스레 그런 홈을 인지하고 나니, 동심원은 마치 거대한 미로처럼 보였다. 시도폰은 나무와 미로를 번갈아 가면서 보다가 말했다.

“마치 나무가 뻗어낸 뿌리 같기도 하군요. 줄이 어떻게 그어져 있는지 선명하게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페가 자신의 신성력을 조심스레 홈을 따라 흘려보냈다. 짙은 푸른 빛의 신성력이 나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갔다.

물줄기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가다가 마지막 원의 둘레에 닿았고, 그곳에서 합쳐져 하나의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때, 동심원에 새겨진 문자가 밝게 빛났고,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섬광에 눈을 감았다.

“이제, 괜찮습니다. 눈을 뜨셔도 될 것 같습니다.”

시도폰의 말에 아페도 조심스레 눈을 떴다. 문자는 언제 빛났냐는 듯 다시 빛을 잃었고 동심원을 미로처럼 물들였던 신성력도 사라지고 없었다. 달라진 게 있을 거라 확신한 시도폰은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시선을 올리다가 나무를 바라보았다.

‘프라이에가 말했던 자국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악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사라진 건가?’

의심스러웠던 시도폰은 직접 구멍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집행자님? 혹시 피곤하신가요?”

“아뇨. 아까 저하께서 바닥에 집중하시느라 못 보셨을 것 같은데, 여기 이 여섯 개의 구멍에선 원래 악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문자가 빛나고 나서 그 기운이 사라진 것 같군요.”

“제가 뭘 했다고 이렇게 된 걸까요? 아까 집행자께서 말씀해주신 구절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요.”

“숨겨진 뜻이 있을지도 모르죠. 아니면 다른 곳에 단서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좋은 일인 것 같으니 저희는 이만 돌아가죠.”

나무에서 손을 뗀 시도폰이 멀리서 말을 타고 달려온 프라이에에게 니옌을 자신의 막사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근처 공사장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갑작스러운 빛에 놀라서 저희를 찾았습니다. 관련된 일입니까?”

“맞네, 하지만 나쁜 일은 아닌 듯하니 심각하게 전달하지 말고.”

프라이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도폰은 아페를 데리고 막사로 돌아가 니옌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니옌은 자신이 문자를 해독하긴 했지만, 그 문장에 무언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답했다. 시도폰도 마찬가지였다. 고민하던 아페가 입을 열었다.

“문장 자체에 숨겨진 뜻은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신성력이 흘러간 그 길, 나무의 뿌리처럼 보이긴 했는데 그 모양에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니옌은 그 말에 눈을 반짝였다.

“콘피테오르가 정립되기 이전에, 신성력은 지금의 주술과 비슷한 형태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미리엄은 여전히 본부에 있나?”

시도폰이 솔라에게 물었다. 솔라는 알아보겠다고 대답하며 막사를 나섰다. 미리엄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아페는 멀뚱히 서 있다가 조심스레 프라이에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아, 저희 북부 기사단에 소속되어 계신 사제님이십니다. 주로 이단의 주술을 연구하시니까 마침 지금 상황에 딱 필요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지난번엔 미카를 잡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설명해줘서 고마워요.”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솔라가 홀로 막사로 돌아왔다.

“미리엄님은 지금 본부에 계신다고 합니다. 이쪽으로 와주십사 연락을 넣었으니 2주나 뒤에 도착하실 것 같습니다.”

북부 기사단 본부에서 1차 경계까지는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시도폰은 지금 3차 경계, 시작의 땅까지 와 있었다. 중간에 산맥도 있으니 솔라의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쁜 일이 일어난 건 아니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지.’

시도폰은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한창 더운 7월 말, 미리엄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막사로 들어왔다. 그는 북부에서 나고 자란 사람답게 더위에 약했다. 시도폰은 루카에게 시원한 물을 내오라고 말했고, 미리엄은 그걸 급하게 들이키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오래간만입니다. 단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항상 승전보가 도착하니 무사하신 건 알고 있었지만요.”

“잘 지냈지. 시원한 북부에 계속 있고 싶었을 텐데 이렇게 불러서 미안하네. 조금 쉬었다가 나가겠나?”

엄연히 말하자면 브리오소의 북부는 제망보다 낮은 곳에 있었지만, 사람들은 관습적으로 북부를 고유명사처럼 사용했다. 시도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배려에 미리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기운을 차린 미리엄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시도폰은 그를 나무로 안내했다.

두 사람을 따라온 아페는 시도폰이 눈짓하자 지난번처럼 자신의 신성력을 바닥으로 흘려보냈다. 구불구불 흐르는 신성력이 문양을 그리자 미리엄이 크게 뜬 눈으로 그 움직임을 따라갔다.

마침내 완성된 문양을 보고, 그는 품에서 종이를 꺼내 급하게 그것을 따라 그렸고, 신성력이 사라지기 직전 문양을 종이에 옮기는 것에 성공했다.

아페와 시도폰은 미리엄이 뚫어지라 쳐다보는 종이를 그의 고개 너머로 살피며 문양의 뜻을 물었다. 미리엄은 아직 정확한 뜻을 알 수는 없지만, 정화와 관련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고 대답했다.

그는 시도폰의 막사로 돌아와, 자신이 들고 온 커다란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엔 책만 가득 들어가 있어서 시도폰은 미리엄에게 책 이외의 짐은 없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아니, 아닙니다. 옷가지나 생필품 같은 건 동행인에게 맡겨두어서 그렇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책을 붙잡고 넘기면서 흐음-하고 콧소리를 여러 번 내더니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건 정화와 재생의 문양입니다. 두 문양이 겹쳐져 있어서 순간 당황했습니다. 어쩌면… 고대엔 두 문양이 원래 하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리엄은 설명을 위해 종이를 두 장 꺼내어 들었다. 그의 펜을 따라, <정화>라고 적힌 종이엔 가운데가 빈, 고리 모양의 원이 그려졌고, <재생>이라고 적힌 종이엔 가운데가 복잡한 문양으로 채워진 원이 그려졌다. 시도폰은 두 그림을 번갈아 가면서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이래서 둘이 겹쳐있다고 한 거였군. 각 원의 가장자리에 뿌리처럼 뻗친 문양 때문에 잘 안 보였는데 이렇게 원 모양만 따로 떼어 놓고 보니 보이네.”

“네, 그래서 제가 생각했을 땐, 아페 저하께서 이 문양을 발동시키셔서 나무의 악한 기운이 정화되어 사라진 데다 상처도 어느 정도 재생된 것 같습니다.”

아페가 반색하며 자신이 매일 그곳을 돌보겠다고 자처했다. 나쁠 것은 없었으나 굳이 그렇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시도폰은, 아페의 간절한 눈빛을 거절하지 못하고 허락해버렸다.

할 일을 마친 미리엄은 다시 북부로 돌아가 보겠노라 말하며 두코에게 전할 소식 같은 건 없냐고 물었다. 시도폰이 딱히 없다고 대답하니, 그는 미련 없이 말을 타고 막사를 떠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프라이에는 전투가 끝나 상황을 정리한 뒤 시도폰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막사를 찾았다.

“그런데 단장, 악마들이 약해진 것 같습니다. 사제들이 아무리 훈련을 해도 약간 버거울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마치 그들이 강해지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더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프라이에는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다. 시도폰은 확인해보겠다며 나무를 다시 살폈고, 눈에 띄게 좁아진 상흔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음 전투에 나섰던 시도폰도 프라이에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기사들에게 악마들이 도로 약해진 것 같으니 이 틈을 타서 아예 그들을 얼씬도 못 하게 하자고 독려했고, 그 결과 점차 3차 경계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완전히 여기도 안정이 되면 두코나 프라이에한테 맡기고 나도 남부를 한번 다녀와야지. 너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어.’

시도폰은 카리타스에게 받았던 편지 봉투의 제 이름을 문질러보았다. 모두가 자신을 단장, 또는 집행자로 부르는 이 시기에 유일하게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줄 사람이 보고 싶었다.

그는 솔라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솔라는 별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솔라가 그렇게 쳐다보는 것에 익숙해진 시도폰은 그저 그렇겠거니, 하고 편지가 들어있는 서랍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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