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Colony

블루 콜로니. 5

CN by BX900
3
0
0

#5. ARI

ARI 프로그램은, 그 목적처럼 전문 수사 요원을 중심으로 시행되었다. 안경에 내재된 증강 현실 인터페이스가 과학적 수사 및 자료 검증에 들일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해 주리란 기대하에, 꽤나 많은 자원자들이 나왔다.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종료된 후엔 모든 요원에게 ARI가 일괄적으로 지급되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전과 부작용은 언제나 함께 찾아오는 법이었다. ARI 보급 후 한 달쯤 지나자, 몇 명의 요원이 후유증을 호소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수가 빠르게 늘어났다. 몇 개월도 채 안 되어서 많은 요원이 만성두통과 멀미 등의 증상을 토로하며 제품을 사용하길 꺼려했다. 연구소는 특수 개발한 부작용 완화제인 트립토카인을 함께 보급했지만, 까다로운 요원들은 제대로 된 의약청의 승인을 통과했는지조차 미심쩍은 이 약물을 복용하면서까지 ARI를 사용하는 것에 의구심을 표했다.

물론 모두가 그리한 건 아니었다. ARI의 유용성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알게 된 소수의 인원은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1년이 넘도록 꾸준히 안경을 착용했다. 결국엔 그들마저도 극심해지는 부작용을 버티지 못하고 두 손을 들며 안경을 반납해야 했지만.

노먼 제이든은 달랐다.

안경은 마치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어떤 부작용도, 후유증도 남기지 않았기에, ARI 착용을 중단하라는 상부의 권고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할 수 있었다. 그는 그때쯤 본부 내에서 최고의 실적을 쌓고 있었고 몇 번 쓰다 나자빠진 동료들과 달리 ARI는 노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중한 오른팔이 되었다.

노먼이 부작용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노먼은 프로그램 초기 단계서부터 ARI 개발에 참여한 관계자의 사망사건을 조사하며 안경의 후유증과 트립토카인의 중독성을 가장 먼저 밝혀낸 요원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꾸준히 ARI를 착용했다. 그 도구가 무수히 많은 미제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일 수도, 혹은 단순히 그에게만큼은 이렇다 할 말썽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다른 동료들이 전부 ARI를 반납하거나 사무실 책상 서랍에 처박아버렸을 때도 노먼은 자유자재로 ARI를 활용했고, 사건 해결뿐 아니라 개인적인 용도, 즉 단순한 게임을 하는 데에도 그 안경을 사용했다.

20대의 노먼은 아직 젊었고 패기와 동시에 무용함도 갖추었다.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기에 다른 동료들은 제대로 활용할 수조차 없고 손도 못 대는 ARI를 이용하여 무수히 많은 범인을 잡아냈고, 또 그 수 만큼 많은 사람을 위험에서 구출해냈다. 그의 사무실 책상 칸막이에는 삐뚤빼뚤한 선으로 그려진, 망토를 두르고 검은 선글라스를 쓴 노먼의 그림이 붙어있었다. ARI가 막 보급된 직후 연쇄살인범으로부터 구해낸 아이가 보내온 엽서였다. 그것은 노먼의 자랑이자, ARI를 놓지 못하는 이유기도 했다.

그렇게 그가 ARI를 착용한 지 3년이 지났을 무렵, 드디어 일이 터졌다.


FBI 워싱턴 본부. 범죄수사과 사무실에 돌아온 노먼은 아무도 없는 회의실로 들어가 책상 위에 ARI를 거칠게 던져놓곤 의자에 주저앉았다.

유달리 일이 안 풀리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미약하게 아파오던 두통이, 사건 조사를 진행하며 더욱 극심해졌다. 그는 가는 길에 아스피린을 사서 몇 알 먹었다. 그러다 늦은 오후쯤엔 갑자기 쏟아진 코피에 조사하던 현장에 핏방울을 떨굴 뻔했다. 급하게 손수건으로 틀어막은 덕에 피는 금방 멎었고 동료들은 이를 보지 못했다. 계속해서 사건 현장을 살피던 중 노먼은 ARI에 뜬 단서를 통해 잘 보이지 않는 구석, 문 뒤편에 숨어있던 용의자를 발견했다.

노먼과 눈이 마주친 남자는 그를 옆으로 밀치며 달아났다. 노먼은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주워 들고 바로 뒤쫓았으나 갑자기 가빠오는 호흡에 벽을 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퍼킨스가 노먼을 지나쳐 용의자를 쫓아 나갔고 또 다른 동료, 패트릭도 급히 움직이려다 비틀대는 노먼과 세게 부딪혔다.

“아! 뭐 하는 거야!” 패트릭은 나자빠진 노먼에게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으며 퍼킨스를 쫓아 달려나갔다.

그때 노먼은 바닥에 누워 부족한 산소를 들이켜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겨우 호흡이 진정됐다. 노먼은 징하게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동료가 사라진 방향으로 서둘러 뛰어갔고, 곧 그들을 찾아냈다. 퍼킨스의 무릎 아래서 머리를 박은 채 등 뒤로 수갑을 차고 있는 남자를 확인하고서야 노먼은 겨우 마음을 놓았다. 다 잡은 범인을 놓칠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본부로 복귀한 요원들은 범인을 심문하러 자리를 옮겼고 상태가 별로인 노먼만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혼자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퍼킨스가 안으로 들어오고 오늘 함께 현장 조사에 나간 패트릭도 따라왔다. 노먼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어때? 뭐 좀 얻어낸 게 있어?”

퍼킨스가 어두운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든 범행은 자기 혼자 한 거라고 주장하더군.”

패트릭이 갑갑하게 목을 조인 넥타이를 당기며 투덜댔다.

“제기랄. 고작해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잔챙이였어.”

그리곤 노먼을 흘겨보며 지껄였다. “그렇게 바로 잡을 게 아니라, 상황을 보고 좀 더 대어를 낚을 생각을 했어야지.”

노먼이 눈썹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봤다.

“뭐?”

“그렇잖아. 제대로 된 밀매 루트를 잡는 게 우리의 목표였는데. 고작 알선책 하나 잡은 건 별 도움도 안 되고, 오히려 윗대가리에게 도망갈 구실을 제공해버렸어. 그러게 왜 아무 문이나 벌컥벌컥 열어서는….”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노먼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내가 실수했다 치자. 그럼 오늘 너는, 아니 이 사건 조사하는 내내 너는 작은 도움이라도 된 적이 있나?”

패트릭은 울컥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노먼이 코웃음을 쳤다.

“그 현장을 찾아낸 것도, 범인을 찾은 것도 나야. 게다가 내가 놓친 범인을 잡은 건 퍼킨스지. 넌, 일단 뭐 하나라도 제대로 하고 나서 입을 털어.”

패트릭이 이를 갈며 노먼에게 다가왔다. 퍼킨스는 팔짱을 낀 채 둘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재수 없는 새끼…. ARI가 없으면 사건 하나 제대로 해결 못 하는 주제에—”

노먼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이래. 패트릭? ARI가 없었을 때도 난 너보다 세 배는 실적이 좋았어. 넌 그나마 ARI가 생겨서 두어 건 더 챙겼잖아? 뭐, 그조차도 적응 못 해 금방 나가떨어졌지만.”

패트릭이 침을 튀기며 반박했다.

“작년의 네 실적은 전부 ARI가 없었으면 해내지 못할 것 투성이였어! 그깟 안경 하나에 의지해서 네 무능함을 숨기려는 거, 쪽팔리지도 않냐?”

노먼은 비죽거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친구? 너는 컴퓨터도 휴대폰도 어떤 기술적인 도움도 받지 않고 사건 조사를 할 수 있다는 소리야? 그것과 ARI가 대체 뭐가 다르지? 발전하는 시대에 빠르게 적응하는 것도 능력이야. 그 정도도 못 하면서 무슨 연방 요원을 한다는 건지—”

패트릭이 노먼의 멱살을 잡았고 노먼 역시 그의 손목을 강하게 붙들었다. 퍼킨스가 끼어들었다.

“그만 좀 하지 그래? 다 큰 어른이 별 시답잖은 말다툼이나 하고 말이야.”

둘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 퍼킨스가 파트너의 이름을 불렀다.

“노먼.”

결국 노먼이 먼저 손을 풀었다. 자유로워진 팔에 패트릭이 노먼의 멱살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지만 이번엔 퍼킨스가 패트릭의 어깨를 잡았다. 그 매서운 눈빛에, 패트릭은 어쩔 수 없이 거칠게 손을 떨쳤다. 그가 씩씩대며 회의실을 나갔다.

퍼킨스가 한숨을 쉬곤 노먼에게 말했다.

“왜 유치한 도발에 넘어가? 답지 않게.”

노먼은 말없이 자리에 앉으며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꽂았다. 조금, 현기증이 이는 듯했다. 노먼은 요즘 들어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고 잔뜩 예민해진 신경에, 평소라면 웃어넘겼을 일조차 날카롭게 대하기 일쑤였다. 노먼은 방금 자신의 행동을 조금 후회했다.

한차례 앓는 소리를 내며, 노먼은 뻑뻑한 눈을 감고 의자 뒤에 머리를 기대었다.

“노먼? 어디 안 좋아?”

“피곤해.” 노먼이 차가운 손바닥을 들어 뜨끈한 두 눈 위로 올리곤 말했다. 어느덧 손의 떨림은 멎어있었다.

“이만 들어가 쉬어. 상부에 보고는 내가 올릴테니.”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고마워, 리처드. 다음 보고서는 내가 작성할게.”

노먼이 퍼킨스에게 감사를 표하며 일어났다. 회의실 문을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 그가 손잡이를 잡고 미는데, 문이 열리질 않았다. 조금 더 강하게 밀었으나 유리문은 아주 약간 열렸다 도로 닫힐 뿐이었다.

“어? 이거 왜 이러…….”

순간, 아래가 꺼지는 느낌이 들면서 발밑으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몸이 크게 휘청였다.

“노먼!”

상체가 뒤로 넘어가며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마지막으로 급히 달려오는 구둣발 소리가 들리고, 얼음처럼 차가운 바닥의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암흑이었다.


노먼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밝은 조명이 안구를 아프도록 찔러와서 반사적으로 두 눈을 깜빡여 초점을 맞추려 노력했다. 사방에 웅성대는 잡음이 가득했으나 양옆으로 두껍게 쳐진 커튼 때문에 소음의 근원지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한 인영이 팔짱을 낀 채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퍼킨스. 그의 내리깐 검은 눈동자는 그저 노먼을 지켜볼 뿐이었다.

노먼은 몸을 일으키려다 엄습하는 현기증에 이마를 짚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침대맡에 등을 기댄 그가 숨을 길게 내쉬곤 입을 뗐다. 잔뜩 잠긴 목소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어떻게 된 거야?”

퍼킨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네가 말해줘야지. 그린스 브라이어 공장에 조사하러 간다던 놈이 왜 응급실에서 쳐자고 있는지는.”

그제야 기억났다. 여긴 디트로이트였고, 자신은 안드로이드 프로파일링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이곳에 파견된 상태였다. 노먼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응급실의 새하얀 천장과 삑삑거리며 돌아가는 기계, 비명을 지르는 인간들과 고함치는 의료진 사이에서, 노먼은 이런 환경이야말로 환자의 심리적 불안감을 악화시킬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눈을 감고 오늘 있던 일을 떠올리려 애쓰자 조각난 기억 몇 개가 노먼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공장, 창고, 안드로이드, 구급대원들. 퍼킨스가 왜 여기 있는지도 알게 됐다. 구급차로 이송될 때 다시 한번 의식을 잃은 탓에 노먼의 주머니에서 울리는 전화를 구급대원이 대신 받았고, 덕분에 노먼은 이 도망갈 곳 없는 공간에서 파트너의 이가 빠드득 갈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고스란히 듣고 있어야 했다.

잠시 뒤 커튼이 쳐지고 몹시 정신없어 보이는 의사가 들어와 노먼을 대강 진찰하고는, 혹시 모르니 하루 정도 입원해 경과를 보자며 급히 다른 침대로 옮겨갔다. 퍼킨스는 노먼의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소견을 듣자마자 바로 휴대전화를 들었다. 거침없이 손을 움직여 깁슨 국장에게 전화를 건 퍼킨스는 어제 현장에서 벌어졌던 일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파트너의 상황을 모조리 함고했다. 스피커 폰을 크게 켠 채. 노먼에게 전부 들리도록. 노먼은 자신의 파트너에게 중대한 성격적 결함이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나, 이 정도까지 치졸할 줄은 정말 몰랐다.

퍼킨스의 보고가 진행될수록 깁슨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파트너의 일방적인 주장에 항변하려는 노먼의 음성이 들리자마자 깁슨은 냅다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제이든! 국장 말이 말 같이 안 들려? ARI작작쓰라고 몇 번을 말했어? 내가 분명히 경고하는데—]

커튼을 친 간호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주의를 주었다.

“여긴 병원이에요. 제발 좀 조용히 해주세요.”

퍼킨스가 휴대전화에 대고 말했다. “국장님. 너무 시끄럽답니다.”

[뭐? 당장 스피커 끄고 제이든 바꿔. 난 아직 할 말 남았으니까!]

노먼이 죽상을 지었다. 파트너에게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으나, 퍼킨스는 차가운 태도로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얼굴을 한껏 찡그린 노먼이 팔을 쭉 뻗어 전화를 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트렸다. 그럼에도 깁슨의 찌를듯한 고성은 노먼의 고막으로 바로 꽂혀 들어왔다. 그 소리를 옆에서 듣던 퍼킨스는, 이럴 거면 스피커든 아니든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시 한번 커튼이 쳐지고 간호사가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 노먼에게 손을 내밀었다. 노먼은 살았다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냉큼 넘겨주었다. 간호사가 전화를 받아들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환자는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응급실은 혼자 쓰는 공간이 아니에요. 그렇게 큰 소리로 통화를 하고 싶으시면 제대로 1인실 입원을 시키세요.”

그리고 다시금 퍼킨스에게 휴대전화를 넘겨주고 자리를 떴다. 깁슨의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아졌고, 노먼은 나중에 돌아올 더 큰 파도가 걱정되었으나 일단 지금은 무사히 넘긴 것에 안도했다.

통화 끝에 전화를 끊은 퍼킨스가 주머니에 휴대폰을 꽂아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원은 다인실로 하라더군. 1인실 비용은 절대 못 내주겠다네.”

노먼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인실이나 1인실이나.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몸 상태 때문인지 깁슨의 전화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그는 몹시 피곤했고 그곳이 집이든 병실이든 병원 바닥이든, 상관없이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를 뒤로 젖힌 노먼에게 퍼킨스가 손을 들이밀었다.

“압수 명령이야.”

노먼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뭐?”

“이제부터 ARI는 쓰지 말라네.”

“제기랄, 그게 뭔 헛소리야. 이번 사건이 중요하다고 말한 건 국장이야. 그럴 거면 지원이나 더 해달라 해.”

“해준대. 내일 당장.”

그냥 해본 소리였건만, 퍼킨스의 즉답에 노먼은 얼빠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무슨 지원을… 설마 패트릭 그 자식을 붙여줄 생각이라면 필요 없다고 전해. 없느니만 못해.”

“그건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지. 그리고 패트릭은 더 이상 네 동기가 아니라, 상사야.”

노먼이 눈알을 굴렸다.

“같은 부서도 아닌데 상사는 무슨…. 그런 인간을 대테러부 책임자로 앉히다니, 국장도 가만 보면 제정신이 아니야.”

“둘 다 발티모어에서 세운 공적이 있으니까. 이제 말 좀 그만하고 얼른 내놔.” 퍼킨스는 노먼의 코 앞에 손바닥을 내민 채로 재촉했다.

노먼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퍼킨스는 평소엔 파트너가 뭘 하고 다니든 관심도 없으면서, 또 어쩔 때 보면 지나칠 정도로 집착했다. 노먼은 어쩔 수 없이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얇은 유리관이 손끝에 스치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묘한 불안감이 순식간에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그가 재킷의 양옆 주머니를 뒤적였다. 가슴팍을 더듬거리며 바지까지 탈탈 털어낸 노먼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없어.”

퍼킨스가 피로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장난 말고.”

“없어. 진짜.”

못 믿겠다는 듯, 퍼킨스는 몸을 숙여 거친 손으로 노먼의 상체를 뒤졌다. 주머니부터 재킷 안까지 샅샅이 살피며 숨길만한 공간을 죄 더듬거려 봤으나 고작해야 트립토카인이 든 병, 잔뜩 구겨진 영수증, 언제 끊은지도 모를 주차티켓 외에는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퍼킨스가 커튼을 열고 근처에 있던 간호사에게 질문했다.

“이 자식 실려 올 때 다른 소지품은 없었습니까?”

바쁘게 움직이던 간호사가 턱 끝만 들어 침대 옆에 놓인 작은 바구니를 가리켰다. 퍼킨스가 바구니를 뒤집어 안에 든 물건을 시트 위로 우르르 쏟았다. 노먼이 떨어트린 지갑과 거기서 빠져나온 1달러 지폐, 차 키와 껌 종이, 피 묻은 넥타이와 검은 가죽 장갑 한 짝이 전부였다. 퍼킨스가 고개를 돌려 간호사를 향해 재차 물었다.

“이게 전부입니까?”

“환자에게서 나온 소지품은 그게 다예요.”

한낱 총을 잃어버려도 왕창 깨지고 보고서를 수십 장은 써야 하는 마당에, ARI는 그보다 훨씬 더 긴요한 수사 정보가 들어있는 물건이었다. 자칫하면 보안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지도 몰랐다. 하얗게 질린 노먼의 얼굴을 본 퍼킨스가, 미간을 좁혔다.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안경의 정보를 아예 삭제하고, 폐기하는 것. 판단을 끝낸 퍼킨스가 망설임 없이 휴대전화를 들었다.

“원격 초기화를 요청해야—”

“절대 안돼.” 노먼이 퍼킨스의 손을 막았다. 그리곤 간절한 눈으로 파트너를 바라봤다.

“사용할 수 있는 ARI는 그것 하나뿐이라고. 초기화하는 순간 영원히 복구 불가야.”

“어쩔 수 없어. 안경을 분실했을 때의 정식 절차가 어떤진 너도 알잖아.”

“…잠깐. 어디 있는지 알 거 같아.”

노먼이 몸을 돌리고 바로 앉자 퍼킨스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침대 턱 아래로 발을 내리고 신발을 찾으려 두리번거리는 노먼의 어깨를, 퍼킨스가 꾹 내리눌렀다.

“얌전히 있어. 또 국장한테 깨지고 싶어서 그래?”

퍼킨스의 팔을 치우며 노먼은 기어코 침대 아래 놓인 신발을 찾아 발을 욱여넣었다.

“말 좀 들어!”

퍼킨스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노먼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잃어버려선 안 되는 물건이야. 날 위해서도, 우리 수사를 위해서도.”

더는 파트너의 헛짓거리를 지켜볼 수 없던 퍼킨스가 의사를 불렀다.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면 이 답 없는 인간이 조금이나마 얌전해질까 싶어서. 하지만 의사는 노먼의 동공을 확인하고, 그의 얼굴과 몸 이곳저곳에 의료 도구를 가져다 대더니 퍼킨스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말을 지껄였다.

“굳이 입원하시진 않아도 됩니다. 심장이 멎었던 분 치곤 놀랍도록 모든 수치가 정상이에요. 체온이 조금 낮긴 하지만, 따뜻한 물 마셔주고 충분한 휴식만 취할 수 있다면 이만 접수하고 돌아가셔도 됩니다.”

노먼의 입가로 미소가 번지고, 잔뜩 휘어진 눈이 파트너를 응시했다. 퍼킨스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 능글맞은 표정이 오늘처럼 밉살스러워 보인 적이 없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