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마회귀 2차 - 단편글

[검마자하] 강호인이 연애는 무슨

검마자하 | 신 자하객잔 에피소드 부근 날조

운기간식 by 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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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살은 단검보다는 길지만 장검보다는 짧았다.

그만큼 목표물에 닿기 위해선 한 보 더 움직여야 했고, 그만큼 적과 가까운 거리까지 붙어야한다는 뜻이다. 또한 그 길이에 비해 무게가 가벼워, 반사적으로 힘을 더 싣게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마교의 사대명검 중 하나이기 때문일까. 일살은 작은 힘과 내공을 보태주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광포해졌다.

다섯 갈래로 뻗어나간 검사(劍絲)가 사지를 토막냈다. 공중으로 치솟은 핏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지금 나는 완전 진지 상태. 사유는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밥을 빨리 먹기 위해 칼질의 속도도 빨라졌다. 새벽부터 일어나 식사 준비하느라 파를 써는 숙수의 마음으로, 나는 일살을 휘둘렀다.

멀리서 지켜보던 조장급 흑의인이 난입하더니 칼을 부딪혔다. 그저 내 신경을 갉아먹기 위해 투입된 놈들이라 그런지, 조장급인데도 실력이 형편없었다.

검기에 내공을 살짝 불어넣자, 흑의인의 손목이 바들바들 떨렸다.

턱을 타고 피가 뚝뚝 흘렀다.

"이놈아."

말 한번 걸었는데,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에 죽음의 공포가 스쳤다.

"밥은 먹고 다니냐."

무공 실력과 별개로 훌륭한 살수였는지 대답이 없었다. 어차피 밥을 먹었다면 괘씸죄로 더 잔인하게 죽여줄 요량이었다.

축문에서 보내준 일꾼들이 떠난 후. 내가 말아준 국수를 먹고 심란해 보이는 검마를 위해 백응지로 식사 원정을 떠나야 했다.

신 자하객잔에서 백응지까지 거리는 이렇게 살수들이 난동을 부려도 아무도 모를 정도로 멀다.

살수들에게서 마공의 흔적이 보이진 않았으나, 마교의 돈으로 움직이는 게 뻔했다. 며칠 간 검마와 내 움직임을 살펴보고, '밥 때마다 괴롭혀라 은자 삼백 개를 주마' 라던가, '하루 끼니를 굶을 때마다 포상금 은자 백 개다' 이런 의뢰를 받지 않았을까.

아무튼 나는 어제 저녁부터 지금까지 굶은 상황. 힘도 없고 피곤하다. 죽어라.

만약 살수들 역시 밥도 못 먹고 이러고 있다면..., 되도록 빨리 죽이고 제사상을 차려줄 생각이다.

"밥 먹었냐고 물어보잖아."

신경질적으로 칼을 내려치자, 살수 조장의 안면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그를 찌르고 벨 수록 상대는 점점 패전국의 깃발처럼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지금 내가 반(半)진지 상태라는 걸 눈치챈 살수 몇몇이 이탈했다. 조장도 그걸 눈치챘는지 안색이 많이 나빠졌다.

셋째야.

멀리서 맏형이 불렀다. 적당히 하라는 질책성 부름이었다.

"확인."

공구(恐懼)의 파도에 뒤덮인 검은 눈이 가로로 갈라졌다. 메마른 흙 위로 핏물이 적셨다.

어느새 다가온 검마는 신발에 튄 흙 먼지와 피를 제외하고 말끔한 상태였다. 일살도 광명검만큼 길고 단단했다면 나도 피를 뒤집어 쓰진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그렇다.

맏형이 한참 내 눈을 바라보다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 꼴로는 밥 먹기 그른 것 같구나."

"그러게."

나는 새빨간 손을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 했다. 일양현이면 몰라도 백응지에서 내 꼴을 본다면, 당장에 가까운 무관이나 관아에 신고할 터였다.

"시체부터 치우자. 어차피 지나다녀야 하는 길인데, 까마귀들이 시체 뜯어먹고 있으면 밥맛 떨어져."

나는 땅을 밟아 홈을 만들며 원을 그렸다. 검마가 시체를 가운데 모으고, 내가 불을 질렀다.

우리는 타오르는 시체 언덕을 잠깐 바라보다가, 백응지 방향으로 다시 걸었다.

일부러 사람다니는 길을 피해 북쪽으로 돌아갔다. 경사진 길을 걷다 보니 고지에서 백응지 전경이 잘 보였다.

이제야 깨달았지만. 오늘은 날씨가 아주 좋았다. 나들이 나온 가족이 반점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저 멀리 있는데도, 마당의 아름다운 꽃나무와 해그늘 아래 비치는 그들의 얼굴이 반짝거렸다.

걸음을 멈추고 풍경을 눈에 담고 있자, 검마도 시선을 따라갔다.

"부러우냐?"

뜬금없는 질문에 검마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것은 걱정을 하는 것인가? 항시 무뚝뚝한 사내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려웠다.

"아니. 내 것이 아닌 행복을 흉내내서 무엇 하겠어."

일부러 손을 휘휘 털며 앞장서 걸었다. 검마가 느린 걸음으로 따라오며 물었다.

"그럼 네 행복은 무엇인데?"

맏형이 웬일로 말이 많았다. 나는 콧웃음치며 슬쩍 뒤를 돌아봤다.

"강호인이 무슨 행복이야. 가끔 술이나 퍼먹음 됐지."

"그러냐. 그런데 요 근래 술도 못 먹었고..."

"갑자기 맏형 때문에 불행해졌어."

검마가 피식 웃으며 앞질러 갔다. 맏형의 등을 열심히 노려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걷다 보니 제법 수심이 깊어 보이는 개천이 나왔다. 아마도 용랑천의 상류로 보였다.

수면에 비친 모습을 보니 세수만으로 씻겨나갈 피가 아니었다. 피 묻은 장삼을 벗고, 무복도 벗어둔 채 못에 몸을 담갔다. 시원한 물살을 파고들자, 작은 물고기들이 놀라서 사방으로 도망쳤다.

물 속에서 얼굴과 귓바퀴를 문지르자,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나 개천을 더럽히고 있었다.

물고기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격자 무늬로 빛나는 수면을 올려다보았다. 물은 흐르니까, 빛도 일렁여야 하는데,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멈춰있었다.

이상하게도.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시간이 멈추면.

더 이상 배고파서 성질 날 일도, 살수가 찾아오는 일도,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교주를 상대할 일도 없을 터인데.

도망칠 생각은 없지만, 그저 잠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니, 잠이 솔솔 몰려왔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바위 틈으로 숨었던 물고기들이 나와서 발가락을 쪼았다.

검마가 손목을 붙잡고 물 밖으로 끌어올렸다.

"고작 물에 빠져 죽을 셈이냐."

숨이 트이며 기침을 뱉었다. 속눈썹에 고인 물이 뚝뚝 떨어지며 시야를 방해했다. 햇살이 물방울에 다양한 모양으로 부서지며 아롱거렸다.

나는 손바닥으로 물기를 닦아 내며 고개를 저었다.

"잠깐 졸았어."

검마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살수와 한바탕 싸우고도 말끔했던 무복이 축축히 젖어있었다.

언제 어깨에 걸쳐졌는지 모르는 흑의 장삼에서는 익숙한 체향이 났고. 귓가에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는 소리가 간지럽고.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렀다.

노려보는 검마의 표정이 아주 살벌했기 때문에 말을 걸기 쉽지 않았다.

결국 젖은 옷이 마르고, 꽃나무가 예쁜 반점에서 불편한 식사를 하고, 다시 신 자하객잔으로 돌아올 때 까지. 나는 검마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본래 맏형과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히 한쪽에서 대화를 거부해서 발생한 단절이다. 나는 별 수없이 입을 꾹 닫고 눈치만 살폈다.

검마도 생각이 많아 보였는데, 그 이유가 잡힐듯 말듯 흐릿했다. 내 죽음을 염려한 맏형의 분노는 단순히 두려움이라는 말로 축약하기엔 부족했다.

* * *

유난히 빠른 하루가 지나가고 해가 저물어 방에 누울 때까지 줄곧 마음이 불편했다.

낮은 숨을 반복하며 잠에 든 검마를 옆에 두고, 불면과 함께 어두운 천장을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불분명한 감정의 흐릿한 형태에 이름을 붙여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옆으로 두번 굴려, 검마와 한뼘 거리를 두고 멈췄다.

얕은 잠에서 깬 검마가 반쯤 눈을 떴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아주 밝은 데다가 우리는 밤눈이 밝은 무인이었으므로 서로의 얼굴이 잘 보였다.

어둠 속에서 반쯤 감긴 눈이 침묵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나는 검마의 손을 끌어다 내 가슴에 얹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검마의 손바닥을 타고 울렸다.

중저음이 낮게 속삭였다.

"아픈가?"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자기 말문이 막히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꿀꺽. 침을 삼키며 눈을 굴리자, 검마가 턱을 잡았다.

"눈을 감거라."

나는 검마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천천히 코끝에 온기가 느껴지더니, 입술에 말랑한 것이 닿았다.

내가 놀라지 않고 얌전히 있었던 이유는, 맏형이라면 신묘한 방법으로 내 상태를 확인해 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입안으로 내공이나 다른 어떤 기운이 흘러오는 것도 아니었고, 입술을 물고 핥는 입맞춤 끝에 검마가 멀어졌다.

결국 참지 못하고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눈을 떴다.

"뭐야?"

검마가 오묘한 표정으로 검지로 심장 부근을 눌렀다.

"소리를 확인해 보거라."

"더 빨리 뛰어."

"네가 내게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마음? 멍하니 검마의 말을 곱씹었다. 그제야 방금 일어난 일을 깨달았다.

맏형과 내가 접문을 했다.

그렇다면 지금껏 여인을 만나지 못한 이유가 사실 사내를 좋아했기 때문인가?

물론 맏형은 멋진 사내다.

사람의 인생에 각자의 출발선이 있다면, 검마라는 사내는 저 우물 밑바닥에서 올라온 사람이다. 그러나 결국 지상에 올라 남들보다 높이 올라간 사내. 그럼에도 적당히 미친 사내. 그러니까, 그래서 내가 맏형을...? 이건 좀 다른 이야기다.

나도 모르게 온기가 남은 입술을 더듬었다. 심장이 쿵쿵 턱이 떨릴 만큼 울렸다.

이름이 생긴 감정을 혓바닥 아래 감추고 물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검마는 빤히 바라보며 되려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

* * *

결국 그날 밤을 꼬박 세웠다.

피곤했음에도 해가 뜨면 착실하게 장작을 패는 자리로 향했다.

퀭한 눈으로 나무를 쪼개고 있자니, 문득 더이상 죽음, 마교, 강호에 대한 생각들은 멀어진지 오래였다. 목계 수련도 잊었고. 온 정신이 입술과 연심에 쏠려있었다.

어제도 살수랑 싸웠고, 언제 마교가 처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 이게 맞아?

손등으로 땀을 닦아내고, 평상에 앉아있는 검마를 힐끗 바라보았다.

일월광천이나 다름없는 화두를 던져놓고, 평소와 다를바 없이 목검을 깎는 모습을 보니 윗배가 아팠다. 그 와중에 접문, 그거 다시 한번 해보면 안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중증이다.

나는 맏형과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인가.

그럼 검마는 나와 무엇이 되고 싶을까.

땅이 꺼질 기세로 한숨을 뱉었다. 이러다간 오늘도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고 먹을 것 같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머리 꼭대기에 오른 태양이 기울고 있었다. 밥 먹기전에는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맏형."

도끼를 어깨에 얹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다가갔음에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은 사내가 물끄러미 고개를 돌렸다. 나는 껄렁한 동네 왈패처럼 물었다.

"고백하면 받아줄거야?"

"아니."

순간 무릎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검마가 목검에 눈을 주며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강호인이 연애는 무슨."

나는 콧김을 뿜으며 팔짱을 꼈다.

"그럼 어서 은퇴해."

"너 때문에 못한다."

"그럼 은퇴하면 받아주나?"

목검을 다듬는 손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좁아진 미간이 명승이었다.

"...그때 가서 생각해 보마."

"..."

시선을 피하는 검마를 팔짱 끼고 바라보다가, 불쑥 터질 뻔한 웃음을 삼켰다.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조심스럽게 검마 옆에 앉았다.

지금껏 지켜 봐온 검마의 성향과 말투를 미루어 보았을 때, 내 귀에는 그 대답이 좋은 말로만 들렸다. 고백을 차여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내. 그것이 나다.

검은 소매를 잡아 끌었다. 별로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끌려왔다.

얼굴을 들이밀자 손바닥이 입술을 막았다. 나무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나는 곤란한 잿빛 눈을 향해 열심히 눈빛을 보냈다. 안돼?

동공이 확장되고 잠깐 흔들리는 모양이 또렷하게 보였다.

검마의 머릿속에서 어떤 분쟁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으나, 결국... 내가 이겼다.

더운 바람을 삼키는 것처럼 서로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저 몇차례 입술이 닿는 것만으로 귀 끝이 찌릿 했다. 나는 술을 마신 적도 없는데 취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달달하네."

검마가 참지 못하고 낮은 웃음을 흘렸다.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는 고양이처럼 조심스러운 접문이 이어졌다.

심장이 부서질 것처럼 뛰어다니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열오른 볼 위로 스치는 손가락의 떨림도 좋았다. 인중에 스치는 콧김도. 입속을 헤집는 혓바닥도. 모든 것이... 달았다.

물 속에 잠겼을 때처럼, 시간이 정지했다는 착각 속에 머물고 싶었다. 물살 대신 살결과 호흡 속에 헤엄치고 싶었다.

들뜬 호흡과 함께 얼굴이 멀어졌다.

나는 여전히 두근거리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왜... 이렇게 좋지?"

"..."

"부끄러우면 말 안 해도 돼. 어차피 얼굴에 다 쓰여있으니까."

손을 저으며 만류하자, 검마가 황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선 엷은 웃음을 띄는 모양이, 한결 마음이 편안해 보였다.

달달한 입술의 사내가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은퇴. 서둘러야겠구나."

"그렇다면 나도 맏형이 하루빨리 강호를 등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군."

검마와 내가 서로를 마주보고 웃었다.

다시 다가갈 때, 더 이상 가로막는 손바닥 같은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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