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샘플

오직 네게서만 배운 것들

2차 파이널판타지 BL 드림

1. 까마득한 두려움

눈발이 가혹하게 흩날리는 한밤중이었다. O과 K가 동거하는 오두막 뒤편에는 이슈가르드에 어울리지 않게, 딱 귀여울 만큼 야트막한 언덕이 있었다. 먼 옛날 누군가가 벤치를 가져다 두었는데, 인적이 드문 곳을 선호하는 K가 은근히 좋아하는 장소였다. 연인의 비밀 데이트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O은 애인이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잠깐 나가서 그 벤치를 닦거나 보수했다. 곁에 꽃을 심고 싶었지만, 혹독한 겨울을 버티는 품종이 없어서 포기해야 하는 게 아쉬웠다. 그 벤치는 언젠가 여기서 황혼을 등지고 청혼해야지, 하고 마음먹은 곳이기도 했다. K가 이곳은 늘 말끔하다고 신기해할 때면 있지도 않은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K를 생각하면, O은 상대적으로 사교적이었다. 비록 혼외자 출신이지만 포르탕 가의 기사이면서 훤칠하고 수려한 겉모습이 더해져,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늘 여럿과 함께 있거나 K와 단둘이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런데 O은 지금 홀로 벤치에 앉아 있었다.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상체를 숙인 그는 애꿎은 머리칼만 마구 헤집었다.

‘K가 없어.’

K가 O을 피해다닌 지도 보름째. 가득 찬 달이 기어코 기우는 시간이었다. 내내, K는 그를 피해 다녔다. 어찌나 날랜지 O은 연인의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온몸에서 피가 마른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는 K를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O은 연인을 남들보다 조금 더 알 뿐, 잘 알지는 못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 아니다. 주변 사람이든 저 자신이든, K를 전혀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 깨달음은 O을 그 무엇보다 나약한 사내로 깎아내렸다. 그간 쌓아온 모든 추억이 아득하리만치 멀게 느껴졌다. 그는 차디찬 맨손에 얼굴을 묻었다. 빌어먹을. 몇 번이고 씨근거리는 저속한 말들은 하나같이 본인을 향한 것이었다.

‘K. 네가 이런 식으로 굴면, 연인이란 관계는 무슨 쓸모겠나? 어차피 너는 날 전혀 믿지 않는데.’

그 말. 그 말과 태도가 전부 문제였다. 멍청했다. 순간의 서운함을, 유치한 충동을 못 이겨 비열하고 폭력적으로 풀고 말았다. 그 찰나, 연인이 보인 눈물은 머릿속에 통째로 밀고 들어와 O을 모래성처럼 무너뜨렸다. 그는 이슈가르드에서 손꼽히는 기사였다. K와 겨룰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무 무쓸모한 잘난 체에 불과했다. 누구보다 강인하다는 평을 듣는 O은 자그마한 슬픔 한 방울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지독한 자기혐오라는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 들어왔으나, 가장 강렬한 두려움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K가 영영 저를 등지고 떠나버린다면? 저는 이슈가르드에 묶인 정기사이나 그는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O에게서 영영 숨어다닐 수 있을 것이다.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감정이 덕지덕지 붙은 새하얀 입김이 샜다. 저를 필사적으로 피하는 K의 심경을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 성격에, 누구에게 상담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 누구와도 고민을 나누지 않는, 껍질에 숨은 소라게 같은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최악의 최악을 떠올리고 어둠 속에 자기를 가둬버렸겠지. 자기 자신을 끝없이 의심하고 책망하는 게 습관인 K는 본질적으로 혼자였다. 그런 와중에도 혼자만 남겨지는 건 꺼렸다.

언젠가, 그가 늦게 들어왔을 때 집에 없는 척하고 그를 지켜본 적이 있다. 꼬리가 축 처져 어깨마저 동그래진 연인에게 달려들어 키스를 쏟아부었더랬다.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조금씩 빳빳하게 올라와 살랑거리는 꼬리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K는 내성적일지언정 O의 쾌활함을 밀어내지 않았다. 못 이기는 척 당해주면서 수줍게 애정을 속삭이는 남자에게 O은 온 마음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을 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딴 빌어먹을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그는 K의 기운 없는 꼬리 흔들림과 조금 처진 입매를 잘 알았다. 다시는 그런 멍청한 장난을 치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맹세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 이 꼬락서니를 보라.

“K,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가….”

그가 근무하는 부대에 가도, 평소 같이 다니던 식당에 가도, 하다못해 자주 거닐던 공원에 가도 K는 보이지 않았다. 같이 사는 오두막에 없는 건 당연지사였다. 일전에 K가 벌여온 다양한 사건들-O이 속으로 일방적 희생이라고 이를 가는 것들-은 그의 타오르는 불안에 기름을 양동이 단위로 끼얹었다.

걱정과 죄책감, 두려움이 한 곳에 뒤엉켜 그를 산지옥에 처박았다. K를 만나기 전에는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감정들이 그에게로 파도쳤다. 물론, O은 닻을 잃은 나룻배였다. 있던 사람이 사라진 자리는 지독하리만치 선명했다. 남들은 고작 보름이라고 하지만 O에겐 세계가 뒤집히는 시간이었다.

냅다 피하기만 하는 게 답이 아닌 줄은 그 또한 알고 있을 것이었다. O의 불안을 자극하는 건, 그 자신이 K에게 꼴도 보기 싫은 존재로 기억될 가능성이었다.

밤에 길게 못 잔 탓에,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고 보기 싫은 새집 머리는 누가 보아도 낯설었다. K를 웃게 했던 평소의 쾌활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신경질적인 태도가 채웠다. 오죽하면 동료들이 좀 머릴 식히고 오라며 내보낼 정도였다.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눈이 쌓여 온몸이 차게 식었다. 그러나 가슴 한쪽에 구멍이 뚫린 듯한 허전함과, 흑백으로 변해 단조로운 세상만은 여전했다.

K. 내 K. 이대로 영영 이별을 고할 생각은 아니겠지? 제발 내게 기회를 줘.

그는 한참 만에 일어섰다. 벤치에 눈이 잔뜩 쌓였고 그는 습관적으로 털어내 정리했다. 둘만의 추억이 가득한 공간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 무엇보다 무거웠다. 그가 없는 공간이라니, 가구를 같이 고르면서 서로 장난을 걸던 게 고작 몇 달 전이다. 불씨마저 사라진 벽난로는 그 어떤 온기도 더하지 못했다. 싸늘한 방. K가 나간 뒤 전혀 손대지 않았다. 손대지 못했다. 그가 머문 흔적이 영영 사라질까 봐.

어떻게든 간단한 요기를 해결하고 재차 머리를 굴린다. 여태, K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주변 인물들에게 그의 행방을 추궁하는 것만은 자제해 왔다. 그러나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기적인 선택일지라도, O에겐 연인을 찾는 게 더 중요했다. 이제 포르탕의 가장 빼어난 기사는 단 한 사람이 없으면 살 수 없게 되었다.

K는 그의 가장 큰 사랑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이었고, 이제 O을 꼼짝없이 책임져야 하는 신세였다. 그것만은 명백했다.

2. 울컥 차는 서운함

이 모든 문제는 O의 과보호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K는 이따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구했고, 종종 그 안에는 연인도 끼어 있었다. 정작 O은 그걸 지독히 두려워했다. 영웅의 연인으로 산다는 게 이렇다는 걸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째서 많고 많은 사람 중 K여야 하는가? 그의 하나뿐인 연인만이 구할 수 있는 세계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솔직한 마음으로, K의 희생만이 유일한 답인 세계라면 끝나버려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O은 감내했다. 그 모든 게 K의 애정 어린 선택임을 기억하고 자기 자신을 억눌렀다. 웃는 얼굴로 끌어안았고 기쁜 마음으로 키스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새를 묶어 가두는 게 폭력이듯, 그의 머릿속에 펼쳐지는 음습한 욕망은 더욱 추악할 것이다.

그래서 참았다. 그러나 변명이었다. 그 모든 분노와 처절함을 K에게 쏟아버리다니. 꼭 해야 한다면 홀로 몇 잔을 마시면서 삭이면 되는 일이 아닌가. 제가 가장 혐오하는 행동을 했다. K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면서 저 혼자 씩씩댄 건 그 무엇보다 저열했다. 어쩌면 그가 K를 찾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의 판결을 얌전히 기다리는 게 사람 대 사람의 예의일 가능성도 있었다.

“젠장….”

그는 침대에 드러누워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가 괴로워하는 맥락은 둘이었다. 하나는 그 자신의 같잖음, 나머지는 K를 향한 서운함이었다. 그래서 당할 만큼 당해 너덜너덜한 마음으로도 제 잘못을 완벽히 인정해 굴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K가 다쳤다.

다른 도시로 토벌을 나가는 길이었단다. 동료가 무기를 잘못 써서 사고가 생길 뻔했는데, 행인이 다치는 걸 막다가 피를 봤다고 했다. 솔직히 O은 석궁을 잘못 건드렸다는 그 자식이 무언가 더러운 의도가 있던 게 분명하다고 믿었다. 토벌에 직접 참여할 만큼 훈련받은 자가 대관절 무슨 맥락에서 그딴 식으로 굴었단 말인가.

K는 과묵하고 너그러웠다. 분명 꼬리를 뻣뻣하게 굳힐 만큼 아픈 주제에 상대의 잘못을 감쌌을 것이다. 실수라고 싹싹 비는 사람에게 좀처럼 화내지 못하는 선한 남자. 동시에, 저를 걱정할 연인을 배려해 감쪽같이 숨긴 기만자. 이해할 수는 있었다. K가 아주 드물게 달고 오는 심각한 부상과 비교하면 스친 정도의 상처였다. 그러나 공감하진 못했다. 걱정할 상대를 배려하는 것과 아예 상처를 감추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맙소사, 그렇다고 멍청하게 굴어도 된다는 얘긴 아니잖아.”

언성을 높였고, 멋대로 비꼬아 해석해 상처를 줬다. 그는 몸을 뒤집어, K의 체향이 잔뜩 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꼴사나운 신음이 흘렀다. 해가 뜨면 그의 부대 동료들을 찾아갈 것이다. 오밤중인 지금 당장 쳐들어가지 않는 게 O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눈을 감자 암흑이 덮쳤고, 그 새까만 배경에서 보름 전 다툼이 실로 짜이듯 떠올랐다.

‘오, O. 이건 별것도 아닌걸. 난 괜찮아. 봐,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잖아. 그렇지?’

‘K,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나. 너는 내게 부상을 감췄어. 네가 옷을 갈아입을 때 들어오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겠지.’

‘정말 미안해…. 난, 그저 네가 걱정하거나 불안해할까 봐 그랬어.’

‘너는 다음에 같은 일이 생겨도 지금처럼 행동할 생각이겠지.’

그때, K가 차마 대답을 잇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서운함이 울컥,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K는 연인을 믿음직한 사내로 보지 않는다고, O은 그렇게 오해했다. 그는 결코 K에게 보호받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그가 자길 위해 희생하는 상황만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단련했고, 그를 지키지는 못 해도 짐덩이가 되진 않는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K는 여전히 O의 고통을 대신 괴로워했다. 꼭 상급자가 하급자를 돌보듯. 그는 돌봄 받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무엇보다, 연인에게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기둥은커녕 지켜줘야 할 존재로 보인다는 그 느낌이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그런 식으로 표현해서는 안 되었다.

‘K. 네가 이런 식으로 굴면, 연인이란 관계는 무슨 쓸모겠나? 어차피 너는 날 전혀 믿지 않는데.’

‘O…!’

‘그래서 나 역시 널, 믿을 수가 없어.’

이 사실을 그 순간에도 알았다. 몰랐다면 흠칫 놀라 입을 틀어막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너무 늦었다는 말도 맞았다. K는 이미 상처 입은 뒤였다. O이 제가 흘린 망언을 수습하지 못해 찰나의 침묵에 빠졌을 때, 그의 연인은 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그는 등허리를 기어오르는 서늘함을 깨달았다.

‘미, 미안해….’

사과해야 할 사람은 O임에도 중죄인처럼 고갤 푹 숙인 K가 뒷걸음질 쳤다. 반사적으로 다가가자 두 걸음이 더 멀어졌다. 저를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에 심장이 발끝으로 추락했다. 다급히 붙들었으나 곧 저도 모르게 놓아주었다.

흔들리는 눈을 한 K의 눈가가 붉었다. 울고 있었다. 아니, 울지도 못해 입술을 하얗게 깨물고 있었다. 그렇게 처참한 모습을 O은 처음 보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연인을 울렸다. 눈물 몇 방울이 떨어져 함께 산 양털 카펫을 적시고, 그가 나갔다.

‘잠깐, K!’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문짝을 젖혔을 때, K는 이미 거기에 없었다. 휑한 거실이 반길 뿐이었다. 외투 한 장 챙기지 못하고 뛰쳐나갔을 것이다. O이 급하게 망토를 들고 따라 나갔지만, 강한 눈발이 그의 발자국을 감추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게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였다. 어쩌면 정말로 마지막, 그러니까 영영 이별이 될지도 모르는.

뜬눈으로 밤을 새운 O이 몸을 일으켰다. 같이 고른 아기자기한 자명종을 끄고, 일어나서 외투를 챙겨입었다. 후회에 젖은 사랑을 찾으러 갈 시간이었다.

 

3. 내 안의 비겁함

열엿새 차 아침. O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댈 기세인 그에게, 웬만한 사람들은 K의 행방을 줄줄 불었다. 애초에 O이 그를 해칠 리 없다는 믿음이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정말 자길 몇 대 칠 만한 미친놈으로 보였거나.

자주 가던 공원에 늘 앉아 있는 노인은 그에게 시장 과일가게로 가라고 했다. 과일가게 사장은 구석진 곳에 있는 아기자기한 레스토랑에 가랬고 레스토랑 주방장은 장인이 운영하는 대장간을, 대장장이는 드물게 민들레가 뿌리를 내린 그늘 밑을 가리켰다. O은 깨달았다. 그가 향하는 순서는 평소 K와 단둘이 데이트할 때 자주 거닐던 코스였다.

‘너는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지났을까.’

비통을 거칠게 훔치면서 눈발을 맞았을 그를 떠올리니 속에서 뜨거운 게 울컥 치밀어 숨이 거칠어졌다. 눈가가 뜨거웠다. 머리끝까지 열병이 든 게 틀림없다. 어찌나 가차 없는지 꿈에도 나오지 않은 연인이 그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약쟁이가 약을 끊어도 이만큼 꼴사나운 모양은 아니리라.

그렇게 열댓 군데를 돌았다. 사람들은 좀처럼 K의 행방을 직접 알려주지 않았다. 정말 모르거나, 어쩌면 K가 이럴 상황을 대비해 미리 일렀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O을 애타게 하기엔 충분했다.

“계신가.”

“이게 누구야, 머저리 O 아닌가!”

그가 다다른 곳은 이슈가르드의 유일한 꽃집이었다. 혹한을 친구, 폭설을 연인 삼은 이 땅에서, 가게 주인은 큰돈을 들여 유리온실을 지은 무모한 사람이었다. 본인 허리께까지 오는 수선화를 다듬으며 그가 O을 맞았다.

“K를 찾으러 왔다. 그는 어디 있지?”

“헹!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보아하니 네놈 잘못으로 싸운 모양이지? 그가 작정하고 숨으면 절대 못 찾는 걸 알면서 이러고 다녀?”

“묻는 말에 답하게.”

이슈가르드의 손꼽히는 기사 앞에서도 가게 주인은 어깨를 당당하게 폈다. O이 알기로, 그는 조금만 겁을 주면 바로 아는 걸 줄줄 부는 인간이었다. 겁도 많았다. 그가 이런 식으로 군다는 건….

“왜 이래? 한 대 치겠군.”

“비켜.”

“어어, 이 사람이!”

가게는 1층이고, 2층은 주인의 거처였다. O은 무례라는 사실마저 잊고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거침없이 올랐다. 밑에서 가게 주인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알아서들 하라고 소리쳤다. 그처럼 겁 많은 자가 당당히 구는 건, 바로 지척에 믿을 만한 호위가 있다는 얘기다. 이슈가르드에서 O과 대적할 실력자는 K 하나뿐이었다.

2층. 작고 작은 오두막에 방은 두 개뿐. 어느 쪽인지 고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붕이 높은 쪽이 정답이었으니까. 막상 문을 열자니 망설임이 들었다. 무뢰한처럼 군다고 내쫓기는 게 아닐까 무섭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는 K를 볼 수 없다는 두려움이 훨씬 컸다.

그래서 문을 열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을 살짝 비치는 커튼이 가리고 있었다. 그의 연인은 한쪽에 마련된 침대에 누워 숨을 색색대는 중이었다. 지극히 평화로운 광경에 O은 걸음을 멈췄다. 감히 그가 건드려선 안 되는 그림의 한 장면 같았다.

“아, 따듯한 물 가져와 주신 건가요? 감사합니다…. 신세를 잔뜩 지내요.”

K의 목소리에 감기 기운이 가득했다. 잔병 한 번 치른 적 없는 그가 감기라니. 순간, O은 모든 망설임을 지우고 그에게 다가갔다.

“K. K.”

“오, O?”

경악에 찬 K가 몸을 일으켰다. 한동안 찾지 말라고 숨고 숨었는데, 왜 그가 여기에 있단 말인가. 자세를 급하게 바꾸자 폐에 찬바람이 들며 잔기침이 쏟아졌다. 놀란 O이 옆에 있던 물잔을 채워 손에 쥐여 주었다.

운이 좋지 않았다. 베개가 눈물로 얼룩진 걸 들켰으니까. 목이 잔뜩 부어서 그럴듯한 변명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하지 않았다. K 본인도 자기가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젖은 베개를 보는 연인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물을 머금어 기침을 달랜 K가 모른 척, 베개를 뒤집었다. 이마에 서느런 손이 닿았다.

“열이 심해. 약은 먹었나? 일단 눕게. 천천히.”

O의 걱정 가득한 말씨에도 K는 답하지 않았다. 끄덕이지도 않았다. 단지 몸을 뉘며 그를 등졌을 뿐이다. 축객령이나 다름없는데도 그의 연인은 뻔뻔하게 자리를 지켰다. 가게 주인이 한숨을 푹푹 쉬며 올라와도 간호는 제가 맡겠다며 돌려보내기까지 했다.

대관절 이게 무슨 뻔뻔함인가. 그러나 K는 그의 지극정성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마를 쓸어주는 손길은 예전만큼 다정했고 이따금 불러주는 자장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O은 그가 이 관계를 끝낼 마음이 없다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건 너도 제발 그렇다고 해달라는 처절한 애원이었다.

그러나 K는 입술만 달싹거릴 뿐, 그 어떤 말에도 답하지 않았다. 그저 O이 시키는 대로 약을 삼키고 식사를 이어갈 뿐이었다. 매 초 매 순간 그의 속이 타들어 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랬다. 밤마다 찬 손을 붙들고 숨을 불어넣는 O이 남몰래 사과의 말을 건네는 걸 알면서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열이 끓는 이마에 메마른 입술이 닿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질적인 회피증이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와중, 불안은 끊임없이 찾아와 속에서부터 치밀었다.

원래 사람은 궁지에 몰렸을 때 가장 깊은 진심을 털어놓는 법이다. O이라고 다를까?

‘그래서 나 역시 널, 믿을 수가 없어.’

너도 날 떠날지도 몰라. 연인이 피로를 이기지 못해 잠깐 졸 때면 K는 몸을 돌려 조용히 눈물을 닦아냈다. 열이 내리고 있었다. 조만간 열 기운에 눈물이 난다고 그럭저럭 핑계를 대기도 어려워질 것이다.

O에게 불신을 사다니. 그 사실만으로 K는 딛고 있던 대지가 산산조각 나 저를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O이 떠나겠다고 하면 순순히 놓아주겠다고,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축복하며 보내주겠다고 한 맹세는 오래전 어느 저녁에 사라졌다. 그는 O 하나만을 위해 세계를 저버릴 수 있는 위인은 아니었으나 그가 없는 세계를 온전히 사랑할 수도 없게 되었다. 제 비겁함에 신물이 났다. 그럼에도 O이 곁에 남아주길 바라는 건 이기심이었다. 그에 관한 모든 문제는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저를 희생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대부분인 까닭이다.

그래서 K는 모든 대답을 감기가 떨어져 나간 다음으로 미뤘다.

4. 가장 따스한 포근함

K의 감기는 빠르게 사라졌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러운 쾌유에 그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몸이 축축 늘어졌는데 이렇게 대뜸 괜찮아지면 더는 미룰 수 없지 않나. 목 안쪽 부기는 가라앉았고 목소리는 매끄러웠으며 오한이나 발열은 며칠 전에 이미 끊겼다. 이 이상 꽃집 사장의 집에 신세를 지기는 염치가 없었다. 그렇다고 침대 머리맡에 상체를 엎드려 곱게 잠든 O을 다시 두고 갈 수도 없었다. 그의 잠귀가 밝은 것과는 별개로, K 또한 제 손목을 놓았을 때 그가 보인 처참함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몸을 일으켜 앉은 K가 이마에 놓인 수건을 들어 협탁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이제는 O이 그보다 훨씬 수척해 보였다.

“너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흠칫 놀랐다. 제 말에 깃든 고질적인 불신을 깨닫는 것과 더불어, O이 천천히 감은 눈을 뜬 탓이었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지? 내가 하는 말을 들었을까?’

안절부절못하는 K를 O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눈을 뜬 채로 잠든 걸까? 그가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긍정적인 가정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O은 이미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천천히 자세를 바르게 하고 있었다. 목을 좌우로 꺾는 그에게서 작게 관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초조함에 손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산만하게 이불을 쥐었다 말았다 하는 동작에서 O 역시 그를 읽어냈을 것이다.

“K.”

지금은 차마 대답을 피할 수 없었다.

“…O.”

잠시간의 침묵은 두 사람 모두에게 가혹했다. 둘은 몇 번 말이 엇갈렸고 서로에게 순서를 세 번 양보했으며 몇 번이고 더듬거렸다. 꼴이 제법 우스워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오는 걸, K는 황급히 입가를 가렸다. 자기를 우습게 여긴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

그 걱정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 O도 괜한 헛기침을 하면서 웃음기를 누르고 있었으니까. 눈이 딱 마주쳤고, 서로를 너무 잘 아는 탓에 더는 감출 수 없었다.

“O, 나는 사실.”

“미안해. 사과하고 싶어, K.”

K의 변명을 O이 끊었다. 그가 하는 말을 늘 끝까지 기다려주던 모습과 대조적이라 눈이 동그래졌다. 이별 통보일까? 심장이 단두대에 내걸리면 이런 느낌일 게 틀림없….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정말 미안하다는 얘기일세. 내가 심한 말을 했잖는가.”

불과 방금 K가 한 말은 없는 셈 치자는 태도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 건은 쌍방책임이라고 하는 게 맞는데, 너는 왜 자꾸 저자세를 고수하는가. 그 까닭은 K가 가장 잘 알았다.

‘O 그레이스톤이 나라는 사람을 사랑해서.’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하나라도 정확히 말할 수 없었다. 그가 꼼지락거리는 손을 가져다 깍지를 끼고 거기에 이마를 댔다. 어느 성직자의 경건한 기도를 철없는 어린애가 되어 훔쳐보는 느낌이었다.

“K. 내 K. 내가 잘못했어. 네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알면서도 치졸한 말을 했네. 변명할 생각은 없어. 결국 그마저 내 본질적인 비열함이겠지. 네가 날 혐오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테고.”

너무 심한 말이라 당황스러운 와중, 그는 정말 진심이었다. 그래서 더욱 실감이 나지 않았다. O은 K에게 하나뿐인 버팀목이고 돌아갈 수 있는 집이었다. 그는 늘 자신만만하고 쾌활했으며 당당했다. 그런 남자가 고작 저 하나 때문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버림받을 두려움에 손을 잘게 떨면서.

“그럼에도 K, 내가 용서를 구할 자격이 된다면.”

O이 그의 손가락에 입술을 내려 앉혔다.

“네 곁에서 영원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일세.”

무언가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라나 순식간에 목구멍까지 밀고 올라왔다. K는 오랜 경험으로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농도 짙은 애정, 가장 순수한 기쁨.

그걸 도무지 견딜 수 없어, 그가 O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어떤 적을 마주해도 태연하던 그가 덜컥 굳었다. 평소라면 등을 부드럽게 쓸어줬을 텐데 꼭 석상처럼 뻣뻣해져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 그렇게 해, O.”

“K….”

“영영 함께 있어. 함께 있어 줘.”

O이 어깨를 살짝 떨었다. 설마 상처를 주는 말이었을까 싶어 고개를 들려는 때 그가 연인을 빠듯하게 끌어안았다. K가 O보다 키가 약간 커서 누구도 품에 완벽히 안겨들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K는 그의 포근한 체취를 한껏 들이마시며 전율했다. 이 품이 없으면, 살아도 산 게 아니리라. O은 한참 동안 제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단지 K의 뿔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면서 허릴 안은 팔에 힘을 잔뜩 집어넣을 뿐.

“거, 자네들. 할 거 다 했나? 방 언제 뺄 건지 얘기 좀 하러 왔는데, 나 참….”

주객이 전도됐다며 꿍얼거리는 집주인이 문을 뺴꼼 열고 들어왔을 때, O은 망설임 없는 동작으로 깃털 베개를 집어 던져 문짝에 정확히 명중시켰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쾅 닫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K가 입을 벙긋거릴 때, 입술이 와 닿았다.

“이, 이, 이래도 되는 거야?”

“싫어?”

“그건 아니지만…!”

“그럼 됐어. 안 될 것 없지 않은가.”

늘 신사적이라고 믿었던 O의 새로운 모습마저 싫지 않았다. K는 밖에서 왁왁 고함치는 소릴 저만치 미뤄놓고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방황을 마쳤으니,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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