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

키쿄 리오는 어두운 터널 속을 지나가듯, 고요한 정적을 차분히 걷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깊은 안개 속.

어둠을 밝히는 빛줄기 하나가 마치 이정표라도 되는 듯, 그것을 향해 쭉 걷기만 했다. 한참을 걸어도 다리에는 감각이 없다. 현기증이 날 것처럼 머리만 아플 뿐이다.

빛의 근원으로 다가갔다고 생각한 순간, 어둡던 세상이 밝게 변하고 눈이 부셔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키쿄 리오는 호흡을 가다듬고 앞으로 향했다. 점점 깊은 곳으로….

“…너는 누구야?”

낯선 목소리에 키쿄가 고개를 돌리자 빨간머리에 초록눈을 가진, 또래처럼 보이는 남자가 키쿄를 경계하며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쏟아지는 현기증 때문인지, 키쿄는 순간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릴 뻔 했다. 남자에게 키쿄라고 말하자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파도치지 않는 잔잔한 바닷가, 남자의 뒤로는 안개 가득한 숲과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저택이 있었다. 바닷물은 투명하고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거려 오래 쳐다보고 있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나는 키쿄 리오, 여기는 어디야?”

“키쿄라고 부를게. 나는 마토바 와타루, 여길 지키는 안내원? 같은 거라 생각하면 돼.”

키쿄는 당장이라도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마토바에게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냐 묻자, 마토바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지금 당장은 나갈 수 없다는 말을 꺼냈다. 며칠 뒤면 배가 올텐데 그때까지 기다리라며. 이곳의 바다는 보기보다 매우 깊고 상어도 꽤 살고 있어서 배가 없으면 절대 나갈 수 없다면서.

상어? 아무리 보아도 물은 투명하고 깨끗해 보이기만 했다. 일단 기다리라는 마토바의 말을 들으며 외딴 섬의 호텔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숲길을 조금 걷자 겨우 사람 하나 살기에는 과하게 크고 꺠끗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와타루는 손님이 마침 없어서 다행이라며 객실 하나를 키쿄에게 내어주었다.

“다음 배가 오기 전까지 다른 손님은 없으니까 편하게 써도 돼.”

“손님이 많이 와?”

“응, 이렇게 한산한 것도 오랜만이네.”

와타루가 조금 쓸쓸한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주전자에 불을 올렸다.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지만, 키쿄는 애써 웃으며 마토바의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곧이어 차를 두 잔 내어 키쿄의 앞에 하나, 자신의 손에 하나 든 와타루도 의자에 앉았다. 옅은 선홍색의 차는 뜨겁지만 김이 나지 않았고, 와타루는 그걸 아무렇지 않은 듯 삼켰다. 옅은 석류의 향기. 그 냄새를 맡자 왜인지 모르게 속이 안좋아져 헛구역질이 나왔다. 정신을 차린 순간부터 몸이 제 몸 같지가 않았다.

“고맙지만 마음만 받을 게, 지금은 속이 좋지 않네.”

“그래…? 아쉽다.”

그럼 저녁을 먹기 전에 내려오라면서 키쿄에게 객실 열쇠를 쥐어주었다.

“문은 잠그지 마. 고장나서 안에서도 안 열릴 때가 있거든.”

키쿄는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객실로 향하려다가, 와타루가 보지 않는 사이에 밖으로 나와 숲을 거닐었다. 가까부터 드는 위화감이 신경쓰였기 때문이다. 숲을 한발한발 내딛는데, 머릿속에 흐릿하게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키쿄, 너랑 절대 같이 안 놀거야!’

어린아이의 앳된 목소리. 갑자기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러고보니 여기에 오기 전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멈춰 서서 생각을 가다듬는데, 어느새 뒤에 마토바가 서있었다.

“여기서 뭐해?”

“아…, 속이 안좋아서 잠깐 걷고 있었어.”

“숲은 잘못하면 길을 잃기 좋아. 특히 밤에는.”

‘숲은 잘못하면 길을 잃기 좋아. 특히 밤에는 더 조심해야하고. 그리고 또… 절대 밤에 바닷가는 가면 안돼.’ 데자뷔가 들었다. 어디선가 이 말을 했었던 것 같은 그런 기분.

“잠깐, 나 가봐야 할 거 같아.”

“가지마….”

‘가지마!’

아까전부터 계속 드는 위화가뫄 두통에 키쿄는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흐릿하게 보이는 기억의 잔상.

「XXXX년, 3월 22일. 오늘은 새로운 아이를 만났다. 어른들은 나이가 같으니 친구를 하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쪽에서는 왠지 모르게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

「XXXX년, 3월 24일. 그 아이와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름은 마□■ ◇타■. 형이 한명 있다고 한다. 나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최근 형과 헤어지게 되어 기분이 안좋던 순간에 나를 만났다고 얘기해주었다. 서로 불편한 감정은 버리고 친구가 되기로 했다.」

「XXXX년, 4월 2일. 친구가 되기로 했지만 서로 안 맞는 부분이 꽤 많았다. 정확히는 안 맞는 게 아니라 서로 부딪히는 부분이 많다. 어른들의 말씀대로 호텔 안에서 놀면 될텐데, 자꾸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숲 너머에 있는 바다에 관심이 많아보인다. 형과 바닷가에서 놀았던 게 재밌었다던가? 그래도 바다는 위험하다.」

「…가지말라고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아니, 나도 사실 내심 바다가 궁금했던 걸지도 모른다. 막았어야 했는데.」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바다는 위험해.」

머릿속이 깨끗해지면서 심했던 두통도 현기증도 눈녹듯이 사라졌다.

“기억나? 우리 같이 놀았었는데.”

“…응.”

이미 십여년 전에, 죽은 마토바 와타루는 키쿄 리오의 앞에서 생긋 미소 짓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분명 와타루가 바닷가에서 죽고 그 섬의 휴양지는 폐쇄 되었을 터. 하지만 십여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 어째서 세월의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한 모습인 건지, 와타루가 제게 먹이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지. 아니, 여기는 도대체 무엇인지.“

“바다를….”

하지만 그런 질문 따위 할 틈도 없이 와타루는 아주 쓴 얼굴로 키쿄를 밀어냈다. 바다가 있는 쪽으로.

가야한다는 본능적인 생각에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한참을 달려 바다 끝에 다다른 순간, 뭔가 알 수 없는 육중한 힘이 키쿄를 밀어내는 듯 하였다. 억지로 기어서 겨우 바닷물에 닿자,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저 멀리서, 바닷가 끝에서 와타루는 입으 뻐끔거리고 있었다.

가지말라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파도-와타루-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파도에 휩싸여 물 속으로 천천히 침전했다.


“키쿄씨, 정말 행운이었어요. 배가 침몰했는데 기적적으로 파도를 타고 해변가로 휩쓸러왔다니.”

정말 다행이라며 연신 조잘대는 사람의 말을 적당히 무시한 채 침대에 누운 키쿄 리오는 계속해서 그떄의 그 일을 떠올렸다. 바다에 들어가는 순간, 정신을 잃었고 병원이었다. 왜 그때 마토바는 키쿄 리오를 붙잡지 못했을까. 듣지 못했던 그 파도소리가 계속해서 키쿄의 가슴 속을 헤집었다.

숨이 다하는 그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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