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귤] 로미오와 줄리엣
배우 제임스x일반인(?) 레귤러스 현대au
당신의 연기를 처음 본 건 학교의 연극제에서.
특별히 당신을 보기 위해 계획한 건 아니었다. 나는 중학생이었고 당신은 고등학생이었다. 같은 재단의 사립학교라 해도 여러 각도로 학생들의 안전을 고려해야하는 학교의 방침 상 고등학생과 중학생의 구분은 철저했다. 그 이사진에 블랙 가문의 입김이 들어가 있다는 게 맹점이긴 해도.
그렇다 할지라도 그날의 목적은 당신이 아녔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학생회장이었던 말포이 선배가 알려줄 게 있으니 시간이 된다면 오라며 초대했고, 흔쾌히 승낙했다. 마침 내가 졸업할 중학교도 그가 졸업하게 될 고등학교와 같은 축제 기간을 보내고 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나는, 중학교 축제의 수준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질풍노도의 시기였고.
고등학교 축제의 첫 날이었다. 강당의 무대는 하루 종일 각종 공연 스케줄로 빽빽하단 걸, 문 앞의 입간판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불러놓은 사람을 갑작스레 바쁘단 이유로 팽개친 하늘같은 선배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고민하던 차였고 이왕 온 김에 공연 한두 개 정도는 봐도 나쁠 게 없다는데 결론이 닿았다.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으니 여기저기 꽂혀오는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마침 한참 연극이 진행 중인 강당 안은 어둠이 깔려 있어 도피하기에 알맞았다.
-Is love a tender thing? (사랑이 가냘프다고?)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강당을 가로질렀다. 고작 학교 축제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장내는 고요했고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이들은 매번 조심스러워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아는 극이었다. 책은 물론이고 유명 극단에서 한 극을 관람한 적도 있으며 오랜 고전 영화로도 접한 장면이었다. 다만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연기하는 로미오가 처음이었다. 당연하게도.
-It is too rough, too rude, too boisterous, and it pricks like thorn. (사랑은 너무 거칠고, 잔인하고, 야단스러우면서 가시처럼 따끔거려.)
당신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었다. 연년생인 형은 집안의 골칫거리였고 형의 친구인 포터는 우리 가족에겐 암암리에 화를 부르는 성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에 교묘하게 도움이 안 되는 사람도 포터였고, 형의 비행을 부추기는 또래 역시 포터라는 절묘한 우연은 해를 거듭할수록 악연으로 엉킬 뿐이었다. 적어도 부모님은 내가 당신을 그렇게 알기를 바라셨을 터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바람과 달리 나는 주니어 포터가 아닌 제임스 포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지역 내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 사립학교를 다닌다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시리우스 블랙, 내 친형이었고 다른 하나가 포터. ‘그 제임스 포터’였다. 공교롭게도 나는 감히 대문자로 이름을 쓸 수 있는 그 두 인물 중 한 명의 동생이라는 부분에서 다른 한 쪽과도 인연을 맺어야 수지가 맞는 운명을 타고난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학교라는 공간은 묘하게 부모님의 법칙을 벗어난 미묘한 무법지대여서 더 손쉬웠다.
너, 시리우스 동생이지? 형과 닮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그건 내 신분을 밝힌 이후에나 주로 나오는 말이지, 길거리를 지나다 대뜸 들을 소린 아녔다. 예? 짜증을 숨기지 못하고 반문하니 당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곤 내 가슴의 명찰을 가리켰다. 창피했다. 그게 처음이었다. 당신과 나의 처음. 그 후에도 몇번인가 당신에 대해 알 기회가 있었다.
-I am a fool taunted by fate. (나는 운명에 희롱당하는 바보다.)
극에 몰입하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강당 안의 누구나가 그랬을 터였다. 사실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극보단 대다수가 무대 위의 로미오 몬태규를 따르고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를 말끔하게 정리하고 그럴듯한 의상을 입은 당신을 많은 여학생들이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무대 위는 바쁘게 움직였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로미오의 마음도 흘러갔고 복수를 이룬 뒤에 뱉은 대사에 어디선가 빗소리가 들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조명이 사라지는 순간 하늘을 보던 로미오의 고개가 밑으로 떨어졌다. 그때의 나는 연애에 대해서 조금도 아는 바가 없었지만, 아마 사랑은 마음이 타고 남은 재가 젖어버린 매운 향이 날 거라고 짐작했다. 그 무대의 로미오가 그랬기 때문에.
극은 절정을 향해 달음박질 쳤고, 사람들은 한숨을 쉬고 눈물을 삼키며 모두가 알고 있는 마지막 장면을 기다렸다.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해 내내 강당의 옆쪽에 서서 연극을 봐야했지만 특별히 다리가 아픈 걸 느끼지 못했다. 너무 빠져있던 나머지, 앉을 자리를 찾는 사이 당신의 무대 위 호흡 한 번을 놓칠 게 아쉽다고 여길 뿐이었다.
-Even though death took away your breath, it could not take away your beauty. (죽음이 당신의 달콤한 숨결을 빼앗아갔을망정, 그대의 아름다움은 빼앗아가지 못했군요.)
여느 여학생들처럼 눈물이 나진 않았다. 다만 줄리엣을 끌어안고 슬퍼하는 로미오가 끊임 없이 시야에 들어왔다. 훌륭하다거나 완벽하다거나 하는 칭찬을 하기에는 보는 눈이 어렸고 아는 바도 없었다. 다만 아주 문득, 나는 로미오가 아닌 당신의 사랑이 궁금해졌다. 저런 연기를 할 수 있는 제임스 포터의 사랑.
* * *
“저거 봤는데.”
“영화?”
“아뇨, 연극.”
“어디서 한 거?”
“학교에서요.”
학교? 스무고개인가? 제임스가 쇼파에 길게 누운 채로 두루뭉술한 대답을 받아 고민하는 동안 레귤러스는 쇼파에 등을 기댄 채 브라운관을 주시했다. 케이블 방송에서 꽤 오래 전에 개봉했었던 로미오와 줄리엣 영화를 방영하고 있었다.
“헉,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걸요.”
공통의 답을 떠올린 제임스가 사색이 된 반면 레귤러스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바구니에 든 초콜릿 하나를 꺼내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경험을 소중히 여기지만 그건 진짜 좀, 중학교 1학년 때 시리우스가 학교 운동장에 목만 내놓고 묻혔던 것만큼 부끄러운데.”
“당신이 부끄러워하는 과거가 있을 줄이야…… 는 둘째 치고 중학교 때 뭘 하고 다닌 건데요.”
대체 중학생 때 뭘 하고 놀면 운동장에 목만 내놓고 묻힌단 말인가. 전혀 짐작이 안 갔고 상상하기도 싫었다. 평생 모르고 살고 싶은 친형의 끔찍한 몰골을 얼른 머릿속에서 몰아내고자 손톱만한 초콜릿을 얼른 입에 넣었다.
“근데 그때 그거 하고 인기 엄청 많아지긴 했지. 1학년인데 주역을 그렇게 잘했다고~ 잘생겼다고~ 어디의 제임스 포터냐고~”
평소처럼 능청스레 자기 자랑으로 아무렇게 내뱉은 제임스가 슬쩍 연인의 눈치를 살폈다. 이쯤 되면 반응이 온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레귤러스 블랙도 제임스 포터의 성격을 잘 아는 바, 묵묵히 새로운 초콜릿 껍질을 까며 TV에 시선을 고정할 뿐이었다.
“뭐래요. 지금 봐도 디카프리오가 훨씬 잘생겼는데 그런 소리가 나와요?”
깔끔하게 직구를 날렸다, 고 자신했다. 잠시 뒤에 어깨를 은근 슬쩍 감아오는 두 팔만 아니었어도.
“지금 이 팔 뭔데요?”
“그날 내 로미오 봤으면 반했겠네, 싶어서?”
“무슨 자의식 과잉이지 이거.”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라고 말 했는데도 어깨에 치대는 얼굴이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꿀밤이라도 때려주고 싶었지만 자세가 여의치 않아 실행에 옮기기 어려웠다. 이마저도 다 계산된 거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지만 기회는 앞으로도 많으니 일단은 나중의 빚으로 달아두기로 했다.
“그럼 오늘 로미오 다시 볼래?”
“설마 나더러 줄리엣 하라는 거 아니죠?”
“그 설마가 맞을 걸.”
영악한 제임스 포터. 레귤러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식의 어이없는 흐름이 한두 번이 아니라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어째 당할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다. 연기를 여러 번 해도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배우라서 그런가. 이를테면 방금은 불과 수 분 전 의기양양한 레귤러스 블랙을 연기하는 거라든지.
“그럼 창문 타고 넘어오는 것부터 해요. 날도 추운데 딱이네요.”
“19층까지 벽으로 올라오려면 시간 좀 걸리겠는데, 내 줄리엣이 기다려줄 수 있으려나?”
“그럼요. 당신 줄리엣은 요즘 문명이 발전해서 위에서 동영상 찍고 있을 거래요.”
초콜릿이 묻은 손가락으로 밤색 머리카락을 헤집으니 앞으로 쑥 나온 익숙한 얼굴이 시야를 가렸다. 뒤이어 간지럽게 물고 떨어지는 입맞춤이 두 번, 아니 세 번.
레귤러스는 제임스가 연기한 온갖 작품을 봐왔지만 그 때만큼 순수하고 어린 연기를 대면한 적이 없었다. 자신을 포함해 당시 강당에 있던 모든 관객들을 감히 행운아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날 것 그대로의 어린 열정은 그 자신에게도 소중한 뿌리지만 함께 경험한 사람에게도 각각의 모양새로 강렬하게 남는다. 예를 들어, 레귤러스 블랙에겐 사랑으로 싹튼 것처럼.
이미 두 사람의 관심에서 멀어진 영화는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클레어 데인즈가 서툰 결혼식을 올리는 참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영원히 그들만의 세계로 떠날 희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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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연예인au 썰 풀고 있는데 잠이 안오는 통에 생각 나는거 짧게 후다닥. 참고(?)로 시리우스는 모델이고 리무스는 싱어송라이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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