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가는 길
"그러나 그 끝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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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lestory Lofi - Where Stars Rest
집은 기후의 변화 등의 외부 환경으로부터 사람이나 동물의 생명 또는 재산을 보호하여 안전하게 지키는 공간이다.
굳이 정의를 되뇌어 볼 만한 단어는 아니지 않을까, 캐스퍼는 생각했다. 하물며 말할 줄 모르는 짐승조차 집이 무엇인지 안다. 자신의 집, 돌아갈 곳. 돌아갈 곳? 새삼스럽게 집의 의미를 반추하던 캐스퍼는 '돌아갈 곳'이라는 표현이 어색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은 집 그 자체의 의미가 아닌, 집이라는 존재에 행해지는 결과가 아닌가.
캐스퍼는 스스로가 언어를 모를 때는 모든 것이 이렇게나 복잡하진 않았던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를 모르던 짐승이 "집"이라는 언어적 표상을 가지게 된다면, 그 이후부터 집의 의미는 바뀌는 것일까? 돌아갈 곳이 없으나 네 발을 딛고 서 있던 그 곳이 나의 집이라 말했던 기억이 있었다. 다시 떠올려 보면,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이 집이었을까? 하지만 '목적지'라는 더 적확한 표현을 할 수 있지 않았던가. 스스로 짐승이라 칭하는 것이 웃기기는 하지만, 캐스퍼는 일단 선을 긋기에 적합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짐승인가, 아니면 인간 - 어떠한 이성이나 논리적 사고가 가능한 것으로 표현되는 - 인가는 사실 쉽게 가를 수 없는 문제였다.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쑤셔넣어진 지식이긴 하지만, 캐스퍼가 알고 있는 바로는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이라 하였다. '사회적'이라는 단어의 선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사회에 속할 수 있는 자격이나 상태는 무엇인가? 단순히 교류하며 어울리는 것이 사회적이라는 표현에 속하는 것인가? 인간으로서 나는 인간 사회에 속하고 있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이리저리 흔들리던 꼬리가 책상 모서리에 부딪혀 얼굴을 찌푸린 그 쯤에서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던 것 같다. 답이 없는 문제니까. 캐스퍼가 아는 한, 그 누구도 감히 완벽한 정답을 말할 수는 없었다. 이전까지 캐스퍼같은 이는 존재했던 적이 없었으니까, 따위의 편하고 게으른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아무도 증명하고자 하지 않은 문제였으니까. 그래, 캐스퍼는 증명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겹게도 잘 알고 있었다.
캐스퍼는 자신에게 돌아갈 집이 있는지 고민했다. 문득 드는 그리움에 캐스퍼는 괜히 뒤를 돌아봤다.
끝없는 우주를 비추는 창,
그리고 그 창에 다시 비춘 자신과
새로운 팀원들.
사람, 짐승, 수인, 로봇까지 섞여 있던 저번과 달리 이번 팀원들은 모두 인간이었다. 서로 다른 소설에서 나온 듯한, 너무나도 다른 두 집단. 새삼스러운 어색함에 캐스퍼는 천천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왜 이렇게 새삼스러운 것일까? 원래 이랬었는데. 캐스퍼가 지내던 연구소에서도 이렇게나 이질적인 존재는 캐스퍼 혼자였다. 나와 비슷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곳이 정말 집이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와 비슷한 존재들이 기다리는 나만의 집을 만들고자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것일까? 아마도. 캐스퍼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 프로젝트 - H.E.S.C. 프로젝트 - 의 골자는 이미 대외적으로 윤곽이 알려져 있었다. 한계가 명확한 건축물을 무작정 무한히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주선에 들어갈 인원은 제한되어 있었고, 최대한 많은 행성에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 행성에 남을 인원은 최소한이어야 했다. 그렇게 남은 최소한의 인원은 나머지 사회 구성원을 '만들어야' 했다. 캐스퍼가 '테라포밍'과 '이주'라는 아주 제한적이고 어중간한 키워드에서 얻어낸 귀납적인 결론은 그랬다. 기묘한 우연으로 그에게는 아주, 아주 많은, 회사 입장에서 지워질 수 없는 지식이 존재했고,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유전 지도로 행성의 새로운 주민이 될 인간들을 뽑아낼 배양 기계의 사용법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것 대신 그의 유전 지도로 사회를 구성할 생명체를 배양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야 물론, 이 기술은 캐스퍼가 제 고양이 손을 보탠 논문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지구의 유일한 기술일 수 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처음 프로젝트를 접했던 그 때만 하더라도 캐스퍼는 감히 인간 대신 제 종족으로 채워진, 새로운 '집'을 만들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귀소 본능이, 순식간에 멋대로 논리를 펼쳐 하나의 점과 선의 그래프를 머릿속에 그렸을 뿐이었다. 그는 이런 이유로 프로젝트에 지원한 것도 아니었고, 캐스퍼의 윤리관은 분명히 좀 더 선한, 그러니까, 자신에게 처음 손을 내밀었던 그 아이처럼 인간의 측면에서 선한 쪽에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이 오래되었지만 분명하고 명확한, 중요하고 가장 쉬운 순간에 지워졌으리라 착각한 이 생각 뭉치는 자연스럽게 망각할 수 없는 그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와 펼쳐졌다. 가장 이상적인 행성의 발견이라 확신한 순간에.
"이번 행성은 정말로 이상적이에요. 토착 식물군이 기존 우리가 알고 있던 생물군과 너무나도 유사하고, 대기에 바이러스나 미소 생물체의 흔적이 존재하지는 않아요. 대기 환경도 운이 따라 준다면 답답한 마스크를 쓰고 다닐 필요가 없겠네요."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생물군이 없어 보이는데, 그럼에도 식물이 저렇게 번성할 수 있나요?"
새로운 팀원 중 한 명, 금발의 지리학자였나. 그가 캐스퍼를 향해 천진난만하게 질문을 던졌다. 캐스퍼는 길게 이어지던 제 생각을 털어내고 얼른 대답했다.
"가능성이 낮진 않아요. 곤충이나 조류 등을 매개로 하지 않는 번식 방법들이 비효율적이지는 않으니까요. 물, 바람...... 방법은 많죠. 하지만...... 식물만이 스스로 진화하여 행성 표면을 덮을 정도로 번성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조금 회의적입니다."
캐스퍼는 제 팀원들을 새삼스럽게 다시 둘러봤다. 캐스퍼는 이번 탐사의 팀 구성이 순전히 운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자신은 꽤나 운이 좋지 않다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때 마지막으로 만났던 인원들 중 그 누구도 겹쳐 깨어나지 않았고, 모두가 서로를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겪었던 처음의 팀원들은 모두 첫 행성 탐사로 능력을 증명한 사람들이었다. 언어학자, 숙련된 군인, 통신기술자...... 그들은 모두 이 프로젝트에 무엇보다 적합한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캐스퍼는 이 프로젝트를 달성하고 싶었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자격지심이자 그의 속한 적 없는, 하지만 분명히 가능성을 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자랑이었으니. 그는 여전히 새로운 팀과 행성을 탐사하고자 하는 의지로 매우 고무되어 있었고, 프로젝트의 성공에 있어 자신의 지식을 맘껏 펼쳐 보이고자 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나름 새 팀원들은 능력이 있어 보였다. 노벨 상을 받은 지질학자, 필즈 상을 세 번이나 수상하고도 필즈 상 후보에 거론되던 수학자, 그리고 가장 큰 제약 회사를 이끌던 CTO로 있던 약학자. 이런 사람들과 헬퍼스 봇의 도움이라면 이번 탐사도 문제 없이 가능할 것이라 의심되지는 않았다. 팀원들은 캐스퍼의 외형을 보고 꽤나 놀랐으나 캐스퍼가 미리 눈치채고 빠르게 제 소개를 하고 나서는 그나마 평범하게 대해 주었고, 캐스퍼가 제 지식을 줄줄히 뱉기 전에는 용감히 캐스퍼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그것이 무례한 행동임을 빠르게 인정했다. 이 정도면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취급이란 건, 생각보다 허들이 높다고 생각해 왔었으니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탐사는 정말 쉽겠네요."
"동의해요, 지각 활동이 관측되지도 않고, 무엇보다 외계 생물에 쫓겨 다니지 않아도 된다니 산책 나가는 기분입니다."
"다만 구름이 지표면의 반절 정도를 가리고 있네요. 심지어 거의 움직이지도 않구요. 대기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것일까요?"
다른 팀원들은 벌써 행성 지표면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고, 헬퍼스 봇은 그런 팀원들 사이를 거닐며 요청하는 모든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번 행성은 명백히 '쉬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불안 속에서 애써 괜찮은 척을 했던 이전 팀원들과는 꽤나 다른 분위기였다. 캐스퍼가 보기에도 이번 행성은 굉장히 비정상적으로 안전하고, 아늑하며, 걱정이 없는...... 낙원과 같은 곳이었다. 자세한 대기와 바다의 상태는 내려가서 확인해야겠지만, 헬퍼스 봇이 필터링한 지구형 행성이라면 대부분의 액체는 물이어야만 했고, 대기도 테라포밍 가능한 원소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었으니 실제로 보호복 없이 활동하게 될 날은 멀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리 길지 않은 논의 끝에, 모든 팀원들은 해안의 지표면으로 향하기로 결정하였고, 헬퍼스 봇은 별다른 말 없이 모든 팀원들을 내려보낼 준비를 했다.
행성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지평선의 끝에는 항성이 주행하며 아름다운 분홍빛 노을을 만들고 있었다. 탐험선은 행성의 반절을 덮고 있는, 경계가 뚜렷한 두꺼운 구름 아래에 착륙했고, 이내 헬퍼스 봇은 탐험자들이 밖을 나서기 전에 대기와 비, 땅의 성분 분석을 시작했다. 이 곳에 착륙한 이유는 두 가지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였기 때문인데, 첫번째는 행성의 환경이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므로 각 환경을 구분하여 평가하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행성의 반을 덮고 있는 구름이 유독 물질을 품은 비를 내리지는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대기는 질소 65%, 아르곤 0.2%, 이산화탄소 3%, 그리고 산소 21%로 구성되어 있는 호흡 가능한 공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표면 또한 유독 물질이 탐지되지 않았고, 온도는 조금 높네요. 29도 정도로 꽤나 후덥지근 할 것으로 예상돼요. 비 또한 대부분이 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위협에 대비해 다들 보호복은 잊지 말아 주세요.]"
헬퍼스 봇의 분석 결과는 예상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였다. 캐스퍼는 점점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이상적인 행성이 벌써 나타났다고? 이렇게나 넒고 광대한 우주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이렇게나 쉽게 발견된다고? 그렇다면 왜 우리 문명은 더 빨리 이주하지 못했을까? 무언가 함정이 있지는 않을까? 다른 팀원들이 탐사에 대한 기대로 들뜬 마음을 쉽게 감추지 못할 때, 캐스퍼만 불안감에 잔뜩 들뜬 제 털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질척하고 무른 땅의 감촉이 제 발을 통해 올라올 때도, 캐스퍼는 괜히 제 보호복을 꼼꼼히 다시 한 번 살피기까지 했다.
행성은 온통 빗방울이 웅덩이에 떨어지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리고 팀원들은 그런 캐스퍼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온갖 탐사 장비를 꺼내 여기저기 펼쳐 놓고 제 특기를 맘껏 펼치기 시작했다. 지질학자는 지반 활동 탐사를 위해 온갖 장치를 땅에 박고 있었고, 수학자는 태양광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자기장의 최소 수치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약학자는 성분 분석이라도 할 참인지 주변의 토착 식물군계의 샘플을 닥치는 대로 긁어 모아 제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었다. 캐스퍼는 잠시 동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예 잊은 사람처럼,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하늘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뒷덜미에 시선이 따가운 것 같았지만, 캐스퍼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안전해요. 이렇게 안정적인 지반 활동이라면 화산 활동이나 지진과 같은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아주 튼튼한 기반암이 마그마를 전부 막고 있어요."
"자기장도 최소 요건에 부합해요. 항성이 과다 활성 상태가 되었을 때를 기준으로 해도 지표면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못 할 거에요. 태양풍에도 안전합니다."
"식물군계에 유효 성분이 다양해요. 상비약은 물론이고, 항생제를 굳이 균계로부터 얻지 않아도 될 만큼 다양한 화합물을 찾을 수 있었어요. 이런 환경이라면 이런 약들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 같지만요."
"[온도가 크게 변화하지도 않았고, 드론이 살펴볼 수 있는 반경 500km까지는 아무런 자율 활동 생명체를 찾지 못했습니다. 위협 요소는 없다고 판단되어, 1차 탐사를 종료했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의견을 말하던 시점은 겨우 탐사가 시작된 지 16시간 남짓 된 시점이었다. 각자가 한 마디씩 뱉고 나서 캐스퍼를 바라보았지만, 캐스퍼는 굳게 입을 닫고 있었다. 캐스퍼는 채 보호복을 다 벗지도 못했고, 심지어 제 손에는 이제 막 채집해 온 씨앗들이 들려 있었다.
"캐스퍼, 당신 의견은 어때요?"
"저희 의견으로는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더 이상의 탐사가 필요할까요?"
캐스퍼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천천히 샘플을 컨테이너에 담고, 보호복을 천천히 벗어 떡진 제 털을 대충 쓸어 넘겼다. 그리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이게 최선인가요?"
캐스퍼의 한 마디에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캐스퍼를 바라봤다. 수학자만이 발끈해서 캐스퍼에게 따지기 전까지는.
"그럼 저희가 태만하다는 건가요? 솔직히 더 모을 수 있는 데이터도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다들, 이번 탐사는 처음이죠?"
"물론 그렇긴 한데 ━ "
"저는 두 번째 탐사입니다."
캐스퍼는 수학자의 말을 끊고 말을 이었다. 불쾌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캐스퍼는 자리에 앉아 설명을 계속했다.
"물론 두 번째와 첫 번째가 그리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이전 탐사는 비록 독립 생명체가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3일의 탐사와 수 많은 지형 탐사 이후에나 정착 가능성을 평가했습니다. 당시 행성도 이번 행성만큼 안전한 행성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겨우 몇 시간 동안의 탐사━ , 아니, 당신들은 밖에 거의 나가지도 않았죠. 몇 시간동안의 책상놀음으로 이 행성 전체의 위협 요소를 전부 파악했다고 확신하시는 건가요?"
금발의 지질학자가 반박하려 입을 열려 하였으나, 약학자가 그를 막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이 충분히 능력있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까? 저희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저희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어요."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해 보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할 수는 없어요."
"이전의 탐사 인원이야말로 태만한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자명한 사실을 3일이나 걸쳐서 겨우 결정했다는 게 더 이해가 안 가네요."
수학자가 노골적으로 분노한 표정으로 위협하듯 캐스퍼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캐스퍼는 저도 모르게 제 발톱이 날카롭게 삐져나오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야말로 여기서 유일하게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연구소 출신이라고만 했지, 당신은 실험체였던 걸로 보이는데요."
"저희는 모두 동등하게 평가받아서 선출되었습니다. H.E.S.C. 프로젝트의 모든 심사위원들이 당신들과 비교해서 더 부족하다고 생각되진 않는데요. 실험체요? 그래요, 실험체였죠. 하지만 당신들을 동면에서 깨운 그 기술이 누구의 손을 거쳤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 프로젝트 대부분의 생명공학 기술은 저희 연구소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모든 기술이 제 손을 거쳤어요. 그 무엇 하나, 사소한 디테일까지도 제 눈으로 확인했었습니다."
팀원들은 예상치 못한 사실에 당황한 듯 서로를 힐끗거렸다. 이런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겠지. 캐스퍼는 쓰게 웃었다. 왠 동물원에서나 볼 법한 인공 생명체가 그 창조주인 자신들보다 대단할 리 없다는 그 차별적인 생각은 예상했음에도 의도치않게 분노할 만큼 지겨운 것이었다. 그래, 인간 사회는 서로조차도 차별하는 그런 곳이었지.
"저 또한 당신들과 동일한 평가를 받고 프로젝트에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제 이전 팀원들도 분명히 동일한 평가를 받고 프로젝트에 합류했습니다. 여러분이 놓치고 있던 잠재적인 위협 요소 중에 무엇 하나 검증 된 것이 없어요. 왜 지표면의 50%가 가려져 있음에도 이렇게나 지표면 온도가 높은가? 대기 활동이 활발함에도 왜 구름이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구름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모된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이런 생각들은 저만 해 보았을까요? 아니요! 탐사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이야기했던 부분이고, 심지어 잊었다기엔 머릿속에서조차 너무나도 놓치기 힘든 주제입니다. 그럼에도 탐사를 완료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구요? 정말로 프로젝트를 완수할 생각이 있는 게 맞나요?"
캐스퍼의 분노 서린 말에 모두가 캐스퍼를 노려보았으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진 수학자조차도 감히 한 마디 하지 못했다. 모두를 말리려는 헬퍼스 봇을 밀어내고, 캐스퍼가 말을 이었다.
"방금 찾아낸 씨앗 샘플입니다. 이 씨앗들은 적어도 이 행성 시간으로 수년간 발아하지 않았어요. 이렇게나 풍부하고 적합한 환경인데 대체 왜 발아하지 않았을 지 고민하면서 돌아온 게 전부 거짓말같네요. 저만 그런가요?"
"우리가 겨우 이런 곳에서 썩으려고 프로젝트에 지원한 줄 아십니까?"
예상치 못한 말에 캐스퍼는 덜걱 멈춰버리고 말았다. 뭐라고?
"그래요, 우린 더 많은 것을 발견하고 기록할 의무가 있어요."
"저희같은 사람들이 이런 곳에서 멈추게 된다면, 전체 문명에서도 손해가 아니겠습니까? 저흰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어요! 더욱 위험한 행성을 테라포밍할 방법을 찾게 될 지도 모릅니다. 저희가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지 몰라요! 하지만 이 곳은 아닙니다."
저 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캐스퍼는 평생을 연구소 안에서만 지냈다. 물론 캐스퍼도 정보화된 지식으로서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명예와 지식욕만이 유이하게 중요한 자들.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사소한', '디테일' 따위보다는 연구자로서 해낸 일이 더 중요한 사람들. 지식은 늘어가지만, 막상 어디에 사용할 지 모르는 자들. 하지만 평생을 작은 연구소 안에서 살았던 캐스퍼는 이런 사람들을 겪어보지는 못했다. 그것이 그들의 말을 끊고 헛소리 하지 말라는 일갈하지 못한 유일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캐스퍼가 이해한다고 생각했는지, 끊임없이 헛소리를 읊어대기 시작했다.
"저의 약이, 이 분의 지질학적 경험이, 이 수학자의 계산이 이 곳보다 더 위험한 행성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꿀 수 있어요. 승선한 모두가 저희를 믿고 있을 겁니다! 저희가 지구에서 그랬던 것 처럼요!"
캐스퍼는 자신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오히려 무언가 잘 못 알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나 간단히 판단 될 일이라면, 나는 왜 이렇게 괜한 애를 쓰고 있는가? 캐스퍼는 갑자기 모든 것이 피곤해졌다. 이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역겹고 혐오스러워졌다. 캐스퍼는 저도 모르게 제 입을 막았다.
"......더 이상 이야기해봤자 소용 없겠네요. 그래요, 가도 좋아요. 제가 남을게요. 누군가는 남아야 하잖아, 그렇지? 헬퍼스."
"[네, 반드시 한 명 이상이 남아 문명을 발아시켜야 합니다.]"
"만약 이 곳이 충분히 안전한 곳이라면 제가 남을게요. 그렇게 떠나고 싶다면, 떠나도 좋아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조사해 주세요. 제가 안전할 수 있는 곳일지, 당신들이 남아도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곳인지. 그렇게만 해 준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 드리죠."
다른 팀원들은 명백히 불쾌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캐스퍼는 헬퍼스에게 계약 조건을 확실히 하고 그들을 지나쳐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눈물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슬펐을까? 자신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아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의견을 존중받지 못해서?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했어도 결국 이렇게 됐을 텐데. 다만 캐스퍼는 문명의 지속과 생명의 지속 사이에서 가늠질조차 하지 않은 그들의 선택이 황망했을 뿐이었다. 그는 갑자기 몰려온 피곤함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캐스퍼가 눈을 떴을 때는 벌써 노을이 져 버리고 있는 저녁쯤이었다. 헬퍼스 봇이 제 방 안에 막 들어온 참이었고, 밖에서는 엔진 추진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캐스퍼는 소스라치게 놀라 밖으로 나갔으나, 탐사선은 지구 호로 명백히 귀환하고 있었다.
"[캐스퍼, 제가 말려보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어요. 미안해요.]"
지금 보니 헬퍼스 봇도 성하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겉에는 식량 찌꺼기가 묻어 있었고, 기름 냄새도 조금 났다.
"헬퍼스...... 그들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들도 악의는 없었을 거에요. 다만 두려워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막으려 했지만 다른 분들이 귀환 프로토콜을 수동으로 실행하셨어요.]"
캐스퍼는 그들이 버리고 가듯 쌓아 놓은 테라포밍 셋을 바라보았다. 저번 탐사에서는 직접 같이 옮겼던, 눈에 익은 구조물들. 캐스퍼는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나는 여기에 버려지듯 남았구나. 그것도 타의로.
"......그럼, 정착에는 문제 없는 거지? 프로토콜이 정상적으로 실행만 되었다면......"
"[네, 모든 보급품은 전달되었습니다.]"
헬퍼스 봇은 천천히 캐스퍼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얼마간의 침묵 후에 말을 이었다.
"[제 메인 프로세스는 아직 지구 호에 있고, 이 아래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업로드 되어 모든 상황을 확인했습니다. 탐사자들에게는 비밀이었지만 저희는 이런 상황도 발생할 것이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해당 참가자들에게 알려지지는 않겠지만, 그들은 더 이상 탐사에 나설 수 없을 거에요.]"
"지금 위로하는 거야?"
"[맞아요. 아니기도 합니다. 위로를 목적으로 전달드린 사실이지만, 이런 걸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답니다.]"
캐스퍼는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헬퍼스 봇에 묻은 찌꺼기를 닦아내며 물었다.
"나도 탐사자인데 그런 걸 말해도 되는 거야?"
"[캐스퍼는 더 이상 탐사자가 아닙니다.]"
헬퍼스 봇은 단호히 말했다. 그럴 리는 없었겠지만, 그렇게 들렸던 것 같다.
"[캐스퍼는 이제 정착자에요. 이 곳이 바로 당신의 집입니다.]"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왔다"는 표현은 그 목적지로부터 떠났다가 다시 해당 장소로 귀소하였을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 누군가의 지적이 귀에 맴돈 것 같기도 하다. 한나, 그 언어학자였을까. 하지만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소하고 두렵기만 한, 그리고 외롭기만 한 행성이다.
캐스퍼는 그 말에 덜컥 멈춰 버렸다. 이 곳이 바로 여정의 끝이었다.
이제 그는 여기에 혼자다. 그만의 집에.
an afternoon in space ☂ starbound ost + rain sounds
낯선 세상에 와 있다는 건
욕망의 한 부분을 드러내
무던히 참았던 육신을 들어내는 일
시시해 보이는 창가 의자에 앉아
허물을 격려하지 못해 멀어진
사람들을 생각한다
잊어버린 주문처럼 쓸쓸한 이름
가끔 누군가도 나를 떠올리는
측은한 저녁이 올 테지
- 김명기, <강변여관>
행성은 고요했다. 비 내리는 하늘, 속삭이는 바람, 철썩이는 파도. 익숙해질만도 하건만, 캐스퍼는 이런 고요가 아직도 낯설었다. 이제 평생 살아야 하는 곳인데도 불안해 했고, 바라보는 이 없음이 분명하건만 이따금씩 놀라곤 했다. 헬퍼스 봇은 그런 캐스퍼를 걱정스럽다는 듯이 타일렀다.
"[캐스퍼, 조금 쉬는 건 어때요? 우리에게는 시간이 충분해요. 적어도 모든 구성원이 생성되고 나서도 모두가 먹을 식량이 3년치는 있어요. 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캐스퍼는 눈에 띄게 피곤한 얼굴로 노트에 계산식을 휘갈기다가 헬퍼스 봇을 바라보았다. 주변에는 비슷한 계산식이 적힌 종이가 무수히 떨어져 있었다. 캐스퍼는 자신이 무얼 계산하고 있는 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정확한 답을 얻은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확신할 수 없을 뿐이었다.
"내가 쓰러지면 나 대신 일 해 주는 거야? 그럼 그만 둘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물론 최선을 다 해 도와드릴 수 있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보조 인공지능이에요. H.E.S.C. 프로젝트 참가자만큼 똑똑할 수는 없답니다.]"
사실 헬퍼스에게 시킬 일은 거의 없었다. 지난 삼 일간 이미 테라포밍 세트는 모두 설치되어 우리에게 익숙한 식물군계가 자라고 있었고, 미리 프로그래밍 된 로봇이 모두가 살 수 있는 건물을 알아서 설치하고 있었다. 다만 사회의 구성원을 배양하고 자라게 하는 것, 그리고 그 구성원이 어떤 모습을 가지게 될 지 결정하는 일은 오로지 캐스퍼에게 달렸다. 사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고민할 필요 없이 버튼 하나로 기계를 동작시키기만 하면 됐을 일이었다. 하지만 이 곳은 캐스퍼의 집이었다. 캐스퍼가 살아갈 사회였다. 그러니 캐스퍼는 캐스퍼와 비슷한 이들로 채우고자 했다.
그렇기에 캐스퍼는 오히려 두려웠다. 아무도 캐스퍼가 어떻게 자랄지, 어떤 생명체일지, 어떤 식성을 가질지, 사회적인 구성이 어떻게 될 지 알지 못했으니까. 캐스퍼 본인도 본인의 미래를 엿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캐스퍼는 확신이 들 때까지 계산을 반복했다. 자신의 유전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동물들 중에서 어떤 동물과 가장 비슷할 것인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어떤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라날 것인가? 캐스퍼는 문득 자신의 '남매'들이 생각났다. 아직 캐스퍼가 이름조차 가지지 못하고, 언어조차 알지 못할 때, 그의 남매가 연구실을 뛰쳐나가 모든 이를 도륙낸 광경은 아직도 잊지 못하는 트라우마 중 하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만 나오는 왠 이상한 자장가가 자신을 '격리' 할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기술되어 있던 것도 그 때의 일 때문이었다. 캐스퍼는 그 때도 그렇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지 않았지만, 캐스퍼가 더 자라서 그의 '남매'들처럼 자랐을 때 그처럼 폭력적인 생물이 될까 두려웠다. 본능에 먹혀 자신들이 구축한 사회를 파괴하고, 서로를 상처입히고, 제 배만 불릴까 두려웠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피를 보는 것을 고민하지 않으며, 오로지 강자만이 살아남는 사회가 되는 것이 두려웠다. 자신의 '이성', 그리고 '친절'이 사실은 주입된 지식에 의한 것일까 두려웠다.
캐스퍼는 자신이 괴물일까 두려웠다.
이런 생각이 모두 부질없게도 계산 결과는 한결같이 비슷했다. 가끔은 고래가 되기도 하고, 가끔은 늑대가 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결과는 '인간'이었다. 캐스퍼는 인간과 비슷하게 자랄 것이다. 인간과 같이 사회를 구축하고, 다른 이들과 '협동'함으로써 살아남는. 캐스퍼는 이런 계산 결과가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물론 자신의 복슬거리는 앞발과 뾰족한 이빨, 그리고 제 트라우마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제 '이성'은 머릿 속에 지식이 주입될 때 같이 주입된 것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의심 때문이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캐스퍼는 드디어 펜을 놓았다. 그리고 제 옆의 모니터 위에 이미 전부 설정된 코드 위에서 천천히 깜빡이고 있는 커서를 옮겨, 제 유전자 서열에 조금의 무작위성을 부여하도록 설정하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에 맞춰 캐스퍼와 헬퍼스 봇 앞에 나열된 배양 기계들이 굉음을 내며 동작하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건, 캐스퍼와 닮은 가족들을 맞이할 집을 꾸밀 일이다. 하지만 그 전에 캐스퍼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비는 따듯하고, 어쩌면 시원하기도 했다. 무척이나 습한 곳을 털복숭이인 캐스퍼가 돌아다니기에는 매우 불쾌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그나마 불편한 보호복 대신 우비를 입고 온 캐스퍼는 문명을 빌려 입었으니 비를 쫄딱 맞고 정처 없이 헤메는 고양이 꼴은 면했다고 생각했다.
캐스퍼가 찾는 것은 이 비의 원인이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아무리 헬퍼스와 데이터베이스를 뒤져 봐도 자신이 아는 상식 선에서는 이런 기약 없는 비가 내린 적은 없었다. 두 달 동안의 장마가 내리는 지역은 물론 있었지만, 아무리 우기래도 단 한 시간도 멈추지 않고 내린 비는 기록이 없었다는 것이 더욱 확실해졌을 무렵, 캐스퍼는 아무래도 이 비가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도 더 기이하고 낯설다는 것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빗물에 아주 약간의 유황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걸리긴 했지만, 이 지역 어딘가에 화산이 있으면 당연히 가능한 이야기였으니 딱히 특이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더 이상한 점은, 이 곳의 식물들은 전혀 이 곳의 기후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맹그로브나 야자수와 같이 내수성이 뛰어난 식물군계도 아니었고, 지구의 침염수와 비슷해 보이는 나무들이 대다수였다. 습기에 강한 종류는 아니었다.
"헬퍼스? 괜찮겠어? 내가 괜한 부탁을 한 거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 줘."
"[괜찮아요, 캐스퍼. 저는 극한의 환경에서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답니다!]"
"그러다 고장나면 일은 또 내가 다 해야 하잖아."
"[여분 기체도 있답니다. 만약 기체를 회수하지 못했다면, 메모리 카드만 가져와 주세요.]"
캐스퍼는 질척이는 땅에 푹 꽂힌 제 앞발을 뽑아 털면서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비 때문에 무너진 지반이 또렷하게 보였고, 나무 뿌리가 전부 드러나 있기도 했다. 몇몇은 뿌리가 썩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식물 쪽으로는 특이한 경우를 알고 있는 게 적어서 그런데, 혹시 침엽수림이 이런 습한 기후에 번성할 수도 있는 걸까?"
"[이미 찾아보신 대로, 지구에서는 침엽수림이 습한 기후에 번성한 지역이 없습니다. 특별히 여기 나무들이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아요.]"
"그렇지? 그럼 최근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는 건데. 대기 활동이 활발한 행성은 아니었잖아?"
"[사전 조사 결과로서는 그렇습니다. 안정된 대기를 가지고 있었어요.]"
헬퍼스 봇을 손짓해서 부른 캐스퍼는 태블릿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헬퍼스 봇의 화면을 이리저리 만졌다. 이번 '팀원'들의 조사 결과, 계산 결과를 전산화해 놓은 게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이 빗속에서 다 젖은 종이뭉치를 알아보느라 낑낑대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이 행성의 3D 조감도를 살펴보아도, 이렇게 대기 성질이 급격하게 변화하거나 이동할 만한 요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기상학자가 아니라서 그런가? 캐스퍼는 이럴거면 연구소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걸 하고 후회했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열심히 한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
연구자로서의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어떤 의무감 때문인지 애써 억눌러 온 감정이지만, 사실 캐스퍼는 이 상황이 귀찮고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포기하고 싶었다. 팀원들이 그렇게 호언장담한 건 성급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모든 계산 결과에 결격 사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애쓰지 않아도, 그냥 제 꼬리나 가지고 놀면서 지내도 모든 것이 알아서 될 것이었다. 하지만 뭐랄까, 스스로는 과학자이고 연구자라고 생각하는 캐스퍼가 스스로 자존심 상할 말이기도 하지만, 무언가 이상한 감이 있었다. 정말로 무언가,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외치는 무언가가 들리는 것처럼, 생각만 해도 제 수염이 바짝 서는 그런 느낌. 짐승의 감이랄까. 스스로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웃겨서 피식 웃어버렸다.
그 순간 무언가, 저 멀리서, 굉음이 들렸다.
쿠우웅......
캐스퍼는 저도 모르게 펄쩍 뛰었다. 불안한 촉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가 이런 굉음을 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만, 하필이면 펄쩍 뛴 곳이 가파른 비탈길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헬퍼스 봇이 반응하기도 전에, 캐스퍼는 비탈길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야 말았다.
"[캐스퍼!]"
헬퍼스 봇이 급하게 제 로봇 팔을 휘적였으나, 그 시도가 무색하게도 캐스퍼의 우비 끝조차 닿지 못하고 허공만을 휘둘렀다. 헬퍼스 봇은 고민하지 않고 비탈길로 뛰어들었으나, 불행하게도 헬퍼스 봇의 기체는 경사로에 적합하지 않아 그저 같이 구를 뿐이었다.
캐스퍼는 제 입 안에 들어간 것을 켈록대며 토해냈다. 다행히도 비가 오래 내려 지면이 단단하지는 않았고, 그저 제 오른쪽 뒷발목을 제외하고는 멀쩡한 것 같았다. 구르는 동안 접지르기라도 했는지 오른쪽 뒷발목은 퉁퉁 부어 있었고, 디딜 때마다 새어나오는 신음을 막기 힘들었다. 문제는 캐스퍼 본인이 아니라, 헬퍼스 봇이었다. 그 무게 때문에 질척이는 땅 속 깊이 박혔고, 안 쪽의 지면은 여전히 단단했는지 카메라와 화면은 전부 박살나 있었고, 궤도 바퀴는 아예 떨어져 나와 있었다.
"[캐스퍼, 괜찮아요?]"
헬퍼스 봇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직대는 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새삼스럽게 캐스퍼는 자신이 헬퍼스 봇을 마치 사람처럼 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캐스퍼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꾸했다.
"아주 괜찮지는 않아. 이 기체는 이제 못 움직이겠네."
"[저는 괜찮습니다. 조사 결과나 주변 지형도를 저장한 데이터가 남아 있으니, 메모리 카드에 접근 가능하시다면 가지고 복귀하시는 걸 추천드릴게요.]"
캐스퍼는 익숙한 손길로 기체를 열었다. 다행히 안쪽은 꽤 멀쩡한 상태였다.
"그래, 그럼 나중에 봐. 이 기체는 나중에라도 회수해야겠네."
기체 안에는 작은 가방과 메모리 카드가 들어 있었다. 작은 가방은 이런 일이 있을 걸 대비해서 캐스퍼가 직접 넣어 둔 것이었다. 이럴 때면 이족 보행을 하지 않아 주머니 달린 옷을 입을 수 없는 제 몸이 참으로 귀찮았지만, 다행히도 문명은 이족 보행이든 사족 보행이든 공평하게 가방은 들고 다닐 수 있게 해 주었다. 캐스퍼는 온갖 관측 장비들이 들어 있는 큰 가방 옆에 작은 가방을 메고는 굉음이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 빗속에서도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캐스퍼는 다짐한 듯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그것은 거대한 구덩이였다. 아니, 크레이터라고 해야겠지. 캐스퍼는 빗물이 차오르기 시작한 크레이터를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명백히 인외적인 기하학적 모양의 크레이터가 진흙탕 위에 선명히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크레이터 가장자리에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존재가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타오르는 듯한 혜성을 닮은 머리카락을 가진, 두 발로 선 분홍빛 생명체가 캐스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캐스퍼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낮췄다. 분명 자율행동이 가능한 생명체는 없었을 텐데? 비구름 때문에 햇빛이 직접적으로 들지 않아 시계가 확보되지 않았다. 처음 마주하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이 순간 캐스퍼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왠지 이 모든 것을 설명해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 것이 아닐가 하는.
하지만 이 곳은 지구가 아니다. 말이 통할 가능성은 통하지 않을 가능성보다 훨씬 높고, 아무리 캐스퍼가 보통의 인간보다 자기보호가 뛰어난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캐스퍼는 단 한번도 누군가와 싸움은 커녕 말로도 다퉈 본 적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상대방이 먼저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기 멈춰. 알아 들을 리 없다는 거 알지만, 제발 멈춰."
상대방은 주춤하는가 싶더니, 무어라 말을 걸었다. 당연하게도 캐스퍼는 전혀 알지 못하는 언어였고, 캐스퍼는 어떤 몸짓을 해야 자신의 의향을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이, 상대방은 다시 천천히 다가왔다.
도망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잠깐 새에 발은 비로 진탕이 된 땅 깊숙히 박혀 있었음을 캐스퍼는 깨달았다. 제 발톱이 길게 뽑아져 나왔어도, 그걸 휘두를 수 없다면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 사이에도 상대방은 캐스퍼의 지척으로 다가왔다. 캐스퍼는 두려움에 눈을 질끔 감았다.
하지만 캐스퍼가 기다리던 고통이나 충격은 한참이 지나도록 발생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눈을 뜬 캐스퍼의 앞엔, 그 생명체가 고개를 숙여 캐스퍼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미안해. 내가 아는 사람들과 닮아서, 왜 그들이 여기 있는지 궁금했거든.>"
마치 자연스럽게 언어가 머릿속에 떠오르듯 무언가를 들었다. 아니, 상대방은 입을 달싹이지도 않았다. 캐스퍼는 지금 이 상황이 자신의 환청이나 환각이 아닌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발성 장치가 분리되어 있는 건가? 캐스퍼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당황하자, 상대방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언어를 지금은 잘 몰라서, 일단은 이렇게 이야기할게.>"
캐스퍼는 현재 대기나 제 입 안에 들어갔던 흙에 환각 유발 성분이 있었는지 분석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하지만 최근 며칠 간 상식적인 상황이 있기는 했는가? 아니, 자신의 존재부터가 상식적인가? 지구가 아닌, 어디인지 모를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행성에서 홀로 자신과 닮은 구성원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 이미 이상한 게 아닐까? 상대방은 캐스퍼가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제 손과 닮은 부속지를 내밀었다.
"<세나라고 불러 줘. 실례가 안 된다면,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
캐스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쩌면 자신과 닮은 방랑자를 찾았다는 생각과 함께.
이 빗속에서도 세나는 별로 젖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나무 아래서 캐스퍼가 축축히 젖은 제 꼬리를 쥐어 짜는 동안, 세나는 제 꼬리를 살랑이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캐스퍼를 바라보았다. 캐스퍼는 그 시선이 무언가 연구소에서 자신이 처음 마주한 시선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연구소 사람들보다, 자신과 더 가까워 보였다. 털복숭이 손과 얼굴, 그리고 쫑긋 솟은 귀와 꼬리까지. 세나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것처럼, 캐스퍼도 세나에게 물어볼 것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캐스퍼가 세나를 힐끔거리며 살피던 걸 알아차렸는지, 세나는 제 턱을 괴고는 캐스퍼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물어봐도 될까? 여긴 아직도 비가 오네.>"
"......."
캐스퍼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는 고개를 마주 끄덕였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물어볼게. 집은 어디야?>"
집이 어디냐니, 마치 길 잃은 어린아이에게나 할 법한 질문이다. 하지만 캐스퍼는 이 질문이 뜬금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캐스퍼는 길을 잃었다.
"해안가가 보이는 곳입니다. 여기서 그리 멀지는 않겠네요, 제 걸음이 너무 빠르지만 않다면......."
"<멀지 않아? 혹시, 여기에 집이 있는 거야?>"
세나의 말에 캐스퍼는 조금 고민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심지어 어떤 종족이며 어디서 온 지도 모를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정보를 주어도 괜찮은 것일까? 캐스퍼는 그 말 끝에 원래 다른 곳이 집이었는데, 이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다. 캐스퍼의 대답에 세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제 손 위에서 부양하는 하늘빛 판을 매만지다가, 질문을 이었다.
"<그럼 만약 무언가를 떠나보내야 한다면, 그 장례식은 어떻게 할 거야?>"
캐스퍼는 이 질문은 정말로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그는 장례식에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다. 주변의 누군가 죽은 적은 있었지만, 장례식이 어떤 곳인지 말해주거나, 가르쳐 준 사람도 없었다.
"저는...... 장례식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누군가 죽는다면 집 주변 어딘가에 묻고 기억할 수 있는 비석을 세우겠죠. 제가 아는 바로는 그래요."
"<소박하네.>"
"원래 있던 곳에서는 좀 더 성대하게 하기도 한다고 알고 있지만, 아무도 가르쳐주진 않았어요. 그런 걸 배우거나 참석해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거든요."
"<보통은 그렇지. 장례가 잦은 게 좋은 일은 아니니까.>"
세나가 다시 판을 매만졌다. 무언가 기록하는 것도 같았다. 캐스퍼는 이제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했다.
"그런 건 왜 물어본 건가요? 외딴 다른 행성에서 처음 본 생명체에게 물어볼 만한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그게 내 일이거든.>"
캐스퍼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더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세나는 무언가 생각하듯 제 판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무언가 고민하는 걸까 싶어 한동안 침묵했지만, 세나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캐스퍼는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너무나도 많았으나, 지평선 끝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캐스퍼는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나,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솔직히 말해주지는 않겠지만, 행성을 차지하거나......."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리 오래 있지 않을 거거든.>"
세나는 캐스퍼의 마음 속을 꿰뚫고 있다는 듯이 재빨리 말을 끊었다. 마치 익숙한 질문을 받은 것 같았다. 세나는 고개를 돌려 분홍빛 노을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저 이 곳을 다시 보러 왔을 뿐이야."
세나는 한동안 노을을 지켜보았다. 마치 그리운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캐스퍼는 세나가 입을 열고 제 언어를 말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자신도 모르게 같이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저 평범한 노을일 뿐인데, 그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일까? 하지만 캐스퍼는 고개를 털었다. 어두워지면 탐사는 물 건너 간 일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캐스퍼는 한 시라도 빨리 탐사를 이어나가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캐스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질척한 땅의 감촉이 다시 느껴졌다.
"미안해요, 먼저 일어나 볼게요. 더 어두워지기 전에 둘러볼 곳이 많거든요. 저를 해치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캐스퍼의 농담에 세나는 작게 미소지었다. 그리고선 세나는 같이 일어나고선, 캐스퍼의 우비 끝을 살짝 잡았다.
"방해가 안 된다면, 나도 같이 가게 해 줘. 난 여전히 네가 궁금하거든."
캐스퍼는 그 말에 잠깐 고민하는 듯 했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노을은 그 새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캐스퍼가 가져온 손전등이 얼마나 오래 버텨 줄 수 있을까? 캐스퍼는 시간이 없었고, 말이 통하는 미지의 존재보다 물어볼 수 없는, 존재할 지 모르는 '집'에 대한 위협이 그에게는 더욱 큰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캐스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비구름의 가장자리에서는 명확히 판별할 수 없었으나, 그 한복판으로 들어가자 바람의 방향은 점차 명백해졌다. 마치 이 곳으로 오라고 손짓하듯 끊이지 않는 바람에 잔뜩 젖은 꼬리가 얼어붙을 듯 삐걱거리기 시작할 즈음, 점점 빛을 먹어버린 어둠에도 눈이 익어 습기에 썩어 가는 나뭇잎의 윤곽이 보이고, 끓는 듯한 대기는 이젠 언제나 곁에 있었듯 걸음을 방해하지 못한다. 물론 타고난 신체에도 불구하고 짧은 평생동안 운동이라고는 전혀 않고 연구만 해 댄 캐스퍼는 여전히 혀를 내밀고 헐떡였지만.
"......힘들지 않아요?"
캐스퍼는 제가 뱉은 물음이 어이없는 물음임을 알았다. 우주 멀리에서 맨 몸으로 떨어진 이 미지의 생명체에게 덥고 어두움이 무엇이 문제겠는가? 세나는 잔뜩 뛰어다닌 강아지마냥 혀를 잔뜩 빼고 헥헥대는 캐스퍼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네가 더 힘들어 보여. 조금 쉴래?"
세나는 고개를 흔드는 캐스퍼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캐스퍼는 잔뜩 흙투성이가 된 제 앞발을 그 무결한 손 위에 올리길 거부했다. 무안해진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세나는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구름이 지평선 위에 걸쳐 있다. 이미 세나는 캐스퍼가 걱정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네가 원한다면, 이 곳에 문제가 생겼을 때 안전한 곳으로 보내줄 수 있어. 내가 지내는 곳이라던지......."
캐스퍼의 귀가 쫑긋이는 걸 본다. 캐스퍼는 명백히 고민하고 있었다. 캐스퍼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문명을 일으켜 세울 정도로 대단한 누군가가 아닐 거라는 자각. 대단한 명예나 칭송이 아닌, 그저 자신의 집을 찾는 여정을 위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이. 캐스퍼는 지쳤고, 제 몸을 편히 누일 곳이 절실했다. 갑자기 떨어지는 소행성이라던지, 화산 폭발, 지진, 홍수의 걱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더 이상 미지의 한 가운데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캐스퍼는 이런 사실도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아는 곳이라고 해서 그 곳이 그의 집이 되진 못 했다. 그는 이미 가장 익숙하고 잘 아는 곳을 뛰쳐나온 이니. 캐스퍼는 이제 다름을 지각하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그 곳은 세나와 같은 사람들만 있는 곳인가요?"
"아니, 나보다는 너와 더 비슷한 사람들이 있는 곳."
"하지만 그 곳은 제 집이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집이 될 수 있어."
집이란 무엇일까? 작은 우리와 같은 곳이지만 의식주가 보장되는 곳인가? 넓고 쾌적한 장소지만 언제 들이닥칠 지 모르는 미지의 생명체들을 걱정하는 삶을 사는 곳인가? 평생 발 붙이고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떠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한 지구를 떠나 수 백년을 잠들어 있다가 발을 딛은, 낯설고 낯익은 행성에서 만난 외지 생명체를 믿고 떠날 미지의 다른 행성계인가? 캐스퍼는 발걸음을 멈추고 막막한 마음이 떠오른 제 눈을 감추려는 듯이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어려워야 할까. 언제까지 이렇게 떠돌아야 할까.
"......짐승들조차 집이 있는데, 저는 집이 어디인지조차 알 수가 없어요."
세나는 그런 캐스퍼에게 감히 눈을 돌릴 수 없다. 같이 가자고 했던 그 자신조차 집이란 얻어본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다.
"편안하고 평온해야 할 집이 저에게만 없는 것 같아서 두려워요. 매일 눈을 뜨는 곳이 낯설고, 심지어 이젠 내가 아는 별자리조차 없는 곳이네요. 이 광활한 우주 안에 내 집이란 게 있는 걸까요? 어쩌면, 그 곳은 이미......."
없어졌을 텐데. 돌아갈 곳조차도.
세나는 캐스퍼 옆에 무릎 꿇어 앉는다. 눈물조차 긴 시간에 말라버렸을, 가엽게도 떠도는 방랑자. 캐스퍼는 여전히 방랑자였다. 그리고 세나는 그 수없는 시간을 앞서 겪었다. 감히 말을 얹을 수 있는 존재로서 말을 잇는다.
"<집>이 한 곳에만 있을까. 어디든 내 발 닿는 곳이 내 집이오,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오래 떠돌다 보니 모든 눈 감는 곳이 집이네. 하지만 그랬던 것도 예전이고, 이젠 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곳이 생겼어. 친구가 있고, 가족이 있고,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 곳. 매일 기나긴 잠이 끝나고 폐허만 남는 걸 보지 않아도 되는 곳.
집은 마음이 머무는 곳이지. 마음이 거기 있어 눈을 감아도 생각나고,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곳. 몸을 뉘일 곳은 많지만, 마음을 뉘일 곳은 단 한 곳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곳."
세나는 그 시작도, 본질도 다르지만 제 길을 걷던 방랑자에게 손을 내민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불현듯 느꼈다. 세나는 '멸망'을 탐독하러 왔기 때문에. 제 연구 주제를 읽으러 왔기 때문에.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할 캐스퍼가 세나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긴다.
거대한 크레이터 아래는 마그마가 술렁인다. 조각된 석재 사이 타다 만 기록물이 거센 바람에 펄럭인다. 기록물이 채 삭아버리지도 못한 폐허가 구름의 진원지였음을, 캐스퍼는 믿고 싶지 않아 눈을 가린 제 앞발에도 그 충격을 다 가리지 못해 보고야 만다. 분명 문명이라고는 없을, 새로운 행성이라고. 그것도 새롭게 발생한 행성이라고, 겨우 독립 생물체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확신하고야 말았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조금만 더 조사했다면 밝혀낼 수 있었을까? 그들을 협박하고 겁박해서라도 이 곳까지 훑었어야 했던 걸까? 생각과 후회가 몰아치고, 미끄러운 땅은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이를 단호하게 넘어트린다. 장비 가방에서 튀어나온 온갖 장비들에 진흙이 묻어 흐트러지는 걸 막을 새도 없이 캐스퍼는 땅 위에 엎어졌다.
"안 돼......."
세나는 그런 캐스퍼를 안타까운 눈을 바라보다, 장비들을 하나 둘 주워 진흙을 닦아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캐스퍼를 달래 세우고, 장비 가방 안에 제가 알지 못하는 장비를 하나하나 다시 주워담았다. 그 또한 여행자가 아닌 집을 찾는 방랑자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늦게 깨달아 버린 탓에, 감히 세나는 원망 어린 시선을 감내하며 캐스퍼에게 자신이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세나는 행성의 죽음을 애도하러 왔으니.
"......이거 받아, 캐스퍼. 하려던 걸 해."
캐스퍼는 세나의 손길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벌벌 떨리는 앞발로 진흙이 아직 묻은 장비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몇 번이나 놓친 전지를 연결해 관측 장비를 작동시켰다. 미지의 존재에게 기적을 바란 것일까, 화면을 바라보던 캐스퍼는 절망한 표정으로 세나를 올려다본다. 분명 태양풍을 충분히 밀어냈을 자기장 수치는 떨어진 수준조차 못 되어 이미 붕괴된 수준이고, 자전축도 크게 기울었다. 그 순간에도 지표면으로 드러난 행성의 내부는 들이찬 물을 꾸준히 증발시키고 에너지를 잃어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행성 내부의 대류는 곧 멈출 것임이 자명해 보였다. 이미 이 곳의 물은 거의 밀려나갔지만, 채 녹지 않은 암석층을 녹이면서 다시 한 번 굳어갈 것이다.
세나는 구름이 걷혀 가는 하늘 위로 더 많은 것들을 본다. 걷힌 구름 위엔 거대하게 날뛰는 항성 활동은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고, 이미 밀려난 자기장 아래로 태양풍에 관측 장비가 오작동하기 시작했다. 이미 판별하기 힘든 화면을 뒤로 세나에게서 눈을 뗀 캐스퍼는 하늘 아래 긴 꼬리를 가진 것들의 추락을 보았다.
캐스퍼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질 못 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는 듯 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소용돌이쳤다. 그 생각 하나하나를 설명하기조차 벅찰 정도로. 이내 세나가 캐스퍼를 흔들었다.
"캐스퍼."
고개가 사정없이 꺾일 정도로 몇 번이나 흔들린 뒤에야 캐스퍼는 정신을 차렸다. 달리는 데에 방해가 되는 온갖 장비들은 그 자리에 내던지고는 베이스 캠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늦지 않았어. 가능한 최고 수준의 방비를 하면 돼. 정말 그럴까? 작은 피해는 있겠지만, 우리 기술이라면. 정말로, 그럴 수 있을까? 캐스퍼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벌써 철렁 내려앉은 심장으로 무리를 하려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혹시 모른다는 희망과 압도적인 절망이 심장을 쥐어짰다.
하지만 뒤늦게 알아차린 재앙은 작은 생명체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헬퍼스 봇의 메인 메모리는 캐스퍼의 주머니에 들어있었고, 수많은 여분 기체들은 그 메모리 없이 구동될 수 없었다. 수많은 건물, 생명 장치, 밭...... 모든 것은 아무도 없던 땅에 떨어진 불의 비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캐스퍼는 끊어질 것 같은 의식을 겨우 유지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제 앞발로 눈물이 터져나오는 얼굴을 마구 헤쳤다.
"......나한테는 집조차도 과분했네."
진흙으로 엉망이 된 젖은 얼굴에 흙탕물이 되어 버린 눈물이 흘렀다. 목 놓아 울지도 못하고, 평생을 제 가슴 안쪽에 삭힌 울분에 그저 흘린 눈물만 닦이지 않을 손으로 연신 닦는다. 자신은 결국 영원히 이방인으로서 떠돌다가 죽는구나. 내 마음이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캐스퍼."
하지만 세나는 단호하게 캐스퍼를 일으켜 세웠다. 캐스퍼는 힘이 풀린 뒷발로 겨우 몸을 지탱한다. 막무가내로 닦은 눈물 사이 제 발톱에 찢긴 눈가의 상처에서 흐른 피가 시야를 가린다. 세나의 손길이 조심스레 캐스퍼의 시야를 밝힌다. 세나는 캐스퍼와 눈을 마주쳤다.
"새로운 집을 짓자.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캐스퍼는 그 말에 눈물 어린 눈망울에 세나를 담는다.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걸까? 캐스퍼는 세나의 눈동자에서 답을 구한다. 어쩌면 전해졌을 지 모를 동질감이 몸을 감싼다. 약속은 아니었지만, 세나는 제가 뱉은 말에 책임을 지고자 했다.
"집에 가자, 캐스퍼."
그 말에 캐스퍼는 세나의 손을 잡는다. 다시 한 번 집을 떠나는 캐스퍼는 깊은 꿈을 꾼다.
집에 가는 꿈이었다.
Snail's House - Lumiukko
얼마나 떠나기 싫었던가!
얼마나 돌아오고 싶었던가!
낡은 옷과 낡은
신발이 기다리는 곳
여기,
바로 여기.
- 나태주, <집>
서걱한 눈 밟는 소리가 나무 사이에 울린다. 연기가 피어 오르는 가까운 크레이터는 아직 채 진동이 가시지 않았다. '가깝다'의 정의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이는 발화자의 능력과 의지에 달린 것이다. 모든 단어는 모두 발화자의 의지와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생각이 있어 언어가 생겼다.
언어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하여 모든 언어가 표현되는 하나하나의 작은 생각들이 없던 것이 되는 게 아님을 이제는 안다. 캐스퍼는 몸을 뒤집은 세나 안에서 나온 뒤에도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눈 밟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언니이이이! 어디 갔다 왔어요오오!]"
저 멀리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캐스퍼는 알지 못하는 언어. 세나는 자연스럽게 캐스퍼에게 어디서 났을 지 모를 작은 바구니를 쥐여 주었다. 달콤한 냄새, 바그락거리는 소리. 무어라 부를 지 알 수 없었지만, 캐스퍼에게는 언제나 '쿠키'일 것이 든.
작은 아이는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나를 닮은 모자를 쓴 아이가 제 꼬리를 바짝 들고 눈을 헤치고 걸어 오고 있었다. 세나는 멍하니 선 캐스퍼의 등을 두드린다.
"<가자. 집이 될 곳으로.>"
캐스퍼는 세나가 작은 아이를 들어올리는 것을 본다. 천천히 걷는 그 발자국 끝에, 집이 있을 것이었다. 캐스퍼는 집을 향해 걷는다. 마음을 둘 곳으로.
아래로는 짧은 후기글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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