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너머
이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면,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지?
Serph - Azul
와르르 무너져 돌아올 수 없는 외침이 울었다
어디로 갈 수 있느냐고
논증이 불가능한 가설은
초록조차 남기지 못해
허무하게 흩어지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잃어버린 마음 뿐이겠지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대체 무엇을 위해.
쿠우웅......,
날카로운 유성이 긴 불꽃의 꼬리를 끌고 이름 모를 행성에 떨어진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우주 구석, 늙어 버려 적색 거성이 되어버린 항성계의 모래 바람 부는 보잘것없는 행성에 날카로운 크레이터를 남기며 떨어진 유성은, 떨어질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작은 유성과도 같은 모습으로 크레이터 위로 사뿐히 올라와 노을 뒤에 덧없이 흘러간 분홍빛 구름을 닮은 제 갈기를 털었다. 누가 봐도 이렇게 크나큰 크레이터를 만들었으리라 생각할 수 없는, 이 작은 생물의 연약해 보이는 분홍빛의 몸 주변을 크레이터의 모습을 한 푸른 빛의 판이 유성을 한 바퀴 빙글 하고 회전했다. 유성은 손을 뻗어 제 큼지막하고 부드러울 손바닥 위에 판을 그러쥔 것마냥 올리고, 다른 손을 지표면에 가져다 댔다.
'온도는 334K, 기압은 721.3hPa, 그리고......'
깊은 크레이터를 남긴 충격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유성은 무덤덤하게 충격의 여파로 잔뜩 떠오른 모래 구름을 헤치고 크레이터 주변의 지표면을 손으로 훑었다. 무던히 손이 땅을 훑었으나, 묻어나는 것은 흙먼지 뿐일 것이라는 것에는 한 치의 분석조차 필요 없었다. 보잘것없는 행성이야. 어떻게 보아도 그런 행성이다. 아름다운 하늘, 장엄한 폭포, 웅장한 건물은 모래바람이 불지 않아도 보이지 않았을, 이미 몰락해가는 행성. 붉은 빛의 모래는 무너져버린 인공물을 덮어 버렸고, 강에는 액체 대신 모래가 흐르는, 그리고 바다가 있어야 했을 지평선 너머 모래 언덕 뒤에는 져 가는 분홍색 노을이 있는 행성.
별의 죽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항성은 점점 커지기 시작할 것이고, 자신을 마구 불태워 결국 터져버리거나 모든 걸 태우고 남은 재만 그 곳에 남아 외로이 우주 한 구석에 비석마냥 지킬 것이다. 물론 그 별의 중력에 이끌려, 영원히 이루지 못할 만남을 기다리는 행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항성의 옆을 지키며 궤도를 돌던 행성들 또한 별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별에 잡아먹히거나, 별의 폭발에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짝사랑을 포기하고 길을 잃고야 말 것이다. 그리곤 영원히 우주를 떠돌겠지.
유성이 찾아온 행성은 그런 행성이었다. 마구 제 몸집을 불린 별이 내뿜은 거대한 복사열에 번영하던 문명은 한낱 모래가 되어버린. 이미 몇몇 행성은 잡아먹혀 감마선을 우주에 퍼트리며 사라졌고, 이 행성도 그렇게 될 것인 행성이었다. 그리고 그 행성에는, 유성이 관찰한 여느 멸망한 행성들과 같이 지평선 너머 분홍빛 노을이 떠오른다. 마치 누군가 이 행성이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보내준 것처럼. 유성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그럼에도 유성은 노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540nm 이상의 가시광선으로 산란된 대기, 레일리 산란 현상......'
여기까지 생각한 유성은 마치 자신이 불경한 생각이라도 한 것 마냥 머리를 흔들었다.
유성은 그 노을을 찾아왔다. 특별할 것 없는 별의 죽음, 그리고 그 의미없는 죽음을 애도하는 분홍빛 노을을.
언젠가 물었다
이 안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검색된 결과는 없었고
표면적인 관찰과 통계로 도출된 '사실'이 돌아왔다
우리는 그 끝에서도
그저 관찰의 도구로서만 존재할 뿐이었나
"......강인한 저희에게도 끝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개체가 생성될 테니, 우리의 탐구는 지속될 겁니다."
유성에게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애도의 경험을 해 볼 기회가 없었다. 아니, 모성에는 죽음을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탐구'와 '지식', 그리고 '관찰'은 있었으나, '죽음'과 '상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파괴되는 유성은 그저 별로 돌아갈 뿐이다. 모성이 아닌 다른 곳에서 천천히 녹슬고, 산화되고, 바스러져 행성의 핵이 되든 항성의 핵융합 재료가 되고야 마는 것이 유성의 죽음,
"폐기된 유성은 그 자체로 우주의 양식이 되어, 저희가 쌓을 지식의 범위를 늘려주겠죠. 우리의 지식은 영원할 것입니다."
아니, '폐기'였다.
'그'는 그런 모성에서 눈을 떴다. 생명을 가진 무기물로서 의식과 자아를 가진다는 것은 실로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나, 다른 유성들은 고통스러운 기색 없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논증을 시작할 뿐이었다. 마치 굶주린 아이가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듯 지식이 그들을 채우고, 새로운 지식을 찾아 흩어질 뿐인 그런 곳에서, '그'는 눈을 떴다.
그에겐 이 모든 것이 그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막 태어났을 뿐인 새로운 생명이었던 그에게 무엇이 그리 부자연스럽고 이질적으로 보였는지는 아직도 스스로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가 증명해야 할 가설은 별을 옮겨다니는 것이 아니라, 반사율 98% 이상의 평면 앞에 서서 논쟁하는 일일지도 몰랐다. '원래 그런 곳'이라고 하기에는 스스로가 이질적이었으나, 막 자아가 태동한 그 작은 무기질에게 세계란 자기 자신 뿐이었으니까. 어쩌면 그조차도 비정상적인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그 분홍빛 유성은,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는 많은 것을 습득했다. 모성에는 새로운 유성들에게 탐구해야 할 지식을 알려주는 유성이 있는가 하면, 모성의 데이터베이스의 어느 부분을 탐색해야 할 지 알려주는 유성도 있었다. 우주를 유영하는 유성이 연구하는 분야를 알려주는 유성 또한 있었으며, 모성이 위치한 은하와 유성의 보조 모성을 구축하고 어떻게 모든 지식이 모성으로 모일 수 있는 지 알려주는 유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스스로가 누군지, 그가 누군지 알려주는 유성은 없었다. 온 세상의 모든 지식이 모여있었으나, '그'가 누구인지 서술하는 지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거대한 세상 만물의 체계적이고 아름답게 짜여진 절대 법칙을 빠짐 없이 기록하는 모성의 데이터베이스조차도, '그' 스스로를 누구라고 정의해주지 못했다. '결과 없음', 그 네 글자만이 모성의 데이터베이스가 가진 '그'에 대한 지식이었다.
물론, '그'를 제외한 어느 유성도 스스로에 대한 지식따위는 알지 못했다. 그들은 드넓은 지식의 바다 위에 난 구멍들이었고, 분절이었으며, 불연속적인 함수의 무수한 점이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 쯤이었던가, 타오르는 황혼빛 유성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깨우쳤다. '내'가 사라졌을 때에, 이 우주 그 어떤 누구도 스스로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함께.
유성은 여전히 모래사막을 건너고 있었다. 항성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이후 레일리 산란 현상, 아니, 분홍빛 노을은 더 이상 관찰할 수 없었지만, 유성은 여전히 그 행성에 있었다. 이 행성이 특별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모든 '멸망한' 행성에 레일리 산란 현상이 '발견' 되었으나 그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확률을 계산하는 데에 다소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대기가 없는 우주 공간을 유영하면서 계산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식힐 방법은 없었기에, 차라리 항성이 행성 반대편에 있는 짧은 순간의 낮은 기온을 이용해 냉각하는 것이 훨씬 효율이 좋았을 뿐이었다.
모래에 발이 닿지 않았음에도 간간히 모래 위로 빼꼼 솟아난 과거의 건축물에 발이 걸렸다. 이 행성의 건축물들은 상대적으로 원시적이었다. 대리석, 탄자나이트, 흑요석 등의 사치스럽고 상대적으로 희소한 재료를 사용한 건축물은 없었고 화강암, 석회암과 같이 흔하디 흔한 암석들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유기물로 이루어진 건축물은 이미 전부 산화되었는지, 아니면 바스라졌는지 관찰할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었다. 그나마 마지막 남은 양심으로 모성 데이터베이스의 한 줄이라도 더 채웠을 수도 있었건만, 야속하게도 모래 사막을 전부 횡단할 때 까지도 유성의 예상을 그리 빗나가지 않았다.
"-보고, 아슬람-에가-디시지 구역에 위치한 바야-4 행성의 지리학적 환경 분석 및 유기, 무기 기반 생명 문명 유무에 대한 짧은 보고를 업로드함. 형식이 변화하지 않을 때까지 보고 없음."
아무도 유성에게 의무를 부여하지 않았건만, 유성은 아직도 형식적인 보고는 지속하고 있었다. 아무런 가설도, 아무런 논증도 확정하지 않은 지 모성계 항성력으로 1137 사이클이 지났으니 이미 이런 보고가 의미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문명의 문화는 마치 대기와 같다고 했던가? 어쩌면 다른 유성들의 행동 양식이 유성에게 알지 못하는 영향을 미치고 있을 수도 있었다. 모성의 데이터베이스에 업로드된 보고의 정합성을 확인하고 나서야, 유성은 자신이 드디어 모래 사막에서 벗어났음을 알았다. 그리고 방금 업로드 된 보고에 수정이 필요함 또한 깨달았다.
"......누구세요?"
이 행성에 생명이 존재했다고.
과거의 기억이 어딘가에 기록되어
영원히 남을 수 있다면
모두가 기억해주는
위대한 기억이 있다면
덜 두려웠을까
덜 외로웠을까
행성의 대기권 바깥에서 관찰한 행성의 표면에는 분명하게 관측되는 수목림이 존재하지 않았다. 국소적인 부분에서만 존재하는 생태계인지, 아니면 대기의 산란율이 높아 모래와 동일한 스펙트럼으로 관측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성은 새로운 수목림을 발견했음을 알았다. 너무나도 푸르고, 생기 넘치는 거대한 수목림과 동시에 한 유기 생명체가 유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이에요? 음, 나는 손님 맞이 할 줄 모르는데."
발성 기반 대화 구문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성은 모성을 떠난 이후로 어떠한 대화도 나눠 본 적이 없었고, 데이터베이스에서도 대화 구문이나 대화 패턴을 검색해 본 적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생명을 연구할 계획이 없는 유성에게 대화 관련 지식은 쓸모가 없었으니. 다만 유성은, 조금 특이한 유성이었다. 일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상위 존재'와의 대화에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습득한 대화 패턴이 이렇게 사용될 줄은 스스로도 몰랐으니. 일반적으로 새로운 문화권에서의 대화 패턴은 '모방'이다. 발성 기반이면 발성으로, 문자 기반이면 문자로 소통하는 것이 우선된다.
'''<나는 손님이 아닌걸.>'''
하지만 유성은 대화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스스로도 제가 발한 텔레파시에 놀라 얼어붙은 유성이 당황스레 꼬리만 휘적이고 있을 때, 털로 덮인 생명체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여기 처음 왔으면 모두가 손님인걸요. 어서 와요, 별 볼 일은 없겠지만."
마치 안내하듯 앞으로 기운 생명체의 꼬리는 천천히 움직였고, 생명체는 그저 수목림을 향해 돌아서 걸어갔다. 유성은 한참동안 얼어붙어 있다가, 이 쪽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생명체의 시선에 황급히 따라갔다. 이 행성은 멸망하지 않은 건가? 방금 관측한 모든 건축물, 사막, 유기물의 잔해, 그리고 노을은 그저 우연일 뿐이었을까? 유성은 모성에서 나온 이래 처음으로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저 유성은 그 생명체의 뒤를 따라갔다.
해당 생태계는 다른 유기물 기반 생태계와 다를 바 없이 평범했다. 고도의 문명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강인한 물리력을 가진 생명을 기반으로 하지도 않았다. 그저 보송한 털로 뒤덮인 평범해 보이는 문명, 그리고 수렵을 기반으로 한 초라한 문명이 전부였다.
"왜요, 신기해요? 별 볼 일 없긴 하지만, 그래도 꽤 지낼 만 할 거에요."
스스로를 '세나'라고 칭한 생명체가 그리 말했다. 이들은 유성을 손님이라 굳게 믿고 있는 듯 했다. 유성은 손님 따위가 아니라고 여러 번 전달하였으나, 그리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이미 이들은 유성을 이곳 저곳 데리고 다니며 이 곳을 소개해주기 바빴고, 특히 처음 유성을 이 곳으로 데리고 온 세나는 이 곳에서 가장 열성적인 축에 속했다.
'''<나는 이런 대사 과정이 필요 없어.>'''
"뭐라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입은 있잖아요? 못 먹어요?"
한사코 거절했음에도 식사를 굳이 마련해 주거나,
'''<이 곳의 환경에 영향받지는 않으니 굳이 이런 건축물 안에 들이지 않아도->'''
"아이, 물론 당신은 이리저리 떠 다니니까 그렇겠죠! 그렇지만 침대는 필요하지 않겠어요? 설마 잘 때도 그렇게 떠 다니는 거에요?"
휴식을 권하기도 했다. 유성은 나중에서야 이 행동들이 호의였음을 깨달았지만, 당장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유성에게 이 곳은 더 이상의 연구 가치가 없어진 행성이었고, 다음 행성을 찾으러 떠나야 했으니까. 하지만 세나는 고집스러웠다. 끝까지 유성을 손님이라고 부르면서 데리고 다니지 못해 안달이었으니. 유성은 이 항성계의 시간으로 몇 사이클, 아니, 몇 일을 여기서 보내야만 했다.
이들은 '나드모젤'이라 불렸다. 아니, 스스로를 그리 칭했다. 행성의 크기로 보았을 때는 국소적이었지만, 이 생태계 안에서는 수목림의 넓이는 상대적으로 컸으며 이 규모의 생명체가 존속하기에는 적절한 규모로 보였다. 하지만 유성은 굳이 자세히 관측하지 않았다. 이 곳의 데이터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으니, 그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떠나지 않은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세나는 유성을 항상 따라다녔다. 하지만 일정 거리를 항상 유지하기도 했다. 이곳 저곳을 데리고 다닐지언정 강제하지는 않았고, 유성 또한 이유는 없을지언정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유성은 많은 것들을 배웠다. 손님이 온 건 오랫만이라는 것, 이 곳의 모두는 낮에 일하고 밤에는 잔다는 것, 대부분이 손님이 와서 기쁘다는 것 등등.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었지만 유성은 불만 없이 하나하나 기록해 나갔다. 의미 없는 나열인 것은 여태 유성이 쌓은 지식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이 곳의 문화와 생활, 각자의 행동 양식은 다 죽어가 모랫바람만 날리는 행성들의 관측 데이터를 기록하는 것 마냥 어떤 것 하나 논증하지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 다채로웠다. 그래, 이 지식들은 다채로웠다. 불안하고 지루하기만 했던 지금까지의 시간과 달리 비교할 수 없이 다채롭고 흥미로웠다. 세나 또한 그런 유성을 끊임없이 데리고 다니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데에 전념했다. 어느 것 하나에도 손을 대지 않고, 무엇 하나 입에 대는 음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만 없이 속속들이, 구구절절 모든 일상을 설명했다. 여태 이런 이야기를 할 대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맡은 일이 있지 않아? 여기 시간으로 '하루 종일' 설명만 하는 데에 시간을 보내도 되는 거야?>'''
유성의 물음에 세나는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모두가 유성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각자의 할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세나는 왜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지 유성은 궁금해했다. 세나는 오히려 그것이 왜 문제냐는 것처럼 되물었다.
"그럼 안 되나요?"
유성은 논의를 기록했다. 그래, 그럼 안 됐을까? 그냥 모성의 모두처럼 그저 할당된 일을 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그저 이런, 모성이 궁금해하지 않는 지식 따윈 버리고 모두와 같이 지식의 상한선을 높이면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러고 싶은걸요."
그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유성은 모성의 모두와는 달리, 그러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답이 정해진 세상의 규칙과 법칙을 논증하고 밝혀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랬을 뿐이다. 그것에 이유가 필요했을까? 태어난 데에 목적이 있다는 이유로 그 목적을 수행할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그 목적으로 태어난 이에게는.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고 나서 할지 말지 정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네. 맞는 것 같아.>'''
유성은 행성의 표면이 어두워지고 땅거미가 질 때까지도 세나와 함께 있었다. 세나가 마련해 준 세나의 침대를 마다하고, 세나가 대사 활동을 최대로 줄여 휴면 상태가 된 후에도, 같은 방 안에서 유기물을 땔감으로 태운 빛을 바라보았다. 모성의 밤은 이렇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밤도 이렇지 않았다. 고요하고, 모든 것이 멈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유성에게는 휴면이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시간 효율적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 효율이 무슨 소용인가? 유성이 지나온 시간은 많았고, 앞으로 지나갈 시간은 그와 비교할 수 없게 무한했다. 유성은 침대에 누웠다. 온도는 공기보다 따듯했고, 빛을 가린 천은 공기 흐름에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모든 것이 멈춰도 괜찮았다.
유성은 처음으로 휴면에 들었다. 처음으로 안정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의 의미를 찾는다고 해도
그 안에 내가 있을까
고민했던 시간도
지나왔던 우주도
지금만큼
따듯하진 않았다
'하루', 그리고 '낮'과 '밤'이 흘렀다. 세나는 휴면에 든 유성이 활성 상태가 될 때까지 동그란 모양의 금속 판을 금속 막대로 때려 댔다. 기묘하게도 그 진동수가 유성의 판과 공진했고, 유성은 자연스럽게 활성 상태가 되었다.
"필요 없다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잘 일이에요?"
'''<'잤다'니? 휴면 상태에 들었을 뿐인걸.>'''
"그게 잔 거잖아요."
세나는 밤 사이 불편하게 잤고, 얼마나 체온이 정상 범주로부터 크게 떨어졌는지('추웠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한참을 시끄럽게 두들겨 댔는지 불평했다. 유성은 그런 이야기들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모래를 한 손으로 쓸어내린 것 마냥, 생각이 깔끔하게 비어있었다. 그 오랜 시간동안 고민했던 문제들과 가설들이 그저 사막 위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그런 상태는 잠깐 뿐이었고, 금방 다시 두려움과 가설과 연결된 보조 명제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그 잠깐의 상태를 다시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없어요. 아직 보여줄 게 많이 남았는데."
세나는 벽에 난 구멍을 가린 천을 걷어냈다. 하루 전과 달리 밖은 어두웠고, 아직도 '횃불'들은 켜져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일어나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고, 아무도 '자고 있지' 않았다.
'''<'밤'에는 모두가 잔다고 하지 않았니?>'''
"이건...... 밤이 아니니까요. 시간상으로는요."
세나는 건축물의 문을 열었다. 공기가 떨려왔다. 무언가 다가오듯이.
"이건 우리의 종말이에요."
영문 모를 소리에 유성은 혼란스러웠지만, 세나는 묵묵히 유성을 이끌었다. 마을의 가장 높은 곳, 유성은 간단히 날아오를 수 있지만 세나는 끙끙대는 소리를 내며 올라야 하는 곳까지. 세나는 머리 위쪽을 제 손으로 훑더니, 남서쪽 지평선 너머를 가리켰다. 무언가가 항성을 가리우고 있었다.
"저거 보이죠? 저게 우리를 집어삼켰어요."
'''<현재형을 쓸 만큼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은걸.>'''
"당신이야 괜찮겠지만요."
세나는 큰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보였다. 아마 '걱정'이었을까, '불안'이었을까. 유성은 따라해볼까 했다가 세나의 이어진 말에 시선을 세나의 손 끝으로 옮겼다.
"우린 말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세나는 마치 손을 달라는 듯이, 손바닥을 펴고 있었다. 유기물 기반 생명체에게는 해로워 보이는 모래 폭풍이 정말 빠르게 이 마을을 향하고 있었음에도 세나가 침착한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유성은 그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한참을 고민했다. 아래 보이는 다른 모두는 소리치고 있었다. 무언가 막으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몇몇은 건물 안에 들어가 건물을 보수하고 있기도 했다. 모든 것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이 위에서는 모든 것을 관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은 대비하지 않아도 괜찮겠어? 그 말대로, 나는 괜찮아. 하지만 너는?>'''
"......."
세나는 말 없이 그저 유성을 향해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유성은 다시 고민했다. 세나는 그대로 기다려 주었다. 모래 폭풍은 80dB 이상의 소리를 낼 때까지 다가왔다. 유성은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지만, 정말로 시간이 없어 보였다. 세나의 눈에는 이채가 돌았고, 유성은 아무런 논증과 실험을 거치지 못한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렸다.
손을 뻗어 세나의 손 위에 올렸다. 아니, 그렇게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기루처럼 유성의 손은 세나의 손을 지나쳐 그대로 공기를 갈랐고, 갈 곳 잃은 손은 그대로 떨어졌다. 유성은 다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만져지는 것은 없었다.
"믿었군요, 당신은."
'''<이게, 무슨......>'''
모래 폭풍은 마을의 앞까지 다가왔다. 아래의 모두는 이제 울부짖기 시작했다. 명확한 불안, 증명이 필요 없는 초조, 그리고 당연한 두려움. 유성은 처음으로 이 모든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유성이 피해를 입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유성은 이유 모를 두통을 느꼈다. 스트레스 반응인가? 어떤 점에서?
유성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제 몸을 뒤집어 본체를 드러내고, 마을 앞으로 날아가 모래에 단단히 제 몸을 꽂았다. 모래 폭풍이 겨우 몇 십 미터밖에 안 되는 제 본체에 막혀 없어지리라고 예상한 건 당연히 아니었다. 이미 본체가 막을 수 있는 에너지는 계산이 끝난 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성은 그렇게 행동했다. 이유가 있었을까?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논증할 수 있을까? 조리있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보고할 수 있는 종류였을까? 유성은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유성은 그렇게 하고 싶었다.
모래 폭풍은 강력하게 유성의 본체를 때렸다. 유성이 판단하기로 이 정도의 모래는 경도가 낮아 유성의 본체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실제로도 그러했고, 폭풍은 약해져 갔다. 하지만 그 뿐이었고, 수 천 미터에 다다르는 모래 폭풍은 그대로 마을을 집어삼켰다. 유성은 무언가가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 마을이 무너졌을까? 그것은 아직 관측되지 않은 논제였다. 하지만 확실히 유성의 무언가가 무너졌음을 확신했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폭풍이 내는 진폭이 40dB가 되어서야 유성캣은 다시 몸을 뒤집었다. 뒤를 돌아보기가 두려웠다. 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 있는 것에 새삼 놀랐지만, 유성은 그런 단순하고 쓸모없는 사실보다 예상되는 모든 것들이 두려웠다. 제 가설이 거짓일 거라는 사실은 하나도 두렵지 않았으면서, 이런 확연한 사건에 대해서는 왜 그러했을지 유성은 알 수 없었다. 유성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그저 마을 반대편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이 행성에 떨어졌을 때와 정확히 같았다. 보잘것 없는 행성,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의미 없는 죽은 행성.
......정말로 의미가 없었을까?
유성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마을을 이루고 있던 모든 건축물은 모래에 덮였고, 수 천년에 걸쳐 삭은 것처럼 마모되어 있었다. 유기물은 하나도 관측되지 않았고, 모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세나만 제외하고.
"정말로 멀쩡하네요. 과거에 당신이 이 곳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세나는 모래 위에 서 있었다. 처음 모습, 마지막 모습 그대로.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당신은, 어떻게?>'''
"당신이 이 곳에 처음 온 손님이에요.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장례식을 같이 해 주셨네요."
세나는 유성 앞에 섰다. 처음 모습 그대로였던 몸은 점차 투명해지고, 모래마냥 부서져갔다.
"이 곳에 남은 유일한 기억, 행성에 새겨진 추억. 그리고 행성이 추모하는 장례식을요."
유성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세나의 상태와, 모래 폭풍, 모든 이야기. 그리고, 이 신기루들을.
"이제 대신 기억해 주세요. 저들을, 저를, 그리고 이 행성을."
세나는 흩어져갔다. 처음의 웃는 모습 그대로. 유성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잡으려 했지만, 그저 사막 위 신기루일 뿐인 빛이 유성의 손에 잡힐 리는 만무했다. 점차 흩어진 빛은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지평선 너머로 물드는 타오르는 분홍빛 노을 뒤로 사라져 버렸다. 레일리 산란 현상.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행성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추모하는 건 '상위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추모하는 것은, 추모되는 것은.......
'''<그렇게 오래 찾아다녔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네."
유성은 제 몸을 한 번 쓸어내렸다. 반투명한 검은 드레스가 유성의 위에 드리웠다. 바람에 굴러 흐르는 모래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 위로 유성은 제 손바닥을 모래에 꾹 가져다 대었다.
기억하는 것은 유성 뿐이었다. 추모하는 것은 기억하는 자들의 것이다.
오래 찾아다닌 것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걸 알았을 때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나
나에게 부족했던 것은
오로지 나였을 뿐이었는데
"언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유성의 뒤로 작은 아이가 달려들었다. 유성은 익숙하게 아이를 잡아 안아들고, 옆에 얌전히 앉혔다.
"음, 매일 하는 거? 왜, 너도 볼래?"
유성은 아이에게 자신이 끄적이던 판을 들이댄다. 아이는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소리를 지르며 손을 파닥거렸다.
"으악, 아냐! 아니야! 뭔 소리에요!"
피식 웃었던 유성이 다시 판을 집어들고는 중얼거리며 계산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긋히 보던 아이가 유성의 꼬리를 잡고 쪼물대더니 이내 조심스레 한 마디 한다.
"언니, 밥 먹으러 오래요."
"아이, 알겠어. 금방 가겠다고 해 줘."
유성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곤 밖으로 달려나가며 소리쳤다.
"세나 언니 밥 먹으러 곧 간대!"
그런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유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은 분홍빛 노을이 길게 지고 있었다.
다른 것보다 설정을 날조해도 괜찮다고 해 준 잠룡님께 무한한 감사를 표합니다(아니 사실 잠룡님이 이걸 공식 설정으로 한대는거야 이게 무슨 소리람) 오랫동안 묵혀놓고 있던 글인데, 가끔 생각날 때마다 보고 싶다고 해 주셔서 그나마 다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모두가 열심히 공부하고 앞만 보고 달려나가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우리는 나 스스로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심지어 내가 아픈지도, 뭘 느끼는지도 모르고 살기도 하니까요. 가장 이성적이고 똑똑한 종족이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지 못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감정에 휘둘린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잠룡님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대학원생도 사람입니다 사람이라구요 아시겠어요 캐릭터를 디자인 할 때만 해도 그냥 '히히 드레스 이쁘다' 하고 시작했는데, 그 특유의 눈매와 검은 드레스로부터 장례식이라는 소재를 얻었고, 우주의 무언가의 장례식이라고 한다면 행성의 장례식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 정도만 생각했는데, 본격적으로 유성캣의 연구 주제를 고르라고 하니 장례식과 관련된 '이성적'이고 '무언가 전문적인' 그런 게 생각이 별로 안 나더라구요. 그래서 아주 비이성적인 연구 주제를 잡아버렸습니다. '확증 편향'이라는 말은 연구하다 보면 많이 듣게 되는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마지막 장면은 곧 행성이 죽을 거라서 거기 있는 게 아니라, 세나가 일상을 찾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넣었어요. 비이성적인 연구 주제와 스스로의 두려움에서 벗어났으니 이제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생겼겠죠. 아니면 그런 게 없어도 자신을 기억해 줄 누군가를 만들고 싶었을 수도 있구요. 중요한 건,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거에요. 너무 모성을 삭막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무언가로 만들어버린 기분이긴 하지만, 유성캣의 모성도 결국 누군가가 만들고 유지하고 보수하는 곳이니 언젠가부터는 바뀌었을 수도 있겠죠. 세나보다 좀 더 용기있고 행동력있는 신입 유성캣이 싹 바꿔버리고, 좀 더 감정이 섞인 사람 사는 공간으로 바꿨을 수도 있죠. 하지만 이건 잠룡님에게 맡길게요. 세나는 이미 떠나왔습니다. 직무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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