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내빛전E

에르케 | 리베라

Erke | Libera

본명 / 에르케 Erke

신생~창천까지 쓴 가명은 리베라, 풀 네임은 리베라 레방셰 (Libera Revanche)

종족 / 아우라 젤라

나이 / 26세(신생) → 29세(효월)

성별 / 여

헤어 / 금발(스노우&라이트닝)

눈 / 청회색 눈동자, 동공 테두리 없음

테마곡

눈바람 / 雪風 / A Cold Wind

고향 / 이슈가르드, 구름안개 거리

총사령부(계급) / 흑와단(소위)

주직업 / 기공사

칭호 / 희망의 등불


외형

이리저리 뻗치고 구불구불한 금발, 탁하게 그을린 잿빛 피부, 검은 비늘. 눈매가 사납게 치켜 올라간데다 화를 낼 일이 많아 늘 미간이 찌푸려져 있다. 제법 미인임에도 성격 때문에 사나워 보인다. 표정이 느슨하게 풀려도 인상이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여성 아우라족 중에서도 유독 키가 크고 근육량이 많은 편. 이슈가르드로 이주한 이민 3세대인 터라 엘레젠과 피가 섞였다.

어두운 색의 옷을 선호하고 가지고 다니는 짐이 많아 벨트나 주머니, 가방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모험가 일을 하면 여기저기서 모으고 얻은 것 뿐만 아니라 총을 수리하고 제작하기 위한 도구와 재료까지 가방 안에 뒤섞여 있는 카오스 상태의 수납. 본인만의 규칙이 있어 필요한 물건을 잘도 찾는다.

성격

표현이 다채로운 편. 잘 울지는 않지만, 웃기는 잘 웃고 슬퍼하기도 함. 대체로 화가 날 일이 많아서 그렇지, 사람을 극도로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신념이 강하고, 부조리와 불의에 강하게 반발한다. 예민한 성정 때문에 어딜 가도 문제를 몰고 다니지만, 본인은 가급적 큰 문제는 일으키고 싶지 않아한다(하지만 세상에 불의한 일이 너무 많아서 문제).

생각보다 상식적이고, 강단있고, 단단하고 이성적인 사람.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여 그들이 공동선을 이루기를 바란다. 사람을 사랑하는 만큼 믿고, 믿는 만큼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안다. 불의가 만연한 가장 밑바닥에서 살았기 때문에 온갖 더러운 꼴을 봐서 순진하게 이상론을 늘어놓는 부류는 아니다.

인류 자체를 믿는 게 아니라 생명이 가지는 가능성을 믿는다. 살아있는 한 생명은 변화하고, 언제든 변화는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향할 수 있기 때문에, 변화의 흐름을 잡고 이끌어나가는 것이 선두에 선 자들의 의무라고 여긴다.

타고난 혁명가이자 영웅. 그러나 선구자로 불리는 만큼 주위로부터 견제를 당하는 일이 많고, 모함이나 누명을 쓰기도 해 지도자로는 지목되지 못할 운명. 젊은 여성인데다 이슈가르드 내에서도 극히 적은 아우라족인만큼 본인도 타인의 따름을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도 동행하지 않더라도 옳은 길을 걷겠다는 각오로 산다.

직업

기공사.

이슈가르드에서 탈출하기 전부터 스테파니비앙의 기공방과 인연이 있었다. 제대로 출시 되기 전의 시제품 역시 조이를 통해 사용해본 경험이 있다. 그러나 탈출 도중 총기가 망가져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다시 하늘강철 기공방에 닿기 전까지는 계속 활을 썼다. 눈이 상당히 좋고, 팔 힘이 세다.

이슈가르드에 재입성한 뒤로 총기를 직접 수리하기 위해 대장일을 배웠다. 덕분에 필요한 기계나 부품, 장비와 갑주 등은 직접 만들어서 사용한다. 돈을 버는 족족 재료비와 도구, 수리비 등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거의 항상 빈털터리 신세.

그 외 기타

골빈 귀족을 극도로 싫어하고, 언젠가 이슈가르드의 썩어 빠진 귀족정과 정교회를 갈아엎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나서서 왕정제를 갈아엎자고 깽판치진 않겠지만, 언제든 도움을 원한다면 달려갈 준비를 하면서 살아간다.

세상을 갈아엎을 힘에는 완력 뿐만 아니라 지식도 필요하다. 모험가로 일하는 동안 꾸준히 온갖 소문에 귀를 기울이며 세계 정세를 파악하거나, 정보를 사모으는 일에 집중했다. 산크레드에게 기술을 다수 배우기도 했고,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새벽의 일원에게 틈틈히 글을 배우기도 했다.

손이 굉장히 빠르다. 도박에도 능한데, 상대에 따라 속임수를 쓰는 경우도 많다. 한마디로 타짜. 돈 많은 작자들의 주머니를 털어 열심히 시장 경제에 보태고 있다.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 아무거나 잘 먹는다. 마찬가지로 아무데서나 잘 잔다. 어디든 머리를 대기만 하면 골아떨어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완전히 안심한 곳이 아니면 늘 얕은 잠만 자기 때문에 쉽게 깬다.

히스토리

0. 신생 이전

오래전 조부모가 이슈가르드로 이주해온 이민 3세대. 이주 초창기에 이단자로 오해받아 박해받은 탓에 제대로 자리잡지 못해 빈민굴에서 거주했다. 다시 다른 곳을 찾아 떠나기엔 체력도 돈도 없어 기회를 얻으려 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5년 전, 재해로 인해 갑자기 추위가 닥치자 빈민굴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몇 없던 가족과 친지들은 하나씩 얼어죽었고, 주변에는 얼어죽거나 굶어죽은 시체가 길바닥에 있을 만큼 죽음이 흔했다.

간신히 방을 얻어 구름안개 거리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지내던 중, 한 살 터울의 동생이 귀족에게 도둑으로 오해받아 잡혀가고 말았다. 이에 억울함을 호소해보기도 하고, 항의도 해보았지만 잡혀간 동생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찬 지하 골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악에 받친 에르케가 동생을 고발한 귀족을 찾아간 날, 도둑맞은 줄 알았던 물건을 멀쩡히 가지고 나온 귀족을 보고 분노하여 돌을 던졌다.

그렇게 가족 하나 없이 홀로 남은 에르케 역시 귀족을 해치려 한 죄로 고발당하고, 결투재판에 끌려가게 되었다. 차가운 감옥에 갇힌 에르케를 구출한 것은 몰래 교류를 이어나가던 스테파니비앙이 보낸 사람이었다. 스테파니비앙의 저택에서 일하던 노인은 에르케를 몰래 감옥에서 빼돌려 커르다스 산맥으로 탈출시켰다.

얇은 옷에 노인이 들려준 가죽 외투만 걸치고 산맥을 넘은 에르케는 얼어죽기 직전에 행상인에게 발견되어 그리다니아로 향하게 되었다.

산맥을 넘으며 유일한 무기인 총이 망가졌기에 다른 무기가 필요해 궁술사 길드에 들었다. 원래 이름인 에르케 대신 가명으로 리베라 레방셰를 썼다. 새로운 이름으로 정체와 고향을 숨긴 채 초보 모험가 행세를 했다. 이슈가르드에 살 적에도 종종 스테파니비앙을 도와 총기 조율에 조언을 했던만큼 무기를 다루는 기본 기술이 좋아 금방 실력이 늘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1. 신생의 에오르제아

활 하나로 그리다니아와 울다하, 림사까지 이르렀다. 초월하는 힘을 자각하며 새벽이 가진 방향성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동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을 도와 야만신을 물리치고, 던전을 파훼하며 차츰 명성을 쌓던 그 때쯤. 모래의 집이 공격당하고 엔터프라이즈 호의 행방을 쫓다가 지긋지긋한 이슈가르드와 다시 엮이게 되었다.

프란셀. 그 귀족 도련님. 이단으로 몰려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는 도련님을 돕기 위해 사람들이 나서는 것을 보며 에르케는 속으로 빈정거렸다. 역시 귀족 나리께서 누명을 쓰시니 모두가 나서서 도와주는 군? 빈민이 이단으로 몰렸다간 그대로 뒈져버리는데. 그러나 프란셀 드 아유나르트는 에르케의 은인인 스테파니비앙의 동생이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간 겪어온 일로 인해 느끼는 양가감정으로 영 마뜩잖은 상황에서 귀족의 사생아인 오르슈팡 그레이스톤까지 만났다.

처음 보는 얼굴임에도 에르케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포르탕 가의 사생아. 이미 인상은 좋지 않았다. 귀족의 사생아면서 가문에 충성이라니? 떨어지는 먹이에 감사히 고개 숙이는 개새끼나 다름없지 않나. 하지만 오르슈팡 개인이 가진 선의를 곡해할 순 없어 불편해 한다.

프란셀의 누명을 벗겨내고 곳곳에 산재한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며 가루다를 물리쳤다. 카스트룸 메리디아눔의 전투 이후 가이우스와 조우했을 때에는 에르케의 분노는 고점을 찍고 있었다(미친놈들의 개소리에 반박할 거리를 하나씩 순서를 매기느라 머리가 정말 바빴다). 그러나 가이우스에게 쏟아내려던 분노는 아씨엔을 조우하며 차갑게 가라앉았다.

문제는 끊이질 않고, 샬레이안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 찾아왔던 문브뤼다를 잃은 이후에는 에르케도 무겁게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이상을 지키기에는 힘이 부족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와중에 새벽의 일행은 이슈가르드의 일에도 손을 뻗기에 이르고,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다 못해 크리스탈 브레이브라는 조직까지 만들자 에르케는 불안감을 느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조직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과정이 불안정하지 않은가? 또 그 주체가 아직 열일곱짜리 어린 소년이란 점이 제일 걸렸다. 어쩌면 배신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 아니었을까?

에르케는 자신에게 미래를 맡기고 하나씩 낙오된 새벽을 등지고 알피노와 함께 도망쳤다. 누명을 쓰는 건 익숙한 일이니 딱히 화는 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의 방식이 에르케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기에 느끼는 참담함이었다. 에르케 역시 고향땅의 개혁을 바라는 과격파였기에 검을 드는 이유를 이해했다. 그래, 모든 무력 운동에는 돈이 필요하다. 울다하의 왕정제는 에르케도 그다지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나모 울 나모와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한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아는 것이 충분하지 않아 대안을 말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도망쳐 나온 에르케는 알피노와 함께 오르슈팡이 있는 용머리 전진기지로 향했다.

2. 창천의 이슈가르드

이슈가르드에서 도망쳐 그리다니아로 숨었는데, 이제는 울다하에서 쫓겨나 이슈가르드로 다시 도망자 신세로 돌아가다니.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르슈팡에 대한 개인의 호오는 접어두고, 에르케는 완전히 기가 꺾인 알피노를 살폈다. 그리고 포르탕 가의 힘으로 이슈가르드로 입성하게 되자 영 애매한 얼굴로 에르케는 관문을 넘었다.

처음 나올 때에는 돌아갈 때에 그들 앞에 떡하고 보여주려 지었던 가명이었다. 리베라 레방셰, 자유(libera)로부터의 복수(ravanche)다. 그들이 억압한 것들, 무시하고 짓밟은 것들이 되돌아와 겨눌 칼날의 상징. 이슈가르드의 입국 서류에 찍히길 바라며 직접 엘레젠식으로 지은 이름이었다.

지긋지긋한 이슈가르드. 지긋지긋한 추위. 여전히 구름안개 거리의 밑바닥에는 얼어죽은 시체가 있다. 에르케는 이제 그 시절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아왔으나 전혀 기쁘지 않았다.

눈발 날리는 날씨에도 물이 흐르고 관목이 다듬어진 이슈가르드 상층? 역겹다. 아래에는 파먹을 흙도 없어 굶어죽는 이가 나오는데, 두꺼운 털옷을 두른 귀족들은 유행이라며 목덜미를 드러낼 때 속이 꼬였다. 이슈가르드에서 완전히 죽은 사람으로 기록될 각오로 뛰쳐나온 지도 3년이 지났는데, 에르케는 여전히 이슈가르드에 영혼이 얽매여 있었다.

화려한 장식이 붙은 난로. 훈훈하고 따뜻한 실내 온도. 부드럽고 커다란 카펫과 병에 꽂힌 꽃. 그래, 꽃. 에르케는 고요한 눈으로 포르탕 가의 내부를 하나씩 눈에 담았다. 그들의 부가 무엇을 위해 유지되고 있으며, 어떤 것을 대가로 얻는지 알아내고자 하는 눈이 곳곳을 훑었고, 이내 집사가 헛기침으로 눈치를 주었다.

에르케는 에마넬랭이 싫었고, 아르투아렐은 더 싫었다. 차라리 오르슈팡이 천만 배는 낫다고 생각했을 무렵, 교황의 초대를 받았다. 정말이지, 새로운 이름으로 돌아왔더니 누구도 에르케를 알지 못하는지 갑자기 붙들려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는 일조차 없었다.

결국은 모든 게 전쟁이 문제였다. 천 년이나 이어진 전쟁. 그것도 파헤쳐보면 인간의 배신으로 인한 촌극이다. 이 무렵, 에르케는 거의 매일같이 화가 나 있었고, 매일 같이 잠들지 못했다. 유일하게 쉴 수 있는 곳은 그나마 용머리 전진기지의 눈의 집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에르케는 오르슈팡과 점차 친밀해졌다. 그는 사생아에, 귀족의 은혜를 받아 살지만, 따지자면 온건파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내부에서부터 점진적 변화의 발판으로서 자리하는 그를 보며, 에르케는 급진적이던 입장 차이를 조금씩 좁혀갔다. 대화를 나눌수록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최전방에 머무는 그를 알아주는 이도 같은 최전방에 서는 자들이다.

나나모 여왕이 깨어났단 소식이 들리기 무섭게 성도는 전쟁으로 돌입했다. 에르케는 모험가로서 참전을 부탁받았고, 적어도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는 확고했다. 비록 그 시작이 이슈가르드 조상의 멍청한 배신이었다고 해도. 전쟁은 대를 이어 비극을 낳았고, 에르케 역시 비극의 한 축이 되었다. 죽이고 도륙하면서도 에르케는 사라지는 생명에 안타까워 탄식했다.

그러던 중 돌연 반군 조직의 정보가 들어왔다. 에르케는 남몰래 피가 차게 식었다. 동지들이 들킨 것인가? 이슈가르드를 떠나기 전에도 에르케에게는 혁명을 위한 동지가 있었다. 누군가의 밀고가 그들을 위험하게 한 것이라면, 차라리 들키기 전에 먼저 처리하리란 생각으로 나섰다. 에르케가 반군 조직을 잡아줄 거라 오해하거나 말거나. 어차피 뒤엎어지면 모르게 될 일 아닌가.

젠장, 아이메리크! 에르케는 애써 모른 척 하려 했으나 일이 이상하게 꼬였다. 아이메리크가 잡혀가고, 창천 기사단이 움직였다. 하는 수 없이 힐다를 찾아가야 했다. 오랜만이야, 영웅 동지. 3년 만에 보는 그를 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는데. 오직 힐다만이 에르케를 기억했다. 길쭉귀는 귀족의 핏줄이었으나, 에르케와 같은 길을 걷는 동지였고 동시에 스테파니비앙의 은혜를 입었다. 등에 매인 차가운 철. 에르케는 별 수 없이 새벽과 루키아, 힐다 사이의 다리가 되어 주었다.

계단을 오르며 교황을 쫓는 동안 에르케는 분노를 쌓았다. 빌어처먹을 교황, 빌어먹을 정교회! 구원조차 사람을 골라가며 하는 썩어빠진 교단! 봐라, 눈발이 휘날리는 날씨에도 꽃이 한가득 핀 내원을 가진 교황청을. 이런 쓸데없는 자동인형이나 만들 돈으로 빈민들에게 구휼이라도 베풀었다면 적어도 지난 몇 개월간 죽는 사람이 배는 줄었을 것이다.

전쟁? 전쟁에는 사람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다. 그들은 돈을 들여 병사를 일회용으로 만들어 용에게 갖다 꼴아박으며 싸우는 것이다. 멍청하게도 아이를 낳아 복수를 위해서라며 교황청에 갖다 바치는 사람들은 어떻고!

교황! 에르케는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가족의 원수, 이 나라의 원수, 자유의 원수. 빌어먹을 전쟁만 그만 뒀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늘었을지, 세보기나 했을까? 그가 아이메리크의 아버지인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가 보는 앞에서 목을 따버리겠다고 소리치지 않은 것만해도 이미 인내심은 다했다.

달려나가는 순간 옆으로 쏘아진 창에 오르슈팡이 먼저 나섰다. 그 뒤로는 손쓸 틈 없이 상황이 급변했다. 결국 교황은 놓쳤고, 오르슈팡은 피범벅이 되어 쓰러졌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데, 화가 나서 미간이 구겨졌다. 웃어주고 싶어도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렇게, 제대로 웃어주지 못한 것은 에르케에게 평생의 후회로 남았다.

잃고서야 깨닫는 것이 있다. 에르케는 그를 사랑하고 말았다.

무슨 정신으로 방아쇠를 당겼는 지도 몰랐을 것이다. 에르케는 마대륙을 휘젓고, 이젤이 추락하고, 끝내 교황을 죽이는 동안에도 반쯤 넋이 빠져 있었다. 분노와 복수심은 하얗게 탈색되어 재처럼 흩날렸다. 용시전쟁이 끝났다. 교황이 사라지니 아이메리크가 총장에 올랐다. 이것은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었다.

맙소사. 화합. 좋다. 아이메리크는 제법 괜찮은 통치자였다. 귀족과 평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조율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성도를 돌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에르케에게 비극이다. 선하고 유능한 통치자는 혁명의 가장 큰 적이다. 그가 뛰어난 덕에 귀족을 모조리 끌어내리기는 불가능해졌다. 이미 동지였던 이들 중에서도 이탈하는 자가 수두룩했다.

이정도면 난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해. 그런 대답과 함께 혁명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는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슈가르드는 변하지 않았다. 에르케는 다시 한 번 그들을 일으켜보고 싶었으나, 용시전쟁을 끝낸 영웅이란 타이틀은 도리어 독이 되었다. 그를 누군가 밀고했고, 아이메리크 앞으로 에르케가 잡혀왔다.

말이 잡혀왔다지, 그냥 모셔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누구도 영웅을 붙잡아 둘 수 있으리라 여기지 않았다. 아이메리크는 에르케를 나무라지 않았다. 책망하지도 않았고, 화 한 번 내지 않고, 나직하게 같은 길을 걸을 수는 없느냐고 물었다. 그의 온건함은 오르슈팡을 닮았다. 입을 꽉 다문 에르케가 몸 성히 돌려보내지자, 남은 동지들은 더 많이 이탈했다. 야속하게도 아이메리크는 반정부 혁명 조직을 효과적으로 와해시키는 법을 아는 이였다.

그를 이해한다. 이제는 온건한 변화도 에르케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좋아하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에르케는 아이메리크가 좋은 정치가가 될수록 그를 증오하게 되리란 예감이 들었다.

이것은 실망과 절망이다. 혁명의 의지가 사라진 이슈가르드를 더는 고향이라 부르고 싶지 않았다. 유일했던 사랑을 앗아가기만 하던, 척박하고 차가운 땅. 지긋지긋한 이슈가르드. 지긋지긋한 추위.

에르케는 이제 가명을 버렸다. 리베라는 사라진 혁명 의지와 함께 죽었다. 아이메리크가 에르케의 과거 고발 내역을 지워주었지만 고맙진 않았다. 이젠 결투재판을 벌이더라도 질 것 같지 않았으니까. 누가 전쟁을 끝낸 영웅과 결투하고 싶어하겠냐마는.

돌아온 새벽 일행과 함께 기라바니아로 향하기로 했다. 그리고, 바일사르 장성에서 다시 소중했던 인연을 잃고 에르케는 완전히 탈진한 영혼으로 성벽을 넘었다.

3. 홍련의 해방자

동방으로 넘어간 에르케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요청하는 대로 싸우면서도 제국군을 향한 분노는 일정하여 영웅은 계속 승리를 가져왔다. 답답한 마음에 잠들지도 못하고 대부분 뜬 눈으로 날을 지새던 에르케가 아짐 대초원에 도달하였을 때에는 한계에 이르렀다.

아우라족의 고향은 영혼을 치유했다. 에르케는 드넓은 초원을 보며 핏줄에 새겨진 본능을 떠올렸다. 자유! 자유로운 하늘과 땅 아래 너른 들을 내달리고 싶다는 충동에 그렇게 했다. 이름 없는 모험가가 되어 내리 몇 날 며칠을 내달리다 돌아와서는 푹 골아떨어졌다가, 다시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에르케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향한 미련을 전부 초원 위에 흩뿌렸다.

전쟁과 전투, 해방. 일련의 사건은 어떤 이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겠지만, 사실 에르케에게 그다지 바람직한 결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기껏 독립하더니 결론이 이전 시대의 지배계층 핏줄에게 지도자 자리를 준다고. 남의 나라이니 말은 얹지 않았으나, 에르케는 그저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이슈가르드와 닮은 방식으로 과거를 답습하는 나라를 보며 두통이 도졌다.

이게 다 갈레말 때문이다. 그 개자식들이 되도 않는 침략 전쟁을 하지만 않았어도 세계가 이 지랄은 안 났을 것이다. 게다가 침략당한 나라의 국민이면서 앞장서서 동포를 팔아먹는 매국노들을 제대로 처벌하지도 않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행태에 에르케는 학을 떼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전쟁이다. 세상은 요지경이라더니, 정말 다채롭게 지랄맞다. 에르케는 제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며 하나씩 쓰러지는 새벽의 일원을 보았다. 누군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4. 칠흑의 반역자

에르케는 처음부터 수정공의 정체를 짐작했다. 예민한 성정인 만큼 한 번 보았던 사람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비밀을 요하는 사람에게는 저마다 사정이 있기 마련이기에, 에르케는 암묵적 합의를 통해 그의 정체를 함구했다. 그보다는 크리스타리움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아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곳은 이상향이었다. 멸망을 앞둔 세계의 끝자락에 세워진 도시는 에르케가 그토록 이루고 싶었던 꿈의 도시였다. 시민의 합의로 돌아가는 도시, 평등한 관계, 우호적이고 시민의 공동 결정에 강짜를 부리지 않는 지도자. 에르케에게 크리스타리움은 희망 그 자체였다. 그것은 에르케가 꿈꾸던 이상향에 닿을 수 있다는 증거였고, 실제로 평등한 도시를 만들 수 있다는 증명이었다.

반대 급부로 율모어는 최악의 도시였지만.

에르케는 밤을 되찾을 때마다 술렁이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앞만 보고 달려와 영웅이 되긴 했지만, 정말로 그는 무엇을 위해 걷는가? 별이 빛나는 하늘은 에르케에게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제1세계는 멸망을 앞두고서도 에르케에게 희망으로 기억되었다. 인류에게 아직 가능성이 있음을 천명하는.

하루라도 빨리 원초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에르케는 무리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돌아가거든 이러한 곳을 더 많이 만들 것이다. 자신이 주체가 되지 않더라도,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를 모을 수는 있을 것이다. 세계 곳곳에 사람이 흩어져있다. 산재한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그들도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손을 잡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수정공을 향해 경의와 존경을 표한다. 에르케는 굴그 화산에서도 배신당했다 여기지 않았다. 사람을 향한 믿음은 그리 얄팍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에메트셀크. 그 밉고도 안쓰러운 것.

아모로트를 처음 본 에르케의 감상은 이랬다: 너무 오래 살더니 돌아버린 거 아니야?

개념적 이상향에 가까운 도시다. 그러나 에르케가 보기에 이 환영 도시는 미련 덩어리였고,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 채 과거에 주저앉은 흔적이었다. 이런 세상을 한 번 만들었다면 다시 새롭게 일으켜 세워야지, 뭘 과거로 돌아가겠다고 나자빠져있나. 그가 견뎌야 했을 세월을 에르케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환영 도시가 썩 좋은 결말을 가져다 주진 않으리라 확신했다.

아. 그리고 엘리디부스. 그가 보여준 환영을 기억한다. 잃어버린 자들과 함께하는 이들을 보여주는 가운데 그가 있었다. 기억과 변함 없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오르슈팡. 그래, 벌써 내 나이가 당신과 같아졌구나. 이제는 영영 나이를 먹지 않아 그와의 차이는 점점 벌어질 것이다. 슬픔은 잠깐이고, 분노는 차갑게 피어올랐다.

에르케는 환영을 향해 총을 쏘았다. 내 사랑을 모욕하지 마. 많은 이들이 죽은 자를 되살리기 위해 애를 쓰지. 에르케는 단 한 번도 그를 살리려 한 적이 없다. 그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도 관심이 없다. 그런 방법을 찾아본 적도 없다. 그를 뒤에 두어야만 에르케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아씨엔은 완전히 흩어졌다. 빛이 되어 크리스탈 타워에 갇힌 엘리디부스와 완전히 굳어버린 수정공을 두고, 에르케는 기억을 담은 소울사이펀과 함께 원초세계로 귀환했다.

5. 효월의 종언

세상이 혼란스럽다. 그 와중에 첫발을 디딘 올드 샬레이안의 인상은…미친 나라. 이상적 시스템을 가지고서도 이렇게 될 수 있나. 에르케는 꽉 막힌 올드 샬레이안을 보며 자신이 세웠던 계획의 보완점을 기록했다. 나쁜 사례로는 적어둘 만 하다.

종말의 공포는 빠르게 퍼졌다. 떨어지는 유성, 불타는 하늘, 괴물이 되어 사라지는 사람들. 도처가 비탄에 빠져있다. 에르케는 답을 찾기 위해 엘피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고대인들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람의 가능성이라. 베네스와 의견이 같았다. 가능성을 믿고 나아간다면 종말에도 맞설 수 있을 것이다.

대이동을 앞두고 계획을 변경하였다. 하이델린과 소통하기 위해 아이티온 별현미경으로 내려간 에르케는, 그곳에서 그리운 혼을 마주했다. 되살린 적 없이 그곳에서 서서히 녹아가던 영혼. 그의 영혼을 눈에 담은 에르케는 슬픔 한 점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에르케는 결코 뒤돌아 보지 않는다. 죽어서도 아낌없이 응원을 보낸다면 호응해야지.

영웅은 증명해냈다. 그들은 우주의 끝으로 향한다.

에르케는 파란새를 아꼈다. 작고 순진한 영혼은 에르케의 시선을 뺏었다. 검은새에게도 화는 나지 않았다. 순전한 절망 앞에 슬픔의 탄식을 흘렸을 뿐이다.

검은새의 질문에 새벽이 하나씩 대답을 하며 사라졌다. 앞으로 나아간 끝에, 새는 홀로 남은 에르케에게 물었다. 왜 계속 걷는 거야? 이 앞엔 어떤 길도 없어. 내일은 존재하지 않고, 의미도 없어. 왜 온건한 죽음을 거부하는 거야? 에르케는 대답했다.

“그래도 살아야 해. 살아야 자신의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고민할 수 있으니까.”

“내일이 없다면, 더는 미래가 없다면?”

“그래도 오늘을 살아야지. 마지막까지 살아야지.”

에르케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어깨에 걸린 수많은 삶의 무게는 무릎 꿇리지 못하고, 등에 매달린 업과 절망조차 그를 끌어내리지 못할 것이다.

“태어났으니 내겐 살아가야할 의무가 있어.”

지금까지 몇 번이고 그를 일으켜세운 사랑이 멀리서 이정표처럼 빛난다. 영혼의 빛은 별의 수명과 함께, 짧은 인간의 삶에서 영원불멸하게 빛날 것이다. 머나먼 영원 끝의 결말에 홀로 살아남았다 해도, 사실 답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에르케는 홀로 남아서도 숨을 거두기 전까지 힘을 다해 살아갈 테니까.

-. 종언 이후

올드 샬레이안으로 돌아온 에르케는 다시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 새벽은 해산해도 에르케는 여전히 새벽과 연락을 이어갔다. 소중한 동료들을 두고 훌쩍 사라질 일은 없다. 그리고 언제든 그의 힘을 필요로 하는 이가 있다면 달려가 도울 것이다.

2024.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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