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

To by 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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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아.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네게로 돌아오면. 너는 몇 번이나 나를 뺏기는 거야?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더 너를 뒤로 밀어두는걸까?’

네가 내게 가지고 있는 것은 딱, 그 정도의 애정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니 네 물음에 나는 그저 눈을 느리게 씀벅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모두가 너를 우선하는 것이 당연했던, 빛나는 자의 특권. 되돌아보면 내 눈에는 네가 나보다 훨씬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너는 늘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당연하지 않다 여기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해야할 것이 명확했기 때문에 그 길을 벗어나지 않았던 나와는 달랐다. 너는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고, 바꾸고 싶었던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너는 네 스스로 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끌어서라도 그것을 해냈다.

나는 네게 딱 그 정도의 사람인 것을 알았다. 손에 쥐고 휘두르기 좋은 도구.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고, 얼굴도 제법 반반하고, 선생님들의 지지도 어렵지 않게 끌어낼 수 있으므로. 네가 세운 계획들을 어렵지 않게 따라주는 그런 사람.

“용희섭 무리시키는 건 내가 다하지.”

“늘 그랬지. 나는 그럼 무리인 거 알면서도 하고.”

누구는 네게 그렇게 휘둘리는 게 기분 나쁘지 않느냐 물었을 때, 상관없다 말하던 나는. 어쩌면 그때 깨달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내 마음을 그때, 그렇게. 조금 이르게 깨달았다면. 그 하늘조차 하얗게 질린 공간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곳에서 깨달았다면. 그래서 차근히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면 지금과 다르게 우리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네가 은근히 웃으며 학생회실 문을 나가며, 나를 피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도 없이 했었다.

수많은 이유들이 저마다 줄을 서서 너를 사랑해도 되는지, 안되는지 바쁘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오직 단 하나,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나의 사랑은 언제나 지는 나날이었다.


그래. 나는 너를 몇 번이나 빼앗겼을까. 늘 너만이 나에게서 너를 앗아갔기 때문에 나는 어떤 소리도 하지 못하고 너를 잃어왔음을 너는 알까. 12년 전에도, 3년 전에도, 그리고 몇 개월 전에도. 너는 그렇게 나에게 알려줬다. 너는 내 것이 아님을. 나는 네게 어떤 무게도 되지 못함을.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너의 뒷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너는 내 것이 아님을 배워야했다. 그 어떤 마음은 가지고 있는 것 만으로도 죄라는 사실을 배워야했다. 나는 너를 가져보거나, 곁에 둬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저 욕심내어본 것 조차 죄같아서. 그래서 너를 잃은 거라고. 너를 잃은 이유를 배워야했다. 나는 그렇게 네 텅빈 관에 대고 수도 없이 마침표를 찍었다. 마침내 마음이 마침표들로 새카맣게 칠해져 검게 물들 때까지 몇 번이고.

네가 차라리 정말로 죽은 것이었다면. 그냥 나는 그대로 너를 마음 한 구석에 영원히 묻고 아주 가끔 꺼내보며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냥 어느 날 수명이 다해감을 느끼고 볕 좋은 곳에서 그저 그렇게 사라졌을테다. 아무런 무게도 없이. 그냥 그렇게. 3년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어느 보고 싶은 날에는 텅 비어있다는 걸 알면서도 네 납골당 앞에 서서 별 무게 없는 시시껄렁한 말이나 하다가, 또 누가 어디서 들을까 아무마음 한조각 입밖으로 내어놓지도 못하고 소리없이 무너지면서. 그렇게 살아갔을테다.

그런데 네가 돌아오고 나서는. 그토록 바랐던 네가 다시 돌아오고 나서는 어땠더라. 그저 마냥 좋아할 수도, 울 수도 없는 폭풍같은 감정 속에 던져진 기분이었던가. 차라리 네가 알려진대로 자의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면. 그저 어디 끌려갔다 온 것이 맞았다면 차라리 조금 더 나았을까. 네가 내 것이었다면. 아니, 내 것이 아니었더라도. 나를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줬다면. 나를 그렇게 버리고 가서는 안됐다고 울부짖는 말을 수없이 삼켰던가. 내가 가족을 잃고 얼마나 무너졌는데. 그 때에도 포기한 생을 너를 잃고 또 얼마나 포기했을지, 너는 아느냐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저 그 감정의 몫은 제 몫으로 온전히 다 삼켜내고 나서야.

나는 네가 돌아오고 나서야 네게서 버림받은 것이 맞음을 알았다. 네게 사랑을 속삭이던 나는 사실 네게 의지조차 되지 못하는 친구. 그 이상도 아니었음을.

“내가 너 때문에 망가졌다면 … 그건 내가 선택한거야.”

그 전까지 나는 네가 죽지 않았을거라고. 무슨 일이 있어 돌아오지 못하는 것일 거라고. 네 상실을 부정하는 데에 온 삶을 다 썼으니. 원망이나 상실, 배신감, 버려졌다는 그 지독한 사실 하나를 이해해보려는 마음 하나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 하나가. 겨우 나를 무너지지 않게 버티게 했다. 우스웠다. 나를 무너트리는 것도 버티게 하는 것도 너라니.

너를 미워하지 않으려면, 너를 버리지 않으려면. 나는 그냥 그곳에 서서 생각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너에게 내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무겁지 않고, 언제든 버려도 되는 다른 사람과 다름이 없구나. 나는.

되려 너와 함께 있으면 너를 괴롭게 하는 사람이었겠구나, 나는. 단어로도, 문장으로도 완결되지 못하는 나의 마음에게 윽박지르는 목소리가 있다. 너는 특별하지 않아. 소중하지 않아. 너 역시 보통의 사람이야. 이전과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어.

“널 피해 숨은건 아니야. 알지?”

“… 그렇다고 하자.”

네가 나를 향해 웃어주던 순간이. 따듯하게 체온을 나누던 순간이. 나에게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던 그 모든 순간들이. 사실은 그저 모두에게 공평하게 베풀 수 있는. 네가 가진 다정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나는 네가 살아돌아온 이후 줄곧, 그렇게만 생각해왔다. 네 마음을 알고 있다 속삭이던 그, 내가 사랑하던 목소리는. 그저 써먹기 좋은 이능력자 하나를 위한 웃분들의 목소리와 다르지 않았음을 믿지 않으면 안됐다. ‘혹시 모르지, 이번에는 찾을 수도 있지 않겠나.’ 하며 다시 그 다음으로 내몰던 목소리와 별 다를바가 없다고. 포기하고 싶으면서, 다 지쳐서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으면서. 흩어지는 목숨을 가만히 올려다보면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후로도, 사라지지도 못하고 그냥. 여기에 가만히 서서.


“그래도 밤엔 돌아올 거잖아. … 아니야?”

나는 괜찮아. 그냥 웃었다. 별 것 아닌 관계가, 일방적인 어떤 것이. 얼만큼의 무게를 가질 수 있는지 나는 이제 가늠할 수 있는 힘을 잃었다.

“… 가진 적 없으니 뺏겨본 적도 없지.”

그리고 앞선 적이 없으니, 네가 나를 뒤로 밀어둔 적도 없다. 애초에 너의 뒤가 나의 자리였을텐데, 앞서있지 않은 것을. 아니, 옆에 나란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뒤로 미룬단 말인가. 나는 언제나 네가 필요하면 부르는, 일종의 스페어였을텐데. 그러면서도 너를 생각하던. 별 것 아닌. 제 목숨이 닳아 헤졌든, 말든. 너를 먼저 소원으로 입에 담으면서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다 헤지고, 망가져서 형태조차 남지 않은 나의 마음 위로 네 긴 숨이 쌓인다.

“…섭아. 1시간으로는 너무 부족해. 너랑 계속, 오래도록 살고 싶어. 그러니까 나도 너도, 무리하지 말자. 나랑 같이 쉬어. 진심이야. 다그만두자.”

왜, 너는 나에게 쉬자고 하는 걸까. 네가 할 일들이 많을텐데. 내 손아귀 너머로도 네가 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나는. 시력이 돌아오며 초점이 잡힌 눈과 마주하면 기묘한 기분이 되고 만다. 이것조차 어쩐지, 신의 농간일까. 하는. 헛된 생각같은 것이 들어서 속 언저리가 쓰렸다.

“요한아. 지금은 내가 네 것이 아니라서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만… 조금 더 지나면 너는 나를 택한 걸 후회할지도 몰라.”

나는 후회하는 일이 없다고 했지만, 그것은 나의 감정이므로. 너는 또다시 나를 택하고, 내가 무겁다고 나를 두고 언제고 사라질지 모르니까.

그 체육창고에서 돌아가는 운동장에서도, 그 뒤의 학생회실에서도, 긴 복도에서도, 졸업식에서도, 네가 돌아오지 않는 빈 책상앞에서도, 홀로 남은 침대 위에서도. 나를 피해 사라지는 네게 약한소리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저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네가 그러다 한 번 뒤돌아봐주면 그걸로 족하다는 듯 손이나 흔들어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이 다음은 없다고 네가 말했지만, 너는 그 이후로도 종종 등을 돌렸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떠날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그 순간이 오기 전에 내가 너를 떠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내가 너의 후회가 되어서는 안됐다.

“욕심쟁이처럼 살아도 돼. 그게 네 매력이니까.”

“이대로 나아가는 게, 더 후회할 것 같아서 그래. …내가 널 또다시 외면하기 전에 깨달아서 다행이야. 나 혼자만 노력하지 않아도 돼. 나 말고 다른 이들에게 맡겨도 돼. … 그렇지?”

네 손으로 네가 세운 것들을 허물겠다고 하는 것을 바라보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 하고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네가 말했던 사랑한다는 말의 무게가 그제야 손안에 어른거리며 잡혔던가. 언젠가 네가 나를 위해 했던 말을 네가 너를 위해 말하는 것을 가만 들으며 눈을 내리 감는다. 응, 그럼. 네가 노력하지 않으면. 내가, 혹은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채우더라. 내가 사라져도 누군가가 채울것처럼.

“세상 모두가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네. …다 버려두고, 나랑 쉬러가자. 지금 당장.

네 목소리에 어려있는 진심을, 이제는 나도 안다. 눈을 돌리려고 해도 돌릴 수 없을 만큼 선명한 것. 언젠가 내가 거울 속에서, 내 눈 안에서 보던 그 감정의 색을.

“…요한아. 네가 나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그러나 그것을 쉽게 움켜쥘 수가 없다. 그 바닷가에서. 네가 나를 다시 한 번 마주할 수 있게 해달라 빈 소원이 고인 바닷가에서. 나는 네게 나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어쩌면 네가 나를 망가트렸다고, 죄책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마음 안쪽에서는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을 손끝으로 꾹꾹 눌러뱉으며 입을 열었다. 평이한 목소리가 흐른다. 어쩔 수 없었다. 너는 그간 보이지 않았으니, 내가 어떤 표정이든. 어떤 마음이든. 어떤 상태이든. 목소리만큼은 평이하게 내는 것에 도가 틀 수 밖에.

“… 언제까지 함께 있을 수 있는데?”

그런데 왜 목소리 끝이 떨릴까. 너는 내게 너를 쥐여주고도 금방이고 언제고, 내가 괜찮아지면. 네가 괜찮아지면 다시 거둬갈 것 같으니. 마음에 기대가 자라기 전에. 아주 작은 화분에 마음을 옮겨심기 위해 묻는다. 마음을, 작은 방 안에 가두고 불을 끄기 위해 묻는다. 답이 돌아오지 않는 벽 앞에 주저앉기 위해 묻는다. 뒤돌아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기 위해 묻는다. 가만히 여기에 서서 기다리기 위해 묻는다. 아무리 커지려고 해도 마음이 더 커질 수 없도록.

“너 무서워하잖아,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 거. 그런데, 왜?”

여전히 있을 수 있는데 나는. 다시 돌아와서, 약하지 않게. 있을 수 있는데 나는. 괜찮다고. 고장난 라디오처럼 말해줄 수 있는데. 그것으로 네가 안심할 수 있다면 나는 몇 번이고 말해줄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를 쉬게 하고 싶은걸까. 내가 쓰러질까봐 걱정하기라도 하는 걸까. 나를 쉬게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너는 왜 나와 함께 잠겨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 걸까. 나는 가만히 생각하다 시선을 마주친다. 나의 마음 한구석이 내게 윽박지르는 소리를 듣는다. 기대하지마, 잡지 마, 표현하지 마. 더는 무게를 주지 마. 네가 다시 눈 앞에 있는 이 아이의 것이 되면 사라질지도 모르는 마음에 무너지지 마. 여기서 내가 너 때문에 무너지면, 내가 너를 잠기게 만들면. 너는 어떻게 해. 물처럼 너를 잡고 끌어내리면 어떻게 해.

“내가 너한테, 그정도의 가치가 있어?”

평이했던 목소리에 금이 가고 마음 한구석이 뒤틀리고 만다. 사랑치고는 너무 오래 고여 쓰고 짠 맛이 난다. 이게 제대로 된 감정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잇몸 사이에 드러누워 못난 모양으로 자리잡은 사랑니처럼 아주 오래 아프고 엉망인 마음이 있다. 네가 눈을 한 번 더 감으면, 등을 한 번 더 돌리면, 아니라고 한 번 더 말하면 사그라질 아주 작고 옅은 감정이 너에게 묻는다.

https://youtu.be/aGVMT_Po_ug?si=7S4wGVcYiU8vjvZ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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