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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은 사랑하는 인간의 꿈을 꾼다

만자타입 HL 소설 커미션 작업물

- 약 10일 소요 / 10,577자 / 전문 공개 샘플

- 스타듀밸리 드림: 여캐 K, 남캐 M

- 신청사항: 1만 자, 오마카세, [  인간 K X 뱀파이어 M  ]


재앙은 사랑하는 인간의 꿈을 꾼다

: 뱀파이어 M X 인간 K

K는 둔중한 문을 힘겹게 열어젖혔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겨우 성안까지 뛰어들어가 커다란 관 앞에 섰다. 그녀의 손안에 곧장 금색 마력석이 쥐어지고, 두 손이 기도하듯 깍지를 끼고 맞물렸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천사의 언어인지 악마의 언어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그 주문은 K가 쥔 마력석과 만나 강한 힘을 발하면서 관에 걸린 봉인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관이 신묘한 검은 빛으로 빛나고, 덜컹거리는 음산한 소음을 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주문을 외울수록 관의 덜컹거림도 점점 거세져만 갔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손마디가 창백해지도록 양손을 더 꽉 맞잡고 끝까지 주문을 외웠다. 그렇게 간절함을 담은 마지막 문장이 끝나자마자,

 

쾅.

 

갑자기 굉음과 함께 관에서 날카로운 손이 훅 튀어나왔다.

“커헉……!”

눈 깜짝할 사이 억센 손이 K의 목을 틀어쥐고 위로 들어 올렸다. K의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으윽, 흑……. K는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질 듯한 소리를 흘리면서 눈만 굴려 제 목을 조른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오랜 세월 잠들어 있었음을 방증하듯 땅에 끌릴 만큼 길게 자란 검은 머리카락, 음울한 보랏빛 눈, 긴 시간 햇빛을 보지 못한 창백한 피부. 그리고 무식하게 센 이 힘.

 

…M다.

M가 틀림없었다.

 

K는 그가 두려워 바들바들 떨면서도 좀처럼 시선을 거둘 줄을 몰랐다. M의 차갑다 못해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공허한 눈이 그녀를 마주 올려다보았다.

손에 더 힘을 주지도, 그렇다고 빼지도 않은 채로 그가 입을 열었다. 느리게 끌리는 듯한 목소리가 물었다.

 

“…그대는 왜 나를 봉인에서 깨웠는가.”

 

K는 마른침을 삼켰다. 잔뜩 긴장한 탓에 심장이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쿵쿵 뛰었다. 그녀는 목이 졸려 쩍쩍 갈라지는 음성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제발, 윽, 제발 저희 마을을 구해주세요…….”

그 대답에 찰나 M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가 내쉬는 숨을 따라, 그녀가 내뱉는 목소리를 따라 그에게 달콤한 체향이 실려 오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의도치 않았겠지만, 잠에서 막 깬 M에게 지금 그녀는 존재 자체로 위협이나 다름없었다. M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

뱀파이어는 본디 피를 탐하는 존재였다.

선택적으로, 제 마음대로 인간을 살육하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이 그러했다. 오랜 시간 피를 마시지 않으면 갈증이 극심한 통증이 되어 육신을 굴복시켰고, 자연히 이성도 완전히 마비됐다.

그렇게 어느 순간 정신을 놓았다가 눈을 떠 보면, 두 손은 으레 무고한 피로 검붉게 물들어 있고는 했다. 물론 제 송곳니에 꿰뚫린 인간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는 것도 당연한 섭리였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신선한 인간을 눈앞에 둔 바로 그 ‘오랫동안 피를 마시지 않은’ 뱀파이어였고.

“…….”

M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K의 체향을 맡으면 맡을수록 침샘에 침이 고였다. 목구멍 너머로 침이 넘어갔다. 그는 애써 이성을 유지하며 무정한 눈으로 K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은 뒤에야, 확.

K를 놓아버렸다.

 

“허억, 콜록……!!”

 

K가 즉시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목을 부여잡고 연신 기침을 토해댔다. 갈급히 숨을 들이마시고, 또 뱉어내길 반복하는 과정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터졌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M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M에게 다시금 호소했다.

“─마을, 마을이 위험해요. 뱀파이어들이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어요. 제발, 콜록. M 님, 제발 저희 마을을……”

“…….”

M는 그런 K의 행동에서 손쉽게 절박함을 읽어냈지만, 그것을 내색하거나 섣불리 마을을 구해주겠다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침전한 눈으로 K를 응시하기만 했다.

신선한 피 냄새, 귓전에 울려대는 맥박 소리, 바로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는 따듯한 살결.

지금 그는 제 발로 찾아온 먹잇감, K의 존재를 무시하는 일만 해도 벅찼다.

이유인즉 뱀파이어의 본능 때문이었다. 가사 상태에서 막 벗어난 뱀파이어는 모든 감각이 평소보다 10배는 예민해지고, 굶주린 만큼 훨씬 더 많은 피를 필요로 했다. 더 큰 살육을 벌였다. 그것에 자의는 없었다.

한마디로 지금 그녀에게는, 마을을 덮친 뱀파이어들보다 그녀가 손수 깨운 그 본인이 더 위험하다는 소리였다.

‘곤란하군.’

그런데 이런 제 본성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마을을 살리겠다고 제 겨울잠을 깨우는 인간이라니.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다 있단 말인가…. 지금 그가 구원을 표방하며 마을에 내려갔다가는 오히려 마을이 더 쑥대밭이 되는 불상사만이 초래될 것이었다.

그곳에는 이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들의 살 냄새도 진동을 할 테니까.

그렇다고 죄 없는 목숨들이 달아나도록 둘 수도 없고, 참으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M는 태어나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었던 제 태생적 끔찍함에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는 자조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걸 지금 뱀파이어인 내게 부탁하는 것인가….”

그러자 저를 눈앞에 두고도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도, 하물며 주춤하지도 않으며, K가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네. 저는 뱀파이어의 시초, 뱀파이어의 뿌리인 ‘M’의 전설을 알고 있습니다.”

덧붙여, 그녀는 말했다.

그녀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M의 전설을, ‘M’ 그 자체를 믿는다고. 그는 아주 먼 옛날 홀로 탄생한 뱀파이어로, 어느 순간부터 끝없는 살육에 지치고 질려 더는 인간을 해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육신을 봉인하기까지 한 자라고.

그러므로 그녀의 마을에는, 촌장을 통해 대대로 ‘마을에 비상사태가 벌어지거든 뒷산을 올라 고성에 잠든 뱀파이어를 깨우라.’라는 지침이 내려온다고 말이다.

그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하는 그 뱀파이어라면, 필시 마을을 도와줄 것이라고.

“제발요, M 님. 제발…. 제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할게요…….”

K가 울며 M를 재촉했다.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속이 타들어 가기는 할 것이었다. 마을 내에서는 정 방법이 없기에 저를 찾아온 것일 테니까.

‘‘인간을 사랑하는’ 뱀파이어라….’

M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그러자 순간 기억 속에 K와 닮은 어떤 여자의 시신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머릿속에서 지워져 기억나지 않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 여자는 M가 한때 꽤 좋아했던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은 바로, 다름 아닌 제 손에 죽은 인간이었고.

가슴이 조금 욱신거려 왔다. M는 잇새를 비집고 나오려는 헛웃음을 억눌러 삼켰다. 몇백 년 전에는 웬 뱀파이어가 다시 왕이 되어달라고 저를 깨우기에 더 강력한 봉인으로 스스로를 잠재웠더니, 어째 이번에는 약하디약한 인간이 그 주역인 모양이었다.

웬만한 마력으로는 봉인을 풀기 힘들었을 텐데. 한낱 인간에게 잘도 내 봉인을 풀 마력이 있었구나…. 그리 생각을 갈무리하면서, M는 아래로 고개를 털었다. 그는 자신이 마을 사람들을 해치지 않고 K를 도울 단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그리고 못내, 머나먼 과거에는 지키지 못했던 인간들을 지키고자 입을 열었다.

 

“그대 이름은 무엇인가.”

 

그러자 일순, K의 분위기가 확 뒤바뀌었다.

좀 전까지 떨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두 눈만이 매우 강렬한 의지로 반짝였다. 그녀가 주먹을 꼭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K라고 해요.”

 

K. 왜인지 옅은 그리움이 풍기는 이름을 머릿속에 제대로 각인해 두며, M가 입을 열었다. 사뭇 진지한 목소리가 K에게 일렀다.

“좋네, K. 허면 잘 듣게. 내가 마을에 내려가려면 안전장치가 있어야만 해. 그대는 나와 계약해야 하네.”

마을을 구해만 준다면 그 어떤 일이든 하겠노라고 먼저 이야기한 사람은 K 장본인이었으므로, 그녀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가 바로 되물었다.

“뭐든 하겠어요. 어떤 계약인가요?”

“살육을 원치 않는다곤 하나 결국은 이 몸도 뱀파이어일세. 피를 마시지 않으면 이성을 잃고 말아. 참으로 본능에 충실한 껍데기지….”

하지만 그런 그녀라도 인간은 인간이었다. 피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의 얼굴에 긴장의 기색이 섞여들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나 당연하지 않은 구석이 있다면, 그녀의 걱정이 본인의 안위보다는 마을을 향해 있다는 것일까.

설마 마을 사람 중 한 명을 제물로 바치라는 소리는 아니겠지요, 하는 물음이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눈에 선연해 보여서, M는 짐짓 그녀를 안심시키는 어조로 말했다.

“…이대로 마을로 향한다면 내 그 뱀파이어들보다 먼저 마을 사람들을 공격할지도 모르네. 하지만 나도 더이상 죄 없는 사람들을 해하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 그대와 나 사이에 속박의 계약을 맺는 걸세. 이 계약을 맺는다면 나는 그대의 피밖에는 마실 수 없게 되고, 자연히 마을 사람들도 해칠 수 없게 되네.”

“하겠어요.”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K가 대답했다.

“후회는 않겠는가?”

“네.”

K는 확고했다. 허락이 떨어졌기로서니 M에게도 더는 그녀를 경계하거나 이 이상 상황을 지체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깜박.

그리고 다시 K를 쳐다보자, 본래 빛 한 점 없던 그의 보라색 눈이 밤길 짐승의 눈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M의 주변에 보랏빛 마력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자가 K에게 길게 드리웠다. K는 M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가까이 몸을 밀착해 오며 속삭였다.

“약간 따끔할 걸세.”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채 깨닫기도 전, 콰득.

 

“아……!”

 

M의 송곳니가 K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M의 뜨거운 입술이 바로 K의 목덜미에 흡착했다. 혈관을 돌던 피가 쭉 쭈욱 하는 상스러운 소리와 함께 무섭게 빨려 나가기 시작했다.

“앗, 흐읏…….”

가느다란 목이며 어깻죽지, 귓가에 M의 더운 숨결이 한가득 쏟아지고, 목이 빨리는 감각에 야릇한 전율이 전신을 뒤흔들었다. K의 작은 손이 파들파들 떨리며 M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녀는 그의 옷자락을 힘껏 구기고, 놓아 비틀고, 다시 쥐어 짓뭉개고, 두어 번은 미끄러지면서 허덕였다.

“매, 그너스 님…….”

쾌락과 격통의 중간 지점에서 길을 헤매는 사이, M가 그녀를 갈구하면서 흘러내린 한 줄기 핏물이 K의 앞섶을 적셨다. 어깨가 드러나는 하얀 블라우스가 핏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십여 초는 더 입술을 붙여 흡혈한 뒤에야, 하아….

M가 혈향으로 녹진하게 젖은 입술을 핥으며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읏.”

K가 휘청했다.

단시간에 갑자기 다량의 피가 빨려 나간 탓이었다. 그녀가 넘어지기 전에 허리를 받쳐 지탱해주며, M가 짧은 주문을 외웠다. 그의 뜨거운 손이 보랏빛 마력을 발산하며 K의 상처 위를 쓸고 지나갔다. 상처가 말끔히 사라졌다.

“계약 성립이네.”

대신 그 자리에는 M의 마력이 깃든 각인만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각인이 제대로 효력을 지녔는지 확인하듯 말없이 바라보더니, 그대로 K를 훌쩍 안아 들었다. 가지. 그가 읊조리고는 곧장 창턱으로 뛰어올랐다.

“허억……!”

상처를 치유해 준 마법에 감탄할 틈조차 없었다. K의 몸이 순식간에 M의 너른 품에 안기고, 그녀의 시야 아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보였다.

“잠, 잠깐만요, M. 설마─”

꺄악…! 문장은 곧 비명으로 번졌다. K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M가 고성에서 뛰어내렸다.

“K, 다치지 않으니 눈을 뜨게.”

하지만 몸이 지면에 닿아 부서지는 느낌은 없었다. M 말대로 하나도 아프지도, 그에게서 몸이 떨어질까 무섭지도 않았다. K는 M를 믿고 살며시 눈을 떠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는 숲속에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인간은 감히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월등한 신체 능력을 지닌 몸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도약하며 빠르게 산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시시각각 전환되었다. 사방에서 나뭇잎 스치는 소리도 들려왔지만, 신기하게도 K의 몸은 잔가지나 나뭇잎 따위에 조금도 상처 입지 않았다.

그렇게 고작 몇 분이나 달렸을까.

그리 오래지 않아 그들은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M는 K에게 걸을 수 있겠냐고 물은 뒤, 그녀를 땅에 살포시 내려주었다. 두 사람 앞에 마을의 전경이 펼쳐졌다.

 

“아아…….”

 

입구에서 바라본 마을은 말로 미루어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인간인 K가 M를 부르기 위해 산을 오르기까지는 시간 소모가 불가피했으므로, 지금 마을은 그녀가 막 떠났을 때보다 더한 참상으로 얼룩져 있었다.

길바닥에는 시체와 선혈이 낭자했고, 도망치고 숨는 사람들과 그들을 아직껏 부러 살려두고 사냥놀이를 즐기는 뱀파이어들, 처절한 비명, 잇따른 폭파음과 화염, 연기 따위의 불온한 것들이 마을을 지옥처럼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K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그때, 별안간 K의 눈에 한 남자를 쫓는 뱀파이어가 들어왔다.

그 뱀파이어와 눈이 마주쳤다.

“엇, 신선한 여자잖아…!”

그 뱀파이어는 K를 보자마자 남자를 버리고 이쪽으로 도약해 왔다. 여자들은 약해서 가장 먼저 죽여버린 줄 알았는데…! 그가 신이 나서 웃어젖혔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K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쾅……!!

 

“커헉……!!”

M가 뱀파이어를 낚아채 바닥에 내던졌다.

K의 눈이 채 따라가지도 못할 만큼 재빠른 속도였다. 얼핏 뱀파이어가 한 바퀴 회전한 것도 같은데, 방금 본 게 너무 찰나라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미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뇌가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은 채 제 앞을 내려다보았다.

땅에 금이 갈 정도로 강한 힘에 내리꽂힌 채, 뱀파이어가 즉사해 있었다.

“히익…….”

K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육중한 굉음에 놀란 뱀파이어들이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그들이 인간 사냥을 멈추고 혼란스러워하며 이쪽으로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미친, 동족이 죽었어…!”

“저자는 누구지?!”

어느새 뱀파이어 무리가 K와 M를 빙 둘러쌌다. 뱀파이어들 사이에 M를 향한 경계와 공포, 복수심 따위의 감정들이 어지럽게 술렁거렸다.

상황을 파악하듯 몇 초의 시간을 저 너머로 흘려보낸 뒤에야, 한 뱀파이어가 정적을 깨고 외쳤다.

“이봐, 거기 너! 너도 뱀파이어잖아! 왜 갑자기 동족을 죽인 거지?!”

K는 힐끔 제 곁에 있는 M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좀 전 저와 계약을 맺었을 때처럼 강렬한 보랏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 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였는데도 한 점 동요 없이, 그가 읊조렸다.

“…이 이상 반인륜적인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원래 갔어야 할 곳에 보내준 것뿐이네.”

뭐라고? 이 자식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혈질인 한 뱀파이어가 무리에서 튀어나왔다. 그가 주먹을 내질렀다.

 

쾅……!!

 

그러나 이번에도 M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K는 M의 체술을 두 번째 목격하고서야 첫 번째에 제가 봤던 회전반경이 착시가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과 같은 방식으로 내려꽂힌 뱀파이어가 즉사했다. M가 그 시신을 앞선 시신 옆에 가지런히 눕혀 주었다.

이 정도 속도라면 그 어떤 고통도 느낄 새가 없을 것이었다. K의 등 뒤로 주륵 땀이 흘러내렸다. 자신이 깨워서는 안 될 인물을 깨웠다는 생각이 뒤늦게 몰려왔다. 그녀는 압도적인 힘 앞에 할 말을 잃었다.

“이, 이런 미친 자식……! 당장 죽어라!!”

하지만 뱀파이어들의 사고회로는 다른 것 같았다.

K는 만일 자신이 저 뱀파이어들 중 하나라면 절대로 M에게는 덤비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들은 힘을 합쳐 동시에 이쪽으로 덤벼들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운 함성과 함께, 잔뜩 날이 선 뱀파이어들이 사방에서 돌진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M는 태연하기만 했다. 그는 상체를 젖혀 양쪽에서 덤벼 오는 뱀파이어들을 피하더니, 그들의 머리를 잡아 서로 충돌시켰다.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삽시에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로도 같은 패턴이 이어졌다. M는 K가 다치지 않게 철저히 그녀 주변을 호위하면서 달려드는 뱀파이어들을 찍고, 내던지고, 가격하고, 내리꽂았다.

“이익…… 뭐 저런 괴물 같은 놈이 다 있어!!”

벌써 절반의 뱀파이어만이 자리에 남았다.

감히 넘볼 수 없는 힘 앞에서 그들은 잠시 주춤했지만, 역시 이성보다는 본성에 따르는 종이기 때문인지 학습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남은 절반만이라도 도망치거나 M에게 자비를 비는 대신, 저마다 양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렇게 된 거 총공격이다……!!”

화악……!

살아남은 모든 뱀파이어가 또 한 번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중에는 머리 좋게 K에게 돌진하는 이도 있었으나, 전과 마찬가지로 판도는 눈곱만큼도 뒤바뀌지 않았다. 귀찮다는 듯, 혹은 어리석은 생명들이 가엾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쉰 뒤, M가 조용히 어떤 주문을 속삭였다.

그러자 우뚝.

 

“허억……!! 이게 뭐야!!”

 

일제히 덤벼들던 뱀파이어가 모두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꼭 뱀파이어들의 시간만 멈춘 것 같았다. 그들은 동상처럼 제자리에 붙박인 채 공황상태에 빠져 이런저런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좀처럼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들이 오갔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돌차간 한 뱀파이어가 사색이 되어 비명을 내질렀다.

“나, 나 이런 능력을 가진 뱀파이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어……!!”

모든 뱀파이어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거의 울 듯한 표정을 한 채, 그가 말을 더듬으며 외쳤다.

“다들 떠올려 봐! 머, 먼 옛날 갑자기 인간 편으로 돌아선 뱀파이어가 있었잖아…!! 우리 조상들의 내분을 유도하고, 이, 인근 모든 동족을 학살한 뒤 스스로 봉인의 관에 들어갔다는……!!”

“젠장……!”

그제야 뱀파이어들의 태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움직이지 못했으나,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 보기 위해 목청껏 발악하기 시작했다. ‘M’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도, 다들 그의 전설만은 아는 모양이었다.

“다, 다들 빨리 어떻게 좀 해 봐, 어서 이 주문을……!!”

하지만 그뿐이었다.

 

딱!

 

M가 손가락을 튕기자, 모든 뱀파이어의 몸에 화륵 보랏빛 화염이 옮겨붙었다.

그중 가장 마지막으로 소리쳤던 뱀파이어가 가장 먼저 재가 되어 흩어졌다.

“……미, 미친.”

“으악, 살려 줘……!!”

그것을 본 다른 뱀파이어들에게서 잇따라 절규와 비명이 울려 퍼졌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인간의 비명으로 가득했던 마을은 이제 뱀파이어의 화형장이 되어 그들의 울음으로 가득했다. 뱀파이어들은 그제야 이 마을을 떠날 테니 제발 불길을 멈추어 달라고 빌었지만, 자기 종을 말살할 수도 있는 창조자의 특권을 지닌 M에게 예외란 없었다.

그와 K를 둘러싼 뱀파이어 뿐만 아니라, 어느 집에 숨어들었거나 멀리서 사냥을 하고 있던 뱀파이어까지….

이곳 마을에 있는 뱀파이어들이 모두 보라색 불길 속에 사라졌다.

바람결에 재가 흩날렸다.

“…….”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려왔다. K는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그와 계약한 장본인인데도, 그가 선한 사람임을 아는데도, 그가 마을 사람들을 구해주기 위해 이곳에 온 것임을 아는데도….

…원초적인 공포가 온몸을 지배했다.

그녀는 차마 M와 눈을 마주칠 수 없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전설은 잘못되었다. M, 이 사람은 단순한 뱀파이어의 시초가 아니라 창조자 그 자체였다. 그가 지닌 힘은 뱀파이어가 아닌 신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신이 아닌 일개 생명체가, 그분의 피조물이, 이렇듯 다른 생명들을 한순간에 재로 만들고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가…….

K는 흔들리는 눈으로 제 발치에 남은 재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법이 걸린 뱀파이어들은 이미 죽었던 자라도 모두 강한 햇빛에 전소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다만 제 앞에 있던 두 구의 시신이 소멸한 자리, 땅에 가 있는 금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이내는 조금 더 시야를 확장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앞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뱀파이어에게 쫓기던 사람들, 굉음이 들려오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집 밖으로 고개를 내민 사람들, 더해서 습격당하던 사람들까지…….

마을의 모두가 이 마을에 강림한 초월적인 존재를 향한 공포 앞에 굳어 있었다.

그 누구도 섣불리 저 뱀파이어를 죽이자고도, 공격하자고도, 또한 그에게서 도망치자고도 말하지 못했다.

M는 이 순간 철저히 인간의 편인 것처럼 보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전원이 덤벼도 대항하지 못할 가공할 능력 탓에 사람들은 그를 온전한 같은 편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만일 저자가 마음을 바꿔 우리를 살해한다면?

우리가 저자를 잘못 깨운 것이었다면?

사실은 전설이 거짓이었다면?

…아니, 길게 갈 것 없이 저자가 위선을 보이는 것이라면.

 

그럼 우리는 더 큰 재앙을 불러들인 것이 아닌가.

 

마을이 고요 속에 침체 되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게 마비된 듯한 그 시공간 속에서, 오직 M만이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 그는 어떤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엉망이 된 마을을 둘러보더니, 이내 눈꺼풀을 깜박였다.

그가 다시 눈을 뜨자, 동족을 살해하기 위해 번쩍였던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K.”

나긋한 목소리로 K의 이름을 부르며, 그가 천천히 K를 돌아보았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그가 처음으로 인간처럼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대도 내가 두려운가.”

 

K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게 묻는 그의 미소는 어딘가 아주, 아주, 아주 까마득히 고독해서…

“…….”

…감히 인간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아름답고, 또 슬퍼 보였다.

“M 님….”

M가 답을 구하듯 K에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런 M의 손 위에 살며시 제 손을 겹치며, K는 대답했다.

 

“M 님,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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