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커뮤 by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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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스라이팅, 폭력, 자살 충동 묘사 주의

그 날은, 정말이지 운이 좋지 않았다. 아르망은 제게 생일 선물이라며 몸에 맞지 않는 속옷을 주었고, 하루 종일 이어진 축하연에서는 종일 환하게 웃어야 했으며, 아르망이 원하는 것과 선물을 저울질해야만 했다. 아르망의 사업은 번창하고 있었고, 그럴수록 그는 나태하고 오만해졌으며, 그 성정이 파놓은 구멍을 메꾸는 것은 자신의 일이었다. 자신이 호스티스이나 결코 주도권을 쥔 적은 없는 축하연은 자정이 넘은 후에야 끝났고, 엘레나는 그 날 침실에서 뺨을 맞았다. 아르망의 정부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는 이유였다. 실컷 소리를 지르던 그는 제 성이 풀린 후에야 방을 나갔고, 엘레나는 아무도 없는 침실에 고요히 앉아있다가, 홀린듯 제 정원으로 향했다. 시녀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안주인의 밤나들이를 배웅했다. 돕는 이는 없으나, 동정하지 않는 이 또한 없는 까닭이었다.

연회가 열리던 곳과는 조금 동떨어진 곳에, 엘레나의 정원이 있었다. 엘레나는 항상 품고 다니는 열쇠로 온실의 문을 열었다. 기름칠 되지 않은 문에서는 끼익거리는 불쾌한 소리가 났다. 화사한 장미가 가득한 온실 깊숙히, 낡은 카우치가 하나 놓여있었다. 엘레나는 그 카우치에 주저앉았다. 종일 구두를 신고 버틴 발과 종아리가 욱신거렸고, 부어오른 뺨은 따가웠으며, 무엇보다, 지독하게 피곤했다. 깊이 잠들고 싶었다. 카우치에 몸을 묻고, 엘레나는 멍하니 손발을 까닥거렸다. 그런 엘레나의 손끝에, 무언가의 이파리가 스쳤다. 이곳으로 올 때 스승이 선물해준 벨라도나의 잎사귀였다. 꽃이 지고 난 자리에 까만 열매가 열려있었다. 엘레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그 열매를 몇 개 땄다.

엘레나의 손에 작고, 까만 열매가 쥐인다.

엘레나는 그 열매가 무엇의 열매인지 알고 있다.

그 열매를 먹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잘 알고 있다.

이 온실에는 아무도 오지 않고, 자신이 방에 없다는 것을 확인해도 아마 한동안은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 몽유병으로 여기저기 나다닌다 생각하고, 주인 어른의 눈치를 보며 숨죽여 찾겠지. 그러니 이곳까지 오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방금 종이 두번 울렸으니, 시간은 두시. 동이 틀 때까지, 약 네시간 반. 시녀들이 오는 시간을 합치면, 약 다섯 시간.

그 다섯 시간 안에, 이 작은 열매 몇 알은 제 할 일을 할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엘레나는 그것을 바라본다. 고통스럽겠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이 긴 시간에 비하면 짧겠지. 수많은 자살자들이 그렇듯, 자신도 삶을 갈망하며 울부짖게 될까? 혹은 그저 잠들듯 조용히 눈을 감을까. 엘레나는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 무엇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참을 그저 내려다본다. 손 안에서 죽음이 뒹군다.

그러나, 결국 엘레나는 손을 쥐어 그것을 뭉개고 만다. 그 말랑한 과육은 참 쉽게도 뭉그러진다. 엘레나는 그것을 제가 앉은 낡은 카우치 위에 닦아낸다. 과즙이 카우치 위에 또다른 얼룩을 덧댄다.

방법이라면 많았다. 제초제도, 양잿물도, 비단 끈도, 정원용 가위도, 하다못해 눈썹칼에 이르기까지,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지금껏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엘레나는, 멍청하고, 나약하고, 도움 하나 청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이지만, 그걸 모를 정도로 멍청한 이는 아니었다.

색색거리던 숨소리가 점차 커진다. 한참을 뛰다 지쳐 쓰러진 사람처럼, 조금씩 거칠고 다급해지던 숨은, 마침내 긴 울음을 토해냈다.

“엄마, 엄마, 엄마아…….”

한 번 터진 울음은 멈추지 않는다. 오래 참아온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 좀, 나 좀 데리고 가……. 나 좀 살려줘……. 엄마…….”

고작 한 사람이 앉을법한 작은 카우치 위에서, 엘레나는 목놓아 울며 몸을 구겼다. 그렇게 작아지면, 정말 작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저 행복할 줄만 알던, 바보같이, 멍청하게 아무것도 모르던 그 때로. 아무것도 몰라도 되던 그 때로. 스스로 제 몸을 끌어안은 팔이, 손이, 형편없이 떨렸다. 엉망이 되어가는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엘레나는 카우치에 기대 몸을 말며 한참을 울었다.

도움을 청할 용기도, 모든걸 그만두고 뛰쳐나갈 용기도, 하다못해 죽어버릴 용기조차 없다. 그럼 나는 뭐지? 내가 가진 것이 뭐가 있지? 이렇게 괴로운데 죽지도 못한다면, 내가 뭘 할 수 있지?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그의 외도를 못 본 척한 순간부터? 그는 원래 그렇다, 체념한 순간부터? 그의 말을 듣고, 그의 말에 따르고, 그를 믿은 순간부터? 혹은, 이곳에 발을 들인 그 순간부터? 그도 아니면, 그저 멍청하고 무능하게 태어나 자란, 그 모든 순간이?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엘레나는 그 답을 알지 못한다.

엘레나는 카우치에 눕듯이 기대어 생각했다. 한참 울면 잠이 오던데. 그런데 이상하게, 잠도 오질 않네…….

카우치에서는 풀내음이 올라왔다. 언제나 반갑던 그 내음이 이상하게 지겨웠다. 자신이 사랑하던 것들이 가득한 곳에 있음에도, 그냥 그랬다. 지겨웠다. 저들에게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비료를 뿌리던 나날이 꼭 전생처럼 아득했다.

동이 트고, 그래서 더 이상 울 수 없을 때까지, 굳게 닫힌 온실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음날, 엘레나는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치장을 마쳤다. 화장대 앞에 앉은 엘레나에게, 아르망이 다가가 말했다.

“오늘은 좀 늦네. 무슨 일 있었던건 아니지? 오늘 중요한 날이야. 알잖아.”

“네, 그럼요.”

“오늘도 잘 해보자고. 그러고나면, 당신이 가지고 싶어했던걸 가져다줄테니. 그, 플레다 영주였나? 그 부인이 가지고 있다는 묘목 말이야. 어때, 좋지?”

“네, 그럼요.”

“그래, 그래. 어제 일은 잊고. 말했잖아, 사내란 원래 그렇다고. 알지? 자, 갈까?”

“…네, 그럼요.”

엘레나는 웃었다. 언제나 그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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