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세스 메이커
옷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
하스미 케이토 x 칸자키 소마
가볍게 씀….
-
어느날 주말.
“여어 칸자키, 어서 가자고.”
“알겠소이다 키류 공!!”
쿠로가 즐겁다는 듯 웃으며 소마를 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드라마티카에서 연극을 한다길래.’ 외에는 별다른 설명을 듣지 못한 소마는 그저 그를 순순히 따라갈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하스미 공, 어제 하루종일 연극 준비를 한다고 얼굴을 통 뵙지 못했구려. 무뭇, 같이 보고 싶소만…. 하스미 공께서는 보통 각본만 쓰시니, 옆에 앉아서 같이 볼 수 있지 않으련가? …우와앗, 그러면 연극 내용이 아니라 하스미 공의 얼굴만 보고 있을지도 모르오!! 그것은 각본을 써주신 하스미 공께 크나큰 결례!!
고개를 새차게 내젓고서 제 양 볼을 찰싹찰싹 두들겼다. 이렇게 깊게 생각에 잠긴 통에, 공연장 앞에 붙은 오늘의 배우는 읽지 못하고 지나친 소마였다.
공연장 안. 앞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둘은 기대된다는 듯 텅 빈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하스미 공은 어디 있으시련가? 괜히 주변을 기웃거리는 소마에게 무슨 일이냐는 듯 쿠로가 눈짓했다. 소마가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아하하…. …으음, 그것이. 사실 하스미 공을 찾고 있었소이다.”
“? 하스미를?”
“그렇소. 하스미 공께서도 연극을 참관하실 수도 있다 생각하여….”
“으~음….”
뭐가 그리 웃긴지 쿠로가 피식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그러냐는 듯 소마가 고개를 갸웃했으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쿠로가 고개를 저었다.
“곧 볼 수 있을 거야.”
“…?”
의미심장한 말만 던지고서 무대를 바라봤다. 이해할 수 없는 게 잔뜩이었으나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막이 오르고, 연극이 시작됐다.
“…?!”
소마는 쿠로의 말대로 곧 케이토를 볼 수 있었다.
무대 위, 공주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하, 하스미 공…?”
“쉬잇, 조용히 해야지 칸자키.”
그 옆에서 쿠로는 재밌다는 듯 케이토와 소마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케이토오오오 이렇게 부탁하겠습니다~!!”
“구제불능이다 네녀석!!!”
공연 전 날. 울 것 같은 모양새를 취하며 케이토를 따라다니고 있는 와타루와 그런 와타루에게 버럭 분노하는 케이토. 지금 이 둘이 왜 이러고 있냐면, 호쿠토가 감기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 말은 즉 당장 내일 있을 공연의 주연 자리가 비었다는 뜻. 그리고 지금 케이토가 이렇게까지 완강하게 거부하는 이유는-
“어째서 내가 여주인공을 맡아야 한다는 거냐!!!”
호쿠토가 맡은 배역이 여자였기에.
“아아, 하지만 케이토~! 이제와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배역을 담당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것 정도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
“저같은 사람이 아닌 이상, 하루만에 동선과 대사를 전부 외우고 연기까지 완벽하게 하는 사람은 드물단 말이죠~.”
“자만하려고 나를 불렀던 건가? 다시 돌아가는 게 좋겠군.”
“케이토~!!!”
정말 매정해요, 너무해요! 훌쩍훌쩍. 와타루의 장난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케이토는 아까처럼 완강하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야 그 또한 와타루의 말에 어느정도 동의했으니까. …이 연극의 각본을 쓴 케이토라면, 동선만 추가적으로 외우면 되니 호쿠토의 완벽한 대체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골치아프다는 듯 케이토가 이마를 쓸어내렸다. 하아, 또다시 이짓거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고민하고 있는 케이토를 향해 와타루가 부드럽게 웃었다.
“케이토, 다음주 공연에는 호쿠토 군이 직접 연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내일 하루만 도와주면 돼요. …아아~ 정 힘들겠다면, 차라리 극본을 조금 더 수정하는 건 어떠십니까? 이 히비키 와타루, 놀라운 솜씨로 1인 2역을 선보이겠습니다~!”
“…그게 더 번거로운 일이다!!”
애써 아무렇지 않게 장미꽃을 흩날리며 외치는 와타루를 향해 케이토가 또다시 버럭 화를 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고서 이마를 짚었다. 그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지는 게 보였다.
“…우선 내놔라. 달리 방법도 없으니까. …이렇게 실랑이 할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연습하는 게 좋을 거다.”
“!!! 우후후. 네에~!!”
와타루가 빠른 속도로 의상실을 향해 뛰어갔다. …정말이지, 전부 구제불능이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서 깊은 한숨을 뱉었다. 제발 키류나 칸자키가 이번 무대를 안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지만 ES에서 의상을 하루만에 수선해줄 수 있는 사람은 키류 쿠로밖에 없었기 때문에, 쿠로는 자연스레 케이토가 공주 배역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소마를 데리고 이렇게 연극을 감상하러 온 것이었다. 깜짝 놀란 소마를 구경하면서, 재밌다는 듯 쿡쿡 웃었다.
‘그게 당신의 뜻인가요, 아버지?’
긴 드레스를 입은 케이토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왕에게 걸어갔다. 무서운 눈빛을 한 슈가 왕좌 앞에 서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던 케이토가, 마치 왕자님처럼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을 헛되이 하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케이토가 제 치마를 들어올렸다. 허벅지에 매여있던 검을 쥐어 빠르게 꺼내고서, 슈에게 검 끝을 들이밀었다. 왕의 양 옆에 있던 호위기사가 놀라서 창을 겨누었으나 케이토는 비릿하게 웃을 뿐이었다. 슈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용할 수 있는 패는 전부 이용하며, 방해가 될 때는 설령 그것이 가족이라도 가차없이 버린다. 그게 당신의 뜻이자 가르침 아니었습니까?’
케이토의 뒤쪽으로 무장한 기사가 걸어들어왔다. 전세가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오, 오오…!”
소마의 심장이 쿵쿵, 두근거렸다.
“와앗, 하스미 공 엄청 아름답고 멋졌소이다!!”
“그러게, 이런 내용인 줄은 몰랐는데 말야. 하여튼 각본 하나는 정말 잘 짠다니까.”
연극이 끝난 뒤에도 소마는 자리에 앉아서 여운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쿠로가 장난스레 씨익 웃었다.
“지금 하스미 만나러 갈래? 아직 그 모습 그대로일지도?”
“…!!!”
소마가 눈을 반짝였다. 아름다운 하스미 공을 또 뵐 수 있는 거요? 벌떡 몸을 일으키고서 쿠로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어서 가도록 하오!! 그를 따라가며 쿠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뭐~ 하스미 나리의 잔소리 좀 몇 번 듣고 말겠지.
벌컥!
“하스미 공!!”
“뭣…?! 키류, 칸자키? 네녀석들도 보러 왔던 건가?”
“아하핫. 하스미가 공주님이 된다는데, 이 진귀한 광경을 놓칠 수는 없잖냐.”
“…정말 구제불능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전히 드레스차림인 케이토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소마는 또다시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계속 올려다보고 있는 소마였기에 케이토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때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그에게 성큼 다가와서 줄줄줄 칭송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하스미 공! 정말 아름답고, 강인하고, 멋졌소이다!!!”
“어이 칸자키 진정해라.”
“손짓과 눈빛 그 모든 것에 압도당할 뻔했소!! 심장이 너무도 빠르게 뛰어 쉬이 진정할 수도 없었소이다! 다시금 하스미 공께 반할 것만 같았소!!”
“…그게 정말인가?”
케이토가 피식 웃었다. 소마의 손을 붙잡고서 와타루에게 눈짓했다. 시계를 확인한 그가 알아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기에, 드레스자락을 움켜진 케이토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이봐.”
남의 대기실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쿠로는 머쓱함에 머리만 긁적일 뿐이었다.
창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듯한 케이토의 뒷모습을 보며 소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이곳에는 왜 데려오신 게련가? 여전히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던 그때, 마침내 원하는 걸 찾았다는 듯 어딘가를 향해 케이토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발이 향한 곳은 오늘 무대에 놓여 있던 커다란 왕좌였다. 그곳에 소마를 앉히고서 케이토가 주변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어,음. 하스미 공…?”
“가만 있어봐라. 네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으니까.”
콧노래와 함께 선반을 뒤적이는 모습 또한 아름다웠기에 소마가 침을 꿀꺽 삼켰다. 선반에서 그가 꺼낸 것은, 오늘 슈가 쓰고 있던 왕관이었다. 뭐, 마지막에는 케이토가 쓰게 됐지만. 그것을 소마에게 씌워주고서 케이토가 그를 제 양 팔 안에 가두었다. 소마를 내려다보며 그가 씨익 웃었다.
“사실말이다, 나는 네녀석이 이 드레스를 입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만…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군.”
“하, 하, 하스미 공?!?”
급작스럽게 좁혀진 거리에 소마의 얼굴이 금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의 볼을 쓸어주며 케이토가 속삭였다.
“이츠키 녀석은 그래도, 공연시간 기준으로 50분 정도는 왕관을 지킬 수 있었지. 네녀석은 얼마나 오래 지킬 수 있을 것 같나?”
“어, 어엇….”
머리가 어지러웠다. 생각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케이토가 피식 웃고서 소마에게 입을 맞췄다. 서로의 혀와 숨이 어지러이 섞이기 시작했고, 소마의 머리 위에 놓여진 왕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스르륵-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통, 통. 왕관이 바닥을 굴러가며 내내는 마찰음에도 둘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니, 오히려 케이토가 그를 왕좌에 눕히다시피하며 잡아먹을 정도였으니까.
야릇한 입맛춤이 멋고, 케이토가 고개를 들었다. 소마는 볼이 붉어진 채 멍한 표정으로 케이토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그의 볼을 쓸어내리며 케이토가 웃었다.
“너무 짧잖나, 구제불능이군.”
“…허나….”
케이토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리고서, 소마가 시선을 피했다.
“…하, 하스미 공께 당초부터 거역할 생각이란 없었기에….”
마음에 드는군. 케이토가 몸을 일으켰다. 왕관을 주워들고서 멍한 표정의 소마에게 손을 뻗었다.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키는 소마의 손을 잡아당기고서 케이토가 씨익 웃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칸자키. 연극에서도, 내가 왕위를 찬탈하고 30분은 더 흐르지 않나.”
“…?”
왕관을 머리 위에 쓰고서 케이토가 당당히 왕좌에 앉았다. 제 허벅지를 두드리고서 요염하게 웃었다.
“이리와라, 네 주군에게 봉사해야지.”
“…!!”
어버버. 얼굴이 새빨개진 소마를 보고 케이토가 만족스럽다는 듯 쿡쿡 웃었다.
소마가 주춤거리며 케이토의 다리에 앉았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앉기만 했는데도 척추가 찌르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익숙한 자세여서 그런 걸지도. 케이토가 소마의 볼을 쓰다듬고는 입을 맞췄다. 움찔. 습관적으로 케이토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눈을 감았다. 제 허벅지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도 저항할 수 없었다.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건 케이토인데, 어째서 무력하게 잡아먹히는 건 자신일까.
소마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건, 소마 자신이 저항하지 않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제게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격과 행복을 느끼며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와 자신 중에 누가 더 동화 속 공주에 가깝냐고 하면, 아마 자신이 될 것이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