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진 /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야미진 기반 카이진
네 마지막 작별 인사는 생각보다 더욱 가증스러웠다.
“분명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어.”
라고 네가 말했었지.
카이바 세토는 그렇게 회상했다.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최상층 레스토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는 유난히 느렸다. 통유리로 된 벽 너머 보이는 북극성은 그날따라 하얗게 빛났다. 유리에 비친 유우기는 약간은 들뜬 표정을 지었고, 통째로 빌렸다고 말하자 입을 쩍 벌리며 경악하다가 곧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었다.
그랬다. 평소와 같이 평화로웠고, 만족스러웠고, 충만했다.
그렇기에 더욱 유우기의 말은 이질적이었다. 유우기의 표정은 조각이 하나 빠진 것만으로 순식간에 무너진 젠가 같았다. 혹은 전부 쓰러진 도미노거나. 그 얼굴과 다르게 겨우 한 말이었다. 평소 타인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고 누구에게서든 부드러운 면을 찾으려 애쓰는, 그 무토 유우기가, 이보다 더 없을 정도로 단호하게.
마치 변하지 않을 진실을 말하듯이.
떨리는 손으로 쥐고 있는 푸른 다이아몬드 반지에도 진동이 전해졌다. 식은땀에 절어 창백한 손은 금방이라도 반지를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그것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것은 천성의 다정함 덕분이겠지. 듀얼리스트 킹덤 때도 그렇지 않았던가. 차마 비정해지지 못하고 자신을 벼랑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넘칠 듯 물기가 가득 어린 보라색 눈동자는 죄책감으로 카이바 세토를 비추고 있었다. 유우기는, 사실은, 예감하고 있었다. 어쩌면 미래시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는, 확신이었다. 몇 번이나 만져본 듯 조금 반질반질해진 사자소생 카드, 벨벳으로 된 순백의 반지 케이스를 본 순간,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대로 몸 밖으로 빼내어 차라리 세토 너에게 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카이바가 명계에서 돌아온 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때로는, 그러니까, 잠든 카이바의 억새밭 같은 긴 속눈썹을 가만히 바라볼 때나 입 안 가득 퍼지는 똑같은 치약의 민트 향기를 맡을 때, “유우기, 너랑 형님은 도대체 뭐야?”라는 물음에 카이바가 그저 미소로, 빈 가지에 이르게 튼 벚꽃 봉오리, 감미로운 클래식의 첫 음 같은 미소로 대답할 때면, 유우기는 ‘어쩌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우기는 틀렸다.
어쩌면이라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립될 수도 없다.
유우기의 눈 안에서 찰랑거리며 흔들리던 물이 결국은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손뿐만이 아니었다. 몸이 덜덜 떨렸다. 깊이도 크기도 가늠되지 않고, 가장자리조차 보이지 않는 거대한 감정 앞에서 유우기는 눈물 흘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어.”
일생 동안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그’밖에 없어, 라는 말까지는 차마 하지 못했다.
반지가 손가락이 아니라 그저 손 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말았다. 여태까지의 관계를 결국 제 손으로 파괴해버렸다는 사실, 아니, 애초에 그래서는 안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유우기는 두려웠다. 카이바가, 저 시린 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어떻게 담고 있을지. 저 입술을 열고 어떤 말을 쏟아낼지. 정당한 원망과, 당연한 비난을 받을 결심도 해야만 했다.
점점 심장의 고동이 커졌다. 마치 귓속에 심장이 들어 있는 것처럼 그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카이바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아주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눈을 떴다. 그 모습이 마치 슬로모션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으나, 이윽고 이어진 말보다는 현실적이었다.
“내가 그런 것도 모를 줄 알았나.”
노기가 가득 어린 높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수를 읽고 있었다는 듯 여유로운 저음이었다.
“애초부터 그런 것은 바라지 않았다만.”
그리고는 빈 반지 케이스를 흥미롭게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을 이었다.
반지나 프러포즈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을 그저 하나의 게임처럼 여기듯이.
“그런 네 녀석을 이해할 수 있는 자도, 옆에 있어 줄 자도 생애에 단 한 명, 오직 나뿐일 텐데?”
도대체 이 얼마나 오만한 청혼인가.
가장 신뢰하는 최측근도, 사랑하는 동생도, 이 말을 듣는다면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러나 카이바는 팔짱을 끼고,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는 듯이 흡족한 미소를 띤 채 유우기를 응시했다. 파란 시선, 여태 겪었던 깊은 신뢰와 애정의 바다 바로 그 속에 유우기가 있었다. 이제껏 본 것 중 가장 꼴사납게 울면서 떨고 있는 나약한 모습이.
눈을 닫아 시야에서 밀어내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것이 바로 카이바 세토의 다정한 강함임을, 유우기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유우기가 혼란스러워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고 있는 가운데, 카이바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가볍게 서명을 하더니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자리를 떴다. 유우기는 그것을 보고 울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 날, 군데군데 얼룩이 번져 우그러진 혼인신고서가 수리되었다.
그 후로 몇 년이 지났던가.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모래사막 위에서 하늘에 뚫린 수없이 많은 별을 바라보고, 오토기가 새로 출시한 게임을 갖고 놀다 함께 아침 해를 맞이하고, 여전히 이십 대 같은 외모를 유지하는 카이바를 보며 유우기가 치사하다고 놀리고, 저혈압이라 아침에 약한 카이바에게 유우기가 치약을 짠 칫솔을 건네고, 흰머리가 생겼다며 고민하는 모쿠바의 투정을 들으며 괜히 거울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맞잡아오는 손이 예전만큼 힘이 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건강 검진을 받고, 그리고, 마지막을 함께 하고 있는 이 순간까지.
자그마치 몇십 년이나 되는 나날이었건만, 마치 짧은 음악 한 곡처럼 느껴졌다.
이제 바이올린도 마지막 현을 켜고 피아노 건반에서도 손가락이 떨어지겠지. 지휘자도 인사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할 것이다. 앙코르는 없다. 되감기도 없다. 어쩌면 그 모든 순간을 유우기는 카이바가 아닌 ‘그’와 함께 겪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심을 카이바도 유우기도 반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이따금 광대한 고독에 지쳐 먼 곳을 볼 때, 자신의 옆모습을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유우기는 카이바에게 배웠다.
그 고마움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어떤 낱말로, 어떤 억양으로, 어떻게 다 표현할 수가 있을까.
유우기는 깨어 있는 동안 줄곧 그것만을 생각했고, 그리고 마침내 아주 적확한 한 문장을 찾아내어, 이제는 너무나 낡아버린 목소리와 함께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단지 한 문장이었다.
아주 간단한, 어쩌면 누군가는 너무나 쉽게 말하는.
그러나 그 순간, 카이바의 시곗바늘은 왼쪽으로 돌기 시작하며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그날이 떠올랐다.
엘리베이터 유리에 비친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도, 괜스레 목이 말라 자꾸만 삼켰던 마른침의 쓴맛도, 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 흘러나왔던 부드러운 음률, 그리고 그 제목도.
카이바는, 이제는 힘없이 자꾸만 처지는 손을 꼭 붙잡고 중얼거렸다.
“분명 너는 나를 사랑할 수 없다고 네가 말했었지.”
그리고는 소설의 마침표, 연극이 끝난 후 내리는 커튼,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하는 영화의 엔드 크레디트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가증스러운 확신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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