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

나의 마음, 그리고

To by 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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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어릴 때부터 용희섭은 주는 것보단 받는 것이 익숙했다. 그것이 시선이든, 관심이든, 사랑이든. 그것은 용희섭의 부모가 용희섭에게 물려준 유산이었고 재능이었다. 용희섭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대개 부모가 물려주는 것들은 받는 이의 마음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그러므로 용희섭은 타인이 주는 것을 받아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자라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연해져야만 했다. 타인의 시선이, 관심이, 사랑이, 미움이 익숙해지지 않으면 그것에 찔려죽는 일만 남지 않겠나. 그러니 그냥 담담하게 자랐다. 초연하게 자랐다. 말이 없이 자랐다. 어차피 모든 행동은 빛을 잃고, 뜻도 잃고, 멋대로 잘려나가기 마련이니.

많은 마음이, 소리가, 시선이 와닿다가 떨어져 나갔다. 어느 한 소설이나 영화에서 잘려나온 인물처럼 살아가게 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을 것이라고 용희섭은 생각한다. 카메라가 없는 세상에서 연기를 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키 크고 잘 생긴 애. 공부 잘 하고 운동도 잘하는 애. 어쩐지 완벽한 것 같은 애. 손에 닿지 않을 것 같지만 손에 잘 닿는 애는 한번씩 다들 눌러보기 마련이다. 공원에 있는 조각상을 다들 만지고 지나가 닳는 것처럼.

깊은 마음 없는 마음들이 저를 한번씩 만지고 가면, 어린 희섭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처음에는 상대방이 그렇게 깊은 마음이 아니라는 걸 몰라서 절절매었고, 그 다음에는 그 마음이 깊지 않다는 걸 알아서 희섭도 비슷한 수위의 마음을 주기 위해 또 노력해야 했다. 거절하기에는 다른 마음을 거절하기 위한 구실로 쓸 때도 많았고, 알아가다보면 희섭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아이를 사랑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제게 던져지는 모든 것들을 그저 그렇게 받아내며 살았다.

‘다들 그렇게 깊은 마음으로 고백하진 않아. 너는 모든 고백이 다 깊은 마음인 줄 아네.’

‘그래야 하는 거 아냐? 고백은 마지막에 확인하는 거랬어.’

‘아닌 애들도 많아.’

시시껄렁한 대화라면 시시껄렁한 대화였다. 그 나이대 아이들 사이에서는 쉽게 흥미로운 주제가 되곤 하는 것들. 애인이 자주 있고, 또 자주 바뀌는 희섭에게 쉽게 들어닥치는 주제들. 열 아홉, 그 무렵의 희섭은 조금 질려있기도 했다. 대입을 핑계로 받아주던 그 모든 고백을 거절할만큼 지쳐있기도 했다. 그리고 요한은 그런 희섭을 알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본 것 같기도 하고. 주제는 적당히 사그라들었지만 희섭의 머릿속에는 요한이 하는 말이 얕게 남았다. ‘그렇구나. 네게 고백은 마지막에 확인하는 거구나.’ 하는 요한에 대한 정보.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신경쓰지 않았을 말도, 좋아하는 사람이 하면 마음 한 구석에 그렇게 남게 된다.

그래서 희섭에게는 요한에게 확인시켜줄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사람에게는 하지 않았던, 확인받지 않았던 감정을 네게는 확인받고 확인시켜줄 시간이. 그래야만 네게 거절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이 마음이 진짜라고, 진심이라고 네가 믿어줄 것 같았다. 그러나 늘 느린 희섭의 확인보다 네 뒷모습이 빨랐기때문에 희섭은 영영 확인받지 못했다. 달리기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던 희섭은 늘 요한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앞서나가지도 못하고 가만히. 그저 그곳에서 영원히 고여버릴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기만 했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나.”

그래서 나는 네 대답 앞에서 잠깐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원한다면, 언제나라니. 수없이 꺾였던 마음이 한순간에 없던 일이 된 것만 같은 달큰한 말이지 않나. 그 대답을 원하고 갈망할 때는 주어지지 않던 답이 제게 주어졌을 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일순간 알 수 없게 된다. 그래. 너는 늘 이렇게 책임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늘상 책임은 제게 주어지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너를 위해 짊어질 수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기꺼웠던 날이 있었다. 또 다시 이 말도 내가 책임지게되려나, 하는 생각이 반. 말이라도 함께 있어주겠다 하는 말에 안심하게 되는 제 자신이 비참하다는 생각이 반. 그리고 그 사이에 또 멋모르고 고개를 짓쳐올린 기대감이 하나.

우습다. 참으로 우습고 엉망인 마음이다.

그 엉망이 된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하얗게 빛이 바란 네 눈과 마주한다. 금방이라도 ‘그러니까, 나 금방 끝내고 올게. 너는 여기에 있어.’ 라고 할 것 같은 눈이라는 걸. 네가 알까. 금방이라도 뒤돌아서 갈 것만 같다. 언젠가 네가 내게 했던 목소리가 들린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어느 시인의 글귀를 말하며 모르냐며 웃던 너에게 내가 뭐라고 했더라. 그럼 물이 된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 물었던 것 같은데. 나는 여전히 같은 마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잠겨 죽게 한, 물이 된 사람은 그 일생을 어떻게 살아가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네가 욕심이 나서.”

날 봐달라고 할 때에는, 가만히 그 등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잖아. 그러니 나는 네게 감히 묻는다.

“내가 너한테, 그정도의 가치가 있어?”

가치야, 있겠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네게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네게 가벼워서, 저울에 올리지도 않았던 사람. 혹은, 저울에 아무런 무게도 주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고백은 마지막에 확인하는 거라고 하는데, 나는 여전히 확인받지 못해 가벼운 마음으로 바람에 날리기만 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네 자신을 더 나눠주지 마. 생명도 시간도, 하다못해 관심도. 뭐든. 그렇게만 해준다면 나도 네게 나를 줄게. 그 정도의 가치는 없겠지만.”

약간의 웃음기 있는 얼굴로 네가 말했다. 너를 내게 주겠다고. 다른 이들에게 나를 나누지 말아달라고. 내가 그것을 잘 못해 늘 차였다는 걸 알면서도.

저는 다를 것이라 믿는 저 의기양양한, 확신에 찬, 진심이 묻어나는 그 눈을 가만 바라본다. 새카만 제 것과는 대조되는 그 눈을.

나는 그 눈을 바라보면서 아주 잠깐 고민한다. 이번에는 믿어도 되는걸까. 나도 확신해도 괜찮은걸까. 이번에야말로 확인받을 수 있는 마음인걸까.

아니면 그 확인 앞에서 너는 또 다시 도망갈까.

한없이 가볍고, 또 무거운 마음이 거기에 있다.

이미 다 망가진 마음이, 한번 더 갈라지면 그 다음은 없을 것이라 말하는 것 같은 마음이 작게 속삭인다. 마지막이야. 이번엔, 정말로 마지막이야. 마지막이라면 한번쯤, 아니. 한번만 더 믿어볼만 하잖아.

“…내가 있는 조건으로 너를 건다는 건.”

조금 마른 목소리가 달싹이며 말한다. 불안정한, 불안한, 확신.

“이 다음은 없단 소리야, 요한아.”

도망치지마. 나 버리지 마. 빼앗기기 싫으면 네가 나 쥐고 있어. 날 버리면 이 다음엔 내가 도망칠거야. 다시는 너를 기다리지 않을거야. 이 다음엔 없어. 내 마음을 알아? 네가 내 마음을 알았던 그때보다 지금이 더 망가져있어. 지금이 더 침몰해있어. 네가 사랑하던 내 사랑의 빛은 잔뜩 금이가고 기스가 나서 이젠 엉망진창이 되어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네가 좋아하던 반짝임은 이미 잃었을지도 몰라.

너는, 내 빛을 잃은 사랑을 사랑해줄 수 있어?

“그래도 괜찮아?”

나를 위한 확신은, 너를 위한 확인은 어느샌가 나를 위한 확인으로, 또 확언으로. 욕심으로 가득한 목소리가 되고 만다. 이 두 눈을 마주하기 까지 정말이지, 너무 오래 걸렸다.

“…나 이제 널 그냥 사랑해도 괜찮아?”

도망가지 않을거야? 버리지 않을거야? 나는 이제 아무런 걱정 없이, 네가 도망갈 거라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의 쓸모를 네게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있는 그래도 있어도. 너는 나를 떠나지 않을거야?

수 없이 많은 말들이 있지만 많은 말들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 말하지 않은 공백은 네가 채워줄 것이라고 믿는 아주 짧고, 작은 문장. 사실은 네가 채워주지 않아도 괜찮다. 빈 공백은 시간과 행동이 말해줄테니.

“사랑해.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아. 이 얼마나 우스운 고백인가 그간 품어온 시간이 이렇게나 긴데도. 고작 제 차 안에서. 미묘한 그늘이 진 곳에서. 일을 갓 끝내고 나와 피곤하고 졸린 상태로. 부스스한 꼴을 하고. 어떤 멋도, 꽃다발도 없이 초라한 단어들의 나열. 그저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어린 투정만이 가득한 말들. 네가 실망하고 돌아선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헛웃음이 가득한 문장을 내뱉는다.

한없이 초라하고 또 가벼운 고해이자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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