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뭉이 이야기

루키모 by 루키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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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뭉은 평범한 강아지였다. 눈처럼 하얀 털에, 얼굴에 난 꽃잎같은 무늬, 색이 바랜 듯한 뾰족 솟은 정수리 털 말고는 누가 보아도 평범한, 품종이랄 것도 없이 제멋대로 태어난 작지만 튼튼한 시골 강아지였다. 마찬가지로 시골개인 어머니와 자신을 복제한 듯 똑닮은 수많은 형제들과 함께 모여 낮잠을 자던 평화로운 삶의 강아지였다. 어린 루뭉에게는 그런 세상만이 전부였다. 하지만 작은 사건 하나가 그의 견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루뭉의 모든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작은 사건은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에 발생하였다. 어린 루뭉은 인자하지만 형편은 좋지 않았던 주인아저씨로부터 형제들과 함께 베른 골목시장에 내놓아지게 되었다. 이런 신세도 모른 채, 루뭉은 배불러 잠든 어머니와 형제들 사이에서 바구니 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마주하는 세상, 루뭉의 동그란 눈이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곧 루뭉은 사람들의 발에 채이는, 그렇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홀로 걸어다니는 이상한 체리를 보게 되었다. 형제들 중 유독 겁이 많았지만 그 겁을 누르는 호기심이 더 왕성했던 어린 루뭉은 잠자는 형제들 사이로 바구니 틈을 박박 긁어대었다. 원래부터 살짝 찢어져 있던 낡은 바구니 틈이 살짝 벌어진 순간, 흰 털이 매끄럽게 눌리며 루뭉은 그곳을 빠져나오게 되었다. 낯선 세상에 첫 발을 내딛은 루뭉은 그렇게 형제와 어머니, 그리고 주인아저씨를 등지고 예의 그 체리를 향해 작은 코를 킁킁거리며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사람들 발에 채여 넘어진 채 쫄쫄 울고 있던 체리와, 북극곰 같은 작은 귀에 작은 눈, 아직 아기 티가 나는 루뭉. 그것이 그들의 첫만남이었다.

대화는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둘은 잘 맞았다. 울던 체리를 핥아서 위로해주고, 일으켜 세우고는 함께 해가 지도록 신나게 뛰어놀았다. 잡기 놀이를 하면 늘 체리가 잡히거나 혹은 루뭉을 잡지 못해서, 계속 졌지만 상관없었다. 둘은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루뭉은 발이 느린 체리를 등에 태우고 함께 사람들 사이를 내달렸다.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무서웠지만 체리가 있어 즐거웠다. 지칠만큼 뛰어놀은 루뭉은 해질녘이 되자 슬슬 돌아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안녕, 또 봐. 하고 체리를 과일가게 가판대 아래에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못내 아쉬운 듯 돌아보았다. 특이한 냄새니까, 또 만날 수 있겠지. 어서 돌아가서 엄마랑 형제들에게 오늘의 재밌던 일을 이야기 해야지! 하며 신난 루뭉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러나 체리와 헤어진 뒤, 해질녘 시장을 달려 주인아저씨가 있을 곳으로 되돌아간 루뭉은 텅 빈 공터를 마주하게 되었다. …엄마? …얘들아? 아우우, 하고 불러보아도 그곳엔 어떠한 냄새의 흔적도 없이 정말 아무도 없었다. 주인아저씨의 냄새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럴수가,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하지? 절망하며 엎드린 루뭉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훌쩍이며 낑낑거릴 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냐, 냄새가 어딘가에 남았을 거야! 불현듯 솟아오르는 용기에 바로 모든 신경을 후각에 집중하고는 공터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아무 흔적도 찾지 못해 다시 절망하고, 다시 용감하게 일어나 냄새를 맡고, 다시 절망하고를 반복한 루뭉은 지쳐있었다. 끼잉…. 시간이 흘러 어두워진 사위에 루뭉은 공터 한복판에 웅크리고 몸을 말았다. 기다리면 아저씨가 돌아와서 데려갈 지도 몰라, 엄마도 내가 없어졌다고 주인아저씨께 호소할 것이고.. 아니면 어쩌지. 다들 나같은 건 잊고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절망적인 상황에 나쁜 생각으로 잠식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루뭉은 훌쩍거리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나가지 말걸, 형제들과 있을걸…. 공터가 루뭉의 끼잉 소리로 가득 찬 그때였다. 어두컴컴한 공터의 모래를 밟는 소리가 빠르게 나더니 그것은 순식간에 어린 루뭉의 눈앞에 다가섰다. 둥근 몸에 나른한 듯이 웃고 있는, 낮에 루뭉과 함께 놀던 체리였다. 토동…. 토동…. 흐물흐물 뻗어나온 작은 체리의 손이 루뭉의 코를 토닥였다. 마치 괜찮다는 듯이 루뭉을 쓰다듬던 체리는 루뭉이 눈물 범벅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그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

루뭉은 체리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괜찮으니 웃어보라고 위로하는 따듯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루뭉이 울음을 그치자 다시 루뭉의 코를 토동토동 쓰다듬은 체리는 팔을 둘러 루뭉을 끌어안았다. 어머니도 형제들도 주인아저씨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루뭉은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더는 혼자여서 무섭지 않았다. 체리가 있어서 다행이다. 루뭉은 자신을 둘러안은 체리의 온기를 느끼며 지친 눈을 스르르 감았다. 춤을 추느라 지친 체리는 그런 루뭉이 잠에 들 때까지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며 곁을 지켰다.

그 다음날, 또 그 다음날에도 루뭉의 주인아저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장의 과일가게 아주머니가 내다버리는 과일을 주워와준 체리와 함께 그것을 나누어 먹으며 공터에서 주인아저씨를 기다린지 3일째 되는 날. 루뭉의 가족을 함께 기다려주던 체리가 별안간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루뭉을 한 번 뒤돌아 보고는 그대로 뚜벅뚜벅 공터를 걸어나갔다. 어디가는 거야? 체리를 쫓아 일어난 루뭉은 체리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를 따라 잡았다.

“@#@%$*”

체리의 말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표정에서 루뭉은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됐어. 우리가 찾으러가자.’ 물론 루뭉이 제멋대로 해석한 내용이겠지만, 어쨌든 체리는 그렇게 말하는 듯 하였다. 우물쭈물하던 루뭉은 결심한 듯 눈썹을 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와 형제들은 내가 찾으러가면 언젠간 만날 수 있을거야. 둘이 함께라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루뭉은 체리를 따라 공터를 빠져나갔다. 얼마 못가 루뭉은 발이 느린 체리를 위해 자신의 등에 타라며 체리를 향해 엎드렸고 체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루뭉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그리곤 기특하다는 듯이 루뭉의 머리를 통통 쓰다듬었다. 위대한 모험의 시작이었다.

루뭉은 체리와 함께 베른의 이곳 저곳을 떠돌며 둘만의 모험을 하였다. 때로는 굶고, 때로는 배부르고, 때로는 몬스터에게 쫓기거나 비를 맞기도 했지만 매일매일이 모험이었고, 함께 있어 즐거웠다. 지칠 땐 서로를 의지하며 기댔고, 맛있는 음식이 생겼을 땐 나누어 먹었다. 낯선 거리의 생활은 체리가 있어 루뭉또한 금방 적응해 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루뭉은 달랑거리던 수제비 귀가 어디로 갔냐는 듯 뾰족하게 우뚝 선 청소년 개가 되었다. 집을 찾아 돌아가야겠다는 목적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체리와 함께 먹을 것과 즐거운 일을 찾아다니는 일상의 모험이 루뭉에겐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날. 무더운 여름, 폭염이 내려앉았다 비가 오는 며칠이 이어지고 있던 날이었다. 단짝인 둘의 모험은 이런 궂은 날씨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

“왕!”

비가 오면 시들시들해지고 기운이 없어지는 체리를 루뭉이 지켰다. 신기하게도 자유자재로 크기가 늘었다 줄었다 하는 체리는 이런 날씨에는 가장 작아진 모습으로 루뭉의 털 사이에 숨었다. 조금이라도 뽀송한 털로 자리를 옮기며 체리는 비가 그칠 때까지 시름시름 앓았다. 루뭉은 비가 올 때마다 나가서 뛰어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늘 친구의 곁을 지켰다. 아픈 체리를 혀로 핥아주기도 하고 콧바람을 쐬어 주기도 하며 체리의 기운이 돋기를 바랐다.

그 날은 베른 남부 어딘가의 낡고 버려진 오두막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루뭉의 젖은 털이 겨우 마르는 사이 폭풍우가 한 차례 더 몰려오려고 하는 듯 했다. 체리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여긴 먹을 것도 남아있는 데다 비가 새어 들어오지 않으니 루뭉은 하루밤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다고 생각했다. 루뭉은 털을 파고드는 체리를 코로 한 번 툭 건드리고는 몸을 웅크렸다. 오늘은 이대로 여기서 잠을 청하려고 하던 루뭉이었다. 그때였다.

“사이… 좋아 보이네요. 서로 떨어지기 싫은 것처럼 말이에요.“

낡은 오두막의 어둠 속에서 의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루뭉이 벌떡 일어났고 그 반동으로 체리가 루뭉의 털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무력하게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둘이 한 번도 떨어져 본 적도 없을 거고. 근데, 이건 정체가… 아하하, 여기 있으면 안 될 것이 있네요.”

그 웃음을 끝으로 손짓 한 번에 가련한 체리는 공중을 날아 어두운 공간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투명한 누군가가 들어서 집어던진 듯이. 이럴수가. 체리가 사라졌어! 놀란 루뭉의 눈이 커지며 절로 깽, 하는 소리를 내었다.

“어머나, 그러니까… 강아지. 정말 작고 하찮군요. 온몸을 떨고 계시기까지. 훗, 가여워라.”

상냥한 듯 싸늘한 목소리였다. 루뭉은 시선이 자신에게로 옮겨짐을 느꼈고 겁에 질려 온 몸을 발발 떨고 있었다. 체리를 대체 어떻게 한 걸까. 어디로 갔을까. 눈 앞에 이건 사람일까…?

“…그 아이를 찾고 싶나요?”

거대한 존재 앞에 작아진 루뭉은 그 의문의 목소리에 고개를 단 한 번,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변덕을 좀 부려볼까요? 도움을 드리죠. 대신 직접 찾아야 한답니다.”

그 존재가 가볍게 손짓하자 바깥에서 부는 폭풍이 오두막 속으로 전부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 폭풍에 휩쓸린 루뭉은 휘몰아치는 기류에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공중을 떠돌던 빛 덩어리들이 그 존재의 손짓에 하나 둘 씩 루뭉의 온몸에 휘감겼다. 그리곤 루뭉이 까무룩 정신을 놓은 순간 체리처럼 어떤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모두가 사라지자 폭풍이 잠잠해지며 어둡고 낡은 오두막에는 앙칼진 웃음소리만 가득 울려 퍼졌다.


“어, 언니!! 봤어? 영지에 강아지가 있었어!“

저택을 뒤흔들며 소란을 떠는 소레토의 두 손에는 풀이 한 포기씩 가득 들려있었다.

“강아지? 뭐… 있을 수도 있겠지.”

무심하게 대답하며 다시 읽던 잡지로 눈을 돌리는 레티레이는 이런 사소한 이슈에는 관심이 없었다. 강아지라니. 그게 뭐 어쨌다고? …시시하게.

“여기는 섬인데 어떻게?! 유기견일까?”

“글쎄….”

귀찮은 듯이 대답을 흘리는 레티레이에 소레토가 서운한 표정으로 바짝 다가섰다.

“관심없오? 굶어죽으면 어떡해….”

입술을 죽 빼고 왕방울 눈으로 올려다보는 소레토의 얼굴. 그리고 유독 그 얼굴에 약한 레티레이는 조금이라도 성의있는 대답을 해보려 머리를 굴렸다.

“…배, 배고프면 알아서 나오겠지. 아니면 저택의 누가 데려왔던가….”

강아지를 같이 찾는다는 선택지는 최대한 배재한 채, 소레토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조심히 흘려보는 레티레이의 잔머리에도 불구하고 소레토는 창문 밖에 달려가는 강아지를 왕방울 눈으로 바라보며 소리쳤다.

“어! 저기 간다! 거기 서-!!”

그리곤 누구보다 빠르게 방을 나가 강아지를 쫓아 복도를 내달렸다.

“내버려 두라니깐! 얘!! 소레토!!”

늘 부주의하고 넘어지기 일수인, 지금도 강아지 말고는 뵈는 게 없어보이는 소레토가 다칠까 봐 레티레이는 읽던 잡지도 접어두고 소레토를 따라 방을 뛰어나왔다.

“…천천히! 뛰지 말라니까! 다친다고!”

빠르게 복도를 내달리는 소레토의 뒤를 쫓아 잔소리를 뱉어내는 레티레이의 두 눈엔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소레토의 뒷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 듯 오로지 앞만 보며 달리고 있었다. 소레토는 이윽고 재빠르게 방에서 본 저택 뒤쪽에 있는 정원에 도달하였고, 강아지가 들어간 풀숲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이, 이쪽으로 갔었는데. 어라..?”

“헉, 헉… 바보소레토…!”

그 재빠른 발을 바짝 따라붙어 겨우 쫓아온 레티레이는 전혀 말을 듣지 않는 소레토를 원망하는 듯한 눈으로 노려보며 가쁜 숨을 토해내었다. 언니가 내뱉는 어떤 잔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엎드려 바닥을 살피던 소레토가 돌연 꽥 소리를 질렀다.

“저깄다! 귀가 풀숲 밖으로 삐져나와있어! 너는 이제 독 안에 든 쥐라구~!”

사냥감을 발견한 육식동물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던 소레토의 몸이 일순간 날아, 풀숲을 덮쳤다.

“죄-죄송합니다아!! 사람인줄 몰랐어요!!”

“괘…괜찮아요…!”

풀숲을 덮쳐 마구 껴안던 손을 만세하며 들어올린 소레토가 연신 사과하였다. 루뭉은 낯선 사람과의 낯선 스킨쉽에 식은땀만 줄줄 흘릴 뿐이었다. 겨우 짜낸 인간의 언어는 제법 그럴 듯하게 사과를 받아주는 말이 되었다.

“히잉, 강아지인줄 알고 쫓았던게 사람이었다니….”

강아지 맞는데, 루뭉이 속으로 삼키는 말은 아무래도 아무도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근데 뭐야?! …누구니, 넌?”

이어서 소레토를 향해 화를 내던 레티레이가 그대로 시선을 옮겨 루뭉을 바라보며 뒤늦게 물었다. 그 기세에 눌린 루뭉은 하마터면 딸꾹질을 할 뻔 하였다.

“루, 루뭉이라고 합니다….”

루뭉은 옛날 옛적, 주인아저씨가 지어주셨던 이름을 인간의 언어로 겨우 발음하여 자신을 소개 하였다. 루뭉, 루뭉… 맞아, 나는 그때 인간의 언어로 루뭉이라고 불렸었어. 속으로 상기하며 루뭉은 변명처럼 자신이 이 곳에 있는 이유까지 덧붙였다.

“길을 잃어가지고….”

“얘 엄청 땀 흘리고 있어.”

태연한 척 했지만, 겉으로는 티가 나는 듯 했다. 하지만 곧 긴장이 풀렸는지, 식은 땀을 흘리며 어색하게 서 있는 루뭉의 배에서 다 무너져 가는 판잣집 소리가 났다.

둘은 고맙게도 배고픈 루뭉을 위해 만찬을 차려주었다. 야외 만찬장에서 셋이 이른 저녁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저 멀리 영지선착장에 큰 배가 들어왔다. 이윽고 분주하게 사람들이 배에서 내리기 시작하였고 마지막으로 내린 제법 큰 키의 남자는 망설임 없이 셋이 있는 만찬장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가까이 다가오자 초저녁의 어둠이 조명 아래 걷히고, 깊게 눌러쓴 모자 아래로 그 얼굴이 드러났다. 다가온 남자는 이 영지의 영주 루키모였다.

“어머! 다녀오셨어요~!”

가장 먼저 알아보고 반긴 것은 소레토였다.

“늦었네?”

뒤이어 인사는 눈짓으로 대신한 레티레이가 가볍게 안부를 물었다.

“…일이 있어서.”

언제나 그렇듯, 성가신 일이 생겼다는 것을 한 문장으로 축약해버린 루키모는 그것에 대해 별로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했다. 시선을 피하던 그의 눈에 두 사람 사이에서 정신없이 구운 닭다리를 물어뜯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그런데, 흠…. 못보던 녀석이 있군.”

“루뭉이라고 한대! 영지에서 발견했어!”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는 루뭉을 대신해 소레토가 발랄하게 소개하며 말했다. 그 발랄한 소개에 겨우 루키모의 존재를 깨달았는지 루뭉이 크게 눈을 뜨며 루키모를 바라보았다. 놀란 동그란 눈에 비친 낯선 사람의 모습에 빵빵한 두 볼에 홍조가 피어오르는 듯 하였다. 곧 루뭉은 입 안에 가득 찬 음식을 열심히 씹어 삼키기 시작하였다.

“…영지에서?”

아무나 올 수 없을텐데…? 다소 바보같은 그 모습에도 아랑곳 않고 잠시 심각한 얼굴이 된 루키모가 루뭉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요즈족인가. 그래, 환영술을 쓰는 요즈족이라면 이곳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도 있겠지. 그리고 루키모는 곧 루뭉에게서 어떤 힘도, 악의도 느껴지지 않자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로 하였다.

“안, 안녕하세요! 잠시 신세지게 되었습니다…!”

입에 남은 음식을 마저 꿀꺽 삼킨 루뭉이 뒤늦게 벌떡 일어나 식은땀을 흘리며 정중하게 인사하였다.

“아아, 신경 안쓰니까 편하게 식사하도록.”

괜히 식사를 방해한 기분에 루키모는 휙휙 손사래를 치며 루뭉을 다시 앉혔다. 모자를 벗고 머리를 쓸어넘기며 적당히 구석 자리에 의자를 끌어온 루키모는 요리사 하이드에게 와인 한 잔을 요구하며 자리에 앉았다.

“감, 감사합니다..!”

타이밍을 놓쳐 뒤늦게 감사인사를 하는 루뭉의 손에는 어느새 새로운 닭다리가 들려있었다.

정말 잘 먹는군…. 며칠 굶었나? 루키모는 신기한 눈으로 벌써 닭 한 마리와 디너 플레이트 세 접시를 비운 루뭉을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았는지, 요리사 하이드를 보며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드는 루뭉에 하이드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 음식을 내어왔다. 그와 상반되게 이미 디저트까지 먹고 그릇을 물린 레티레이와 언제 가져왔는지 모르게 스케치북을 가져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소레토, 세 사람이 모두 대비되어 보였다.

“그러니까, 걸어다니는 딸기 처럼 생긴?”

“아이여해이애여(아니요 체리예요)”

입이 가득 찬 상태로 다급하게 대답하는 루뭉이었다. 입에 제법 큰 고기뼈를 물고있어 알아듣기 어려운 루뭉의 말을 소레토는 용케 알아들은 듯 했다.

“역시 몬스터일까? 어때 언니?”

혹시 짐작가는 바가 있는 지 자신보다 월등하게 경험이 많은 레티레이에게 소레토가 물었다.

“발이 달린 과일이라.. 그런게 있었으면 영지가 난리가 났겠지.”

레티레이는 얼토당토 않은 소리라며 고개를 저었다.

“크기가 늘었다 줄었다하고.. 손발이 달린 체리.. 그려봤는데 어때? 비슷해?”

“으으읍!”

식탁에 엎어져서 열심히 그리던 그림을 내민 소레토의 작품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하마터면 입에 든 음식을 모두 뿜어낼 뻔 한 루뭉이 황급히 입을 가리며 상체를 물렸다.

“…끔찍하군.”

구석에서 와인을 마시며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루키모도 나지막하게 감상평을 말하였다. 놀란 숨을 들이켰던 레티레이도 손을 내젓고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나 네가 이럴때마다 페이튼에서 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

“그곳에 대한 기억은 없는데도….”

레티레이의 말에 소레토가 우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였다. 아차하는 표정의 레티레이는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누르며 눈알을 굴렸다. 소레토는 금방 괜찮아졌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고는 어떠냐는 듯이 그림을 들고 루뭉을 바라보았다.

“무, 무서워요….”

음식을 다 삼킨 루뭉이 눈을 내리깔며 작게 말하였다. 바라보고 있으면 식은땀이 흐르는 대단한 화풍이었다.

“응. 그럼 이건 아닌걸로. 새로 그려볼게!“

발랄하게 스케치북을 넘긴 소레토가 다른 특징도 알려달라며 다시 크레파스를 손에 들었다.

“음, 으음…. 체리는 두개가 아니라 하나구요…. 꼭지엔 이파리가 없어요. 그리고 늘 나른하게 웃고 있어요. 몸은 둥글고.. 음~ 아주 예뻐요. 손은 통통하고, 발은 손보다 훨씬 작아요. 뺨은 몸통보다 좀더 더 빨개요.”

소레토의 그림에서 수정해야 할 부분을 상기하며 우물쭈물 체리의 생김새를 묘사하던 루뭉의 눈이 점점 빛났다. 묘사하는 말의 속도도 점점 빨라지며 볼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지금 이 순간, 루뭉은 체리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어서 찾아야해…. 그렇게 생각하며 루뭉은 소레토의 거침없는 손놀림을 기다렸다. 소레토의 두 번째 그림이 공개되기 전, 레티레이는 아예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어때?!”

“아, 아까보다는 닮은 것 같…아요!”

루뭉이 식은 땀을 흘리며 대답하자 그림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던 레티레이도 힐끔거리며 그림을 보았다. 아까랑 크게 달라진 것 없이 여전히 끔찍하다고 생각한 레티레이는 그만 참지 못하고 ’풉’ 하고 웃었다. 그게 신호가 되었는지, 세 명의 여성이 일제히 그림을 보며 깔깔대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자신은 전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 왁자지껄해진 분위기에 마지막 남은 와인을 입 안에 털어넣으며 루키모 또한 픽 웃었다.

“…밥은 어느새 다 먹었군. 잠 잘 곳은 있나?”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며 다 마신 잔을 정리한 루키모가 넌지시 물은 질문에 레티레이가 즉시 대답하였다.

“아 그거. 지금 저택에 도저히 방이 없어서, 아빠 방에서 자라고 했어. 괜찮지?”

“…하.”

당연한 듯한 레티레이의 태도에 어이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쉰 루키모를 보며 루뭉은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았다. 왠지 이곳에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 신세지겠습니다아….”

삐질거리는 식은 땀을 흘리며 눈치보는 루뭉에게 루키모는 다시 괜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정말 괜찮냐던 루뭉을 자신의 방에서 재우고, 집무실 소파에서 팔짱을 끼고 잠든 루키모가 선잠에서 깬 것은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역시 백이가 없으면, 깊게 잘 수 없군. 그가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깔았을 때,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발치에 웅크리고 있는 작고 하얀 강아지였다.

"……?"

루키모는 의아한 듯 한참동안이나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강아지의 뒷목을 살짝 잡아 들어올렸다. 놀라서 반쯤 열리던 눈이 잠에 취한듯 다시 감기고,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루키모는 자신의 무릎 위에 강아지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온기를 나누며 털을 쓰다듬는 손길은,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체리를 찾게 될 때까지 며칠 동안만 지낼 줄 알았던 루키피디아의 사람들이 사실은 체리를 찾고난 루뭉은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대로 같이 살자며 루뭉을 붙들었다. 모두 좋은 사람들인데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매일 먹으니 행복했던 루뭉은 알겠다고 수줍게 대답하였다. 대신 체리를 찾으면 같이 살고 싶다고 말했다. 루키피디아의 사람들은 기꺼이 둘이 함께 지낼 방을 만들어 주었다. 어서 체리를 찾고 싶어. 체리와 함께 이곳에서 살고 싶어. 목표를 다잡는 루뭉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는 듯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불타는 루뭉의 의지와는 다르게, 다시 체리를 만나게 된 것은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둘의 재회는 루키모의 심부름으로 이 대륙, 저 대륙을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던 루뭉이 그림자 달 시장에서 체리를 먼저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시 만난 체리는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시장 바닥 가장자리 가판대 아래에 사람들의 발에 채여 넘어진 채 쫄쫄 울고있는 상태였다. 주의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고 그냥 지나치기 쉬운 위치였지만, 루뭉은 그것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체리를 다시 만난 루뭉은 그만 다리가 풀릴 뻔 하였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루뭉이 체리를 잽싸게 들어올려 소중하게 꼬옥 끌어안고는 가까운 마술가게의 비밀 공간으로 쏙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다락방에서 루뭉은 그렁그렁한 얼굴로 체리를 들어 보았다. 드디어, 드디어 체리를 만났어! 루뭉은 감격한 채 주저앉아, 체리를 다시 와락 끌어안으며 크게 소리쳤다.

“나, 나 루뭉이야! 갑자기 사람이 됐어! 나, 체리가… 너무, 정말로, 보고 싶었어! 으아앙…. ”

루뭉은 너무 감격한 나머지 체리를 끌어안고는 흐느껴 울며 어깨를 들썩였다. 얌전히 안겨있던 체리는 조용히 팔을 뻗어 사람인 루뭉의 턱을 토동 토동 두드렸다. 익숙하고 그리운 그 토닥이는 손길에 루뭉이 눈물 범벅인 얼굴로 체리를 보자, 체리가 내려달라는 듯이 버둥거리며 팔을 휘저었다.

“@#…. @%$*#!”

“앗, 힘들지! 미안…!”

루뭉이 서둘러 눈물을 닦으며 체리를 바닥에 내려놓자 루뭉을 멍하니 바라보던 체리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였다. 맞아, 예전에도 이렇게 춤을 춰서 나를 위로해 줬었는데. 루뭉은 문득 떠오르는 옛날 생각에 살풋 웃었다. 체리는 제자리에서 한참을 신나게 빙글빙글 돌다 별안간 우뚝 멈추고는 루뭉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

루뭉은 울다 웃는 얼굴로 체리를 보며 갸웃거렸다. 루뭉은 체리와 다시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좋기만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펑!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일순간 체리에게서 뭉게뭉게 짙은 연기가 뿜어져나왔다.

“꺄악!”

갑작스러운 큰 소리와 이상현상에 놀란 루뭉이 만세를 하며 뒤로 나자빠지고, 짙은 연기 뒤에선 검은 인영이 일렁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지?! 상황 파악조차 하지 못한 채 눈을 꼭 감은 루뭉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때였다. 짙은 연기 사이에서 새하얀 사람의 손이 뻗어나와 떨고 있는 루뭉의 손을 부드럽게 마주 잡았다. 자신의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쥐는 따듯한 촉감에 힐끔 눈을 뜬 루뭉의 눈 앞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루뭉의 손을 잡은 것은 긴 생머리의 분홍색 머리칼을 가진, 루뭉과 똑같이 생긴 얼굴의 소녀였다. 그 소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미소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곤 루뭉의 손을 감싼 두 손으로 안심하라는 듯이 루뭉의 손등을 토닥였다. 가만히 미소지은 채로 루뭉을 빤히 바라보던 소녀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드디어 만났다. 히.”

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지금은 명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건 체리의 목소리였다.


( 재회 후 루키피디아에서 소일거리를 하며 살고 있는 루뭉과 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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