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스톡홀름 1
주술회전 / HL 네임리스 드림 / 창작 샘플
*쵸소우 드림
*타계정 업로드 작품이며 샘플용으로 해당 계정에 아카이빙합니다.
삶이란 본디 선택과 사고의 연속이다.
다만, 그 경계가 모호할 뿐.
미스터 스톡홀름
“아, 미친…. 이래서 숙소에 돈 아끼면 안 되는데.”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일부러 소리 내 중얼거린 건, ‘너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씹새야.’라는 협박과 일맥상통했다.
도쿄 시부야에 저렴한 숙소가 있다는 건 통장 잔고가 바닥을 향해 달려가는 내게 꽤 구미 당기는 미끼였다. 쇼핑의 도시로 여행 오면서 군자금을 위해 평소 내세우던 법칙 하나를 깬 게 실수였다.
여행 철칙 1. 숙소에 돈 아끼지 말 것.
시부야에 이토록 사람 없는 동네가 있는 줄 몰랐고 내 숙소가 다 쓰러져 가는 폐허인 줄은 더더욱 몰랐다. 속으로 열댓 번의 욕을 씹어 삼킬 즈음, 어깨 근처가 묵직해졌다. 첫날부터 쇼핑에 아낌없이 투자하긴 했지만, 쇼핑백의 얄팍한 끈에 의한 통증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분명했다. 특별하게 뭐가 보이는 체질은 아니어도 가위에 자주 눌리거나 종종 길을 잘못 들기라도 한 것처럼 텅 빈 공간에 다다른 적이 있는 등 기묘한 일을 자주 겪었던 터라 이런 감각에 익숙한 편이었다.
나, 랑, 놀, 자, 아
귀에 들리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다시 한 번 여행의 철칙을 어겼던 나 자신에게 울화가 치밀었지만, 애석하게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비명을 지르며 달릴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숙소를 알아볼까? 이게 따라오면 어쩌지? 그러고 보니 시부야에서 끔찍한 일이 있었다고 했지. 이런 곳에 혼자 올 생각을 하다니, 미쳤지. 미쳤어! 너무 어둡고 초행길이라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모르겠어. 어떡하지?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방금까지 내 오아시스처럼 느껴지던 10m 앞의 가로등이 볼품없이 픽 꺼졌다. 어깨에 턱 얹어지는 손길에 나는 그만 주저앉아 있는 힘껏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꺄…아아아악!!!!!!”
“윽.”
윽?
방금까지 들리던 목소리가 아닌 웬 남자의 음성이었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위를 올려다보자, 머리를 개성 넘치게 묶은 험악하게 잘생긴 남자가 얼굴을 찌푸린 채 귀를 막고 있었다. 여행지에서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인데, 난 이 순간 그가 구세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런 곳에 혼자 있으니 노려지지.”
“…네?”
훌쩍 거리면서 묻자, 남자는 말 없이 날 일으켜 세워주곤 떨어진 쇼핑백까지 야무지게 주워주었다. 아무렴 어른 된 체면이 있지, 울음 터뜨리는 걸 가까스로 참은 난 그제야 주변 공기가 조금 상쾌해진 걸 느꼈다. 어깨도 가볍고 주위에서 웅성대던 기괴한 소리가 멎은 채였다.
콧잔등을 가로지르는 문신 같은 무늬와 커다란 덩치 탓에 남자의 인상은 꽤 험악했지만, 어둠 속에서도 어렴풋하게 보이는 얼굴은 상당히 잘생긴 편이었다. 편한 티에 청바지 차림의 남자는 고맙다는 내 인사에도 귀찮다는 듯 손을 몇 번 휘저을 뿐이었다.
“…혼자 가겠다고?”
다시 지도 앱을 켜고 걷는 날 향해 남자가 기가 막힌 목소리로 탄식했다.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돈은 돈인 법인데. 숙소 경비도 아깝고 어차피 일정이 그리 길지 않으니 내일부터는 해가 떠있을 때 다니면 될 일이었다.
“방금 그런 일을 당해놓고 배짱도 좋군.”
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니까 상관없지 않나.
내 불만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남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데려다 주마.”
생김새에 비해 말투가 꽤 중후하다.
“아뇨! 안 그러셔도 되는데.”
“여긴 위험해. 안 보이는 사람한테도.”
…대체 뭐가 보이셨던 건가요?
차마 묻지 못한 말이 목구멍 아래로 따갑게 내려갔다. 뭐가 됐든 도움을 준 사람이기도 하고 여차하면 경찰에 신고할 셈으로 남자와 함께 걷게 됐다.
여행 철칙 2. 모르는 사람의 호의는 경계할 것.
하루만에 여행 철칙을 두 개나 무시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내게 옵션이 다양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자 마음은 차라리 편해졌다.
버려진 동네에서 홀로 살고 있는 이 남자의 이름은 쵸소우라 했다.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뒤처지는 날 배려해 걸음을 맞춰 걷거나 내 쇼핑백까지 모두 들어주는 걸로 미루어보아 기본적으로 다정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이 건물이 맞나?”
“인정하기 싫지만, 맞네요.”
내가 묵을 숙소는 말 그대로 폐가였다. 3층짜리 목조 건물에 현관도 다 부서져 있는. 예약 사이트를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내일 아침 일찍 항의를 남길 생각으로 분노를 억누르는데 내 옆에 선 쵸소우의 표정도 제법 심각했다. 그는 입을 떡 벌렸다가 이마를 짚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했다.
“혹시 몰라 묻겠는데, 몇 호지?”
“301호요.”
“…하아.”
한숨을 푹 내쉰 그가 터벅터벅 목조 건물의 계단을 올랐다.
“짐까지 들여 놔주실 필요는 없어요!”
“겸사겸사다.”
열쇠 따위는 애초에 망가졌는지 대수롭지 않게 301호의 문을 벌컥 열어젖힌 그가 내 쇼핑백을 턱 내려놓고는 302호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난 옆방에서 지내고 있거든.”
멋쩍은 듯 뺨을 긁적인 그가 벙찐 내 얼굴을 흘끗 바라보고는 “그럼.”하며 문을 닫고 사라졌다.
*
쵸소우는 옆방의 여자가 소리 없이 벽에 이마를 쾅쾅 찧는 걸 느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런 폐가에 웬 여자가, 그것도 방금 주령에게 붙들려 죽을 뻔한 자가 혼자 이곳에서 자겠다고 찾아왔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오늘은 그에게도 제법 바쁜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지금껏 바쁘게 돌아다니며 잡다한 주령을 잡느라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제게 인간으로 살아가길 바란다는 이들의 바람을 져버리지 못하고 오늘도 살아남고 말았다. 제가 쌓아 올린 잘못을 속죄하기 위한 저주의 연쇄가 아닐는지 막연히 생각했지만, 어쨌든 그는 홀로 주령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삶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이 폐가를 선택한 건 어찌 보면 저주의 연쇄를 끊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다. 인적 드문 이곳에서 저 혼자 죽더라도 아무도 발견 못 할 그런 장소였으니 말이다.
그런 곳에 갑자기 나타난 여자를 마냥 두고 볼 수도 없어 도왔더니 하필 또 제 옆 방이었다. 딱 보니 잘못 흘러들어온 관광객인데, 내일 아침이면 질려서 나가겠거니 막연히 확신했다. 저 같은 반 주령인 몸이야 무서울 것 없는 공간이지만, 일반인이 지내기엔 턱없이 두려운 공간이었다. 주령이 안 나온다 하더라도 제법 뒤숭숭한 건물이니 말이다.
지금껏 봐온 여자라고는 주술사 중에서도 모두 주력이 훌륭한 사람들뿐이었는데 힘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 여자가 바다를 떠다니는 유리병처럼 의도치 않게 이런 공간에 다다른 게, 어쩐지 순진하고 불쌍하게 주령과 카모 따위에게 농락당했던 제 어머니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 자질구레한 생각은 쵸소우의 잠을 방해했다. 온전히 혼자가 된 날 이후로 잠은 사치가 됐지만, 이날은 유독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거미줄처럼 금이 간 창문을 투과해 들어오는 달빛을 이불 삼아 뒤척이던 그의 귀에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얄팍한 벽에 슬그머니 귀를 대자, 301호의 불청객이 흐느끼는 소리가 여실히 넘어왔다.
‘주령인가.’
쵸소우는 별 고민 없이 301호의 문을 열어젖혔다. 널브러진 쇼핑백 사이로 이불을 꼭 말아 쥔 채 웅크리고 누워 “으윽, 흐….”하고 신음하는 여자 주변으로 승두 몇 마리가 가까이 붙는 게 보였다.
승두의 머리통을 꽉 쥐어 손안에서 터뜨린 쵸소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그녀의 머리맡에 털썩 주저앉았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턱을 괸 채 쏟아지는 달빛을 받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으음.”
승두가 사라지자 숨쉬기 한결 편해졌는지 뒤척이는 그녀의 얼굴에 조잡하게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쵸소우가 슬그머니 정리해주었다. 팔짱을 끼고 그녀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자, 실로 오랜만에 잠이 쏟아졌다.
제 곁을 먼저 떠난 동생들의 꿈은 달콤했다.
영영 깨고 싶지 않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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