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ide
드레해리
해리 포터가 드레이코 말포이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게 된 것은 학기가 고작 3주 남았을 쯤이었다. 그 소문은 드레이코의 귀에 들어오기 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학기가 시작할 때 부터 소문이 퍼졌다는데, 드레이코는 그걸 학기가 끝나기 3주 전에 듣게 된 것이다. 소문은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었으며, 모두가 쉬쉬했고, 드레이코 말포이는 평소에 기숙사에 처박혀 살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
호그와트의 복구가 마무리 된 후, 학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전쟁의 생존자들이 호그와트로 돌아왔다. 거의 모두가 원래의 학년을 다시 다녀야 했기 때문에 인원이 두 배가 된 1학년을 제외하고는 원래의 정원보다 그 수가 적었다. 그리핀도르의 경우 가장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여 학생 수가 적었고, 후플푸프와 래번클로도 그 수가 그리핀도르에 비해 적을 뿐 상황은 비슷했다. 다만 슬리데린의 경우 7학년이 고작 1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호그와트로 돌아오기를 거부하거나 아즈카반에 잡혀가거나 영국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드레이코 말포이가 호그와트로 돌아왔을 때, 모든 학생들이 놀랐다. 모두가 드레이코 말포이의 왼팔에 죽음을 먹는 자의 표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말포이 가문은 볼드모트를 가장 선두에서 따랐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말포이 가문이 죽음을 먹는 자들을 팔아먹고 아즈카반을 피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염치가 있다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레이코 말포이는 호그와트로 돌아왔고, 드레이코 말포이는 모두의 시선을 외면하고 기숙사에 숨어서 지냈다.
드레이코는 골든 트리오, 그러니까 해리 포터, 론 위즐리, 헤르미온느 그레인저를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염치가 있었고 양심도 있었으며 자존심도 있었다. 그것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지만, 드레이코는 여전히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듣고 싶었던 비행술 수업도 포기했다. 다행이겠지만 마법 정부 방침에 의해 오러 지원을 위한 필수 과목 중 하나이자 어둠의 마법과 관련된 어둠의 마법 방어술 수업도 들을 수 없었다. 그 외 수업은 학년이 몇 없는 슬리데린은 래번클로와 함께 수업을 들었고, 마찬가지로 가장 학생수가 적은 그리핀도르는 후플푸프와 수업을 함께 들었다. 오직 졸업장을 따는 것 만을 위해 드레이코는 호그와트를 버텨냈다. 드레이코는 자신이 무얼 하고 싶은지 알 수는 없었고 미래에 가정을 꾸리게 될지도 알 수 없었으나 무언가 책임질 상황들을 위해 호그와트를 졸업하고자 다짐한 것이다. 아버지인 루시우스 말포이와 척지게 된 순간 드레이코는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
드레이코는 해리 포터를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1년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학기가 끝나기 직전이 되어서나 이 소문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드레이코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도서관 구석으로 향했고, 마법약과 관련된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어떤 무리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그의 귀에까지 꽂혀 들어왔다.
"그래서, 결국 포터의 소문은 어떻게 된 거야?"
"몰라. 아마 그 역겨운 말포이가 더러운 술수를 쓴 걸 거야."
"포터가 불쌍해. 말포이는 언제까지 그렇게 정의롭고 올바른 아이를 괴롭힐 생각인걸까?"
"포터는 말포이와 엮이고 있는 것 만으로도 불쾌한데, 그걸 간신히 참고 있는 걸거야."
"맞아."
드레이코는 도대체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들의 속삭임을 몰래 듣는 것은 더이상 자신이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드레이코는 숨을 죽이고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동시에 귀를 기울였다. 도대체 자신이 포터와 어떻게 엮였다는 걸까?
"포터가 그 역겨운 자식을 좋아할리가 없어."
뭐?
"전쟁 전처럼, 포터 앞에서 떵떵거리기 위해 말포이가 호그와트에 돌아오자마자 소문을 퍼트렸겠지."
"하지만 그 녀석, 학기 초부터 기숙사에 처박혀서 돌아다니질 않는다며?"
"기숙사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어떻게 알겠어? 슬리데린에 남아있는 것들도 다 믿을 수 없어. 난 맥고나걸 교장선생님이 왜 그들을 받아줬는지 이해할 수 없다니까!"
"쉿!"
그때 핀스 부인이 나타나 학생들에게 경고했고, 그들은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드레이코는 복잡한 마음이 들었고, 더이상 책의 글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해리 포터가 날 좋아한다고? 당연히 그럴리 없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거의 일년 내내 드레이코 말포이가 이 소문을 퍼트렸다고 생각하고 있고, 드레이코 말포이가 간악한 술수를 부리기 위해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드레이코는 이 일을 해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도대체 누구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미칠듯이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온통 해리 포터 생각 뿐이었다.
***
드레이코는 자신이 연회장에 들어가도 되는지에 대해 한참 고민을 하면서도 이 일을 실행에 옮겨야만 한다고 확신했다. 이미 대부분의 학생들은 연회장 안에서 식사 중이었고, 누구도 드레이코가 연회장 반대편, 문 밖에 서있는지 알지 못했다. 드레이코는 7학년 동안 단 한번도 연회장에서 식사를 한 적이 없었고, 맥고나걸 교장에게 부탁해 항상 슬리데린 휴게실로 간단한 식사를 전달받았다. 맥고나걸은 그걸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더이상 누구에게도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드레이코의 말에 그의 뜻을 존중해주었다. 학기가 끝나기까지 고작 3주. 드레이코는 그냥 모든 것을 무시하고 조용히 호그와트를 졸업할 수도 있다. 하지만 드레이코는 모두의 시선이 쏟아지더라도 학생들의 분위기 혹은 해리 포터, 론 위즐리, 헤르미온느 그레인저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아야만 했다. 그래야 그들에게 다가가서 소문을 해명할지, 아니면 사과를 할지, 아니면 그냥 모든걸 무시하고 다시 숨어들어갈지 결정할 수 있을테니까.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크게 내뱉은 그는 연회장 문을 천천히 밀었다. 웅성거리며 활기를 띄던 연회장이 그의 등장으로 인해 입구부터 단상 방향을 향해 점진적으로 소리가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제 발 끝만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드레이코는 쓰러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고개를 아주 살짝 들어 앞을 바라보니 슬리데린 테이블은 1,2학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텅 비어있었고, 다른 모든 기숙사 학생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들 하우스가 떠올라 심장이 미칠듯이 뛰었다. 드레이코는 그리핀도르 테이블을 바라본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에 누군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저 빌어먹을 개자식 말포이 좀 봐!" 누군가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 웃음 소리와 욕설은 드레이코의 머릿속을 뒤집어놓았다. 다수의 웃음이 마치 볼드모트의 웃음과도 같게 느껴졌다. 드레이코의 크루시아투스 저주를 맞고 괴로워하던 이들이 떠올랐다. 사람들의 비명, 자신의 지팡이를 통해 쏟아지던 붉은 저주들, 자신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비웃던 볼드모트. 이곳이 호그와트인지, 리들 하우스인지 드레이코는 분간할 수 없었다. 몸이 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바닥을 기듯 일어나 연회장을 간신히 빠져나왔다.
자신이 계획했던 것과는 다르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몸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덜덜 떨렸고, 생리적인 눈물까지 흐르고 있었다. 머리와 마음은 차갑게 식었음에도 온 몸이 공포를 기억하고 있었다. 여름이 시작되는 뜨거운 바람이 불어와 마치 자신의 안전만을 우선시해주던 어머니의 품처럼 느껴졌음에도, 그것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완벽한 방패가 아님을 알고 있는 드레이코는 두려움을 멈출 수 없었다.
"안 좋아 보이네."
드레이코는 익숙한 낮은 목소리에 황급히 몸을 돌렸다. 벌떡, 다급하게 일어난 탓에 그의 지팡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드레이코는 그걸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눈 앞에 서있는 녹색 눈동자의 영웅을 바라봤다. 기둥에 몸을 기대고 서있는 해리 포터는 여유로워 보였으며, 동시에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드레이코는 천천히 뒷걸음을 쳤다. 왜 자신이 도망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지팡이를 주워야 했지만, 지팡이를 줍기 위해서는 그에게 가까워져야만 했다. 드레이코는 팔을 들어 제 눈에 흐르는 눈물을 급하게 닦아냈고, 그냥 뒤를 돌아서 무작정 달렸다. 자기가 어디로 달리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달렸다. 한참이 지난 뒤에 드레이코는 자신이 슬리데린 기숙사 정 반대편에 와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한참을 걸어 기숙사로 돌아갔다.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텅 빈 휴게실 중앙 테이블로 향했다. 허기가 졌지만 입맛이 없었다. 마른 빵을 입 안에 밀어 넣고 물을 몸 안으로 들이 부었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이대로 죽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그냥 모든 시간이 빠르게 지나기를 바랐다. 해리 포터에게 해명이나 사과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도저히 용기가 나지않았다. 무슨 염치로 그에게 사과를 하겠는가, 손톱만큼도 남지 않은 자존심을 짓밟아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는 없었다.
***
새벽이 되어 지팡이를 떨어뜨렸던 곳으로 돌아갔지만, 지팡이는 찾을 수 없었다. 해리 포터나 다른 학생들에 의해 반으로 부러져있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지, 아예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기에 드레이코는 한숨을 내뱉었다. 해리 포터가 주워갔다면, 새로 온 슬리데린 기숙사 사감의 손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운이 좋다면 분실물로서 필치의 손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드레이코는 오늘 하루를 지팡이 없이 지내기로 하며 마법약 수업으로 향했다.
마법약 수업이 끝나고 래번클로 학생들이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나 슬리데린 학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냄비를 씻고 기물을 정리할 수 있었다. 누구도 그러라고 시키지는 않았지만, 슬리데린 학생들은 스스로 행동을 사리고 있었다. 슬리데린 학생들 중에서 가장 조용히, 그리고 뒤로 빠져서 움직이던 드레이코는 마법약 교수의 냉담한 표정에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하며 교실을 빠져나왔다.
"늦네. 항상 꼴지로 나와?"
드레이코는 고개를 번쩍 들었고, 자신의 얼굴 바로 앞에 있는 번개머리 흉터의 안경을 바라봤다. 그가 황급히 도망치려고 하자, 해리 포터는 드레이코의 가슴을 손으로 밀며 그를 복도 구석으로 끌고 갔다. 지하에 위치해 있으니 조금의 빛도 들지 않는 복도는 습하고 퀴퀴했다. 드문드문 마법으로 횃불이 켜져있어 불빛이 흔들렸지만, 드레이코는 자신이 간신히 해리 포터의 표정을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리 포터는 한참을 드레이코를 관찰하는 듯 바라봤고, 드레이코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해리 포터의 팔에 들린 비행술 교재를 바라봤다. 드레이코의 시선을 파악한 해리 포터는 "이거?" 하며 비행술 교재를 흔들었다. 드레이코는 자신의 시선이 들켰다는 생각에 고개를 훽 돌리며 부정했다.
"빌려줄게. 이번 주에는 수업 더 없어." 그러고는 드레이코의 손에 비행술 교재를 들려주었다. 드레이코는 그걸 거부하려고 했으나, 어찌나 막무가내인지 해리 포터는 드레이코가 그걸 쥐어들지 않는다면 그의 얼굴이라도 한 대 칠 기세였다. 드레이코는 비행술 교재를 받아 들고 해리 포터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고, 해리 포터가 웃었다. 드레이코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고개를 숙여 이번엔 제 발 끝을 바라봤다.
"지팡이 필요 없어?"
그 물음에 드레이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말포이 저택에서 그가 어머니와 자신 그리고 벨라트릭스의 지팡이를 가져갔던 일이 떠올랐다. 드레이코는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이 전쟁을 끝내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이 고통을 끝내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오로지 그건 해리 포터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저 아이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볼드모트의 앞에서 생명으로서의 가치도 없이, 그저 장기말로서의 가치도 없이, 볼드모트의 유희거리이자 화풀이 상대가 되었던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때가 생각났다. 그 시절이. 드레이코는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고, 자신이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말 안 할 거야? 나랑?"
해리 포터는 그걸 느끼지 못했는지 드레이코에게 되물었다. 드레이코는 이 어둠 속의 대화를 빠르게 끝내기 위해서는 그가 원하는 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을 잘 하기 위해,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드레이코는 입을 열었다.
"지팡이, 필요하지만..."
드레이코는 고개를 들었다가 해리 포터가 자신을 보고 웃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미소짓고 있었다.
"내가 갖지 않길 원한다면, 네가 버려도 돼."
"뭐?"
"그리고,..."
"야, 드레이코. 너 지금 무슨..."
드레이코는 해리가 말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용기를 내서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드레이코는 자신을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해리의 녹색 눈을 바라봤다. 그건 매우 따듯하고 다정하면서도 이미 나약해빠진 드레이코 말포이라는 존재의 짓밟는 듯 느껴졌다. 그건 해리 포터가 너무 친절하고 다정한 눈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 내가 퍼트린게 아니야. 네가 날 좋아한다니, 그럴리 없지. 미안해. 학기 내내 네가 그런... 불쾌한 일을 겪었을 줄은 몰랐어. 난 정말 그냥 기숙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난 그저 졸업장만 따면..."
"드레이코."
"마법 세계에서 사라질 거야."
"..."
드레이코는 자신이 영원히 세상에 숨길 작정이었던 본심을 뱉어냈다. 자신이 본심을 드러낼 수 있는 존재라면 그건 오직 해리 포터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말을 진짜 내뱉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해리 포터, 영웅 앞에서. 그는 드레이코 말포이의 앞날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어머니의 증언을 옹호해 주었고, 그렇기에 말포이 가문이 아즈카반에 가지 않고, 죽음을 먹는 자들을 고발하며 재산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해리 포터가 정직하고 다정한 그리핀도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드레이코 말포이와는 관련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드레이코는 그가 자신의 진심을 오해하지 않고, 자신이 정말 무고하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모두에게서 잊혀질 거라고 해리 포터가 알게 된다면... 다른 누구에게 오해를 받아도, 아마.... 아마도 드레이코는 상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드레이코는 제 발 끝만 바라보던 시선을 들고 자신의 앞에서 멍하니 서있는 불빛에 흐리게 빛나는 그 녹색 눈동자를 슬쩍 바라봤다. 심장이 아픈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슬픈지도 알 수 없었다. 해리 포터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지 조차도 않았다. 그도 자신의 의견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정말 미안."
드레이코는 자신이 소문을 무마할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해리 포터 또한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저 사과를 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드레이코는 흔들리는 해리 포터의 녹색을 한참 바라봤다.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 관계는 완벽하게 끝이 났고, 앞으로는 지팡이 없이 살아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드레이코는 그대로 등을 돌려 그 복도를 빠르게 벗어났다. 그리고 답답한 마음에도 천문탑이나 안뜰과 같은, 호그와트의 어디로도 향하지 않고, 곧바로 슬리데린 기숙사로 들어갔다.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하기 위해서.
***
침대를 더듬어 지팡이를 찾으려다가, 자신의 지팡이는 더이상 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직접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이 방은 텅 비어있었다. 어차피 슬리데린에는 학생이 몇 없었기 때문에 슬리데린은 모두 따로 생활했다. 오해를 받을까봐 서로 말을 걸지도 않았다. 눈을 마주쳐도 인사도 하지 않았고,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드레이코는 불편하지만 모든 일들을 지팡이 없이 직접 했다. 교복을 입고, 교재를 챙기던 중 해리 포터의 비행술 교재를 바라봤다. 그걸 전해줘야 했다.
비행술 교재를 챙긴 드레이코는 우선 자신의 수업으로 향했다. 오전 수업을 마치면 점심시간이니, 그때 연회장 앞에서 아무에게나 책 전달을 부탁하면 될 것이다. 해리 포터를 직접 만날 용기도, 그를 수소문 할 용기도 없었다. 다른 기숙사 학생들에게 욕을 먹을지라도, 이 교재가 완벽하게 해리 포터에게 전해진다면 상관 없었다. 그러면 드레이코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정확히 임무를 수행하고 해리 포터와 더이상 엮이지 않을 수 있을 터였다.
마법의 역사 수업은 여전히 지루했다. 하지만 드레이코가 들을 수 있는 재미있는 수업 자체는 몇 없었다. 게다가 이번 전쟁으로 인해 드레이코는 마법의 역사에 관심이 생겨서 최대한 졸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7학년들은 특히나 이번 전쟁에 대한 수업을 많이 듣게 되었는데, 이는 마법 정부의 지침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드레이코는 이 수업을 들으며 자신이 저지른 죄와 볼드모트라는 존재의 공포를 무한히 상기할 수 있었다. 이 수업을 들을 때면 래번클로 학생들이 슬리데린을, 특히나 자신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연회장으로 빠르게 향했다. 일찍 가야 그나마 학생이 적기 때문에 드레이코는 그렇게 했다. 연회장과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식은땀이 흐르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불안한 감각이 온 몸에 퍼졌다. 어지럽고 시야가 흔들렸다. 눈 앞에 기숙사 점수판을 보니 슬리데린의 모래시계는 다른 기숙사들과는 다르게 간신히 바닥을 가릴 정도의 에메랄드만이 떨어져 있었다. 그걸 빤히 쳐다보다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황급히 몸을 숨겼다.
"해리, 정말 말포이랑 얘기 할 거야?"
"응. 해야지."
"난 반대야. 네가 왜?"
"지팡이도 돌려주고, 책도 받아야지."
"그 녀석이 지팡이 안 줘도 된다고 했다며."
헤르미온느 그레인저는 어디에 있는지 해리 포터는 론 위즐리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껄렁거리는 걸음걸이가 영웅처럼 보이지 않고 그냥 평범한 학생 같았다. 해리 포터의 그런 모습은 드레이코가 죽음의 먹는 자가 되기 이전의 기분을 느끼게 했다. 당장이라도 그의 앞에 서서 "멍청한 포터, 당장 내 지팡이를 줘, 넌 어차피 지팡이가 두 개여도 마법도 못 부릴 것 같은데?" 하며 비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당연히 드레이코는 그럴 수 없었다. 계속 투덜거리는 론 위즐리에 해리 포터는 짜증을 내며 론 위즐리의 손목을 잡아 연회장 앞에서 멈춰 세웠다. 드레이코는 깜짝 놀라 몸을 더 숨겼다.
"그 애랑 할 얘기가 있어. 끝내지 않은 얘기가. 소문도 그렇고."
"해리, 그 소문은..."
"걱정 마, 론."
해리 포터는 론 위즐리의 어깨를 툭툭 치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지금 론 위즐리가 없다면, 해리 포터에게 말을 걸어 책을 주고 도망칠 수 있을 텐데. 이건 다 위즐리 때문이다. 그 둘은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드레이코는 구석에 멀뚱히 서서 손에 들린 비행술 교재를 바라봤다.
***
성 운동장으로 향했다. 오후 수업이 있었지만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비행술 7학년 교재를 들고 운동장 구석의 풀숲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넓은 녹색의 잔디밭과 파란 하늘이 아름다웠다. 날씨도 따듯했다. 5월 하늘이 이렇게 따뜻하고 아름다웠던가. 드레이코는 무릎 위에 책을 올려놓고 한 장 한 장 넘겼다. 드레이코가 어릴 적 티비에서 보던 기술들이 적혀있었다. 그 기술들의 창시자와 원리에 대해서도 설명되어 있었고, 어떤 빗자루를 어떻게 이용하는게 효율적인지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다. 드레이코는 오랜만에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평소라면 그런 기분 조차도 느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을텐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비행술 책을 읽으며 즐거웠다.
"아, 비행 하고 싶다."
"비행 하러 가자."
"난 빗자루가 없어."
"내걸 빌려줄게."
드레이코는 자연스럽게 흘러간 자신의 생각과 대화에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드레이코에게 손을 뻗으며 하하, 하고 웃고 있었다. 드레이코는 산발머리를하고 안경을 쓴 그리핀도르의 검은 형태를 빤히 바라봤다. 드레이코는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그에게 답을 할 기운도 없었다. 온 몸의 기운이 쫙 빠지는 듯 했다. 해리 포터는 대체 자신에게 왜 이러는 것일까.
"내가 불쌍하니?"
드레이코의 말에 해리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드레이코는 그걸 보고도 못 본 것으로 치며 말을 이었다.
"소문에 대해서도 사과 했고, 지팡이도 네가 알아서 처분하라고 했잖아. 이제 2주 정도면 ... 끝이야. 말포이도 다 끝이라고. 제발 날 내버려 둬. 만난 김에, 이 책도 가져가."
드레이코가 무거운 비행술 책을 든 손을 해리를 향해 뻗었다.
"빨리 받아!"
드레이코는 그 무게에 팔을 덜덜 떨며 소리쳤다. 며칠 전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서 힘이 없었다. 입맛이 없었고, 수업 외에는 거의 기숙사에서 지내니 밥을 먹지 않아도 살만 했다. 자신의 비루한 모습에 손톱만큼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자존심이 상처를 입었는지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나랑 비행 해주면, 받을게."
"꺼져, 필요없어. 네가 그러지 않아도 난 이미 지옥에 처박혀있어."
드레이코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비행술 책을 숲에 내던졌다. 분한 기분에 해리 포터를 밀쳐버리고 싶었지만, 성 운동장에 나와 있는 학생들이 그들을 힐끗거리며 보고 있었다. 해리 포터와 드레이코 말포이의 조합 만으로 시선을 잡아끌만 했다. 드레이코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고 했지만, 해리 포터는 경쾌한 걸음으로 드레이코의 뒤를 따랐다.
"지팡이 받아야 하잖아."
"버리라고 했잖아. 날 내버려 둬."
"난 돌려주고 싶어. 네가 마법을 계속 쓰길 바라."
거짓말. 드레이코는 답을 할 가치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며 앞만 보고 빠르게 걸었다. 화가 나고 열받았다. 하지만 제 주제에 영웅 포터에게 화를 낼 순 없었다. 분풀이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죽은 듯이 살아야만 했다. 죽은 듯 살다가 기한을 채우고, 졸업장을 받고, 영원히 말포이 저택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갈 것이다. 세상이 조용해질 때 까지. 그러니 해리 포터가 자신을 이렇게 붙잡고 귀찮게 굴지 않기를 바랐다.
"지팡이 돌려줄게."
드레이코는 역시나 답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 천문탑에서 만나. 네가 안나오면 나만 필치에게 잡히게 될지도 몰라."
드레이코는 나갈 생각도 없었다.
"해리 포터가 드레이코 말포이를 좋아해서, 천문탑에서 드레이코 말포이를 밤새도록 기다렸다는 소문이 퍼지길 바라?"
"뭐?"
드레이코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소린가, 드레이코는 숨이 턱 막히고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 앉은 기분을 느꼈다. 해리 포터가 자신을 협박하는 것인가? 자신의 남은 2주를 지옥으로 몰아 넣고 싶어서 그러는 것인가?
"천문탑에서 봐."
해리 포터는 드레이코의 어깨를 툭툭 치고 빠르게 사라졌다. 이런 식이면 해리 포터의 제안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내던진 해리 포터의 비행술 책이 여전히 숲에 남아있었다. 드레이코는 뒤를 돌아 책을 챙기기 위해 다시 성 운동장 구석으로 향했다. 해리 포터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녹음을 향해 걸었다.
***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음식이 넘어가지 않아 빵 반의 반 쪽을 간신히 목구멍 안에 쑤셔 넣고 물로 밀어 넣었다. 그만큼도 먹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죽음을 열망하면서도 죽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말포이는 언제나 한심했다. 자신이 한 것이 무엇인가. 해봐야 포터를 무시하고 짓밟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 그게 전부였다. 드레이코는 자신의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고 있는 두꺼운 비행술 교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문탑에 가서 이 책을 건내주고 떠나자. 어떤 대답도 들을 필요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물음을 던질 이유도 없다. 드레이코는 자신의 모습을 정리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목이 아렸다.
드레이코 말포이는 한 때, 아주 어렸을 때, 해리 포터를 좋아했다. 그건 아주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그것이 사랑인지 동경인지 알 길이 없다. 드레이코는 그것이 어떤 마음이던지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불가능한 마음이었고, 쓸모 없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드레이코는 짙은 고동빛이 나는 까만 머리가 부스스한 모습을 보며 어머니를 떠올렸다. 언제나 깔끔하게 머리를 뒤로 넘겨 빗겨주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래서 저 아이에게도 그런걸 알려주고 싶었다. 넥타이를 바르게 매야 하는 이유와 옷을 깔끔하게 입었을 때 사람에게서 나는 풍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런건 아버지에게 배운 것들이었다. 순수혈통이라면 본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우상이며, 그들에게 존중받는 위치에 있다. 그리고 그 애는 포터였다.
그래서 그 꼬질꼬질하고, 정돈도 하지 못하고, 옷도 바르지 못하며, 그저 실실 웃기만 하고 다니는,... 해리 포터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어쨌든 드레이코 말포이는 해리 포터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그런건 존재하려고 했으나 드레이코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거대하고 깊은 뿌리로 인해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말포이와 혈통과 환경과 사회가 드레이코를 그렇게 만들었다. 드레이코는 천문탑 계단을 헉헉거리며 올랐다. 숨을 고르고 문을 열었다. 발걸음을 내딛었다. 낮은 돌 난간에 해리 포터가 몸을 기대고 있었다. 금방 떨어지기라도 할 것 처럼, 하지만 굳세어 절대 그럴 일 없을 것 처럼 보였다. 높은 곳은, 덤블도어가 죽은 그 날, 드레이코가 가장 싫어하는 곳이 되었다.
"드레이코."
해리 포터가 등을 돌리며 드레이코를 불렀다. 넌 언제부터 날 드레이코라고 불렀지? 드레이코는 물을 수 없는 질문을 속으로 삼켰다. 그 질문은 해리 포터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뜨겁게 불리운 그 이름과 함께 삼켜졌다.
"이거 받아."
드레이코는 여전히 천문탑 복도 문 앞에 서 있었고, 해리 포터는 열 걸음은 더 걸어야 하는 거리의 난간 앞에 서 있었다. 드레이코가 다가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에게 다가가면 그저 붙잡혀 버릴까봐, 드레이코는 그냥 책을 내려놓고 다시 문을 닫고 숨어버리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해리 포터는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의 등 뒤로 펼쳐진 거대한 산과 검은 하늘, 마법처럼 반짝이며 빛나는 밝은 별과 아주 잘게 쪼개진 달. 드레이코는 해리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웃고 있다고, 어쩌면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 어서."
드레이코는 그 목소리에 한 걸음 다가갔다. 보폭은 좁았고, 둘의 거리는 여전히 멀었다. 바람이 불었다. 해리 포터가 센 바람에 휘청였고, 드레이코는 놀라 두 걸음 더 큰 보폭으로 걸었다. 둘 사이는 금세 가까워졌다. 해리가 웃었다. 그는 어느새 양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드레이코는 울컥했다. 해리 포터는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복수를 하는 것이 분명하다. 저 지팡이를 받으면, 어떤 저주 같은게 걸려 있어서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거나, 놀림 거리가 될지도 몰랐다. 어쩌면 거품을 물고 쓰러질지도 몰랐다. 지팡이를 받으려고 하는 순간, 자신이 공중에 띄워져 저 난간 너머로 떨어지게 될지도 몰랐다.
덤블도어가 그랬던 것 처럼.
"드레이코?"
해리 포터가 한 걸음 다가왔다. 드레이코는 가만히 서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해리 포터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드레이코 말포이는 해리 포터를 알았다. 드레이코는 한 걸음, 큰 보폭으로 그의 앞에 섰다. 둘은 어느새 가까워졌다. 드레이코는 왼손에 들고 있던 비행술 교재를 내밀었다.
"지팡이는 됐어. 이 비행술 교재나 가져가."
해리는 뺨을 긁적이며 못 들은 척, 괜히 천장 구석을 바라봤다. "포터!" 드레이코가 소리치자 해리는 움찔했다. 드레이코는 그 모습이 바보같다고 생각해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간신히 웃음을 참아내고 해리의 가슴팍에 책을 퍽 밀었다. 그러자 해리는 휘청거렸고,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어어어-" 비행술 교재가 난간 너머로 떨어지고, 큰 바람이 불었다. 펄럭, 챠르륵- 하는 책장이 바람 사이로, 공기 너머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둘 사이의 좁은 틈을 갈랐다. 드레이코는 해리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가 넘어지지 않게 그를 꽉 잡았다. 둘은 서로 숨이라도 닿을 것 처럼 가까웠고, 해리는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이제는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드레이코 눈에는 해리의 얼굴만이 쏟아졌다.
"해리 포터가 드레이코 말포이를 좋아한대."
빛이라곤 쪼개진 달과 수많은 별이 전부였음에도, 드레이코는 자신의 눈 앞에 반짝이는 그 녹색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그건, 내 입에서 시작된 소문이야."
드레이코는 놀란 마음에 해리를 바로 세운 후 품에서 떨어트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해리는 드레이코의 목에 두 팔을 감았고, 드레이코는 여전히 어정쩡하게 해리의 허리께에 두 손을 띄우고 있었다. 드레이코는 해리가 빛난다고 생각했다. 이 아이에게서는 빛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왜 내가 해리 포터라고 말하지 않았어?"
드레이코는 그게 언제인지 알았다. 하지만 드레이코는 그가 해리라고 말할 수 없었다. 왜 해리라고 말하지 않았는지도 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거짓말은 할 수 있다. 그는 슬리데린이니까.
"난 겁쟁이니까."
"거짓말."
그리핀도르를 속이기는 쉽지 않다. 드레이코는 정답을 말하기를 피했다. 고개를 돌렸다. 해리 포터가 이 팔을 풀어주길 바랐다. 존재할 수 없었던 자신의 마음이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나오려고 하니까. 그리고 그것이 기어 나와 자신의 심장 위에 올라 앉는다면, 드레이코는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하며 삶을 살아가게 될 테니까.
"널 가엽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널 생각하기 시작했어. 널 구했던 이유가 뭘까."
"넌, 선하니까. 나같은 쓰레기도 구할 정도로."
"그런가, 내가 선한가."
해리는 큭큭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그가 들썩이며 웃자 해리의 머리가 드레이코의 가슴에 닿았다. 큭큭거리며 웃더니 이내 드레이코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끅끅대며 웃다가 그대로 팔을 내려 드레이코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드레이코는 어정쩡한 제 팔을 내리고 가만히 있었다. 해리 포터를 끌어 안을 정도의 욕심은 부릴 수 없다.
"널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멈출 수 없었어. 그래서 왜 그런지 생각했지. 왜 널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는지."
"포터, 제발 그만해."
"론이 그러더라고. 내가 널 좋아하는게 아니냐고. 그러면서 웃는거야. 막 웃더니, 자기는 프레드의 장난을 따라갈 수는 없는 것 같대. 그러더니, 속상해하다가 울었어."
드레이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해리 포터는 자신을 괴롭히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미친듯이 뛰는 이 심장을 죽여야 했다. 멈춰야만 했다. 드레이코는 팔을 들어 자신을 껴안은 해리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해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나도 웃을 수 없었어. 나도,...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았거든."
"...개소리 마."
"난 너무 많은 것을 잃었어, 드레이코."
"네가 날 좋아할 이유가 뭐야, 네가 날 사랑할 이유가 뭐냐고. 우린 적이고, 난 패자고, 난 배신자고, 난 악당이야. 난,... 나는 네가 품을 이유가 전혀 없는...!"
"너마저 잃을 수 없어."
"... 넌 날 가진 적 없어."
"갖지 않아도 잃을 수 있어."
"네 마음은 잘못됐어."
그 말에 해리는 몸을 덜덜 떨었다. 냉정한 말이었다. 드레이코는 뜨겁게 뛰려던 제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드레이코, 널 사랑해. 입,... 맞춰도 돼?"
고개를 든 해리와 눈이 마주쳤다. 드레이코는 불안한 눈으로 해리를 바라봤다. 드레이코의 시선이, 그의 무답이 긍정이라고 생각한건지 해리는 드레이코의 머리를 감싸며 그에게 입을 맞췄다. 혀가 드레이코의 입 안을 짧게 끌어안았다 사라졌을 때, 드레이코는 그것이 부족하다 느꼈을 때, 해리는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그냥 론에게 조용히 말했어. 론이 프레드를 떠올릴 때,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어. 그러니까 그 애가 화를 냈지. 당연했어. 넌... 넌..."
"난 죽음을 먹는 자니까."
"그랬었지... 그래서, 론은 화를 냈어. 호크룩스를 파괴하고 다닐 때 이후로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엄청 화를 냈어. 널 사랑해선 안된다고,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자긴 받아들일 수 없대. 근데 그걸 누가 들은거야. 와전된 이야기가 호그와트에 퍼졌어. 어쩌면 네가 그걸 듣고 날 찾아올지 모른다고 기대했어. 이번 학년 내내 널 만나지 못했으니까. 결론적으로 론은 나에게 사과했고, 헤르미온느도 날 걱정했지만,... 난 널 만나지 못했지."
"내가 그 소문을 들은건 며칠 전이야."
"그래... 그래."
해리는 드레이코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손길이 따듯했다. 다정했다. 그래서 드레이코는 지금이 항상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손을 뻗었다. 해리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겼다. 헝클어졌던 머리가 길고 하얀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쓸려 내려갔다. 해리가 움찔했고, 뜨거운 숨을 뱉었다. 드레이코의 손가락은 몇 번을 해리의 머리카락 사이를 쓸어 넘기고, 해리의 뒷목을 건드리고, 귓가로 머리카락을 넘기고, 해리의 뺨을 몇 번 더듬었다. 해리는 빨개진 얼굴로 드레이코를 빤히 바라봤다.
"항상 이러고 싶었어."
그 말에 해리는 울컥하며 입술을 씹었다. 눈물을 참는 듯 보였다. 고개를 푹 숙이자, 드레이코는 해리의 턱을 손가락으로 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 그러자 해리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드레이코는 해리의 구겨진 셔츠깃을 두 손으로 판판하게 폈다.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고, 해리의 넥타이를 풀렀다. 빨간 그리핀도르의 넥타이는 잔뜩 구겨져 꼬기작거렸다. 해리의 어깨 넘어로 팔을 넘긴 후, 넥타이를 감았다. 천천히 넥타이가 묶이는 소리가 들렸다. 스윽, 스으윽, 하는 천이 구멍 사이에 넣어지고, 목을 감고, 팔을 넘는 소리와 행동이 해리를 애닳게 만들었다. 해리는 침을 꿀꺽 삼키며, 눈물을 끊임없이 흘렸다. 어쩌면 이 행위가, 드레이코에게 어떤 선택인지 해리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일지도 몰랐다.
"난 평생 이런, 다정 속에서 살았어."
"..."
"해리. 이게 내 다정이야."
드레이코는 해리의 어깨를 한 번 털어내며 그의 바른 옷차림과 단정한 머리를 바라봤다. 마치 어린 시절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한밤 중에 교복을 바로 입은 해리의 모습이 우스웠다. 드레이코는 해리를 보고 씨익 웃어보였다. 언젠가, 해리를 멀리서 바라볼 날이 올 것이다. 그 때는 해리가 자신을 보지 못하더라도 해리를 보고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해리는 끝내 눈물을 터트리며 드레이코를 끌어 안으려고 했다. 그가 영원히 멀어질 것이라는 것을 해리는 본능적으로 알아 차렸다. 드레이코를 품에 안고 입을 맞추고자 했다. 하지만 더이상 멀어지는 드레이코를 잡을 수 없었고, 그런 드레이코가 그의 지팡이를 결국 챙기지 않고, 해리 포터를 천문탑 위에 내버려두고, 다시 문을 닫고 들어가버리는 것을 해리는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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