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왕사

✶4 Secrétum (3) (23.11.21 재업)

계약(1)|현판AU

ESAVIR by Riv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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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이모지와 같은 'ㅍ ㅍ' 모양을 한 녹색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던 베른은 조용히 로봇을 내려두고 빠르게 숨었다. 아니 전원 버튼 같은 것도 없이 켜진 데다가 목소리도 전화 통화처럼 자연스러운 인간 목소리잖아!!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을 마주했을 땐 빠르게 피해야 하는 법이다. 적어도 수 세기 동안 베른 세크리티아는 그렇게 살아왔다.

-…하…

나직한 한숨 소리. 베른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기척 없이 움직여 로봇의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골치 아픈 상황을 마주한 것처럼 머리-로 추정되는 부분-를 짚은 모습이 마치 사람 같았다. 너무 사람 같아서 기분이 더러웠다.

‘…아저씨… 저 로봇… 그거 같지 않아요?’

‘그거?’

‘그, 우리 돌아오기 전에요.’

칼리안이 떨면서 한 말에, 그제야 이 이해할 수 없는 께름칙함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인간만한 크기의 검은 로봇. 마주치는 인간은 죄다 죽이고, 파도처럼 몰려드는 것들이-

‘…로봇이 많이 싫어진 모양인데…’

베른은 열심히 싸웠다. 칼리안을 업고, 평소엔 잘 꺼내지도 않는 순백의 검을 꺼내 붉은 오러를 입혀서 달려드는 것들을 족족 베었다. 등에 업은 칼리안만은 안전하게 지키려고. 프레이야 씨랑 약속했으니까. 칼리안을 지키겠다고…

하지만.

‘칼리안, 우리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그때 그것들은 검고, 인간만 했잖아.’

저 로봇은 작다. 고양이만 하다. 동그란 원통형 몸체에 인간의 팔이 있을 곳에 얇은 로봇 팔이, 인간의 얼굴이 있을 곳에 검은 패드가 달린 하얗고 작은 로봇일 뿐이다. ……인간처럼 행동하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만 빼면.

‘모든 로봇을 경계하면 나중에 세상 살기 힘들어. 세상에 로봇이 얼마나 많은데.’

‘…아저씨는요?’

‘응?’

‘아저씨는 로봇 괜찮아요? 전, 이제 알았지만. …무서운데.’

아이의 순진하고 진솔한 걱정에 말문이 턱 막혔다. 베른은 제 감정이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며 조심조심 생각을 전했다.

‘아저씨는… 경험 많아서 괜찮아. 그 정도로 무서운 게 생기면 인간들 사이에서 못 살았지. 우리 꼬맹이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이 제일 무서워. 뭐든 조심해야 하는 법이야.’

‘……다행이에요.’

‘그치. 그럼 저거부터 어떻게든-’

-나와.

아이를 겨우 달래기가 무섭게 시린 겨울날 묵직하게 자리를 지키는 고목처럼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른은 다급하게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오러를 준비했다.

-하… 부국장 이놈은 뭔 짓을 했길래 외부인을 불러들여.

부국장. 저건 분명히 정보가 제한됐다는 그 부국장이 아니라 아르센 헤르츠를 이르는 말임이 틀림없었다. 부국장을 놈이라고 불러? 로봇 맞나? 아니 그보다, 대체 어떻게 아르센 헤르츠와 관련되어서 들어왔다는 걸 알아차린 거지? 칼리안이 숨을 멈추고-영혼도 숨을 쉬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리를 죽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새기며 베른은 저 로봇을 박살 낼 준비를 끝마쳤다.

- 《 인테르디티오 》

―분명한 마력이 움직이기 전까진.

흐릿한 연녹색 마력이 팔다리를 붙들었다. 몸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오러로 빚어낸 날카로운 검이 쨍그랑 바닥을 구르며 떨어지기 직전에 모래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오러… 소드 마스터인가. 몇 명 없는 걸로 아는데.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로봇이 몸을 숙여 살피듯 움직이지 못하는 베른에게 다가와 얼굴-로 추정 이하생략-을 들이밀었다.

-테일란 카스트린,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 시오나 힐, 베른 세크리티아. 그걸 넣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에반 브리센과 그레이 브리센도.

“…!!”

-그중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은 없는데…

로봇이 갸웃하듯 얼굴-이하생략-을 흔들었다. 하지만 베른에겐, 그리고 칼리안에겐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베른 세크리티아의 이름이 곧바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그 이름에 반응했다는 사실을 들킨다면 정체를 들키는 것은 한순간이리라는 확신에 가까운 직감에 베른은 최대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래, 여기까진 이상하지 않다. 오러를 봤으니까. 소드마스터의 이름을 나열하는 건 이상하지 않지. 베른이 소드마스터라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긴 하지만, 아르센 헤르츠를 '놈'이라고 부를 정도의 녀석이라면 아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칼리안인가? 그 애가 잘 자랐다면 이쯤일 것 같은데. 외모도… 나이도.

근데 이건 뭔 편견 없는 계산이지?

진정하려고 온갖 힘을 다 쓴 머리가 다시 팽팽하게 돌아간다. 뭘 어떻게 해야 소드마스터의 이름을 읊다가 이제 막 열네 살이 된 막내 왕자의 이름이 나오는 거야? 흑발적안의 외모 때문에? 세상에 흑발적안이 한 명만 있는 것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평범하게 자란 왕자가 검을 배우고 오러를 깨우쳤으리라는 생각을 누가 하냔 말인가!

이건 절대로, 로봇일 수 없었다.

베른은 최대한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노력은 했다.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칼리안까지 당황한 상황이 맞물려서 무용한 일이었지만.

“왜 여기 계십니까!!”

그런 베른을 구원한 것은, 몇 시간 들었다고 귀에 익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르센 헤르츠.

“제가 이 짓 하지 말라고 안 했습니까?? 한 번 더 말릴 기회는 주셨어야죠. 그 몸으로, 이렇게 말 하나 없이…!”

-부국장!!

찢어지듯 아픈 목소리가 노한 기색을 아낌없이 흩뿌리며 울려 퍼졌다. 아르센 헤르츠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커다란 목소리가 벽을 타고 여전히 울렸다. 부국장, 부국장, 부국장

-지금 그게 중요한가.

“……”

-카이리스, 발칸 본부 1급 기밀 연구실에 외부인이 들어왔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 거냐고.

있으나마나한 이모지 얼굴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저 어마어마한 분노를 표현한 건 목소리 뿐이었으니까. …아니, 저 '인간'은 실제 얼굴로 저만큼의 감정을 드러내기는 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므로 베른은 누가 봐도 심각하게 치닫는 분위기 속에서 눈치 있게 조용히 있는 것을 택했다. 칼리안 역시, 본인의 목소리가 남들에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데도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아르센은 질끈 눈을 감고 사과했다. '인간'은 로봇의 몸이면서도 머리가 아픈지 머리를 부여잡는 시늉을 하다가 녹색 LED 얼굴을 돌렸다.

-…그래. 나도 미안. 더 늦으면 시도도 못할 것 같아서.

“그럴 만 한 상태셨지요.”

-그럼, 저쪽에 대해 얘기해볼까.

'인간'은 순식간에 끓어 넘치던 감정을 정리하곤 주변을 잠시 살피다가 베른이 나왔던 그 문으로 다가갔다. 아르센 헤르츠의 개인 집무실에서 대화를 진행하리라는 것이 너무나 훤해서, 아르센과 베른은 동시에 눈을 질끈 깜빡이고는 느리게 그 뒤를 따랐다.

“왜 나오셨습니까.”

“…미안합니다. 밖의 모습이 들어올 때랑은 달라진 것 같아서.”

“상냥한 분이시니 별거 아니면 오늘 제게 하신 것처럼 화내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아니,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시는 것도 거의 없지만요…”

“…그렇군요.”

“왕자님에 대해 알리실 생각은 없으신 게지요.”

아르센의 물음에 베른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알리고 자시고.

“……이미 들킨 것 같던데요. 거의 모두 다. 제 본명도 불렸고 이 몸의 이름까지 불렸습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들키는 건 어차피 시간문제인 사안이니까요. 중요한 건 왕자님께 숨길 의사가 있으시냐는 거죠.”

“가능하다면, 네. 숨기고 싶습니다. 대체 저 사람 누굽니까?”

“천재요. 숨길 생각 있으시다면 그대로 그냥 잡아 떼십시오. 저까지 말 안 하면 그냥 수긍하고 넘어가 주실 겁니다. 어지간한 게 아니면 비밀을 캐묻는 분은 아니시니까요.”

“……수긍의 개념인 겁니까.”

“그쪽으로는 최대한 언급도, 생각도 안 해주시는 것일 뿐이…니…… 아니 잠깐, 그거 어떻게 여신 겁니까!!”

아르센은 벌컥 열린 제 집무실을 보곤 서둘러 뛰어갔다. 정신 없이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베른은 문득 떠오른 의문점에 고개를 돌려 엉망이 된 연구실 내부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로봇의 몸으로 마법은 어떻게 쓴 걸까.”

로봇의 몸으로 정신-아마-을 옮긴 건 어떻게 한 거고, 그래도 로봇이니만큼 전원을 눌러야 켜질 텐데 어떻게-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군. 베른은 짧게 한숨을 내쉬곤 서둘러 하얀 문 너머로 넘어갔다.

로봇을 상석에 올려두고 베른-과 칼리안-을 그보다 덜한 상석으로 안내하고 자신은 말석에 앉은 아르센 헤르츠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두 분 모두, 의심할 필요 없고 수상한 사람 아닙니다.”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았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겠다.

-……그래.

“……그래요.”

“그럼 두 분이 서로 자기소개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제 재량으로 소개해 드리면 싫어하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르센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느리게 찻잔 가장자리를 쓸어내던 베른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카파, 혹은 베타. 둘 중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그리스 문자의?”

“그렇죠 뭐.”

-…그럼 그때그때 끌리는 쪽으로 부르지.

“안 헷갈리게 조심하십시오. 전 이곳에선 카파라고 부르겠습니다. 다음,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로봇에게서 깊은 한숨이 나왔다.

와, 저 한숨 왠지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베른은 공감하는 의미에서 작게 웃었다. 부하-아마-가 번잡한 틈을 타 놀리려고 시동을 걸고 있으면 당연히 머릿속이 복잡해질 것이다.

-L.

“…L이요?”

-문제 있나.

이쪽도 두 글자 짜리 짧은 가명을 제시했지만 돌아온 가명은 그의 절반 정도로 짧았다. K, L, B… 읽는 방식만 다를 뿐 결국 근원은 같은 가명을 이어본 베른이 경계하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그냥, 그럼 우리 그리스 문자로 통일하는 게 어떤가 해서요.”

-굳이. 한다면 그쪽이 더 효율적일 텐데.

“그냥 생각만 해봤어요.”

베른은 싱긋 웃었다. 사람은 자고로 아름다운 것에 약하기 마련이니, 저 너머의 사람이 누구든 칼리안의 미모로 웃는 것에는-칼리안은 부끄러운 듯 안으로 숨어들어 갔다- 넘어갈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쪽이 K(케이) 혹은 B(비)로 바꾸는 쪽이 발음 상 효율적이라는 짧은 말은 모르는 척 넘어갔다. 사회에서 너무 많이 쓰는 알파벳을 가명으로 사용하는 건 귀찮아질 가능성이 높으리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쪽은 상관 없을 것 같아서 굳이 바꾸라고 얘기하지 않았지만, 소드마스터의 감이란 것은 제법 신빙성이 높은 정보의 일종이니.

-…그래.

잠시 침묵하던 L이 느리게 다시 목소리를 냈다. 스피커 안 달려있던 것 같은데 소리는 어디서 나오는 거지, 쓸데없는 부분에서 발휘된 호기심이 잠시 L의 말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발칸의 부국장이다.

“소리는 어, ……예?”

-지금은 마법 공학을 통해 내 정신을 옮긴 상태고.

“그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누구도 예외 없이 정보 제한하라고 하신 게 누구신데요.”

-불편하니까.

아르센의 불만스러운 질문에 L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폭탄을 떨어트린 사람답지 않은 평온한 목소리였다. 베른은 그 평온함과 반대되는 헛웃음만 지었다. 모르면 불편하다-는 그 말은 물론 틀린 건 아니겠지만, L은 자신의 직위를 말하는 것으로 베른이 그의 말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왕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데다가-이건 아직 L이 완전히 확신한 건 아니겠지만- 기밀 연구실에 허가 없이 들어갔다가 딱 걸렸던 이쪽으로서는 왕자와 동일한 명령권을 가지고 있는 발칸 부국장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아마 이미 이쪽의 상황을 전부 눈치채고 미리 서로의 위치를 확실히 하고자 한 것이 틀림 없었다. 아르센 헤르츠가 보증한다고 말할 만한 이가 부군단장의 권리에 대해 들었으리라 추측하는 건 한순간에 침입자의 정체를 눈치채낸 저 머리엔 식은 죽 먹기인 일일 테니까.

그런 입장에서, 베른은 그저 기다란 한탄을 삼켰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딴 생각 안 했지. ……그랬어도 넘어갔겠지만.

-그럼… 이렇게 된 거, 부탁 하나 하지.

“…부탁이요?”

-나랑 계약하지 않겠나.

감정을 알 수 없는 건조한-그냥 LED 빛에 이런 표현을 써도 될까는 모르겠다- 얼굴이 베른을 보았다.

-당신이 일을 해결할 때까지 도와주면, 나는 당신을 시스파니안이 있는 곳에 데려다주는 계약.

시스파니안의 이름이 왜 나오는 거야.

베른의 눈이 커졌다.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당황이 새 나오는 그 눈을 보면서도, L은 여전히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플란츠 룬 카이리스가 자신의 정보를 모두 백업해둔 곳을 아는데.

칼리안이 조심스럽게 보는 것이 느껴졌다. 베른은 불만을 가득 담아 손을 주먹 쥐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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