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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통 계승

만자타입 HL 소설 커미션 작업물

- 약 10일 소요 / 12,811자 / 전문 공개 샘플

- 주술회전 드림: 여캐 Y(성씨 K), 남캐 료멘 스쿠나

- 신청사항: 1만 자, 오마카세, [  뱀파이어 스쿠나 X 인간 Y(성씨 K)  ]

- 주의사항: 유혈, 사망 요소


혈통 계승

: 흡혈귀 스쿠나 X 인간 Y

머나먼 옛날, 한 인간의 배에서 괴물이 태어났다. 팔 넷에 눈도 넷, 배에는 거대한 입이 달린 돌연변이. 전혀 사람 같지 않은 ■■.

가문을 이을 건강한 장자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의 탄생은 재난이었다. 사람들은 ■■를 보자마자 이게 웬 망신이냐며 당장 저 괴물을 죽여야 한다고 칼을 빼 들었고, ■■의 아버지마저 아내가 괴물과 정을 통한 것이 틀림없다며 그녀를 내치고 파문시켰다.

오로지 ■■의 어머니만이 ■■를 감쌌다. 그녀는 끝끝내 ■■를 안고 친가로 도망쳤고, 당연히 친가에서마저 쫓겨났다. 순식간에 홑몸이 된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이 마을 저 마을을 전전하며 갓난아기인 ■■를 데리고 살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발 디딜 곳이 없었기로서니, 그녀의 모성애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아직 젖도 못 뗀 ■■를 전설 속 요괴 ‘료멘 스쿠나’로 부르며 두려워하고 혐오하기 시작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도, 땅을 옮겨도 료멘 스쿠나의 소문은 질기게도 따라붙어 두 사람을 괴롭혔다.

결국 이 땅의 그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는 몸이 된 ■■의 어머니는 온갖 악담과 저주, 돌팔매질에 못내 지치고야 말았다. 그녀는 ■■를 포기했다. ■■, 네 존재를 받아들이기에는 세상이 아직 많이 이른 것 같구나. 그래, 우리 여기까지 하자. 이 어미가 못나 미안하다. 부디 다음 생에는 우리 둘 다 평범한 모자로 만나자꾸나….

그녀는 ■■를, 료멘 스쿠나를 산속 깊은 동굴에 유기했다. 그리고 자신도 멀리 도망쳐 허름한 폐가에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동굴에서 우렁찬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몹시 서글픈 것 같기도 했고, 어미와 세상을 원망하는 듯 날카로운 것 같기도 했다.

소리를 들은 검은 곰 한 마리가 동굴 근처로 다가왔다. 굶주린 곰은 크게 헐떡이며 연약하고 보드라운 생살의 냄새를 맡았다. 곰이 크게 포효했다. 날카로운 잇새로 침이 뚝뚝 흘러내렸다. 곰의 송곳니가 스쿠나의 작은 몸을 찢어발기려는 순간이었다.

 

신이 나타났다.

 

미래를 관장하는 여신, 그와 동시에 끝없는 사랑을 베푸는 자.

K였다.

K는 즉시 부드러운 손길로 곰을 잠재우고, 건강하게 울어 젖히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녀는 스쿠나를 거두었다. 염소의 젖을 먹이고, 풀로 옷을 지어 입히고, 평화로운 자연의 요람을 만들어 인간들에게 배척받은 그를 사랑으로 키워냈다.

스쿠나는 범인이 아닌 그 생김새에 걸맞게 어려서부터 온갖 분야에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걸음마를 막 떼었을 때 이미 들소를 한 손으로 들 수 있었고, 언어와 지식의 습득 능력도 빨라 곧잘 어려운 말을 구사해 냈다. 다섯 살에는 스스로 누가 알려주지도 않은 온갖 체술을 익혔으며, 또 여덟 살에는 이미 신장이 오 척에 달했다. K보다도 한 뼘이나 큰 체격이었다.

인간보다는 가히 신에 가까운 성장 속도였다. 웬만하면 놀랄 일이 없는 K도 깜짝 놀라 살펴보니, 안 그래도 남다른 씨앗에 저주의 힘이 깃들어 버린 듯했다. 스쿠나를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인간들의 마음이 부정적인 힘이 되어 스쿠나에게 주력으로 축적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힘을 좋은 데 썼으면 좋겠다는 K의 바람과 달리, 부정적인 힘을 타고난 천재답게 스쿠나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포악하고 잔인해지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심심풀이로 숲에서 짐승들을 상대로 힘을 겨루던 것이, 이제는 숲을 떠나 인가를 헤집고, 수많은 사람들을 해치고, 더 강한 자를 찾아 도전하고 승리하고 살해하며 희열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다.

많은 신들이 K를 긴급회의에 소집했다. 그들은 K더러 곰에게 죽었어야 할 녀석을 부득불 길러낸 당사자가 현 사태를 책임지라며 어서 그 애송이를 죽이라고 닦달했지만, K는 스쿠나가 죄 없는 생명들을 죽여 업을 쌓아가고 있다는 사실에는 동의할지언정 그를 죽여야 한다는 의견에만은 동의하지 않았다.

아무리 죄가 많은 자일지라도 사랑으로 품어주고 정해진 미래로 인도하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자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K는 신들의 목소리에 맞서 싸웠다. 그녀는 만에 하나 누군가 스쿠나를 죽인다면 자신은 더는 신들에게 미래를 점지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고, 그녀의 고집을 아는 신들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이로써 사건은 일단락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정말로, K는 스쿠나를 죽였어야만 했다.

 

열넷에 독립하여 몇 년간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며 일본 열도를 휩쓸던 스쿠나가 돌아왔다.

더는 죽이고 싶은 인간도, 회가 동하는 강자도 없다고 했다. 이제는 시시한 인간 따위보다 신들이 얼마나 강한지 궁금해졌다며, 스쿠나가 말했다.

K는 제자리에 서서 스쿠나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이리될 줄은 스쿠나를 거둔 그날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야 그녀는 미래를 보는 신이었으매, 그 미래는 곧 운명이라서 무슨 수를 써도 그 누구도 피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결론적으로, K는 스쿠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되레 뒤집기조차 못 하던 어린 스쿠나를 강아지풀로 즐겁게 놀아줬던 것처럼, 속임수나 봐줌 따위 없이 전심전력을 다해 전투에 임했다. 그것이 K가 스쿠나에게 애정을 저버리지 않는 방식이었고, 스쿠나에게 내어 줄 수 있는 마지막 즐거움이었다.

불화살 비가 쏟아져 내리고 땅이 갈라지고 신력과 주력이 충돌하며 굉음을 내는 그곳에서, 스쿠나는 웃었다. K도 웃었다. 스쿠나의 손에서 화염구가 쏘아져 나왔다. K의 심장이 관통했다. 반 박자 늦게 피가 울컥 솟구쳤다.

스쿠나의 손이 K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불사의 몸도 머리와 심장을 동시에 분리하면 죽겠지. 그가 K의 목을 비틀었다. 마지막 발악처럼 뿜어져 나온 피가 스쿠나를 적셨다. 종막이었다.

어디를 찔러도 금세 회복되던 K는 이제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스쿠나는 승리의 쾌감에 그 오만한 목소리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크게 웃어 젖혔다. 갈 곳을 잃은 K의 신력이 그녀의 피를 뒤집어쓴 스쿠나에게 흡수되었다. 스쿠나는 자신이 불사의 몸이 되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때,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치더니 별안간 일본도 수십 개가 날아왔다. 스쿠나의 몸이 거대한 신목에 날아가 박혔다. 허공에서 즉시 사슬이 튀어나와 온몸을 휘감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신들이 스쿠나의 주위를 둘러싸 포위했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신이 외쳤다.

“이 사악한 요물 같으니! 네가 감히 고귀한 신의 피를 탐하였겠다…!!”

스쿠나는 피를 흘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는 제 목숨을 위협하는 신들이 주변에 있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킬킬킬 음산한 소리만 흘려댔다. 신이 또다시 외쳤다. 배짱 한번 좋구나. 신을 경외할 줄도 모르는 방자한 놈이 이 천하에 네놈 말고 또 있을까!

“내 네 녀석을 고이 죽게 놔둘 수가 없다. 네놈은 신의 권위를 넘보고 그 존체를 살해하였다! 그 죄로 ■■ 네놈은 네 그리 좋아하던 인간의 피를 빨아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더러운 몸이 될 것이며, 그 가공할 주력도 갈가리 찢겨 스무 손가락에 봉인될 것이다……!!”

K의 죽음으로 분노한 신들은 힘을 합쳐 스쿠나의 손가락 스무 개를 자르고 그에게 검은 저주의 낙인을 찍었다. 주력은 빼앗겼어도 신력은 빼앗기지 않은 스쿠나의 손가락은 다시 자라났지만, 그렇다 해서 합세한 신들에게 이길 방도는 없었다. 그는 온몸에 칼이 꽂힌 채 지옥불 속으로 떨어졌고, 천 년의 세월 동안 화마에 전신이 불타고 찢겨나가는 고통을 받는 형벌에 처하게 되었다.

고작 인간에 불과했던 나를 처리하지 못해서 이렇듯 꼴사납게 달려드는 신들이라니. 스쿠나는 영원히 불타는 화마 속에서도 즐겁기만 하다는 듯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천 년, 그 이상의 세월이 지났다.

 

 

***

 

 

Y는 가마를 타고 저주받은 숲으로 옮겨졌다. 이제 자신들은 더 나아갈 수 없으니, 남은 길은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가마꾼들이 행운을 빌어 주었다. Y는 혼자가 되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앞은 까마득히 먼 옛날 신을 해하고 사신이 된 자가 머무르는 신사로, 그의 영향력이 닿는 공간은 이처럼 하늘이 붉은빛을 띠고, 기이한 울음소리와 땅에 아무렇게나 자라난 정체를 알 수 없는 뼈가 가득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공간을 ‘마를 가두어 다스리는 사찰’, ‘악마가 깃든 부엌’이라는 뜻에서 ‘복마어주자’라 불렀다.

Y는 복마어주자 속을 거닐었다. 마을에서 이 공간의 주인, ‘료멘 스쿠나’에게 석 달마다 마을 사람을 제물로 바치게 된 역사는 무척 오래되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신사 끝까지 제물을 데려다주지 않고 중간에 내려주는 것 또한, 그저 가만히 있는 인간을 잡아먹기보다는 쫓겨 도망치고, 반항하고, 격렬하게 날뛰는 인간을 사냥하는 것이 그의 취향이기 때문이라고.

이왕이면 순순히 바쳐진 먹이보다는 살아 도망치는 사냥감이 좋다니, 이만하면 료멘 스쿠나의 성정에 대해서도 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Y는 스쿠나에 대해 곱씹었다.

‘가엾은 사람.’

보통 인간이었다면 스쿠나를 두려워하고, 저주하고, 원망하며 혐오했겠지만, 태생부터 박애를 실천하는 Y의 감상은 그와는 많이 달랐다. 그녀는 스쿠나를 안타깝게 생각했다.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했기에 신을 해했고, 그 결과 피밖에는 먹지 못하게 되어 인간도 해했겠지. 또 그러한 살생은 지독한 인과율로 작용하여 그를 신도 인간도 아닌 반신반인으로 만들었을 테다. 그가 신과 인간 둘 중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기피되는 존재가 된 것은 비단 그의 잘못만은 아닐 거야.

더욱이 전승에 따르면 그의 몸은 피를 섭취해야만 한다고는 하나, 살까지 씹어먹어야 한다는 소리는 없었다. 그럼 스쿠나도 사랑만 안다면, 굳이 사람을 살해하지 않아도 그 배를, 공허함을, 무료함을 달랠 수 있지 않을까. 그저 석 달마다 피를 조금 섭취하는 것으로, 그 결핍을 충족할 수 있지 않을까.

저를 잡아먹을 괴물의 소굴로 걸어 들어가면서도, 그를 설득하고 더 나은 미래를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낙관주의자가 바로 Y였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숲속에서도 조금도 겁먹지 않고 사박사박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 갑자기 섬찟한 기운이 느껴졌다.

“……!!”

Y는 뒤를 확 돌아보았다. 순간 핏 소리와 함께 목에 따끔한 느낌이 들더니, 1초도 채 안 되어 제 뒤편의 나무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우지끈 무너졌다. 참격이었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목이 따끔따끔 쓰라려 오기 시작했다. 만져보니 피가 묻어 나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대로 저 참격을 맞고 목이 날아갔을 터였다. Y는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쯧. 혀를 차며 료멘 스쿠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쿠나의 모습은 Y가 소문으로 들어왔던 그대로였다. 거대한 체격에 한 쌍씩 더 있는 눈과 팔, 그리고 배에 쭉 찢어져 있는 입. 집채만 한 거미 같은 인상을 주는 남자.

하지만 그 모습에서 Y가 어떤 공포심이라도 느꼈냐면, 그것은 아니었다. 그냥 남들과 조금 다른 것. 그게 전부였다. Y는 말없이 스쿠나를 응시했다. 스쿠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몸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군. 그 기개만은 높이 쳐 주마.”

생김새로 보아도, 이 공간에 살아 존재할 수 있는 자는 ‘그’ 한 명뿐이란 사실로 미루어 보아도, 어떻게 보아도 그는 스쿠나가 분명했다. 그럼에도 상대의 성함을 묻는 것이 어떤 예우라도 되는 양, Y는 그에게 물었다.

“저, 혹시 스쿠나 님이신가요?”

그 어이없는 작태에 스쿠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다가, 명쾌하게 대답했다.

“불쾌하군. 내 이름을 네깟 계집이 알아 무어에 쓰겠다는 거지.”

스쿠나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Y는 피하지 않았다. 확. 그의 억센 손이 Y의 팔을 잡아당겼다. Y는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선득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스쿠나가 중얼거렸다.

“…어디서 본 것 같다 했더니, 닮았군.”

그의 시선이 Y의 상처 난 목으로 옮겨갔다. 그제야 Y는 마른침을 삼켰지만, 그건 스쿠나가 두려워서나 지금 상황이 긴장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묻고 싶은 말이 많아 목이 탔다. 그 별종 같은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본 듯, 스쿠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네년은 누구냐.”

다만 Y는 물음의 저의를 파악하느라 새하얀 눈만 깜빡였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당장 잡아먹을 소나 돼지에게 이름을 묻는 사람은 없다. 역시 료멘 스쿠나의 소문은 과장되었는지도 몰랐다. 입가에 배시시 옅은 웃음이 번졌다. 스쿠나가 아무리 위협적인 어조를 취하고 송곳니를 드러내도, 그녀에게 두려움의 기색이란 좁쌀 한 톨만큼도 없었다.

Y는 오히려 이처럼 적대적이고 날 선 스쿠나의 반응이 그가 사랑에 무지하여 베풀 줄 모를 뿐이라는 방증이라고 여겼다. 그녀는 사근사근 대답했다.

 

“저는 ‘K’ Y라고 해요.”

 

그러자 순간, 스쿠나의 미간이 더 짙게 패였다. 검붉은 네 개의 눈이 모두 Y를 당장에라도 찢어 죽일 것처럼 맹렬한 기세로 쏘아보았다. 이형의 눈 한 쌍이 가늘어졌다.

‘그 여자’와 판박이인 모습에 똑같은 이름, 똑같은 피 냄새.

그에 더해, 신력은 하나도 없건만 좀 전부터 느껴지는 묘하게 익숙한 기운까지. 신력이 아니라면 이 힘은 뭐지? 이렇게 생명력조차 희미한 여자가 대관절 무슨 힘을 담을 수 있단 말이냐. 이 몸에게 익숙한 힘이란 단둘밖에 없는데. 허면 주력인가.

‘주력이라고?’

스쿠나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천 년도 더 전에 나를 나락에 빠뜨린 여자의 복제품이 내 앞에 나타나다니. 이게 과연 우연일까. Y의 모습에서 불쾌함을 느낀 스쿠나는 Y가 알 리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밖에선 그리 고고한 척을 하더니, 뒤에선 나 몰래 새끼라도 까고 다녔나. 그의 사나운 눈빛이 Y의 가녀린 몸을 낱낱이 훑었다.

“뭐, 먹어보면 알겠지.”

훅. 일순 스쿠나가 Y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우악스러운 힘에 그녀의 옷깃이 확 풀어 헤쳐지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곧장 목의 상처를 더 깊게 찔렀다.

“흑……!”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Y의 손이 반사적으로 스쿠나의 팔뚝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것도 그뿐, 그녀는 격통에 허덕이면서도 우는소리 한 번 안 하고 최대한 신음을 눌러 삼켰다. 스쿠나의 두텁고 뜨거운 혀가 Y의 상처를 핥아 벌리며 질척이는 야릇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가 피를 빨아들였다.

지독한 단맛이 입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 피를 한 모금 삼키자, 쿵.

순간 스쿠나의 몸이 울렸다.

스쿠나는 황급히 Y를 밀쳤다. Y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녀가 말간 눈으로 스쿠나를 올려다보았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스쿠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소간 멍해져 있다가, 하하… 헛웃음을 뱉어냈다. 예상이 맞았다. Y의 피를 빨자 어떤 힘이 몸 안으로 미세하게 흘러들었다. 제 신체가 먼저 그 힘에 반응하고 있었다.

스쿠나와 Y의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스쿠나는 제 입술에 묻은 피를 엄지로 훑어 내 삼켰다. 더 공격하지 않는 저를 올려다보며, 이유를 알 수 없게 Y의 입가에 순수한 미소가 번졌다.

‘어찌 된 일인지 훤하군.’

그 모습에서, 스쿠나는 완전히 확신했다.

인간 Y는 신인 K의 피를 이은 자손이었다.

스쿠나는 제 손으로 죽인 K에게서 흡수했던 신력이 아닌, 본래 인간이었을 적 제힘이었던 주력이 소량 돌아온 것을 느꼈다. 그는 어렵지 않게 당시 신들의 속내를 알아챘다. 오호라. 그것들이 이 몸을 두려워했구나. 스쿠나의 입가에 점점 더 짙은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곧 희열이 되어, 사악하고 끔찍한 웃음소리를 낳았다. 그가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오랜만에 몹시 기분이 좋았다.

과거 제 손가락을 잘라낸 신들은 이 일본 땅 곳곳에 제 손가락을 흩뜨려 숨겨 두었다. 그것까지는 저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신들이 저를 제압하는 데 성공하고도 저를 두려워했던 것이었다. 훗날 제가 주력을 모두 되찾아 복수심을 불태워 반격한다면, 그들 중 일부는 K처럼 죽어 나가고야 말 터였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죽인 신들의 신력을 차례차례 흡수한다면, 더는 저를 막을 수 있는 재목도 없을 것이었고.

“이거 재미있군.”

그러니 신들은 제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손가락 스무 개를 모두 찾지는 못하도록, 죽은 K의 껍데기만을 되살려 그녀에게 제 손가락 하나를 먹인 것이다. 그리고 그 껍데기를 조종해 적당한 인간 놈과 자손을 낳게 했겠지.

껍데기일 뿐이라도 신의 육체는 신의 육체였으므로, 그 누구도 파괴할 수도, 소화할 수도 없는 그 손가락도 어찌어찌 융합해 볼 수는 있었을 테니까.

“주물은 사라지고 주력만이 네 핏줄을 타고 계승되었구나.”

본디 강자 아니면 흥미가 없는 스쿠나의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그는 세상에서 이만큼 흥미로운 존재는 또 없다는 듯, 유쾌한 낯짝을 하고서 Y를 내려다보았다. 이토록 보잘것없는 생명력을 지닌 여자가 여태껏 멀쩡히 살아있는 것은 다 제 덕분이었다.

아주 소량만 남았을지언정 막강한 제힘이, 생명력을 보충하여 그녀를 이곳에 살려두고 있었으니 말이다.

“계집, 일어나라.”

Y의 이용 가치를 깨달았기로서니 스쿠나의 태도가 변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는 손가락 하나를 까딱여 손도 대지 않고 Y를 일으켜 세웠다. 인간 따위 쓰러지든 자빠져 죽든 하등 상관없는 그가 그녀를 손수 일으켜 준 것은 모처럼 저를 즐겁게 해 준 데 대한 아주 작은 호의였다.

“봐줄 수 없을 만큼 약해빠진 몸이로군.”

그는 신력으로 피가 줄줄 흐르는 Y의 목을 낫게 해 준 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Y가 한결같이 온화한 얼굴로 웃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속살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영역을 전개했다.

훅. 순식간에 전경이 뒤바뀌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어둑한 숲속이 아닌, 산처럼 쌓인 해골들이 있는 스쿠나의 신사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Y가 여긴 어디냐고 묻기도 전에, 스쿠나가 팔 하나를 측면으로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검은 기운으로 일렁이는 구멍이 생기더니 작고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함이 꺼내져 나왔다. 그가 그것을 받으란 듯 Y에게 툭 던지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Y는 몇 번 덜컥거린 끝에야 함을 안정적으로 받아 들고선 스쿠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유롭게 해골 더미의 정점에 오르더니, 그곳에 놓인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Y에게 함을 열어볼 것을 지시했다.

“이걸 열면… 어떤 일이 생기나요?”

겉만 봐도 불길하게 생긴 상자였다. 이걸 열어젖힌다면 당장 안에서 온갖 사악한 질병과 재해가 튀어나오는 것은 아닌가, 싶을 만큼 을씨년스러운 모양새였다. Y가 망설이자 스쿠나가 다시금 명령했다. 잔말 말고 열거라.

Y의 가느다란 손이 함을 열었다. 일순, 그녀가 몸을 떨었다. 함을 여는 순간 오소소 소름이 끼치면서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한 감각이 쏟아져 들어왔다. 안에는 정체 모를 물건이 부적에 꽁꽁 싸여 있었다. Y는 해답을 구하듯 스쿠나 님, 하고 그를 불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스쿠나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계집, 넌 주력이 있으니 그 봉인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부적을 뜯어 보아라.”

그냥 뜯으면 되는 걸까. 정말로 사람들에게 해로운 게 들어있는 건 아니겠지. Y는 조심스레 부적을 뜯어냈다. 낡은 두루마리가 둘둘 풀리고, 괴상하게 생긴 자줏빛 손가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뭐예요?”

스쿠나의 전설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보았지만, 손가락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Y였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 손가락에서 나오는 주력이 보이느냐. 스쿠나의 물음이 떨어졌다. 그제야 Y가 또 한 번 물었다.

“아까부터 말씀해 주셨지만, 전 ‘주력’이라는 건 처음 들어봐요. 그게 무엇인가요?”

평상시의 스쿠나였다면 그녀의 되물음에 이미 참격을 날렸을 것이었다. 귀찮은 애송이 같으니. 하지만 Y의 쓸모를 발견한 그는 오늘 지난 천여 년간 그 누구에게도 베풀지 않았던 아량을 아주 조금은 베풀 의향이 있었다. 그는 Y의 목을 날리는 대신 대답했다.

“네년이라면 볼 수 있을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두 번씩 말하게 하다니, 상당히 귀찮은 계집이로군. 정신을 잘 집중해서 그 손가락을 들여다보아라. 주변부에 붉은 기운이 보일 것이다.”

Y는 하는 수 없이 스쿠나의 말대로 손가락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저 평범한 손가락 같은데 어떤 기운이 보일 거라니.

그에 더해 아까부터 제게는 주력이 있다든가, 누구를 닮았다든가. 그가 내뱉는 말들은 모두 알쏭달쏭하고 신기하기만 했다. 닮았다는 건 누구를 말씀하신 걸까. 스쿠나 님이 죽였던 어느 인간 중 하나일까? Y의 정신력이 그 궁금증들에 가지를 더 뻗치는 대신 손가락에 집중되었다.

“앗.”

어느 순간, 눈이 트였다. Y는 꼭 언젠가 서역의 상인에게 들었던 ‘오로라’라는 것을 처음 본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서운 기세로 솟구치는 붉은 기운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눈이 밝아지자 몸도 트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손가락에 담긴 기운이 무척 강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보여요, 스쿠나 님.”

Y가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듯 강아지 같은 얼굴로 스쿠나를 올려다보았다. 스쿠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Y에게 가까이 와 보라는 듯 까딱 손가락을 움직였다. Y는 이번에도 거역하지 않고 순순히 그의 발밑까지 다가갔다. 스쿠나가 소름 끼칠 만큼 길게 입꼬리를 찢어 올렸다.

“네 눈이면 전국 팔도에 흩어진 내 손가락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스쿠나의 손이 Y의 배와 손에 쥔 손가락을 차례로 가리켰다.

“네 조상이 삼킨 것과 네 손에 들린 것을 제외하면 모두 열여덟 개. 그것들을 전부 찾아오면 내 너를 놓아주겠다.”

시종일관 무서운 기색 한번 없이 생글거리던 Y의 얼굴에 웃음꽃이 더욱 만개했다. 역시나. 원하는 것만 얻으면, 저를 기꺼이 놓아주시겠단다. 그녀는 제 예상대로 스쿠나도 충분히 대화로 설득이 가능한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아뢰었다.

“하오면 사람들을 잡아먹지도 말아 주세요.”

스쿠나의 미간이 실룩 움직였다.

하. 배짱 하나는 사내놈들보다 좋은 계집이라니까. 그가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마. 어차피 주력을 되찾고 몸도 되돌리고 나면 인간의 피 따위 그에게도 쓸모가 없을 예정이었다. Y는 사람을 죽이지 말아달라거나 사람을 해하지 말아달라는 대신 잡아먹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흡혈쯤이야 인내할 수 있었다. 석 달에 한 번 제물을 받는 연유도 생존보다는 식탐, 식탐보다는 유흥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더욱이 이깟 계집과 스스로 불만족스러운 계약을 맺는다 한들, 다른 놈을 협박해 제 손을 쓰지 않고 그녀를 죽이면 그만이었다. 대상이 사망하면 계약은 종료되고, 자신은 더 질 책임도 없게 되고는 했으니까. 스쿠나의 배에 달린 두 번째 입이 희락으로 찢어졌다.

“계약하겠느냐.”

스쿠나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Y를 채근했다. 겉보기에 여유로운 기색이 만만한 그는 내심 초조해 손톱으로 톡톡 팔걸이를 두드렸다. 계약만, 계약만 맺는다면 이 몸이 이 좁디좁은 공간에서 탈출하는 날도 머지않게 된다. 아둔한 계집. 뭐 이리 답이 늦는 거지.

Y의 맑은 눈이 스쿠나의 심중을 들여다보듯 그의 얼굴만을 또렷이 직시했다. 스쿠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뒤에야, Y가 웃음기 가신 차분한 낯으로 대답했다.

“네. 할게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크하하. 비로소 스쿠나의 입이 확 벌어졌다. 그가 재밌어 마지않는다는 듯, 으스스한 소리를 울려 대며 크게 웃었다. 확.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Y가 순식간에 스쿠나 앞으로 끌어당겨졌다.

스쿠나는 Y의 낭창한 버들가지 같은 허리를 거대한 손으로 붙잡고 제 무릎 위에 눌러 앉혔다. 그의 손바닥에서 화륵 불꽃이 타올랐다. 허억. Y가 고통에 놀라 허리를 비틀었다. 그녀의 몸이 스쿠나의 가슴팍으로 무너졌다. 스쿠나는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게 허리를 더 세게 붙잡고 얇은 옷자락 너머 눈밭처럼 새하얀 살결에 화인을 새겨 내려갔다.

번뜩이는 제4의 눈이 Y의 옷 밑에서 새어 나오는 문양의 신력을 확인했다. 손에서 불꽃이 꺼졌다. 스쿠나가 힘을 풀었다. 계약 성립이다. 그가 Y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하아…. 그대로 무더운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를 더럽히는 순간, 콱.

 

“아윽……!”

 

송곳니가 자비 없이 Y의 목을 꿰뚫었다.

“……흑, 아. 아앗.”

자상하게 손수 상처까지 치료해 줬던 방금까지와는 달랐다. 무서운 속도로 피가 쭉쭉 빨려 나가기 시작했다. 스쿠나의 목울대가 꿀꺽꿀꺽 묵직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Y는 한 손에는 스쿠나의 손가락을 꽉 쥐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다른 한 손에는 그의 소맷자락을 꼭 붙든 채로 파들파들 떨었다. 빨려 나가는 피 때문인지 평생 써볼 일 없던 젖 먹던 힘을 다 쥐어 짜냈기 때문인지, 주먹이 금세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스쿠나가 제 목숨을 앗아가는 순간까지도 영문을 모르고 그를 믿었다. 가냘픈 목소리가 더듬더듬 이름을 불렀다.

“……스쿠, 나, 님.”

가슴팍이 짧은 간격으로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바싹 마른 입술에서 밭은 숨이 터져 나오고, 그 숨마저도 곧 꺼져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내 음전했던 Y의 손이 죽음의 문턱 앞에서 붙들 것을 찾기라도 하듯 스쿠나의 옷자락을 몇 번이고 헤집고, 할퀴고, 우그러뜨렸다. 등에 손톱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스쿠나의 손가락이 떨어졌다. 스쿠나가 무심하게 그것을 받아 냈다.

Y는 헐떡이며 스쿠나에게 매달렸다. 안 그래도 창백했던 얼굴이 아무런 색조도 담지 않고 그 투명한 눈 색만큼이나 파리하게 질려 갔다. 온몸의 영혼이 마귀에게 꼼짝없이 독식 당하는 기분이었다. 몸이 잘게 경련했다. 그녀의 팔이 툭 떨어졌다. 쿵, 쿵, 쿵…. 심박수가 차츰 느려졌다. 숨이 꺼졌다.

작은 몸이 볼품없이 스쿠나의 품 안에 늘어졌다. 스쿠나는 Y에게서 입술을 떼었다. 핏물 섞인 타액이 입가에 번들거렸다. 몸의 주인은 진작 숨을 거두었는데도, 구멍 난 Y의 목덜미에선 샘물처럼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투박한 손이 자못 다정하게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스쿠나는 언젠가 제가 어미에게 받았던 손길을 무의식중에 Y에게 전해주면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계집. 스쿠나 님이 아니라 ■■ 님이다.”

 

반짝. Y의 눈이 떠졌다.

903년 1월 30일, 바야흐로 신들이 꼭꼭 숨겨 둔 신의 자손이 사신의 자식이 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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