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3부 4화

배신자의 주술

“솔라 님, 설마 아침부터 지금까지 여기 계셨던 건가요?”

해가 저물어가는 도서관에서 루카가 솔라를 발견했다. 솔라는 책들을 몇 권 쌓아두고 읽고 있었는데, 루카는 책 내용을 추측할 수도 없었다. 평소 같았다면 도서관에서 정숙 하라는 말을 들었겠지만, 지금 도서관엔 솔라와 루카 외엔 없었다.

“어제 그렇게 일을 빨리 끝내신 게 이것 때문이었나요?”

“네, 이런 책들은 진득하게 읽어야 이해가 될 것 같아서요.”

“어떤 내용인가요? 제목들이 뭔가 어려워 보여서 어떤 내용인지 추측이 잘 안 되네요.”

“뭐, 다양하게 많이 들고 오긴 했는데요. 성서 해석이나 지도자, 악마 대처법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들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이 옛날 사람들이라 그런지 지금이랑은 잘 안 맞는 것들도 있는 것 같고…, 글 자체가 어렵게 쓰인 것들도 많네요.”

확실히 책 표지나 책등엔 닳고 닳은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굳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게 생긴 외양에, 루카는 내일 업무도 잘 부탁한다고 말하곤 도서관을 나왔다.

“이젠 어엿한 부관 취급이군, 갑자기 들어와서 깜짝 놀랐네.”

한 책장에서 피데이스가 걸어 나왔다. 노을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솔라는 해를 등지고 선 그를 잠깐 보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때, 내 추천 도서들은? 네 고민은 좀 해결이 됐나?”

“그분을 어떻게 모셔야 할지에 대한 건 가닥이 잡혔습니다.”

솔라는 시도폰이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동료가 필요한 거지 그렇게 받들어 섬기는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야.’

그 말에 솔라가 얼마나 오랜 시간 고민을 했던가.

집행자들은 신성하고 위대한 힘으로 수백 년 동안 악마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왔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사람들은 암흑 속에서 고통받으며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빌었고, 신학이 무의미한 취급을 받았으며 어떠한 지도자도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런 동굴을 거쳐온 사람들이 마침내 환한 등불을 맞이했을 때, 그들의 기쁨과 벅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고 그들은 기꺼이 그 등불 앞에서 몸을 낮췄다.

이렇듯, 존재만으로 존경받아 마땅한 이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을 들으니 솔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피데이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보아도, 그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부관 시험 전까지 억지로 대답을 내놓긴 했지만, 솔라는 그게 자신의 대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폰은 거기에 만족한 것 같았지만.

“모시는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라고 하셨다면서?”

“그렇게 말씀하시긴 하셨죠.”

피데이스의 말에 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그분께서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한다는 걸 증명하는 증거일 뿐, 그분이 받들어져 마땅한 존재인 걸 부정하는 발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성스러운 분 앞에서 고개를 치켜들고 설 수 없고, 자연스레 고개 숙인 우리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려 하는 것이 그분의 성품인 것입니다.”

“평등하게 사랑한다고…. 그래, 그런 분이시라면 신전의 부패도, 왕권의 수작도 전부 부정해주시겠지.”

“그분을 이용하려고 드는 건 여전하군요. 어쩔 수 없이 협력하긴 하지만 그분께 위해가 가는 일은 어떤 수를 써서든 막을 겁니다.”

피데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게 불만스러운 시선을 보내던 솔라가 책을 들고 일어섰다. 책을 하나씩 제자리에 돌려두던 솔라는 도서관 한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4년 전, 시도폰이 집행자로 각성하던 날, 동료들을 버리고 아이들과 사제들을 위협했던 배신자였다. 솔라의 뒤에 서 있던 피데이스도 그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기사단이 조용해져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보는 사람이 적어지니 벌레가 멀쩡히 기어 다니는군.”

피데이스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고, 솔라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이런 말이 그의 주위엔 항상 돌아다녔을 테니까,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을 들어 마땅한 이니까. 그것보다 솔라는 그가 왜 도서관에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배신의 죄로 지난 4년 동안 신성력 채우는 일만 했던 그가, 무엇하러 도서관에 온다는 말인가?

“…피데이스, 죄인은 근래에 도서관에 온 적이 있었습니까?”

“아니? 애초에 하루 중 대부분을 구금되어있으니 볼 일이 없었지.”

책을 피데이스에게 던지듯 맡긴 솔라가 성큼성큼 미카에게 다가갔다. 경멸과 배신감을 4년 동안 받아온 사람이라 그런지, 미카의 얼굴과 손짓, 그 어디에서도 생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만은 그날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기에 솔라는 그가 어떤 책을 들고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미카의 허락도 없이 솔라가 마구잡이로 그의 몸을 뒤져보았으나 예상과 다르게 먼지 한 톨도 나오지 않았고, 무언가 더 찾아보려던 솔라를 내친 미카가 허둥지둥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예상치 못한 반항에 솔라는 빠르게 물러섰고 잠깐 허리를 숙였다가 일어났다.

“얼마 전 집행자께서 온정을 베풀어 기사단 내에서의 자유 시간을 늘려주시긴 하셨지만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네. 책에 그렇게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피데이스가 설렁설렁 솔라를 뒤따라와 미카가 있던 자리를 살폈다. 들고 온 게 없었던 모양인지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는데, 솔라의 손엔 종이 한 장이 들려있었다.

“그건 뭐지?”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드는 문양이 있네요.”

게슴츠레 뜬 눈으로 종이를 보던 피데이스는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콘피테오르가 사용되지 않은 주술이 적혀있는 것 같으니 미카를 추궁해봐야겠어. 솔라, 베론 부 기사단장을 불러와. 내가 미카를 데리고 부 기사단장 집무실로 갈 테니까.”

“반대로 하죠. 저는 미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솔라가 제 주위에 떠 있는 십자가들을 어디론가 보냈다. 노을빛에 십자가들이 반짝거리며 복도로 사라졌고 솔라는 그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미카가 도망쳤을 때 몰래 하나를 붙여뒀습니다. 다른 것들을 따라서 보냈으니까 금방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있을 거예요.”

“빠르네, 알겠어.”

피데이스는 베론을 찾아 도서관을 빠져나갔고, 솔라는 미카를 추적했다. 기사단 건물 밖으로 나갈 순 없었기 때문에 미카는 금방 솔라에게 붙잡혔다. 그는 사지가 각각 하나의 십자가에 붙들려 있어, 버둥거리지도 못하고 박제된 곤충처럼 바닥에 붙어서 욕을 뱉어댔다. 솔라는 그를 내려다보며 남은 하나의 십자가로 그의 목을 뚫어버릴까 고민했지만, 저 멀리서 피데이스가 베론을 데려오는 것을 보고 단념했다.

“솔라, 그를 풀어줘라. 놓아주라는 뜻이 아니라, 대화를 이런 상태로 할 순 없으니까.”

베론의 명령에 솔라는 손을 구속한 십자가를 풀었다. 미카는 곧바로 상체를 일으켰으나 발은 여전히 바닥에 묶여있어, 도망칠 수 없었다. 피데이스가 그를 무릎 꿇렸고, 베론은 그 자리에서 미카에게 종이를 들이밀며 어떤 주술인지 물었다.

“주술이라니요…. 제가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한들 그런 사특한 것에 관심을 가질 리 없잖습니까? 그냥 아무렇게나 한 낙서입니다.”

“단순한 낙서라면 이런 글귀를 적어놓진 않았겠지. 너보다 이단과 악마 숭배자들을 많이 봐온 사람 앞에서 그런 말장난이 의미가 있을 거로 생각하나?”

분노한 베론의 목소리가 집무실에서 울렸다. 낮고 위압적인 기운에 솔라가 몸을 살짝 떨었고, 미카는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아니, 아니 절대로 아닙니다. 독방에 갇혀서, 는 거라고는 그럴듯한 망상을 하다가 잠드는 것뿐인 제가, 어떻게, 어떻게 그런 인간들과 같은 짓을 하겠습니까?”

“그럼 여기 적어둔 주술 같은 건 뭡니까? 아무리 봐도 콘피테오르가 아닌 것 같은데.”

나풀거리는 종이를 피데이스가 미카에게 들이밀었다. 미카는 제 것이 아니라고 부정했고, 솔라는 제가 직접 미카의 몸을 뒤져 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종이 같은 걸 누가 제게 줄 리가 없잖습니까? 애초에 저 아이가 자신이 그린 것을 제 것이라고 뒤집어씌우는 걸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황당한 발언을 이어가는 미카에게 피데이스가 헛소리하지 말라고 일갈했지만, 미카는 뻔뻔하게 제 결백을 믿어달라고 호소했다.

“애초에 출신도 불분명한 평민이 집행자의 부관이 된 것도 이상했는데, 이런 식으로 남을 속였던 거겠죠. 다들 보호소 아이라고 오냐오냐해주니 기고만장해져서는…. 으악!”

“솔라! 진정해, 당장 내려놔.”

십자가들이 미카의 옷을 붙잡고 그를 공중에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천장에 등이 닿게 된 미카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솔라의 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분노로 점철된 눈이었지만 표정은 지극히 평안해 보여서, 정말로 화난 게 맞는지 의심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미카는 제 등에서 땀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당황한 피데이스가 솔라를 붙잡았지만, 미카는 여전히 땅을 밟지 못하고 있었다.

“네 구린 속셈을 숨기려면 나를 의심한다고 말하기만 했어야지…. 감히 너 따위가 그분을 들먹여?”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말이었다. 베론이 피데이스에게 어떤 주술인지 알아오라고 시키고 솔라에게 다가가 미카를 전담 기사에게 넘기라고 명령했다. 베론보다 먼저 집무실에 도착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전담 기사는 마침내 바닥을 딛고 선 미카를 밧줄로 꽁꽁 묶어 데려갔고, 미카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걸어갔다.

솔라는, 다리에 힘이 풀린 채 힘들게 걸어가는 미카가 사라질 때까지 노려보았지만 더 무언가를 하진 않았다. 하지만 베론은 미카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솔라의 멱살을 잡았다. 뒤에서 지켜보던 피데이스는 손을 뻗으려다, 베론이 그저 솔라를 잡고 있기만 한 것을 보고 멈췄다.

“피데이스의 말이 들리지 않았나? 네 임무는 그자를 잡아 오는 것까지였을 텐데.”

“죄송…합니다. 집행자님을 모욕하는 말에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명령은 절대복종이다. 전시엔 이 정도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갑작스레 그런 일을 당했으니 당황할 법도 하건만, 솔라는 침착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 태도에 베론은 순순히 솔라를 놓아주었고, 자리를 파했다. 이후 베론은 피데이스를 불렀다.

“식물을 생장시키는 주술이라고요?”

피데이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기억을 더듬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무언가 중얼거리더니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래, 전담 기사가 묻자 바로 답했다고 하는군.”

“어이가 없군요, 정말 그런 거였다면 왜 그 자리에서 답하지 않았던 겁니까?”

“솔라가 자신을 모욕했다고 느껴서 말하기 싫었다고 하던데. 감정적인 사람이니 그럴 법해. 그런 주술을 만든 것도 자신이 조경 일을 할 때 필요할 것 같아서 만든 거라고 하네.”

이 대화를 피데이스가 그대로 솔라에게 전하자, 나무인형을 상대로 힘조절을 하고 있던 솔라가 그걸 두 동강 내버리고 돌아섰다.

“그런 거짓말을 그대로 믿어주셨다고요? 정확한 주술 내용이 뭡니까, 읽으셨을 거 아니에요.”

“뭐,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무언가를 높게 만드는 문장이었어. 그걸 식물에 적용하면, 아니 애초에 적용할 만한 대상이 식물뿐이니까. 조경용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 문제는 그걸 왜 그렇게 숨겼냐인데, 솔직히 난 그 사람이 말한 이유가 전부라고 생각하거든.”

“아니, 아닐 겁니다. 분명 진짜 이유가 있을 거예요.”

뒷머리를 긁은 피데이스가 왜 그렇게까지 그를 의심하냐고 물었다. 하지만 솔라는 그에게 이유를 말할 수 없다고 침묵했고, 그걸 피데이스는 할 말이 없는 거로 받아들였다. 너무 신경 쓰지 말라며 피데이스가 사라지자, 솔라는 나무인형을 치우며 생각에 잠겼다.

‘그날 일을 생각해보면, 그 인간이 그렇게 감정적인 사람인 건 놀랍지 않아. 내가 있다는 이유로 그 주술이 무슨 의미인지 말하기 싫다는 건 진심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식물을 생장시키는 주술이 정말 조경에 필요한 건가?’

그 생각에 잠긴 지 사흘째 되던 날, 시도폰의 방이 있는 별관에 들른 솔라는 유달리 짧은 나무 하나와 그 옆의 벼락 맞은 나무를 발견했다. 마침 루카가 근처를 지나갔기에, 솔라가 그를 붙잡고 물었다.

“루카 님, 저 나무는 언제부터 저렇게 되어있었나요?”

“꽤 되었을걸요? 4월 중순쯤 집행자께서 떠나기 직전에 저렇게 되어서 저걸 처리 못 하고 있었어요. 돌아오시면 어떻게 할지 여쭤봐야겠죠.”

“그 옆에 작은 나무는 언제 심겨있었습니까?”

“그건… 잘 모르겠어요. 아마 저 커다란 나무에 가려져서 안 보였던 것 같네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뇨,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길로 솔라는 곧장 제 숙소로 돌아갔다.

그가 다시 별관에 온 것은 모두가 잠든 밤, 달빛만이 지상을 비추고 있을 때였다. 능숙하게 불침번 사제를 피해서 시도폰의 방 근처에 도착한 솔라는 들고 온 삽으로 나무를 파냈다. 땅을 정리하고 호수에 나무를 던져버린 뒤, 삽의 흙을 털어냈을 때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수풀 속에 무릎을 꿇은 채 몸을 숨긴 솔라는 긴 옷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을 놓치지 않고 바라봤다.

‘루카는 나무를 심은 게 조경 담당이라고 했지만, 정작 그 담당자라는 사람은 근래에 뭔가를 새로 심은 적이 없다고 했었지….’

솔라는 나무가 왜 거기 심겨있어야 하냐고 되묻는 담당자를 떠올렸다. 어둠 속에서 똑바로 걸어 나무 쪽으로 다가간 사람은 조경 담당자보다 머리가 하나는 더 컸고, 솔라는 어쩐지 익숙한 몸짓에 눈살을 찌푸렸다. 집행자가 각성했던 날, 신전에서 무력하게 앉아있어야 했던 솔라에게 검을 든 기사가 다가왔었다. 무기조차 하나 없는 사람들에게 칼을 휘둘러 위협했던 장신의 사내를 솔라가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미카는 나무가 있던 자리로 다가가더니 비어있는 구멍을 보고 놀랐는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증거가 될 만한 거라도 남길 줄 알았는데 바로 가버리다니, 너무 성급하게 없애버렸나…. 하지만 저걸 남겨두기엔 너무 불안했어. 나무가 높게 자라면 거기에 올라가서 그대로 집행자의 침실로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솔라는 시도폰이 종종 나무를 타고 바깥으로 몰래 나갔다는 사실을 몰랐다. 또, 그 나무가 벼락을 맞아서 반 토막이 나버리는 바람에 시도폰이 더는 그런 일탈을 감행할 수 없다는 사실도. 나중에 시도폰이 돌아오면 보고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솔라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도 그 일이 신경 쓰이나?”

피데이스는 한 서류를 이상하리만치 오래 들고 있는 솔라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딱-소리와 함께 솔라는 정신을 차렸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건 부정의 뜻이 아니었고 피데이스 또한 그걸 알아챘다. 긴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솔라가 이후로 미카를 본 적은 없냐고 물었다.

“미카는 평소랑 똑같아.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신성력을 보충하고 잠깐의 쉬는 시간 동안은 아무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어. 도서관은 가지 않는 것 같던데. 거기서 네게 들켰으니까 사리고 있는 건가?”

“그렇다기보다는 더는 거기서 얻을 만한 정보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게 맞을 것 같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 솔라가 피데이스에게 나무를 파내버린 일을 이야기했다. 피데이스는 밤중에 봤으니 착각할 수도 있었던 거 아니냐고 반박했지만, 솔라가 ‘그럼 미카 외에 굳이 그런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입을 다물었다.

“그때 바로 나무를 파내서 버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성급했습니다.”

“다른 증거는 찾기 힘들겠네. 그날 이후로 아무런 활동을 안 한 것 같으니까.”

씁쓸한 표정으로 솔라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솔라. 고작 미카 따위가 집행자의 침실에 들어간다고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축 늘어져 있던 솔라의 머리카락이 움찔거렸다.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린 솔라는 딱딱하게 굳은 제 표정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런 인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자리에서 타죽는 것 외엔 없겠죠. 하지만 그렇게 침입하게 두는 것 자체가 죄라고요.”

“알았어 진정해. 그거 내려놔.”

피데이스는 솔라의 주변에서 벌처럼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 십자가들을 가리켰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라며 마지막까지 경고한 솔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게?”

“머리 식히러 갑니다. 예산안 짜는 거 힘드네요.”

솔라의 걱정이 무색하게, 시도폰과 함께 남부에 갔던 일행이 돌아오기까지 미카는 어떤 일도 저지르지 않았고 아무런 이상 현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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