誓約, 密約
하얀 서약, 검은 밀약
https://youtu.be/jH9bY2Y6v-Q?si=cd4l0amF2y9Q9wbG
저 너머의 인형이 무언의 벽을 뚫고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잠깐일지도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평화를 되찾은 노르브란트의 펜던트 거주관에서 느낀 시선. 하지만 이 곳에서 그것이 사람의 형태를 띄고 있다 하더라도 정녕 사람일지는 모르는 일이지. 다만 그 시선의 출처를 나는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지키지 못한 자들의 시선이었다.
그의 신념과 항상 굽은 그 등에 얹어진 이어져가는 의지를 들은 이후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내가 지키지 못한 자들은 고대인들과는 달리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올 수 없는 자들 뿐이었다. 민필리아도, 오르슈팡도, 문브뤼다도 그 누구도 이 세상의 빛을 지켜보지 못하고 에테르계로 떠나버렸다. 언제나 내가 그들을 지킬 수 있을 만큼의 힘과 용기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데도 그들이 나에게 하던 이야기들은 언제나 마음 깊숙이 남아있어 항상 그들이 이야기하던 것을 나또한 읊조린다. 린에게 이야기해주었던 영웅에게 슬픈 표정은 어울리지 않아... 라던가. 이야기를 할 때에는 상대방이 어떨지 생각하며 이야기를 하라고 하던가,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오르슈팡이 어떤 심정으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린에게 지금 필요한 말이 이것인 것 같아 이야기했을 뿐. 같잖은 따라쟁이일 뿐이다.
그들은 나를 원망하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스스로 부여한 죄책감은 쉬이 사라지지는 않는 것이었다.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율모어 사람들이 서약을 맺을 때도, 원초세계로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전할 때도 언제나 무언의 시선들이 나를 따라다니는 감각이 선명했다. 당신들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함께 기뻐해 주며 더욱 빛나는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텐데라고 생각하고야 만다. 별을 읽으며 가장 빛나는 것을 좇는 것도 그 이유였다. 당신들은 내가 보았던 사람들 중 가장 빛나는 사람들이었으니 분명 그 에테르가 환하게 빛나 우리가 찾을 수 있을 만큼 그 곳에서도 빛나고 있겠지.
하얀 바위에 새겨지는 서약을 읽으며 나는 그 앞에 당신들과 서약을 맺는다. 언제나 가장 빛나며 가장 어두운 영웅이 되어 그대들을 지키리라고. 그리고 스스로 밀약을 맺는다, 언젠가 에테르가 되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게 된다면 별조차 되지 않고 떠나리라고. 나 대신 빛나는 자들이 이리 많은데 어찌 그 자리에 함께할 수가 있겠어.
그라하 티아는 내 죽음을 미리 보았던 자였다. 그리고 이 곳에서는 가장 오래 산 어쩌면 현자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할지도 모르겠다. 내 눈에는 현자보다는 오히려 그가 영웅으로 보이지만. 그의 손을 잡고 나는 부탁한 적이 있다.
" 수정공. 아니 수정공이 아니지... 그라하 티아 난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언젠가 만약 내가 두 눈을 다시금 뜰 수 없게 된다면 나에게 잘 자라는 말 한마디만 해줄래요? 사람의 일이라는건 모르는 거니까요. "
그가 과거 크리스탈 타워를 봉인하기 위해 문을 닫고 혼자 남게 되었을 때 문밖에서 내가 읊조리던 말이었다. 문 안에서의 당신이 무슨 반응이었는지 나는 알 도리가 없지만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이야기를 들은 당신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눈이었다. 입을 달싹이며 무언가 물으려는 눈치였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말을 더하였다. 잔인한 부탁인 걸 알지만 이런 걸 부탁할 만한 사람은 당신밖에 없었다. 나를 구하기 위하여 그 모든 것을 넘어 이 자리에 존재하는 그대말이다. 내 마지막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곳에 있는 것이겠지. 내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나는 그럴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언제나 이야기하지만 그대가 정한 일이니 더 할 말은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도 했고. 이런걸 부탁하는 이유는... 나는 그저 잠에 들었을 뿐이니 에테르계로 떠난 것도 아님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래야 내가 별이 되지 않을 수 있지.
" 참...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이야기를 했던가요? 좋은 아침이에요 그라하 티아. "
햇빛이 내리쬐는 이 곳은 제 1세계 노르브란트. 벽 너머의 무언의 시선과 눈앞의 또 다른 영웅과 맞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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