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4부 18화

사후 처리

*대사가 적어요


왕궁을 장악한 후, 기사단은 본격적으로 이단을 색출해냈다.

신전 내부의 이단은 물론이고, 왕당파였던 귀족 가문들도 들쑤셔졌는데, 불행하게도 그중엔 메릭의 가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메릭의 가문은 교황파에서 왕당파로 돌아선 지 오래되지 않아서 의심은 강하지 않았고, 이단으로 추정할 증거도 나오지 않아서 금방 혐의를 벗었지만, 니스 백작은 이번 사태에 큰 충격을 받고 첫째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경계의 기사단에 이 소식이 알려져, 사태 안정을 위해 기사들 몇이 남부로 파견되었다. 신전과 거주관을 얼추 수습한 뒤, 2월 9일 일요일, 사망한 사제들과 집행자를 위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임시로 복구된 신전 바닥엔 관이 빽빽하게 깔렸다. 천장을 올릴 정도의 시간은 없어,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이 조금씩 관을 덮어갔다. 기존에 의자가 놓였던 곳에 관이 질서정연하게 놓여있으니, 그 광경은 마치 무덤을 실내로 옮긴 듯했다.

수많은 관 사이에서 가장 크고, 하얀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것은 당연히 시도폰의 것이었다. 그의 관만 열려있었고, 그의 창은 겹쳐진 시신의 손 아래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몰려든 사람이 너무 많아, 신전은 본래 넓은 공간임에도 매우 좁게 느껴졌다. 빽빽하게 모여든 사람들은, 눈을 감은 채 누워있는 시도폰의 시신을 보며 저마다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뒷사람들이 자신의 옆 사람에게 이야기했고, 또 그것을 들은 이들이 말한 것을 그 주변인들이 들었다. 그의 표정은 사람들의 말마다 달랐다. 슬퍼하는 표정이었다고도 하고 모든 것에 초연해진 이의 표정 같았다고도 했다.

그들은 그제야 집행자의 죽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앞으로 악마들의 공격이 있으면 누가 우리를 지켜주냐고 공포에 떠는 사람도 있었고, 순수하게 집행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손에 하얀 꽃을 쥐고 있었다.

당시까지도 신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 그들은 시도폰이 왜 죽었는지를 자기들끼리 추측해보았으나 당연하게도 제대로 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의 검고 폭 넓은 옷 위로 하얀 눈이 조금씩 쌓였고, 인내심 없는 누군가가 언제쯤 장례식이 시작되는 거냐며 투덜대기 시작했을 때, 검은 베일을 쓴 이가 단상에 올라왔다. 낮은 목소리는 신전 전체에 울렸다.

사람들은 이 목소리의 주인을 몰랐지만,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고, 일순 조용해진 신전에서, 장례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과 이후 절차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개회를 마친 솔라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눈을 감은 채, 단상에서 안전하게 내려왔다.

다음으로 올라온 이는 베일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정체를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고 나서야 사람들의 표정이 다양하게 변했다.

“…저는 기사단 소속 사제, 아세쿠토레 수페르피키에스 입니다.”

피데이스는 아페를 내세워 사태를 설명했다. 제1 신전에 악마들이 소환되도록 유도하고, 저 바다 건너 쿠나블라의 도움으로 기사단을 이참에 몰아내려고 했던 왕의 계획을, 그의 자식의 입으로 불게 만든 것이다.

그는 그래야 왕족을 향한 백성들의 동정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고, 사람들은 기사단이 귀족 가문의 도움을 받아, 임시로 국가를 경영하겠다는 선언에 반박하지 않았다.

아페가 단상에서 내려온 후, 솔라는 다시 그곳에 올라가 신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며 희생당한 기사들을 위로해달라고 부탁했다.

카리타스가 그렇게 변한 원인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당사자와 시도폰뿐이었는데, 두 사람 다 죽고 없으니 카리타스가 타락한 원인은 아무도 추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겐 믿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이 있었다. 성녀가 타락했고, 그가 불러낸 재앙을 몰아내기 위해 집행자가 희생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시도폰의 관이 닫히고, 사람들은 누운 관들을 향해 하얀 꽃을 던졌다.

눈이 비로 바뀔 수 있다는 이유로 악기 연주 따위도 없었던 적막한 장례식에서, 울리는 음악이라고는 사람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사람들은 비로 바뀌어버린 눈을 맞으며 신전 밖으로 빠져나갔다.


몇몇 자원봉사자들이 기사들을 도와 관을 묻을 수 있는 구멍을 파기 시작했고, 그것을 감독하던 크로마는 일의 경과를 묻는 피데이스에게 문제가 없다고 보고했다.

“피데이스님, 솔라 부관은 여전히 집행자님 쪽에 계십니까?”

가장 먼저 흙 속에 안치된 관은 시도폰의 것이었다. 다른 이들의 관을 묻고 있는 지금, 시도폰의 관은 이미 흙에 덮인 지 오래였다. 피데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그럼 이쪽 감독을 잠시 맡아주실 수 있으실까요? 솔라 부관에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고민하듯 턱을 만지작거린 피데이스가 답했다.

“지키고 있겠습니다. 솔라는 당신을 많이 의지하고 있는 것 같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기왕이면 비를 계속 맞지 말고 실내로 들어가 있으라고 말해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크로마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를 대신해 사람들을 감독하던 피데이스는 다음 주부터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이것저것 시급한 것들이 많았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신전을 꾸릴 사람들을 뽑는 것이었다.

성직자들은 대부분 이미 신전에 등록된 상태였으니 보충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따라서 피데이스는 기존 왕립 학교의 성직자들을 흡수하고 단순 행정 또는 가사에 투입되는 인원은 일반 양민들 사이에서 뽑고자 마음을 먹었다.

한편, 솔라를 찾아간 크로마는, 관의 옆, 맨바닥에 앉아 그대로 비를 맞고 있는 솔라를 발견하고 다급히 다가갔다. 솔라는 장례식이 끝나 베일을 벗은 채 앉아있었는데, 평소의 엄격하고 차가운 모습과 다르게 그의 주변에선 음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크로마가 가까이 가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솔라는 입을 열었다.

“…지금 제가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까?”

보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크로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없습니다. 하지만 비를 계속 맞고 있는 건 위험하니 실내로 들어가 있으라고 말하러 왔어요.”

“괜찮습니다. 이정도로 약한 비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걱정되어서 그래요. 이번 일 이후로 제대로 쉰 날이 없었으니 건강이 약해졌을 게 분명하잖아요. 자, 일어나요.”

크로마의 손이 조심스레 솔라의 손끝에 닿았다. 솔라는 그 감촉을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 계속 앉아있었다. 그런 모습에 크로마는 부러 화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가 해야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잖습니까. 그 일을 다 하기도 전에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일에 차질이 생기면, 당신은 그걸 수습할 자신이 있나요?”

크로마가 처음 자신의 포부를 고백했던 날에 이야기했던 것을 들먹이자, 그제야 솔라는 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앉아있었던 것인지, 휘청거리며 일어선 솔라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냐는 크로마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걸어갔다.

그러던 그들은 아페와 이디스를 마주쳤다.

시도폰이 죽기 전, 이디스는 부상으로 신전을 빠져나가던 중, 중상을 입고 쓰러져있는 언니를 발견했다. 악마들이 그를 신경 쓰지도 않고 떠날 정도의 중상이어서 다른 기사들은 이미 다친 이디스가 그를 살려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디스는 어떻게든 오드샤를 살렸고, 부상의 여파로 오드샤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요양을 하게 되었지만,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이디스를 살렸다.

그리고 국왕과 왕비, 왕자는 이단 혐의로 사형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그들과 쿠나블라 사이의 협력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아직 구금된 상태였다.

그들은 아페를 데려오라고 매일 아우성이었지만 아페는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다만 매번 그런 보고는 들려왔으니 마음이 꺼림칙해, 이디스와 그 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먼저 솔라와 크로마를 발견한 이는 이디스였다.

“두 사람 다 오래간만이에요. 솔라…의 시력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것 같은데 괜찮은가요?”

“전반적으로 문제가 많긴 합니다. 그러니 도와줄 인력도 추가로 뽑으려고 생각하고 있고요.”

솔라의 대답에 크로마가 놀라서 물었다.

“제 도움만으로는 모자란 가요?”

“…단순 문서 내용 전달이나 식사 수발 같은 것까지 당신한테 맡길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 시간에 당신이 다른 일을 맡는 게 훨씬 효율적이죠.”

일이 줄어든다는 말이었지만 크로마는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솔라는 그의 감정을 목소리에 읽어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오드샤의 상태는 어떻냐고 물었다. 이디스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게… 몸 자체는 회복되신 걸 확인했는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계세요. 책을 읽는다거나 식사를 하는 것 같은 일상생활은 무리 없이 하시는데 말이에요.”

그는 고개를 돌려 주변에 다른 이들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복도에 서늘한 겨울바람이 스쳤다.

“종종 그날 일이 생각나시는지 밤에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일어나실 때가 있어요. 그때마다 무슨 일이냐고 여쭤보는데 자꾸 뭔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떨기만 하시고 대답은 안 해주세요.”

걱정이 되긴 했지만, 상대가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 법이다. 아페는 함께 대책을 고민해주긴 했지만, 그조차도 가족이 얽힌 문제가 있었으니 오드샤의 일에 온전히 힘을 쏟아줄 수 없었다.

솔라는 관련 증세가 과거에도 있었는지 알아봐 주겠다고 약속한 뒤 자리를 떴다.


며칠 후, 남부의 신전에 도착한 호셰는 침울한 얼굴로 신전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시도폰의 동상을 다 만들고 나서 그것을 어디에 두어야 사람들이 잘 보고 다닐지 고민을 하던 중, 시도폰은 사냥 대회를 주최하기 위해 아르모리크 산맥으로 떠났다.

플뢰르와 함께 동상 주변을 꾸미며, 시도폰이 돌아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했던 그로서는 갑작스러운 시도폰의 사망 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남부에 도착하니 거리 곳곳엔 하얀 꽃이 그려진 검은 깃발이 걸려있었고, 사람들은 슬프면서도 불안한 표정으로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자리와 차를 내어준 이는 잠시 후, 솔라를 데리고 응접실로 돌아왔다. 호셰는 솔라가 왜 그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지, 왜 눈을 감고 있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솔라는 그런 질문을 허락할 생각이 없는지 바로 대화를 시작했다.

“소식은 들으셨겠지요.”

“…처음엔 못 믿었는데 남부로 와보니 실감이 되더군.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악마를 죽이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셨다고는 말만 줄곧 해대고 말이야.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주게.”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집행자께선 타락한 성녀를 죽이고 일대의 악마들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하… 이것 참.”

믿을 수 없다는 듯 호셰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는 아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덤에 들러 추모할 수 있게 해주겠나?”

“추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제가 편지로 미리 말씀드렸던 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건 일단 도구를 들고 왔으니 재료만 있으면 할 수 있네. 한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장담을 할 수가 없겠어. 집행자를 그려둔 초상화라도 남아있으면 참고하고 싶은데.”

솔라는 잠시 고민하더니 책상에 놓여있던 작은 종을 울렸다. 아까 호셰를 이곳으로 안내한 이가 문을 두드리고 응접실로 들어왔고, 솔라가 그에게 무어라고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방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들고 온 것은 곳곳에 핏자국이 묻어 있는 시도폰의 초상화였다. 액자 속의 시도폰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화공을 바라봤던 모양이다.

호셰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히 액자를 받아들었다. 액자를 감싼 흰 천이 바람에 팔랑거리자, 그림을 바라보는 호셰의 눈동자도 덩달아 흔들렸다.

그는 그림 속 시도폰을 계속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을 안내받았다. 그리고 크로마를 따라 시도폰의 무덤으로 가, 플뢰르가 만든 꽃다발을 내려두고 작업실로 돌아갔다.

호셰가 사라진 응접실에서 솔라는 차를 마저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피데이스가 그를 찾아 노크도 없이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드물게 화가 난 목소리로 그가 솔라에게 말했다.

“호셰가 온 걸 봤다. 뭘 할 생각이냐?”

“이미 다 예상하고 오신 것 아닙니까?”

솔라는 그에 지지 않고 질문으로 답했다. 한숨을 쉰 피데이스는 아까 호셰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차를 거절하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동안 동상을 조각했던 것도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라, 이번에 신전이 박살 난 김에 내가 아예 동상을 없애버리려고 했던 것을 모른다고 할 셈이냐?”

“당신께서 교리에 엄격하게 구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 제게 제안했던 것도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삼는 교회를 개혁하자는 것이었죠.”

자그마치 10여 년이 다 되어가는 과거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피데이스의 신념은 변함이 없었고, 솔라는 그것에 완전히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시도폰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그를 따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협력했었다.

수많은 사제가 죽어 빈자리가 생긴 지금, 피데이스는 그가 원했던 대로 능력 위주의 인선을 펼칠 수 있었다.

사제가 필요한 부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왕립학교 출신을 등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 중에서도 최대한 선별해서 뽑았고, 굳이 신성력이 필요하지 않은 직책의 사람을 뽑을 땐 여러 단계의 시험을 거쳐서 등용했다.

솔라는 이 과정엔 이의가 없었다. 크로마는 조금 불만이 있었던 듯했지만, 남들이 보기에도 아주 공정해 보이는 시험이었으니 그는 섣불리 제 목적을 위한 무언가를 할 수 없었다.

피데이스가 사건 이후 인선을 전담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많은 이들이 그에게 연줄을 대고자 했으나 모두 매몰차게 거절당했다고 한다.

심지어 피데이스는 자신에게 그런 부정한 청탁을 했던 자들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비난하여 반면교사처럼 삼기도 하여, 어떤 두 사람이 그렇게 망신을 당한 이후로는 그런 꼬임이 전혀 오지 않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좋은 면이든 안 좋은 면이든 피데이스의 존재감이 너무 커지게 되었다. 솔라는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이미 죽어버린 시도폰보다, 살아있으면서 권세도 가지고 있는 피데이스를 더욱 추종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피데이스를 믿고 인선을 맡긴 것은 자신이었으니, 그리고 그렇게 뽑힌 사람들은 꽤 신전에 도움이 되고 있었으니 솔라는 그 건으로 피데이스를 지적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피데이스를 견제하지 않을 순 없지.’

피데이스가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면, ‘부관인 네가 그렇게 행동하는 건 집행자께 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냐.’라고 지적했을 테지만, 만약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솔라는 ‘저는 누구에게나 저를 집행자의 부관으로 소개할 겁니다. 제 위엔 항상 그분이 계신다는 걸 누구나 의식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해야 할 말을 정리한 솔라가 재차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건 양보할 수 없습니다.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기엔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게 필요하고,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가장 쉽게 믿을 수 있죠.”

“사람들이 그런 우상 없이도 믿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제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 일을 하기 귀찮다고 교리에 어긋나는 동상을 세우는 건 직무 태만과 다른 바 없어!”

정직하고 바른 사제라면 당연히 할 법한 말이었으나, 솔라는 그 말이 이상할 정도로 거슬렸다. 글을 배우지 않고 버텼던 어린 자신이 생각나서였다.

시도폰의 권유로 글을 배우고, 피데이스의 도움을 받아 직접 경전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는 신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식의 습득이었고, 그가 진심으로 신을 따르겠다고 결정하게 된 계기는 그런 머리를 통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무엇도 없는 몸으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나섰던 시도폰, 그리고 그 희생에 감복해 그를 살리고자 친히 성령을 내려주었던 신.

그 두 존재가 그려낸 환상적인 풍경과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황홀한 빛, 그것이 솔라에게 진정한 가르침을 준 것이었다. 물론 문자로 쓰인 가르침이 아니었으니 누군가가 솔라에게 그것이 어떤 가르침이었는지 물어본다면 명확하게 설명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험을 하게 된 솔라로서는 문자로서 습득할 수 있는 깨달음이란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피데이스를 설득하고자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굳이 그를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호셰를 시켜서 동상을 만들고 길 곳곳에 세워두기만 하면 된다. 피데이스가 남들의 눈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것을 부수려고 든다면 문제겠지만, 솔라는 그가 이미 만들어진 동상을 훼손하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길고 긴 대화가 이어졌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씩씩거리며 응접실을 나가던 피데이스는 이 문제를 회의에서 정식으로 제기하겠다고 말했다.

솔라는 그렇게 하라고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피데이스와 교체하듯 들어온 시종의 부축을 받아 호셰의 작업실로 향했다. 그가 나타나자 호셰는 당황해하며 아직 작업을 시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솔라는 마련된 의자에 앉으며, 당장 작업을 재촉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의 눈치를 보던 호셰는 조심스레 솔라가 편지에 동봉한 도안을 꺼내 들었다.

솔라가 시력을 잃기 한참 전, 호셰의 작업물을 본 당일, 솔라는 자신이 생각해둔 이상적인 동상의 형태를 스케치를 해두었는데 다행히 그것이 그의 일기장에 남아있었다. 솔라는 호셰에게 남부로 와서 집행자의 동상을 제작해달라는 의뢰를 하며 그 스케치를 동봉했었다.

“자네의 스케치는 내가 만들었던 동상과는 다르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동세와 구도를 보여주고 있어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네. 그런데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네, 솔직하게 대답해주게.”

“동상 제작에 필요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질문하십시오.”

호셰는 다소 거북한 것을 물어보는 사람답게, 솔라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넘기고 입을 열었다.

“자네는 집행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주게. 동세와 구도만으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네에겐 있는 것 같으니.”

“제게 그런 게 있다고요….”

솔라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호셰는 솔라를 제대로 마주 보지 않았으니, 그런 것은 알아차릴 수 없었다. 만약 그가 그 미소를 보았다면 부차적인 설명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호셰는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 설명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군, 그러니까… 그 두 가지로 설명하기 힘든 요소들을 말해주면 좋을 것 같네. 자네가 동상을 상상했을 때 떠올린 색, 그 주변의 빛과 공기의 모양, 소리, 어울리는 상황 등등을 말해보게.”

그제야 감을 잡았다는 듯 솔라는 입을 열었다. 길지 않은 설명이 끝나고 호셰는 ‘그런 거였군.’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라는 자신의 설명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신기하게도 호셰는 그런 솔라의 머릿속을 잠깐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인지 혼자 이런 것 저런 것을 써 내려갔다.

말없이 내리 무언가를 적던 호셰는 솔라에게 자신의 작업물이 완성되었을 즘에는 시력이 돌아올 수 있는지 물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것이 회복될 거라고 예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광경을 직접 봤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가… 이 일이 끝나면 자네한테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하지만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집행자의 이목구비는 제 손이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그걸 손이 기억하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호셰는 그것을 물어보고 싶다는 욕망과 굳이 그것을 알고 싶지 않다는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이성의 손을 들어주었다. 대화는 거기서 거의 끝이었다.

호셰는 연습이 필요하니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고, 솔라는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하며 작업실을 나왔다.

‘호셰가 작업 자체에 대한 반감이 없어서 다행이야. 이미 한번 만들어본 사람이라 그런가. 아니면 피데이스처럼 교리에 엄격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건가. 어느 쪽이든 나한텐 좋은 일이지.’

침대에 기대어 앉은 솔라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눈이 멀지 않았다면, 자신이 직접 집행자의 동상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인데, 그것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광경과 동상 사이에서 결정하라고 한다면 나는 다시 그 광경을 보는 걸 선택하겠지.’

무언가를 선택하면 다른 것을 버려야 할 때가 있다. 피데이스를 버리고 크로마를 선택하는 것처럼. 솔라는 자신의 아래에 모든 것을 두기로 했다. 자신의 위엔 집행자와 위대하신 그분만이 존재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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