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창작 단편

#선착순으로_멘션_온_3개로_짧은_글쓰기(2016.03.12)

멘션

1. 꽃

2. 화려한 날개(깃털을 잡았더니 파사삭 사라지는 느낌)

3. 속눈썹(미소녀가 눈 감을 때 반짝거리는 속눈썹)


기차가 흔들린다. 규칙적인 소리를 멍하니 들으며 창에 머리를 박았다. 기차의 흔들림과 소리가 머리를 통해 더욱 생생히 전해져왔다. 창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은 어느새 무채색의 건물들에서 색색의 자연 풍경으로 바뀌어있었다. 낯선 듯 그립고, 먼 듯 친근한 창 밖 풍경. 느리게 두 눈을 껌벅이며 조심스레 하늘과 산과 강을 눈에 담았다.
고향에 가는 게 얼마만이지. 나는 속으로 햇수를 헤아려보았다. 초등학생 때는 방학 때마다 가다가 중학교부터는 안갔으니까 8년만인가.

"오랜만이네."

그리 중얼거리자 입에서 뿜어나온 입김에 차창이 하얗게 변했다. 소매로 대충 닦아내니 온 시야가 노란색 일색으로 가득 채워졌다. 유채꽃이다. 봄을 만끽하러 뒷산에 수두룩하게 모여 바람에 따라 이리 저리 한가로이 흔들리고 있다. 하늘을 향해 뻗어나온 초록빛 줄기 끝에 물감을 찍은 듯 콕 박힌 샛노랑 꽃 하나.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점묘화를 그려내었다. 순간 초등학생인 내가 누군가와 함께 그 한 가운데에 서있는 모습이 보인 듯 했다. 더 자세히 보려 허리를 폈지만 얄궂게도 다른 산에 가려져 사라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곧 역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울렸다. 내릴 시간이다.


오랜만이건만 어쩐지 시골은 내 추억 속 그대로인 듯했다. 8년이란 시간 동안 바뀌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역에서 내리면 있었던 큰 플라타너스 나무도 사라졌고, 파란색 플라스틱 지붕의 작은 마을 회관은 2층짜리 벽돌 건물이 되어있었다. 그래도 느긋한 분위기라든가 포근한 냄새라든가 자그맣게 들려오는 새소리 등 시각적인 부분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내 추억에서 뛰쳐나온 것 마냥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고향 맞네. 새삼스레 중얼거렸다.

마을 회관을 지나 구멍가게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할머니댁이다. 나는 역 앞에 가만히 서서 할머니댁이 있을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오느라 힘들었지?」라며 눈 주름을 곱게 접으며 웃으실 할머니가 떠올랐다. 잠시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할머니에게 들리지도 않을 인사를 남기고 나는 마을회관 왼쪽길로 들어섰다. 기차에서 떠오른 추억 하나가 아무리 해도 지워지지가 않았다. 이대로 계속가면 뒷산이다. 걸을 때마다 매고 온 가방이 내 다리를 두드렸다.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초등학생 시절 뺀질나게 들락 날락했던 게 무색하게 얼마나 걸었다고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체력이 많이 약해지긴 했나보네. 하기사 어린 애 체력이랑 성인 체력이랑 같겠어? 잠시 숨을 고르려 멈춘 날 재촉하려는 듯 소녀가 눈 앞에서 계속 어른거린다.

"안그래도 가고 있어..!"

손으로 나무를 짚고 게속 걸어갔다. 금방이라도 유채꽃 향기가 코 끝을 건드릴 것만 같은데 향기는 커녕 그냥 노란 꽃 한 송이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가 이렇게 깊숙한 데에 있었던가. 기차에서 본 풍경과 어릴 적 기억을 차츰차츰 더듬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란 생각이 자꾸만 치솟았다. 하지만 아까 언뜻 본 과거의 나와 누군가가 자꾸 유채꽃밭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쓸데없는 짓인 것은 안다. 가봤자 아무도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가야만 한다는 이유모를 의무감이 내 다리를 움직이게 했다. 바보같이.

낡아빠진 표지판 하나가 앞으로 정상까지 300m 남았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내 목적지는 정상이 아니지만. 나는 허리 언저리 높이에 매달린 유채꽃처럼 노란 리본을 매만졌다. 이게 아직도 있을 줄이야. 고개를 들고 표지판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기껏해야 동네사람들만 다니는 길이라 풀에 덮여 티는 나지 않아서 그렇지 확실히 길이 있었다. 이제서야 유채꽃 향기가 살짝 맡아졌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네. 나는 표지판을 제치고 나아갔다.

뒷산의 그 유채꽃밭은 동네사람들만 아는 비밀의 장소다. 거기에 신이 있다나 뭐라나.그런 연유로 원래도 사람들이 오지 않는 시골마을이지만 사람의 손이 조금이나마 덜 타게끔 동네사람들이 암묵적인 룰처럼 외지인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이 동네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을 따라 타지에서 자란 나에게마저도. 그래도 어디에나 예외가 있듯, 그 룰을 당당히 깨부셔버린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알려주면 뭐 어때서?"

허리에 손을 얹고 당당히 웃으며 소녀는 그리 말했다. 웃는 얼굴도 행동도 다 기억이 나는데 목소리만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땠더라. 명량하고 쾌활한 느낌이었다는 것만 알겠다. 어찌됐든 소녀는 내 손을 잡아끌며 그 샛노란 세상으로 날 데려갔다. 여기가 자기 놀이터라면서, 이제부터 여기서 만나서 같이 놀자면서. 혹여나 내가 못찾아올까 표시도 해두었더랬다. 그래, 아까 그 리본말이다.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를 열어젖히자 그제서야 노랑과 초록으로 치장한 유채꽃 무리가 날 반겨주었다. 그리고─

"안녕."

─그 소녀 또한.

잠시 온 몸이 멈췄다. 모든 신경이 잠시 아웃된 그 순간에 눈만은 올곧게 소녀에게 향해있었다. 유채꽃밭 한 가운데에 소녀가 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유채꽃밭 위에 소녀가 떠있었다. 새하얀 바탕에 색색으로 빛나는 화려한 날개를 뽐내면서.

"...오랜만이야."

입 밖으로 툭 나온 말에 소녀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곧이어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날개를 한 번 힘차게 펄럭여 내 눈 앞으로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길고 반짝거리는 속눈썹이 나비 날개마냥 하늘하늘거렸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늙었네!"

"오랜만에 만난 사람한테 말이 너무 심하지않아?"

"아하하.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미간 찌푸리면 더 빨리 늙어! 소녀가 내 미간을 꾹꾹 누르며 덧붙였다. 팔팔한 20대한테 늙었다니. 울컥 화가 났지만 소녀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소녀는 중학생, 기껏해야 고등학생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설마 너는...

"멍청한 표정."

"악!"

내 이마에 딱밤을 먹이고서 소녀는 그리 즐거운지 푸흐흐 웃음을 흘리며 멀어져갔다. 손은 매워가지고는...

"그런 표정 지어봤자 하나도 좋을 거 없다구? 웃어봐! 하나, 둘, 셋, 김치!"

"사진 찍냐."

"너 사진 찍는 거 좋아하잖아."

소녀는 양손 엄지와 검지로 사각형을 만들더니 한 쪽 눈을 감고 사진찍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찍는 것은 필시 나. 저 손가락 카메라에는 가방끈을 세게 움켜쥔 채 굳어있는 내가 찍히겠지. 꼴볼견이네. 눈을 감았다.

"괜찮아."

"응?"

눈을 뜨자 소녀는 나를 향해 양 손과 날개를 활짝 뻗었다. 바람이 불어와 유채꽃 무리를 흔들어 향기를 퍼트리고, 태양빛에 소녀의 날개가 무지개색으로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멍하게 서있으려니 내가 발을 딛고 서있는 이곳이 꼭 별세계같았다. 소녀는 몇번 그 긴속눈썹을 지닌 눈을 깜박거리고는 이내 기고만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분명 잘 될 테니까!"

손으로 브이표시를 하더니 소녀는 날갯짓을 하며 멀리 날아가버렸다. 아니, 사라졌다고 하는 게 더 맞으려나.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힘찬 날갯짓이 참 소녀답다 싶었다. 소녀가 가버린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 발짝 뻗었다. 공중에서 투명한 깃털 하나가 곡선을 그리며 내려왔다. 살며시 잡자 파사삭 깨지며 사라졌다.

"...뭐야?"

대답 대신 바람이 유채꽃과 나무를 흐트려뜨리는 소리만 들렸다. 흡사 파도 소리같았다. 대체 방금 그건 뭐였을까? 환상? 현실? 전자면 내가 미친 것이 틀림없다. 스트레스가 너무 쌓인 끝에 돌아버린 것이 틀림이 없어.

하지만 만약에 현실이라면...

"하핫.."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나왔다. 진짜 미쳤나. 깃털을 잡았던 손으로 괜히 마른 세수를 했다. 황당무계한 일에 진짜 영문을 하나도 모르겠고 어지러운데도 기분이 썩 괜찮았다.
가방을 열고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왠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듯한 묵직하고 둑탁한 감촉에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린다. 왼손으로 안정적이게 받쳐들고 카메라에 눈을 갖다대었다. 유채꽃의 노랑과 나무의 갈색과 초록, 그리고 하늘의 파랑까지. 소녀가 손으로 찍은 사진은 이런 사진이였을까. 찰칵. 셔터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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