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4부 11화

암어쥑쥑

편지가 도착하기 일주일 전, 신전에 요란한 종소리가 울렸다. 비상소집 명령이었으니, 고위 사제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급히 교황의 집무실로 모였고, 카리타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육중한 문이 닫히고, 교황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노쇠한 몸에 맞지 않은 형형한 눈으로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는데, 카리타스는 그 시선이 자신에게 유독 따갑다고 느꼈다.

“격리 구역에서 악마 숭배자들이 악마를 소환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사제들은 바로 그 의미를 알아듣고 술렁였고, 카리타스는 왜 교황이 자신에게 그런 눈빛을 보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심각한 일에 대한 예언을 받지 못했는지 질책하는 눈이었다. 재차 교황이 자신을 바라보자, 카리타스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당장 카리타스에게 무어라 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으니, 교황은 기사들에게 당장 격리 구역으로 가서 악마와 그들의 계약자를 막으라고 지시했고 얼마 안 되어 세 신전에 있는 기사들이 격리 구역으로 차출되었다.

 


“그런데도 부족하다니요?”

카리타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황이 악마들의 소환을 발표한 지 3일이 되던 날이었다.

어마 무시한 소식을 전했던 당일과 다르게, 지금 교황의 집무실에는 카리타스와 교황, 메릭 이렇게 세 사람뿐이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교황은 난처한 낯으로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기사들이 모두 전투에만 투입이 되는 게 아니다 보니 인력이 부족하더군요. 제1 신전이 가장 가까워 그곳의 기사들이 가장 먼저 투입되었습니다만, 그쪽은 아무래도 왕실 출신에, 자주 훈련을 받지 않는 이들이 있었으니 크게 도움은 되지 않은 모양이더군요.”

어이가 없었던 카리타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교황은 제3 신전의 기사들도 투입이 되어야 할 것 같다고 말을 이었다. 카리타스는 교황의 시선이 제 뒤의 메릭을 향하는 걸 눈치채고 급히 말했다.

“차라리 제가 직접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계속 무작정 사람을 늘리기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나요?”

교황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 악마의 개체 수가 적고, 단순히 강하기만 했다면 저도 주저하지 않고 성녀께 도움을 요청했겠지요. 하지만, 당신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번에 소환된 악마들은 쥐 떼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나무가 빽빽하게 세워진다고 한들, 쥐들이 그사이를 빠져나가 버리면 그만이지요. 물량 공세엔 뛰어난 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여럿이 필요합니다.”

카리타스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는 제 앞의 찻잔 속 차가 식어가는 걸 보면서 교황에게 부른 이유를 물었다. 카리타스의 예상대로, 교황은 메릭마저 출정할 것을 명령했다.

“안 됩니다. 개인 호위까지 차출해야 할 정도로 사태가 나쁘다면 저도 가겠습니다. 사제들의 부상 현황을 알려주세요.”

“현재까지 사망자는 없습니다만, 또 다른 악마가 소환된다면 이후 전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악마 숭배자들을 잡아들여야 하는데, 그들이 지금 쥐 떼의 중심부에 있으니… 중심으로 파고드는 동시에 외부로 탈출하려는 쥐들을 막아야 하니 기사라면 누구나 차출되고 있는 겁니다.”

“…잠시 고민할 시간을 주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회의 직전, 쥐들이 너무 많아 그 떼에 파묻혀 실종된 기사가 나왔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선 여기 계셔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타당한 말이었지만, 카리타스는 믿기가 힘들었다. 메릭 한 명이 없다고 전장이 바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가 뭐라고 다시 반박하기도 전에 메릭이 말했다.

“가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메릭!”

“다행히 눈치가 빠르군요. 좋습니다.”

기사가 자발적으로 전장에 참가하겠다고 했으니, 카리타스는 말릴 수 없었다.

교황은 얼른 출정을 준비하라며 두 사람을 내보냈고, 닫히는 문틈으로 희미한 기침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안이 벙벙했던 카리타스는 메릭에게 무슨 생각으로 출전하겠다고 말했냐고 그를 타박했지만, 메릭은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금방 돌아올 수 있겠지요. 쥐 떼라고는 하지만, 각 신전에서 기사들이 이렇게 차출되고 있고, 사제님들도 사망자가 생기지 않게 잘 지원해주고 계시는 것 같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마무리한 메릭이었지만, 카리타스는 불안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아 자리에 앉지도 않고 방안을 서성였다.

‘예언도 없이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이런 일은 처음인데. 미들 부인도, 두코의 일도 전부 예언이 있었어. 이것보다 더 사소한 일도 가끔은 예언을 통해서 미리 알 수 있었는데…. 정말 별일이 아닌 걸까?’

메릭은 조심스레 카리타스의 손을 잡았다. 놀란 카리타스였지만, 그는 손을 빼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많이 걱정되시면 축성을 걸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물론 개인이 이렇게 요청하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으니, 불쾌하시면 안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안 해주면 괜찮다고 덧붙인 것치고는 너무 간절한 눈빛에, 카리타스는 잡히지 않은 왼손을 들어 메릭의 이마에 얹었다.

“[해와 달이 그 빛으로 우리를 지키도록 하시옵소서]. 하… 자존심 상하는 말이라고 들을 순 있겠지만, 메릭, 나서지 말고 몸을 사려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기사니까요.”

축성을 마친 카리타스가 메릭에게서 손을 떼어냈다. 하늘색 빛이 메릭을 한번 휘감고는 사라졌고, 메릭은 그 빛이 사라지는 게 아쉬운 듯 바라보다가 말했다.

“축성은 단순히 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피로가 회복되는 느낌도 드는군요. 감사합니다.”

 

‘축성을 걸어줬구나. 고마워, 이만 가볼게.’

 

올해 오순절, 예언 때문에 급하게 남부를 떠나야 했던 시도폰과 기사들에게도 카리타스는 축성을 내렸었다. 시도폰의 신성력은 카리타스의 것보다 막대했으니, 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축성의 본질적인 효과는 미미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메릭이라면 효과가 있겠지. 내가 도움이 되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걸.’

씁쓸해하는 카리타스와 다르게 메릭은 기쁘게 그의 호의를 받았다. 재차 조심해서 다녀오겠다고 이야기한 메릭이 나가고 얼마 뒤, 카리타스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성녀님. 기사단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한동안 보내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정기연락에만 맞춰서 보내려고 하나?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아냐, 정신 차려.’

시도폰을 밀어낸 것은 자신이었다. 카리타스는 평소보다 얇은 봉투를 받아, 떨리는 손으로 그 자리에서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자신의 이름, 잘 지냈냐는 안부를 묻는 문장, 그리고 간단하게 쓰인 근황을 읽고 나니 ‘시도폰으로부터’라는 끝이 다가왔다.

편지 중간중간에 묻어 있던 자잘한 잉크 방울도, 빠르게 쓰느라 기울어졌던 글씨도, 농담으로라도 보고 싶다고 말하던 문장도 없어진 편지는 아주 깔끔하고, 단정하며, 간결했다.

순간 ‘시도폰으로부터’라는 글씨가 번졌고, 카리타스는 제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내버려 둔 채 소매로 급하게 편지지를 닦았다. 하지만 이미 번진 글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발신인이 흐려진 편지만이 카리타스의 손에 남았다.

‘이게 당연한 걸 텐데, 예상 못 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입안이 쓰다고 느낀 카리타스는 편지를 다시 접어 봉투와 함께 보관함에 넣었고, 새 편지지를 꺼내려다가 한숨을 쉬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에선 메릭을 비롯한 기사들이 제1 신전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아까 외웠던 콘피테오르에 걸맞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햇빛도 달빛도 가려지지 않게, 아주 맑은 날이었다.

 


“이쯤 되면 정화가 실패했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시도폰이 채소 수프를 한 입 먹자마자 한 말에 루카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화가 완료된 대지에 꽃만 심기엔 아깝고 식량 조달도 자체적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있었기에, 올해부터는 경계에서도 농사를 짓기로 했다. 그 수확물로 만들어낸 음식을 사흘째 먹게 되었을 때 시도폰은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루카는 동의하면서도 농사 담당자였던 플뢰르의 눈치를 보았지만, 의외로 플뢰르는 시도폰의 말에 딱히 화를 내지 않았다.

되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루카는 그에게 속상하지 않냐고 물었다. 플뢰르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속상하다니요? 식물이 얼마나 섬세한데, 고작 정화한 지 몇 달밖에 안 된 땅에서 맛있는 결실을 볼 수 있을 리 없잖아요. 그러니 제가 꽃을 심자고 했었던 거였는데 말이에요.”

“플뢰르 님은 그냥 꽃을 좋아하시는 줄로 알았는데요.”

“물론 그것도 맞아요. 들켰네요.”

“…히아신스는 이제 질렸어, 다른 거로 하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아기 구근이 듣겠어요!”

시도폰이 헛소리하지 말라며 툴툴거렸고, 플뢰르는 헛소리가 아니라고 우겨댔다. 두 사람 사이에 낀 루카가 그들을 중재할 때, 솔라는 끼어들지 않고 얌전히 밥을 먹었다.

투덜거리면서도 시도폰은 수프를 다 비웠고, 깨끗한 그릇을 앞에 둔 채 남부에서 사 온 건조 고기를 씹었다. 이것도 마지막이라며 슬픈 표정으로 느릿하게 고기를 녹여 먹던 시도폰에게 누군가 찾아왔다.

그는 깨끗하게 빈 그릇을 보더니 기쁜 표정으로 식사는 잘 마쳤냐고 물었다. 시도폰이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루카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주방장님이 직접 오셨네요! 덕분에 매번 맛있는 요리를 먹고 있어요, 항상 감사드립니다.”

“맛있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사실… 기사님들 표정이 좋지 않길래 혹시 맛이 없었던 게 아닌가 싶어서 여쭤보려고 온 거였거든요.”

주방장은 시도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건 자네 문제가 아니라 재료 문제야. 배고파서 안 남기고 다 먹은 거였는데 다행이다….’

속으로 진심을 삼킨 시도폰은 맛있었다고 말하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신나게 식당을 나서는 주방장의 뒤에다가, 고기를 구해다 주겠다고 외쳤다.

“아마 기사들 표정이 그런 건 고기가 먹고 싶어서일 걸세, 조만간 구해다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옆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솔라가 물었다.

“어떻게 공수해오실 생각입니까?”

“…남부까진 힘들고, 1차 경계의 아르모리크 산맥까지만 가보면 어떻게든 사냥은 할 수 있겠지.”

이미 수프를 다 비우고 그들을 관전하고 있던 프라이에가 제안했다.

“단체로 사냥 대회라도 여는 건 어떻습니까? 요새는 악마가 자주 나타나지 않으니 기사들도 심심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도 괜찮겠군. 이번에 내려가서 잔뜩 잡은 다음에 당장 먹을 걸 제외하고 나머진 말려두면 되겠어.…갈 수 있겠나?”

조심스레 시도폰이 묻자 프라이에는 고개를 저었다. 남들과 함께 밥을 먹을 수도 있었고, 생활 자체에는 문제가 없어진 프라이에였지만 여전히 그는 경계를 벗어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이정도로 회복된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뭐.’

시도폰은 알겠다며 더 권하지 않고 사냥 대회 지원자를 받기로 했다.

대회 준비를 위한 회의에서 가장 먼저 논의된 것은 대회 시기였다. 적어도 수행단의 훈련이 끝나고 나서 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러려면 3월까지 기다려야 하니 너무 늦다는 반박이 이어졌다.

시도폰이 어쩌면 좋을지 고민하던 때 베론이 손을 들고 말했다.

“수행단은 저와 프라이에가 맡으면 될 것 같습니다. 수행단 상태를 보아하니 고기를 먹지 않으면 쓰러질 수도 있겠다 싶더군요.”

수행단을 데리러 시도폰이 남부로 떠나기 전, 베론이 브리오소 북부의 기사단 본부를 정리하고 경계의 새로운 본부로 자리를 옮겼다.

기존의 본부였던 곳은 훈련시설이 되어 기사 지망생을 밭는 곳이 되었지만, 기사들의 무덤이나 기념품이 보관된 건물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시도폰은 베론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자… 그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이제 출전할 사람들을 정해야 하는데, 일단 나는 총책임자이니 대회에 직접 참가하지 않을 거네. 자네들 중에 참가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

손을 든 사람은 크로마, 이디스, 솔라를 포함해 여섯 명이었다. 아페는 자신이 쓸 수 있는 무기가 없다며, 이디스의 권유에도 고개를 젓고는 손을 들지 않았다.

이들의 얼굴을 확인한 시도폰은 잠깐 멈칫하더니 솔라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건 좀 의외군.”

“당신께서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셨으니까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물어봤다는 듯 솔라가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시도폰은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다른 기사들은 익숙한 듯 두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몇 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를 가지고 내기를 하기 시작했다. 금방 시장통처럼 어수선해지는 분위기에, 시도폰이 손뼉을 쳤다.

이후 회의에서는 사냥 대회 우승자를 위한 부상을 무엇으로 할지, 치유 사제를 데려갈 것인지 말 것인지 등이 논의되었다. 한 기사가 손을 들었다.

“악마를 퇴치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가벼운 부상 정도야 저희가 알아서 치료할 수 있으니 굳이 치유 사제님들을 데리고 갈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아페가 다급히 일어서서 반박했다.

“가벼운 부상만 일어난다면 정말 다행이겠지만, 심각한 부상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가겠습니다.”

시도폰은 굳이 아페 정도나 되는 사제가 갈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며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저하, 제가 생각하기에도 저하께서 가실 정도로 대단한 부상은 없을 것 같습니다.”

“사냥은 걸어 다니면서 하지 않을 거잖아요? 낙마라도 하면 어떡하려고요! 그것 때문에 사흘이나….”

“아하하 알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시도폰이 다급하게 아페의 입을 막았다. 지난여름, 시도폰이 악마 숭배자들의 가족 때문에 낙마한 적이 있었는데, 시도폰은 그 부상 때문에 사흘을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다.

화끈해진 얼굴로 시도폰이 치유 사제의 자원을 받았고, 크로마는 평기사 중에서 자원자를 추렸다.

 


회의가 끝난 다음 날, 식사를 끝내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던 시도폰은 어째서인지 망치와 정을 든 채, 잔뜩 흥분한 얼굴의 호셰와 마주쳤다.

“들었습니다! 사냥 대회를 여신다고요.”

“그…렇네만, 자네도 참가하려고 그러나? 그 도구로 짐승들을 잠기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은데.”

“에이, 이 도구들은 제 손발과 같은 건데 어떻게 이걸로 짐승 따위를 잡겠습니까. 잠깐 이리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소화도 시킬 겸 시도폰은 그의 말에 따라 어딘가로 향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도착한 곳엔 돌 조각이 여기저기 널려있었고, 그 중심엔 꼿꼿하게 서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시도폰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 조각상을 보다가, 호셰에게 저것이 자신이냐고 물었다.

“알아봐 주시는군요! 맞습니다. 대략적인 형태는 잡아두었고, 세부 묘사를 할 차례라 이렇게 모셨습니다.”

시도폰은 아래에서부터 조각상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것의 오른손은 창을 아래로 향하게 내린 채, 왼손은 누군가의 앞을 막아서듯 적당히 몸에서 떨어진 채 뻗어있었다. 기사단 단장을 뜻하는 흑색의 망토는 왼팔에 휘감긴 채 아래로 똑 떨어졌고, 상체의 갑옷은 아직 덜 다듬어져 있음에도 그 물성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원래의 것과 비슷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완성되지 않은 것은 시도폰의 얼굴뿐인 것처럼 보였다. 넋을 놓고 시도폰이 그것을 바라보자, 호셰는 기쁘면서도 다소 민망한 듯 어떤 표정을 원하는지 물었다.

시도폰이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마음 가는 대로 하시게. 내가 봤을 땐 이미 생각해둔 게 있을 것 같거든. 그렇지 않나?”

“… 감사합니다. 그러면 잠시 제 지시를 따라주시겠습니까?”

그가 시키는 대로, 시도폰은 호셰의 표정을 따라 했다. 시도폰이 언제까지 이 표정으로 있어야 하냐고 물으려고 입을 여는 순간 호셰는 가만히 있으라고 호통을 쳤다.

물론 호셰가 정신을 차리고 바로 사과를 하긴 했지만, 시도폰은 재빨리 입을 닫고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시도폰을 찾으러 왔던 솔라는 벌서듯 조각상 옆에 서 있는 시도폰과 열심히 조각상을 두드리고 있는 호셰를 번갈아 가면서 보다가, 조각이 끝나고 나서야 시도폰에게 말을 걸었다. 시도폰은 조금 원망스러운 눈빛을 그에게 보냈다.

“도중에 말을 걸어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일세.”

“호셰가 화내는 건 저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니었고요.”

“그래, 무슨 일인가?”

듣고 보니 정말 별거 아닌 일이었다. 왕궁 근처에 어마어마한 쥐 떼가 나타나서 난리가 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었다. 시도폰은 고양이나 풀 것이지 그런 걸 뭐하러 우리에게 이야기하냐고 중얼거렸고, 솔라는 그에 맞장구를 치며 호셰가 작업한 조각상을 흘끗 보았다.

조각상의 강한 의지를 담은 눈이 정면의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까지 민둥했던 얼굴은 뒤에 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기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의 손과 몸짓 하나하나가 모두 그 뜻을 따르는 것처럼 뻗어나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는 집행자는 확실히 이런 면이 강하지. 악마로부터 자기들을 지켜주고, 구해줄 사람으로….’

솔라는 그 생각이 틀리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은 가시지 않아서, 그는 사냥 대회가 끝나고 나면 호셰에게 직접 조각을 배울까 고민하며 시도폰을 따라갔다.


* 메릭에게 축성을 걸어주는 카리타스

* 호셰가 만든 조각상은 이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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