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여름의 해바라기밭 너머에는 봄날의 해바라기가 살고 있다

만자타입 HL 소설 커미션 작업물

- 약 2일 소요 / 11,040자 / 전문 공개 샘플

- 스타듀밸리 드림: 여캐 K, 남캐 M

- 신청사항: 1만 자, 오마카세, 서사 반전, [  불멸자 정령사 K X 요양 온 필멸자 대학원생 M: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동기들의 몸 걱정으로 K가 사는 곳에 요양 온 M  ]


여름의 해바라기밭 너머에는 봄날의 해바라기가 살고 있다

: 불멸자 정령사 K X 필멸자 대학원생 M

M는 턱선을 타고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는 제 앞에 펼쳐진 무성한 잔디밭을 바라보았다. 잔디 너머에 희끗희끗하게 팻말이 보였다. ‘스타드롭 펜션으로 가는 길. 어서 오십시오.’

‘제대로 온 게 맞았군.’

그는 팻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본래라면 이 시간엔 랩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어야 했지만, 그는 웰윅과 치의 계략에 말려들어 제가 사는 도시를 떠나 바로 이곳 스타듀밸리에 일주일간 휴양을 왔다.

동기인 그들의 친절한 ‘제안’이 아니고 계략인 이유는 별것 없었다. 단순하게 그 둘이 짜고 쳐서 냅다 스타드롭 펜션을 예약했다. 허면 적어도 셋이 같이 가는 것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M를 콕 집어서 ‘너만 다녀 와.’라고 말했다.

웰윅이 변명하기를, 요즘 제 몰골이 말이 아니었댔다. 교수는 허구한 날 저만 찾아대지, 안 그래도 논문에 회의에 팀 프로젝트에 연구에 바빠 죽겠는데 갖은 심부름까지 도맡아 하니 저게 진짜 노예 몰골이지 사람 몰골인가 싶었단다.

그렇게 치가 제 지인이 운영하는 곳이라며 이곳 펜션을 예약했고, 교수님 불호령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감당할 테니 제발 좀 쉬고 오라며 등을 떠밀었다.

더욱이 스타드롭 펜션은 펠리컨 마을은 몰라도 이 펜션만은 아는 사람들이 많을 만큼 유명했는데, 바로 앞에 펼쳐진 대농장의 해바라기밭과 그 아래 보이는 바다, 주변 숲의 아름다운 정취가 예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만 펜션 주인이 철저히 지인에게 뿌린 지류 초대장을 통해서만 손님을 받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이곳에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는 곳이라고.

‘나 참.’

그리 유명한 곳을 저 힐링하고 오라고 홀딱 예약해 버렸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M는 그럼 일정만이라도 알자며 체크인 날짜가 언제인지 물었다. 치가 무난한 숫자를 뱉어냈다.

“5…….”

“아, 5일 뒤?”

닷새 정도면 여유롭게 준비할 틈이 있었다. M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치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그가 중얼거렸다.

 

“4, 3, 2…….”

 

이런 미친.

M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기숙사로 뛰어가 짐을 챙겼다. 치 이 미친 자식. 네가 그럼 그렇지! 그는 부랴부랴 최소한의 옷가지와 지갑만 챙겨서는 스타듀밸리로 향하는 차편을 검색했다.

그리고 몇 번의 환승을 거친 끝에야 이곳에 도달했다. 중간엔 계곡 마을까지 직행하는 버스마저 뚝 끊겨서 운 좋게 도착해 있는 마을버스를 뛰어 탔고, 그마저도 차내에 에어컨이 없어서 차창을 스치는 해풍에 의지해 겨우겨우 더위를 달래며 왔다.

이쯤 되니 이게 힐링하라고 보내준 휴양인지 똥개훈련인지 알 수 없었지만, 치가 최소한의 도리로 메신저에 약도를 보내줬기에 그것을 보며 버스정류장을 벗어나 농장까지 걸었다.

‘오.’

그렇게 도착한 농장은 확실히 대농장인 것으로 보였다. 뭐 저기 수출용 대규모 농업 단지 같은 스케일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아무튼 계곡 규모치고는 밭이 무척 넓고 해바라기가 많았다.

M는 감탄하며 그대로 밭을 따라 걸었다. 생각 외로 펜션이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아, 어서 오세요! M 님 맞으시죠?”

때마침 마당에 나와 있던 펜션 주인이 다 알고 있다는 듯 인사를 건넸다. 알고 보니 그냥 치의 지인이 아니라 그의 고등학교 시절 절친이라고 했다. M는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체크인을 마친 뒤 방에 짐을 풀었다.

‘덥다.’

그는 바로 에어컨을 켜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해바라기밭을 감상했다. 확실히 바깥 날씨는 무척 살인적이었지만, 시원한 실내에서 내다보이는 풍경은 강렬한 여름의 햇살만큼이나 색채가 짙고 아름다웠다.

“…….”

한데 그처럼 바깥 풍경을 가만히 내다만 보고 있으려니, 왜인지 슬그머니 아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바람이 불 때마다 키가 큰 해바라기들 너머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녹색 숲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주변은 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결국, M는 풍경에 매료되어 다시 뭉그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땀이 나서 씻어야 할 것, 몸 더럽힌 김에 나가서 주변에 뭐가 있나 미리 살펴봐 두고 돌아와 목욕을 하면 편리할 것 같았다. 그럼 다른 날에 바깥을 헤매며 뻘뻘 진땀을 흘려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으니 말이다.

‘좋아, 효율적으로 움직이자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어컨을 송풍으로 맞춰 두었다. 그리고 밖을 나섰다.

 

 

***

 

 

산들바람이 나무를 한바탕 사아아 뒤집어 놓았다. M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펜션 부근은 일조량이 상당했는데, 이리 숲으로 들어오니 햇볕이 가려져서 공기가 제법 시원했다. 그는 ‘신더샙 숲’이라는 나무 표지판을 지나 점점 더 깊은 숲속으로 걸어 내려갔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웬 반짝이는 먼지들이 M 앞으로 흩날려 오기 시작했다.

‘뭐지……?’

단순히 햇살을 반사해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어떤 화학 반응을 일으킨 홀씨나 포자라도 되는 듯이 자체적으로 발광하는 빛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M는 손을 뻗었다. 잡아보니 반딧불이였다.

한낮에 불을 켜고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라니?

이런 현상은 난생 처음 보았다. 연구생 된 도리로 응당 조사를 해 봐야 마땅했다. M는 반딧불이들이 날아오는 방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쩌면 저곳에 반딧불이의 집단 서식지라도 존재하고 있는지 몰랐다. 참 기이한 현상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

그리고 그리 오래지 않아, 또 다른 숲에 도착했다.

숲은 좀 전까지 그가 거닐었던 신더샙 숲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좀 더 짙고 푸른 녹음 하며, 불이 켜진 듯 빛나는 나뭇잎들 하며, 그곳을 요정처럼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들 하며.

거기에다 곳곳에는 청나래고사리도 자라 있고, 한때 고목이었을 게 분명한 거대한 나무 밑동들도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고. 정말 여러모로 꿈만 같은 풍경이었다.

‘지구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M의 상상력은 수학적인 사고방식을 제하곤 대체로 빈약했지만, 그런 그라도 푹 빠져들어 환상이니 꿈이니 요정 같은 것을 논할 만큼 숲은 아름답고 신비한 힘으로 넘쳐났다. 생물학 석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조차 처음 보는 식물들이 즐비했다. 웰윅과 치도 이곳에 온다면 분명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었다.

M는 내심 들떠 이곳저곳을 마구 둘러보기 시작했다. 당장 표본을 채취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동네에 잡화점이 있다고 들었는데, 내일 그곳에서 유리병이라도 한가득 사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퍽!

 

“윽……!”

갑자기 뭔가 묵직한 게 날아와 등을 쳤다. 뭐야? M는 황당해져 뒤를 돌아보았다. 반고체 상태의 투명한 생명체가 제 밑에서 꾸물거리고 있었다.

“이게 뭐지…?”

M는 쪼그려 앉아 그것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별안간, 우수수…!

눈앞의 것과 똑같이 생긴 것들이 수풀을 헤치고 잔뜩 튀어나왔다. M의 등에도 소름이 돋았다. 뭐, 뭐야 이거. 그는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말도 안 되게 많은 양의 생명체들이 저를 둘러싸고 있었다.

M는 조심스레 그것들을 피해 발을 옮기려 했지만, 순간 한 슬라임이 그의 신발로 달려들었다. 치이익. 타는 소리와 함께 신발 앞코가 녹아내렸다. 미친…! M는 황급히 발을 떼었다. 정체 모를 산이었다.

그는 꼼짝없이 제자리에 서서 이 포위망을 어떻게 뚫고 나가면 좋을지 고민했다. 머리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몸에 산도 높은 점액질을 두른 생명체라니, 이런 건 단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슬슬 이 숲을 향한 경외심으로도 모자라 공포심마저 샘솟던 그때,

 

“슬라임들이여, 그자는 적이 아닙니다…!”

 

맑은 목소리와 함께 일순 강력한 빛이 터져 나왔다.

“윽…!”

정면으로 마주한다면 가히 실명까지도 번질 만한 빛이었다. M는 팔로 시야를 가렸다. 우수수수…. 그것들이 어둠을 찾아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살그머니 팔을 내렸다. 그러자 눈앞에는 어느새 좀 전의 괴생명체들은 온데간데없고, 눈부신 하얀 머리를 반짝이며 옅은 빛 속에 서 있는 여성만이 보였다.

‘지팡이……?’

그는 자칫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여성을 바라보았다.

손에 쥔 나무 지팡이며, 독특한 복장이며, 몸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며. 여러모로 범인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인간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는 우선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첫 음절을 채 내뱉기도 전, 여성이 물었다.

“괜찮으세요?”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방금 당신이 구해주었으니 괜찮았다. M는 다시 한 번 고맙다는 의사를 비치려 했지만, 여성의 시선이 묘하게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시선이 닿는 제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아.”

방금 벌어진 난리통에 다친 건지, 괴생명체에게 당해 발목의 살갗이 녹아 있었다. 일련의 사건들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지는 바람에 다친 줄도 몰랐다. 그는 멋쩍게 답했다.

“…괜,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놔두면 금방 나을 거예요.”

하지만 여성의 의견은 달라 보였다. 그녀는 짐짓 어떤 책임감을 느끼기까지 하는 얼굴로 강경하게 말했다.

“아니요, 전혀 괜찮지 않아요. 슬라임의 독은 평범한 약으로도 낫기 힘들거든요.”

제가 갑자기 빛을 비춘 탓이에요. 죄송해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M를 치료해주겠다고 말했다.

“아, 음…….”

그 낯선 친절에, M는 저도 모르게 주저했다.

그야 솔직히, 그의 입장에서는 겨우 이 정도 상처로 그녀에게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 자체가 많이 어색하고 한심하게 느껴지기만 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기에, 그는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실례지만, 조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제야 그녀가 온화하게 풀어진 얼굴로 웃어 보였다.

“저는 K예요.”

그녀는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했다. 그에 M도 ‘저는 M라고 합니다.’ 하고 짧은 자기소개를 마친 뒤 뒷덜미를 매만졌다. 왠지 목 뒤가 열기로 조금 후덥지근했다.

 

“좋아요, M! 그럼 가볼까요?”

 

이후 그는 그녀를 따라 그 이상한 숲을 벗어났다.

가는 길에는 저를 공격했던 슬라임들이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바람결에 부드럽게 나부끼는 K의 새하얀 뒷모습만을 쫓아 숲을 내려왔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서 남쪽으로 내려가, 낮은 절벽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도달해보니 그곳은 한눈에 봐도 무척 오래된 외양을 자랑하는 첨탑이었다. 그는 이끼가 슬고 하얀 꽃을 틔운 덩굴이 기어오르는 돌탑을 올려다보았다. 나무 문의 손잡이를 잡으며, K가 부디 놀라거나 겁을 먹지는 말아 달라고 속삭였다.

뭐….

건물이 꼭 중세에 지어진 탑 같고 많이 낡긴 했지만, 겁을 먹을 이유가 있을까 싶어서 M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문이 열렸다.

화악.

순간, 열린 문틈으로 꽃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M의 눈이 커졌다. 탑의 안쪽은 슬라임이 출몰하는 숲만큼이나 아름답고 신비했다. 바닥에는 연녹색 잔디밭이 한가득 깔려 있고, 신기하게 생긴 버섯과 식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자라 있으며, 그 위로 나비들이 날고 있기 때문이었다.

벽면으로 시선을 옮기면 그쪽도 보통 집 같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온갖 약초와 이상한 재료들, 말린 꽃, 유리병, 물약들이 각종 선반과 책장에 그득그득 진열돼 있었다.

그중 제게로 날아오는 나비 한 마리에게 검지를 내밀어 보며, M는 물었다.

“저기, K. 이게 다 뭐예요……?”

K가 쿡쿡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런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그녀가 밉지 않게 M를 흘겨보며 미소 어린 낯으로 답했다.

 

“마법이에요.”

 

…….

….

…마법?

마법이라니?

M의 얼굴에 혼란이 뒤섞였다. 그의 표정은 대체로 무표정한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도무지 그런 딱딱하고 정적인 얼굴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야 이 모든 게 마법이라지 않은가.

원래의 자신이었다면 장난치지 말라며 헛웃음만 흘렸을 터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미 온갖 신비한 동식물들이 서식하는 숲을 보고 온 참이었다. 그런 데다가 그곳보다 더 환상으로 활짝 피어 있는 그녀의 탑 안에 들어오니, 그로서는 당최 그녀의 말을 부정하거나 감히 비웃을 수가 없었다.

M는 할 말을 잃고 K를 바라보았다. K가 약간은 쓴 얼굴로 웃었다.

“저는 이 계곡에 은거하는 마법사예요. 여기서 동식물을 관찰하고, 소통하며 자연을 굽어살피고 있어요.”

“그게…… 가능합니까?”

그녀의 목소리마저 이제는 한여름 밤의 꿈 같아서, M는 주어도 없이 무작정 되물었다. K가 잠시 눈을 굴리더니, 찬장으로 가 작은 약병을 꺼내 왔다. 안쪽에는 각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오묘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걸 마시면 알게 될 거예요.”

M는 얼떨결에 병을 받아들었다. 십 마일 밖에서 봐도 수상할 만큼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이었지만, 그는 호기심에 코르크 마개를 뽑았다. K에게 흘긋 시선을 던지니 그녀가 믿어도 좋다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생각건대, 그건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기이할 만큼 굳건한 신뢰를 주는 눈빛이었다.

“…….”

M는 거의 직진밖에 모르는 남성이었으므로, 그녀의 확신에 가득 찬 금빛 눈을 배신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는 K를 믿고 그대로 액체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간 순간, 저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헉……!”

 

이 계곡에 온 뒤로 줄곧 놀라움에 놀라움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M는 순식간에 누군가의 목소리로 시끄러워진 귀를 붙잡으며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약을 마시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존재들이 와글와글 그의 눈앞에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게, 대체…….”

M는 순간 자신이 마약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몸에는 별다른 이상 증상이 없었다. 그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작은 영령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영령들이 제각기 다른 말을 뱉어냈다.

안녕, 안녕! 인간이다. 인간 뭐해? 인간 바빠? K! 이 인간 비밀의 숲 냄새가 나! M? 숲에 다녀왔지! 켁, 도시의 체취다! 새로 이사 온 건가? 슬라임의 진액이 묻었어! 정화해! 신기하다~ 인간이 K의 탑에 들어오다니…….

도대체가 어찌나 말이 많은지, 귀가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는 해답을 구하듯 K를 바라보았다. K가 다 안다는 듯 말했다.

“그들은 숲의 정령 주니모예요. M, 당신을 반기고 있네요.”

이어 그녀는 방금 그가 마신 약이 이들을 보고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 약이라면서, 다른 인간들에게는 주니모 이야기를 비밀로 해주기를 당부했다. 그녀가 주니모들이 이처럼 반기는 인간은 오랜만에 본다고 말했다.

‘나를 반기고 있다고…?’

어디 SF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 지금 바로 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니, 역시 현실감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다. 신기한 마음에 M는 쪼그려 앉아 주니모 한 마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손안에 말랑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와 닿았다. 주니모가 폴짝 뛰었다.

오, 반응한다. 이런 게 교감이라는 건가. 그는 주니모를 좀 더 쓰다듬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K도 뒷짐을 지었다. 그녀는 M가 충분히 교감하고 또 이 환경에 적응할 틈을 주더니, 그가 주니모를 실컷 쓰다듬었다고 생각될 즈음에야 짝 박수를 쳤다.

“자, 좋아요. 그럼 슬슬 치료를 시작해 볼까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참. 치료. 그것 때문에 여기 왔었지. M는 조금 아쉬워하며 주니모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K가 싱긋 웃고는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순간 나무 스툴이 날아와 M의 뒤에 자리 잡았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이거 앉으라는 거 맞지…? M는 그답지 않게 쭈뼛거리며 스툴에 앉았다. K가 선반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이번에도 독특하게 생긴 물약과 약초 몇 가지를 꺼내더니, 방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가마솥 앞에 가 꺼내 온 것들을 하나씩 집어넣었다. 5분쯤 기다리자 부글부글 연금 색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그녀가 아래층의 용액이 섞이지 않게 그 거품만을 얇게 떠내 야트막한 종지에 담았다.

“달콤보석베리를 섞은 약이에요. 이게 슬라임의 독에 좋거든요.”

코끝에 달콤한 향기가 스쳤다. 이름만큼 달콤한 재료인 모양이었다. 그것을 손에 덜어 펴내며, K가 M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잠, 잠깐만요. 이게 무슨……!”

일순 M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허둥지둥하며 K를 막았다. 그래봐야 함부로 여인 몸에 손을 댈 수가 없어서, 어정쩡하게 양 손바닥만 펼쳐 든 자세에 불과하긴 했지만.

“안 돼요. 이걸 발라야 나아요. 오래 두면 주변 피부도 녹는다고요.”

그런데 정작 K의 반응은 단칼 같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M의 손을 곱게 접어 밀어내주곤, 다른 한쪽 손에 묻은 약을 그의 발목에 부드럽게 펴 바르기 시작했다.

“읏…….”

그 움직임이 상상외로 부드럽고 간지러워서, M는 그만 옅은 신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그는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이내는 잘근거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종국에는 팔목으로 제 입가를 가린 채 K의 손길을 느꼈다.

자신은 약의 배합을 모르니 치료받는 것까지야 그렇다 쳐도, 그녀가 이토록 저를 어린이 취급하며 손수 약을 발라줄 줄은 몰랐다. 그 정도는 스스로 바를 수 있는데,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M는 자신이 꼴사납다고 생각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그런 걸까, 견디지 못하게 부끄러워 그런 걸까. 심장이 마구잡이로 쿵쿵 뛰었다.

“간지러워…….”

M는 K에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문득 눈이 마주친 주니모가 음흉하게 히죽 웃었다. 뭐, 뭘 웃어. 정령이면 다 착한 녀석 아니었나? 영물 주제에 잘도 저런 웃음을 짓네….

“…….”

어쩐지 조금 분한 감정을 느끼며, M는 도로 K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다 됐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세요, 말끔해졌어요.”

M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제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와.”

정말이었다.

K의 말대로 정말 발목이 깨끗하게 싹 나아 있었다. 아니, 단시간에 이런 치료가 가능하다고? 피부가 녹았던 흔적조차 없어…. 이거야말로 모든 인간이 간절히 손에 넣고 싶어 할 영약이잖아. 그는 멀쩡해진 제 살결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생전 처음 보는 치료 방식에 감탄하고 있으려니, 곧 그의 시야에 투명한 약병이 하나 들이 밀어졌다. 안에는 방금 그녀가 제 발목에 발라준 연금 색 약물이 든 채였다.

“……왜요?”

M는 영문을 몰라 K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그의 두 손을 감싸 약병을 쥐여 주었다.

“사과이자 작은 선물이에요. 어쨌든 저 때문에 불필요하게 다치신 거니까요.”

“아….”

선물이라고. 이렇게 귀한 걸 그냥 받아도 되나…? M는 다소 겸연쩍어져 괜스레 약병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이쪽 숲은 아까 당신이 마주친 슬라임이라는 몬스터들이 많이 돌아다니니 위험하다고. 가능한 한 가까이 오지 말고, 혹 다치거든 그 약을 잘 사용하라고.

“…….”

치와 웰윅이 꿰뚫어 본 대로 매일같이 치어 살기 바쁜 도시 생활에 조금은 지쳤던 것도 사실인지라, 이런 순수한 친절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M의 눈이 잠깐 반짝였다.

“……고맙습니다. 너무 신세를 진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녀가 친절하다고 해서, 그 친절에 기대어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는 법이었다. M는 K에게 손을 내밀었다. K가 방긋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고 악수해 주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M는 그렇게 꾸벅 인사한 뒤, K의 배웅을 받으며 탑을 나왔다.

‘말 그대로 마법 같은 시간이었어.’

그는 피식 웃고는 병을 하늘 높이 들어 보였다. 나뭇잎 사이로 비친 햇살이 약물을 영롱하게 밝혔다.

이어 그는 K의 마탑도 한 번 뒤돌아본 뒤, 병을 손에 쥔 채 왔던 길을 되돌아 신더샙 숲 표지판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농장의 펜스를 넘고, 몇 개 건물을 지나고, 해바라기밭을 거쳐, 비로소 펜션에 들어갔다.

“와, 오늘 평소보다 진짜 많이 걸었다….”

방에 도착하니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피로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기야 그 넓은 숲을 돌아다니고 태어나 처음 보는 이상한 생명체들도 맞닥뜨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역시 에어컨을 적정 온도로 켜 두고 나오길 잘했다. 어느덧 뉘엿뉘엿 지고 있는 햇살이 거실로 한 아름 비쳐 들어와 살갗이 따가웠다. 그는 커튼을 치고 침실로 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작은 병 안에서 찰랑이는 물약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꿈만 같단 말이지….’

M는 물약의 은은한 금빛에서 자신을 구해준 여성의 눈 색을 떠올렸다.

무릇 인간의 사고방식은 연쇄적으로 작용하는 법이다. 그는 K의 눈 색에서 나아가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를, 살갗에 닿았던 조심스러운 움직임과 온기를, 햇빛 아래 찬란하게 부서지던 그녀의 백색 머리칼을 떠올렸다. 열사병 직전 상태에 내던져진 사람처럼 K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침실은 이 시간이 되니 비교적 그늘이 져서 햇볕이 따갑지 않았다. 그는 병에서 시선을 옮겨 창 너머 해바라기밭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해풍이 불어오고, 해바라기 꽃잎들이 꼭 자기들에게 와 달라는 것처럼 M를 유혹하며 하늘하늘 춤을 추었다.

“K, 그 사람은 숲에 내려오지 말라고 했었지….”

M는 혼잣말을 읊조리며 해바라기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어김없이 황금빛 물결 너머 희끗한 녹음으로 눈길을 옮겼다.

해바라기는 환영할지 몰라도 초면인 제게도 걱정의 낯빛을 보여주던 K는 제 방문을 전혀 환영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는 한 번 더 그녀가 사는 숲으로 내려가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그 숲을 굽어살피는 마법사이자 과학자였듯 그도 생물학자이자 연구생이었고, 그곳에는 그가 모르는 신기한 표본들이 셀 수 없이 많았으며, 가장 결정적으로는─

“…….”

…그의 성격에, 이대로 그녀의 호의를 얌전히 받기만 할 수는 없었던 까닭이다.

‘나 원, 그렇게 신기한 광경을 보여줘 놓고는 더 다가오지 말라니.’

제가 아는 가장 다정한 낯을 해놓고도 참으로 무정한 사람이었다. M는 자리에서 일어나 협탁에 물약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좋아, 그럼 내일은 내 쪽에서 선물을 가져가도록 할까.”

M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메신저 앱을 켰다. 치가 보여줬던 스타드롭 펜션 패키징 인포에 따르면 아마, 내일 밭의 해바라기를 수확해 꽃다발을 만드는 체험 시간이 있다는 것 같았다.

M는 꼭 봄날의 정원 같던 K의 마탑을 떠올렸다. 작은 풀꽃들로 가득한 그녀의 공간에 커다란 해바라기도 한 송이 장식해 둔다면, 그녀가 가장 강렬한 8월의 여름도 잘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무뚝뚝하게 굳어 있기만 했던 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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