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교열·윤문의 미학
ⓒNEIN
눌어붙은 빵 조각이 발치에 닿았다. 어둑한 여전했으나 지나다니는 이 하나 없는 곳, 잠을 청하는 이들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골목. 이재헌은 자신이 발 붙이고 선 곳이 돌아갈 곳 없는 세계임을 단번에 이해했다.
“우욱…”
헛구역질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이번에는 누구지, 나일까, 아니면 이려원일까. 제 곁에서 뒤바뀜의 정도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아니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평온한 저 얼굴 거죽 아래 있는 것이 이려원인지 아니면 다른 것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거대한 무언가에 짓눌리는 기분은 운명 아래 오로지 굴복 뿐이던 때 이후에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이재헌은 뒤쫓아오는 과거에 발목 잡히고 있음이 명확했지만.
“부장님, 우리… 계속 걸어요?”
갑작스럽게 멈춘 구두코를 걱정과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이려원이 재헌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맞닿은 시선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법한 청명과 자신을 담았다. 아뇨. 더는…. 아니, 조금 더 걸어야겠습니다. 이재헌이 마치 자신 스스로 최면을 거는 것처럼 제 발등에 투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는 슈레드 치즈를 무감한 눈으로 응시했다. 무엇도 담겨있지 않은 눈, 그러나 살고 싶다는 욕망이 번들거리는 속눈썹 끝. 그러한 것들이 이려원으로 하여금 이재헌을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좀, 붙지 마. 멀리 떨어져 걷는 게 나아요.”
“그런데요, 재헌 씨…. 어제 했던 얘기 말인데요….”
부득불 이재헌의 곁을 떠나지 않고 머무르려는 의지에 감응한 것인지, 아니면 변덕스러운 그녀의 성정이 이 세계를 정확히 관통하는 시간선이 되는 것인지 ‘알던 것’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 세계가 이려원의 의지에게는 유독 제 빗장을 쉽게 풀어주고는 했다. 마치 이려원을 세계가 필요로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해석을 덧붙이고 나니 재헌의 속이 더욱 뒤집혔다. 누군가 창자를 쥐고 비트는 기분이었다. 그 상대가 차라리 려원이었더라면 있는 힘껏 땅을 박차고 도망갈 수 있었을 텐데.
“어, 저기 부장님 옷이다.”
어디요, 재헌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미적지근하고 뭉근한 것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 사이 분명 제 옷자락이 보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념에서 한 발 떨어지니 보이는 것들이 있다. 분명 지나쳤던 깨진 보도블럭 자리, 배를 내보이며 솜을 찾는 인형 같은 것들. 어린이의 사고와 사회가 기묘하게 뒤섞인 풍경은 누군가 짚어 말하지 않아도 이전의 발자취에서 보았던 것들과 같다.
“좀 뛰어볼까요?”
한 손에 쥔 나무톱이 바닥에 끌려 기이한 쇳소리를 냈다. 동시에 제 손목을 붙들고 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려원에게 이끌린 발목이 어긋나 중심을 잃기 직전이었다. 잠깐, 아니, 잠깐? 나아가는 이려원의 뒤로 제 앞에 걷는 이재헌과의 거리를 톱 끄트머리로 가늠하는 려원이 지나쳤다. 신기루인 것인지, 아니면 사라져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것인지 보였던 려원은 흩어지고 새로이 제 하복부에 손을 집어넣는 려원이 지나쳤다.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요.”
이려원의 목소리를 누군가 오염이라도 시킨 것처럼 웅웅거리는 배경음은 필히 날파리의 것이다. 떼어내도 떼어내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 것들. 점차 그 크기를 키워가며 가까이 다가온 려원과 자신의 모습을 두고 이재헌이 발을 옮겼다.
하나, 둘, 셋, 다섯, 열…. 그리고 손발을 동원하여 세기를 거부했을 때, 목덜미 부근까지 바닥에서 솟아오른 이려원이 그들의 보행을 저지했다. 이내 솟아오른 손, 허벅지, 그리고 식사. 이제 더는 ‘이려원’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그것의 손에 붙들린 것은….
“…재헌 씨?”
누군가 뇌를 후벼파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긴 꼬챙이로 제 핏줄을 들쑤시는 것이 견디기 수월하리라 싶었다.
“…나를, 본다고.”
시선이다. ‘그’ 이려원은 자신의 이재헌을 보고 있지 않다. 그것이 조명하는 것의 끝에는 ‘이재헌’이 있다. 웃는 얼굴에는 피로감이 사라지고 대신 손목 이음새가 벌어졌다 닫히는 마네킹.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는 ‘운명’을 부여받은 등장인물을 다시 도맡은 것이라면….
“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세계를 찢고 가로질렀다. 재헌 씨가 집중을 안 하시길래요. 입꼬리 끝이 길쭉하게 모양 잡힌 려원이 이재헌의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죽지만 않으면 되니까. 붙잡힌 손목 끄트머리에 마네킹의 것과 같이 이음새가 생겼다. 너덜한 손목 아래로 흩어지는 혈흔이 이재헌으로 하여금 ‘자신’의 이려원으로 시선을 옮기게 했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