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진 / 함정 카드 발동
카이진
"사랑해, 라고 말하면 만족할 거야?"
유우기는 애써 웃으며 물었다. 문장의 형태는 의문이었으나, 약간 처지는 말꼬리와 평소보다 더욱 부드럽고 단 말투를 들으면, 상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애교임을 누구라도 금방 알 수 있을 터다. 하지만 카이바는 팔짱을 낀 채 완고한 태도로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동생 같았다면 따듯한 홍차 속 금방 녹아내리는 각설탕처럼 노여움을 풀고 한 번쯤은 넘어갈 수도 있었을 해프닝이었으나 카이바 세토에겐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어떤 사이냐는 인터뷰 질문에 카이바는
"카이바 코퍼레이션에 어울리는 인재였으며 내가 바라던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이제는 육체가 멸하는 그날까지 생애의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라고 대답했다.
마치 시 구절을 낭송하듯 평온한 저음. 그 톤으로 조곤조곤 읊은 말은 프러포즈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유우기는 당황하여 무심코,
"아니, 그렇게까지는……."
이라고 툭 내뱉고 말아버린 것이다.
다행히 상황은 무사히 넘겼으나 유우기는 인터뷰가 끝난 이후부터 카이바로부터 집요한 시선과 분노의 오라를 느끼고 있었다. 물론, 유우기 역시 언젠가는 카이바와 호적을 합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감하고 있긴 했다. 그것은 예감이라기보다는, 카이바의 말을 빌린다면 조금의 과장을 보태어 숙명, 혹은 언젠가는 해야 할 숙제처럼 여겨졌다. 여름방학이 끝나기 직전에 반쯤 울면서 하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언제쯤 그 예감이 현실이 될지 궁금해지고, 때로는 기대되기까지 하는.
하지만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눈앞에 들이밀어진 숙제는 부담밖에 더 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여과되지 않은 속마음이 튀어나온 것은 그 탓이었다.
프라이드로 쌓인 바벨탑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것은 유우기의 말이었고, 그렇기에 그 장본인이 카이바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애써 노력하고 있었다. 듀얼 하자고 먼저 권유해도 카이바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쏘아보고는 돌아서 버렸고, 미안하다고 제대로 사과를 해도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 유일한 아군인 모쿠바는 "형님도 좀 더 어른이 되면 좋을 텐데. 힘내, 유우기!"라며 반쯤 흥미로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유우기는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카이바와 다툰 적은 많았어도 대개, 그러니까 열 번 중의 아홉 번은 카이바가 원인이었고, 나머지 한 번은 오해 때문이었다. 유우기가 카이바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일은 이번에 처음이었으므로 이 상황 자체가 곤란하고 당혹스러운 한편, 조금은 신선하고 즐거운 기분도 없진 않았다.
팔자로 늘어지는 눈썹 아래 웃음기를 감추고 있는 표정을 카이바도 이미 간파했을 터다. 그렇기에 카이바는 쯧, 하고 짧게 혀를 차더니 그제야 눈꺼풀을 열고 유우기를 바라봐주었다. 최근 그 녀석을 닮아 약간 얄미워졌고, 같은 나이인 주제에 몇 발짝이나 더 먼저 나아간 어른스러운 여유를 보이고, 그러면서 웃을 때면 아직도 고등학생처럼 천진난만한 구석이 보이는.
"시시하군. 겨우 그딴 한마디 말로 내가 만족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역시 안 되는 걸까……."
작게 중얼거리던 유우기는, 그래봤자 구깃구깃한 셔츠와 캐주얼한 청바지 차림임에도, 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리하더니 카이바 앞에 정자세로 마주 앉았다. 그리고는 카이바가 이 사태를 인지하기도 전에,
"그럼, 부족한 몸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더니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럼 이건 어떨까나? 라고 짓궂게 묻듯이.
그 말괄량이 같은 모습이 카이바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연한 얼굴로 창피를 주고는 인제 와서 변덕을 부린다고? 타인이었다면 당장 시야에서 내쫓아도 분이 풀리지 않을 터다.
그러나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무토 유우기.
카이바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본인조차 모르는,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한 위장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유우기를 본 순간 화는 누그러졌고 두 사람은 그동안 풀지 않았던 숙제의 마지막 답을 써넣었다. 먼 훗날 채점 받을 때쯤 동그라미가 그려질지 빗금이 그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어도, 카이바는 단 한 가지 사실만은 단언할 수 있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임에서 카이바는 분명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승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 영원한 패배가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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