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4부 16화

석양이 지면 밤이 찾아오고

“그만해.”

시도폰은 중얼거리며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를 감쌌던 검은 액체는 불꽃에 재가 되어 사라졌고, 악마는 그런 시도폰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시도폰이 기절하기 전에 내리던 눈은 이미 그쳤고, 하늘도 눅눅한 구름 하나 없이 깨끗해져 있었다.

산 아래로 져가는 해는 모든 것을 태울 것처럼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그런 해를 등진 악마가, 눈을 가늘게 뜬 시도폰에게 말했다.

“아쉽군, 뒤에 더 봐야 하는 부분이 남아있는데…. 억지로 이걸 끊어낼 줄이야. 내가 너무 과소평가했어.”

“….”

입술을 짓씹은 시도폰은 말없이 창을 내질렀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악마는 뒤늦게 회피했지만, 그의 왼손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프진 않지만, 이대로 두면 미관상 별로란 말이지.”

악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붉은 뿌리가 절단면에서 자라나더니 손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는 자라난 왼손을 턱에다 괴고 물었다.

“아직 제정신이 아닌가 보군. 신성력을 제대로 두르지도 못하는 걸 보면. 그런 식으로는 몇 번이고 공격해봐야 소용없다.”

“닥쳐! 당장 네 놈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시도폰의 외침에 악마는 잠깐 동그랗게 눈을 뜨더니, 높게 뛰어올라 천사의 동상이 있던 받침대에 올라섰다. 아까까진 해를 등져, 역광이 드리웠던 그의 얼굴이 이제는 주홍빛 햇살에 물들었다.

그리고 그가 무어라고 중얼거리자, 영안실을 감싸고 있던 자작나무 숲에서 악마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울상을 하고 있었으며, 느릿한 걸음으로 시도폰을 향해 다가갔다. 시도폰이 그들을 해치우려 손끝에 불씨를 틔우자 악마는 그래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지? 또 말장난을 치려는 거면….”

“나는 너를 걱정해서 묻는 거다. 마지막 질문을 하지, 나와 저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키득거리는 악마의 말을 듣고, 시도폰은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울고 있는 악마의 얼굴이 여럿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어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의 발단은 악마들이 으레 내던 짐승의 울음소리와 비슷했으나 그것은 점차, 점차,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의 말로 변해갔다.

[사라지고 싶지 않아요.]

제 창을 붙잡은 악마를 떨쳐내려던 시도폰은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이상했다. 그는 그 악마에게서 아무런 악의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매번 악마를 감지할 수 있었는데.’

[저희를 구해주세요.]

[부디 자비와 구원을….]

그들은 단순히 인간의 말만 구사하지 않았다. 강렬한 햇살이 그들의 얼굴을 비추었고, 시도폰은 마침내 그들이 또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채 자신에게 호소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언젠가는 스쳐 지나갔던 얼굴도 있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시도폰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니라고…. 네가 아까처럼 환상을 보여주는 게 틀림없어. 간악한 자식.”

창을 휘둘러 그들을 떨쳐낸 시도폰이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받침대 위의 악마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악마는 실망한 듯 한숨을 쉬었다.

“내가 거짓을 보여주었다고 오해하고 있군. 역시 아직 내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했어. 이러면 곤란한데… 아, 이런.”

“시끄러워.”

시도폰의 창에 받침대가 부서졌다. 무사히 땅에 착지한 회색빛의 악마는 붉은 뿌리로 창을 단단히 옭아맸고, 시도폰은 뿌리를 불태워 창을 다시 쥐었다.

그런데 갑자기, 악마는 머리가 아픈 듯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그는 재차 중얼거리듯 말했다.

“닥쳐…. 제발,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악마가 미치기라도 하나?”

악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도폰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가 다시 창을 내지르려던 그때, 영안실 입구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장님! 여기 계신 거 맞습니까?”

“자작나무밖에 안 보여, 아 거기,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마세요.”

“악마들이 얼마나 많은 거야 대체. 느껴지는 것만 해도 수십은 되는 것 같습니다.”

“다들 조용. 주위 경계는 전혀 안 할 생각인가?”

마지막 목소리의 주인은 솔라였다. 자신의 위치를 알리려, 소리가 난 쪽으로 급하게 고개를 돌린 시도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멀쩡해진 목소리로 악마가 그의 뒤에서 속삭였다.

“똑바로 봐라. 그리고… 아이 야, 이젠 네게 차례를 넘겨주마.”

솔라가 외쳤다.

“집행자께서 계신 곳을 발견했다. 주변엔 악마들이 있으니 다들 물러서. 크로마, 제가 먼저 길을 열 테니 엄호하세요.”

“네. 걱정하지 마시고 가세요.”

자작나무를 헤매던 기사들이 한 사람을 필두로 튀어나와 시도폰에게 매달렸던 이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들은 기사들의 공격을 막고자 팔을 뻗었다가 그대로 잘려나갔다.

[이러지 마세요. 우리의 말을 들어줘요.]

[아파, 아파, 아프다고.]

시도폰은 망연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자신의 동료가 분명할 텐데 어째서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본래 악마로 보였던 자들은 어째서 억울하게 죽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다시 악마를 바라보았다.

노을은 오늘따라 유달리 길었다. 만약 해가 졌다면, 그래서 어둠 속에서 그 얼굴을 봤다면, 잘못 본 것이라고 자신을 속일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희미한 빛 아래, 제 앞에 선 이가 급하게 회색빛의 껍데기를 두르기도 전, 시도폰은 하늘빛 눈동자를 보고야 말았다. 맑은 날의 하늘을 닮은, 제 신성력과 똑 닮은 하늘빛을 착각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너… 너는 날 공격했잖아. 네가, 네가 그 사람일 리가 없어. 그럴 순 없어, 절대로.”

“….”

“난 아직 세 번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 그러니 네가 제대로 그 사람의 안위를 알려줬을 리 없지.”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마, 내가 널 믿을 것 같아?”

입으로는 열심히 부정했지만, 시도폰은 제 눈앞의 악마를 베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어느새 그의 근처에 다다른 솔라가 시도폰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그러자 시도폰은 그를 향해 위협적으로 창을 휘둘러, 거리를 두었다. 솔라는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아래로 내려가라는 명령을 어겨서 그러시는 겁니까? 하지만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을 추려서 온 겁니다. 당신께 짐이 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자들뿐입니다.”

“전부 내려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솔라는 뒤로 물러서기만 하고, 시도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기사들은 가까이 가지 않고 시도폰의 동태를 살폈다.

시도폰은 재차 외쳤다.

“당장 언덕 아래로 내려가, 명령을 무시할 생각인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혼자…, 뒤! 공격입니다!”

솔라의 외침에 시도폰이 뒤돌았다. 그는 꿈틀거리는 바닥을 피해 몸을 날렸고, 땅속에서 솟아올라 솔라의 십자가를 쳐낸 것은 피처럼 붉은 뿌리가 아니라,

 

새하얀 자작나무였다.

 

시도폰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것을 보았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자 하늘엔 어둠이 펼쳐졌고, 시도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들은 숨을 죽이고 시도폰과 그의 맞은편에 선 악마의 대치를 지켜보았다.

창날이 바닥을 향하도록 들고, 시도폰이 힘겹게 걸음을 내디뎠다. 걸음만큼이나 무거운 입이 움직였다.

“네가 보여준 게 전부 진실이었어?”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악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익숙한 침묵은, 오히려 악마의 정체를 확신하게 했다.

한여름의 나무 그늘에서 카리타스는 시도폰의 질문에 비밀이라고 대답했다. 그날 이후로 주고받았던 무수히 많은 편지에서도, 그는 시도폰에게 진심을 숨기느라 바빴다.

그러니 시도폰이 그 침묵 속에서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완전히 오판이었다.

“카리.”

시도폰은 카리타스를 향해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그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창을 바닥에 질질 끌어가며 걸었다. 바닥의 돌이 금속에 갈리는 불쾌한 소리가 귓전을 때렸지만, 누구도 불평할 수 없었다.

쉬어가는 목소리로, 시도폰이 말했다.

“너는 항상 나한테 많은 걸 숨겨왔지? 그럴 때마다 솔직히 서운했지만, 나는 네가 어떤 상황인지 몰랐고, 그 일이 무엇에 관한 건지 전혀 몰랐으니까 무작정 네게 이야기해달라고 조를 수 없었어. 그런데 이번 일은, 내가 집행자로서 알아야 했던 일인 것 같은데. 왜 이번에도 숨기려고 했어?”

악마는 여전히 침묵했다. 화가 난 시도폰이 허리가 잘려나간 영혼을 가리키며 물었다.

“왜 저들이 악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했냐고 묻잖아!”

“…네가 진실을 알게 되면 괴로울 테니까. 말할 수 없었어.”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해?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죽길 바랐어?”

이번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시도폰은 머리끝까지 화가 차올라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카리타스는 손을 들어 제게 가까이 다가오던 시도폰을 밀어냈다.

그 힘은 미약했지만, 한 번도 카리타스는 시도폰을 그렇게 대한 적이 없었으니 시도폰은 자기도 모르게 밀려나고 말았다. 그는 그렇게 세 걸음을 그대로 밀려났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해주지 않는데, 나는 왜 네가 여전히 궁금한 건지 모르겠어.”

비틀거리다 다시 바닥을 박차고 카리타스에게 달려든 시도폰은, 제 발목을 잡는 붉은 뿌리를 끊어내다가, 나뭇가지의 공격을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왼쪽 어깨에 상처를 입었다.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신음이 입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시도폰은 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는 금방 회복된 팔로 창을 휘둘렀고, 카리타스는 그를 피하며 복잡하게 얽힌 나뭇가지와 뿌리로 창을 옭아맸다. 그것들이 불에 타 재가 되어 사라져, 잿가루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연기를 해치고 시도폰의 공격이 이어졌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널 악마라고 생각해서 죽이길 바란 거지? 그런데 어떡해, 난 이미 전부 알아버렸는데.”

“시도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 이름을 불러?”

시도폰이 휘두른 창이 굵직한 나무 기둥에 박혔다. 국왕을 알현하러 갔던 자리에서도, 흥분한 시도폰의 창을 카리타스가 막아냈었다. 그때를 떠올린 시도폰은 발로 나무를 짚고 창을 빼냈다.

‘우린 왜 항상 남들 앞에선 같은 편이 될 수 없을까. 아니다, 넌 애초에 날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긴 한 건지.’

창을 빼낸 반동을 그대로 이용해 휘두른 시도폰에게, 카리타스의 오른손이 잘려나갔다. 활활 타오르는 푸른 불꽃이 재생을 막았고, 끔찍한 고통에도 카리타스는 시도폰에게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시도폰의 이름을 부르며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과는 너무 미약해서, 시도폰의 분노에 부스러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토록 살기등등한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었으니, 주변의 기사들은 그를 말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솔라만이, 그 모든 장면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새카만 눈을 크게 뜨고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회색빛의 악마와 푸른 옷의 기사가 다시 가까워졌을 때, 시도폰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만 카리타스로 보이는 거라면, 다른 모두에겐 네가 사악한 악마로 보이는 거라면, 난… 널 죽일 수밖에 없는데. 왜 나한테 모든 진실을 보여준 거야? 왜 끝까지 악마인 척을 하지 않았던 건데?”

그러자 카리타스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치켜든 그가 손짓하자 붉은 뿌리가 시도폰의 옆구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극심한 고통에 시도폰이 상처 부위를 누르며 멈추었고, 그 잠깐의 틈을 타, 카리타스는 거리를 벌렸다.

“상황이 너무 답답해서 말이지. 등불이여, 내가 대답해주겠다.”

처음 악마가 냈던 기이한 목소리였다. 시도폰은 공격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다른 이의 입을 통해야만 진실과 진심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비참하게 했지만, 그는 악마의 말을 막지 않았다.

“그대가 봤다시피 성녀는 호위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의 목소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네. 그리고 자네를… 쯧, 여기까지 와서 반항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자꾸 발버둥을 치나?”

혀를 찬 악마는 자신의 뺨을 내리쳤다. 몇몇 기사들은 악마가 혼란한 틈을 타, 시도폰을 지나쳐 기습을 강행했다가 단번에 나가떨어졌다.

겨우 지혈을 마친 시도폰은 그들을 향한 악마의 공격을 막아내며, 다른 기사들이 그들을 밖으로 대피시키는 것을 도왔다. 마침내 신전에 악마와 시도폰, 두 사람이 남게 되었을 때, 악마는 말을 이었다.

“…성녀는 자네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를 받아들였네. 보통의 우리를 소환하는 방법과는 조금 다르지만, 진실을 깨달은 자는 굳이 그런 방법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으니.”

시도폰은 그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하지만 카리타스는 내게 진실을 알려줄 생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렇지, 그렇지만 우리는 그대가 모든 진실을 알았으면 했다. 그러니 성녀가 내 말을 방해하려고 했던 거지.”

그때 시도폰이 그 말을 비웃자, 악마가 물었다.

“무엇이 우습지?”

“내가 진실을 알게 되면 뭘 할 거라고 기대한 거지? 너희 편에 서서 기사들을 다 죽이려고 했을 것 같나?”

“글쎄, 그런 것까지 기대하진 않았다. 다만, 이 몸을 외면하진 못할 걸 알고 있었지. 그렇지 않은가?”

그 말에 시도폰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얼굴을 마구 문질러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하, 그래.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불쾌할 정도야.”

“이 몸의 주인이 알고 있는 만큼만 아는 것뿐이다.”

“….”

이번엔 시도폰이 입을 다물어 침묵을 불러왔다. 잠시 후, 그는 웃으며 말했다.

“악마의 거짓말은 이상하지 않지만, 직접 들어본 건 처음이군.”

“무슨 소릴….”

“네가 정말 그 몸의 주인이 아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진실을 알게 된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시도폰은 말끝을 흐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그의 창이 악마의 심장을 꿰뚫었다. 뒷걸음질 치려던 악마는 어느새 등 뒤에 솟아있는 나무에 막혀, 창을 피할 수 없었다.

쓰러진 악마는 떨리는 손을 뻗었다. 시도폰은 그 손이 제 얼굴을 감싸는 것을 알고도 창을 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미안해.”

창끝에 맺힌 불꽃은 세차게 타올랐고, 더 깊게 박힌 창은 뼈를 부수고 부수다가 바닥에 꽂혔다.

어느 순간 시도폰에게서 떨어진 악마의 손은 자신의 심장을 꿰뚫은 창을 잡고 있었다. 창을 빼내고자 하는 손이 아니라, 이곳이 심장이라고 알려주는 듯한 모습에 시도폰은 급하게 무기를 거두었다.

 

“카리.”

세차게 뛰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피를, 시도폰이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왼손으로는 카리타스를 바닥에서 건져 올려 제 품에 안았고, 그 무게는 오른손으로 잡은 창으로 지탱했다.

바닥은 피로 흥건해져 있었고, 시도폰이 카리타스의 등을 받쳐 든 그 순간에도, 그의 손을 적시다 넘친 피가 계속해서 아래로 흘렀다.

 

때마침 비춘 달빛은, 눈을 적신 붉은 피를 비추었고 시도폰의 푸른 불꽃은 그 피를 검게 비추었다. 이것을 인간이라고 해야 할지, 악마라고 해야 할지, 시도폰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곧 불꽃을 꺼트렸다.

꺼져가는 숨을 겨우 내쉬면서 카리타스는 눈을 뜨자, 하늘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도폰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지도 못하고 카리타스에게 말했다.

“미안해, 많이 아팠지. 그런데 이것 말고는, 방법을 모르겠어.”

우느라 뚝뚝 끊기는 말이었지만 카리타스는 전부 알아듣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졸린 사람처럼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네가 미안해할 거… 없어. 오히려 네게 사과해야 하는 건 난데.”

“너도 잘못한 거 없잖아. 난, 난….”

시도폰은 말을 잇지 못하고 카리타스를 더 세게 껴안았다.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꿰뚫린 몸을 지혈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다르게 카리타스의 몸은 시시각각 아래로 늘어졌다. 겨우 붙어있는 숨으로, 카리타스가 말을 이었다.

“네가 모든 이들의 기대를 업고 경계에 처박히게 된 것도…, 네가 이런 꼴이 된 나를 상대하게 된 것도 다 나 때문이잖아.”

“너를 지키려고 집행자가 됐던 거니까 그걸 후회하고 싶지 않아.”

내용과는 다르게 시도폰은 창을 잡은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아는 곳과 모르는 곳에서 죽어간,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후회하는 건 정확하게 그거야. 내가 네게 같이 북부로 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넌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렇게 말한 카리타스는 천천히 그의 머리를 시도폰의 품에 기댔다.

“네가 아무것도 모르길 바랐는데.”

“왜 자꾸 그런 말을 해. 이러지 마, 그렇게,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가 만나선 안 되는 사이였던 것 같잖아.”

핏물이 눈물에 씻겨 내려갈 것처럼 울던 시도폰이 목소리에 분노를 실었다. 하지만 카리타스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자, 그 목소리는 곧 울음이 되어 형체를 잃었다.

잠시 후, 카리타스는 제 얼굴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빤히 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미안해.”

“그만해. 계속 그런 말 할 거면 안 들을 거야.”

“…그래? 그러면 안 되는데.”

시도폰은 무슨 말이냐는 듯 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좋아해. 아마 죽어서도 그럴 거야.”

갑작스러운 고백이었지만, 시도폰은 기뻐할 수 없었다. 기쁨은 무슨, 이제는 흐르는 눈물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까보다 더 심하게 울기 시작한 시도폰에게 카리타스는 마지막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네 부탁이라면…. 내가 지킬 수 있는 한에서는, 맹세할게.”

“네가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죽지 말아줘. 이 세계가 믿는 진실은 진실이 아니라는 걸, 우리의 적은 악마가 아니라는 걸… 네가….”

갑작스레 끊긴 카리타스의 말에, 시도폰은 눈물을 닦아내고 흐려진 시야를 밝혔다.

카리타스는 눈을 감고 손을 모은 채 잠들어있었다.

그의 어깨를 감싼 시도폰의 손이 떨려왔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시도폰은 곧장 늘어지는, 차가워지는 카리타스를 제 심장에 더 가깝게 끌어안았다. 가쁘게 내뱉는 숨소리도, 터질 것처럼 세차게 뛰는 심장도, 모두 그의 것이었다.

“…나보고 살아가라고 해놓고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카리타스에게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안고 있다고 해서 그의 온기와 호흡, 박동이 카리타스에게 옮겨갈 리는 없었다. 아주 천천히 그걸 자각한 시도폰은 창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추락한 창은 바닥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그 창의 끝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달빛이 그의 발끝을 비추었고, 시도폰은 그 존재를 눈치챘다.

하지만 그는 낯선 존재의 등장을 무시하고 카리타스를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오른손은 이제 창이 아니라 카리타스의 다리를 받치고 있었다.

그는 뒤돌아서 몇 걸음 걷더니 빈 관을 찾아 그곳에 카리타스의 시신을 조심스레 눕혔다. 마음속으로 작별을 고한 시도폰은, 고개를 숙여 카리타스의 이마에 닿을 듯 말듯 입을 맞추고 일어섰다.

낯선 이는 시도폰이 처음 그를 눈치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자리로 돌아온 시도폰이 그에게 물었다.

“카리타스는 왜 제 손에 죽었어야 했습니까? 대답해주십시오, 위대하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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