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브예서] The Sleeping Swallow
2024년 아이소 배포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위대한 백곡왕의 해방자, 대 랑부예 가문의 자랑스러운 분홍 타마, 우리의 명탐정 함-크리스텔-가인께서 가상의 콧수염을 매만지며 상황을 한 줄로 정리했다.
“제비 놈이 잠자는 숲속의 제비가 됐다고요?”
침대에 누워있는 제비, 아니 지브릴 디오프는 자신에게 붙은 이상한 수식어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대신 그와 같은 조상을 둔 사내가 옆에서 수려한 눈썹을 까딱였다.
“지금 숲이 왜 나오지? 사고가 발생한 장소는 실내 아니었나.”
“뭐래. 동화 몰라요?”
위에서 드리운 커다란 그림자를 삐딱하게 올려다본 가인은 여기는 없나, 중얼거리고는 손을 대충 허공에 휘저었다.
“뭐, 그런 거 있어요, 재수 없게 저주에 걸려서 백 년쯤 꿀잠 자다가 한참 연하랑 결혼하신 분 얘기.”
“……?”
“어떻게 물렛가락에 찔리는 것까지 똑같냐. 웃긴다. 그쵸, 궁주님?”
“……세레니테?”
가인은 자신과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파격적인 요약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세드리크 역시 자신을 이해시켜줄 사람을 찾았다. 이제 두 사람의 시선이 닿은 곳에 앉아있는 쥘리에트의 궁주가 곱게 눈을 접어 웃으며 입을 열 차례였으나, 죄책감에 젖어 무거워진 속눈썹을 내리깐 주신의 천사는 침울하게 바닥만 보고 있었다.
백 년……. 방금 들은 불길한 단어 하나를 중얼거리던 입이 작은 소리를 힘들게 뱉어냈다.
“저 때문에, 공자가…….”
3일은 꼬박 굶기라도 것처럼 힘없는 목소리에 물과 불이 펄쩍 뛰어오르며 반박했다.
“그게 왜 궁주님 탓이에요! 자기가 알아서 잘 피했어야지! 8급은 장식으로 달았나?”
“동의하지 않을 수 없군. 그는 폐하께 명받은 대로 호위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야.”
“끼응!”
통통한 꼬리를 흔들며 발치를 맴돌던 데미까지 편을 들어주었지만, 수심이 깃든 표정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오후 간식으로 올라온 레몬 마들렌마저도 아직 접시에 가득히 탑을 쌓고 있었다.
저를 대신해 누워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맛있는 간식이나 즐기고 있기에는 가슴 한구석이 콕콕 찔렸다. 인제 와서 양심이 찔릴 게 아니라, 차라리 내가 찔렸더라면……. 흑마법이 안 통하는 것처럼 나는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자신이 간식에 손도 대지 않는 것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두 명의 시선에 못 이겨 하나를 집어 들고 먹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침대에 잠든 남자를 곁눈질하다 결국은 도로 내려놓았다. 끼후. 데미가 앞발로 얼굴을 가리며 한숨 같은 소리를 흘렸다.
지브릴 디오프를 잠에 가둔 것은 선대, 선대의 선대,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황궁 창고에 보관되어있던 물건 중 하나였다. 죄 쓸모를 다했거나 쓸모를 알 수 없는 것들이지만 새해를 맞아 먼지라도 털어내자고 아침 일찍부터 여러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소식을 들은 정예서도 앞치마를 하나 빌려 그 틈에 끼었다. 앞치마는커녕 풀어헤친 가슴팍에 먼지가 다 들러붙을 만한 불량한 옷차림으로 건들건들 나타난 지브릴도 그 뒤에 따라붙었다.
‘청소? 이봐, 궁주님. 윗사람은 일하는 사람들 근처에 괜히 어슬렁대지 않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입으로는 그렇게 삐딱한 소리나 하면서도 남자는 몇 걸음 앞에 놓인 상자를 발로 슥 밀어 치워주거나 팔을 뻗어 닫히려는 문을 잡아주면서 잘만 따라왔다. 주변 좀 제대로 보고 다니라고 핀잔을 주며 높이 쌓여있는 물건 더미 사이에서 위험하게 삐죽 튀어나온 것을 손끝으로 툭, 쳐내기 전까지만.
‘공자? 왜……어억!’
간간이 티격태격하는 목소리만 들리던 쪽에서 갑자기 우당탕 울려 퍼진 요란한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급히 뛰어왔지만, 일은 이미 벌어진 후였다. 빈방의 침대든 수풀 속이든 상대만 있다면 누울 자리를 안 가린다던 탕아가 바닥에 쓰러져있고, 갈색 머리의 신관은 급히 꺼낸 날개를 파닥거리며 그 밑에 깔려있었다.
바로 치유 서클을 펼쳤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치유 신관을 부른다, 누구를 부른다며 시끄러운 사이로 고개를 내민 프랑수아 덕분에 공자가 마법에 걸렸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주변을 살핀 프랑수아가 지브릴이 마지막으로 건드린 문제의 물렛가락을 포함한 물레 전체를 회수하고 이 천재 마법사를 믿으시라며 멋진 윙크를 남기고 갔지만, 지브릴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다 식어버린 캐모마일 차를 들어 간신히 한 모금 넘긴 예서가 걱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정말 백 년 동안 못 일어나면 어떡하지…….”
그 백 년이라는 단어를 꺼냈던 가인이 입술을 감쳐물었다. 이놈의 입이 괜히 그런 말을 해서는! 가인은 뒤통수를 긁으며 눈을 굴리다가 일부러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를 냈다.
“저희가 억지로라도 깨우면 되죠! 까짓거 얼음물 좀 붓고 몇 대 패주면 안 일어나고 버티겠어요? 정 안되면 동화 내용대로 따라서 해보면…….”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주먹까지 쥐고 힘차게 휘두르던 가인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서서히 일그러지는 얼굴을 힐끗 본 태자가 물었다.
“그 동화에서는 어떻게 깨어났지?”
“……진정한…사랑의…입…맞춤으로…….”
벌레라도 씹어 뱉듯 말을 토해낸 가인은 무얼 상상했는지 작은 소리로 우욱, 하며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세드리크도 괜히 물었다는 표정이 됐다.
미안함과 염려로 가득 찬 시선을 보내는 그들의 신관과 달리 두 성기사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침대를 조용히 노려보았다. 황족의 피가 섞인 공작가의 장남, 유능한 8급 전투 마법사, 궁주님을 지켜준 조금은 고마운 놈……이지만.
“……그냥…안 깨워도 되지 않을까요?”
“…….”
“자기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겠지. 다 큰 놈 모닝콜을 굳이 해줘야 하나? 태자님이나 궁주님이 안 일어나면 큰일이겠지만 저놈이 안 일어나는 게 뭐……. 오히려 살롱의 숙녀분들을 지키는 일이 되지 않을지?”
“……일단 그 전까지만 시도해보지.”
“아, 얼음물 붓고 패는 거? 오케이. 그것까지는 제가 해줄 수 있음.”
티테 데려와서 미역으로 따귀도 좀 때려볼까요? 광어도 괜찮을 것 같고……. 바로 옆의 신관이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대화가 빠르게 오갔다. 오래된 마법에 걸린 마법사는 잠시 후 제 얼굴에 뭐가 날아들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있었다.
미역도 광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아기 신수를 등에 업고 양손에 해산물을 쥔 물속성 성기사를 일상처럼 익숙하게 지나치던 사람들은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전후 사정을 듣고 놀라며 입을 가렸다. 저마다 입을 가린 손 아래에서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진정한 사랑의 입맞춤만이 마법을 풀 수 있다고요?”
“어머나! 로맨틱해라.”
“하지만 '그' 디오프잖아요. 천섬의 탕아! 진정한 사랑이 있기는 할까요? 염문을 뿌린 이들을 불러 모으면 광장을 꽉 채우고도 남을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그 많은 사람 중에 한 명 정도는……있지 않을까요?”
말하는 이도 영 확신이 들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래도 더 이상 남은 방법이 없었으므로 비밀리에 사람들이 궁으로 불려왔다.
지금은 결혼했거나, 약혼자가 있거나, 본인이 내키지 않거나, 너무 멀리 있어 오기 어려운 이들은 참석하지 않았는데도 넓은 방 하나를 채울 정도는 되었다. 가지각색의 고운 드레스나 정장을 갖춘 아가씨들은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재잘거렸다. 어머, 언니 오랜만이다. 우리 전에 셋이 같이 보고 처음이지? 어, 네가 왜 여깄어? 너도 공자님이랑 했어? 너도? 나도!
“이게 무슨 막장 미드나 영드도 아니고…….”
흐린 눈으로 천장을 보던 가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놈은 그냥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는 게 낫지 않을까? 아 죽어가는 게 아니라 잠든 거라고? 그랬지, 참. 아쉽게.
동창회라도 온 양 웃고 떠들던 여성들은 잠시 후 앞뒤 상황을 듣고는 조용히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까 잠든 지브릴 디오프에게, 진정한 사랑의 키스를 해야 한다고?
“진정한…사랑이요?”
“저는……아닌 것 같은데요.”
“저도 그냥 하룻밤으로 끝이었어요. 너는 좀 오래 만나지 않았나?”
“아이 참. 몇 번 만나긴 했지만 우린 그냥 서로 즐긴 거라니까. 너도 봤잖아!”
“공자님은 한두 번 만나기엔 좋지만 진지하게 만나기엔 좀……그치?”
태자는 말없이 이마를 짚고 가인은 다시 허허 웃으며 높디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번개놈아, 너 대체 왜 이렇게 사냐……. 역시 그냥……그냥 죽자. 죽여버리자.
세드리크가 황위 계승자로서 육촌의 사생활을 어디까지 방치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고, 가인이 살인 충동을 삼키고, 아가씨들은 간식과 샴페인을 조지고 있을 때. 그 모든 사태의 시발점이 된 지브릴 디오프의 곁에는 단 한 명이 앉아있었다.
잠에 방해가 될까 봐 햇빛이 들어오는 창으로 가 커튼을 쳤다가, 그렇게라도 눈을 뜨는 게 좋은 거 아닌가 싶어서 다시 걷었다가……정예서는 결국 커튼을 애매하게 반만 걷어놓고 의자에 앉았다.
원래 잠버릇이 그런지, 마법에 걸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공자는 몸 한 번 뒤척이지도 않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조금 전 데미가 레아와 페리까지 데려와 셋이서 앞발 뒷발에 꼬리까지 총동원해서 한바탕 두들기고 갔지만 소용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애물단지들의 꼬리에서 뿜어져 나온 털과 화풀이로 잔뜩 뿌리고 간 꽃잎들만 미동 없는 잘생긴 얼굴의 주변으로 나풀나풀 내려앉았다.
예서는 조심히 뻗은 손가락 끝으로 눈꺼풀 위에 앉은 붉은 꽃잎을 살며시 걷어냈다. 꽃잎 아래 감은 눈의 속눈썹이 의외로……가지런하고 길었다.
“……몰랐네.”
자세히 볼 일이 없기도 했거니와, 평소 자신의 앞에서 공자가 짓는 표정이라고는 찌푸리거나 비웃는 표정이 대부분이었으니 받아치기 바빠서 그런 곳에 시선이 갈 일도…….
‘주변 좀 제대로 보고 다녀.’
지금 갑자기 그 말이 왜 생각난 걸까. 왜인지 그 말을 읊은 목소리도 귓가에 생생하게 재생된 것 같아서, 예서는 마법사의 닫힌 입술을 괜히 한 번 쳐다보았다.
당연히 잠꼬대는 아니었다. 그 말은 디오프가 잠들기 전, 창고에서 들었으니까. 청소를 돕기 바쁜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며 돕는 건지 방해하는 건지 모를 행동이나 자꾸 하던 남자가 불쑥 허리께에 손을 대며 했던 말이었다.
옷 위였는데도 이상하리만치 뜨겁게 느껴지는 손바닥이 허리를 잡아 슬쩍 끌어당기고, 잡힌 곳을 내려보았다가 비죽 솟아있던 물체에 옆구리를 찔릴 뻔했다는 것을 알고는 고맙다고 말하려고 다시 올려다보았을 때. 귀에 걸린 자수정이 삐딱하게 기울어질 정도로 고개를 숙인 남자가 붉은 눈을 어둡게 물들이고 했던 말.
‘제대로 보라고.’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저가 막았던 물렛가락을 손끝으로 한 번 툭 건드리고는, 허리에 감은 팔을 풀지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아닌가? 쓰러지기 직전에 팔에 힘이 더 들어갔던 것 같기도 하고…….
예서는 괜스레 간지러워지기 시작한 허리를 옷 위로 슥슥 문질렀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래도 태자님과 가인 씨가 공자의 전 여자친구분들을 만나 본다고 했으니, 그중에 인연이 있다면 곧 여기로 와서 공자를 깨워줄 터였다. 사랑을 담은 입맞춤, 으로…….
똑똑
“헉!”
무심코 잠든 이의 입술을 빤히 응시하고 있던 예서는 문 너머에서 작게 들린 노크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등에서 하얀 날개도 급하게 삐져나와 파닥거렸다. 벌써 왔나? 그럼 자리, 자리를 비켜줘야…….
“어, 어어. 잠시만요. 금방 나갈……?!”
앉아있던 작은 의자를 쓰러뜨리고 허둥대던 발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것을 밟아버렸다. 데미가 유독 크게 피워주고 간 붉은 장미의 꽃잎은 아주 커다랗고, 향기롭고, 미끄러운 나머지 저를 밟은 사람을 그대로 넘어뜨리고 말았다. 바닥이 아니라 푹신한 침대 위라는 게 다행일지, 불행일지.
엉덩방아를 찧지 않은 것은 분명 다행이나, 침대 위에 먼저 누워있던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 아니었다.
“윽, 아야…….”
반짝이는 별이 핑 돌 정도로 아찔한 아픔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때, 시야 가득히 지브릴 디오프의 얼굴이 들어찼다. 놀란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 아래에는 셔츠를 풀어 헤친 남자의 가슴이 맞닿아있고, 얼굴은 코끝이 서로 스칠 정도로 가깝고……아니, 그럴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스치고 있었다. 설마 코 아래, 그러니까 저기, 그……입술까지 닿은 건…….
“……음.”
하필 그 순간, 지금껏 조각같이 움직임이 없던 남자가 낮게 목을 울리며 눈가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 세상에. 정은서 맙소사! 닿았나 봐!
‘으악! 악!’
남자의 몸 위에 엎드린 채 20분 같은 2초 동안 굳어있던 정예서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빛의 속도로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두 손이 남자의 맨가슴을 몇 번이나 더듬은 것도 같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는 남아있지 않았다.
“앗, 궁주님?”
“으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문 앞에 선 것은 마법에 걸린 공자님을 구하러 찾아온 아리따운 아가씨가 아니라 궁주님의 간식을 들고 온 하늘색 머리의 아는 얼굴이었지만, 꼭 감은 눈 위에 손까지 덮고 도망치는 정예서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멀어지는 발소리가 작게나마 들리는 방 안에서 조용히 까딱거린 손가락이 작은 깃털 하나를 집어 들었다는 것도, 아직은 아무도 보지 못한 일이었다.
‘왜……대체 왜 깨어난 건데?!’
아니, 물론 눈 뜨길 바라긴 했지만.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긴 하지만!
쫓아오는 이는 없었지만 열심히 도망치다가 아무 방에나 들어가 숨은 정예서는 등으로 문을 닫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브릴 디오프가 자신의 에테르를 감지해 쫓아올 수 있는 성기사가 아님을 알면서도 에테르 수도꼭지를 꽉 잠그기까지 했다.
그렇게 꽁꽁 숨었는데도 아직도 심장이 목 끝으로 올라와서 뛰는 것 같았다. 문에 기대어 올려다본 천장은 어지러울 정도로 높아 보여서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는 사이도 안 좋잖아.’
필요한 조건과는 정반대 아닌가? 태자님이랑 가인 씨처럼 티격태격하다가 정드는 공식 커플도 아닌……. 어, 티격태격하는 건 맞는데. 정든 것도 조금은……맞는 것 같고. 아니, 그치만, 그래도.
기억 속 한쪽 구석에서 정은서가 쯧쯧 혀를 차며 등장했다. 언젠가, 함께 야식을 먹으며 드라마를 보다가 남주와 여주 사이가 너무 안 좋아 보여서 이거 로맨스 아니었냐고 물었을 때의 반응이었다.
‘정예. 혐관 몰라? 혐관?’
은서가 설명해줬던 내용들이 떠올랐지만 얼른 고개를 흔들어 기억을 흩어버렸다. 작은오빠는 그런 거 몰라. 모르고 싶다.
‘그냥 우연히 타이밍이 맞았던 건 아닐까.’
그래, 그거야. 그거라고 하자. 스스로 다독이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등 뒤,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복도를 나란히 걷는 두 명의 말소리도.
“공자님을 대체 누가 깨운 거래?”
“그러게나 말이야. 공자님도 못 보셨다며.”
못 봤다고? 정예서는 도망치기 직전의 상황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하긴, 움찔하는 것만 보고 눈이 제대로 뜨이기 전에 도망쳤으니 모를 만도 했다. 다행이었다. 그럼 이대로 그냥, 쭉 모른 척해도…….
“진정한 사랑의 입맞춤이라고 했나?”
“근데 그거, 어느 쪽의 진심을 말하는 걸까?”
……어느 쪽? 숨어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숨죽여 깜빡이던 갈색 눈동자가 순간 동그랗게 뜨였다.
“진정한 사랑이면 당연히 쌍방이겠지.”
“에이, 그럼 공자님이 누군지 모를 리가 없잖아.”
“아, 그런가? 맞네. 그러면 공자님을 짝사랑하는 사람이 몰래 들어와서 입 맞추고 사라졌다는 거야?”
“이야, 리에스테르 제국 제일의 난봉꾼한테 그런 사람이 있다니…….”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는 다가왔던 것과 꼭 같은 속도로 정예서를 지나 멀어져갔다. 높으신 분의 연애 이야기를 재미나게 속닥거리던 웃음소리도 따라서 사라졌다. 이제 다시 혼자 남았음에도, 정예서는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무릎만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공자님을 짝사랑하는 사람이…….
이미 떠나간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써 저 아래에 묻어놨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단숨에 건져서 더 이상 무시할 수도 없게 맨 위에 올려놓고 가버렸다.
‘내가…….’
정예서는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지금까지 누군가를 연애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니…남자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공자를…….’
옆에 정석 로판 남주가 있어서 그렇지, 지브릴 디오프도 나름 잘생긴 얼굴이다. 자느라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니 그 생김새가 더 잘 보였다. 늘 삐딱하게 밀어 올리는 눈썹과 코웃음 치던 콧대는 시원하게 쭉 뻗어 있고, 맨날 사탕이나 물고 다니던 입술은 의외로 조금 얇은…아니, 그 생각은 하지 말자. 다른 생각. 그래, 체격도 좋으니까 옷만 좀 단정하게 입고 다니면 훨씬 멋있을 거다. 전에 신국 귀족으로 위장하느라 옷을 차려입었을 때, 그때는 정말…….
가볍게 열이 오른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예서는 문득 등허리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본 곳에는 어느샌가 소리 없이 열린 문틈으로 웬 구둣발이 성큼 들어와 있었다.
그 위로 긴 선을 그리며 쭉 뻗은 다리, 유연해 보이는 허리를 지나서 한 뼘쯤 더 올라가면 방만하게 단추가 풀어진 가슴과…….
“이거 참, 얌전하지 않은 줄은 알았지만 사람 몸을 이렇게 훑어보실 줄은 몰랐는데.”
……입 안에서 사탕을 굴리며 저를 내려다보는 잘생기고 재수 없는 번개 놈팡이의 얼굴이 있었다. 예서는 당장이라도 딸꾹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입을 힘주어 꾹 다물었다. 이 인간은 어길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나 아직 생각 정리 못했으니까 좀 이따 와! 문도 닫고!
독심술이라도 쓰는지 마법사는 기꺼이 문을 닫아주었다. 본인도 방에 들어온 후에 닫았다는 게 문제지만.
커다란 방 안에 다시 둘뿐이었다. 예서는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착하자, 정예서. 공자는 날 못 봤다고 했어. 연기만 잘하면 일단 이대로 넘어갈 수…….
“우리 얘기할 거 있지 않나?”
정수리만 보여주는 예서를 향해 지브릴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소리를 내 시선을 끌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잘하지도 못하는 연기를 시도해 볼 기회도 없이, 화려한 반지를 낀 손에 익숙한 깃털 하나가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넘어갈 수…없구나.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증거가 그의 손에 있었으니. 예서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고개를 힘겹게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말만큼은 꼭 전해야 한다는 마음에서였다.
“……미안합니다, 공자.”
손가락 사이로 새하얀 깃털을 희롱하듯 굴리던 남자는 정중한 사과에 대꾸 대신 사탕을 까득, 깨물었다. 그 소리가 재촉으로 들리기라도 했는지 깃털을 잃은 천사의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제가 일부러 그런 건 정말 아니었지만, 그, 공자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신체 접촉이 된 거…….”
지브릴이 코웃음을 치며 목을 기울였다. 신체 접촉?
“일어나게 도와준 거니까 키스가 아니라 뺨을 때렸다고 해도 난 할 말이 없어, 궁주 마마. 그건 넘어가.”
일부러 입에 올리지 않은 단어가 귀에 선명하게 꽂히자 순진한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반쯤은 부끄러움, 반쯤은 서운함이었다. 내 입술이 닿은 게 따귀를 맞은 것 같은 정도인 건가? 그래, 나만 좋아하는 거면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는데…….
“그거 말고.”
별안간 거리를 좁혀오는 남자의 모습에 예서는 반사적으로 발을 뒤로 물렸다. 한 걸음, 반, 그리고 등 뒤에 굳게 닫힌 문.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켜는 사이에 눈앞의 벽이 되어버린 남자가 로메로에게서 물려받은 붉은 눈동자를 짙게 물들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 나 좋아해?”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날아든 직구에 얼굴 전체가 꽃잎 같은 빛으로 화다닥 물들었다. 아마 목 아래도 비슷하지 않을까. 가는 목을 감싼 옷깃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내리던 지브릴은 애꿎은 사탕을 한 번 더 깨물고 눈을 돌렸다.
“뭐, 나였다면 한 번 해볼까 하는 고민도 안 했을 것 같거든. 근데 다짜고짜 입술부터 날름 먹고 가버리다니, 대체 평소에 날 얼마나…….”
“머, 먹다뇨! 진짜 사고였다니까!”
일부러 놀리는 건가 싶을 정도로 가벼운 말투에 욱해서 평소처럼 팔뚝을 찰싹 때린 예서가 아차, 하고 손을 거뒀다. 잠시 눈치를 살폈지만, 맞을 때마다 엄살을 떨던 남자는 그냥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예서는 몇 초 더 망설이다가 옷자락을 쥐었다. 방금 전 가볍게 지나갔지만 신경 쓰이는 말이 있었다.
“공자는 왜……고민도 안 했을 거라는 겁니까?”
“안 봐도 뻔하니까.”
“…….”
고백도 전에 차이는 게 이런 기분인가. 말 자체보다,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바로 내뱉는 게 더 속상했다. 서운함이 눈가로 몰려드는 기분이 들어 얼른 옆으로 얼굴을 돌렸지만, 따라온 팔이 문을 짚고 옆을 막았다.
“대답, 아직 안 했는데.”
마법사의 두 팔 안에 갇혀 서운함이 얼룩덜룩 엉긴 눈에 복잡한 감정이 드리웠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그걸 내 입으로 꼭 듣고 싶냐는 뾰족한 마음 반, 그렇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는 약한 마음 반. 예서는 마지막으로 남은 작은 반항심으로 시선도, 목소리도 내주지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정말?”
끄덕.
“우리 그때 입술 안 닿았는데도?”
끄덕……응?
방금 뭐라고? 귀를 의심하며 돌아보았을 때, 지브릴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는 이미 서로의 입술이 맞닿아있었다. 아까처럼 닿은 건지 아닌지 헷갈리고 싶어도 도저히 헷갈릴 수 없는, 너무나도 확실한 접촉이었다.
뜨겁고 말캉한 무언가가 입술 위를 건드렸다. 이어서 손톱만큼 벌어진 틈으로 부드럽게 밀고 들어오는 움직임과, 입천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천천히 쓸어내리는 속도, 그 끝에 빨간 사탕의 맛을 조금 남겨놓고 떨어지면서 난 작은 소리까지. 스물여덟 모태솔로에게 첫 키스를 똑똑히 새겨놓은 남자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키스는 이거고.”
그리고는 아직 멍한 표정으로 숨만 할딱이는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려 이마를 콩, 맞댔다.
“아까 우리가 한 건 이거고.”
어떻게 이거랑 이거를 구분도 못 하시나 몰라. 큰일 났네, 정말. 키득대는 웃음소리 밑에서 첫 입맞춤을 빼앗긴 예서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렇지만. 그럼 어떻게……. 동화에서는…….”
“그쪽 세상 동화는 모르니까 그 얘긴 그만하고.”
뒤에 문이 버티고 있다는 것마저 잊었는지 자꾸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려는 허리에 굵은 팔이 감겼다.
“하던 얘기나 계속하지? 우리 시간 별로 없는데.”
몸이 바짝 붙을 정도로 끌어당겨지니, 자연스레 남자의 가슴에 손이 얹혔다. 재빨리 주먹을 쥐어 닿는 면적을 최소화한 예서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뒤로 뺐다.
“뭐……무슨 얘기요?”
“당신이 날 좋…….”
말이 끝나기 전에 두 손이 날아와 난봉꾼의 입을 틀어막았다. 화를 내듯 눈에 힘을 준 얼굴은 붉었지만, 아직 가슴에 박혀있는 말이 남아있었다.
“그쪽은 시도할지 말지 고민도 안 했을 거라면서. 근데 나한테 왜 이러는데요.”
너 나 갖고 노냐. 재밌어? 울컥하는 마음에 입을 막은 손 안쪽이 조금씩 간질거렸다. 공자가 입이 막힌 채로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소리는 안 들리고, 손 위로 보이는 눈은 꽤 진지해 보였다. 손을 뗄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 손바닥 안쪽에 뭔가 뜨겁고 축축한 것이 닿았다.
지금……핥았어?! 충격으로 손을 떼자 지브릴이 보란 듯이 혀로 아랫입술을 핥으며 방금 한 말을 다시 읊었다.
“당신이 깨어날 게 뻔하니까 고민도 안 했을 거라고.”
……야, 너 그런 뉘앙스로 말한 거 아니었잖아! 그리고 사람 손은 왜 핥아!
홀랑 속아 넘어간데다 손바닥까지 뜨거워진 신관이 분노에 찬 발길질을 하기 전에, 손 빠른 마법사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아, 알았으니까 화내는 건 좀 이따가 해. 이제 곧 당신 친구들이 나 잡아 족치러 올 거라고.”
“나중에 화내면 지금은 뭐……읍!”
그러니까 그 전에 키스 한 번만 더. 뭐 아니면 그것보다 조금 더 가도 좋고. 지브릴은 맞댄 입술 사이로 분명 그렇게 말해주었지만, 눈을 꼭 감은 상대가 그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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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태자 전하! 랑부예 경도 함께 계셨군요. 마침 잘 되었습니다. 이 프랑수아 뒤엠이 미지의 문제의 답을 발견했음을 기쁜 마음으로 알려드립니다! 이 물레에 걸린 마법은 그냥 시간이 지나면 풀리는 것이었답니다. 진정한 사랑의 입맞춤으로 눈을 뜬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낭만적입니다만, 디오프 공자는 지금쯤 푹 자고 일어났을……전하? 랑부예 경? 어디, 어디 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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