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하나] 어느 날, 옆집에 카에데라는 남자가 이사 왔다

2023.06.11 루카와 카에데x사쿠라기 하나미치 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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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백절을 기념하여, 후기를 제외한 본문 전체를 약 일주일 간 무료 공개합니다.

▮안내사항

※본 회지는 타임리프 소재를 다룹니다.

※하나미치보다 10살 이상 연상인 카에데가 등장하나, 연상인 카에데와 미성년자인 하나미치 사이에 섹슈얼한 묘사는 최대한 없도록 주의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다루는 소재 및 시점으로 인해 원작의 진행을 직간접적으로 언급하는 에피소드가 몇 있으며, 이로 인해 아직 원작을 완독하지 못하신 분들께는 뜻하지 않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주의해 주세요.

※반대로,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미래의 카에데)가 등장함에 따라 원작과는 다른 전개가 일부 존재합니다. 해당 사항이 불편하신 분들은 구매를 재고해 주세요.

※원작에서 하나미치가 사는 건물은 일본에서는 보통 '아파트'라 불리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단어에서 오는 나라별 인식 차이를 고려해 첨언 없이 '맨션'이라고 표기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01. 어느 날

소란한 아침이었다. 어슴푸레 밝아온 빛이 엷은 감색을 덧입은 것을 보면 아침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때인지도 몰랐다. 모호한 시간의 경계 속에서,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이제 막 눈을 뜬 참이었다. 퀭한 눈가에 잠기운이 흠뻑 어려있다. 한 번, 두 번. 느릿느릿 여닫히던 눈이 빛이 들어오는 자리로 향한다. 창을 지나 머리맡을 겨우 비추던 것이 차츰 어둠을 덮어가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날이 밝아오는 걸 지켜보기를 한참, 눈이 부실 즈음에야 사쿠라기는 흐리멍덩한 정신을 가다듬고 제대로 된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었다.

해가 떴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이는 자명한 사실이다. 두 번 되짚을 것도 없는 명제에서 의심할 구석은 없다. 그런데, 왜…….

“아직도 들리는 거냐고오…….”

흡사 낮은 비명과도 같은 말이 방바닥을 굴렀다. 투정이라고 봐도 좋았다. 바닥을 기다 못해 금방이라도 땅을 파고들 듯한 목소리 끝이 잔음을 남기며 길게 늘어졌다. 애꿎은 베개 양 끝을 감싼 사쿠라기가 손에 쥔 것을 안쪽으로 한껏 구부려 귀를 틀어막는 시늉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환청처럼 들려오던 소리가 날이 밝고도 귓가를 떠나지 않고 있는 탓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나 긴 시간 자신을 괴롭힌 것인지 사쿠라기는 알지 못했다. 다만 자정을 넘어간 어느 새벽, 벽 너머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소음이 그를 꿈과 현실의 경계 사이에 던져두었다는 사실만은 쉬이 떠올릴 수 있었다. 들려온 소리는 낯설다기에는 익숙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이 내는 것이 분명한 소리, 혹은 흔히 ‘생활 소음’이라 일컬어지는 특별할 것 없는 소리. 이런 것들에 낯선 이가 몇이나 될까. 적어도 자칭 바스켓맨 타칭 풋내기 사쿠라기 하나미치를 괴롭혔던 입부 첫날의 드리블 환청보다야 익숙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농구부에 정식으로 입부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그에게 이는 어찌 보면 당연했지만.

그런 사쿠라기가 기억하는 첫 소음은 크게 숨을 삼키는 소리였다. 놀란 듯, 어쩌면 악몽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한껏 공기를 들이마시는 소리가 얇은 벽을 지나 잠든 그의 의식 표면을 두드렸더랬다. 가끔, 아주 가끔, 깨어있는 동안 신경줄을 갉아먹었던 소리를 자는 내내 환청으로 듣곤 하는 그로서는 그 역시 환청의 일종이라 여겼다. 혹은 착각이거나. 그도 그럴 게 소리가 들려온 옆집은 세 든 사람 하나 없이 텅 빈 지 오래인 빈집이었으니까.

세월을 고스란히 맞아 삐그덕대는 낡은 맨션에서 유독 사람이 들어오지 않던 집. 사쿠라기의 기억 속에서 단 한 번도 집으로서의 기능을 한 적이 없는 집. 그 흔한 문패 한 번 걸린 걸 본 적 없는 곳에 저도 모르는 새 누군가 살게 되었을 리는 없잖은가. 설령 사쿠라기의 예상과 다르게 누군가 살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간 어떤 소음도 들려오지 않다가 오늘만 소란한 것은 이상했다. 이는 얼추 잠기운을 몰아낸 사쿠라기가 제법 그럴듯한 근거까지 붙여가며 내린 결론이었다. 그 자신의 추리력에 속으로 연신 감탄했으면서도, 날이 다 밝아온 뒤로도 들려오는 소음을 환청이라 여기는 태도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이 그의 한계라면 한계였다.

여하간, 첫 소음은 사쿠라기를 수마에서 완전히 끌어 올리지는 못했으나 오롯이 잠든 것도 깬 것도 아닌 자리 어디쯤에 의식을 던져놓았다. 그때부터 그의 수면 질은 끝도 모르고 내리막길을 내달렸다. 숨소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됐고, 어느 순간 무거운 것을 질질 끄는 소음이 되었다가 멀리서 서랍 따위를 여닫는 잡음이 됐다.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환청 사이로 발소리가 섞이는 일이 예사였음은 물론이다.

드리블 소리가 나았다니깐…. 몸까지 구겨가며 귀를 한껏 틀어막은 사쿠라기가 중얼거렸다. 돌이켜보면 체육관 바닥을 두드리는 공소리는 차라리 규칙적이기라도 했으니 말이다. 아니, 아닌가? 거기서 거기인가? 어떤 쓸모가 있는지도 모르는 저울질이 계속된다. 사쿠라기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느라 벽 너머에서 들려오던 소음이 사그라든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만이 쫓아갈 수 있는 규칙을 가지고 둥둥 멀리 떠나가던 의식은 어느새 더 나은 소음 따위를 찾기 시작한다. 차라리 전화기 울리는 소리라면 편했으려나. 아니면…….

쿵, 쿵, 쿵.

그래, 문 두드리는 소리나.

“……엉?”

둔중한 소리가 온 집 안을 울렸다. 사쿠라기가 몸을 일으켜 짧은 시곗바늘이 겨우 7을 가리키는 것을 확인하고, 오늘이 주말이라는 사실까지 상기하는 사이 한층 묵직해진 소음이 고막을 흔들었다. 쾅, 쾅. 문 두드리는 소리에도 정해진 언어가 있다면 이만한 채근은 또 없을 터다. 당장 문 열어보라는 뜻일 게 분명한 재촉에 사쿠라기는 조금 전까지 골몰하던 문제는 싹 잊어버린 채 느긋이 현관으로 향했다.

주말 아침,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이런 방식으로 찾아올 만한 사람. 떠오르는 얼굴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적어도 사쿠라기가 아는 한 초인종이란 것이 떡하니 존재함에도 이런 식으로 재촉할 이는 없었다.

아, 아니다. 딱 한 명. 성질머리가 그럴 법한 사람이 한 명 떠오르기는 했다. 새카만 머리에 잘난 척하는 낯짝을 가진-이는 어느 정도 사쿠라기의 사견이 개입된 이미지일 것이다- 여우 자식 하나가. 이 시간에 집 앞에서 이런 식으로 볼일은 결코 없을 상대였지만.

“아침부터 누가 이렇게 무식하게 문짝을…….”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툴툴 내뱉은 말이 잘려 나갔다. 말도 다 끝맺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어 버린 얼굴 위로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이윽고 그 감정은 한 스푼의 경악이 섞인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뭐, 뭐야 너! 여우?”

…자식이 아닌, ……가? 한껏 높아졌던 목소리가 자신감을 상실한 채 사그라든다. 그 짧은 새 시시각각 변하는 듯하던 표정 역시 혼란이란 종착지에 정차해 버렸다. 문 너머의 상대는 사쿠라기가 50번이 아니라 100번을 더 차이는 신기록을 달성할 세월이 지난다 해도 상상하지 못할 이였다. 아침부터 신경질적으로 문을 두드리던 상대는, 그러니까, 그 남자는, 새카만 머리카락 아래로 잘난 척하는 낯짝을 가졌으나 사쿠라기가 무심코 떠올렸던 이는 절대 아니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모르는 남자’가 분명하다.

그가 반사적으로 입에 올렸던 루카와 카에데, 사쿠라기 혼자만의 통칭 ‘여우 자식’은 북산 고교에 갓 입학한 1학년일 뿐이다. 눈앞의 남자처럼 어느 모로 보나 ‘어른’을 떠올릴 법한 낯짝은 못 되었다. 잠시나마 루카와라고 착각했던 남자는 못해도 20대 중후반은 되어 보였으니까. 무엇보다 다른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따로 있었다. 눈높이가 달랐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 아주, 라는 부사를 백 번쯤 붙여도 모자랄 만큼 아주 조금, 남자의 눈높이가 사쿠라기보다 더 높은 듯했다. 입부 첫날 들었던 루카와의 키가 자신보다 무려 1cm나 작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큰 차이였다.

사쿠라기치고는 진지한 고찰이 이어지는 동안, 세차게 문을 두드렸던 남자는 그 모든 게 자신이 했던 일이 아닌 양 입을 다문 채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사쿠라기에게 못 박힌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하는 법도 없었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는 빛을 등진 탓에 머리카락만큼이나 새카맣다. 본래 그보다는 밝은 빛을 띠었을 눈 위로 드리워진 속눈썹은 기이할 만큼 한 올 한 올이 눈에 띄었다. 사쿠라기는 잠시간 그 눈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속눈썹이란 것이 그림자 위에 또 다른 그림자를 덧그릴 수도 있는 무언가임을 태어나 처음 깨달았다. 쌍꺼풀 없이도 도드라지는 눈매는 희미한 피로가 어렸음에도 날카로워서, 모르긴 몰라도 어지간히 기세를 누그러트리지 않는 이상 별세계 사람 같은 인상을 풍길 터였다.

단 수 초다. 사쿠라기가 알 수 없는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하는 얼굴을 뜯어본 것은 고작 몇 초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굳이 미추를 가려야 할 때면 매번 단순한 표현으로 설명을 관두고 마는 사쿠라기조차 남자의 이목구비나 유려한 얼굴선, 세월이 정성스레 빚어둔 서늘한 분위기 하나하나가 얼마나 보기 드문 것인지 정도는 알았다. 결코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미이냐 추이냐 나눠야 할 때 고민도 없이 미를 선택할 그 얼굴에서 누군가를 겹쳐 본 것도 인정했다. 보통은 이토록 재수 없는 얼굴이 세상에 둘 존재하리란 예상은 못 할 테니. 분명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빼다 박았다.

“여우가 둘……?”

숨기려는 노력 하나 없이 얼빠진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사쿠라기가 잘게 떨리는 손가락을 눈앞까지 들이밀며 삿대질을 하자, 루카와를 똑 닮은 남자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아무래도 성격이 나쁜 것도 비슷한 모양이라, 고. 그 표정을 놓치지 않은 사쿠라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야, 너….”

그뿐인가. 심지어는 목소리마저 비슷해 사쿠라기는 입을 떡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잊을 만하면 저를 ‘멍청이’라 부르며 한두 마디 얹는 그 목소리를 못 알아듣기란 어려웠기에 더욱이.

기억 속의 그것보다 미미하게 낮은 음성이 짤막한 한숨으로 변한다. 긴 시간 잠겨있던 숨을 트듯 이어지는 날숨 안에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눌러 담겨있다. 비록 사쿠라기의 온 신경은 눈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와 기억 속의 여우 자식을 비교하는 데에 쏠려 있었지만. 남자의 얼굴이 담아낸 시간에서 제 나이를 뺀 만큼을 빨리 감아낼 수 있다면, 루카와 녀석의 목소리도 저렇게 변하려나. 그가 얼추 생각의 맺음 아닌 맺음을 마쳤을 때였다.

“멍청, ……사쿠라기 하나미치.”

확실한 호명이 들려왔다.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가 읊는 익숙한 호칭의 첫머리가 기시감 한 자락 남기지 못한 채 사쿠라기의 의식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당연한 의구심이 먼저 고개를 들이민 탓이다. 대놓고 수상쩍다는 눈빛을 한 사쿠라기가 삿대질하던 손가락을 주춤주춤 뒤로 물리며 입을 열었다.

“뭐야. 큰 여우 아저씨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건데, …요.”

그새 특기대로 별명까지 야무지게 붙여 놓고는 경계심은 한가득이다. 설마, 벌써 이 천재 바스켓맨 사쿠라기의 이름이 유명해진 건가. 이어진 중얼거림이 손바닥 뒤집듯 경계심을 허문다. 남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비집어 열었다. 조금 전부터 못마땅한 기색을 표정 가득 드러내던 그가 손쉽게 사쿠라기의 손가락을 붙잡아 끌어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다.

“문패.”

톡톡. 남자의 빈손이 바깥 벽면 어딘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다른 말이 덧붙었다.

“그거 보고 안 거니까 아침부터 헛소리하지 마.”

성큼, 그가 현관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 제멋대로를 넘어서 고압적이기까지 한 말이 연이어 나오자 사쿠라기는 성질대로 욱 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쏟아낼 새도 없었다. 남자는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도 모자라서 현관을 막아서듯, 사쿠라기의 손을 끌어 내렸던 손으로 열린 현관 문틀을 쥐었다.

그러나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어떤 이던가. 겁도 없이 북산의 주장 아카기를 고릴이라 부르고, 상급생 앞에서조차 겁먹어야 할 이유란 것을 품어본 적이 없는 농구부의 떠오르는 문제아 신예였다. 저보다 나이가 열은 더 많아 보인다 한들 안자이 감독의 턱살을 물풍선 두드리듯 만지는 그가 고분고분 굴 리 없었다. 그것도 존대하기 어색할 정도로 루카와를 닮은 남자에게. 그에 더해 산만하기 그지없는 정신은 이미 딴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 지 오래였다. 어쩌면, 제아무리 사쿠라기라 해도 시야에 들어온 것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잠깐, 잠깐, 잠깐!”

보여주던 흉흉한 기세와 다르게 남자가 뚝 움직임을 멈췄다. 멈추랬다고 멈춘 남자의 발치를 유심히 바라보던 사쿠라기는 문을 틀어막은 남자의 팔 아래로 고개를 빼 바깥을 두리번거리기까지 하고 나서야 자세를 바로 했다. 그간의 대화가 무색하게 표정은 다시 돌아가 혼란만이 가득하다.

맨발. 활짝 열린 채인 옆집의 현관문. 그것도 지난밤 환청으로 자신을 괴롭혔던 집의.

차례로 눈에 들어온 것들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다시 바닥을 보자 아무렇지 않은 양 현관을 밟은 남자의 맨발이 보였다. 그제야 적당히 걸친 트레이닝복과 정돈이 덜 되어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온다. 자다 일어나 뛰쳐나왔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모습에서 눈을 뗀 사쿠라기가 재차 시선을 떨어트린다. 남자의 맨발로 돌아온 것이다. 크게 지저분한 구석 하나 없는 맨발로. 팽팽 돌아가던 머리가 멈추었다.

“설마 옆집에 사는 거야?”

“…이사, ……왔는데.”

“도대체 언제?!”

“……어제 새벽에.”

말이 되냐고. 환청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소리에 덧붙인 제 추리가 보기 좋게 빗나갔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사를 왔으면 온 거지 새벽이라니. 더 따져 묻고 싶었지만 남자는 꿋꿋했다. 적어도 사쿠라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구겨져 있던 표정은 진작에 풀어져 덤덤한 데다, 금방이라도 더 안쪽으로 발을 들일 기세 역시 누그러져 당연한 사실만을 입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히 이상한 구석이 있음에도 콕 집어낼 재간이 없는 사쿠라기가 의심 어린 눈을 바짝 붙여 남자의 표정을 뜯어봤다. 뭐, 상대는 저보다 어른이기는 하니까. 홀로 남은 뒤 이사라는 걸 해본 적 없는 사쿠라기는 이런 때에만 어른을 향한 기이한 신뢰를 내비쳤다. 의문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묻는 역할은 루카와를 닮은 옆집 남자에서 사쿠라기로 뒤바뀌었다.

“큰 여우 아저씨, 빚쟁이한테 쫓기는 신세라거나 뭐 그런 건 아니지? 빚쟁이를 피해 야반도주, 왜 그런 거.”

“쫓기기는 누가. …그보다, 아까부터 그 이상한 호칭은 뭐야.”

“여우랑 닮았는데 요만-큼, 요만큼, 더 크니까 큰 여우. 맞잖아, …요.”

검지와 엄지로 작은 틈까지 만들어 가며 보여주던 사쿠라기가 슬그머니 물러섰다. 눈빛만으로 언짢음과 불쾌감을 동시에 내비치는 상대 탓에, 실수인 척 어미를 바꾼 것은 덤이다. 그가 뒤늦게 ‘지난 새벽에 이사 왔다는 이 남자는 여우 녀석이 누군지 모를 테니 설명이 부족한 게 문제였나’, 따위의 헛다리를 짚고 있던 때였다.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남자가 어딘지 피곤한 낯으로 손을 내저었다.

“됐으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

“그럼 뭐라고 부르는데, …요.”

“이름 뒀다가 뭐할 건데.”

“내가 아저씨 이름을 어떻게 알고…. 큰 여우 아저씨 이름이 뭐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래?”

셋을 셀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리셋된 호칭에도 돌아오는 말은 없다. 소란하기만 하던 아침 위로 첫 침묵이 내려앉았다. 고요 속에서 눈을 감았다 뜬 남자가 입을 벙긋거리지만, 전해지는 소리는 없었다. 그 흔한 숨소리조차 지워진 시간 속에서 입술이 다물린다. 조금 전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햇살을 받은 남자의 홍채가 언뜻 본연의 색을 드러냈을 때에야, 사쿠라기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카에데.”

아직 이 계절과는 멀어 보이는 울림을 똑똑히 들은 사쿠라기가 입을 연 것은 그 후였다. 단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다 해서 그 이름을 어떻게 잊겠는가.

“설마 성이 루…,”

“성 같은 거 없어. 그런 녀석도 몰라.”

루카와 카에데. 그 이름을.

생김새도, 목소리도, 성격도 이만하면 그 녀석과 판박이인 주제에 키만 아주 조금 더 큰 카에데라는 남자가 말을 잘랐다. 자신이 루카와, 라고 끝까지 발음했던가. 세상에 성이 없다니. 기다렸다는 듯 나온 답도 이상하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 여우와 이름 마저 같은 남자는 하나부터 열까지 수상해 보였다. 다시 경계심을 쌓아 올린 사쿠라기가 물었다.

“그래서 카, …큰 여우 아저씨는 우리 집에 도대체 왜 온 거야?”

“…이사하면 옆집에 인사부터 하는 게 예의다.”

이른 아침부터, 문을 쾅쾅 두드려 대면서? 말도 없이 삐죽거리는 얼굴로 되묻던 사쿠라기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수상해, 수상하단 말이야. 다 들으라고 종알거리는 소리가 뒤따르기는 했다만 이번에도 그 ‘어른을 향한 기이한 신뢰’라는 녀석이 의심이 제 역할을 하는 것을 막았다. 이 또한 사쿠라기는 알지 못하는 영역이었으므로. ‘예의’를 입에 올려야 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새 포기한 건지 남자가 더는 호칭에 말을 얹지도 않으니 사쿠라기는 넓은 마음으로 이 한번은 넘어가 줄 의향도 있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신문 같은 거 안 보거든? 큰 여우 아저씨가 빚쟁이한테 쫓기는 사연이 있어도 안 봐줘.”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늘어놓은 말에 돌아온 답은 짧았다. 그런 거 아니야, 멍청아. 오늘 처음 본 상대가 내놓은 반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사쿠라기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익숙한 레퍼토리다. 반사적으로 씩씩거리던 사쿠라기가 제가 생각해도 허무맹랑한 상념을 꾹 눌러 삼켰다. 그 여우 자식, 하루아침에 늙어버려서 나부터 골탕 먹이러 온 거 아니야?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사쿠라기의 태도에 영 관심이 없었다. 고개를 뒤로 젖혀 위를 본 남자가 후, 한숨을 쉬자 앞머리가 작게 움직이다 풀썩 꺼졌다. 너 때문에 이상한 소리만 했잖아. 느른한 목소리가 힐난보다는 핀잔처럼 들려왔다.

“너, 농구 하지.”

그가 샛길로 멀리 흘러버린 대화를 제 쪽으로 끌어왔다. 어느 순간 사쿠라기의 등 뒤로 향한 눈동자가 부단히도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반문보다 ‘역시 천재 바스켓맨 이 사쿠라기의 위상이 벌써-’로 시작하는 말이 먼저 돌아오자 남자는 말허리를 자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 헛소리, 하고. 여기저기 흐르던 시선이 곧 자리를 되찾았다. 그가 다시 사쿠라기를 바라봤다.

“한 지 얼마나 됐어.”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성큼 걸음을 떼며 대답부터 하라 다그치던 때와는 다르다. 그보다는 드문드문 눈에 띄었던 피로가 남자의 말에 무게를 더한 것만 같다. 때때로 지켜보는 이들이 의아할 만큼 기민하게 분위기를 읽어낼 줄 아는 사쿠라기의 감각이, 그답지 않게 남자의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희미하지만 충혈된 흰자위, 이러다 곧 눈을 감고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낯빛. 그런 것들에서 사쿠라기는 어떠한 신호가 있음을 느낀다. 그 안에 어린 감정이나 의중까지 헤아리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다만 남자가 채근처럼 고개를 기울여 무언의 압박을 늘어놓을 때, 청량한 아침 공기 사이로 섞이는 이질적인 냄새만큼은 확실히 맡을 수 있었다. 사쿠라기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이게 뭐였더라. 아침보다는 저녁, 저녁보다는 더 늦은 시간. 텅 빈 골목길보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끄러운 번화가에서나 자주 맡을 수 있던 냄새. 정체 모를 냄새가 거슬려 코끝을 찡그린다. 그치고는 퍽 평이한 투의 답이 뒤늦게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고등학교에 들어오고 시작해서 이제 두 달이지만, 이 몸은 천재란 말이지. 이 천재 덕에 현 대회 예선 3차전까지 무사통과한 거나 마찬가지니깐.”

“그만둬.”

몇 음절 되지 않는 말을 뱉어낸 입술이 다물렸다. 청각보다 후각에 정신을 빼앗겼던 사쿠라기가 답을 찾아낸 것도 그때였다. 알았다, 술 냄새. 동시에 크게 뜨인 눈이 남자를 바라본다. 서로 다른 감정을 담아낸 시선이 섞여 들었다.

“너, 농구 그만두라고.”

사쿠라기 하나미치, 16세. 해동 중학 재학 시절 빨간 머리가 도대체 뭐라고 원치 않게 바람 잘 날 없는 나날을 보냈던, 북산 농구부의 떠오르는 문제아 신예. 자칭 천재 바스켓맨답지 않게 그의 삶에는 농구보다 가까운 것이 하나 존재했다. 먼 훗날에는 달라질지도 모르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그것은 그 무엇보다 사쿠라기에게 익숙한 문제 해결 수단이 된다.

사쿠라기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망설임 하나 없이 양손을 뻗어 앞을 버티고 선 남자의 머리를 잡아 끌어당겼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술 냄새가 훅 끼쳐들었지만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멈출 이유가 못 되었다. 폭력이란 이름의 수단을 손쉽게 휘두를 기세 그대로, 사쿠라기는 남자의 이마에 박치기를 날렸다.

 


02. 카에데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이상하다. 정확히는, 루카와에게만 더 이상해졌다. 농구부에 알음알음 퍼진 출처 모를 소문은, 내용은 두루뭉술했으나 목격담 하나는 확실했다. 한두 명뿐이었던 목격자는 어느 순간부터 늘어 현재는 사실상 북산 농구부원 전원이 사쿠라기의 기행을 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 되었다.

농구에 있어 초보자나 다름없는 사쿠라기가 고등학교 입학 전부터 에이스로 활약해 온 루카와에게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루카와를 대하는 태도 하며, 틈만 나면 말을 얹는 방식의 도발이나 유치한 장난 모두가 이를 대변했다. 하필이면 이런 데에서까지 지독한 승부 근성을 버리지 못한 루카와 역시 사쿠라기의 태도를 가만두고 보질 않고 맞서니, 두 사람 사이가 조용할 날은 드물었다. 이 말은 즉 가벼운 대거리나 유치한 장난질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사건임을 뜻한다. 보다 특별한,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이상해졌음을 주장하는 목격담은 여태 이어져 온 라이벌 의식의 표출 방식과는 다른 양상을 띠었다.

이를테면 이랬다. 예선 리그 4차전을 위한 연습이 진행되던 어느 날, 사쿠라기는 루카와의 주변을 알짱거리며 그를 면밀히 살폈다. 아무런 말도, 도발도, 장난도 없이 이어진 단순하고도 직접적인 관찰은 평소와 다름없는 루카와의 반응-그는 ‘멍청이.’란 말을 열 번도 넘게 반복했다-에도 멈출 줄을 몰랐다. 그다음 날에는 농구화를 벗기려 들다 루카와와 가벼운 주먹질을 나누게 됐고, 또 며칠 후에는 말 좀 더 해보라는 뜻 모를 요구를 하다 연습이 시작되어 제지당했다. 카나가와현 결승 리그를 목전에 둔 상양과의 5차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튿날, 난데없는 호구조사를 하다 거짓말하지 말라며 루카와를 추궁했던 일은 가장 최근 사건이자 소문의 유력한 근거가 됐다. 이로써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루카와 카에데를 대할 때 왜인지 더 이상해졌다는 주장에 토를 다는 이는 사라졌다.

도대체 사쿠라기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의 기행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이 주제는 한 번씩 화제에 올랐다. 현재로서는 셋에서 넷, 넷에서 다섯이 된 연속 퇴장 기록의 충격 탓이 아니냐는 설이 가장 유력했다. 결승 리그 첫 시합을 며칠 앞둔 현재까지 명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 모든 소문과 잡다한 꼬리표는 사쿠라기의 안중에도 없었으므로, 누구도 답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몰랐다.

소문의 주인공이자 다섯 시합 연속 퇴장의 신기록을 달성 중인 사쿠라기는 예의 그 기행으로 치부되는 행동을 오늘도 몸소 행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루카와는 농구부 연습 시작 전부터 사쿠라기의 시선을 한껏 받고 있는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오늘의 사쿠라기는 체육관 벽에 기대선 채 멀리서 그를 관찰하는 데에 그쳤다는 것 정도일까. 저 멍청이가 또. 루카와가 나직이 중얼거리는 말이 사쿠라기의 귓가에 닿지 못한 것 역시 농구부의 평안에 있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연습 시작 전의 체육관 분위기는 대체로 자유로웠기에, 일찍이 도착한 부원들 대부분은 그런 사쿠라기의 기색을 곁눈질로 살피다 제각기 할 일을 찾아 나서기 바빴다. 말 한번 잘못하는 것보다야 내버려 두는 게 십중팔구 나았다. 이는 단 두 달 사이 북산 고등학교 농구부원들이 암암리에 깨우친 진리 중 하나다.

“료칭.”

이러한 내막 또한 안중에도 없을 사쿠라기가 전조도 없이 나란히 벽에 붙어 서있던 이를 불렀다. 자못 비장하기까지 한 부름에 탁, 하고 공을 붙잡는 소리가 들려온다. 손가락 끝으로 돌리던 볼을 멈춘 미야기가 옆을 돌아봤다. 곁에 선 채 시간을 죽이면서도 먼저 말 한마디 꺼내지 않던 것치고는 재빠른 반응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정했다 하면 스스럼없이 별명을 붙여다 부르는 후배의 태도에 퍽 익숙해진 그가 여상히 응했다.

“왜 무게를 잡고 그러냐, 하나미치.”

팔꿈치를 들어 옆구리 찌르는 시늉까지 한 미야기의 얼굴에 삐뚜름한 웃음이 걸렸다. 평소와 다름없이 여유를 걸쳐 가장 그다운 얼굴이었지만, 오늘의 미야기 료타는 나름의 속내를 가지고 부러 그 옆에 선 쪽에 속했다. 부탁을 받아 가벼운 모험을 강행했다는 표현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유난히도 걱정이 많은 1, 2학년 몇몇이 사쿠라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알아봐 달라며 그의 등을 떠민 지 어언 며칠. 미야기는 지금의 이 호명이 사쿠라기가 기행을 부리는 원인을 알 기회가 되리라 직감했다.

“있잖냐….”

시작은 대개 이렇다. 괜한 서두가 붙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어떤 말이든 들어 줄 의향이 있다는 듯 미야기가 답 대신 한쪽 눈썹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슬쩍, 곁눈질로 이를 확인한 사쿠라기가 목소리를 낮췄다.

“얼굴도 비슷하고 목소리도 비슷하고 거기다 이름이 같은데, 형제가 아닐 수도 있는 거야?”

들려온 말을 따라 느릿느릿 까딱이던 고개가 뚝 멈춘다. 얼빠진 소리를 낼 뻔한 미야기가 입부터 다물었다. 지금은 짧게라도 고민하는 척이 필요한 때라 판단해서다.

농구부 복귀 후 사쿠라기에게 종종 페이크를 가르쳐 주게 되면서, 미야기는 나름대로 이 후배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사쿠라기 하나미치라는 후배는 유독 눈에 띄었고, 종잡을 수 없었으며, 묘한 기대를 품게 만들었으니까. 그간 미야기가 봐온 사쿠라기는 보이는 만큼 단순하고 겉보기보다 섬세했다. 답 사이의 간극은 후자를 고려한 선택인 셈이다. 차츰 농구에 열의를 띠는 것이 보이는 데다 연습만은 소홀히 하지 않는 후배를 위한 선택. 속을 들여다볼 요량으로 기회를 만든 것부터가 그랬기야 한데……. 시간이 남았다 하면 기행을 부리기 시작한 근간에 이 질문이 있다면 맥이 좀 빠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 질문만으로는 당장 앞뒤 정황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애초에 말이야…, 하나미치.

“형제인데 이름이 어떻게 같아? 비슷하면 몰라도.”

생각지도 못한 답을 들은 사람처럼 사쿠라기의 눈이 커진다. 아! 하는 탄성이 따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상한 데에 꽂히면 쉬운 답이 안 보일 때도 있으니까. 고민한 시간이 짧지 않은 듯 보이니 미야기는 어떻게든 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름만 다르고 비슷하게 생겼으면 오히려 쌍둥이일 수도 있겠지.”

전제를 비튼 미야기가 가장 쉬운 결론으로 향했다. 반박은 재빠르게 돌아왔다.

“그건 아냐.”

“뭐, 이름이 같다고 했으니까 쌍둥이는 아닐 것 같긴 한데….”

“나이가 달라. 한……, 열다섯 차이.”

서른하나라고 했으니까. 뒤따른 작은 소리는 혼잣말 같았다. 하나같이 구체적인 답이다. 미야기는 말 몇 마디 만에 대번에 골대 앞에 다다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느새 사쿠라기의 시선이 다시 루카와를 쫓고 있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이름이 같은 먼 친척일 가능성은? 가끔 그런 사이에 엄청나게 닮기도 한다더라.”

“…그럴 수도 있는 거야? 료칭, 보기보다 똑똑하네.”

“넌 잘 나가다가 꼭 그래야겠냐.”

건방진 하급생 보듯 하는 표정에도 사쿠라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미야기라고 진심으로 사쿠라기를 질책할 마음은 없었으니 금세 픽, 하고 웃어넘길 뿐이었지만. 이제는 일상적인 주거니 받거니였다. 이만하면 원인이 보이는 것도 같고. 미야기가 그러모은 증거를 짜맞추기 시작할 때였다.

“……료칭.”

또, 또. 조금 전의 부름과 비슷한 호명이 들려왔다. 미간을 한계까지 좁힌 사쿠라기가 이번에는 한층 심각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누가 들으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고민을 하고 있다 해도 믿을 법했다.

“먹을 걸 사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지?”

“보통은 그렇…지?”

“그치?”

어떻게 도달했는지도 모를 대화의 흐름 속에서, 미야기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쿠라기가 반색하며 웃는다. 맞아 그런 거야, 여우 자식은 몰라도. 홀로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신난 기색이 묻어났다. 갑자기 끌려 나와 비교 대상이 된 루카와가 무언가 느끼기라도 했는지 언뜻 사쿠라기를 돌아봤다. 오늘도 얼빠진 표정이군. 가차 없는 입 모양을 읽어낸 미야기가 뜻을 해석해 낼 동안 욕을 들은 당사자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또 생각 삼매경이었다. 그 얼굴은 더는 루카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거기다 속이 다 시원해 보여서, 미야기는 다른 말을 더 덧붙이려다 관두었다. ‘먹을 걸 준다고 무조건 좋은 사람은 아니다’ 같은 첨언은 아무래도 과하지 않은가.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세 살 난 애도 아니고 설마 그렇게 생각할까.

마지막 질문이 신경 쓰이기는 해도 결론은 얼추 나왔다. 보아하니 사쿠라기 하나미치의 기행을 부추긴 원인은 루카와와 어지간히도 닮은 사람인 모양이었다. 어쩌다 한번 보았거나, 알게 됐거나. 둘 중 하나리라. 그새 먹을 거라도 얻어먹었는지도 모른다. 막상 속을 더 살피니 정황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결말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이는 또 다른 의문을 낳는다.

그게 그렇게 신경 쓰일 일인가, 같은 의문을. 미야기는 이 후배의 기준을 좀처럼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나미치, 이리 와 봐.”

반쪽짜리 해답이기는 해도 그는 이만하면 제 역할은 끝났다 여겼다. 그랬음에도, 들고 있던 농구공을 옆구리에 끼워가며 비게 된 손으로 손짓까지 한 까닭은 단순히 장난기가 일어서였다. 왜, 뭔데? 되물은 하나미치가 미야기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네 말 들으니까 생각나는 게 있어서. 기대했던 반응이 돌아오자, 미야기가 착실히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다.

“……하나미치, 도플갱어라고 아냐?”

“도플…, 뭐?”

“도플갱어.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말하거든? 근데 이 도플갱어랑 만나면 말이지….”

차차 말소리가 낮아지고, 작아진다. 속삭임을 닮은 말은 여름의 무더위를 핑계 삼아 떠들고 다니는, 흔하디흔한 괴담을 읊는 투로 치장되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침을 꼴딱 삼킨 사쿠라기가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루카와를 바라봤다. 지난 며칠간 지겹도록 반복한 행위가 습관처럼 녹아들어 사쿠라기를 이끌었다. 루카와의 손을 떠난 공이 깔끔한 포물선을 그리는 것이 보인다. 그렇게 되면…. 귓가에 내려앉는 말과 함께 공이 허공을 유영하듯 느리게, 림을 향했다.

“죽는대.”

쉬익, 타앙.

그물을 통과한 공이 바닥을 때렸다. 사쿠라기는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대로 멈춰있었다. 무서운 이야기를 장난 대신 꺼내 드는 이들이 가장 환영할 만한 반응을 받아낸 미야기가 결국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도 조심해라, 하나미치. 농담일 게 분명한 말이 웃음소리에 섞여 사그라든다. 손을 뻗어 하나미치의 등을 몇 번 두드린 그가 장난기를 완전히 거두고 말을 이었다.

“해남 녀석들 상대할 때까지 괜한 일로 머리 굴리지 말고, 인마.”

격려, 환기, 그 밑바닥에 희미한 염려가 깔린 말. 그 한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체육관에 들어선 아카기가 부원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가자. 툭, 주먹 쥔 손등으로 사쿠라기를 건드린 뒤에야 미야기는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가 한 걸음, 두 걸음, 그러고도 몇 걸음을 더 내디딜 때까지도 사쿠라기는 움직이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자리를 지켰다.

뒤늦게 따르는 걸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미야기가 뒤를 돌아본다. 실없는 장난에 굳었던 낯을 가진 후배는 더는 없다. 잠잠한 눈에 담기는 것은 한 사람이다. 미야기는 시선을 따라가지 않고도 그 안에 담겨있는 이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하필 이렇게 원점이냐. 한숨 섞인 말이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사라졌다.

 

익숙한 하굣길을 밟아 돌아가면 외벽에 계단이 딸린 낡은 2층 맨션이 나온다. 인접한 길과 2층짜리 건물을 구분 짓는 것이라고는 흔한 벽돌 담장뿐으로, 맨션으로 통하는 입구에는 여닫을 수 있는 정문조차 없었다. 맨션의 외벽만큼이나 닳고 닳은 문의 수는 두 손으로 다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고, 문 옆에 자리한 창살이 달린 창문의 수는 꼭 그와 같았다. 다만 문패만은 늘 수가 하나 적었다. 사쿠라기가 기억할 수 있는 먼 옛날부터 혼자 남게 된 때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가 사는 1층 집 바로 옆집에 문패가 걸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는 영영 텅 비어있을 줄만 알았던 옆집에 카에데라는 남자가 이사 온 뒤로도 변하지 않았다. 새벽부터 아침까지 다방면으로 소란을 몰고 다닌 남자는 성 같은 건 없다고 밝힌 말이 사실이라 시인하듯, 텅 빈 자리를 사쿠라기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남자가 이사 온 지 나흘째의 일이었다.

제아무리 사쿠라기라 해도 그 말만은 믿지 않았다. 차라리 그 남자의 성이 루카와라는 것이 더 그럴듯한 이야기 같았다. 근거는 많았다. 남들이 다 아니라고 할지라도 사쿠라기에게만은 그랬다. 그 남자, 카에데는 나이만 제외한다면 놀랍도록 여우 자식과 흡사했으니까. 열흘 가까이 지겨울 정도로 비교해 봤으니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닮았다 떠들기도 입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이 정도면 이름까지 같을 것이다’, 라는 비논리적인 주장은 의심 하나 없이 사쿠라기 안에 뿌리내린 지 오래였다. 이 같은 기이한 믿음이 아니더라도, 무엇보다 그는 이미 한번 사쿠라기에게 거짓말을 한 전적이 있었다. 비록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대략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해도 말이다. 했던 거짓말이 사라지지는 않는 법이잖은가.

“큰 여우 아저씨 또 여기서 자네.”

불만 가득한 시선이 사쿠라기, 라고 적힌 문패 아래를 내려다본다. 카에데는 낯짝 두꺼운 얼굴 그대로 성만 적힌 문패를 머리 위에 둔 채 벽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숨길 생각이 있는 거야? 엉? 여기 어디에 하나미치라고 쓰여있는데? 당장이라도 그런 말로 잠을 확 달아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다 수그러들었다.

그가 이사 온 첫날을 제외하고는 꽤 자주, 이 같은 변덕을 부리고 싶었다. 이상한 점을 집어내 꼬치꼬치 캐묻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왜 그날 아침 다짜고짜 찾아왔는지. 문패에 다 적히지도 않은 제 이름은 어떻게 아는 것인지. 또, 농구를 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으며 왜 대뜸 그만두라는 말을 뱉었는지. 여전히 의문점이야 많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자꾸만 사쿠라기의 입을 다물게 했다.

언제부터였더라. 자문해 봐야 지난 열흘 중 어느 날부터일 테니 사쿠라기는 구태여 답을 찾지 않았다.

“문 열 거니까 일어나 좀.”

툭툭, 신발 앞코로 쭉 뻗은 다리 한쪽 끝을 건드리자 카에데가 느릿느릿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사쿠라기를 올려다보는 눈에 어린 잠기운이 무색하게, 바로 옆 바닥에 널린 흰 비닐봉지들을 챙기는 동작이 퍽 익숙해 보였다. 그래, 다 저것들 때문이야. 사쿠라기가 불퉁한 표정으로 합리화를 했다.

이 낯선 이웃은 사쿠라기가 등교하는 날이면 익숙한 풍경 중앙을 떡하니 차지한 채 잠이 들어있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늘 그렇게 사쿠라기의 귀가를 기다렸다. 흰 비닐봉지들을 바닥에 늘어놓고, 못 본 척도 할 수 없게 집 앞에 앉아서. 주말에는 대놓고 그것들을 가득 든 채 대문을 두드렸다. 흰 비닐봉지는 수상한 이웃의 수상한 호의였다. 들춰보지 않아도 이제는 내용물이 훤히 짐작되는 호의. 보나 마나 그 안에는 오늘도 각종 편의점 도시락이며 포장된 음식 같은 저녁거리가 들어있을 터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제멋대로인 대화에 끌려다녔던 아침, 카에데는 사쿠라기의 박치기를 맞고도 쓰러지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고개를 털던 그가 한 선택은 흉흉한 기세를 내보이기만 하다 문을 닫고 떠나는 것이었다. 자신보다 키가 큰 남자, 그것도 성인이 곧 주먹질이라도 할 것처럼 냉랭한 기운을 두른 모습을 사쿠라기는 그날 처음 목격했다. 다음에 다시 마주친다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반드시 벌어지리라 여겼는데. 그랬던 남자가 그다음 날부터 저녁때만 되면 먹을 것을 들고 찾아왔다. 불투명한 흰 비닐봉지에 가득 담긴 것들을.

처음에는 또 그 ‘예의’를 들먹였다. 원래 이사 온 뒤에는 이웃에 뭐라도 들고 가 정식으로 다시 인사를 해야 한다나. 그런 날에는 이웃 간에 같이 식사하는 일 정도는 흔히 있다고 했다. 그다음 날 핑계는 ‘나이’였다. 서른하나나 먹은 어른인 그는 미성년자인 사쿠라기 혼자 저녁을 먹게 둘 수는 없으시단다. 생각했던 것보다 나이가 많다는 점도 의외였지만, 다감하고 푸근한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그런 말을 한 것도 의외였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속에 없는 듯한 말을 하는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다, 고. 사쿠라기는 생각했다. 그나마 이 이유는 예상보다 빨리 밝혀졌다. 음식을 한가득 들고 찾아오는 그를 집에 들인 지 닷새가 되는 날부터, 카에데는 항상 비슷한 말로 입을 열었으니까.

“멍청…, 사쿠라기. 생각해 보라고 했던 거, 대답은?”

“생각은 했고, 농구는 안 그만둘 거야.”

“아예 그만두라는 게 아니라, 이번 여름 전국 대회 이후에 정식으로 시작하라고 분명히 말한 것 같은데.”

“그래도 안 그만둔다고 이 천재가 백 번은 대답해 줬던 것 같은데!”

유치한 대거리의 반복이었다. 대화 내용이 조금씩 바뀌기는 했으나 흐름은 같았다. 농구는 잠깐 그만둬라. 싫다, 안 그만둘 거다. 단 두 마디로 요약이 가능했다. 날이 갈수록 그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횟수 자체가 확연히 줄기는 했다. 이만하면 오늘은 신기록이었다. 카에데가 얼마나 매서운 기세를 두를 수 있는지 진작부터 봐버린 사쿠라기는 이를 의아하게 여겼다. 그만두게 하고 싶은 기색임에도 일정 수준 이상의 강요는 없다. 거기다 그만두면 그만두는 거지, 기간 지정까지 해대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진짜 이상하다니까. 뻔히 보이는 속셈을 안고 찾아오는 이웃을 첫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집에 들이고 있는 집주인이 중얼거렸다. 사쿠라기가 주섬주섬 열쇠를 꺼내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카에데가 뒤따라 들어온다. 문이 닫히는 소리 사이로 비닐이 부스럭거리는 소음이 섞여 들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낮고 긴 한숨과 서로 다른 두 개의 발소리가 조용했던 집 안을 다채롭게 채워갔다. 짧은 말다툼 아닌 말다툼 다음에는 저녁 식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열흘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기묘한 루틴이었다.

“큰 여우 아저씨, 오늘은 뭐야?”

“덮밥.”

“오늘도 많이도 사왔네.”

“먹기 싫으면 버려.”

“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 참 나 왜 이렇게 극단적이냐고….”

주고받는 말과 달리 두 사람은 의외로 손발이 척척 맞았다. 이른 나이부터 혼자 사는 데에 익숙해진 사쿠라기가 집주인답게 식사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면, 카에데는 저녁거리로 사온 것을 식탁 위에 늘어놨다. 단둘이 먹기에는 다소 과해 보이는 양의 식사가 식탁을 가득 채우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식사의 시작은 대체로 같았다. 마주 보고 앉아 하는 인사말 한마디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낯설어진 인사말, 그 한마디를 조용히 읊조리는 목소리가 신호였다.

“잘 먹겠습니다.”

소리 내는 이는 사쿠라기 한 명일지라도 카에데는 항상 이때를 기다려 주었다. 지난 며칠에 걸쳐 같은 방식으로 반복된 식사 시간 동안 사쿠라기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알아낸 것들의 주체는 수상한 옆집 남자 카에데다.

“큰 여우 아저씨, 뭐 좀 묻자.”

“……또 뭐. 이번에도 멍, …아니 이상한 소리 하면 가만 안 둔다.”

하나, 카에데는 의외로 뭐든 잘 들어줬다.

그가 나이를 들먹였던 날, 사쿠라기는 툭 하면 멍청이니 얼간이니 해대는 그에게 어른이면 어른답게 그딴 말은 좀 덜 해보라 따졌더랬다. 그 뒤로는 놀라울 정도로 딱 그 두 표현만 발언 빈도가 줄었다. ‘멍’이니 ‘얼’이니 ‘멍청’이니 하는 토막 난 말을 질릴 만큼 듣고 있기는 했지만.

무언가를 물었을 때 대놓고 무시당하는 일도 드물었다. 특히 확실한 물음의 형태를 띤 말이라면 더 그랬다. 나이가 서른하나라는 사실, 형제가 없다는 주장, 저녁을 살 수 있으니 빚 같은 건 없다는 반박, 어설픈 존대를 할 바에는 원래 하던 대로 굴라는 에두른 허락. 이 모든 것이 물음 끝에 사쿠라기가 받아낸 답이었다. 오늘은 또 다른 답을 받아내 볼 작정이었다. 미리 질문까지 고민해 온 사쿠라기가 바로 앞에 놓인 가츠동을 끌어오며 입을 열었다.

“왜 자꾸 인터하이 끝나고 다시 시작하라는 거야? 처음에는 그냥 관두라더니.”

농구 이야기일 게 뻔해서일까. 카에데는 묵묵히 그 몫의 도시락에 시선을 떨어트린 채였다. 사쿠라기가 반쯤 식은 덮밥을 크게 한입 입에 욱여넣는 소리와 젓가락 끝이 플라스틱 용기 따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한동안 계속됐다. 카에데와의 대화에서 인내라는 것을 조금 배운-재촉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지난 며칠간 강제로 학습해야 했다- 사쿠라기가 착실히 음식을 비워갔다. 지루한 기다림이 끝난 것은 두 사람 앞의 식사가 각각 반 이상 줄었을 때였다.

“처음부터 아예 관두라고 할 생각은 없었어. 오히려, …….”

오히려, 뭐. 입 안 가득 찬 음식물을 씹어 삼킨 사쿠라기가 눈짓으로 물었다. 됐어. 한숨 같은 답이 돌아온다.

“넌 초짜니까, 지금 시작하나 겨울 전국 체전을 목표로 시작하나 똑같아. 정 안 되겠으면 지금은 기초 트레이닝이나 해. 내 말 들어.”

“누가 초짜라는 거야? 이 천재의 플레이를 보지도 못했으면서.”

“네 입으로 시작한 지 두 달이라고 했던 건 다 잊었냐. 이 멍…, …….”

하……. 답답함이 한가득 담긴 한숨이 식탁 위로 흩어졌다. 이런 반응 하나가 뭐라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내기 바빴던 사쿠라기가 소리 내 웃었다. 그는 정말 이상한 데에서 ‘잘’ 들어줬다. 그런 점은 진짜 어른 같았고, 그 여우 녀석과는 달랐다. 그렇게 느껴졌다.

“헹, 이 천재가 지금 빠져버리면 해남이랑 능남 녀석들 상대하기 더 힘들어질 게 뻔해. 결승 리그 끝나면 전국 대회가 코앞인데 어떻게 빠지란 거야?”

고릴도 안경군도 이번이 마지막인 것 같았다고. 싹싹 바닥까지 긁어 먹던 사쿠라기가 중얼거렸다. 코앞까지 들어 올린 도시락 용기에 말마디가 부딪히며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쿠라기 나름의 항변이었으나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하긴, 카에데가 고릴이나 안경군은 도대체 누구냐 물었다면 그게 더 신기했을 터다. 그는 몰라도 그만이라는 듯, 사쿠라기가 부연 설명도 없이 덧붙이는 말에 영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

단 며칠 사이 몇몇 반응에 통달하게 된 사쿠라기가 그새 깨끗하게 비운 용기를 내려놨다. 그의 손이 막 식탁 중앙의 규동으로 뻗어갈 즈음, 비슷한 타이밍에 식사를 마친 카에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중얼거린다기에는 크고 말을 건다기에는 작은, 조용한 반박이었다.

“퇴장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겠지.”

퍼뜩, 사쿠라기가 고개를 들었다. 남은 열기 탓에 반쯤 익어버린 계란 노른자를 가르던 동작이 멈췄다. 반사적으로 열린 입에서 튀어나온 목소리가 한참이나 높다.

“누가! 아, 안……!”

차마 아니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지역 예선 리그에서 치러진 다섯 경기 모두 파울 누적으로 퇴장당한 화려한 전적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이쯤 되니 제법 그럴듯하면서도 지극히 사쿠라기다운 가정이 머릿속을 꿰찼다.

사실 이 천재의 팬이라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야? 먹을 것도 그래서 사주는 거고. 그렇지 않고서야 콕 집어서 그걸 언급할 게 뭐란 말인가.

“안, …당할 거야. 퇴장. 두고 보라고.”

삽시간에 기세가 수그러든 것을 확인한 카에데가 흥, 코웃음을 쳤다. 진짜 어른 같다고 했던 건 다 취소다, 취소. 여우 녀석이랑 똑-같이 재수 없어. 지난 사견에 취소 선을 쭉 그어버린 사쿠라기가 씩씩대며 혼자만의 식사를 이어갔다. 말도 없이 제게 닿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두 무시해 버렸다. 소소한 복수였다.

지나온 다른 날의 저녁 식사도 대개 이런 식이었다. 사쿠라기가 묻고, 카에데가 답한다. 어쩌다 흘러간 이야기 속에서 ‘멍청이’나 ‘얼간이’ 같은 말 하나 없이도 그가 사쿠라기의 온 속을 긁어 놓는다. 그러면 사쿠라기는 저 혼자 분을 삭이다 카에데보다 길게 저녁을 먹었다.

뒷정리는 카에데의 몫이었다. 자연스레 그렇게 정해졌다. 그저 시간이 비어서인지, 연장자다운 척을 하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는 항상 뒷정리를 도맡았다. 쓰레기를 분리해 정돈하는 일이 끝나면 손도 대지 않은 도시락들을 보관해 두기 좋게 쌓는다. 그다음 순서는 자질구레한 설거지였다.

식탁 정리를 마친 그가 싱크대로 향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도시락통에 얼굴을 묻을 기세로 푹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쿠라기가 그제야 자세를 바로 했다. 자신의 앞을 제외하고는 말끔하게 정돈된 식탁이 보였다. 가지런히 쌓인 채 놓인 도시락들, 깨끗이 닦인 식탁 표면, 그리고 시야 바깥쪽에 걸리는 작은 과자 하나. 카에데가 앉았던 자리 앞에 놓인 과자는 투명한 비닐에 낱개로 포장되어 있었다. 반달을 닮은 형태가 중앙이 눌려 휜 채로 부풀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이제는 그 독특한 형태가 익숙했다. 두 번째로 습득한 사실을 뒷받침해 줄 증거였으므로.

둘, 카에데는 유독 저 과자를 자주 먹었다.

식사를 다 마친 후에 그는 항상 같은 모양의 과자를 먹었다. 그것도 딱 하나만. 사쿠라기의 기억이 맞는다면 이틀 정도를 제외하고는 먹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어쩌면 그 하루조차 그저 사쿠라기가 놓친 것일지도 모른다. 과자를 먹을 때마다 그는 사쿠라기가 보지 못하는 순간만을 골라다 홀랑 먹어 놓고는 빈 껍데기만 버리고 돌아갔으니까. 부스럭거리는 소리나 과자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 돌아보면 이미 과자는 모습을 감춘 뒤였다. 다 큰 어른이 숨어서 혼자 먹는 꼴이 창피하지 않으냐 말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런 태도가 더더욱 사쿠라기의 호기심을 부추긴다는 건 모르는 듯했다.

따지고 보면 이건 큰 여우 아저씨 책임이 크지 않나? 고양이 앞에 생선, 고릴라 앞에 바나나, 사쿠라기 앞에 ‘그 과자’다. 다소 모자란 듯했던 오늘치 복수를 이어갈 생각에 신이 난 사쿠라기가 속으로 키득거렸다. 싱크대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는 멈추지 않고, 어느 순간부터 늘 넓기만 하던 집 안은 두 사람만큼의 존재감으로 가득하다. 등 뒤의 물소리와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사쿠라기는 최대한의 조심성을 끌어모아 손을 뻗었다. 몸을 살짝 일으켜 상체를 앞으로 쭉 뻗자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과자가 손안에 들어왔다. 조심조심 포장을 뜯는 일은 그보다 조금 더 어려웠지만 이만하면 고지가 눈앞이었다.

다행히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물소리만 못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과자는 크기에 비해 한참이나 가벼웠다. 손가락으로 집어 보기만 했을 뿐인데 속이 비었다는 게 느껴질 정도다. 한입에 먹을지 일부러 소리 내 먹을지 한창 고민에 빠져있을 즈음, 사쿠라기의 예상에 없던 소리가 들려왔다.

파삭. 저도 모르게 손끝에 힘을 주었는지 센베이를 닮은 색의 과자가 반으로 갈라졌다. 똑 분리되어 떨어지는 쪽을 반사적으로 잡은 사쿠라기가 그 조각을 냉큼 입에 넣었다. 맛은 그저 그런데. 평까지 야무지게 남긴 그의 시야에 나머지 반쪽짜리 과자가 들어왔다. 예상했던 그대로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텅 비었다 말하기엔 어폐가 있다. 안에는 돌돌 말린 작은 종이가 한 장 들어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맛 때문에 꺼졌던 호기심이 다시 부풀어 오른다. 머릿속이 번뜩이면서 무언가 떠올랐다. 사쿠라기의 짐작대로라면 여태 카에데가 열심히 챙겨 먹은 과자는 포, …뭐였더라, 아무튼 운세 같은 게 나오는 과자였던 모양이다. 그 얼굴로 운세를 믿는다니. 과자나 단것을 좋아한다는 것보다는 어울리려나.

시답잖은 생각을 잇는 내내, 사쿠라기는 돌돌 말린 종이를 펼치기 바빴다. 나머지 과자 반쪽은 마저 입 안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길게 펼쳐진 종이 안쪽에는 사쿠라기가 상상했던 종류의 문장이 적혀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아기자기한 글씨체로.

<요즘 자꾸만 눈길이 가는 상대가 있나요? 그 사람의 비밀을 알게 될지도 몰라요.>

눈길이 가는 상대, 비밀…. 종이 가까이 붙어 띄엄띄엄 문장을 읽어내는 목소리가 고요한 집 안에 내려앉았다. 똑, 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한층 크게 들렸다. 연애운 같은 건가. 중얼거리고 나서야 사쿠라기는 어느 순간부터 작게 경종을 울려대던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잠깐, 왜 이렇게 조용하지?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선고처럼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보다 빠른 발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식탁에 널브러진 과자 포장지부터 숨겨보려던 사쿠라기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 아니 난, 큰 여우 아저씨가 맨날 혼자 먹어버리니…,”

“방금 뭐라고 했어.”

“…까……엉?”

“방금 뭐라고 했냐고. 다시 읽어봐.”

사쿠라기가 앉아 있는 의자 뒤에 바짝 붙어 선 카에데가 몸을 숙였다. 의자 등받이를 붙잡는 기척이 느껴진다. 그가 손에 힘을 실은 탓인지 낡은 가구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작은 종이 위에 쓰인 글자를 훑어내던 얼굴이 옆을 돌아본 것은 그다음이다. 뭐해. 고갯짓이 종이를 향했다. 시선은 떨어지지 않고 사쿠라기의 얼굴에 다닥다닥 붙어 재촉해 댔다. 글을 못 읽는 것도, 작은 글씨를 못 볼 정도로 눈이 나쁜 것도 아닌 듯한데. 대체로 그랬지만 이번에도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시선이다. 지은 죄도 있고 하니 사쿠라기는 무언가 묻기도 전에 먼저 또박또박, 종이 위에 적힌 문장을 읽어갔다.

요즘 자꾸만 눈길이 가는 상대가 있나요? 그 사람의 비밀을 알게 될지도 몰라요.

겨우 두 줄뿐인 문장이 끝날 때까지 카에데는 미동도 없이 사쿠라기를 응시했다. 시선에도 무게가 있다면 사쿠라기는 진작에 숨이 막힌다 호소했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충분하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사쿠라기가 결국 입을 열었다.

“도대체 뭔데 그래? 이상한 거나 시키고!”

금방 씨근거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로 사쿠라기가 카에데를 돌아봤다. 지척에서 뚫어져라 시선을 던져대던 카에데가 전과 다름없이 붙어있는 탓에 거리가 가까웠지만 부러 피하지 않았다. 일종의 고집이었다. 분명 처음에만 해도 그가 꼬박꼬박 챙겨 먹는 과자를 가로채 소소한 복수를 할 생각이었건만. 이래서야 본전도 못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네가….”

기다림은 길었다. 카에데가 턱 끝을 조금 들어 올리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내가? 소란했던 그날 아침으로 돌아간 것처럼, 의심 가득한 낯이 집요하게 그를 쫓는다. 사쿠라기의 시야에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입술이 보인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불쑥 튀어나온 손이 찰싹 소리를 내며 사쿠라기의 이마에 달라붙었다. 더 제대로 된 표현을 쓰자면 다가오지 못하게 밀어 냈다고 봐야 옳다.

“네가 ‘멍청한’ 얼굴로 보고 있길래.”

이마에 닿은 손바닥이 주욱 사쿠라기를 뒤로 밀어 낸다. 또, 누구보고 멍청하대!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거 모를 줄 알아? 끝끝내 사쿠라기가 소리쳤다. 하지 말라고 했던 ‘그 말’이 더 또렷이 들린 건 착각이 아닐 터였다. 기세는 좋았다지만 앉은 상태인지라 큰 반항은 힘들다는 게 유감이라면 유감이었다. 결국 그가 미는 대로 밀려난 사쿠라기의 고개가 뒤로 기울었다. 힘은 뭐 이렇게 무식하게 센 거야. 누구한테 하는지 모를 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먹고 싶은 거면 다음부터는 미리 말해.”

빵 한 조각 안 내줄 것 같은 건조한 어투로 그는 그 정도는 먹게 해줄 수 있다는 양 굴었다. 들려온 말을 일종의 허락으로 해석한 사쿠라기도 사쿠라기였지만, 말도 없이 등을 돌려버린 카에데도 만만치 않았다. 이마를 밀어 내던 힘이 사라지자 반동으로 푹 앞으로 몸이 꺾인 사쿠라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새 현관까지 유유히 걸어가는 뒷모습이 얄밉게만 보였다. 간다. 남은 도시락은 네가 알아서 해. 참 빠르기도 빠른 인사가 긴 꼬리를 흘리며 문 앞까지 이어졌다.

“형제 없다는 거 다 거짓말 아냐?”

이렇게나 제 속을 뒤집는 사람이 세상에 둘이라는 것도 거짓말 같은데, ‘루카와 카에데’와 ‘카에데’가 연관이 없다는 말은 더더욱 말이 안 되는 것만 같다. 고작 며칠 전의 사쿠라기가 물었던 질문에, 여우 자식에게도 똑같이 던졌던 추궁에, 변함없는 답이 돌아온다.

“없다니까.”

“그럼 친척 중에 큰 여우 아저씨랑 닮은 사람은? 왜, 아주 먼 친척 중에 있을 수도 있잖아.”

큰 여우 아저씨보다 이만-큼, 이만큼이나 작은 여우 녀석. 현관 앞까지 쫓아온 사쿠라기가 엄지와 검지로 틈까지 만들어 설명했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의 거리가 전보다 훨씬 넓다. 이를 알아차린 모양인지, 카에데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실소했다.

“없어.”

“친척이 많아서 모르는 건 아니고?”

“아니야.”

열다섯은 어린 미성년자가 뒤에서 저 하나에게 답을 듣겠다고 쉬지 않고 떠드는 와중에도, 카에데는 가차 없이 뒤돌아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혹시…. 앞선 말들과 확연히 다른 어조가 막 떠나려던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큰 여우 아저씨도 혼자야?”

그가 뒤를 돌았다. 사쿠라기의 이마를 밀어 내던 손을 떼어 뒤돌았을 때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에 등을 보였을 때처럼. 조금 전까지와 다를 것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래. 지금은.”

“그럼 료칭도 틀린 거네.”

사쿠라기는 이번에도 부연 설명 하나 없이 저 할 말만 늘어놓았다. 카에데가 갑자기 ‘료칭’이 누구인지 궁금해하거나, 이 말이 어떤 맥락에서 튀어나온 것인지 따위를 궁금해할 리 없으니 말이다. 큰 여우 아저씨는 친구도 없어 보이는데. 그 소리가 갑자기 왜 나와. 그럼 찾아올 사람도 없다는 거 아냐? 그래서 뭐. 이번에는 현관을 배경으로 실랑이가 이어졌다.

“우리 집에는 요헤이네라도 오는데 말이지….”

거의 요헤, 에 가깝게 들리는 발음을 늘이며 사쿠라기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분명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두 사람의 분위기는 판이했다. 그럭저럭 다 이해했다는 태도로 구는 사쿠라기와 그런 사쿠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듯한 카에데가 서로를 바라봤다. 약속이나 한 듯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는다. …불길한데. 카에데가 중얼거린 혼잣말이 현관을 채 벗어나지 못하고 형체를 잃었다.

“어쩔 수 없이 이 천재가 특별히 큰 여우 아저씨네 집에…,”

“계속 헛소리할 거면 잠이나 자.”

잘 벼려진 목소리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쿠라기의 해괴한 주장을 잘라냈다. 그것도 모자라 혀 차는 소리까지 들려오자 사쿠라기는 다시 불만 어린 눈을 치켜뜰 수밖에 없었다. 카에데가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시늉을 했겠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너 때문에 지금 버린 시간이…. 그가 중얼거리며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꺼낼 듯하던 동작이 멈춘 것은 찰나다. 이내 무엇도 쥐지 않은 손이 주머니를 빠져나왔다.

“…말을 말아야지.”

잠시다. 아주 잠시뿐인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찰나의 시간 동안 일련의 동작을 모두 지켜본 사쿠라기가 이미 몇 번은 겪었던 위화감을 떠올려 냈다. 그가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 말을 흐린 건 한번이 아니었기에.

마지막 셋, 카에데는 아주 가끔 무슨 의도인지 모를 행동을 하다 멈추고는 했다.

그런 뒤에는 늘 시선을 움직여 물건 하나를 찾았다. 아마 이번이라고 다르지 않을 터다.

“시계는 거실에만 있어.”

그러니까 얼른 가버리기나 하라며 사쿠라기가 입을 비죽거렸다. 손까지 휘휘 내젓자 이번에는 카에데가 먼저 눈동자에 온갖 불쾌감을 다 담을 듯이 바라보다 뒤돌아 떠났다. 이전의 그 인사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건지 간단한 인사 한번 없었다. 문이 닫히고도 사쿠라기는 곧바로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가 현관 앞을 벗어나는 시기는 정해져 있다. 닫힌 문 너머로 걸음을 옮기는 소리, 벽 너머 어딘가의 문이 열리는 소리, 그러다 다시 문이 닫히고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들려오는 마룻바닥을 천천히 밟아가는 소리. 그 모든 소리를 듣고 나면 사쿠라기는 그제야 카에데가 정말로 떠난 것처럼 현관 앞을 벗어났다.

돌아온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반쯤 먹다 만 식사와 열어보지도 않은 도시락 몇 개, 작은 쿠키가 만든 쓰레기뿐이다. 사위에는 익숙한 적막이 있다. 그마저도 온 신경을 기울이면 벽 너머에 누군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소음이 되어 돌아와 적막은 적막조차 아니게 된다. 사쿠라기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어느 날 찾아든 수상하고 비밀 많은 남자가 마냥 싫지만은 않은 것처럼. 수상쩍은 구석이니 비밀이니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 오로지 이 순간 때문에 사쿠라기는 고작 며칠 만에 진심 어린 추궁이나 의심보다는 입을 다무는 쪽을 택하게 됐다. 아무렴 어때, 하고.

그가 여우 녀석을 닮았든, 거짓말을 했든, 저를 어떻게 알든 얼마나 수상하든 저조차 이상할 정도로 종종 무엇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 미야기에게 들은 이야기가 더 그럴듯한 이유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그도 먹을 걸 사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미야기가 붙인 ‘보통은’이라는 조건은 저 좋을 대로 빼버린 사쿠라기가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느 날 카에데가 사실 루카와와 형제라고 밝혀도, 혹은 먼 친척이었다고 해도 거기까지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도플……, 뭐인지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농구 잠깐 그만두라는 말도 좀 그만하고. 들을 이 하나 없는 농을 연달아 종알거린 사쿠라기가 다시 식탁 앞에 앉았다. 다 식은 밥을 입에 넣으면서도 그가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멀리서 희미하게 익숙해져 버린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03. 분기점

삶은 늘 한 치 앞도 모르게 흘러간다.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고작 열여섯의 나이에 이를 한 줄의 문장이 아닌 감각으로써 깨우친 지 오래였다. 지나온 시간의 궤적을 조리 있게 언어화하는 능력이나, 생을 깊이 성찰하는 법과는 거리가 멀다 한들 겪은 바가 사라지지는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깨달음의 가장 밑바닥에는 몇 년 전의 풍경이 있다. 어둑한 현관 앞에서 보았던 쓰러진 부친의 인영, 그 하나로 충분했다. 사람의 수만큼 제각기 다른 삶이 존재하니 이는 비단 사쿠라기만이 유별나게 일찍 깨우친 경우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사쿠라기는 그렇게 여겼다.

거창한 근거는 없다. 거창한 근거가 필요치도 않을 터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만으로 되었다. 어느 날, 옆집에 카에데라는 남자가 이사 오리란 걸 바로 그 전날의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처럼. 꼭 쉬이 잊기 어려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만이 비예측적인 삶을 알게 해주는 것은 아니니까.

어떤 이에게는 우산 없이 만난 소나기가, 어떤 이에게는 무심코 지나친 페이지에서 나온 시험 문제 하나가, 또 어떤 이에게는 맛도 보지 못하고 떨어뜨린 아이스크림 따위가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예상치 못했던 일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사쿠라기와 같이 ‘한 치 앞도 모르는 삶’이라는 것을 감각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만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논리가 아닌가. 이마저도 사쿠라기는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방법은 모른다 해도 말이다.

열여섯, 농구를 만난 뒤로 사쿠라기의 삶은 한층 예측하기 어려운 일을 몰고 다녔다. 당장 그날 치러지는 경기부터가 미리 내다볼 수 없는, 알 수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니 이는 어찌 보면 당연했다. 예컨대 결승 리그 첫 시합이었던 왕자 해남과의 경기가 가장 가까운 예시였다. 사쿠라기 하나미치의 패스 미스를 끝으로 북산이 패배하리란 걸 어느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다른 이들은 몰라도 사쿠라기만은 머릿속에 그려본 적조차 없는 사건이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예측 불가 그 자체였던 결승 리그 첫 시합 탓에 사쿠라기가 지금과 같은 상황에 놓여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패배가 아니었다면, 거기에 더해 연이어 일어난 사건들이 아니었다면, 사쿠라기가 이 집에 발 들일 일은 없었을 테니. 쓰디쓴 패배를 맛본 지 겨우 하루 만에 불쑥 날아든 초대는,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쳤다는 점에서 집주인을 쏙 빼닮아 있었다.

“가만히 좀 있으라고 말한 지 5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막 새 반창고를 꺼내던 카에데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벼운 핀잔에 사쿠라기의 어깨가 작게 들썩인다. 흡, 숨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리는 것만 같다. 숨 쉬지 말라는 게 아니라 가만히 있으라고. 잇따른 말에도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부산스레 굴러다니던 눈동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앞을 보자니 카에데의 얼굴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 불가항력이었다. 고작 구급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기에는 정보값이 너무도 많은 얼굴이다. 거의 똑같다고 봐도 좋을 얼굴을 가진 상대와 치고받고 싸운 지 3시간도 지나지 않았으니 더더욱.

치열한 접전 끝에 직면한 패배와 명백한 자신의 실책 앞에 사쿠라기는 울분 섞인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다. 그 후로는 내내 사쿠라기가 예상치 못한 일들만이 이어졌다. 그날 저녁은 하루도 빠짐없이 나타났던 이웃조차 찾아오지 않았다. 사쿠라기를 반긴 건 주인 없이 문고리에 달랑 걸려 있는 흰 비닐봉지 두어 개뿐이었다.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다음 날이 되어서도 자신의 실책을 곱씹었고, 그를 농구라는 길로 이끌어 준 하루코의 격려에 이렇다 할 대답조차 못 했으며, 늦은 저녁 비까지 맞으며 당도한 체육관에서는 루카와와 뜻하지 않은 주먹다짐을 했다.

하나같이 예상에도 없던 일을 겪고 낡은 맨션 앞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밤이 깊어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아니면 루카와에게 맞아서 난 상처가 덧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절했거나. 간지럽지도 않은 여우 녀석의 주먹질에 기절까지 할 리는 없었지만 당시에는 당장 눈앞에 놓인 광경보다는 그쪽이 현실성 있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잠들지 않은 카에데가 흰 비닐봉지도 없이 사쿠라기의 집 앞에 서있었으니까.

맨션에 딸린 철제계단과 빗방울이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소리 속에서, 사쿠라기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조건이 붙은 초대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제집과 정확히 대칭인 구조의 옆집으로 끌려들어 와 있었다. 그에 더해 집주인에게 떠밀려 바로 옆에 있는 집을 두고 남의 집에서 씻은 것으로도 모자라-카에데는 무슨 청승이냐는 면박과 함께 갈아입을 옷까지 챙겨주었지만 사쿠라기는 기억하지 못한다-, 늦은 저녁까지 얻어먹었다.

그리하여 파란만장했던 이틀은 연한 회색빛 러그 위의 시간에 다다른다. 사쿠라기가 식사를 끝내자마자 카에데는 기다렸다는 듯 거실 바닥에 사쿠라기를 앉혔다. 물론 그는 말 한마디 없이 눈짓으로 소파 앞, 동그란 러그에 덮인 바닥을 가리킨 게 다였다. 사쿠라기 혼자 잘못이라도 저지른 아이처럼 그 기세에 눌려 얼결에 앉았을 뿐이다.

“농구공을 죄다 얼굴로 받아낸 건 아닐 테고.”

카에데의 손끝을 떠난 반창고가 사쿠라기의 왼쪽 눈가에 자리 잡았다. 이걸로 벌써 두 개째였다. 사쿠라기를 앉힌 카에데는 예고도 없이 구급상자를 꺼내와 적당한 연고며 반창고부터 찾았다. 여기저기 자잘한 생채기가 난 얼굴은 누가 봐도 ‘나 주먹질하고 왔다’ 말하는 꼴이었으니, 유달리 특별한 반응은 아닐지도 몰랐다.

평소라면 생각도 전에 입이 먼저 열려 무어라 말이라도 했을 텐데, 사쿠라기는 입을 다문 채 죄 없는 러그 표면만 손끝으로 만지작댔다. 잦아든 빗소리 사이사이 다시 새 반창고를 꺼내는 소리가 녹아들었다. 무심한 손길이 반창고를 하나 더 붙여주고 나서야, 입만 쭉 내밀어 모르쇠를 일관하던 사쿠라기가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이…, 여우 자식이 먼저 때렸어.”

때리기 직전 멈추었다고 해도 먼저 주먹을 내질렀던 장본인인 사쿠라기가 여우 탓부터 했다. 당시에는 늦게라도 손을 거두려 하긴 했던 터라 억울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이번만큼은 루카와 녀석을 때려눕혀 봤자 그건 진정으로 이기는 게 아님을 알았다. 농구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 정말로, 처음에는 그 생각뿐이었다. 루카와가 카운터라며 정확히 제 뺨을 후려갈기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그거 맞고 넌 얼마나 때렸는데.”

“당연히! 여우 자식보다 많이.”

입도 벙긋 안 할 때는 언제고 바닥에서 눈을 뗀 사쿠라기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구급상자를 정돈하던 손이 멈춘다. 깊고 덤덤한 시선이 빤히 사쿠라기를 향했다. 이 대답이 아닌가? 뒤늦게 기세를 누그러뜨린 사쿠라기가 카에데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봐도 뭘 모르겠으니 소용은 없었지만.

“…….”

다만 단 하나, 소리 없이 여닫힌 입술이 무언가 내뱉으려다 만 기색은 늦게라도 읽어낼 수 있었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사쿠라기의 눈에는 묻고 싶은 게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사자가 말이 없으니, 맞았는지 틀렸는지조차 모를 일이다. 하여간 이상한 아저씨야. 그 이상한 아저씨의 투박한 호의란 호의는 다 받아먹은 사쿠라기가 속으로 구시렁댔다.

“멍청…, 너 또 이상한 생각 하고 있지.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고 이거나 먹고 자.”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낸 것은 카에데였다. 저 욕하는 건 귀신같이 알아차린 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대뜸 면전으로 날아든 것이 간발의 차로 사쿠라기의 손안에 담겼다. 조금만 늦었어도 약 주고 병 준 격이 될 뻔했다, 고. 있는 말인지 없는 말인지도 모를 문장이 사쿠라기의 혀를 떠나 불평처럼 흘러나왔다.

“이게 뭔데 그래?”

좀처럼 불퉁한 낯빛을 지우지 못하던 사쿠라기의 표정이 바뀐 것은 그다음이다. 손안에 안착한 물건은 과자였다. 반달 형태의 중앙이 눌려 휜, 부푼 모양이 독특한 ‘그 과자’. 네가 그렇게나 먹고 싶어 했던 거. 어느새 거실 구석 찬장 앞으로 간 카에데가 구급상자를 넣어두며 대꾸했다. 어딘지 묘하게 비꼬는 듯한 투였음에도, 이번만큼은 당장 사쿠라기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이거 그거지? 포, 포…….”

“포춘쿠키.”

“…나도 알거든.”

몰랐던 주제에. 툭툭 치고 들어오는 말에 금세 다시 불이 붙은 사쿠라기가 툴툴댄다. 이거 맛 별로던데. 그럼 내놔. 줬다 뺏는 게 어딨어, 어른이. 몇 차전인지 모를 실랑이가 짧게 오가다 끊겼다.

“운세는 궁금하니까 볼 거야. 과자는 나중에 먹고.”

별다른 답이 없는 것을 보면 분명 무언의 허락일 터였다. 한 번 해보았던데다 이번에는 허락까지 받았으니 두 번째는 더욱 쉬웠다. 파삭, 투명한 포장지를 빠져나온 과자가 손쉽게 반으로 쪼개졌다. 갈라진 틈에서 떨어진 돌돌 말린 종잇조각이 러그 위를 구른다. 읽어 봐. 사쿠라기가 처음 그 종이를 꺼냈을 때처럼, 카에데가 말했다. 찬장 앞을 떠난 그가 사쿠라기의 등 뒤에 놓인 소파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만 돌려 뒤를 살피는 사쿠라기의 눈에 팔자 좋게 소파 팔걸이에 기대 턱까지 괸 모습이 들어왔다. 이건 반창고랑 과자랑 도시락이랑…, 아무튼 그런 거에 대한 보답이다. 보답이다…. 괜한 소리를 참기 위해 중얼거린 사쿠라기가 종이를 집어다 펼쳤다. 이미 한 번 본 적 있는 아기자기한 글씨체로 쓰인 글귀가 시야를 채웠다.

<솔직해질 수만 있다면 운명은 당신의 편!>

고작 한 문장을 소리 내 읽는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그 시간 동안 또 얼굴 곳곳에 들러붙는 시선이 있기야 했다만 이번에는 거리가 멀어서인지 지난번과 같은 감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단 두 번의 경험이, 혹은 그동안 카에데가 던져왔던 시선들이 모여 익숙함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르리라.

솔직…, 운명……. 작은 종이에 바짝 붙어 다시 한번 띄엄띄엄 운세를 훑던 고개가 기울어진다. 이건 조언이라고 하나? 아니면 또 연애운? 고민에 빠진 사쿠라기를 잠자코 내려다보던 눈이 내리깔렸다.

“다 읽었으면 자.”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카에데가 운세보다 뒷전이 된 과자 조각을 집어 들었다. 말투로 보나 태도로 보나 그는 사쿠라기만의 진지한 고민을 기다려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이건 내일 먹고. 짧게 따라붙은 말과 함께 둘로 나뉜 과자가 식탁 중앙을 차지했다. 투명한 포장지에 담긴 그대로 접시 위에 놓인 과자가 어딘지 우스꽝스러워서, 카에데의 무심함에 항변하려 했던 사쿠라기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접시째로 들고 가라는 거야? 큰 여우 아저씨, 이상한 데에서 섬세하네.”

“들고 갈 필요 없어.”

그가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방향만 보아서는 바로 옆집인 사쿠라기의 집을 가리키는 듯했지만, 고개를 돌려봐야 당장 보이는 건 열린 방문 틈으로 모습을 드러낸 침실뿐이다. 거실을 밝히는 빛이 스며 어두운 공간 안에 놓인 가구들이 윤곽을 나타내고 있었다.

운세 한 줄을 읽을 때보다 긴 시간 말이 없던 사쿠라기가 휙, 카에데를 돌아본다. 만에 하나, 정말로 만에 하나, 그가 지금 제가 떠올린 가능성 중 가장 희박한 의도를 담아 말한 것일까 봐 입이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가장 현실성 없어 보이는 선택지부터 먼저 확인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설마…, 아니지? 자고 가라고?”

“맞는데.”

이럴 때만 돌아오는 답이 빨랐다. 사쿠라기는 온 얼굴로 ‘왜?!’라고 물었으나 방금까지 잘만 대답하던 집주인에게 철저히 무시당했다. 이 집에 끌려들어 왔을 때처럼,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한 사람만 쓰기에는 넓은 침대에 혼자 누워있었다. 아니, 분명 많은 대화가 오갔다. 문제는 사쿠라기의 머리가 그 모든 걸 받아들이기에는 요 이틀간 너무도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머릿속에 남은 건 희미한 잔상뿐이다.

처음에는 또 그 ‘예의’였다. 벌써 몇 번은 들먹인 단어가 나온 뒤에는-솔직히 당시의 사쿠라기가 듣기에는 억지스러운 면이 있었으나 술술 말이 이어지니 긴가민가했더랬다-, 또다시 나이 이야기였다. 그새 지겨워진 패턴이건만 그 뒤로도 몇 줄은 되는 문장이 이어지는 내내 사쿠라기는 단 한 번도 반박하지 못했다. 구태여 반박할 이유를 찾지 않았다고 봐도 좋았다.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이번에도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카에데는 오늘도 먹을 걸 사줬으니까. 미야기가 들었다면 황당해할 생각을 잘도 뇌까린 사쿠라기가 적당히 합리화를 했다. 긴긴 말이 끝난 뒤에 카에데에게 ‘와, 아저씨 생각보다 말 엄청 많네.’ 따위의 발언을 했다가 눈으로 헛소리하지 말라는 욕을 좀 얻어먹은 것은 덤이다.

어쨌거나 카에데가 길게 늘어놓은 말의 요지는 단순했다. ‘혼자 뒀다가는 사고 칠 것 같으니까’ 같은, 어른 내지 보호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입에서 자주 나올 법한 주장. 함께 있는 시간이 늘수록 카에데의 나이가 겉치레는 아니라고 느끼기 시작한 사쿠라기는 그럭저럭 잘 알아들은 척 굴었다. 기실 멀쩡히 이해한 문장은 단 한 줄도 없었음에도.

사쿠라기가 이 상황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든 간에, 카에데는 언제나와 같이 행동했다. 결정되었으니 실행한다. 단순한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처럼 문가에 선 그가 언제 켰는지도 모를 침실 불을 껐다. 작은 소음과 함께 방의 주인과 퍽 잘 어울리는, 고만고만한 톤을 가진 가구들이 꺼진 불 아래로 차차 모습을 감추어 갔다. 제법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이불이 가져다주는 온기가 따뜻해서 사쿠라기는 내려앉는 어둠 속에서 몇 번이나 눈을 굴렸다.

빛이 사라진 환경에 채 적응하지 못한 시야에 담기는 건 대부분 윤곽조차 흐릿한 가구들이다. 태반이 어둠뿐이니 손수 불을 끄고도 떠나지 않는 실루엣이 유독 눈에 띄었다. 금방이라도 방문을 닫을 것처럼 문고리를 잡고 선 그의 등 뒤로, 거실의 불빛이 들이치고 있었기에 더욱. 낯선 풍경과 온기 속에는 낯익은 침묵이 자리했다.

사쿠라기는 문득, 호의라는 단어가 형체를 가진다면 이 같은 모습을 갖고 찾아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도 아니면 꾸깃꾸깃 바지 주머니에 담기게 된 작은 종잇조각과 같은 형태거나, 주인 대신 차지한 포근한 이불일 수도 있을 터다. 좀처럼 속내를 종잡을 수 없는 이웃을 의심할 바에야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던 사쿠라기가 먼저 침묵을 흐트러트렸다. 그가 막 문을 닫고 떠나려는 게 느껴질 즈음이었다.

“큰 여우 아저씨, 뭐 좀 묻자.”

“……뭔데.”

‘의외로 뭐든 잘 들어주는 카에데’는 이번에도 걸음을 멈추었다. 반쯤 닫혔던 문이 다시 열렸다. 빛이 턱없이 부족한지,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제 얼굴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더 술술 입이 열렸다. 밤이 늦어서야 찾아온 여유에 지난 시간이 물밀듯 머릿속을 채운 탓인지도 몰랐다.

“어제 말이야, 왜 비닐봉지만 두고 간 거야?”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답 사이의 간극이 길었다. 어느새 천장으로 눈을 돌린 사쿠라기가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눈꺼풀을 여닫으며 적당히 셋을 셈했을 때, 다시 카에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시락은 제대로 두고 갔는데 뭐가 문제야. …저녁에 일이 있었어. 앞으로는 없을 거다.”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라…. 앞으로 없을 거라는 건 또 뭔 소리야. 다 들으라고 종알거리던 사쿠라기가 한 박자 늦게 앞서 들려온 말을 되짚었다. 유독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저녁에 일?

“일을…, 해? 약속 말하는 거야?”

“……헛소리할 거면 문 닫고 간다.”

사쿠라기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순수한 의문만을 담은 물음이었다. 듣는 쪽은 달랐는지, 의외로 뭐든 잘 들어주는 카에데는 어디 가고 가차 없는 카에데만 남았다. 빛이 드는 자리가 순식간에 좁아진다. 잠깐, 잠깐, 잠깐! 또다시 말로 그를 붙잡은 사쿠라기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당사자 반응이 이러니 더 캐낼 정도로 궁금하지는 않았다.

“거, 있잖아.”

저도 모르는 새에 어조가 대번에 차분해졌다. 또 뭐. 그런 의도를 담은 눈빛이 어둠 너머에서도 느껴지는 듯했다. 사쿠라기가 크게 한 번 헛기침을 했다. 저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는 목소리가 스스로도 조금 낯설었다. 아주 조금. 기껏 불렀으면 말을 해야 하는데, 생각보다도 입이 먼저 움직여 붙잡고 보니 화제가 하나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그럼에도 낯선 망설임 속에서 입을 연 까닭은, 기다려주는 이가 있어서였다. 어둠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해남 녀석들이랑 붙은 경기, 나 때문에 졌거든. 근데…….”

“네 탓 아니야, 멍청아. 패인은 너보다는 다른 데에 있겠지.”

“뭐야, 알지도 못하면서 안 어울리게 위로부터 하지 마.”

또 멍청이래! 부러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눕던 사쿠라기의 머릿속에 기시감이 엄습했다. 바로 몇 시간 전, 루카와와 나눈 대화가 아직 채 옅어지지 않은 탓이다. 루카와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 녀석은 제 실수 하나가 승패를 좌우할 만큼 자신이 대단한 전력은 못 된다는 뜻으로 한 소리였지만. 어쩌면 사쿠라기가 읽어내지 못했을 뿐, 카에데의 말에도 그와 같은 의미가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여우 녀석이랑 비교를 좀 안 하려고 해도 카에데는 꼭 이렇게 잊을 만하면 비교할 거리를 만들어다 바쳤다. 관두자, 관둬. 사쿠라기가 어둠 속에서 보이지도 않는 손짓으로 카에데를 내보내려 할 때였다.

“봤어.”

“……뭐?”

“봤다고. 어제 그 경기. 결승 리그 첫 시합인지 뭔지 네가 하도 떠들어대서.”

“진짜로 봤다고?!”

벌떡. 사쿠라기가 몸을 일으켰다.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삽시간에 속에서 마구 뒤엉킨다. 적어도 그 안에는 어쩔 수 없는 창피함이나 다 풀어내지 못한 분함 따위가 확실히 들어있을 터였다. 루카와와 치고받으며 털어냈던 감정만큼은 아니라 해도 말이다. 여우 녀석도 가끔 도움이 되긴 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이쯤 되니 이전의 가정이 훨씬 더 그럴듯해졌다. 이만하면 확실한 증거라고, 사쿠라기는 자신할 수 있었다.

“내가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큰 여우 아저씨 사실은 이 천재의 팬이지? 천재를 좋아하는 걸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으니까 숨기지……,”

“다시 누워. 헛소리할 거면 문 닫고 간다고 했을 텐데.”

언젠가처럼 가차 없이 말이 잘려나갔다. 습관적으로 툴툴대면서도 사쿠라기는 착실히 다시 드러누워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 올렸다. 나중에 악수해 달라고 해도 안 해줄 거야. 씩씩거리는 소리가 한층 커졌다. 금방이라도 방을 떠날 듯이 굴던 이는 또다시 빛이 드는 자리를 좁히다가도 다시 넓혀왔다. 보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문가에서부터 변덕스레 빛이 들이치니 사쿠라기의 시선이 절로 그쪽을 향했다. 문은 더 열어놓고도 금세 떠나갈 듯 거실로 반쯤 몸을 튼 카에데가 보였다. 빛에 드러난 얼굴의 반절이 변함없이 담담했다. 움직인 입술이 내뱉은 목소리마저 그랬다.

“퇴장은.”

무심한 어조가 문가에서 떨어져 어둠 속으로 번져나갔다. 한없이 짧은 문장이 물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음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에는 그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만 같다. 어둠을 사이에 둔 채 똑바로 마주한 시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사쿠라기는 언제 들이켰는지도 모를 숨을 천천히 내뱉은 후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안, 당했어. 이번에는. ……봤다면서 그건 왜 물어.”

“그만하면 잘했어. 너치고는.”

사쿠라기의 입이 꾹 다물렸다. 진짜 뭐야. 농구 그만두라고 할 때는 언제고. 괜한 말이 목구멍에 갇힌 채 맴돈다. 황급히 몸을 일으켰을 때와는 다른 감정이 그 안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형체도 없는 것을 한 번에 삼키듯, 사쿠라기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인다. 큰 여우 아저씨. 줄곧 귀 기울이고 있었다는 신호처럼, 그제야 익숙한 호칭을 입에 담는다. 나 머리 밀 거야. …머리는 왜. 나 때문에 진 거니깐. 또 그 소리.

이런 실랑이가 왜 질리지 않을까. 타박이나 다름없는 말을 들으면서도, 사쿠라기는 그런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천재의 변화를 특별히 먼저 알려주는 거라고. 영광으로 알아.”

빛 드는 자리가 좁아진다. 눈을 감아 더는 카에데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돌아오는 답이 없어도 사쿠라기는 하고 싶은 말을 속에 담아두는 방법 따위는 모르는 사람처럼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전국대회도 보러 와.”

이 천재를 보러 말이야.

선언과도 같은 말이다. 결승 리그 1차전은 패했을지라도, 남은 2차전과 3차전에서는 승리를 거둬 전국으로 가리란 자신 가득한 선언. 어둠 속에서 사그라드는 말을 끝으로, 문이 완전히 닫혔다. 끝끝내 답은 없었다. 다만 발을 끄는 소리 사이의 머뭇거림과 감은 눈 너머에서 닿던 시선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느꼈다.




04. 나비효과

익숙지 않은 집에서 맞이한 아침은 낯선 만큼 새로웠다. 가장 먼저 사쿠라기를 반긴 것은 하룻밤 사이 눅눅해진 과자와 제 키보다 작은 소파에 몸을 구긴 채 잠들어 있는 카에데였다. 설마 그가 마땅한 대안도 없이 손님을 하나뿐인 침실에서 재우리라곤 상상도 못 한 사쿠라기가 무어라 한참을 떠들었지만, 돌아온 반응은 졸음으로 한없이 느린 손짓뿐이었다. 그마저도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잠기운 하나 이기지 못하는 어른을 깨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쿠라기는-솔직히 말하자면 깨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곤히 잠든 그를 내버려 둔 채 홀로 아침을 때웠다. 전날 카에데가 미리 사둔 도시락과 눅눅한 과자는 그런대로 먹을 만한 아침 식사였다.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있다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평화롭고 고요한, 그런 아침이었다.

카에데는 사쿠라기가 지난밤 선언했던 ‘변화’를 실천하러 갈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귀가 때마다 문 앞에서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이 퍽 익숙했기에, 사쿠라기는 그가 어지간히도 잠이 많은 편이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아 할 수 있었다. 그런 모습까지 취미가 잠자기라고 말했던 ‘그 녀석’과 닮았다, 고. 자연스레 이어진 생각에 혼자 휘휘 고개를 젓기는 했지만.

기대도 하지 않은 마중까지 받으며 옆집을 나설 때에는 이미 해가 중천에 뜬 시간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성실한 학생과는 거리가 먼 자유로운 등교였다. 종종 어른 행세 비슷한 것을 해오던 카에데는 이런 일에는 별말을 얹지 않았다. 사쿠라기가 이제 간다며 현관을 나설 때, 그 변화인지 뭔지만 끝내고 나면 딴 길로 새지 말라며 한마디 했을 뿐이다. 마치 이 정도 일은 크게 상관없다는 양 무미건조한 태도였다. 그보다는 당장 밀려오는 졸음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해서, 사쿠라기는 그 반응이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다. 다 큰 어른이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서서 쏟아지는 잠을 견디는 모습이 신선해 그랬다는 것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예고장을 받은 이가 단 한 명뿐인 사쿠라기 하나미치의 ‘변화’는 오후에나 북산고교에 퍼져나갔다. 바싹 짧아진 빨간 머리는 여기저기서 작은 소란을 몰고 오기 좋은 화젯거리였다. 며칠 동안은 웃음과 구경꾼을 동반하기 일쑤였으나, 고작 머리 하나 자른 일로 사쿠라기는 지난 실책을 돌아보기가 더는 전만큼 괴롭지 않았다. 그사이 연이어 사쿠라기를 찾아온 수많은 사건이 모여 그 한 번의 실패를 무디게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혹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인터하이를 전국대회까지 이어가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관문이 코앞에 닥친 탓일 수도 있다. ‘타도 무림’과 ‘타도 능남’이라는 관문은 결승 리그 첫 시합에서 패배한 북산에게는 반드시 달성해야 할 과제였으니까.

변화는 변화로 이어진다. 모든 승패가 결정되기까지 단 며칠, 사쿠라기는 골밑슛 맹특훈으로 여념이 없었다. 부활동이 끝난 후에도 이어진 특훈으로 사쿠라기의 귀가가 늦어졌기에, 자연스레 카에데와의 저녁 식사 시간 역시 늦춰졌다. 사쿠라기가 언제 돌아오든 카에데는 항상 같은 모습으로 사쿠라기를 기다렸다. 그가 늘 먹던 포춘쿠키는 카에데가 처음 던져주었던 날부터 줄곧 사쿠라기의 차지가 됐다.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한 것이 혼재한 시간 속에서, 그는 더는 농구를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았다.

첫 만남부터 사쿠라기의 박치기를 불러왔던 발언이 잠잠해진 것은 분명 큰 변화였으나 더 눈에 띄는 변화는 따로 있었다. 저녁 시간에 만나는 게 당연했던 이웃이 아침에도 종종 얼굴을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식사 시간이 늦어질 즈음부터 카에데는 사쿠라기의 등교 타이밍에 맞춰 집을 나섰다. 그가 직접 밝힌 사유는 ‘아침 운동’이었다. 검은 트랙 팬츠에 그에 맞춘 듯한 재킷, 러닝화 따위의 스포츠웨어를 갖춰 입은 모습이 보란 듯이 눈에 들어오니 사쿠라기도 처음에는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가 잠 하나 이겨내지 못해 사쿠라기 혼자 아침을 먹게 한 게 고작 며칠 전의 일이라 해도 말이다. 대개 새로운 결심이라는 것은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고, 때로는 이런 우연도 있는 법이니.

참고로, 사쿠라기가 한층 잦아진 이웃과의 만남을 ‘어쩌다 겹친 우연’이라 생각한 것은 고작 3일뿐이다. 생각이 바뀐 까닭은 단순하지만 명확했다. 그 만남이 한 번이 아닌 두 번이 되고, 집 앞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의 만남이 되자 더는 우연이라 볼 수 없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무림과의 결승 리그 2차전이 치러지는 당일 아침, 사쿠라기 혼자만의 특훈 시간에 카에데가 난입해 왔으므로 더더욱 의심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하고.

그날도 카에데는 그새 취미가 된 아침 운동 핑계를 댔다. 러닝 도중 지나가는 길에 마침 공원 농구 골대 앞에 있는 사쿠라기가 보여 들렀다나. 거기까지는 사쿠라기도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나타난 이웃이 그 잘난 취미를 즐기러 다시 떠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그는 퍽 당당하게 사쿠라기가 타월을 걸어둔 낮은 철제 울타리에 기대앉아 사쿠라기를 지켜봤다. 시선 이전에 존재감부터가 부담스러운 남자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쿠라기가 아무리 눈치를 줘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말을 걸어 봤자 돌아오는 답은 짧았고, 평소처럼 실랑이로 넘어가도 반 이상은 사쿠라기 혼자 열이 받아 대화가 끊겼다. 경기 시작 전에 애써 계획한 특훈 시간을 뺏길 수 없었던 사쿠라기는, 대화 시도 열 번 만에 무시가 가장 나은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 알수록 이상하냐…, 큰 여우 아저씨는.

200개. 정확히 그만큼의 슛을 끝낸 사쿠라기가 맨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중얼거렸다. 맑은 하늘 아래로 높게 우는 새소리가 짤막한 말 한마디로도 돌아오지 않는 답 대신 간극을 메웠다. 크게 숨을 들이쉬자 이른 아침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우는 게 느껴졌다. 쉼 없이 이어진 슛으로 차오른 숨과 빠르게 뛰는 심장이 그 어느 무엇보다 기민하게 이를 반겼다.

─혹시 말야……, 혹시라도 이 천재가 잠들면 꼭 깨워. 오늘 10시에 무림 녀석들 상대하러 가야 하니까.

땀에 젖은 피부 위를 훑는 바람이 가벼웠다. 그날의 사쿠라기가 눈을 감은 채 계속 중얼댔다.

─큰 여우 아저씨, 듣고 있지? 거기 있는 거 다 알거든?

이 몸은 천재니까…. 말을 채 다 끝맺지도 못하고, 사쿠라기는 밀려드는 수마에 잠겨야 했다. 아침 특훈을 모두 마친 끝에 덮쳐온 탈력감, 그간의 피로. 그런 것들이 사쿠라기를 순식간에 잠으로 이끌었다. 그때까지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진 카에데와 이제는 얼마나 긴 시간 받아냈는지도 모를 시선이 조금은 믿음직스러워졌다는 사실 역시 영향을 주기는 했을 터였다.

그러면 안 됐는데.

아악! 사쿠라기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런 비명이 절로 튀어나오는 시간이었다. 10시 10분. 10시로 예정된 경기는 이미 시작되었을 때고, 카에데는 진작에 사라져 있었다. 다행히 그날의 북산은 무사히 승리를 거두었다. 사쿠라기가 전력을 다해 달려가 시합이 끝나기 전 합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라는 식의 이상적인 전개는 아니었지만 이 일로 카에데와 잘잘못을 따질 기회는 오지 않았다. 같은 날 닥친 안자이 감독의 입원이라는 큰 사건과 바로 그다음 날로 예정된 능남과의 경기가 사쿠라기에게 짧은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완연한 여름을 맞을 동안 유독 특별했던 사건은 그 정도가 다였다. 북산 농구부의 진정한 여름, 인터하이는 지역 예선에서 끝나지 않고 이어져 전국 대회를 앞두게 됐다. 무림에 이어 능남과의 경기에서도 승리했기에 맞이할 수 있었던 결과였다.

그간 카에데로 인해 시작된 ‘저녁 시간 외의 만남’은 한층 다른 방식으로 바뀌었다. 만남이 이루어지는 과정 자체는 무림과의 경기가 치러진 당일과 흡사했다. 사쿠라기가 근처 공원에서 연습을 하는 날이면, 어느 순간 카에데가 합류한다. 일정한 규칙 하나 없는 연습마다 제때 찾아오는 것이 신기해 저녁 식사 이후로 연습 시간을 바꾸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한번은 자연히 따라붙는 의구심에 사쿠라기가 따져 물은 적도 있었다.

─아침은 그렇다 치고, 저녁에 공원은 왜 지나가는데?

이때 돌아온 답이 가관이었다.

─취미. 저녁 러닝은 이사 오기 전부터 했었어.

카에데는 이번에도 농의 탈을 쓴 거짓말 같은 발언을 평소와 다름없는 낯으로 읊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쿠라기는 혼자만의 연습 시간에 더는 혼자가 아닌 점마저 싫지 않았다. 심지어는 어느 순간부터 툭, 카에데가 슛 폼 따위를 지적해와도-물론 큰 여우 아저씨가 뭘 아느냐며 툴툴거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싫어지기는커녕 익숙해지기까지 했다. 지난 한 달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만들어주었다.

매일 함께하는 저녁 식사 메이트이자, 종종 바깥에서도 마주하게 된 얼굴.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처음으로 열과 성이란 것을 다해 잘 해내고 싶은 일을 왜인지 옆에서 지켜봐 주는 사람. 어느 날 옆집에 이사 온 카에데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 단 한 명을 가리키는 표현을 곱씹던 얼굴이 골대가 있는 방향을 바라본다. 이윽고 사쿠라기의 손을 떠난 공이 림을 향했다.

“팔꿈치가 너무 벌어졌어.”

그 말과 동시에 림에 부딪힌 것이 바닥을 굴렀다. 반동으로 골대 근처 가로등 아래까지 굴러간 공을 쫓으며, 사쿠라기가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또 말로만 농구 20년은 한 사람처럼 구네.

“큰 여우 아저씨, 오늘도 한가해?”

이런 시간이면 두 번 중 한번은 해오던 질문을 사쿠라기가 반복했다. 공을 주워들어 뒤를 돌아보자 항상 같은 자리에 기대앉아 있는 카에데가 보였다. 사쿠라기의 타월 걸이 역할도 겸하는, 공원 구획 구분 용도의 낮은 철제 울타리는 그리 안락해 보이지 않음에도 항상 카에데의 의자 신세였다. 비교적 해가 긴 시기라 한들 이 시간은 어두운 게 당연할 때라 엷은 어둠에 몇 겹은 덮인 듯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공원 곳곳에 설치된 가로등이 아무리 열심히 빛을 비추어도 그가 있는 데까지 닿지는 못했다. 눈이 부시다는 이유로 카에데가 늘 같은 자리를 고집한다는 것을, 이제는 사쿠라기도 알았다.

“바쁜 시간 쪼개서 올 이유 없어. 쓸데없이 똑같은 질문 하지 마.”

같은 질문에 늘 꼬박꼬박 답을 주는 그가 말했다. 일상의 한 조각이나 다름없는 반응이다.

“그으래? 한가하단 말이지?”

기다렸다는 듯 히죽 웃은 사쿠라기가 주워 든 공을 던진다. 오늘의 변화구였다. 여름밤의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잠깐이다. 사쿠라기의 손을 떠난 농구공이 제법 큰 소리를 내며 카에데의 손안에 안착했다. 맥없이 공을 맞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1할 정도는 있었던 사쿠라기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혹여 저보다 열다섯은 많은 아저씨가 잘못 맞기라도 할까 봐 제 딴에는 아주 조금 살살 던지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깔끔하게 받아낼 거란 예상은 못 한 눈치다.

“갑자기 뭐 하는 짓이야.”

어느새 한 손으로 공을 든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다른 생각으로 얼이 빠져있던 사쿠라기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한 번 한 것은 그때다. 중대한 발표를 앞둔 사람처럼 목을 가다듬고, 못된 장난을 꾸미는 아이 같은 표정을 걸기도 한다. 어떻게 들어도 수상쩍을 목소리까지 준비하고 나서야 사쿠라기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특별히 이 천재가 큰 여우 아저씨한테 기회를 주려고.”

너무도 유치한 반응 때문일까. 외려 카에데가 표정을 풀었다. 또 뭐. 멍청이가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이제 그는 말도 없이 눈빛과 표정만으로 ‘멍청이’ 소리를 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 멍청이 소리의 주인공인 사쿠라기 역시 이를 모두 읽어내는 재주가 생겼음은 물론이다. 카에데가 무언의 험담을 하든 말든, 오늘의 사쿠라기는 그간의 일을 한 번에 갚아 줄 ‘궁극의 계획’을 세워둔 지 오래였다. 머릿속에는 이미 그럴듯한 시나리오 아래 어떤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한 번의 슛이 얼마나 어려운지 몸으로 겪고 나서야 깨달은 카에데가 천재 사쿠라기의 고충과 노력에 감탄한다. 각본 사쿠라기, 연출 사쿠라기, 감독과 주인공도 사쿠라기다. 단 한 문장으로도 완벽하고, 충분하다. 기실 이 시나리오는 그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 핑곗거리를 만든 것이나 다름없으니, 장난은 겸사겸사였다. 정말로, 겸사겸사.

“큰 여우 아저씨.”

카에데가 ‘멍청이’라고 쓰인 눈빛으로 자주 보곤 하는 그 표정을 그대로 건 사쿠라기가, 골대를 고갯짓했다. 호명 외에 별다른 말은 덧붙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빨간 머리통 아래의 우스운 각본을 훤히 들여다본 양, 카에데가 한숨을 쉬었다. 한심하다고 말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는지 그는 사쿠라기의 예상보다 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골대 앞으로 향했다.

“이번 한 번만이다.”

몇 번은 거절이 돌아올 거라는 생각에 준비해온 대사들이 다 무의미해졌다. 설마 쫀 거 아니지? 같은, 뭐, 그런 식의 도발들 말이다. 평소와 다름없는 걸음으로 골대 정면을 지나친 카에데가 비스듬히, 골대 우편에 섰다. 그 걸음에 맞춰 설렁설렁 발을 옮기기 시작한 사쿠라기가 당연한 수순처럼 조금 전까지 카에데가 앉아있던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왼쪽에 섰다면 가까웠을 텐데. 큰 차는 아니었지만 멀어진 카에데는 서있음에도 평소보다 조금 작아 보였다. 가까운 자리 놔두고 왜 저렇게 멀리 가? 사쿠라기의 혼잣말을 들은 그가 힐끗 시선만 옮겼다 거두었다.

“잠자코 보기나 해.”

기다림은 필요 없었다. 사쿠라기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공이 카에데의 손을 떠났다. 그가 골대 앞까지 걸음을 옮긴 시간과는 비할 수도 없이 짧은 시간이 사쿠라기의 망막 위에서 잘게 쪼개어졌다. 공이 떠나기 전에 분명, 손이나 팔보다도 발끝이나 무릎이 먼저 움직였던 것만 같다. 흐린 어둠 아래에서도 공을 밀어 낸 손의 윤곽이 또렷이 잡힌다. 별다른 움직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왼손과 다르게 오른쪽 손끝만은 허공에서 흐르듯 움직이고, 똑바로 림을 향한 시선에 흔들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망설임이라고는 하나 없는 슛이 찰나의 정적을 꿰뚫었다.

쉬익, 타앙.

림에 부딪히는 소리 한 번 나지 않은 매끄러운 점프슛이었다.

“공은 네가 주워.”

감탄할 새도 없이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눈으로 본 광경을 세 번은 더 복기하고 나서야, 사쿠라기는 카에데가 한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언제 꾹 다물었는지도 모를 입이 뒤늦게 불만을 토로했다.

“어른 맞아? 이런 걸로 쪼잔하다 쪼잔해.”

우우, 천재의 인정을 받을 기회를 이렇게 걷어차다니. 당장 떠오르는 생각들이 두 번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장난스러운 야유와 함께 입 밖으로 줄줄이 나온다. 보란 듯 껄렁한 걸음을 옮겨 공 앞까지 걸어간 사쿠라기가 입을 비죽였다. 딱 이 천재의 발끝에 미칠 정도만큼은 멋있었다, 같은 사쿠라기식의 인정이자 감탄은 마음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보았던 장면마저 같은 처지가 되지는 않았다. 이제 겨우 농구를 배운 지 3개월이 지난 사쿠라기조차 카에데의 폼이나 슛 자체가 범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농구를 좋아해서 슛 연습만 열심히 한, 이 천재 바스켓맨의 숨은 팬인가. 여태 그 전제를 버리지 못한 사쿠라기가 막 공을 집어들었을 때였다.

공원 주변을 에워싼 철조망 너머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이윽고 인영은 골목을 비추는 가로등 빛에 닿아 또렷한 형체를 얻고, 그렇게 선명해진 얼굴은 지금의 사쿠라기에게 가장 익숙한 낯을 드러낸다. 밤보다 어두운 검은 머리카락 아래에서도 눈에 띄는 얼굴을 어떻게 못 알아볼까.

“공 주우라고 해놓고 어디까지 간…….”

반사적으로 열렸던 입이 닫혔다. 뒤를 살피자 똑같은 얼굴이 보였다. 뒤에도 카에데 앞에도 카에데…, 아니, 앞은 루카와다. 다시 앞을 바라보자 그리 넓지 않은 공원 변두리를 따라 심어진 나무와 풀숲 사이사이로, 자전거를 탄 루카와의 모습이 힐끔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광경이 시야에 담겼다.

여우 자식이 이 시간에 왜 돌아다니는 거지? 첫 번째 의문과 함께 루카와의 인영이 조경수가 연이어 늘어선 구역 뒤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하필 왜 여기 있는 거고. 두 번째 의문과 함께 그가 탄 자전거 앞바퀴가 나무 기둥 뒤를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뭐 저렇게 빨라. 아니, 누가 빨리 감기 한 거 아니야? 셋, 넷, 의문인지 푸념인지 모를 것들이 연달아 빠르게 사쿠라기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등 뒤에서 카에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서서 뭐 하고 있느냐는 식의 물음에는, 분명 앞에 ‘멍’으로 시작하는 예의 그 추임새가 붙었던 것도 같았다.

그보다 내가 왜 이런 고민을……. 다섯 번째는 끝맺지도 못한 사쿠라기가 뒤를 돌았다. 금방이라도 크게 열릴 듯했던 입이 합, 다물렸다. 큰 여우 아저씨, 오늘 덥지 않아? 농구공을 옆구리에 낀 채 묻는 목소리가 작다. 애매한 까치발을 든 사쿠라기가 게걸음으로 타월을 걸어둔 낮은 울타리 앞까지 향했다. 카에데의 주의를 끌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밑도 끝도 없이 사쿠라기를 채운 탓이다.

우습게도 이 생각이 뿌리내린 근원지는 시답잖은 장난이었다. 단지 그것뿐이다. 여름이 성큼 다가오기도 전, 미야기가 귓가에 속삭였던 웃기지도 않은 괴담 하나. 제 입에 올리기도 어색한 ‘도플…’, 아무튼 그런 이상한 이름을 가진 녀석. 아무리 사쿠라기라 한들 그런 괴담에 홀랑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에 겁을 집어먹거나, 걱정을 한가득 안게 되었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됐다. 미야기조차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고. 사쿠라기는 자신할 수 있었다. 다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 따라,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어쩔 수 없이 ‘만약’을 떠올리고 만 것뿐이다.

‘혹여나, 몇천 몇만 몇억의 확률을 뚫고, 어떤 괴담이나 영화 속의 이야기처럼───’

그렇게 물꼬를 튼 가정은 삽시간에 자라난 비이성적 사고의 가장 좋은 밑거름이 된다.

“…내가 한 말 듣긴 한 거지? 엉?”

사쿠라기가 무어라 말하고 어떻게 굴든, 돌아오는 답이 없는 것을 보면 카에데는 입을 열기도 지친 듯했다. 혹은 이제 이런 돌발 행동은 놀랍지도 않다고 여기고 있거나. 어느 쪽이든 항상 앉던 자리로 향하는 카에데의 걸음과 주의를 끌려는 사쿠라기의 걸음이 같은 장소로 향하고 있음은 확실했다. 카에데의 단골 좌석 앞에 서서 울타리에 걸린 타월을 잽싸게 집은 사쿠라기가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원 주변을 한 바퀴 빙 돌듯, 골대의 뒤편을 지나 직각으로 꺾인 철조망을 따라 코너를 도는 자전거가 눈에 들어왔다. 당장 카에데가 뒤를 돈다면 사쿠라기가 보는 것과 같은 풍경이 훤히 보일 터였다. 이제 ‘만약’이 자라날 길은 정해져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이웃과 루카와 카에데, 똑같은 얼굴을 가진 두 사람이 마주쳤을 때,’

사쿠라기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인다. 허무맹랑한 가정임을 앎에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크, 큰 여우 아저씨?”

“또 뭘 꾸미는 거야.”

“그…….”

“멍청…, ……. 너 지금 안간힘 쓰는 거 다 보이거든.”

마주 본 채로 대화가 엇갈린다. 행동은 몰라도, 사쿠라기가 생각해 낸 말은 뛰어난 임기응변은 못되었다. 진작부터 이상함을 눈치챘던 모양인지 카에데는 더는 못 봐 주겠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바닥으로 향한 눈동자가 짧은 간극을 두고 옆으로 흐른다. 이를 낱낱이 살피고 있던 게 분명한 반응 속도로, 사쿠라기가 휙 타올을 든 손을 뻗어 카에데가 옆을 보지 못하게 막았다. 이 각도에서는 루카와가 보이지 않을 게 뻔했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한층 더 수상쩍게 느껴질지 모른다는 걱정도 뒷전이었다. 그 와중에도 얼굴을 덮었다가는 큰 소란이 벌어지리란 생각에 귓가 근처 허공에 타올을 늘어뜨리기만 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때까지도 사쿠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그 최악의 상황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나 다름없다는 당연한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어느 순간부터 가슴이 술렁일 정도의 불안이 어딘가에 숨어 몸집을 불리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만약’이라는 가정은 왜 한번 시작되면 멈추지 않는지, 저조차 당장 근간을 알 수 없는 불안은 어디서 시작된 건지. 사쿠라기는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그가 아는 것은 허무맹랑한 괴담에 기반한 ‘만약’의 종착점뿐이다.

‘정말로, 그 이야기처럼 된다면.’

크게 들이켰던 숨이 사쿠라기의 부자연스러운 동작처럼 뚝뚝 끊어져 입술 새로 빠져나왔다.

“너…….”

흉흉한 목소리였다. 사쿠라기는 이 같은 부름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아마도, 그가 이사 왔던 첫날. 그것도 정면으로 박치기를 날린 직후에. 나직한 울림 끝에 한숨이 이어진다. 그날만큼은 아니어도 냉랭한 기세가 스멀스멀 카에데의 시선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아니, 느껴졌다. 문제는 루카와를 본 후부터 사쿠라기의 멀티플레이 능력이 0에 수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다른 방안을 찾거나 그만두었을 텐데, 이 비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에 반박할 간단한 근거를 찾았을 텐데, 카에데의 먼 등 뒤를 지나가는 똑같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자 도저히 여념이라는 것이 생기지 않았다.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결코 그 ‘만약’을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

‘…죽는다면.’

일순 흔들린 시선이 철조망에 가려진 루카와에게 닿았다. 낯익은 얼굴이 선명했다.

“뭐가 있길래 못 보게 하는 거지.”

멀쩡한 사람 눈앞에 두고 다른 생각 하지 마, 멍청아. 스산한 말이 내려앉기 무섭게 카에데가 뒤를 돈다. 예고도 없이 이어진 행동은 면밀한 계산 끝에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는 사쿠라기가 주의를 돌린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그 안을 비집어 파고들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드라이브인이자 타고난 반사신경이 보통이 아닌 사쿠라기조차 간신히 좇을, 그런 판단이었다.

옆을 막아야 하나. 아니면 뒤? 팔을 붙잡는 쪽이 나았나. 생각은 몸이 반응하는 것보다 느렸다. 이런 순간이면 늘 그랬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상상 이상의 집중력을 십분 발휘하는 사쿠라기의 재능은, 싸움이나 경기 한복판에 놓인 순간이 아님에도 드러났다. 표현이 거창하다 뿐이지 결말은 단순했다. 놀라울 정도의 반응 속도로 대뜸 몸부터 움직인 끝에, 사쿠라기는 생각 없이 이루어진 판단의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했다. 비록 그 결과란 것이 울타리에 발이 걸려 휘청거리는, 꼴사나운 모습일지라도 말이다.

윽. 중심을 잡느라 악다문 잇새로, 또 생각보다 한발 빠른 반응이 소리가 되어 새어 나왔다. 토막 난 듯한 신음은 그대로 끊기는 듯하다가 손목을 붙잡는 힘에 의해 곧장 당혹감 섞인 감탄사로 변해갔다.

“…어엉?”

간신히 잡혀가던 중심이 다시 기울었다. 손목을 이끄는 힘을 따라, 그러니까, 언제인지도 모르게 뒤돌던 것도 멈추고 사쿠라기 하나미치를 붙잡은 카에데를 따라.

이미 수초를 억겁인 양 나누어 받아들이던 사쿠라기의 감각은 과부하에 걸린 지 오래였다. 그랬기에, 두 귀로 듣고 두 눈으로 보고 온 피부로 느끼고 있음에도 눈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해석해낼 수는 없었다. ‘사쿠라기’ 하고 저를 불러 오는 낮은 외침과 흔들리는 눈동자를, 고작 휘청이는 일 따위가 뭐라고 끌어당기는 힘을, 손목이 저릴 정도로 붙잡아 오는 손끝을, 등 뒤를 감싸기 시작한 또 다른 팔을, 가쁘게 흩어지는 숨을, 어둠에 가려진 낯을, 다급한 뒷걸음질을, 카에데를, 그를.

탕, 타앙.

공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빙글, 시야가 돌아갔다.

 

*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던 등을 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삶이란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준 광경은, 상실과 죽음의 이름을 덧입어 기억 속에 잔존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온 부친의 죽음은 그렇게 하나의 기억이 됐다. 이는 필연적으로 그 이름이 가진 무게만큼의 아픔을 가져올 때가 있었으나, 끈덕지게 따라붙어 일상 곳곳에서 모습을 보이는 종류의 각인은 아니었다. 사쿠라기 하나미치 스스로가 그런 것이 되게 두지 않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무엇보다 아프고 무거운 경험에 맹목으로 매달리는 삶은 그대로 가라앉아 매몰될 수밖에 없음을 알았으므로.

홀로 남은 사쿠라기는 그만의 방식으로 상실과 살았다.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 귀가에 차차 익숙해졌고, 짧은 인사말 한마디 없이 하는 식사를 일상이라 받아들였으며, 그 혼자뿐인 공간에서 잠드는 나날을 당연하다 여겼다. 하나하나 가르쳐 주는 이 없이도 사쿠라기는 모든 일을 곧잘 해냈다. 이만하면 그날의 기억으로 새겨진 상처 위에는 일찍부터 착실히 새살이 돋기 시작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구태여 문제를 꼽자면 상처가 적당히 아문 뒤에도 남은 흉뿐이다. 어떤 기억은 어느 순간 불쑥 나타나 흉 진 자리를 다시 비집고 나오기도 한다는 걸, 열여섯의 사쿠라기는 안다.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표현이 더 옳을 터다. 그래, 예컨대 그것은 안자이 감독의 쓰러진 뒷모습에서도 기어나와 그날의 일을 떠올리게 했다. 지난 6월 일어난 안자이 감독의 입원 사건은, 그가 쓰러질 당시 함께 있던 사쿠라기의 재빠른 조치로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기에 생긴 결과였다. 공원에서 잠이 들어 출전조차 못 했던 시합과 카에데와의 잘잘못 담판이 뒷전이 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날은 어쩔 도리 없이 새어 나온 눈물을 몇 번 훔치는 일만으로 지난 과거를 다시 털어버릴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후로 이제 한동안은 또다시 생각날 일 없는 기억이라 여겼는데.

이게 뭐냐고오…….

비명이라도 지를 수만 있다면 사쿠라기는 그러고 싶었다. 이 모든 상황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헛된 바람을 가질 만큼 닥친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도망이 절실하기도 했다. 반면 머릿속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게 갠 상태였다. 타의에 의해 앞으로 고꾸라진 반동인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짓거리를 연이어 벌인 뒤의 충격인지 모르겠지만.

변명이야 할 수 있었다. 하필 ‘카에데’와 ‘루카와 카에데’가 너무도 비슷한 게 문제였다. 하필 미야기 료타가 그런 재미없는 괴담을 입에 담은 것도 문제였고, 하필 천재적인 두뇌가 그 이야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하필, 하필, 하필. 이렇듯 속으로 변명을 늘어놓는 중에도 불쑥불쑥 떠오르는 옛일이 가장 큰 문제였다.

사쿠라기는 가장 무거운 기억이, 무엇보다 크게 남은 흉이, 이런 방식으로도 제 발목을 붙잡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혹여나 몇천 몇만 몇억의 확률을 뚫고 그 이야기가 실재하게 된다면, ‘카에데’와 ‘루카와’ 두 사람 모두가 흔한 괴담의 주인공이 된다면. 그렇게 또다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등을 마주하게 된다면. 우습게도 사쿠라기는 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외면하지 못했다. 불안했고, 조금은 무서웠다. 부정도 없이 쉬이 인정할 정도로 명료한 감정이었다. 설사 그 감정이 손톱만 한 크기에도 못 미친다 해도, 죽음이란 것이 어떻게 현실이 되어 기억으로 남는지 그는 똑똑히 알고 있으니까.

비현실적인 가정임을 안다. 이전에도, 지금도 알고 있다. 알기야 아는데 기억이니 감정이니 하는 것이 사쿠라기를 마음대로 두지 않았을 뿐이다. 사쿠라기의 기행을 몸소 체험한 카에데만은 이 모든 변명을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사쿠라기에게 가장 비현실적인 존재는 이 해프닝의 원인을 그저 ‘멍청함’으로 축약해 버릴 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 자신은 ‘루카와 카에데’와 혈연관계라고 착각할 만큼 똑같으면서, 긴 시간 텅 비어있던 옆집을 새벽녘부터 꿰찼으면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제 보호자라도 된 양 굴었으면서.

카에데와는 정작 단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하고 있음에도, 사쿠라기는 머릿속에서 하염없이 이어지는 반론을 멈출 수 없었다. ‘카에데’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매일같이 사쿠라기를 기다리고, 함께 식사해 주며, 입은 험한 주제에 돼먹은 어른인 것처럼 때때로 곁을 지키고 있잖은가. 비현실적이란 수식어는 제 상상보다도 오히려 그에게 잘 어울리는 말일 터였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카에데의 돌발행동으로 사쿠라기를 떠나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농구공은 힘없이 구르는 소리도 내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던 자전거 소리는 이제는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잡히지 않았다. 그뿐인가. 자전거는커녕 사람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만큼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카에데는 어이없게 뒤로 넘어진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180은 거뜬히 넘어 190 가까이 되는 사쿠라기 하나미치를 넘어지면 큰일 나는 아이인 양 끌어당겨 놓고, 같이 무게중심을 잃어버려 흙바닥에 드러눕게 됐으면서도 말이다.

쿵, 쿵, 쿵, 쿵. 여태 몸도 일으키지 못한 사쿠라기의 귀에 빠르게 맥동하는 심장 소리가 들려온다. 카에데의 심장 소리다. 루카와의 기척을 더듬느라 쏟았던 신경이 잡아낸 소리는, 딱 붙어 함께 넘어진 탓에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왔다. 사쿠라기는 사람의 심장이 이토록 빨리 뛸 수 있다는 것도, 누군가의 심장 소리가 이렇게나 크게 들릴 수 있다는 것도 오늘이 돼서야 처음 알았다. 그나마 듣는 사람이 걱정될 정도로 가쁜 호흡은 어느새 잠잠해진 축이었다.

카에데는 온몸으로 그가 느낀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평소의 그를 생각하면 숨기지 못하는 상태라고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이 작은 사건 어디에 그토록 놀랄 거리가 있었는지, 사쿠라기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다만 큰 소리를 내며 넘어지기 직전부터 지금까지 등을 감싸 안은 팔이나 당시 들려온 다급한 숨소리, 여태 빠르게 뛰는 심장에서 그가 느꼈을 감정의 크기를 짐작할 뿐이다. 제가 벌인 일의 민망함과 잠깐의 더위는 참아볼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다쳐.”

낮게 눌린 목소리가 그치고는 볼품없었다. 풀벌레 하나 울지 않는 여름밤의 정적을 다 흐트러트리지 못할 만큼 작기도 해서, 사쿠라기는 그 말이 제게 하는 말인 줄도 몰랐다.

“네가 아무리 튼튼해도 똑같다고.”

운동선수가 되고 싶은 거라면 적어도……. 한없이 느리게 격양되던 말이 한순간에 가라앉으며 끊겼다. 사쿠라기를 안고 있던 팔에 서서히 힘이 풀린다. 부담스러우리만치 가깝던 체온이 멀어지고, 등 어딘가를 매만지던 손이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말을 반절도 이해하지 못한 사쿠라기가 머리를 굴리는 동안, 카에데가 마저 손을 뻗어왔다. 어깨를 감싸듯 잡아 밀어 내는 손길에 사쿠라기는 그제야 몸을 움직여 맨바닥에 엉거주춤 앉을 수 있었다. 얼빠진 낯이 어느새 몸을 일으켜 세운 카에데에게 향한다. 턱없이 모자란 가로등 빛과 밤은 그의 표정을 온전히 드러나지 못하게 했으나 완벽히 가리지도 못했다. 묽은 어둠 아래로, 식은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 끝이 드문드문 시야에 밟혔다.

“돌아가. 시간도 늦었으니까.”

카에데가 여상히 잔소리 같은 말을 해왔다. 언제나와 같은 어투는 볼품없거나, 작거나, 격양되어 있지 않다. 어스름에 덮인 무덤덤한 낯이 왼쪽 손목을 확인하는 것이 보인다. 정확히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왼쪽 손목 위를 차지하게 된 시계를. 그런 뒤에나 그는 뒤를 돌았다. 한 걸음, 그가 멀어졌다. 답도 듣지 않고 떠나려는 것을 알아차린 사쿠라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래 놓고 어디 가? 그것도 이런 시간에!”

“볼일 있어.”

일단 발부터 붙잡아 보려는 말에 그가 몸을 틀어 뒤를 돌았다. 뭐 문제 있느냐는 식의 표정이 왜인지 얄미워서, 사쿠라기는 다른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연습 후에는 항상 같이 돌아갔으니 오늘도 그래야 한다고 따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약속했던 일도 아니거니와 그간은 돌아가는 방향이 같아 어쩔 수 없이 그래 왔을 뿐이니까. 그저 조금 전에 했던 그 이상한 말들은 무슨 의미인지, 왜 그렇게 굴어서 신경 쓰이게 만드는지. 카에데는 제대로 답도 해주지 않을 것 같은 일에 관해 묻고 싶었다.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매번 혼자 연습하고 있는 자신을 찾아내 지켜봤는지 같은 건 진작부터 물을 생각도 없었으니까, 그 대신에라도.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아무려면 좋다고 묻어온 질문이 몇이나 되는지 짐작도 하지 못할 뒷모습이 다시 멀어진다. 제 넓은 아량은 눈곱만큼도 이해할 수 없을 수상하고 이상한, 비현실적인 이웃이 점차 작아졌다. 결국 참다못한 사쿠라기가 크게 소리쳤다. 어느 순간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어차피 오늘 해야 했던 이야기는 따로 있었으니.

“이 천재는 내일부터 합숙이야!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무려, 일주일! 그동안 이 천재님을 못 본다고. 알아? 큰 여우 아저씨 혼자 밥 먹어야 된다고!”

“…알아.”

주변이 워낙 조용해 멀어진 채로도 그 답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도대체 뭘 안다는 거야? 방금 들어 놓고 다 아는 척 굴면 그게 어른스러워 보이는 줄 알아? 검은 뒤통수를 보며 사쿠라기가 툴툴댔다. 그 모습이 작아지고 더 작아져 골목 안쪽 어둠에 삼켜질 때까지, 사쿠라기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

 

사위를 에워싼 풍경이 빠르게 멀어진다. 걸음 하나마다 눈에 띄게 달이 기울고, 왼쪽 손목 위의 시곗바늘이 성큼 움직였다. 앞에서 뒤로 흐르듯 스쳐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그는 어두운 골목 사이사이를 쉼 없이 달려 목적지로 향했다. 가고자 하는 곳이 정확히 어느 쪽인지, 혹은 찾고자 하는 것이 어디 있는지 따위를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주변을 스치는 광경에 낯익은 것이라고는 무엇도 없다 해도 괜찮았다. 지금은 오로지 하나만 생각할 필요가 있음을 그는 안다. 당장의 목적을 이루려면 그래야 했다. 그래야만 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익숙해진 것보다 한참은 앳된 얼굴을 생각했다. 조금은 작은 키와 덜 자란 몸을 생각했다. 몇 년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을 바보 같은 성정을 생각했다. 그가 상상해 왔던 것 이상으로 적막한 작은 집 안에 홀로 남은 뒷모습을 생각했다. 농구공을 쥔 손과 뛰어오르는 등, 빨간 머리카락 아래의 다채로운 표정을 생각했다. 사쿠라기 하나미치를 생각했다. 온 힘을 다해 그 하나만을, 한 사람을.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턱 밑까지 찬 숨과 열이 시야를 부옇게 만들었다. 한계에 다다른 다리가 서서히 느려질 즈음, 결코 지나치지 못할 붉은빛이 눈에 들어왔다. 목적지였다.

그 흔한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길 중앙을 떡하니 차지한 구식 자판기는, 무시하려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색을 두르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겁고 느린 걸음이 그 앞으로 향한다. 본래라면 제품의 모형을 진열해 두었을 자리가 텅 빈 채 그를 반겼다. 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버튼은 일정한 간격으로 저마다 붉은 빛을 반짝이다 꺼지기를 반복하고, 텅 빈 자판기 안쪽 위에서 떨어져 내부를 비추는 조명은 그보다 짙은 붉은색으로 내내 밝았다.

호흡을 갈무리하던 그가 툭, 이질적인 기계에 고개를 기댔다. 어깨가 크게 오르내릴 정도로 쉬지 않고 달렸음에도,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시선으로 앞을 바라봤다. 붉은 빛이 기댄 얼굴을 타고 미끄러져 떨어진다. 턱밑까지 흘러내린 땀방울은 빛이 옮아 채 다 붉어지기도 전 추락하며 바닥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기계에 못 박힌 시선은 깜빡임 하나 없이 긴 시간 이어졌다.

쾅!

신경질적으로 내리친 주먹이 커다란 소음을 만들어낼 때까지, 계속.

그게 신호인 것처럼 자판기가 발랄한 전자음을 내며 휘황찬란한 빛을 쏟아냈다. 덜컹. 그것이 평범한 소음과 함께 무언가를 뱉어낸 것은 그다음이다. 그는 몸을 숙여 한 손에 다 쥐고도 남을 것을 꺼내 들어 세게 움켜쥐었다. 손안에서 부서지는 것은 자판기의 우스운 전자음과 퍽 잘 어울리는 소리를 내며 잘게 조각났다. 그가 다시 손을 펼쳤을 때, 손아귀에는 투명한 포장지 너머의 볼품없는 잔해들과 이리저리 구겨진 종잇조각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종이는 형체가 기이하게 뒤틀렸음에도 그가 알고자 하는 것만을 어울리지도 않는 글씨체로 통보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50’이라는 숫자뿐이었지만, 그는 흰 종이 위에 쓰여있을 문장을 손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소원이 끝나는 날까지 앞으로 50일>

입술을 비집고 나온 긴 숨이, 늦은 새벽 미명 아래 흩어졌다.

 


05. 적과 백

지난해 전례 없는 성적으로 2년 연속 우승을 거두었던 디펜딩 챔피언과 정규 시즌 1위의 플레이오프 파이널 마지막 경기는 두말할 것도 없이 뜨거운 관심을 몰고 왔다. 구단 역사상 첫 3년 연속 디펜딩 챔피언의 자리를 노리는 도쿄 레반가의 에이스, 루카와 카에데의 존재 자체가 이슈에 이슈를 더했다 말해도 과언은 아닐 터였다.

국내 리그로 복귀한 지 올해로 2년, 루카와는 여전히 명실상부한 스포츠 스타였다. 그가 처음 복귀 소식과 함께 귀향했을 무렵에는 가십거리가 필요한 언론이 간간이 잡음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일찍이 NBA의 스타플레이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던 그가, 명문 구단이라 불리는 도쿄 레반가와 함께하게 됐다는 소식은 자연히 팬들의 기대를 불러일으켰으니까.

루카와 카에데라는 선수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지 오래인 만큼 그 기대는 고스란히 현실이 되었다. 루카와의 합류 이후 레반가는 유례없는 기록을 남기며 2년 연속 디펜딩 챔피언 자리를 차지했고, 이듬해인 올해 또 한 번 당당히 플레이오프 파이널에 도달해 3연패를 목전에 뒀다. 레반가의 검은 유니폼 위에 붉은 글씨로 쓰인 루카와라는 이름에 열광하지 않는 팬은 드물었다. 그렇게 그의 나이가 서른하나에 접어들 때까지, 그를 지칭하는 말은 수많은 변화를 겪는 것 같다가도 또다시 ‘에이스’니 ‘스타’니 하는 수식어에 종착했다.

혹자는 끝끝내 레반가가 3연패라는 역사를 썼던 그 순간, 루카와라는 농구 선수를 단편적인 단어로 수식하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고 말한다. 더블 클러치와 함께 마지막을 장식한 버저비터, 기적 같은 역전승. 영화 속 한 장면을 잘라낸 듯한 광경 속에서 림이 아닌 관중석으로 시선을 던지는 그의 모습은, 긴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한없이 이질적이었으므로. 그날부터 향후 몇 년간은 잊을 만하면 끌려 나올 장면은 한 스포츠 잡지 기자에 의해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게 된다.

정작 화려하다 못해 한층 장황하기까지 한 수식어를 더 떠안게 된 주인공은 기적의 역전승이니, 새로 쓰인 역사니 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루카와 카에데가 어떤 이던가. 고작 열여섯의 나이에 그저 농구를 잘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먼 이국땅을 목표로 했던데다 결국 그 목표를 이룬 농구 선수이자, 농구에 있어 둘째가라면 집념과 투지는 죄 불태울 인간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빛 좋은 찬사나 놀라운 업적이라 해도 그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구’ 그 자체니까. 물론 그 앞에는 지극히 당연한 조건이 하나 마련되어야만 했다.

‘평소의, 원래의 루카와 카에데라면.’ 그런 조건이.

팀을 3년 연속 디펜딩 챔피언 자리에 올린 주역, 루카와 카에데는 이 역사적인 날에 다른 의미로 이례적인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 만에 느끼는 것인지도 모를 술기운에 오로지 한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가 무겁다. 답답한 속은 밤공기를 몇 번이나 한가득 들이마셔도 도무지 트일 기미가 보이지 않고, 알코올이 그에게 가져다준 것은 기분을 가라앉히는 종류의 취기뿐이다.

축배를 드는 것이 당연한 승리 후 마련된 회식 자리에서 먼저 몸을 일으킨 그를 붙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음알음 퍼진 소문과 한솥밥 한두 해로 루카와를 그럭저럭 알게 된 팀원들은 이런 날에도 기쁜 감정 한 번 내비치지 않는 에이스를 적당히 돌려보냈다. 유독 잔걱정이 많은 구단 매니저의 배웅을 만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걸어서도 갈 법한 거리에 사는 건장한 운동선수이자 스포츠 스타를 걱정할 이유가 뭐가 있느냐면서.

그들의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루카와는 즐거이 먹고 마시기 위한 자리에서 벗어나 관성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 수 분 만에 닿을 거리는 아닐지라도 진작 도착하고 남았을 시간까지, 그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바깥을 나돌기만 했다. 오늘따라 불쾌하기만 한 취기를 귀가 전에 털어버리겠다는 일념으로 집 주변을 빙빙 돈 탓이다. 그렇게 걸어도 걸어도 제자리만을 맴도는 귀갓길이 이어졌다.

비슷한 길을 몇 번씩이나 밟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술에 전 것은 아니었다. 눈에 띌 것을 생각해 인적이 드문 길만 고를 만큼 이성은 충분했다. 오늘 마신 술의 양이 어떻다느니, 원래 주량이 어떻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할 것도 없었다. 루카와는 그저 오늘이 하필 그런 날임을 알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레 알게 됐다. 시쳇말로 술이 안 받는 날. 그럼에도 술잔을 더 기울일 수 있다면 기꺼이 기울여 당장은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들을 잠시나마 유예해두고 싶은 날. 전자는 드물기는 해도 종종 느껴본 적은 있었고, 후자는 서른하나의 그에게 처음 있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특별한 날을 한층 더 특별하게 만들어버린 원흉을 알았다. 루카와 카에데라는 인간을 평소처럼 굴지 못하게 한 것도 모자라 머릿속을 한껏 복잡하게 만든, 문제 해결에 하등 도움이 안 될 술을 한 번이라도 더 털어 넣고 싶게 한 원흉을.

그것은 빨간색이었다. 그 아래로 가끔, 아니, 자주 얼빠진 표정을 짓는 멍청이였다.

─네가 웬일이냐, 여우? 연락을 먼저 다 하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천재니 뭐니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주제에, 나이 몇 더 먹게 됐다고 이제는 어른스러운 척을 해대려는 멍청이. 그 멍청이의 목소리가 밤길을 거니는 동안 몇 번이고 떠올랐다. 머리 가장 안쪽에서 울려대는 소리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던 소음 하나, 호흡 하나까지 덧입은 채 재생되고 있었다. 그 자신의 목소리는 없다. 무어라 입을 열었는지 그조차 기억하지 못했으므로.

─그거? …맞긴 맞는데. 뭐, 이번 일로 하필 같은 부상도 세 번째고 재활도 벌써 세 번째니까.

사쿠라기는 거리낄 것 없다는 양 잘도 대답했다. 귀국한 다음 날에 영감님이 먼저 얘기 좀 하자고 불러서 이미 만났걸랑. 은퇴한 뒤로 혼자 느긋하게 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은근 빠를 때가 있단 말이지, 그 영감님. 묻지도 않은 말이 연이어 이어졌다. 귀국하자마자 치료와 재활로 바빴던 것을 뻔히 알건만, 그 와중에 안자이 감독과는 또 어떻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것인지 모르겠다. 그날 자신이 했던 답 하나 기억하지 못하면서 루카와는 작은 소리로도 내지 못했던 생각들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를 아는 이들이라면 열에 열은 그가 이토록 장황히 떠들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만한 문장들을. 못다 한 말이 누군가에게 닿을 리는 없다고 해도 말이다.

‘두 번째는 첫 번째에 비하면 큰 부상 축에도 못 끼는 경상이었잖아, 멍청아. 드래프트 후에 네가 반년 넘게 쉬어야 했던 건 선발 전에 있었던 훈련 강도 문제가 더 컸고. 기껏 찾아갔을 때는 세 번이나 해봐서 문제없다고 잘난 척하더니 왜 지금 그딴 이야기를 하는데.’

말이란 쏟아낸 것보다도 담아둔 것이 더 오래 남을 때가 있다는 것을 그는 취기 아래 멍하니 깨닫는다. 그러니 내뱉은 말만이 잊힌 것일 터다.

하지 않은 말들은 이토록 또렷하게 남아있는데.

‘왜, 세 번은 못 할 것 같아서 그래? 너답지 않아.’

기억 속 사쿠라기의 목소리가 선명한 만큼, 그 목소리를 기억하는 기관 외에는 자리마다 알코올이 들러붙어 깊이 스민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의미 없는 짓을 하고 있을 리 없었다. 듣는 사람도 없는 지금조차, 입을 연다면 격정은 아닐지라도 꼴사나운 감정이 새리란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멍청이 넌 내가 아는 놈들 중에 끈질기기로는 제일…, …….’

─아직 고민 중이기는 한데 애들 상대로 감독…, 궁금하기도 했고. 이 천재의 도움을 바랄 인재들이 많기는 할 거니까. 여우 너 돌아가기 전부터 이 몸이 서부에서 이름 크게 날렸었잖냐.

단 한 사람의 발화만이 선명한 회상은 혼잣말도 되지 못했던 상념을 자르기에 충분했다. 루카와는 매번 같은 타이밍에 같은 결론을 내렸다. 긴 숨을 내쉬고, 벌써 몇 번째 되뇐 것인지도 모를 문장을 곱씹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멍청이는 이미 은퇴 고려, 내지는 은퇴란 선택지를 긴 시간 고민한 듯 굴고 있지 않은가.

루카와가 이 소식을 들은 것은 고작 며칠 전이었다. 플레이오프 파이널 2차전과 3차전 사이, 어느 날. 그것도 북산 고교 시절 같은 농구부였던 미츠이 히사시를 통해 우연히 전해 들었다. 그 소식을 안 당일 통화 중에 들은 말이란 것이 이랬다. 마치 그는 알지 못하는 시간 동안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진작에 긴 고민을 끝낸 것처럼, 모든 답은 의연하게 돌아왔다.

오른쪽으로 다섯 번은 더 끼고 돈 골목으로 다시 접어든 그가 짧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당장 털어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무거운 머리, 트이지 않는 속, 한없이 불쾌하기만 한 취기. 모두 다 그 녀석 때문에 생긴 것들. 혹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것들. 계속 빨간 멍청이를 생각한 탓에 열이 올라 취기 하나 쫓지 못하는 게 틀림없다, 고. 루카와는 수시로 턱밑까지 차오르는 뜻 모를 감정을 핑계 대신 삼켜내기 바빴다.

곁에 있지도 않은 사쿠라기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동안에도 머리 안쪽에 자리 잡은 과거의 멍청이는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바로 며칠 전의 사쿠라기는 여우 너나 잘하라느니, 파이널 2차전은 이 천재보다 지지부진한 것 같았다느니 입만 산 듯한 말을 줄줄 늘어놨다. 조금 전에 한 이야기는 혼자만 알고 있으라며 어울리지도 않게 당부까지 해대서, 루카와는 재활 훈련도 끝나지 않은 환자에게 모난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써야 했었다. 여전히, 그래서 노력 끝에 자신이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다만 대화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맥락을 통해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다음, 그날의 루카와는 애쓴 것이 무색하게 제 성정대로 굴었던 것 같다.

─먼저 전화해 놓고 왜 시비야? 특별히 뭐 하나 알려주려고 했는데 됐다, 됐어. 끊는다, 여우 자식아.

그렇게 생각하면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가 뚝 끊겨버린 것도 설명이 됐다. 더는 골몰하고 싶지 않은 일에 다시 한 번 마침표를 찍어 보듯, 걸음을 떼는 것보다도 느리게 그가 눈을 감았다 뜬다. 그새 술을 더 마시기는커녕 쉼 없이 걸음만 옮겨온 그의 시선 끝에 질리도록 떠올린 색이 걸린 것은 그때였다.

붉은 것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가는 빨강이. 그 멍청이를 떠올리게 하는 색을 가진 빛이.

생각이 몇 번이고 제멋대로 사쿠라기의 일로 귀결되는 걸로도 모자라 눈앞에 강렬한 빛까지 어른거리자 그가 가볍게 실소했다. 공교로운 일의 연속인지라 루카와는 그답지 않게 취기 탓을 하고 싶었다. 오늘은 제 생각보다 단단히 취한 게 분명하다고. 취했기에 말도 안 되는 헛것까지 보는 것이라고. 그래, 그 취기란 것 때문에. 술 때문에.

분명 먼 곳에 걸려 있던 빛이 걸음마다 빠르게 가까워진다. 루카와는 저도 모르는 새에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고작 걸음 한 번을 떼는 순간에도 한 사람을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지금 떠올릴 수밖에 없는 단 한 사람, 사쿠라기 하나미치를 생각했다. 눈앞에 어룽거리는 빛이, 밤을 배회하게 만든 며칠 전의 목소리가 그렇게 만들었다. 버저가 울리는 순간 보았던 익숙한 얼굴에 걸린 낯선 표정과 지독히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눈빛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불가항력이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빠르게 가까워지던 붉은빛이 한가득 눈에 담길 만큼 코앞까지 가까워진 순간, 루카와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아니었다. 그는 사람이지 밤에도 빛을 내는, 온통 빨갛기만 한 구식 자판기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깊이 숨을 삼킨 뒤에 나온 말은 조명마저 붉은빛인 기계에 던지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혹은 어느 누구에게도 하는 말이 아니거나, 그도 아니라면 들어 주는 이가 없기에 혼잣말이 된 혼잣말일 터였다.

“…오지 말았어야지.”

혼자 다 결정한 것처럼 떠들었으면. 바싹 마른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달려온 것도, 먼 거리를 지나온 것도 아닌데 어깨가 오르내릴 만큼 숨이 찼다. 심장이 이상하리만치 큰 소리를 내며 뜀박질하고 있었다. 고작 몇 마디로도 호흡이 뚝뚝 끊기는 것이 못마땅해 루카와는 서느런 눈으로 애꿎은 자판기만 노려봤다. 제품의 모형 하나 없이 텅 빈 진열대와 그 안을 비추는 붉은 조명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저마다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는 버튼이 쉴 새 없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눈이 부셨다.

쾅!

그래서, 그놈이나 할 법한 일을 벌였다. 붉고 반짝이는 게 거슬려서, 고작 이런 빛에도 이상하리만치 하얗게 눈이 부셔서.

소리가 제법 컸음에도 기계에 들이받은 이마에서는 미약한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장 이런 모습이 눈에 띄기라도 했다가는 에이전시니 구단이니 하는 곳에 어떤 식으로 불똥이 튈지……, 같은 문제를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더는 담아두기만 할 수 없는 말이 끝내 목 안쪽을 틀어막아 답답했다. 열이 오른 듯 뜨거웠고,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이 심장인 양 맥동했다. 그저 홀로 남을 뿐인 말이 혀끝을 떠난 건 그래서였다.

“표정이라도 제대로 숨겼어야 할 거 아니야, 이 멍청아.”

잇새로 씹어 삼키듯 내뱉은 말은 자판기의 발랄한 전자음에 묻혀 금세 사라졌다. 어떤 노래인지도 모를 곡조와 함께 바로 앞에서 휘황찬란한 빛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바투 붙어있던 그가 인상을 쓰며 한 걸음 물러섰다. 어두운 밤사이로 빛을 뿌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것이 잠잠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적어도, 루카와가 조명이 다시 붉어지기를 기다릴 만큼의 인내심을 발휘할 정도는 되었다.

덜컹.

어느 순간 자판기가 무언가를 뱉어냈다. 어둠 속에서 붉은빛을 덧입은 실루엣이 천천히 자판기 쪽으로 기운 것은 그 직후다. 루카와는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양 몸을 숙여 그것을 꺼내들었다. 손아귀에 잡힌 물건은 그가 잠깐이나마 상상했던 그 무엇도 아니었다. 빨갛지도 않았고, 멍청하게 생기지도 않았다. 아니, 후자는 맞는 것도 같았다.

그것은 과자였다. 반달을 닮은 형태가 중앙이 눌려 휜 채로 부풀어 있는, 그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과자. 안을 열면 웬 종이 쪼가리 하나가 들어있는 과자다. 크기에 비해 무게감이 없는 과자는 딱 하나뿐인 주제에 투명한 비닐에 정성스럽게 포장까지 되어 있었다.

포춘쿠키를 파는 자판기라니. 색만 그런 것이 아니라 황당하다 못해 둘은 없을 것 같은 점마저 그 녀석을 생각나게 하는 기계였다. 고작 박치기 하나로 오작동한 걸 보면 내구성은 영 꽝인 것 같았지만.

물 흐르듯 이어지던 생각이 뚝 끊긴다. 또다시 사쿠라기 하나미치를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루카와가 잠시간 숨을 멈췄다. 경기 도중 그를 본 뒤로는 단 한 번도 완벽히 그만두지 못했으면서, 이제 와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느릿느릿 눈을 끔뻑이기도 했다. 한동안 움직임이 없던 그가 양손을 뻗어 자판기 측면을 붙잡았다. 어떤 사고를 거친 것인지는 몰라도 그는 그대로 머리라도 다시 들이받을 것처럼 움직이다 뚝 멈추었다. 미수에 그칠 수 있었던 까닭은 실낱같은 이성이 그를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박치기를 막은 이성이 내려준 결론은 단순했다. 이런 걸 앞에 두고 있으니 계속 멍청이를 떠올리는 것이 분명하다. 그 결론을 즉각 받아들인 루카와가 빠른 걸음으로 자판기 앞을 벗어났다. 아무래도 밤 산책은 술을 깨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모양이라며 또다시 취기 탓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해결책이 아닌 일을 반복할 필요는 없으니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었다. 긴긴 귀갓길의 끝이 다가온 것이다. 그놈의 취기 때문인지, 그저 주변에 무심한 탓인지, 같은 길을 몇 번이나 지나는 동안 붉은빛을 내는 자판기 따위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끝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

 

*

루카와는 어떤 공간에 서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혹은 어떻게 이런 곳까지 왔는지 같은 단순한 의문 하나 떠올리지 못했다. 걷거나 팔을 움직이는 등의 간단한 일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주변을 에워싼 벽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그저 위와 아래, 옆을 가로막은 것들과 그것들이 가진 색을 생각하는 일 말고는 그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하얀, 어쩌면 동시에 빨갛기도 한 벽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다. 출구도, 입구도 없다. 있다 해도 그것들 역시 모두 같은 색일 터였다. 붉거나 하얀, 오묘한 색. 눈에 보이는 것과 머리가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가 기괴했다. 그는 눈꺼풀을 몇 번이나 여닫아 똑같은 감상을 머릿속에서 이어 붙였다. 얼마나 긴 시간을 그렇게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느 순간, 희면서도 붉은 것과 붉으면서도 흰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떠올리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거실에서 누가 선물해 주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무엇이 되었든 농구 외에는 영 관심을 두지 않는 그에게 술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술기운을 떨쳐버릴 수 없다면 오늘따라 몸이 잘 받아들이든 말든 차라리 두 번째로 바라는 일이라도 선택하고 싶었다. 외려 술로 계속해서 하나로 흐르는 생각을 멈출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을지라도 두 번은 없을 것 같은 충동을 따르는 것 자체도 나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결국 이것도 다 사쿠라기 하나미치란 이름의 원흉 때문이었다.

어떤 것도 나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채로, 루카와는 적당히 구색만 맞추어 정리해둔 술 중 푸른 라벨이 붙어있는 것이나 병 자체가 푸른 것을 집착적으로 골라냈다. 최대한 빨강과 대척점에 있는 것을 고르려 한 탓이다. 지나온 그의 삶을 생각하면 흰색이 더 적당할 테지만, 안타깝게도 흰 것은 없었다.

어딘지 어설프고 기이한 결론이 초래한 시간은 세간이 술에 매긴 가치에 비해 싱겁게 지나갔다. 잔은 그나마 투명한 것을 집어 왔다지만 고심해 고른 술에 어울리는 종류는 아니었고, 왜 꺼내두었는지도 모를 포춘쿠키는 마이너스가 아니면 다행일 수준의 조화를 이루었다. 그는 몇 모금이 몇 잔이 되는 동안 잘 먹지도 않는 과자를 느릿느릿 쪼개었다. 단 두 번. 첫 번째는 끄트머리를 조금, 두 번째는 중앙에서 왼쪽으로 치우친 자리를 완전히. 그 정도로도 어느 순간부터 싹트기 시작한 호기심을 해결하기에는 충분했다.

술기운으로 일렁이는 시야 안쪽에 그가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의 종잇조각이 들어왔다. 돌돌 말린 것을 펼칠 즈음에는 눈꺼풀이 천근처럼 느껴져 앉아있던 소파에 푹 기댈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 스스로 농구 다음으로 관심이 있다고 밝히곤 하는 것이 수마를 안고 몰려옴에도 루카와는 종이 안쪽을 확인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혼곤한 잠에 떠밀리기 직전, 새하얀 종이 위에 쓰인 어떤 문장을 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퍽 우스꽝스러운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대뜸 눈앞에 나타난 종이에 쓰여있는 것과 똑같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소원을 적어보세요.>

“……허.”

우습지도 않은 꿈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방에-그는 방이라는 단순한 단어 외에는 이 공간을 지칭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종이 한 장이 전부인 꿈이라니. 그것도 잠들기 직전 보았던 것과 똑같은 내용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적혀있다.

걸음 하나 뜻대로 떼지 못하는 꿈의 노골적인 종용을 무시하고 싶다가도,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는 흔하디흔한 말이 떠올라 루카와는 시선을 내리깔고 만다. 구태여 짚고 넘어가자면 잠들기 직전의 그는 그 종이를 손안에서 구겨버렸었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도 모를 만큼 울컥 치미는 감정이 있어서. 그 뒤 어느 순간 까무룩 잠들었으니 그것은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 있든, 그대로 손안에 있든 둘 중 하나이리라. 꿈 밖에서는 쓰레기만 못한 취급을 받았던 것이 꿈속에서는 무엇보다 돋보이는 형태로 그의 앞에 나타난 꼴이다.

대치 아닌 대치는 길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공간에서 그는 몇 가지 이유를 대며 손이라도 움직여 보는 것을 선택했다. 첫째로, 움직일 자유를 여태 박탈당한 상태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둘째로, 움직일 수만 있다면 어차피 볼만한 것이라고는 눈앞의 종이뿐이니 쓸데없이 생생한 꿈의 지루함을 그걸 보아서라도 덜어내고 싶었다. 벽을 보는 건 진작에 질린 지 오래였으니까. 셋째로, 고작 꿈일 뿐인데 눈앞에 들이밀어진 듯한 싸움에서 지고 싶지는 않았다. 잠들기 전 보았던 것과 똑같은 종이 한 장을 보는 일이 어떻게 싸움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는 루카와만이 알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손은 아무런 문제 없이 움직여졌다. 그가 바라는 대로 앞으로 뻗어나갔고, 그가 의도했던 대로 종이를 붙잡았다. 문제는 딱 거기까지였다는 것이다. 그 뒤로는 의지랄 것이 개입될 수 있는 틈이 없었다.

종이를 붙잡기 무섭게 ‘바라는 것’이라는 글자 아래의 빈자리부터 붉은 잉크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얇은 펜 끝으로 적히는 듯한 문장은 루카와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눈에 익은 글씨체를 덧입고 있었다. 가장 익숙한 언어로 적혀가는 문장이 다 쓰이기도 전에, 그는 붉은 잉크가 완성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내용인지 알았다. 종이를 구겨버리기 직전, 무심코 떠올린 생각이 고스란히 글자로 나타나고 있으니 모르는 척을 하기도 어려웠다. 그것도 자신의 글씨체로.

루카와 카에데가 제 손으로 적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문장은 천천히 완성되어 갔다. 불쾌감에 눈을 감고 싶어도 눈꺼풀도 더는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는커녕 눈동자를 움직여 시선을 돌릴 수조차 없다. 그는 또다시 자유를 박탈당한 채 완성돼 가는 문장을, 무심코 떠올린 바람이란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마침내 고작 한 줄뿐인 문장에 마침표가 찍혔을 때, 그는 잠들기 직전의 자신이 왜 그것을 쓰레기 다루듯 구겨버렸는지 깨닫는다. 인정하기 싫었다. 잠시나마 떠올린 문장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소원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소원이라는 건, 대개 지금 당장은 이룰 수 없거나 이루기 버겁다고 여겨지기에 바라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깟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간절히’라는 말까지 붙은 채 제 안에서 그렇게 정의되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그 멍청이가 오늘 관중석에서…….

언젠가처럼 또다시 거칠게 흐르던 생각이 끊겼다. 꿈속에서조차 사쿠라기라는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그가 알아차리자마자, 굉음에 가까운 버저 소리가 들려왔다. 고막을 뒤흔들 정도로 커다란 소리는 높은 이명으로 남아 그의 정신을 어지럽혔다. 누군가 세게 머리를 내려친 것처럼 시야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주변이 한층 새하얗게 표백되듯 눈앞이 빛으로 가득 찼다. 아득히 멀어지는 의식을 느끼며 루카와는 이것이 진부한 꿈의 끝이길 바랐다. 구태여 이 꿈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그는 이것을 악몽이라 부를 테니.

 

*

삶은 늘 한 치 앞도 모르게 흘러간다. 루카와는 당장 제게 닥친 일들을 한 줄의 문장으로 정리하면서도, 삼류 소설에도 쓰이지 않을 법한 표현이라며 자조했다. 그라고 처음부터 뻔한 말로 이 상황을 요약해 가며 체념한 듯 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만큼 삶에 있어 완벽한 예측이란 불가능에 가까우니, 어떤 일은 예상조차 무의미하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았을 뿐이다.

불유쾌한 꿈에서 벗어나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세상이 온통 비현실적으로 일렁이며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으면서도 원인과 해결 방법 따위를 찾아보려 애썼다. 그러나 몸을 일으킨 곳이 잠들었던 소파가 아닌 침대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한 번, 속이 뒤집힐 정도로 어지러운 시야에 들어온 장소가 낯선 집 안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한 번, 본래 지내던 곳보다 좁은 생활공간 구석구석에 의아할 만큼 그 자신에게 맞춘 듯한 흔적이 남아있음을 확인했을 때 한 번, 인내심과 함께 미미하게 남은 의욕마저 깎여 나갔다.

몸을 눕히나 서나 하늘과 땅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는 듯했으니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도 버거웠다. 백번 양보해 이 어지럼증은 지난밤의 과음으로 얻은 숙취라 치더라도, 대뜸 모르는 장소에서 눈을 뜬 것은 설명하기 어려웠다. 고작 과음 때문에 기억에도 없는 집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 대뜸 침대부터 차지했을 리는 없잖은가. 적어도 그가 알기로 그런 술버릇은 없었다. 납치같이 황당무계한 선택지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 그가 놓인 상황이라고 해서 황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소거법을 거쳐 루카와는 자신이 여태 꿈을 꾸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일종의 자각몽이자 꿈속의 꿈, 같은 상황 말이다. 꿈이라고 한다면 중심을 잡기 버거울 정도의 시야와 어지럼증, 이 이상한 장소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됐다. 무엇보다 이곳은 마치 루카와 카에데와 하나부터 열까지 똑같은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이 사는 곳처럼 꾸며져 있었으므로. 이 정도로 저를 잘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몇 배는 비현실적이리라. 꿈이 아니고서야 하루아침에 이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지금 상황이 꿈이라고 확신할 만한 유력한 증거는 따로 있었다. 정확히는,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금방이라도 속을 게워내도 이상하지 않을 메스꺼움을 견뎌내며 루카와가 적당히 ‘이건 꿈이다’, 라는 결론을 내린 직후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인하지 않았던 옆 공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들려왔다’고 표현하기에도 빈약한 소리였으나, 생각을 제대로 마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일순 어지럽던 시야가 트이고 머릿속이 한층 맑아졌다. 작은 차이다. 정말로, 손가락 한 마디만큼이라 표현하기도 과할 차이였다. 그 차이가 그를 움직이게 했다. 문을 열고, 단 한 번도 본 적 없다 말하기는 어려운 풍경을 채 다 보지도 못한 채 지나쳐 소리가 들려온 방향에 있는 문을 두드리게 했다. 바로 옆집의 문을. 밖으로 나갈 때는 신을 신는다는 기본적인 상식조차 지킬 틈 없이 저지른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그 어떤 것보다도 이 상황이 꿈임을 입증해 줄 증거를 마주했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인-그는 아직도 플레이오프 마지막 경기 이후 일어난 모든 일을 한 사람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사쿠라기 하나미치였다. 그에게 가장 익숙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 정도 차이는 꿈이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조금은 앳된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이 어쩔 수 없이 길어지기야 했다. 눈을 뜬 이후로 줄곧 그를 괴롭혔던 구역감과 일렁이는 시야가 거짓말처럼 사라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잠들기 전이나 잠든 후나 어김없이 떠오르던 멍청이의 얼굴을 똑바로 보게 되었는데도 그는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처음으로 멀쩡하다고 할 만한 상태가 되니 편한 호흡 한 번이 기꺼웠지만, 숨이 한번 트인 부작용인지 갖가지 생각이 물밀듯 들이닥쳐서 문제였다. 뭐든 과하면 안 좋은 법이라고 그는 결국 수많은 생각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그때그때 되는 대로 지껄였다. 변명은 똑같았다. 어차피 꿈이니까, 거리낄 것 없었다. 내놓은 대답이나 행동거지란 것들이 프리스로로 치면 하나같이 에어볼이 될 만한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지금의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눈앞에 있는 사쿠라기 하나미치였다. 상념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꿈에까지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민 사쿠라기 하나미치.

기억 속의 그것보다 미성숙한 얼굴과 조금 긴 붉은 머리카락, 저보다 낮은 눈높이를 가진 사쿠라기 하나미치. 저를 처음 보는 양 굴면서 ‘여우’가 아닌 ‘큰 여우 아저씨’, 같은 한층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는 사쿠라기 하나미치. 제 이름 하나 모르는 데다 농구를 시작한 지 고작 두 달이라고 말하는 사쿠라기 하나미치. 루카와 카에데가 사쿠라기 하나미치를 처음 만났던 열여섯의 봄을 막 지나온 사쿠라기 하나미치.

서른하나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막무가내 같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루카와가 내린 결론은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닐 리 없다.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저와 같은 서른하나였고, 저보다 늦게 NBA 리거 타이틀을 달아 그보다 작은 시간 차를 두고 그곳에서도 유명 인사가 됐다. 심심찮게 입에 담던 리바운드왕이라는 별명이 하나둘 먼 이국땅에 퍼져나가 결국 스타플레이어 반열에 오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NBA 데뷔 초, 드래프트 직후 얻은 부상으로 반년 이상 결장이 이어졌음에도 그로부터 몇 년 후 팀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서게 만든 경기에 사쿠라기가 있었다. 루카와가 귀향한 해 팀을 20년 만에 플레이오프 파이널로 이끈 주역 중 하나 역시 그였다. 그해 파이널 6차전에서 얻은 부상이 하필 그의 발목을 잡았지만,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논란의 여지가 필요치 않은 뛰어난 선수이자 한때 그가 수없이 떠든 ‘바스켓맨’에 걸맞은 인간이었다.

그래, 그런 녀석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식을 전해왔다. 재활 훈련 기간이 다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코트 위를 떠난다는 선택지를 고려는 해보고 있다는 식의 소식을. 하필 열여섯의 나이에 얻었던 큰 부상과 또 같은 자리에, 그때와 필적할 만한 부상을 얻어와 이번 치료 기간은 이전에 겪었던 그 어떤 시간보다도 길게 이어지고 있기야 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루카와는 사쿠라기가 전해온 소식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말이 전해왔다지 기실 루카와는 우연히 주워들었다고 해야 옳다는 사실부터가 이상하리만치 그를 언짢게 했다. 미츠이가 아니었다면 사쿠라기가 비밀처럼 덮어둔 생각을 한참이나 늦게 알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니 더더욱.

“그만둬.”

루카와는 어느 순간부터 줄곧 제 안에 응어리져 남은 감정을 그런 터무니 없는 말로 토해냈다. 이건 어차피 꿈이니까. 지금 내뱉는 말도 모두 진짜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듣지 못할 혼잣말이나 다름없으니까. 그조차 똑바로 들여다본 적 없는 본심은 이런 때에도 가장 밑바닥에 숨긴다. 이 정도 페이크는 괜찮으리라.

꿈속이라지만 논리적인 근거를 대라면 댈 수도 있었다. 애초에 그가 아는 사쿠라기는 제 말에 대번에 수긍할 이가 아니었다. 상대의 나이가 몇이든 간에 웃기지 말라며 반박을 하면 했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는 너는 어차피 이러나 저라나 초짜니까 몇 달 뒤에 다시 시작하라 이를 생각이었다.

열여섯, 풋내기 사쿠라기가 입었던 부상 탓에 NBA 서부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하나였던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입은 부상이 한층 심각한 것이라면 간단한 방법이 있지 않은가. 루카와 역시 함께 뛰었던 8월의 산왕 공업 고등학교와의 시합에서 입은 부상을 없던 일로 만들면 된다. 없던 일로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저 조그마한 멍청이가 시합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일 터였다.

농구를 시작한 지 고작 두 달이라고 했으니 아직 늦지 않았다. 어차피 이 멍청이가 제 말대로 잠깐 농구를 그만두더라도 언젠가는 코트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지 않겠다고 해도, 그렇게 만들면 된다. 무슨 자신감인지 몰라도 루카와는 이만하면 그럴듯한 가정이라 여겼다. 애초에 꿈이라면 과거를 바꾼다는 허무맹랑한 가정을 해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이나, 논리를 따질 필요는 없으리란 생각이 진작부터 상충했기에 나온 자신감인지도 몰랐다. 결론적으로는 이성적인 사고를 거친 척 굴고 있지만, 어느 모로 보나 막무가내일 뿐이라는 점에서 앞선 태도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잘만 입을 열어왔던 열여섯의 사쿠라기가 말을 멈춘 채 눈을 크게 뜬다. 이른 아침의 햇살이 문을 막고 선 루카와의 어깨 위를 겨우 지나 현관 안쪽의 사쿠라기를 비추었다. 정돈하지 않아 이마를 덮을 정도로 긴 붉은 머리카락이 낯설어 사쿠라기의 이마 위를 배회하던 시선이 눈동자로 향한다. 시선이 섞여들 때, 루카와는 한가로이 생각한다. 이토록 선명히 과거를 보여주는 꿈이라면 그깟 종이 쪼가리 한 장 나오는 꿈보다야 나쁘지는 않다고. 그는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작은 멍청이에게 재차 하고자 했던 말을 확인시켜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 농구 그만두라고.”

루카와 카에데, 서른하나. 일찍이 노력과 투지로 갈고닦은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세상에 이름을 알린 농구 선수이자, 최근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갱신한 디펜딩 챔피언 팀의 에이스. 온갖 찬사가 따르는 농구 실력을 갖춘 그에게는 ‘루카와 카에데’를 아는 사람이라면 열에 열은 인정할 단점이 하나 존재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말로써 이뤄내는 소통에 능숙한 편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간과했던 자신의 단점은 모든 예측을 무너트리는 초석이 된다.

루카와의 예상과 다르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그 대신, 사쿠라기가 양손을 뻗어왔다. 순식간에 머리가 붙잡히고 그의 몸이 앞으로 훅 기울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세상이 흔들리듯 그간 느끼지 못했던 메스꺼움이 그를 덮쳤다. 왜인지 이번만큼은 그것이 확실하게 숙취를 닮았다고 생각했을 때, 바로 앞까지 가까워진 빨간 머리카락이 눈앞을 온통 채웠다. 그제야 루카와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역시 삶이란 제 예상대로 흘러가는 경우는 드물다고. 그렇기에 이건 오히려 꿈이 아니라 진짜 현실일지도 모르겠다고. 실소가 터질만한 상념이 순식간에 번져나간다. 직후 덮쳐온 선명한 고통과 함께, 그는 새하얗게 점멸하는 시야 속에서 뒤늦게 옛일을 떠올려낸다.

이 멍청이는 처음 만났던 날에 이미 앞뒤 가리지 않고 제게 박치기를 날린 전적이 있다는걸. 이제 와 떠올리기에는 늦은 감이 있었지만.


06. 세계의 축

누군가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방법을 물어온다면 루카와는 고통의 존재 여부부터 확인해 보라 답할 것이다. 흔히들 믿기지 않는 일을 겪고 나면 꿈이 아닌지 뺨을 꼬집어 달라고 하지만, 그 방식은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다. 그것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한 방법은 머리가 울릴 수준의 박치기다. 선명한 고통을 느낀다면, 못해도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선택지를 고려조차 하지 않을 만큼 헷갈릴 일은 없을 터였다. 몸으로 직접 겪고 나니 그는 이제 이보다 분명한 수단은 생각나지 않았다.

정작 루카와는 생생한 통증에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반 정도만 현실이라 믿게 된 데에 그쳤지만, 이만하면 ‘어느 날 열여섯인 사쿠라기 하나미치의 옆집에서 눈을 떴다’는 비현실적인 상황 앞에선 너그러운 판단이었다. 외려 그치고는 이를 반이나 현실일지도 모른다 믿게 된 것부터가 상당히 비이성적인 결론을 내린 축이었다.

어떻게 이걸 잊었던 거지.

몸이 비틀거릴 만큼 강한 충격에 루카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언젠가부터 사쿠라기와 주먹질까지 하며 싸울 일은 드물어지다 못해 사라진 터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입부 초기만 해도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제 버릇 못 버리고 쉽게 끓어올라 여기저기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는 것을. 덕분이라고 하기에는 과하지만 정신이 번쩍 들기야 했으니 득 없는 실은 아니었다.

겁도 없이 박치기를 날린 작은 멍청이는 기세 좋게 머리부터 붙잡을 때는 언제고 사고 친 후 주인 눈치라도 보는 강아지처럼 뒤로 주춤 물러섰다. 루카와가 당장 거울을 볼 수만 있었다면 사쿠라기의 반응을 어느 정도 이해했겠으나, 애석하게도 제 얼굴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유난히 천둥벌거숭이 같던 시절의-이는 어느 정도 루카와의 사견이 개입된 이미지일 것이다- 사쿠라기가 경계할 만큼의 표정은 되리라 추측할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른하나의 루카와 카에데는 상대가 아무리 사쿠라기라 할지라도 저보다 열은 넘게 어린 미성년자에게 복수심을 품을 정도로 덜떨어진 인간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 멍청이와 있으면 서른이 넘어서도 열여섯으로 돌아간 듯이 유치해지고는 했지만,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그는 저보다 낮은 티가 나는 눈높이를 가진 사쿠라기가 생소했다. 얼얼한 이마에 맞닿았을지도 모르는 빨간 머리카락 아래의 덜 자란 얼굴이 생소했고, 운동선수 특유의 태가 부족한 체구 역시 생소했다. 분명 오래전 바로 곁에서 보았던 모습이건만 이렇게 마주하니 기억 속의 사쿠라기보다 몇 곱절은 어려 보였다. 우습게도 루카와는 이 순간 얼마나 긴 시간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곱씹었다. 더 단순히 표현하자면 그 멍청이도 저도 나이를 헛먹지는 않았다 생각한 것이다. 혼란하다 못해 믿을 수 없이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할 법한 생각은 아니란 자각은 있었다.

그가 열여섯의 사쿠라기만 덩그러니 남겨둔 채 자리를 떠난 것은 그래서였다. 지금은 사태 파악부터 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 결정하지 못한 나머지 반의 가능성이 꿈과 현실, 어느 쪽에 가까운지 확인 정도는 해야 대책이 세워질 터였다. 서른한 번의 햇수를 허투루 보내지 않은 그는 결심을 마치자마자 제 손으로 열었던 문부터 닫아버렸다. 그 뒤엔 당당히 ‘이사 왔다’ 거짓말을 내뱉어 졸지에 제집이 된 옆집에서 직접 산 듯 꼭 맞는 신을 꺼내 신었다. 집안은 어지러운 시야로나마 뒤져봤으니 가만히 있기보다 돌아다니며 알아보는 것이 나으리라. 이렇게 된 이상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집주인 대신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낡은 맨션을 등지고 떠날 즈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등 뒤에서부터 의심 가득한 시선이 들러붙는 게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사쿠라기의 것이라 짐작한 시선에서 적당히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 무렵부터 또다시 눈앞이 어지러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잠시나마 멀쩡해졌던 속이 뒤집힐 듯 구역감이 올라온 것은 물론이고, 또다시 하늘과 땅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도는 듯했다. 한번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를 겪어본 데다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고려해보게 된 그로서는 고역도 이런 고역이 있을 수 없었다.

숨 한 번을 들이쉬고 내쉬는 일이 벅차다. 어딘가 아프기라도 한 사람처럼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삽시간에 돌변한 상황을 받아들일 틈도 없이, 루카와는 당장 손이 닿는 담벼락에 기대 정신을 다잡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햇다. 사쿠라기가 사는 맨션으로부터 몇 블록이나 벗어났는지 따질 여력은커녕 주변을 살필 겨를조차 나지 않았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울렁이는 시야와 메스꺼움의 원인을 어떻게든 생각해 보려 애쓰기야 했다. 문제는 짚이는 바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열이 나는 것도 아니었고, 이 모든 일이 현실이라면 하룻밤 새에 이토록 몸 상태가 나빠질 이유라고는 술 외에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숙취라는 선택지는 사쿠라기를 만나기도 전에 제외했기에 원인을 찾아보려는 노력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세상 어딘가에는 한순간에 나아졌다가 다시 급격히 나빠지는 병이나 숙취 따위가 존재할지 몰라도, 루카와에게는 상식 밖의 일이었으니까.

원인 모를 증상에 시달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물가물한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마냥 기이해져 갔다. 머리 위에 있으리라 짐작되는 태양은 어느 순간 눈이 아플 만큼 빛을 흩뿌리다 잠잠해지고, 온 풍경은 요동치며 일제히 다가왔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공기는 텁텁한 것으로도 모자라 매캐하게 변해 숨이 통하는 모든 길을 찔러왔다. 그렇게 사위, 나아가 세상이란 것을 이루는 온갖 요소가 루카와 카에데라는 인간에게 점차 버거워졌다. 마치 뭍에 버려진 물고기라도 된 양.

그래, 자신이 물고기라면 지금 세상은 물속이 아닌 땅 위인 것만 같았다.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휘청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바로 서지 못한 채 흔들거리기만 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난감이 된 듯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루카와는 더는 버티고 설 이유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토록 감상적이고 공상적인 비유를 떠올린 것만 보아도 이미 한계였다.

그는 무심코 평소 습관적으로 들고 다니던 물건을 찾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뒤늦게 자신이 입고 있는 옷마저 잠들기 전의 옷이 아니고 그간 주변을 지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겉옷 주머니를 뒤지던 손끝에 무언가 걸렸다. 촉감이나 크기부터가 그가 찾던 물건은 아니었다. 그가 찾으려던 것은 차라리 어디 도움을 구할 시도는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늘 가지고 다니는 핸드폰이었으니까. 어디까지나 서른하나인 루카와에게 있어 ‘보통의 경우’일 때의 이야기다.

이곳이 15년 전의 현실이라면 자신이 알던 형태의 핸드폰은 있을 리 만무하다는 사실은 따질 거리가 못 됐다. 이미 서른하나의 루카와 카에데와 열여섯의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마주친 일부터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 아닌가. 그 외에 줄줄이 따를 문제들도 지금 그의 상태보다는 중요치 않았다. 원인도 모른 채 기절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지금은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기절에서 그치면 차라리 다행일 지경이었다. 이유도 알 수 없는 증상에 시달린 불쾌감으로 짜증스레 미간을 구긴 그가 손끝에 닿는 것을 꺼내 살폈다. 되도록 가장 먼저 생각난 물건만은 아니길 바라면서.

<■■■ ■■■ ■■■ ■■■ 96■>

이제는 뿌옇게 흐려지기까지 한 시야에 담긴 것은 보기 좋게 기대를 배신한 종이 한 장이었다. 얇고 부스럭거리는, 손끝에 익은 촉감을 루카와는 기억한다. 주머니 안쪽에서 이것을 처음 만졌을 때 그는 붉고 하얀 꿈을 꾸기 전에 펼쳤던 종이 한 장을 떠올렸었다. 잠들기 전 손안에서 구겨버렸던 것. 꿈에서까지 나타나 소원을 쓰라 종용하다 못해 그가 떠올렸던 문장 한 줄이 저절로 적히었던 것.

이 종이는 상상했던 종이가 맞되 아니었다. 평범한 재질과 색, 돌돌 말려 과자 하나에 들어갈 법한 크기 모두 그것과 같았지만 유일하게 멀쩡히 보이는 ‘96’이라는 숫자만으로도 소원이니 뭐니 하던 것과는 다른 말이 쓰였음을 알 수 있었다. 완벽히 같은 종잇조각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그가 일찍이 머릿속을 꿰찬 의문을 담아 중얼거렸다.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지. 마른침을 삼킨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린다. 가늘게 뜬 시선은 어느새 뚫어져라 종이 위에 새겨진 글자를 노려봤다. 알고 있던 것과 온전히 같지 않다고 해서 넘어갈 만한 물건이 아니라 여겨서다. 거기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들은 한 자 한 자 물에 번진 듯 형태가 다 흐무러진 것에 반해 눈에 들어온 ‘96’만은 형태가 뚜렷했다. 단순히 제 상태가 안 좋아 다른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기에는 유난히도 선명한 글자가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보이는 그대로 일부만 물에 젖어 잉크가 번진 것이라 하기도 어렵다. 어딘지 작위적이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한 걸음, 루카와는 무거운 다리와 정신을 이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가장 수상하게 느껴지는 것이 유일한 실마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짧은 사이 세 번이나 눈에 띈 포춘쿠키 안의 운세 종이와 그것을 뱉어냈던 붉은 자판기. 어느 모로 보나 그 두 가지가 가장 수상했다. 그 자판기가 있는 골목이라면 술에 취해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며 다섯 번은 넘게 지나갔으니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문제는 이곳은 카나가와현이고, 서른하나인 루카와가 사는 곳은 도쿄에 있는 구단 클럽하우스 인근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지겨운 조건을 다시 끌어오자면 이곳이 15년 전의 세상일 경우 자판기가 그 자리에 고스란히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다시 한 걸음, 지친 기색이 역력한 숨을 내뱉으며 나아가는 찰나에 그가 억지로 의식을 일깨웠다. 다른 실마리, 혹은 돌파구가 필요했다. 몸뚱어리 하나 겨우 이끄는 정신이 머릿속을 뒤지는 시간은 지극히 짧았으나 루카와에게는 억겁 같았다. 그동안 마땅한 대책 하나 떠올리지 못한 그가 시선을 든다. 어쩐지 사쿠라기를 만났을 때보다도 날이 환히 밝아온 것처럼 느껴졌기에. 더딘 움직임으로나마 바라본 하늘이 눈부셔서, 그는 파란빛 한 점 눈에 담지 못했지만.

또다시 한 걸음. 그는 시선을 떨어트린 후에야 발을 뗀다. 루카와가 기를 쓰고 흔들리는 몸을 바로 해 걸음을 내딛는 짧은 사이, 어지러운 시야 바깥에 주변을 오가는 사람 몇몇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희끄무레하게만 보이는 인영이 그의 옆 또는 앞을 지나 유유히 걸어갔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조차 시야가 흐리다는 사실보다도 더 강한 위화감이 그를 덮쳤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가 아무리 지금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할지라도, 어느 순간부터 흐르기 시작한 식은땀과 몸 하나 겨우 가누는 모습은 눈에 띌 수밖에 없으리란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시선이 모여드는 듯한 느낌이나, 저를 피하는 분위기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유령이나 투명 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어린 티가 역력한 사쿠라기와 나눈 대화가 없었다면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죽었다는 가능성을 머릿속 한구석에 추가했을지도 몰랐다.

눈앞에 닥친 상황만큼이나 터무니없는 가설에 그가 소리 없이 실소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왜인지 이전보다는 가벼이 나아가기 시작한 그의 옆으로 길게 그림자가 늘어진다. 일순 주변을 에워싼 풍경이 걸음보다도 빠르게 뒤로 멀어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는 그렇게 다시 한번 성큼 다가온 위화감 앞에 하늘을 바라봤다. 주홍빛이 보였다. 더는 눈부시지 않은 하늘 위로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단 몇 걸음을 떼는 사이 하루가 저물어 가는 광경이 빙글거리는 시야 안에 담겼다.

웃기지 마.

짧은 숨과 함께 씹어 삼킨 문장이 상식을 난도질했다. 이제 그를 떠미는 것은 본능이다. 그것은 경종을 울려대며 한 걸음이라도 더 떼야 한다 재촉한다. 걸음마다 앞에서 뒤로 흐르듯 스쳐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그가 식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낯익은 것은커녕 이해할 수 있는 것조차 없었다. 한없이 느린 걸음으로 코트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으로 전력을 다해 드리블할 때와 비슷한 감각을 느끼고 있다니. 금세 한계에 다다른 다리가 서서히 멈춘다. 루카와는 놀랄 틈도 없이 땅거미가 진 하늘이 별안간 어둠에 뒤덮이는 광경을, 어느 곳인지도 모를 길목 곳곳에 가로등이 빛을 흩뿌리는 광경을, 너른 길을 눈 깜짝할 새 지나 좁디좁은 골목길이 눈앞에 늘어선 광경을 본다.

이제는 평소처럼 입을 열고 움직였던 때마저 오래전 같다. 분명 그가 사쿠라기와 대화를 나눈 건 그리 긴 시간 전의 일이 아님에도. 그는 끈질기게 정신을 붙들고 있는 기력을 그러모아 그 순간을 회상했다. 사쿠라기 하나미치와 대화할 때는 온 세상이 요동치지도, 금방이라도 속을 게워낼 듯 괴롭지도 않았다. 그는 뿌옇거나 흐리게 보이지 않던 어리숙한 낯을 기억했다. 생생히 눈에 담긴 조금 낮은 눈높이와 다른 체구를 기억했다. 서른하나가 되었든, 열여섯이 되었든 변함없는 성정을 기억했다. 그나마 서른하나의 사쿠라기는 불같은 성격과 태도가 나아진 축이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역시 기억했다. 잊지 않았다. 모두, 그가 직접 겪었던 일이다. 머리 안쪽이 울릴 정도로 무식했던 박치기까지 생각이 닿자, 저도 모르는 새에 짧은 웃음이 흘렀다.

아니, 그것은 숨이었다. 사쿠라기와 헤어진 뒤 처음으로 내뱉은 제대로 된 숨, 버겁지 않은 호흡. 언젠가처럼 어지럽던 시야가 트이고 뒤엉킨 머릿속이 한층 개었다. 작은 차이다. 정말로, 차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틈이 가져온 대단찮은 평안 속에서 루카와는 그 낡은 맨션을 벗어난 뒤 처음으로 흔들림 없이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옆얼굴을 비추기 시작한 붉은 빛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그는 서두르는 법 없이 옆을 돌아본다. 깊은 밤하늘 아래, 그것도 바로 지척에, 보란 듯이 서있는 붉은 기계가 눈에 들어왔다. 쿵, 쿵. 고작 고개를 돌리는 사이 심장이 세차게 뛰며 순식간에 턱 밑까지 숨이 차오른다. 가쁜 호흡을 내뱉는 중에도 온 시야를 채우는 구식 자판기에 못 박힌 시선이 어둠 안에서 번뜩였다. 자판기가 두른 붉은 빛이 맺힌 눈동자에 웃음기가 어린 순간, 입술 새로 헛웃음인지 아닌지 모를 것이 희미하게 흘렀다. 적어도 지금은 뭍에 나온 고기 꼴 같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당장 확인해야만 성이 차는 일을 보란 듯이 행할 기회가 눈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므로.

쾅!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리쳐진 주먹이 적당한 값이라도 된 듯, 자판기는 그가 한번 들은 기억이 있는 발랄한 곡조를 쏟아냈다. 다채로운 빛이 눈부시게 점멸하는 것도 잠시, 다시 붉은 조명을 밝혀 텅 빈 진열대 안쪽을 비추던 기계가 무언가를 뱉었다.

덜컹.

소음이 밤을 채우는 것은 잠시다. 그는 곧 자신이 자판기 안에서 꺼내게 될 물건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랬기에 주어진 시간이 다 된 양 다시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삽시간에 밀려드는 지독한 구역감을 견디고 태연히 몸을 숙였다. 한 손에 다 담기고도 남는 것을 세게 쥐고 나서야 루카와는 휘청이는 몸을 일으켜 자판기에 기대었다. 이제는 흐린 시야마저 익숙해 투명한 비닐 하나 벗겨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새벽녘의 미명이 온통 그를 뒤덮는 동안, 그의 손길을 따라 조각난 과자 부스러기 사이에서 빠져나온 종이는 수수께끼라도 내는 양 또다시 불분명한 문장을 내보였다.

<■■■ ■■■ ■■■ ■■■ 95■>

변화만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숫자가 달라져 있다. ‘96’에서 ‘95’로.

기대선 자판기 조명이 비추는 빛에 의지해 루카와는 가만히 그것을 응시했다. 등 뒤에서 비치는 붉은 빛이 엷어지고 더는 흰 종이를 뒤덮는 어둠 따위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껏해야 종이 위에 쓰인 문장 하나를 확인하는 사이 날이 밝아왔다. 눈꺼풀을 여닫은 것은 세 번, 호흡은 그보다 한 번이 많을 뿐인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여전히, 형체가 모호한 글자와 선명한 숫자가 혼재한 문장이 뜻하는 바를 알지 못함에도.

그가 짐작할 수도 없이 먼 곳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의 소란이 들려온다. 빠르게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제법 길게 이어진 소리는, 성년이 채 되지 못한 이들 특유의 생동감과 왁자함을 가지고 있었다. 소리뿐인 기척에 그는 오늘이 평일일지도 모르리라 짐작한다. 십여 년 전의 그도 속해 있던 일상을 생각하면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이름 모를 학교로 향하는 길목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인 듯했다. 아마 이 순간마저도 단 몇 걸음에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을 때와 같이 금세 지나가 버릴 테지만.

이번에는 또 얼마나 빠르게 시간이 저를 두고 흘러갈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게 사라질 시간 속에는, 당장 들려온 소리에 섞여 비슷한 길을 밟는 낯익은 얼굴이 있을지도 몰랐다. 눈을 뜬 뒤 유일하게 온전한 시간을 함께한 사람. 아직은 긴 빨간 머리카락을 넘겨 리젠트 머리를 하고 다닐 그 멍청이가.

루카와는 멍하니 더는 아프지 않은 이마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눈앞이 흐리다 해도 머릿속에서만큼은 선명히 그려낼 수 있는 순간이 존재하기에, 그는 구태여 온 힘을 다해 지난 시간을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그가 상념에 빠져있든 말든, 피로로 닳아빠진 신경이 들려오던 소리가 일제히 잠잠해졌다는 사실을 알린다. 동시에 마냥 흐릿하던 초점이 찰나로 또렷해진 그때, 거짓말처럼 모습을 드러낸 글자가 말하는 바를 루카와는 놓치지 않고 읽어냈다. 일순 드러난 문장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던 글씨체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것은 고작 몇 자만으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잠들기 전 종이를 가차 없이 구겨버린 루카와를 조롱이라도 하듯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라 밝히면서.

이는 통보이자 선언이고, 그가 간원한 적 없던 소원이 가진 유효기간의 고지였다.

<소원이 끝나는 날까지 앞으로 95일>

루카와의 손아귀에서 종잇조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순식간에 몸을 틀어 뒤로 돈 그가 양손을 뻗어 자판기의 측면을 붙잡았다. 그는 끝내 관두었던 일을 늦게나마 실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번에는 실낱같은 이성이란 것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붙잡지 못했다.

쿵!

말간 아침 하늘 아래로 둔중한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

자판기는 두 번째 충격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루카와는 구식처럼 보이지만 튼튼한 자판기에 박치기를 한, 척 보기에도 어딘지 상태가 나쁜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자초한 생생한 통증에 그는 남은 반절의 가능성 중 다시 반을 꿈이 아닌 현실에 할애했다. 이로써 75% 정도의 믿음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현실이라 여기게 된 셈이었다.

여하간 다시 붉은 자판기를 마주친 뒤로 루카와는 ‘대뜸 열여섯 살의 사쿠라기가 있는 과거에서 눈을 떠 색다른 고생을 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얼추 알게 됐다. 정확히는 이만하면 알게 되었다고 여기기로 했다. 자판기 혹은 포춘쿠키, 둘 중 하나가 원인이라고. 포춘쿠키를 뱉어내는 것이 자판기이니 둘 다라고 봐도 틀리지는 않을 터였다. 여기저기서 불쑥 나타나 ‘소원’을 들먹이던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소원이 이미 이뤄진 양 남은 기간을 통보하고 있으니, 관련이 없으리라 여기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한 탓이다.

무엇보다 루카와는 꿈에서까지 나타난-지금은 그것 역시 꿈이었는지조차 긴가민가했다- 하얀 종이에 저절로 적힌 붉은 문장을 기억했다. 마치 루카와 카에데가 적지도 못한 소원을 대신 적어주겠다는 듯 쓰인 문장을 쉬이 잊기란 어려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는 분명 잠들기 전 그 문장을 떠올렸으므로. 누군가 알게 될 일은 없을 테니 이런 때까지 고집스럽게 굴 생각은 없었다. 속으로 단 한 번 인정하는 것쯤이야 눈을 뜬 뒤로 겪게 된 끔찍한 증상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제 손으로 쓴 적도 없는 그 ‘소원’ 때문에 믿기 어려운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한번 그런 가정을 꺼내놓자 그 뒤는 쉬웠다. 그는 자신이 왜 과거로 오게 되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것도 하필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농구를 시작한 지 고작 두 달인 시기라면, 포춘쿠키가 통보한 남은 기간과 그 소원까지 더해져 얼추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의 사고는 다시 열여섯의 사쿠라기를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간다. 농구를 그만두라고 말했던 그 순간, 그때 속으로 늘어놓았던 논리로. 그 멍청이가 은퇴를 고려하게 된 원인 가장 밑바닥에 열여섯 때 겪은 부상이 있다면, 그 부상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쉬울 터다. 당연히 없던 일로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작은 멍청이가 시합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루카와는 여전히 그리 믿었다. 이렇게 된 이상 터무니없는 현 상황과 적당히 타협해, 저 스스로 떠올리기는 했던 것을 이루기만 한다면 결과적으로 나쁜 일은 아니리라.

어느 날 소원이란 이름을 빌려 찾아온 비현실적 사건은, 그렇게 루카와를 사쿠라기의 옆집에 이사 온 이웃이자 ‘카에데’로 살게 했다. 그간 카에데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나. 카에데를 15년 전 세계에 떨어트린 원인으로 추정되는 ‘붉은 자판기’는 하루에 단 한 번만 포춘쿠키를 주었다. 이는 다시 자판기를 발견한 날이자 95일이 남았음을 통보받은 당일 알 수 있었다. 원흉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불쑥 치민 감정에 휘둘려 저지른 박치기에 자판기는 꼼짝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 뒤로 몇 번이나 있는 힘껏 그것을 두드리거나 발로 차봤지만, 줄곧 느낀 어지러움 위에 미미한 고통이 가중될 뿐이었다.

둘. 이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제멋대로 흐르고 변화했다. 오로지 그에게만. 어떤 때는 카에데가 아는 상식대로 움직이는 것 같다가도, 또 어떤 때는 걸음 하나에 먼 곳으로 와있거나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 긴 시간이 흐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는 정도나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카에데가 조정할 수는 없었다. 어떤 규칙이 있는지도 모르게 그는 그저 휘둘릴 뿐이다. 끔찍한 증상을 몸소 체험하면서도 자판기가 포춘쿠키를 더 뱉어내지는 않는지 시험하는 도중, 뒤로 한번 물러선 걸음이 그를 사쿠라기가 사는 맨션 앞으로 옮겨두었던 터라 금세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간혹 눈에 띄는 사쿠라기 외의 다른 사람들이 카에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만이 기이한 법칙이 적용된 세계에 유리되어 있기 때문인 듯했다. 오로지 사쿠라기만이 그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소원’이라는 전제가 있다 해도 기이했지만, 이 역시 다시 자판기를 발견한 날에 직접 겪어봤으니 믿기 어려워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닐 터다.

물론 이는 완벽히 적응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타인에게 제가 어떻게 보이는지나 순식간에 변화하는 공간은 어느 정도의 법칙이 있는 듯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멀쩡한 경우가 드문 풍경을 관찰해 그때그때 달라지는 시간을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무심결에 시간을 확인하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찾다가 텅 빈 주머니만 뒤지는 일도 더러 생길 정도였으니. 그가 적당한 대체품인 손목시계를 갖게 된 것은 포춘쿠키가 ‘60’이라는 숫자를 보여준 어느 날이었다. 그것은 당연하다는 듯 카에데가 이사 왔다고 거짓말을 한 집안, 루카와 카에데라면 둘 법한 자리에 얌전히 홀로 놓여있었다. 꽤 긴 시간 불편을 감내해야 했던 그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셋. 제멋대로 흐르는 시간과 공간, 원인조차 모를 괴로운 증상을 해결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카에데가 어느 순간 ‘뭍에 놓인 물고기 꼴’이나 ‘바로 서지 못한 채 흔들거리기만 하는 장난감’에 자신을 빗대게 만들었던 증상은, 이미 한번 없던 일처럼 되었던 때가 확실했으니 시도는 금세 이루어졌다. 그것의 ‘해결책’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더불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사쿠라기 하나미치 그 자체였다. 사쿠라기와 있을 때면 순식간에 시간이 흐르는 일도, 한걸음에 불분명한 풍경을 지나쳐 모르는 장소에 도달할 일도 없었다. 시야가 온통 흔들리며 구역감이 생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가 있기에 그 모든 기현상이 사라졌다고 느껴질 정도로 세상은 평화로이 카에데가 알던 그 모습 그대로 존재했다.

넷. 임시방편에 가까운 해결책도 있었다. 세 번째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카에데는 오로지 이 끔찍한 증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드문드문 숨통이 트였던 때를 집착적으로 되짚었다. 세 번째 사실의 증명에 따라 그 짧은 순간 역시 자연스레 사쿠라기 하나미치로부터 기인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를 떠올리면 미약하게나마 숨통이 트였다. 빠르게 흐르던 시간이 조금, 아주 조금은 알던 것과 비슷하게 흐르려는 듯 유순해졌고, 물 위를 표류하는 무언가처럼 걸음 하나에 몸이 휘청이는 일도 덜했다. 네 번째 사실은 세 번째 사실 만큼이나 기이했지만, 카에데는 온 세상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때마다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불가해 속에 자리한 불가항력이었다.

다섯. 정확히 어느 곳에 있는지 불분명한 붉은 자판기를 찾아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네 번째 사실과 흡사하다면 흡사했다.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세 번째와도 비슷할지 몰랐다. 방법은 단순하다. 사쿠라기 하나미치를 생각하며 움직일 것. 온 힘을 다해, 오로지 그 멍청이만을. 한 사람을. 움직이는 방향은 어디든 상관없다.

자판기와 포춘쿠키 외에는 조금이라도 이 상황과 관련된 듯한 걸 찾을 수 없었기에 카에데는 매일 같이 자판기를 찾아 나섰다. 그나마 네 번째 사실로 인해 홀로 빨간 기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고통-이를테면, 그가 지겹도록 겪었던 어지럼증이나 구역감 같은 것들-을 일부 덜어낼 수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카에데는 아무리 저라도 눈을 뜬 첫날에 겪었던 증상을 긴 시간 버텨내기란 어렵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이는 그다지 나쁜 조건은 아닌 편이었다.

여섯.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카에데가 살게 된 집과 그의 상태는 확실히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졸지에 카에데의 집이 되어버린 사쿠라기의 옆집은, 원래 집주인 따위는 없으리란 예상 그대로 그 어떤 이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에 반해 가구며 집기들이 모두 멀쩡히 있어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이곳에서 눈을 뜬 뒤로 상식이 통하는 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카에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처음부터 그를 위해 마련된 것만 같은 집에서 가장 기이한 물건은 냉장고였다. 사람이 생활하는 데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 중 식을 담당하는 가전제품 중 하나. 그 안에는 매번 어디서 나온 것인지도 모를 식삿거리가 들어있었다. 그것도 편의점이나 일반적인 가게에서 자주 쓰이는 흰 비닐봉지 같은 것에 담긴 채로. 안을 열면 늘 보통 그 녀석이 좋아할 법한 도시락이나 포장된 음식들이 갓 나오거나 데운 듯 따끈따끈한 상태로 들어있었던지라 더더욱 이질적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첫날, 그 안에 있던 것은 미국에서 지낼 적에 질리도록 먹었던 오믈렛이었다. 참고로 맛은 그 멍청이가 만들어주는 것보다 별로일 정도로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어쩌면 어딘지 이상한 몸 상태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 것일 수도 있었다. 카에데는 다시 눈을 뜬 뒤 단 한 번도 허기를 느낀 적이 없었다. 기본적인 생리현상 중 일부가 아예 사라진 것처럼 기묘한 상태 역시 계속됐다.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움직일 수 있는 시체와 비슷한 상태가 된 것도 아니다. 무언가를 먹으면 맛이 나기는 했고, 언젠가 사쿠라기를 밀어 내느라 이마에 닿았던 손바닥 아래로는 미지근한 체온이 느껴졌다. 애초에 사쿠라기의 옆집에 강제로 눌러앉게 된 뒤로 겪은 증상 때문에 흘린 식은땀을 생각하면, 결국 이것도 따져봐야 소용없는 문제라는 결론이 났지만 말이다. 카에데가 가장 지긋지긋해하는 것은 사쿠라기가 곁에 없는 동안 느껴야 하는 원인 모를 증상들이었으니 이 정도는 신경 쓰이는 문제 축에도 못 끼었다.

일곱. 다행히 포춘쿠키는 단 한 번도 카에데의 예상을 빗나간 결과를 보여주지 않았다. 다만,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포춘쿠키 안의 종이에는 날마다 착실히 1만큼 줄어든 숫자를 제외하고는 늘 같은 글자가 쓰여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이 다소 번거롭다는 것이다. ‘95’라는 숫자와 함께 정확한 문장을 확인했던 다음 날, 다시 찾아간 자판기 앞에서는 아무리 기를 써도 숫자 외에는 명확한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같은 내용이리라 넘기려 해도, 한없이 기이하고 수상쩍은 상황에서 카에데는 되도록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길 여지를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이를 고려해 택한 방법은 가장 변수가 적은 때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사쿠라기와 있는 동안에는 그 어떤 것도 카에데의 상식을 벗어나지 않았으므로, 그는 자연스레 그와 함께하게 된 저녁 시간마다 포춘쿠키를 확인했다. 먹을 것으로 그 작은 멍청이의 경계심을 풀어 ‘소원’에 필요한 설득을 해보는 동시에, 그를 괴롭히는 증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마다. 이 마법 같은 종이에는 유통기한이라도 있는 것인지 그날이 지나면 글자가 모두 사라져 그날그날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번거롭기야 했다. 그 때문에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고작 이런 과자 하나에 관심을 가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사쿠라기가 카에데가 아는 것과 다른 문장을 읊었던 날, 그러니까, 그가 방심한 틈을 타 몰래 포춘쿠키를 열어본 날. 카에데는 한층 무엇도 이해하고 싶지 않다가도 그에 반하듯 수많은 의구심이 싹텄다. 왜, 어째서. 그런 물음이 잇따라 고개를 들었지만, 다시 읽어보랬다고 착실히 연애운 비슷한 문장을 소리 내 읽는 작은 멍청이의 표정에 금세 저 좋을 대로 생각하게 됐다. 아무려면 어떤가, 하고. 본래 시간 여행자-카에데는 이 표현이 옳은지조차 몰랐다-는 비밀이 많은 편이라는 설정을 그 멍청이랑 봤던 지루한 영화에서 보았던 것도 같았기에. 성 같은 것은 없다는 뻔한 거짓말로 자신이 이름뿐인 사람이 된 것처럼 말이다. 이상한 데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빠른 그는, 어느 순간부터 누구도 정해주지 않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적당한 틈을 타 혼자 종이를 확인할 필요 없이 사쿠라기가 그것을 볼 때 함께 확인하는 일은 그런대로 덜 지루한 일과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까.

여덟.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은 모두 그에게서 잘려나가듯 사라진다. 카에데는 이 현상을 이보다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멋대로 흐른 시간은 적어도 그에겐 주어지지 않은 시간처럼 취급됐다. 예컨대, 그가 냉장고에서 그 멍청이가 좋아할 음식만이 담겨있는 흰 비닐봉지를 챙겨다 사쿠라기의 집 앞에 앉아 눈을 감았다 뜨면 열에 아홉은 사쿠라기가 이미 돌아온 뒤였다. 그렇게 빠르게 흘러간 듯한 시간은 카에데에게 졸음을 한가득 가져다주기야 했지만 정말로 잠들었다 일어난 듯한 경험을 주지는 않았다. 단지 눈을 한번 깜빡였을 뿐 실제로 잠들 수는 없고, 흘러가 버린 시간은 그에게만 없던 시간이 되듯이.

이 현상은 사쿠라기의 옆집에서 잠들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루하루 포춘쿠키가 고지하는 숫자가 줄어들수록 피로는 덜하다 느낄 때가 있기야 했지만, 대개는 눈만 감았다 뜬 듯한 묘한 감각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흰 종이가 보여주는 숫자가 70대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사쿠라기와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가 눈을 감았다 뜨면 선 채로 아침 해가 뜨는 걸 보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그때마다 사쿠라기가 집을 나서는 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을, 카에데는 기억했다.

그가 유일하게 평범히, 알고 있는 상식대로 잠들었다고 느낀 날은 사쿠라기 하나미치를 그의 집에서 재웠던 날뿐이다. 그날은 그간 잊고 있었던 수면이란 게 어떤 것인지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둔 채 느껴지는 익숙한 이의 존재와 버겁지 않은 세상이 가져다주는 안온함이 기꺼웠다. 좁은 소파에 몸을 구겨 잠드는 일 따위는 불편이 되지 못했다. 그 탓에 그날은 한번 잠든 뒤로 도저히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그 멍청이가 무어라 떠들었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홀로 투덜거리며 식사하는 소리나 눅눅한 과자를 씹는 소리, 식탁을 치우는 동안 작게 들려오는 물소리마저 머리맡을 다독이는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참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몸은 이 세상의 법칙에 적응한 것처럼 사쿠라기가 그의 공간을 벗어나려 할 즈음에야 겨우 뜻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고작 한 번뿐이었던 긴 평안과 안온은 카에데에게 전에 없던 충동을 가져다주었다. 이것도 다 그놈의 포춘쿠키니 소원이니 하는 것들 때문이라고.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쏟아지는 졸음과 피로를 견디며 그는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카에데는 그렇게 언젠가부터 고수하기 시작한 ‘시간 여행자’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의 자신은 그와 같은 열여섯이 아니라 열다섯은 많은 성인이라는 사실도 이성이 선택적으로 제 역할을 하는 데에 일조했다.

아홉. 아홉 번째는 몇 안 되는 희소식에 가까웠다. 카에데를 괴롭히던 증상이 어느 날부터인가 차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차라 해도 나날이 그 차이가 쌓이니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했던 날 떠올렸던 표현을 이어가자면, 간혹 어떤 순간에는 사쿠라기를 생각하지 않아도 잠시간 물로 돌아가 제대로 호흡할 기회 정도는 받은 듯했으니까. 눈앞은 일렁이며 움직이지 않고, 하늘과 땅 역시 제자리를 지킨다. 들숨과 날숨 한 번에 숨이 지나는 온 길이 아플 일도 없었다. 마치 그가 머물게 된 세상이 루카와 카에데라는 인간에게 아주 조금씩 온화해지기라도 하듯이. 여덟 번째 사실에도 불구하고, 잠들기 위해 억지로라도 눈 감는 시간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아니었던 건 이 때문인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진작에 몸이 버티지 못했을 터였다.

열. 그가 갈 수 있도록 허락된 장소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허락’이라는 표현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아무리 네 번째 사실로 알아낸 방법과 아홉 번째 사실이 만들어준 기회를 이용해 행동반경을 늘려보려 해도 일정 수준이 지나면 어떠한 억제력이 카에데를 사쿠라기가 사는 맨션 앞으로 되돌려놨다. 그것도 어느 순간, 갑자기. 걸음 하나에도 모르는 장소 한복판에 놓여있거나, 사쿠라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어디 있는지도 모를 붉은 자판기 앞에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 어느 순간부터는 이 사실도 그다지 특이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열 번째 사실에 따라 그가 갈 수 있는 장소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카에데와 사쿠라기의 집이 있는 낡은 맨션, 이상한 붉은 자판기 앞, 그리고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있는 곳. 마지막은 예측할 수 없는 때에 어떻게든 그 장소로 향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를 맨션 앞에 되돌려두는 억제력과 닮아있었다. 세상이 조금은 온화해지고, 그가 아는 순리대로 움직이려 하고 있다고 느껴지면 그것이 신호였다. 그때마다 카에데는 홀로 있는 장소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는, 사쿠라기를 만나야만 한다는 생각이 카에데를 이끌었다. 그런 순간에는 사쿠라기를 떠올리며 걸음을 떼고, 눈을 깜박이는 것만으로도 늘 그가 있는 곳 근처에 이를 수 있었다. 카에데는 이 현상을 어떠한 부름이 자신을 이끈 결과라고 느낀다. 이 이상한 세계가, 혹은 무언가가 자신을 부른 것이 틀림없다고.

마지막 열하나.

쿵, 쿵, 쿵, 쿵. 금방이라도 터질 듯 심장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는 붉은 조명 아래 ‘50’이라는 숫자만이 선명한 문장을 본 뒤에도 좀처럼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자판기에서 쏟아지는 조명 빛 탓에 눈앞이 온통 새빨갛다. 골칫덩이 기계에 기댄 이마에서부터 열기가 번져 더는 쇳덩어리가 닿는 자리에 특유의 찬 기운은 남아있지 않았다. 사쿠라기 하나미치와 멀어진 지 오래임에도 발밑은 흔들리는 법 없이 그를 지탱했다. 당장 그의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단 하나, 한 사람뿐이니 가능한 일이리라.

사쿠라기가 얼빠진 소리를 내며 휘청이던 순간, 그는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사쿠라기와 있을 때면 상식을 벗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칙이 깨진 것처럼, 평범하게 흐르던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그런 것만 같았다. 그러니 망설일 틈도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손을 뻗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를 붙잡았을 뿐이다.

카에데는, 루카와는, 루카와 카에데는. 그는 몇 번이고 변명하고 싶었다. 혹여나 그 멍청이가 잘못 넘어져 다치기라도 한다면 모든 게 소용없어지니까. 저는 어차피 열여섯의 사쿠라기에게 ‘루카와 카에데’가 아니니까. 그러니 그 정도쯤은 이상할 것 없다. 유별난 대응도 아니었다. 그래야 했다. 비록 이런 식으로 늘어놓은 변명으로는 저 혼자 날뛰는 심장 소리를 다 설명하지 못할지라도, 그 찰나의 순간 느낀 감정을 모두 대변할 수는 없을지라도. 고작 그런 일로 불안했다고, 손톱만 한 크기에도 못 미친다 할지라도 무서웠다고, 그렇게 겁을 먹었다고. 형체 없이도 선연히 그를 덮쳐온 날것의 감정을 꺼내놓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그는 일찍이 깨달았던 사실로부터 여러 번 눈을 돌렸었다. 눈앞에서 저절로 적힌 ‘소원’이란 것을 마주할 필요도 없이 루카와는 안다. 루카와 카에데는 누구보다도, 어쩌면 열여섯의 사쿠라기보다도, 나아가 서른하나의 사쿠라기 하나미치보다도 그가 농구를 그만둘 일이 없길 바랐다. 그만두지 않기를 바랐다. 포기하지 않기를 원했다. 제 손으로 쓴 적도, 간절히 빌어본 적도 없건만 그것은 오래전부터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만두지 않길 바라는 주제에 그만두라는 시답잖은 말 한마디를 껍데기 삼아 속여 넘기려 했다. 그럴듯한 핑계를 대기 위해 머릿속을 뒤졌다.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같은 말을 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으면서, 소원에 필요한 설득을 핑계로 과거의 자신은 몰랐던 시간을 함께했다. 소원 외에는 과거에 더 간섭할 수 없다는 듯 굴다가도 그 녀석이 청승맞게 비 맞는 꼴은 보기 싫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말을 구실로 예외를 두었다.

열여섯의 저와 치고받아 생긴 상처를 제 손으로 치료해줄 때에도, 묻고 싶은 것 하나 입에 담지 않았다. 시작한 지 세 달도 되지 않은 농구 때문에 그토록 분한 마음이 드느냐고. 서른하나가 될 때까지 같은 부상을 세 번 입게 하고, 잊을 만하면 부상을 달고 살게 만드는 이 스포츠가 단 두 달을 쉬지 못할 만큼 좋으냐고. 서른하나의 네 놈은 겨우 말 몇 마디로 제게 코트 위를 떠날지도 모른다고 통보해 왔는데.

루카와는 묻지 못했다. 루카와 카에데라는 사람이 물을 수 있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할 터였다. 그는 평생을 농구와 함께 살았고, 한때는 그것이 삶의 전부라 믿었던 적도 있었으니까.

무르게 구는 이유를 저 스스로 만든 시간 여행자라는 우스운 역할 탓으로 떠넘기며 속으로 궤변을 늘어놓았던 일 역시 그는 부정하지 못했다. 루카와가 어느 한자리에도 똑바로 서지 못했던 언젠가, 그 멍청이는 잘도 선언하지 않았던가. 전국 대회도 보러 오라고.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평생을 안고 가야 할 부상을 얻는 그 경기를.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변명하고 싶었다. 180은 너끈히 넘는 사쿠라기를 작은 충격에도 산산이 깨어질 무언가처럼 다룰 수밖에 없었던 일에 대해, 여전히 세차게 심장이 뛰는 이유에 대해. 하물며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온 소원이란 게 그를 떨어트려 둔 시간 속에서, 온 세상의 이치가 따르는 주축이 왜 그 자신이 아닌지에 대해. 흰 종이 위에 적힌 빈약한 소원보다도 더 간절한, 그마저도 깨닫지 못해왔던 터무니없는 바람에 대해.

루카와는 홀로 유리된 세계에서 혼잣말로도 중얼거리지 못한다. 단 한 번이라도 입 밖으로 내었다가는 껍데기가 벗겨지고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리란 걸, 지금의 그는 알았다. 페이크란 본디 그런 것이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필연 언젠가는 가장 밑바닥에 숨겨둔 속내가 보이기 마련이었다. 무언가를 숨기려 덮어둔 겉껍데기가 벗겨지는 순간, 무엇보다 선명히 본심이 드러날 것을 알면서 그는 고집스레 그만두라는 말 따위를 내뱉었다. 그때에는 가장 깊은 곳에 응어리져 존재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저조차 알지 못했으니. 이 모든 일이 그에게는 제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재해와도 같은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마지막 열하나. 루카와 카에데는 단 한 번도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농구를 그만두길 바란 적 없었다. 언제, 어느 때라도. 무슨 이유에서든. 외려 어떻게든 그만두지 않길 바랐다. 어쩌면 평생을 그럴 터였다.

아니, 분명히.


07. 단풍

몇 번을 겪었는지도 모를 기시감이 막 잘려 나가던 시간을 이어 붙인다. 그새 익숙해진 감각은 루카와의 의식 표면을 두드리며 그가 일어나기를 재촉했다.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라 말하기에도 조금 이른 시각이었다. 장신의 몸을 편히 누이기는 좁은 소파 위에서 억지로 눈을 뜨고도, 그는 그저 조용히 시선만 움직였다. 시야가 멀끔했다. 고요하다 못해 평안하게 느껴지는 얼마간이 눈앞에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루카와는 저를 깨운 것이 무언가가 아니라 누군가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곳에서 그에게 이런 순간을 선사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쾅, 쾅.

옆집에 사는 작은 멍청이는 버젓이 존재하는 초인종을 놔두고 이 시간부터 힘차게 문을 두드려댔다. 사쿠라기가 들었다면 억울해하다 못해 따지려 들지도 모르는 생각을 삼키며, 루카와는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 떴다. 곧 현관문 너머의 사쿠라기가 입을 열었다. 그는 몰라도 뒤늦게 다른 집을 배려할 생각은 들었는지, 목소리에는 언성을 높이지는 않으려 노력한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큰 여우 아저씨, 안 자고 있지?”

나 정도 되는 천재면 다 안다고. 사쿠라기가 으스대는 투로 덧붙였다. 정말로 알고 이러는 것인지, 그저 그런 척을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아마 마주 보고 있었더라면 예의 그 멍청한 표정이 한눈에 들어왔을 터였다. 루카와는 구태여 입을 열지 않은 채 적당히 귀 기울이는 시늉을 했다. 몸을 일으키는 일도 없었다. 사쿠라기가 합숙을 끝내고 돌아온 이후 단 며칠간 다시 이어진 저녁 식사 때와 같이, 그는 최소한의 반응만 내보였다. 겉보기에는 남의 눈치 하나 안 볼 것처럼 생긴 그 녀석이 분위기를 바꿔보겠다고 걸어온 장난을 무시했을 적과 비슷한 태도다. 예나 지금이나 이상한 데에서 감이 좋은 멍청이는 그런 루카와의 반응에 내내 입을 비죽였지만.

지금은 서로 얼굴조차 맞대고 있지 않으니, 소리 없는 반응은 그때보다 더하다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터였다. 어느 모로 보나 서른하나라는 나이가 무색한 대응임에도 지금은 이 정도가 그의 최선이었다.

합숙 전날 일어난 사건 이후, 루카와는 소원이고 뭐고 제 치부를 몽땅 들킨 이처럼 굴었다. 정작 열여섯의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단 한 번도 그날의 일을 꺼낸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기실 그 소원도 이제는 허울뿐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자판기와 포춘쿠키가 기이한 힘으로 루카와는 예상조차 못 할 다른 일을 저지르면 또 모르겠으나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가능했다면 루카와를 15년 전의 사쿠라기와 만나게 할 필요도 없이, 제 허락도 받지 않고 쓴 소원부터 이루어 주면 되는 일이었을 테니. 상상보다 더 무능한 포춘쿠키는 숫자가 반 가까이 줄어들 때까지 줄 수 있는 것은 기회뿐이라는 양 꼬박꼬박 남은 시간만을 알려왔다.

15년 전의 사쿠라기를 만난 뒤로는 쭉 그래왔기에 새롭지도 않은 사실이건만, 처음 세웠던 계획에 허점이 있음을 이제 와 깨달은 게 문제였다. 분명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만 해도 루카와는 작은 멍청이가 두 달 정도만 농구를 그만두게 할 생각이었다. 처음 세웠던 가설과 계획의 타당성은 차치한 지 오래였으므로, 그만하면 완벽하다 여기면서. 계획을 실행할 마음도 없었던 주제에 그랬다.

그는 아주 잠시라도 사쿠라기가 농구를 그만두지 않길 바랐다. 혹여 지금이라도 열여섯의 사쿠라기가 잠시나마 농구를 그만두게 만들 방법을 알게 되더라도, 루카와는 지난 사십여 일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시도 한 번 못 할 터였다. 서른하나의 사쿠라기 하나미치에게 일어난 일을 알면서도 자신이 결코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그는 안다. 너무도 잘 알게 돼서 문제였다.

오래전부터 속에 들이고도 깨닫지 못했던 진심에 대한 늦은 인정은, 이 비현실적인 세계를 다시 꿈처럼 느끼게 했다. 무엇도 할 마음이 들지 않는 세상에서 어떻게 그때의 그 소원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그는 이제 흰 종이 위에 적힌 소원만으로는 부족할 지경인데.

“나 진짜 다녀온다. 어제 말했던 그거 때문에 일찍 가야 돼.”

돌아오는 반응 없이도 사쿠라기는 열심히 떠들어댔다. 처음 했던 말대로 루카와가 깨어있는 것을 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정작 하는 말마다 설명이 한참이나 부족했지만, 루카와는 눈치껏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모를 수가 없다고 하는 쪽이 더 정확했다. 지난 며칠간 저 멍청이는 대화의 9할 정도를 곧 있을 전국 대회 이야기로 시작했다. 루카와가 단답을 하든 말든, 말도 없이 고갯짓으로만 반응하든 말든 여상히. 이는 즉 그가 가장 의식했던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8월의 전국 대회, 지역 예선에서 끝나지 않은 북산의 인터하이.

내일 있을 풍전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이긴다면, 북산은 분명 산왕 공업 고등학교와 만나게 될 것이다. 그가 지나온 과거에 그랬듯이. 사쿠라기에게서 주워들은 이야기만 맞춰봐도 여태 경기 결과가 달라졌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그 녀석의 패스 미스 사건까지 그대로인 것 같았으니 이후라고 다르지는 않으리라. 그렇게 되면 산왕과의 경기에서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분명…….

“뭐, 아무리 바빠도 큰 여우 아저씨 생각해서 특별히 시간 내서 온 거니까. 잘 들어두고 잊지 마.”

문 너머에서부터 던져진 말이 상념을 끊어냈다. 루카와는 여전히 답하지 않는다. 언젠가 이 낯선 집에 사쿠라기를 데려왔던 날, 어두운 자리에 걸쳤던 걸음을 애써 움직였을 때와 같이. 사쿠라기 역시 그날처럼, 하고 싶은 말을 속에 담아두는 방법은 모르는 양 말을 잇는다.

“전국대회도 보러 와.”

반사적으로 턱밑까지 차오른 대답을 그는 간신히 늦지 않게 삼킬 수 있었다. 목 안쪽이 답답해 몸을 구겨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가 굼뜬 동작으로 소파 끝에 걸쳐 앉을 때까지, 조금 전 들려온 말을 마지막으로 떠날 것 같던 발소리는 문 근처를 벗어나지 않았다. 인기척은 멀어지지 않고, 루카와의 온전한 세계와 함께 문가에 머물렀다. 또 무슨 꿍꿍이가 있길래. 속엣말 대신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쉰 루카와가 이번에는 소파 팔걸이에 기대 턱을 괬다. 담담한 시선이 흘러간 곳은 현관이다. 그의 자리에서는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 제대로 보이지 않음에도, 문 앞을 떠나지 않는 빨간 머리통 안의 생각을 가늠이라도 해보려는 듯 그는 같은 방향만을 바라봤다.

문 너머의 인기척은 어느 순간 한 자리에 멈춰 선다. 곧이어 무언가 부딪히며 부스럭거리는 소리, 부산스레 움직이는 소리, 테이프 따위를 뜯는 소리가 고요한 시간을 간간이 깨뜨린다. 그런 소음마저 사쿠라기와 닮아있어서, 루카와는 언제 다시 흔들릴지 모르는 세상 속에서도 눈을 감지 않았다. 작은 소란은 금세 끝을 보였다. 읏차, 하는 추임새 사이로 손 터는 소리가 섞였다. 곧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전조 뒤에 다시 사쿠라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물 두고 간다. 이것도 ‘특별히’ 이 천재가 구한 거라고.”

특별히, 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사쿠라기는 어울리지도 않게 헛기침을 해댔다. 누가 들으면 낯간지러운 말을 겨우 해낸 줄 알 것이다. 저 녀석은 특별이니, 천재니 하는 표현을 입에 달고 사는 주제에 저부터가 어색하게 굴면 그런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것마저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다 큰 어른이 유치하게 굴지 마. 자꾸 여우 자식 같잖아. 이어진 중얼거림은 기침 소리보다도 작아서, 지금처럼 조용한 때가 아니었다면 루카와의 귓가에 닿지도 못했을 터다. 끝까지 한 사람만이 입을 연 대화 아닌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 소리는 이내 소음이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작디작은 무언가로 변해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었다. 루카와는 멀어진 게 분명한 사쿠라기의 흔적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문을 열어 바깥을 보지 않아도 떠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을 것만 같을 때까지.

“……다치지나 마, 이 멍청아.”

늦어도 한참 늦은 답이 그의 입술 새를 비집고 나온다. 그대로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상념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멀쩡한 마룻바닥을 밟아가기 시작했다. 지나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인지, 이조차 사쿠라기를 떠올린 일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주변은 여태 눈에 띄게 멀쩡했다. 혼자 남은 시간 동안 작은 이상도 느끼지 않은 적이 드물었기에, 루카와는 이런 상황에서 ‘멀쩡하다’는 표현을 떠올린 것 자체가 비일상적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열여섯에게 유치하게 굴지 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요 며칠 새 나잇값을 못 하던 그는, 그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몸소 증명해 보이듯 오로지 사쿠라기가 두고 간 무언가가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꼼짝 않던 몸을 움직였다. 열다섯이나 어린 상대가 열심히 이야기할 때는 대답 한 번을 안 했으면서, ‘선물’이라는 단어를 무시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사쿠라기의 말은 이미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을지도 몰랐다.

구태여 변명을 붙이자면 조금이나마 상태가 괜찮을 때 보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어 빠릿빠릿하게 구는 것이기는 했다. 아무리 첫날보다 증상이 나아졌다 한들, 눈앞이 일렁이기만 하면 시야가 흐릿해지고 구역감이 드는 건 똑같았으니까.

단 몇 걸음을 떼는 사이에도 루카와는 늘 하고 다니게 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결코 넓다고 할 수 없는 집 안을 나서 문을 열고 나가기까지, 시간은 기이할 만큼 평범하게 흘러갔다. 고작 몇 초에 불과하다지만 루카와는 혹여 사쿠라기가 떠나는 척만 하고 어디 숨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변부터 살필 정도였다. 금세 터무니없는 상상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는 했어도.

어떤 변덕처럼 주어진 유예 속에서 그는 천천히 시선을 옮겨갔다. 문 바로 앞의 풍경을 지나 바닥으로, 바닥에서 더 넓은 주변으로. 그러다 하늘과 낡은 맨션 외벽에 딸린 계단, 세월이 보란 듯이 흔적을 남긴 벽으로. 홀로 동터오는 하늘의 색을 온전히 눈에 담은 것이 얼마 만인지도 가늠할 수 없다고 느낄 무렵, 유독 이질적인 존재가 눈에 밟혔다.

그것은 빨간색이었다. 아니, 녹색이기도 했다. 잎자루와 잎의 반절이 녹빛을 띠는 단풍잎은 이 계절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빛깔이 섞여 있었다. 한여름에 이르게 붉은 옷을 입으려던 잎사귀는 그렇게 사쿠라기의 눈에 띈 죄로 선물이 돼버린 모양이다. 그것도 투명한 테이프를 잎자루에 덕지덕지 붙인 채, 문패 하나 없이 텅 빈 자리를 강제로 떡하니 차지하게 된 선물이.

어이가 없어서.

마른 웃음이 미미한 호선도 그리지 않고 루카와의 입가에 걸렸다 사라졌다. 바로 옆집의 같은 자리를 차지한 ‘사쿠라기’, 라는 성이 쓰여있는 문패까지 함께 눈에 담고 나니 그 선물이 너무도 어설퍼 보였다. 정말이지 그 멍청이나 할 법한 생각이라고. 루카와는 시곗바늘이 아주 조금씩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외면한 채 또다시 한 사람을 생각했다.

그는 자신과 같은 나이의 선이 뚜렷한 얼굴을 생각했다. 비슷한 눈높이와 자질구레한 부상으로는 꺾이지 않는 의지를 투영한 것만 같은 몸을 생각했다. 서른이란 나이를 넘어서도 열여섯 못지않게 유치하게 굴어 오는 바보 같은 성정을 생각했다.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할 때면 곁을 채워 와 무시하기 힘든 존재감을 생각했다. 농구공을 쥔 손과 뛰어오르는 등, 빨간 머리카락 아래의 다채로운 표정을 생각했다. 사쿠라기 하나미치를 생각했다. 골치 아프다 못해 괴로운 시간을 덜어주는 유일한 ‘해결책’이자 이 시간에는 없는 이를, 더는 처음과 같은 버거움은 없을지라도 이제는 습관처럼 떠올리게 된 사람을.

더는 이렇다 할 노력조차 필요치 않은 ‘해결책’을 실천한 것이 무색하게, 세상은 다시 루카와가 아는 모습을 찾아갔다. 조금은 느리게, 아무리 임시방편이라지만 해결책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는 않을 만큼만 느리게.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없는 풍경이 일렁인다. 땅은 더 이상 루카와를 지탱해주지 않는다. 간신히 크게 휘청이는 꼴은 면한 그가 발을 뗐다.

한 걸음, 몸은 제 생각보다 수월히 움직였다. 다시 한 걸음, 그새 하늘이 한층 밝게 트인 것만 같다. 또다시 한 걸음, 팔을 뻗어 문을 열 적에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음에도 등 뒤로 노을이 쏟아졌다. 고작 세 걸음으로 그는 제게 주어진 앞으로가 어떤 형태로 다가올지 알 것 같았다. 그를 골릴 준비를 해오던 시간이 변덕스레 물러가는 조짐 역시 느껴졌기에.

순식간에 밤을 드리우고 일렁이던 풍경이 잠시 평안해졌다. 그는 이 순간이 어떤 신호임을 알았다. 한동안 변덕은 없을 것이다. 아주 잠깐일지라도, 세상은 그에게 온화한 체하며 떠나야 한다 채근할 테다. 부르는 이가 있으니 가야만 한다고, 이곳에 떨어진 이상 이 세계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고민은 길지 않다. 루카와에게 선택권 같은 건 없었으니까. 그는 짧은 시곗바늘이 세 바퀴를 돌기 전에 사쿠라기를 찾으러 나설 때와 비슷한 채비를 마치고 낡은 맨션 앞에 섰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한 걸음, 그 한 번을 내딛기 직전 그가 문패 대신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손을 뻗었다. 잎맥이 붉은 자리만을 더듬어 오르듯 움직이는 손끝이 조심스럽다. 피부 위로 닿는 잎의 감촉이 생생했다.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적어도 지금은, 꿈은 아닌 것만 같았다.

*

 

걸음을 내디디며 눈을 깜빡이는 시간은 순간이라 부를 만했다. 그 찰나의 틈을 지나 루카와는 거짓말처럼, 어쩌면 당연하게 이루어져야 할 누군가의 말에 이끌린 것처럼 열기로 가득한 경기장 안에 당도했다. 힘찬 응원 소리와 관중석을 족하게 채운 사람들, 코트를 가르는 붉은색과 흰색의 유니폼. 루카와 카에데만이 겪은 시간을 덧입지 못해 앳되었음에도 낯익은 면면들.

그가 모를 리 없는 날이었다. 경기 중이면 으레 들려오는 자잘한 소음을 뒤덮을 정도로 ‘산왕’이라는 이름을 외치는 응원이 장내를 울리고 있었다. 꿈속에서조차 상상해보지 못한 자리에서 루카와는 오래전 그 역시 지나쳐 왔던 날을 본다. 부연 먼지처럼 쌓인 세월 탓에 제 기억 속에서까지 조금은 빛바랜 풍경이, 다시 생기를 얻은 채 눈앞에 펼쳐졌다.

루카와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긴 시간 눈꺼풀을 닫거나, 시선을 떨어트리는 법도 없다. 15년 전의 세상에서 눈뜬 이후 가장 경계했던 한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 순간은 마치 그가 지켜봐 주기만을 기다린 양 오롯이 이루어졌다.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느끼기에는, 그 어떤 것도 바뀌지 않은 것만 같았다. 미야기의 몸을 맞고 코트 위를 벗어나려 하는 공, 그 뒤를 쫓는 미츠이. 부름으로 그를 만류하며 순식간에 뛰쳐나와 몸을 던지는 한 사람. 그 모든 것이.

어마어마한 소리가 울린 직후, 장내는 삽시간에 적막에 휩싸이는 듯하다가도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심판이 호각을 불며 무어라 외친 뒤부터는 눈에 들어오는 것도, 귀에 닿는 것도 극히 희박해졌다. 적어도 그가 잊지 않았다고 믿는 모든 순간이 작은 오차도 없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만 같은 광경은, 손끝에 남은 감각이 무색하게 그의 정신을 잡다한 상념 속에 던져두었다.

루카와 카에데는 여전히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농구를 그만두지 않길 바랐다. 가능한 한 오래라는 표현이 모자랄 만큼, 외려 평생이란 시간을 가져다 붙여야 만족할 만큼, 상식이란 것을 뛰어넘어 그 멍청이가 코트 위에 영영 있길 바랐다. 루카와가 그리는 바람에는 당연하다는 듯 그 자신 역시 함께했다. 치기 어릴 나이는 다 지났으면서 현실적인 요건 같은 건 따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 녀석이나 저나 처음 만났던 열여섯부터 지금까지 서로의 앞에서 한없이 유치해지는 건 똑같았으니까. 아마 그 멍청이도 저와 같으리라고, 무의식중에 그렇게 여겨왔는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그토록 그 녀석 생각밖에 할 수 없었던 거라면, 그렇다면, 제가 평소처럼 굴지 못했던 그날의 일도 설명이 됐다. 루카와는 지금에 와 명확히 정의할 수 없었던 답을 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답지 않게 술기운을 안고 거리를 배회한 날. 팀을 승리로 이끌고도 온통 사쿠라기 하나미치 생각으로 머릿속이 무거웠던 날.

그래, 그날.

버저가 울리기 직전. 1초가 셀 수 없이 많은 억겁으로 나뉘어 눈앞에 닥친 순간, 루카와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공이 제 손을 떠나 림으로 향하기 전부터 그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몇 년 전 수도 없이 느꼈던 감각은 잊히지 않고 붉은 유니폼보다 검은 유니폼이 익숙해진 루카와의 안에 남아 그를 이끌었다. 저기 어딘가에, 코트 바깥 어딘가에 사쿠라기가 있다고. 인력처럼 작용한 힘은 끝내 루카와의 시선을 돌려 그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했다.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그토록 눈에 띄는 빨간 머리카락도 가린 채 관중석 어딘가에 있었다. 정확히 어느 곳이었는지, 주변에 사람은 몇이나 있었는지 따위는 기억하지 못했다. 멀리서도 똑똑히 보였던 표정과 찰나의 순간 섞여든 시선에 담긴 감정만이 서느러니 남아 루카와의 머릿속을 온통 헤집었다. 그에게 묻고 싶었다. 정말로, 그따위 표정을 하고도 코트 위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드느냐고. 루카와 카에데가 언제까지고 사쿠라기 하나미치를 기다릴 코트 위를.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도 모를 집착과 논리가 뒤엉킨 물음은 소리를 갖지 못해 타인에게 기억으로 남을 기회조차 잃었다. 다만, 루카와는 그날 버저가 울리는 순간 보았던 얼굴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가 잊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터였다. 그는 운명이니 필연이니 하는 것들은 믿지 않았지만, 코트 위에서 저를 이끄는 경험과 감만은 믿었으니까.

그는 코트 바깥으로 제 의식을 이끌었던 감각과 비슷한 인력을 느꼈던 첫 순간을 기억했다. 15년이란 세월이 흐르고도 유독 선명한 장면을, 당장 바로 눈앞에서 고스란히 재연되고 있는 지금 이때를.

열여섯의 루카와 카에데가 만들어낸 마지막 패스가 사쿠라기의 버저비터로 연결된다. 79-78이라는 결과는 단 몇 초도 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완성되어 북산의 승리로 남았다. 당시의 루카와는 왜인지, 아니 확실히,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그곳에 있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는 코트 위라면 어떤 순간이든 그는 사쿠라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북산 농구부 시절, 수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던 두 사람의 콤비 플레이 아래에는 이 같은 내막 아닌 내막이 존재했다. 만났다 하면 불협화음을 이루는 루카와와 사쿠라기가 어떻게 종종 무서울 정도로 손발이 착착 맞는 플레이를 펼칠 수 있는지는, 농구부원들 사이에서 미스터리로 남았지만 루카와에게만은 예외였다.

그는 그저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경기 중에 그만큼이나 능숙히 사쿠라기의 패턴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어떻게 사쿠라기가 있는 곳을 아는지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때때로 무언가 저를 이끄는 것 같다고 느낄 뿐이었다. 사쿠라기와 코트 위에 있을 때는 필요한 순간에 어김없이.

그러니까, 이건 모두 코트 위에서의 이야기였다. 루카와와 사쿠라기, 두 사람 모두가 같은 코트를 밟았던 시절에 국한된 이야기.

분명 그랬었다.

삐익-!

정작 그날에는 듣지 못했던 호각 소리가 한순간의 적막을 뚫고 루카와의 의식 안으로 밀려들었다. 경기의 끝이었다. 환호성과 함성,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도 모를 연호가 체육관을 채웠다. 어쩌면 그 이전에, 같은 유니폼을 입은 루카와와 사쿠라기의 터치 소리가 먼저 들려왔을지도 모른다.

루카와가 익히 알면서도 동시에 전혀 모르는 광경이 상념을 흩트리며 생생히 눈앞에 이어졌다. 그의 시야 안쪽에 승리의 기쁨으로 뒤엉킨 이들 사이에서 환히 웃고 있는 사쿠라기가 보였다. 너도나도 달려드는 농구부원들과 일명 사쿠라기 군단이라 불리던 이들까지 합세하자 코트 위는 한층 복잡해졌다. 아픈 줄도 모르고 승리를 만끽하던 빨간 머리통이 기억에 없던 얼굴로 홀로 서있는 루카와를 돌아본 것은 그때였다.

눈이 마주쳤다. 잠시뿐이었지만, 루카와는 그렇게 느꼈다. 금세 고개를 돌려 팀원들을 훑는 것을 보면 착각일 수도 있을 터였다. 사쿠라기가 정말로 저를 봤다면 멀리서도 눈에 띄게 한껏 으스대거나 잘난 척을 했을 테니.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아마도…….

역시 착각이었나.

그가 속으로 중얼거린다. 루카와는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이 이 세계와는 동떨어져 있음을 느낀다. 이곳에는 어디에도 서른하나의 루카와 카에데가 속해도 될 자리가 없었다. 문득 이어진 생각에 그가 미묘한 낯으로 미간을 좁혔다. 이상하게도, 그 멍청이가 보고 싶었다. 자신이 아는 서른하나의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같은 부상을 세 번이나 겪고도 웃었던 그가.

*

 

한때는 지겹도록 일상 한구석을 차지했던 풍경 앞에서 루카와는 한가로이 걸음을 옮겼다. 밀려드는 파도가 만들어내는 경계를 따라 달리며 그 녀석을 만나러 다니던 십여 년 전의 어느 날보다 한참은 느린 동작이었다. 모래사장과 바다는 흔들림 없이 널리 뻗어있고, 파랗다 못해 새하얀 빛으로 드리운 하늘은 더는 정신 사납게 돌아가지 않는다. 원치 않게 함께했던 메스꺼움이니 구역감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지난 환상이었다는 듯 더는 그의 곁에 없었다. 아마 걸음 한 번 떼지 않고 에노시마가 보이는 해변까지 끌려온 게 아니었다면, 그는 이제 이상한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됐다고 믿었을지도 몰랐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곳에 다다르기 전, 루카와는 분명 잡지 표지에 쓰이지도 않을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그새 다친 것도 잊고 맨 앞에 구부정히 앉는 사쿠라기에게서 잠깐 눈을 뗐을 뿐인데. 정신을 차리니 짠 내음이 한가득 몰려오는 바닷바람을 맞고 있었다.

순 멋대로군.

이곳에서 이상한 자판기부터 찾으려던 시도가 실패하자마자 루카와가 입 밖으로 낸 말이란 것이 그랬다. 숨이 찰 정도로 달렸고, 틀림없이 늘 하던 대로 그 멍청이 생각도 했건만 괜스레 전속력으로 해안가를 달려 힘만 뺀 사람이 됐다.

소득이랄 게 전혀 없지는 않았다. 달리는 중에도 간간이 눈에 밟히는 어딘지 낯익은 풍경과 더위가 꺾이어갈 절기 특유의 날씨가 어렴풋이 그가 놓인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시기의 사쿠라기는 분명 루카와도 아는 그 병원에 입원 중일 터였다. 북산의 인터하이는 그가 기억하는 것과 똑같이 끝을 맺었을 테고, 작은 멍청이는 긴긴 재활을 이겨내 언젠가 코트로 돌아올 것이다. 비록 루카와는 홀로 가늠한 이 모든 상황을 ‘그 포춘쿠키는 예상했던 대로 사기였다.’는 문장으로 요약해 버렸지만, 그조차 의아할 만큼 이외에는 어떠한 감상도 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익숙한 바다와 섬, 하늘을 앞에 둔 채 물과 땅의 경계 앞에 앉아있는 빨간 뒤통수와 등을 보았을 때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포춘쿠키니 소원이니 하는 것들은 중요치 않은 듯 느껴졌으니까. 루카와는 일렁이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세상 속에서 걸음을 뗐다. 더는 혼잣말로 남겨두지 않으려는 말을 들어야 할 이가 저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으므로.

신발 밑창 아래로 모래 알갱이가 스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쉴 새 없이 포말을 만들어내는 파도가 사쿠라기의 바로 앞까지 밀려들다가도 멀리 물러났다. 바닷물을 머금은 자리가 짙은 갈색으로 물들며 발끝의 경계를 덧칠하든 말든, 먼 수평선만을 바라보는 뒷모습을 눈에 담던 루카와가 입을 열었다.

“사쿠라기.”

퍼뜩,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던 사쿠라기가 어리둥절한 낯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심을 한가득 안은 얼굴이 뒤를 돌아본다. 이번에는 확실히 눈이 마주쳤다. 동그랗게 크게 뜨인 눈이 우스워 루카와는 괜한 숨을 미미하게 열린 입술 새로 밀어냈다.

“뭐, 뭐야, 큰 여우 아저씨? 내가 보낸 편지에는 답도 없더니!”

“바빴어.”

이제는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편지에 무슨 내용이 담겼는지는커녕 그것이 제대로 도착했는지조차 모르면서 그는 겉보기보다 섬세한 멍청이를 배려하는 말을 적당히 주워섬겼다. 산왕과의 경기가 있었던 날로부터 정확히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몰라도, 그간 저 녀석은 제게 편지까지 쓴 모양이었다. 사람이 바쁘다 답했는데도 사쿠라기는 어쩐지 수상쩍어하는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뭐 얼마나 바빴는데.”

“…출장.”

이번에는 한 박자 늦게 입이 열렸다. 나름대로 그럴듯한 답을 찾으려 머릿속을 뒤진 탓이다. 다행히 사쿠라기는 그가 이사를 들먹이며 거짓말한 첫날처럼 대놓고 의심은 못 하는 눈치였다. 진짜 일을 하네, 같은 얘기를 당사자 앞에서 중얼거리기는 했어도 그 외에 더한 말은 없었다. 잠깐의 침묵을 채우는 것은 파도 소리다. 먼 곳에서 불어온 바람이 자아내는 소리가 지지 않고 끼어들었다. 한동안 멋쩍어하는 표정으로 목덜미를 쓸어내리던 사쿠라기가 어느 순간 입을 비죽이며 종알거렸다.

“이 천재가 산양 녀석들 이기는 것도 못 봤겠네. 보러 오라고 했는데.”

“봤어. 네가 두고 간 그 이상한 풀도 봤고.”

“진짜 보러 왔다고? 그보다 이상한 풀이라니. 특별히 구해다준 거구만.”

하여간, 성격도 나빠. 꾸깃꾸깃해진 얼굴로 삿대질하는 녀석을 루카와는 그저 조용히 바라봤다. 그 간극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몰라도, 사쿠라기는 그간 못한 말을 쏟아내듯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경기를 봤으면서도 9월이 될 때까지 답장 한 번 안 했냐느니, 역시 천재가 찾아갔을 때 깨어있었으면서 무시한 거였냐느니, 그걸 어떻게 구했는지는 아냐느니……. 그 많은 말을 도대체 어디다 담아두었는지 끝도 없었다. 그는 중간에 끼어들지 않는 것으로 이전에 못 했던 어른의 역할에 충실했다. 제게는 고작 하루도 안 된 듯한 일이 사쿠라기에게는 적어도 한 달은 지난 사건이라 생각하면 속절없이 묘한 기분이 들기야 했지만, 어쩌겠는가. 루카와는 그의 상식을 벗어난 이 이상한 세계에서 사쿠라기 하나미치라는 ‘해결책’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에 의존하며 버텨온 지 오래였다. 그것은 강제적인 적응이나 마찬가지였고, 어쩌면 그조차 인정하지 않을 순응의 한 갈래였다.

루카와는 이 지난한 시간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물론 그 흰 종이가 통보하던 고지가 사실이라는 전제하의 이야기이기는 했다. 여태 그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발견한 사실을 죄 무시하고 이렇게나 멋대로 굴어오는데 이게 마지막을 알리는 징조가 아니라면 억울함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 지금은 그 과자가 하나 정도는 지키길 바랄 뿐이다.

“곧 이사 가. …급하게 결정된 거라 난 선물 같은 건 없어.”

사쿠라기의 말을 글자 그대로 그냥 잘 들어 주기만 하던 루카와가 드디어 제 할 말을 꺼냈다. 추측이 빗나가든 말든, 그건 나중에 고민할 문제니까. 설마 여기서 영영 저 멍청이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할 일이 벌어지지는 않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어, 어디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이럴 때면 참 어리숙한 티가 났다. 서운한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루카와가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이번에는 다행히 미리 준비해둔 거짓말이 있었으므로 답만은 빨랐다.

“미국.”

“그렇게 멀리? 왜!”

사쿠라기는 금방이라도 제자리에서 펄쩍 뛸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안 그래도 그 여우 자식이….’라는 서두를 단 투덜거림이 뒤따른다. 15년 전의 자신이 사쿠라기를 어떤 식으로 도발했는지 정도는 기억하는 루카와가 이번에도 잠자코 그 말을 들었다. 언젠가처럼 말허리를 자르는 일은 없다. 대신, 살가운 반응이나 답 역시 없었다. 그는 서른하나가 되어서도 열여섯의 멍청이가 보이는 반응이 익숙하다는 사실이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눈앞의 녀석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게 있다고 생각했으니.

귀가 따갑도록 함성이 울리던 체육관을 강제로 떠난 뒤로는 줄곧 그랬다. 루카와는 이 기분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름에도 단순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일쯤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못 본 지 오래되었으니 얼굴 정도는 보고 싶었다. 그 멍청이가 돌아오길 기다리기는 제 성격에 턱도 없다는 걸 알기에 이 정도는 이상하지도 않으리라.

“…코트 바깥에서도 눈에 밟히는 멍청이가 하나 있어서.”

파도마저 잠잠해진 순간, 루카와의 혀를 떠난 말이 모래사장을 구르다 사라졌다. 들어야 하는 이는 눈앞에 없다지만, 들을 수 있는 이는 있었기에 그것은 분명 한 사람에게만은 닿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쿠라기가 금세 표정을 바꿀 이유가 없었다. 뭔 소리야 또. 얼굴만으로 그리 대꾸하며 미간을 좁히던 사쿠라기가 선심 쓰듯 말을 받아왔다.

“큰 여우 아저씨랑은 이웃이니까 이야기해 주는 건데, 아무한테나 멍청이라고 하면 친구 안 생긴다. 엉?”

“내가 멍청이라고 제일 많이 부르는 놈은 너야, 이 멍청아.”

“아까부터 계속 뭐라는 거야!”

또, 또, 다 큰 어른이 멍청이래. 다친 사람 앞에서 그러고 싶어? 이 천재한테 이까짓 부상은 아무것도 아니긴 하지만. 모래사장 위에서 한쪽 발을 연신 구르며 사쿠라기가 씩씩댔다. 루카와는 반사적으로 멍청이라 아픈 것도 못 느끼느냐고 빈정대려다 관두었다. 제가 생각해도 나이를 헛먹지는 않았다며 스스로를 다독인 것은 덤이다. 바로 앞의 녀석이 알면 한층 길길이 날뛰었을지도 모를 일이나, 그의 머릿속을 알 리 없는 사쿠라기가 마저 말을 이었다.

“됐어. 어차피 나도 미국 갈 거니까.”

언제, 하고 루카와는 묻지 않는다.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면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그가 지나온 과거의 언젠가 그랬듯 당연하게 루카와가 있는 미국 땅을 밟을 테다. 그곳에 어느 날 대뜸 옆집에 이사 왔던 ‘카에데’라는 남자는 없다 해도 말이다.

“그때는, 뭐…. 이 천재가 카…, 카에데 아저씨네 옆집에 가면 되겠네. 헹, 나 없다고 슬퍼하지나 말라고.”

“마음대로 해.”

어색함에 금방이라도 몸을 뒤틀 것처럼 굴면서 이런 때에 괜한 호칭은 왜 입에 담는지 모르겠다. 담백하다 못해 건조한 반응만 보이던 루카와가 먼저 툭,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 전에 그 이상한 버릇이나 고쳐. 또 왜 시비야. 그거야 네가 자꾸 멍……. 이제 아주 막 나오지? 너른 바다를 배경으로 둔 채 나누기에는 유치한 실랑이였다. 누가 열여섯이고 누가 서른하나인지 모를 싸움은, 두 사람 사이에서 단 한 번도 홀로 들려온 적 없던 울림을 가진 소리 아래 끊겼다.

“하나미치.”

루카와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여상히 그 이름을 불렀다. 이런 일까지 승패가 나뉘는 싸움으로 여겨 호칭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부른다고 닳을 일도 없으니 이 정도 변덕은 부리고 싶었다. 정작 당사자는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양, 갑자기 분위기는 왜 잡느냐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그는 더 늦기 전에, 혹은 제 마음이 바뀌기 전에 가장 밑바닥에 엎드려 숨어있던 말을 끄집어냈다.

“포기하지 마.”

‘농구’ 같은 당연한 단어는 붙이지 않는다. 들려온 말을 곱씹듯, 사쿠라기가 물러서던 걸음을 다시 되돌리며 눈을 깜빡였다. 어떤 때에는 ‘멍청이’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한없이 멍청한 주제에, 이번만큼은 아닌 모양인지 그가 금세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바보 같기는. 큰 여우 아저씨 표정이 왜 그래? 역시 내 팬인 거 맞지? 투명한 햇살을 쏟아내는 하늘과 빛이 잘게 부서지는 바다 앞에 놓인 미소가 밝았다. 이게 뭐라고, 도대체 무어라고 목이 탔다. 하필 날은 왜 이렇게 맑아서, 푸르른 물결 위로 부서지는 빛은 왜 또 반짝여서. 루카와는 언젠가처럼 눈이 부심에도 환한 풍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만만한 표정은 고민조차 필요치 않은 말을 입에 담을 때까지도 웃음기를 머금고 있다. 무엇보다 찬연한 순간이, 답이 되어 돌아왔다.

“물론! 난 천재니까.”


08. 어느 날

소란한 아침이었다. 창 너머에서부터 들이치는 빛이 하얗게 밝은 것을 보면 아침이라기에는 늦은 때인지도 몰랐다. 불분명한 시간의 경계 속에서, 루카와 카에데는 이제 막 눈을 뜬 참이었다. 한 번, 두 번. 그로는 모자랐는지 서너 번은 더 여닫힌 눈이 허공을 배회한다. 어느 모로 보나 잠기운 하나 떨쳐내는 게 버거운 듯한 반응이 자취를 감추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독 잠에 무른 그를 늦게나마 떠민 것은 어떠한 강박이었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시기는 어느 정도 되었는지, 어쩌면 떨어져 나갔어야 할 시간을 이어 붙여 그를 눈 뜨게 했을지도 모르는 이가 지척에 존재하는지. 그런 것들을 확인해야만 한다는 강박.

가물거리는 시야 안에 낯선, 아니, 익숙한 풍경이 들어온다. 창을 반쯤 가린 커튼과 너른 거실 곳곳을 차지한 고만고만한 톤의 가구들. 마시다 만 위스키 두 병과 술이 반쯤 남은 잔이 놓인 낮은 테이블.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그 옆을 차지한, 구겨진 종이 쓰레기 하나. 그는 당장 주변을 채우고 있는 물건들보다도, 망막에 맺히는 모든 게 어지러이 일렁이거나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위화감을 눈치챘다.

시계 따위는 없는 왼쪽 손목이 가볍다. 침대가 아닌 소파에서 깨어난 것이 분명한데도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외려 190은 넘는 장신인 제가 편히 몸을 누일 수 있을 만큼 넉넉한 크기가 어색할 지경이다. 몇 번을 다시 살펴도 그가 눈을 뜬 것은 거실 한가운데였다.

그것도 그의 집.

‘원래의’라는 말조차 붙일 이유가 없는 루카와 카에데의 집.

“도대체가 무슨 꿈이…….”

낮게 잠긴 목소리 끝이 사그라든다. 뇌리에 선명히 남은 수많은 기억 탓에 머리 안쪽이 지끈거렸다. 숙취 때문일지도 몰랐지만, 몸을 일으키고도 메스꺼움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으니 루카와는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상태라 여겼다. 지난밤 꾼 꿈에서 그를 괴롭혔던 증상에 비하면 이 정도는 거슬리는 축에도 못 끼었으니까.

그렇게 잠에서 깬 그가 ‘포춘쿠키 때문에 15년 전의 사쿠라기 하나미치를 만나는 꿈’의 교훈을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 없는지 따위는 꿈과 현실을 구분케 하는 기준이 못 된다’로 막 결론 내릴 때였다.

구겨지다 못해 돌돌 뭉친 채로 놓인 종이 끝자락 위로 비죽, 그어진 붉은색 선이 눈에 밟혔다. 저답지 않게 청승을 떨다 과음을 해 그런 이상한 꿈을, 그것도 그토록 길고 생생한 꿈을 꾼 것보다도 신경 쓰이는 가정이 그의 머릿속을 스친 것도 그때였다. 그 탓에 루카와는 잠들어 있던 그를 깨운 소음이 여태 문밖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밖이 소란스럽건 말건, 종이와 눈싸움이라도 하는 양 그것을 빤히 응시하던 그가 한참 만에야 손을 뻗는다. 그대로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으나, 잠들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붉은색이 어쩔 수 없이 마음에 걸렸다. 수상한 데다 말도 못 하게 신경 쓰이는 종이를 펼쳐 내용을 확인하는 일은 쉬웠다. 찰나는 아닐지라도 금세라는 표현 정도는 어울릴 만큼, 긴 시간이 걸릴 이유가 없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루카와는 제 손으로 구긴 것이 분명한 종이를 곧게 펼친 채 한동안 미동도 않고 그것을 바라봤다. 아니, 노려봤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소원을 적어보세요.>

하얀 종이 위에는 분명 잠들기 전 보았던 것과 같은 내용이 예의 그 우스꽝스러운 글씨체로 적혀있었다. 문제는 프린팅된 듯한 문구가 기억과 똑같이 검은색이라는 점이다. 물론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 멍청이랑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같이 농구를 하고 싶어.’

구겨진 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하얀 종이 위에는 루카와가 제발 아니길 바랐던 그 말이, 제발 아니길 바랐던 그 색을 입고, 제발 아니길 바랐던 그 글씨체로 자리했다. 저보다 한참은 어린아이들도 쓰지 않을 것 같은 내용의 ‘소원’은 끝으로 갈수록 글씨가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춤을 춰댔다. 붉은 잉크는 얄미울 정도로 또렷한 색을 띠고 있어서, 그 색을 입은 문장이 눈동자를 지나 영영 머릿속에 남을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차라리 꿈이라 믿었던 일이 꿈이 아니고,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진 포춘쿠키가 만들어낸 현실이라면.

그런 가정까지 속으로 뇌까린 루카와가 한숨을 닮은 긴 숨을 내뱉었다. 지금이라도 종이를 잘게 조각내 버릴 생각으로 몸을 틀 즈음, 또다시 그의 시야에 비죽 튀어나온 붉은색이 들어왔다. 반쯤 빈, 푸른 라벨이 붙은 위스키병 뒤에 놓인 빨간색 펜 하나가 늦게나마 존재감을 과시하며 그를 반겼다. 제가 그걸 어떻게 가져온 것인지 기억조차 못 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로써 확실해졌다.

루카와 카에데는 술에 취해 기억에도 없는 집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 대뜸 침대부터 차지하는 술버릇은 없다 자신할 수 있지만,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괜한 문장을 종이 위에 끄적이는 술버릇은 없다고 자신하지는 못하게 됐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직시한 그가 이미 너덜너덜한 종이를 가차 없이 구겨 손안에 쥐었다.

어차피 누구도 볼 일 없는 내용이었다. 찢어버릴 게 아니라 이대로 태우면 그 어떤 이도 조각 하나 보지 못하고 끝날 터다. 그래, 차라리 밖으로 나가서…….

쿵, 쿵, 쿵.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생각을 방해한 것은 문 두드리는 소리였다. 뒤늦게 재차 밀려오는 두통을 느끼며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던 그가 현관 쪽을 돌아봤다. 몸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관성적으로 소음이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찌푸린 낯에는 피로와 여태 다 달아나지 않은 잠기운이 여실했다. 한낱 꿈에서 익숙해졌던 그 거리보다도 더 많은 걸음을 옮기는 동안, 그는 제가 사는 건물의 특수성은 고사하고 초인종을 놔둔 채 문을 두드리는 이가 범상치는 않을 것이란 생각 하나 떠올리지 못했다. 어쩌면 이부터가 지금의 루카와가 마냥 멀쩡한 상태는 아니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지도 몰랐다.

“요, 여우.”

말도 없이 열어젖힌 현관문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만큼이나 익숙한 목소리는 한 박자 늦게 루카와의 귓가에 닿았다. 어느새 제 손으로 활짝 열어버린 문짝은 눈앞에 있는 방문객이 누구인지 똑똑히 확인시켜 주었다. 남의 집 문을 신나게 두드려 놓고 대뜸 허물없는 인사부터 건네온 상대는 사쿠라기였다. 그 특유의 인상 탓에 제 나이보다는 조금 어려 보이는, 루카와와 비슷한 눈높이를 가진 서른하나의 사쿠라기 하나미치. 꿈속에서 보았던 열여섯의 작은 멍청이는 분명히 아닌 녀석이 버젓이 눈앞에 나타났다.

히죽 웃는 얼굴 위로 더 앳된 얼굴이 겹쳐지는 듯하다 사라진다. 대놓고 의식해달라 구는 것만 같은 표정은 꼭 무슨 일을 꾸밀 작정으로 찾아왔다 말하고 있는 양 보였다. 혹은 이미 일이란 일은 다 저질러둔 채 왔다 해도 믿을 법했다. 어디까지나 짐작이지만, 지난 15년이란 시간이 보내온 신호에 그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멍…, 사쿠라……, 아니 멍청이.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루카와는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포춘쿠키를 뱉어냈던 그 자판기부터 찾아가 박치기를 한 번 더 날리고 싶었다. 꿈속에서 이미 원치 않게 실컷 때리기는 했다지만, 그놈의 꿈 때문에 제가 느끼기에도 얼빠진 반응부터 보인 꼴이 어이가 없었던 탓이다. 너 뭐 잘못 먹었냐? 루카와가 어떻게든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덤덤한 척 말을 이어간 것이 무색하게 사쿠라기는 그 부분을 놓치지 않고 걸고넘어졌다. 곧 짧은 웃음을 덧입은 말이 마저 귓가를 두드려왔다.

“아침은 무슨 아침이야, 벌써 점심때구만. 어제 내내 연락도 안 받더니.”

“시간 이야기 같은 건 됐고. …연락은 무슨 연락.”

“구단 회식 끝나기도 전에 여우 너 먼저 들어갔다며? 왜, 그 걱정 많은 매니저가 그 뒤로 너랑 연락 안 된다고 나한테 전화까지 했걸랑.”

그리 어렵지도 않은 말을 루카와는 서너 번은 더 머릿속에서 곱씹어야 했다. 사쿠라기가 언급한 매니저가 누구인지 몰라서는 아니었다. 기뻐하기만 해도 모자란 날 먼저 자리를 뜨는 그를 걱정했던 유일한 인물이었으니까. 구단 사람 중 그 성정을 모르는 이는 없을 정도로 그 매니저는 유독 팀원들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사쿠라기조차 이를 안다는 것은 의외였지만, 들려온 이야기 중 유독 마음에 걸리는 점은 따로 있었다.

“네 번호를 어떻게 알고.”

“지금 그게 중요해? 연락은 왜 안 받은 건데?”

하루 종일 잔 건 아니지? 몸까지 기울여 가며 루카와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던 사쿠라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제야 그는 사쿠라기가 했던 말을 차근차근 거꾸로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지금이 아무리 점심때라 한들, 하루 종일 잤다 이야기할 정도는 아닐 터였다. 사쿠라기에게 전화까지 했다는 그 매니저가 걱정이 많기는 해도 고작 한나절 만에 그토록 신경을 쓴 적도 없었다. 그것도 구태여 같은 구단도 아닌, 귀국 후 재활도 끝나지 않아 소속 팀도 없는 사쿠라기에게까지 연락할 정도로. 애초에 ‘어제 내내’라는 표현부터가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경기 끝내고 돌아온 뒤로는 계속 잤어.”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든 가능성은 일단 제쳐둔 채 루카와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입에 담았다. 아직 처리하지 못해 손안에 남은 종이를 무심결에 더 꽉 움켜쥐기는 했지만. 그새 자세를 바로 한 사쿠라기가 감탄마저 어린 듯한 투로 입을 연 것은 그다음이다.

“사람이 어떻게 24시간을 넘게 자? 여우가 아니라 곰인가?”

“헛소리 그만하고 계산부터 다시 해, 멍청아. 경기는 어제 끝났는데 아까부터 계속 무슨 소리야.”

“너야말로 자꾸 헛소리하지 마! 자, 이 천재가 가르쳐줄 테니까 보라고.”

이래도 어제 같냐? 한층 높아진 목소리와 함께 핸드폰 화면이 코앞까지 들이밀어졌다. 점심때라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시를 나타내는 자리를 차지한 ‘11’이라는 숫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시선을 조금 더 움직인 후에야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이렇듯 구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날짜를 알리는 작은 글자가 똑똑히 제 역할을 해왔으므로.

“……허.”

채 다 막지 못한 헛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화면 위에는 제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날짜가 띄워져 있었다. 고작 하루 차이기는 해도 중요한 경기 일정을 헷갈렸을 리는 없으니 눈앞에 놓인 것만이 사실이었다. 도쿄 레반가가 우승을 차지했던 경기가 치러진 날은 어제가 아닌 그제였다. 그는 정말로, 사쿠라기의 말마따나 24시간을 넘게 꼬박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진짜 몰랐나 보네.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던 사쿠라기가 중얼거렸다. 루카와는 고작 이틀 사이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돌이켜 보려다 금세 관두었다. 코트 바깥의 멍청이나 빨간 자판기, 술에 취해 꾼 꿈같이 지나간 시간을 헤아려 봐야 뭐하겠는가. 꿈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이상한 데에서 수용이 빠른 그는, 이렇게 된 이상 눈 뜨기 전이나 후나 줄곧 떠올라 저를 괴롭히던 대상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미 제 발로 눈앞에 나타나기까지 했으니 결과적으로 나쁜 일은 아니리라.

“그래서, 볼일은. 그게 다면 집에나 얌전히 있지 왜 온 거야.”

아직 환자인 주제에. 여태 잠긴 목소리가 낮게 바닥을 울렸다. 사쿠라기를 본 뒤로 시선 한 번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했으면서, 그는 여전히 사쿠라기에게만 모날 때가 잦은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 이것도 어차피 다 그 꿈 때문일 테니까, 하고. 그토록 생생한 꿈을 꾼 탓에 이 멍청이 얼굴을 오래 보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이리라. 느린 시선이 사쿠라기의 얼굴을 더듬어간다. 꿈속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는 조금 더 긴 빨간 머리카락과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가 어우러진 얼굴은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묘한 이질감을 안겨다 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는 건 플레이오프가 시작되기 직전 이 녀석이 다니는 병원에서 만난 이후 처음이었다. 벌써 이틀 전이 된 그날 눈에 담았던 코트 바깥의 얼굴은 너무도 멀었었고, 그 뒤에는 긴긴 꿈속의 앳된 모습만 보아왔으니 조금은 낯선 느낌이 들 법도 했다.

십여 년을 알고 지낸 멍청이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루카와의 머릿속에 형체가 모호한 예감이 엄습한 것은 조금 더 뒤였다.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이상하리만치 잠잠했다. 저 녀석 성격에 짧다고 말하기 어려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돌아오는 말 한마디 없을 리 만무한데도. 평소대로라면 진작에 여우 자식이라는 호칭을 남발하며 씩씩거리거나, 못해도 제 태도를 수상하다 여기고도 남아야 했다.

‘평소대로라면’, 분명히. 오늘은 예외인지 외려 사쿠라기는 또 히죽거리는 웃음을 건 채 루카와를 바라봤다. 그는 이 표정을 알았다. 한없이 멍청하고도 멍청한 낯짝이기 이전에,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 때의 얼굴. 분명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사쿠라기는 지금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던가.

문득, 온통 사쿠라기 하나미치에게 향했던 신경이 주변으로 뻗어나간다. 그가 사는 곳은 보안이 허술하지도 않건만 고작 두 가구뿐인 층을 오가는 사람이 몇몇 눈에 띄었다. 하나같이 무언가를 나르느라 정신이 없거나 비슷한 업체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이들은 활짝 열린 옆집의 문을 드나들며 잡다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보고 들은 모든 것이 그제야 그의 인식 범위 안으로 밀려들며 경험에 기반한 결론까지 도달한다. 시기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린 이처럼 그의 표정을 살피던 사쿠라기가 보란 듯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나 이사 왔다. 여우 넌 모르겠지만 원래 이사 오면 옆집에 인사부터 하는 게 예의거든.”

작게 열렸던 입이 다물린다. 루카와는 말 한 번 꺼내지 못한 채 사쿠라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공들여 준비한 장난을 성공시켜 기쁜 아이처럼 우쭐거리는 얼굴은, 서른하나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사쿠라기에게 퍽 잘 어울렸다. 사쿠라기가 어떤 감정에 취해있든, 루카와는 무시 못 할 기시감에 종이를 쥔 손끝을 무심코 작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사쿠라기가 눈앞에서 계속 무어라 떠들어대는데도 그 어떤 말조차 제대로 귀에 담기지 않았다.

아니, 몇 가지는 얼추 구분할 수 있었던 것도 같다. 그는 루카와가 며칠 전에 건 시비가 마음에 들지 않아 특별히 알려주려던 이 소식을 숨겨왔다고 했다. 구태여 제 옆집으로 온 건 저 때문이 아니며, 사쿠라기 스스로 고심 끝에 새로운 집을 선택했다나 뭐라나. 병원이니, 트레이닝 센터니, 위치니, 안전이니……. 아무튼 구실이 많기도 많았다. 뭐가 되었든 루카와 카에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였다.

그다음 이어진 말은 멋쩍은 표정과 헛기침이 함께였다. 그렇게 떠들고도 루카와가 대답 한마디 않는 게 예상 밖이었는지, 고개까지 돌려 시선을 피하며 꺼내놓은 말은 이랬다. 미츠이 히사시가 사쿠라기의 소식을 먼저 들을 수 있었던 건 안자이 감독을 찾아갔기 때문이라고. 여우 네가 그런 일로 연락까지 할 줄은 몰랐다고. 루카와는 왜인지 지금 들려온 이야기가 흔히들 말하는 사과나 변명 따위를 닮은 것 같다 느낀다. 어딘지 장황하고 두서없이 나열된 언어는 다듬어지지 않아 투박한 만큼 묵직하게 다가오는 구석이 없잖아 있었다. 제가 알던 그 사쿠라기에게는 유독 어울리지 않는 듯한 태도라 겨우 열릴 뻔했던 입도 다시 다물어졌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낯선 기류는 잠시뿐이다. 언제 루카와의 눈치를 봤냐는 듯, 사쿠라기는 금세 ‘네가 그때 시비를 건 것도 결국은 그래서가 아니냐’, 라는 말로 소리높이며 루카와에게 익숙한 그 태도로 돌아왔다. 정작 그날 통화 중에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루카와는, 사쿠라기가 늘어놓은 이야기만으로도 그 내용을 얼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의 사쿠라기는 정말이지 말이 너무도 많았다. 루카와가 입을 다문 시간만큼을 주워 담아 모조리 그의 몫으로 만들어 떠들 것처럼 굴어오니, 시끄러워서라도 입을 열고 싶다는 마음마저 싹 사라졌다. 꿈속에서 작은 멍청이를 볼 때에도 느꼈지만, 도대체 매번 저 작은 머리 안에 뭘 그렇게 많이 담아두어서 죄 꺼내지 않고는 못 사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거, 그리고 있잖냐.”

익숙한 서두였다. 루카와는 이러한 시작을 알았다. 그랬기에 왜인지 이 순간,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도 모두 잊고 한 걸음을 더 내디디고 싶었다. 금방이라도 다시 열릴 것만 같은 입술을 채근하고 싶었다. 흔치 않은 변덕은 실현되기보다 익숙한 형태로 남아 루카와를 붙잡았다. 지금은 기다려야 했다. 저 멍청이가 가장 고심해 꺼내놓으려는 말이 다시 숨어버리지 않도록, 가장 밑바닥에 남겨둔 말 하나를 끄집어내기 위해 그 위를 두텁게 덮고 있던 것들을 잇달아 쏟아낸 일이 무의미해지지 않도록.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형편없는 글씨로 쓴 붉은 문장이 작은 과자가 주장했던 행운의 증거가 될지도 모르니까. 곧 제게 닿을 말 하나가 그렇게 만들어낼지도 모르니까.

“저번에 말한 그거……,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아직 재활도 다 안 끝나기도 했고. 이미 두 번 했는데 이 천재가 세 번이라고 못 하겠냐!”

어색함을 덮으려 서서히 커진 목소리가 멎기 무섭게 루카와가 빈손을 뻗었다. 고작 몇 초뿐인 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던 탓이다. 사쿠라기의 손등을 타고 올라간 손끝이 손목을 감싸 쥔다. 손바닥 안쪽에 닿는 체온이 높았다. 지난 꿈속에서 느꼈던 그 어떤 것보다도 선연히 피부 아래 남은 온기가 생생했다. 그는 그대로 말도 없이 손목을 잡아끌어 사쿠라기를 집 안으로 들였다. 어엉? 붙잡힌 줄도 모르고 엉거주춤 끌려오던 멍청이는 얼빠진 소리를 내면서도 걸음을 물리지는 않았다.

“너…, 너 지금 뭐 하냐?”

“하루 종일 잠만 잤더니 배고파. 그 맛없는 오믈렛이라도 만들어 봐.”

상황 파악이 느린 녀석을 배려한답시고 멈춘 루카와가 뻔뻔스럽기까지 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기실 평소와 다름없는, 이렇다 할 표정도 안 걸린 낯이었지만 사쿠라기는 그렇게 느끼지 않으리라. 그대로 눈을 맞추고 적당히 시선을 엮는 데에는 큰 노력이 필요치 않다. 더는 ‘카에데’가 아닌 루카와 카에데가 한번 뱉어냈던 거짓말을 사실인 양 능숙히 늘어놓았다.

“원래 이사 오면 같이 밥 정도는 먹는 거니까. 이웃끼리.”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사쿠라기는 입도 제대로 열지 못한 채 연신 눈만 끔뻑여댔다. 멍청이. 기회만 생겼다 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읊조리는 호칭을 조용히 삼켜낸 루카와가 언제 멈추었냐는 듯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두 번의 배려는 없었다. 그는 그대로 주방 안쪽까지 사쿠라기를 데려오고 나서야 손을 놓았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아니야, 뭔가 다른데? 혼이 쏙 빠진 듯한 낮은 중얼거림이 등 뒤에서 들려온다. 그러다가도 퍼뜩, 정신을 차린 사쿠라기가 루카와를 밉지 않게 노려봤다.

“근데 넌 뭐 나한테 맡겨놨냐. 왜 이렇게 당당해?”

루카와는 대꾸도 않고 팬이며 식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 반응이 익숙한 모양인지, 사쿠라기는 툴툴거리면서도 팔을 걷어붙이고 제집인 양 착실히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나 아직 이사 안 끝나서 이거 얻어먹으면 네가 일해야 해.”

“마음대로 해.”

“나 환자라고.”

“알아.”

“부려 먹고 있으면서 알긴 뭘 알아, 이 여우 놈아.”

하나둘 주고받는 말과 함께 냉장고를 떠난 재료들이 쌓여간다. 티격태격할 때는 언제고 사쿠라기는 손은 손대로 움직이면서도 금세 미국에 있을 때가 생각난다느니 하는 말을 꺼냈다. 그 이야기가 얼마 전 먹은 음식 이야기가 되고, 어제 꾸었다는 꿈 이야기가 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여우야 들어봐, 이 천재가 어제 꿈을 꿨는데 거기 네 녀석이 나왔거든?’ 하고.

조용하기만 하던 시간이 두 사람분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루카와는 언제부터인가 낯설어진 소란함이 익숙한 순간을 흐트러트리며 다가오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것은 15년 전의 어느 날에 그랬듯이, 그에게 무엇보다 선명히 남을 얼굴로 나타나 잊을 새도 없이 옆자리를 꿰찰 테니까.

그렇게 늦은 봄의 어느 날, 옆집에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이사 왔다.


2023.7.27 웹 발행 당시 후기 일부

안녕하세요, REET입니다. 웹 발행으로는 처음 인사드리네요.
제 안의 루하나는 일찌감치 불도저 저리 가라 할 사랑을 할 것 같으면서도,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깨달아 갈 것 같은 관계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옆집에 카에데라는 남자가 이사 왔다'라는 긴 제목을 가진 이야기는 후자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너무도 익숙하고 당연하면서도 그만큼 특별하기에 무어라 딱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을 좋아해요. 회지 후기에 다 담지 못한 마음을 웹 발행에만 포함된 짧은 사담에라도 살짝 담아 봅니다.
여기까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하나로 행복한 덕질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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