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4부 17화

기권 패?

위대하신 분.

그렇게 불린 이는 천천히 걸어 나와 달빛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다만, 그 존재는 현실에 발을 디딘 이가 아니라서 달빛은 그의 몸을 통과해 다 무너진 동상의 잔해를 비춰주었다.

“성녀라고 해도 인간 하나일 뿐이야. 내가 모든 인간의 생과 사를 결정하지 않지. 그 아이는 그저 거기까지였을 뿐이다.”

새하얀 옷차림과 가지런한 금색 머리카락이 흐린 달빛 아래에서도 찬란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 아름답고 성스러운 모습과 다르게 나오는 말엔 감정도 온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도폰은 그의 앞에 양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절그럭 소리와 함께 허리에 차고 있던 단도가 바닥에 닿았고, 그의 옷자락에 바닥의 무늬가 가려졌다.

그는 천천히 상체의 갑옷을 벗으며 말했다.

“당신이 신경 쓰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따로 신경 쓰는 이도 있다는 말씀이신 거겠죠.”

“새삼스럽게 묻는구나. 그게 여태껏 너희들이 집행자라는 이들이었고, 이번의 집행자는 바로 너이지 않니.”

속이 텅 빈 금속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시도폰은 벗어낸 갑옷을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시도폰을 바라보던 이가 그쪽으로 잠깐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시도폰을 보았다.

“이게 무슨 뜻이지?”

“뜻이라… 그런 건 없습니다. 이제 저걸 쓸 일은 없을 테니까요.”

시도폰은 고개를 들었다.

제 맞은편에 있던 이가, 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워져서는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그 얼굴에 담긴 걱정에 시도폰은 마음속 다짐을 굳혔다.

“그날을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아마 처음 뵈었던 날이었을 텐데.”

“기억하고 말고, 네가 내 눈을 굉장히 열심히 봤지.”

그 말에 시도폰은 그의 눈과 카리타스의 눈이 비슷한 감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입안이 썼다.

“…그날 제게 소중한 존재를 지킬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죠. 제가 걷는 길이 정도고, 제 눈에 보이는 것이 진리이며, 저는 제 마음속에 울리는 진실한 소리를 따르면 된다고요.”

“그래, 잘 기억하고 있구나. 그래서 네게 그 힘을 주었잖니. 네게 허락해준 그 ‘축성’ 말이다.”

뿌듯함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시도폰은 무릎을 세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 힘으로는…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었어. 모두를 구하는 건 요한이 다시 살아나도 불가능한 일이란다. 물론 그는 다시 살아나는 건 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일이라고 절대로 내게 부탁하지 않을 테지만.”

시도폰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모두를 구하는 원대한 꿈은 꾸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구하고, 구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생각이었죠.”

“집행자로서 아주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한다만, 내 앞이라고 해서 그렇게 무릎을 꿇을 필요는 없단다. 어서 일어나….”

시도폰에게 뻗어진 손은, 이어진 말에 공중에서 멈추었다.

“하지만 모두를 구한다고 해도, 제가 사랑하는 이조차 지키지 못한 힘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하얀 로브 아래에서 옅은 미소를 짓고 있던 입꼬리가 내려갔다.

“‘사랑하는 이’라고 하였느냐?”

“그렇습니다. 당신께서 주신 힘으로, 지키려던 사람을, 제게 진리를 보여주고 진실을 들려준 사람을 죽였습니다.”

시도폰이 무릎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푼 것과 반대로, 신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옷을 말아 쥐었다.

“네가 맹세를 올린 건 나였잖니. 내게 남은 모든 삶과 정의를 바쳤다고 생각했는데…. 네 입으로 내 검이 되겠다고 했던 것을 잊었느냐?”

크게 실망한 듯 힘 빠진 목소리로 돌아온 질문에, 시도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마지막까지 당신의 검이 될 겁니다.”

자작나무와 붉은 뿌리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지만, 아직 악마들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는 소리는 이제, 시도폰에겐 기괴한 악성으로 들리지 않았다.

‘곧, 당신들도 구원해줄 테니까.’

시도폰은 허리춤의 단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는 처음 이 검을 발견한 이후로 전혀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이 검이 쓰일 일이 없도록 하자는 자신과의 약속을, 여태까지 충실히 지켜왔었다.

그는 제 옷에 가려진 바닥의 문양을 기억하고 있었다. 카리타스가, 자신의 각성 당시 사용하려고 했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

물론 카리타스는 알려준 적이 없지만, 그 날의 일은 베론에게 모두 보고를 받은 지 오래였다.

그것은 많은 이들의 피가 바닥에 의미 없이 뿌려지고 나서야 겨우 사용할 수 있는 술식이라고 했다. 남은 이들이라도 지키고자 술자가 목숨을 바치는 상황에서나 사용한다고 했었다.

평소 같았다면 자살이라는 단어조차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살아달라고, 살아서 자신의 가족과 동료들을 지켜달라고 부탁하고 떠나갔다.

그런 일방적인 약속은 항상 마지막 숨을 따라 흘러갔고, 그 숨에 휩쓸린 자신은 약속을 등에 이고 창을 잡았다. 갑옷의 무게는 결코 가벼워질 일이 없었지만, 주변엔 그것을 함께 짊어질 동료가, 창이 있었다. 그리고 제게는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바람이 있었다. 맑은 하늘 아래, 펄럭이는 작은 손수건을 따라가면 되었다.

하지만 이제 바람은 멎었다. 창을 들 힘조차 남지 않은 손은 겨우 단검을 그러쥐었고, 동료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여태까지 자신을 살게 했던 약속들이 더러운 바닥에 무참히 버려졌다. 그중에 가장 무거운 것은, 당연하게도 카리타스의 것이었다. 자신은 그것을 짊어지고 살아갈 만큼 강하지 않았다.

양손으로 검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심장과 수평을 이룬 칼날이 달빛을 반사했다. 신은 그제야 시도폰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위대하신 분, 제가 사랑했던 건, 제가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건 다른 인간이지, 당신이 아니었습니다.”

“안돼, 멈춰!”

미제리코르데는 정확하게 시도폰의 심장을 꿰뚫었다. 시도폰은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아내 바닥 문양의 정중앙에 꽂았다.

카리타스를 죽였을 때처럼, 피는 물처럼 흘러내려 음각으로 새겨진 글자에 스며들었다. 뚝뚝 끊기는 숨을 겨우 이어가며 시도폰이 말했다.

“[당신의 충실한 종이 무릎을 꿇습니다. …오만과 무지를 내려놓고 어리석은 인간으로서 당신 앞에, 회개하오니, 단 한 사람만의 희생으로, 다른 이들을, 구원받게… 하소서.]”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무릎을 꿇었던 시도폰은 그대로 문양을 덮은 채 쓰러졌다. 그의 하늘빛 신성력은 그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그 몸에서 빠져나와 문양에 스며들었다.

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적혀있던 글자들이 같은 색으로 발광하며 잠깐이나마 그곳을 낮처럼 밝게 비추었다.

신의 몸을 관통하던 달빛은 빛을 잃었다. 동시에, 신은 자신이 땅을 딛고 있음을 깨달았다.

‘악마’였던 것들은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라졌다. 영안실을 중심으로 하늘빛과 노란빛의 신성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그 부근의 모든 악마를 증발시켜버렸고, 부상병들은 상처가 순식간에 낫는 것을 느꼈다. 악마가 더럽혀 방치되어있던 검은 땅도, 제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시도폰이 문양에 쓰러지기 직전, 다시 영안실로 돌아온 솔라는 너무도 밝은 빛을 마주한 탓에 한동안 눈을 뜰 수 없었다. 훗날 크로마가 그에게 왜 눈을 감지 않았냐고 따졌을 때, 솔라는 그 광경을 볼 수 있었으니 후회는 없다고 대답했다.

빛이 사그라들고, 신은 자신의 몸이 다시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술자인 시도폰이 죽었으니, 그가 다시 현실에서 유리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다시 물질계를 벗어난 신은,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는 주제에 기어이 그곳을 향해 기어오는 솔라를 내려다보다가, 막 빠져나오려는 시도폰의 영혼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솔라는 바닥을 더듬거리며 관과 관 사이를 헤쳐 기어갔다. 자신의 검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쭉 뻗은 솔라의 손이 누군가의 발에 닿았다.

손은 그 주변을 더듬거리다가 마침내 피에 젖은 단검에 닿았고, 그것을 따라 올라가다 시도폰의 얼굴에 닿았다. 솔라는 천천히 시도폰의 얼굴을 다듬듯이 매만졌다.

안면의 굴곡과 질감을, 눈물과 피로 얼룩진 표정을 모두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다른 기사들이 영안실에 도착했을 때, 솔라는 시도폰이 했던 것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그는 피범벅이 된 시도폰의 시신을 안고, 고개를 숙인 채, 기도하고 있었다.

우리의 집행자가 신의 품으로 안전하게 돌아가길,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희생으로 구해낸 목숨이 헛되게 사라지지 않도록 보우하길.

기도가 끝나자 이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슬픔에 허둥대던 기사들은 솔라에게서 시도폰을 받아내려고 하였으나, 솔라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이 모시겠다고 고집했다.

크로마가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는 솔라를 도와 시도폰의 시신을 수습할 때, 한 기사가 문양 주변에 놓여있던 창을 가리키며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시도폰의 창은 이제 주인을 잃었으니 누구나 만질 수 있었다. 아페가 힘겹게 그것을 들어 품에 안듯이 챙겼다. 주인의 신성력이 깃든 창은 아직 따뜻했다.

중상을 당한 채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디스도 아까의 여파로 정신을 차렸다. 그는 다른 기사들을 따라 뒤늦게 신전으로 올라왔지만, 솔라의 품에 안겨있는 시도폰의 시신을 보고 고개를 떨구었다.

프라이에와 베론은 본부에 있고, 피데이스도 제1 신전에 있었으니 그 자리에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이는 솔라였다. 그는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부담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집행자께서 사망하셨으니 시신을 가장 멀쩡한 곳에 보관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거주관의 구조를 잘 알고 있는 분들이 맡아주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 몇몇 기사가 손을 들고 나왔다. 솔라는 그들에게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말하며 아페에게 그들을 따라가라고 명령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아페가 그를 쳐다보았지만, 솔라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아페가 떠난 후, 남은 기사들에게 솔라가 말했다.

“두 번째로 저희는… 제1 신전에 들러 피데이스와 합류한 후, 왕궁으로 갑니다.”

크로마가 이의를 제기했다.

“잠시만요. 제1 신전에 가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왕궁에 갈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이번 일을 보고하는 건 나중에 해도….”

솔라는 그의 말을 잘라냈다.

“보고가 목적이 아닙니다. 저희는 이단을 처리하러 가는 거니까요.”

“이단이라니…. 왕궁에요?”

“제1 신전 근처에서 악마가 소환되도록 악마 숭배자들을 심어놓은 자, 진실을 알게 된 피데이스와 비르-베리를 죽여 없애려고 했던 자가 그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하를 따로 보냈던 것이고요.”

덤덤하게 엄청난 사실을 말한 솔라는 크로마에게 이의가 있냐고 물었다. 크로마는 없다고 대답하긴 했으나, 썩 완벽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솔라의 말이 여태 틀린 적이 없었기에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그때 크로마가 솔라에게 여전히 눈이 부시냐고 물었다. 그에 솔라는 천천히 눈을 떴고, 크로마는 그의 눈이 새하얗게 바랜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그의 손을 잡았다.

“솔라, 어째서….”

“그런 것을 맨눈으로 보았으니 그 여파로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게 된 모양입니다.”

“다른 것들은, 이라니요, 그럼 여전히 보이는 건 있다는 건가요?”

“예. 살아있는 존재는 그 영혼이 보이는 것 같군요. 덕분에 당신이 어디 있는지, 다른 기사들이 어디 있는지는 보이지만 구조물 같은 건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이게 일시적인 건지 영구적인 건지는 두고 봐야 알 수 있겠네요…. 일단 지금은 절 따라와 주세요.”

크로마의 말에 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마의 뒤를 따라 입구로 향하던 솔라는, 시도폰의 시신을 안치하고, 다른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기사들에게 일이 다 끝나면 제1 신전으로 오라고 이야기했다.

아페는 다친 사람도 없는데 왜 자신이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궁금했지만, 시도폰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기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시도폰이 누운 관은 지붕이 멀쩡한 실내에 있었고, 다들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관의 뚜껑은 열려있었다. 아페는 그 옆에 조심스레 다 식어버린 창을 내려놓고, 쭈그려 앉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멍하니 쳐다보던 그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왜 그렇게 서둘러서 가셨어요? 그분이 없는 세상이 그렇게도 싫었나요. 우리 모두를 남겨두고서, 그렇게 미련도 없이 떠날 정도로?”

분명 따져 묻는 내용이었으나, 담겨 있는 감정은 슬픔과 애처로움뿐이었다. 다른 이들이 시도폰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시도폰을 이곳에 붙잡아둘 만한 동기가 되지 않았다. 아페는 그것이 못내 슬펐다.

시도폰이 죽어도 세상은 끝나지 않고, 자신은 그런 세상에 여전히 살아있다.

좋아했고, 동경했던 이가 버린 세상이지만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세계이지 않나, 그러니 정말 모든 게 끝난 사람처럼 앉아만 있을 순 없었다. 아페는 도움을 청하는 다른 이의 외침을 듣고 자리에서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추모는 평생에 걸쳐서 할 생각이었다.

 


제1 신전에 도착한 솔라는 곧장 피데이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시도폰의 일이 있기 전에 방문했던 제1 신전의 구조를 외우고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신전에서 보이는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이란 단 둘뿐이었으므로 쉽게 그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널려있는 시체들 때문에 솔라는 크로마의 부축이 없었다면 시체에 발이 걸려 열 번은 넘어졌을 것이다.

잠시 후, 쇠사슬에 묶인 이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던 피데이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솔라는 자신의 눈에 대한 설명은 제외하고 정말 필요한 일만 일목요연하게 이야기했다.

그에 피데이스가 자신의 뒤에 있는 이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증거이니 데려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솔라는 기사들을 시켜 그를 말에 실었다.

“그보다 솔라, 계속 눈을 감고 있을 셈이냐?”

“눈을 뜬다고 해서 다를 것이 없으니까요.”

“대체 뭘 본 거야? 혹시 그 강렬한 빛을 직접 보기라도 한 거냐?”

“맞습니다. 크로마,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솔라는 태연하게 대답하며 크로마의 도움으로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크로마는 이곳으로 왔을 때처럼 솔라의 뒤에 앉아 말을 몰았고, 왕궁에 도착한 기사단은 상황보고를 하러 왔다며 국왕을 뵙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사들이 왕에게 허가를 받으러 자리를 떴을 때, 피데이스는 크로마에게 기사들을 이 근처에 대기 시켜놓고 외부로 향하는 연락병이 없는지 잘 살펴봐달라고 속삭였다.

곧, 솔라와 피데이스 두 사람에게만 입궁이 허락되었고, 나머지 기사들은 궁 밖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괜찮으려나, 두 사람만 보내도… 피데이스님은 집행자님의 스승이니만큼 걱정할 필요 없겠지만 솔라는 지금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인데.’

크로마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두 사람의 귀환을 기다렸다. 한편, 응접실에서 대기하던 솔라와 피데이스는 무기를 두고 들어오라는 명령에 각자의 무기를 맡겨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땅의 대행자에게 인사드립니다.”

평소에 듣던 인사와는 사뭇 다른 인사에 왕은 보일 듯 말듯 미간을 찌푸렸다 폈다.

성직자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폐하를 뵙습니다’라든가 ‘이곳의 주인을 뵙습니다’ 같은 인사를 올렸지만, 성직자들은 절대로 그를 주인으로 여기는 인사를 뱉어내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는 언제나 행정적인 대행자일 뿐이었고, 그들의 주인은 신, 그리고 그 바로 아래의 집행자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지금 드러낼 필요는 없었으니 국왕은 왕비와 함께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기사단 여러분. 이번 사태를 해결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상황을 알려주시려 직접 찾아와주셨다고요.”

자연스레 그의 시선은 눈을 감고 있는 솔라에게로 향했다. 그가 솔라의 상태를 지적하기도 전에, 피데이스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우선… 저희는 과거 성녀였던 분께서 악마를 불러들이시고, 그것들을 소탕하기 위해 집행자께서 희생하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악마들의 기운은 현재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 모든 악마가 소탕되었다고 보고드리는 바입니다.”

왕은 슬퍼하는 척 목소리를 낮추고 죽은 성직자들을 위로했지만, 그는 속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교황과 오토 대주교의 생사를 물었다. 피데이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두 분도 마찬가지로 신의 곁으로 가셨다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렇담, 앞으로 교회는 사태 수습 때문에 바빠지겠군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열과 성을 다해 교회를 도울 것을 약속드립니다.”

국왕의 물 흐르듯 나오는 말에 피데이스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응접실의 창문엔 아까까지 그가 심문하던 인질이 식물의 덩굴에 묶인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 인영을 알아챈 왕비가 비명을 질렀고, 동시에 피데이스는 솔라에게 ‘왼쪽’이라고 말했다.

순식간에 네 개의 십자가가 나타나 왕의 목을 노렸다. 벌의 날갯짓처럼, 위협적인 소리를 내는 것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으니, 왕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는 간신히 소리를 내어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솔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아직 당신이 이단 재판에 회부 되었던 것에 악감정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그건 제가 억울해서라도 무덤까지 가지고 갈 것 같습니다.”

피데이스의 대답이 끝나고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인질은 창문의 유리 조각에 긁혀 여기저기 상처가 났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피데이스는 그를 치료하지 않은 채 고개를 잡아 왕을 마주 보도록 돌렸다.

“이 얼굴을 알고 계십니까? 꽤 중요한 인물인 것 같아서 살려는 두었는데 만약 모르신다면 죽여버려도 괜찮겠지요? 이 작자가 제1 신전에서 이단에 관한 증거를 찾고 있던 우리 대원들을 죽이려고 들었단 말입니다.”

“나, 나는 모르는 얼굴이네. 죽인다고 해서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옷차림새를 보아하니 왕국군인 듯한데, 그의 독단적인 행동의 책임을 왜 나에게 묻는겐가!”

왕의 부정에 피데이스에게 잡힌 기사가 울분이 섞인 소리를 냈다. 피데이스가 그의 입을 막고 있던 것을 풀어주자, 기사는 바로 왕에게 외쳤다.

“어찌 그렇게 저를 냉정하게 버리실 수가 있습니까? 이 자는 자신들의 부하를 전부 잃었다고 하지만, 저희 쪽 손해도 만만치 않게 컸단 말입니다.”

“무슨 헛소리냐 네 이놈! 이거 치우시게, 경비병은 무얼 하는가? 이 자들을 모두 끌어내! 반역이다!”

솔라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왕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가 부른 문 너머의 경비병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피데이스가 말했다.

“발뺌하셔도 소용없으시고, 경비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 십니다. 제 단원들이 여태 소중히 모아온 자료로, 당신께서 이단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니까요. 반역이라고 하셨습니까? 저희에게는 당신이 반역자입니다.”

이 말을 끝으로 왕궁은 정리되었다.

기사단이 소수였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왕국군은 기사들에게 반항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 반항한다고 해도 금방 제압되었기 때문이었다. 왕과 왕비를 결박해 이단과 관련된 진술을 받아낸 직후, 아페가 왕궁에 도착했다.

그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응접실로 들어왔고, 솔라와 피데이스를 번갈아 가며 보다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피데이스가 일을 설명하고 나서, 왕과 왕비는 자신의 딸에게 선처를 구했다.

그러는 동안, 피데이스는 솔라에게 아페도 국왕 부부와 함께 감금해야 하지 않겠냐고 속삭였지만, 솔라는 고개를 저었다. 의아한 얼굴로 피데이스가 물었다.

“왜 반대하는 거지? 아무리 기사단에 함께 있었다고 해도 왕족이다. 믿을 수 없어. 무고하다면 나중에 풀어주면 그만이야.”

솔라는 말이 없는 아페에게 계속해서 도움을 구하는 국왕과 왕비의 목소리를 듣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저하께서는 저희를 믿고 계십니다. 오래된 믿음을 순간의 의심으로 더럽힌다면 회복하는 데에는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요. 제가 아니라 집행자께서 이 상황을 아셨어도 저와 똑같은 판단을 하셨을 겁니다.”

무언가 더 말하려던 피데이스를 막고, 솔라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희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저들이 자충수를 둘 것 같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

솔라의 말이 끝나고, 응접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시끄럽게 무엄하다고 소리치는 목소리는 시도폰에게 춤을 청했던 왕자의 것이었다. 그는 기사들에게 붙잡혀 발버둥을 치다가 아페를 발견하고 당장 자신을 풀어달라고 호통을 쳤다.

“왕국의 공주가 되어서 반역자의 무리에 들어가다니 부끄럽지도 않으냐? 당장 이 자들에게 감금을 풀라고 해!”

“저… 저는.”

당황한 아폐가 말을 잇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고, 솔라는 아페의 앞을 막아섰다. 그제야 아페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모으고 있던 두 손을 아래로 내리고, 아페는 배에 힘을 주고 말했다.

“저는… 사제입니다. 사제로서 이미 이단으로 확인된 사람을 감쌀 이유는 없습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는 마음은 변함이 없지만, 이번 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는지 알기에 저는 감히 선처를 요청할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아페는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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