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문대] Cliché
가을 내음 품고 온 저릿한,
대학생 류청우(23)와 박문대(21)로 읽어주세요. 문대가 서술을 반말로 하지만 ...그렇습니다.
대학생이 되면 원하든 원치 않든 견뎌야 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어? 문대 잔 비었다!"
개강주면 몰려드는 별의별 이름을 다 갖다 붙인 개강총회. 일명, 술자리.
"뭐야~ 잔 비면 안 되지!"
작게 한숨하고 앞에 놓인 술잔을 잡았다. 분명, 잡았다. 순식간에 앞에서 사라진 술잔에 빈손을 보며 벌써 그렇게 취하진 않았을 텐데 하고 옆을 보자
"미안. 문대는 여기까지만."
내 술을 단숨에 원샷하고는 빈 잔을 내려놓는 류청우가 보였다. 나를 보며 ...웃었다.
"당장 저 얼굴에 주먹이라도 꽂아버리고 싶네."
어? 하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술병을 들어 잔을 채우고 바로 입에 털어 넣었다. 아무래도 생각만 한다는 걸 입 밖으로 내뱉은 모양이었다.
"오~ 문대 원샷~"
"문대는 마시겠다는데?"
이게 뭐라고 호들갑 떠는지. 아무래도 다들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술을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했으니. 그때였다.
"근데, 청우랑 문대는 원래 알던 사이야? 동아리 들어오기 전부터 친했던 것 같던데... 그렇다고 과가 같은 것도 아니고."
나는 알고 있었다.
"아, 고등학교 후배야. 같은 선도부였거든. 그래서 친했어. 졸업 뒤에도 종종 연락, ...했었고."
류청우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그리고 그 대답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을 것이란 것도. 그 질문에 망설이는 건 나뿐일 거란 것도. 그리고
"그치?"
내게 예쁘게 웃어 보일 류청우도.
나는, 너의 이 다정함이, 무섭다.
***
'아무래도... 선도부나 학생회 정도는 하는 게 좋겠지.'
별생각 없이 들어간 선도부는, 생각보다 좋았다. 과한 사람이 없었거든. 선도부라 그런지 적당히 조용하고, 적당히 시끄러웠다. 나쁘지 않았다. 특히, 선배 하나가. ...뭐, 선도부 일도 적성에 맞았고.
"어? 문대. 일찍 왔네?"
누가 봐도 나 선도부예요 하는 듯 반듯하게 갖춰 입은 교복과 반듯한 미소. 류청우였다.
류청우는 아침잠이 없는 편이라며 1학년 때부터 줄곧 오전 교칙 검사를 자처해서 하고 있다고 했다. 나 또한, 류청우와 함께 오전 교칙 검사를 자처해서 하고 있다. ...뭐, 아침에 좀 더 일찍 눈 뜨는 것쯤 어렵지도 않더라고.
"네, 선배님도 일찍 오셨네요?"
류청우가 나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 문대야. 혹시 내가 아직 불편해?"
"네? 아니요, 딱히."
왜 그런 질문을 했냐는 눈빛으로 보자 어색하게 웃더니 '계속 선배님이라고 하길래... 하하, 참. 큼...' 하고 머쓱해 했다. 정말 터놓고 친해지는 게 아니라면 죽을 때까지 선배님, 선배라고 부르는 게 보통 아니던가.
"형."
"....???"
"이라고 불러드려요?"
류청우는 잠깐 놀란 듯하더니 웃음이 터졌다.
"응. 그렇게 불러."
류청우가 싱긋 웃었다. 뭐 저렇게 웃음이 기분 좋을 수 있지.
"네, 형."
좋다 하며 더 환하게 웃어 보이는데 ...움찔했다. 저 웃음 하나면 정말 내 모든 걸 내걸고 해줄 것만 같아서.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게 이런 느낌인 건가.
류청우와 나는 선도부 완장을 팔에 걸고 교문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더 이른 시간에 온 탓에 한참을 가만히 서 있어야만 했다. 그 덕에 류청우와 떠드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류청우와 나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계속 이른 시간에 등교했다. 그렇다 보니 매일 대화를 하는 시간이 넘쳐났다. 이젠 그것마저 오전 교칙 검사의 루틴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 시간이 지나면 대화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류청우는 고3이었으니까.
"박문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손가락으로 앞문을 가리켰다. 그 끝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 지으며 손을 살짝 흔들어 보이는 류청우가 있었다. 교실 밖으로 나가자, 류청우는 잠깐만 하며 내 손목을 잡았다. 그 탓에 손 쓸 틈도 없이 류청우의 빠른 보폭에 질질 끌려가는 꼴이 됐다. 류청우가 잠시 멈칫하더니 보폭을 좁혔다. 아마 깨달은 것이겠지.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그만."
"아니에요. 근데 어디 가는 거예요? 뭐, 급한 일 생겼대요?"
류청우가 내 말을 듣더니 어딘가로 쏙 들어갔다.
"아니? 문대랑 얘기하려고."
이 사람은, 자신의 미소가 가진 파급력을 모르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예쁘게 웃어.
"문대랑 대화할 시간이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연락, 하잖아요."
그건 너무 딱딱하잖아 하며 다시 한번 웃었다. 미치겠네, 진짜.
"그래서 말인데,"
역시 대화는 핑계고, 용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작게 한숨하고 고개를 들어 류청우를 봤다.
"문대. 우리 영화 볼까?"
"???"
"영화 보자. 나랑."
머리 위에 보이지도 않는 물음표를 잔뜩 띄운 내게 '이제 더 지나면 문대랑 못해볼 게 많을 텐데, 그게 너무 아쉬워서.'라는 말을 던졌다.
거절도 못 하게 진짜.
***
술만 홀짝이고 있는 내게 다시금 질문이 날아왔다.
"근데, 왜 연락했었고야?"
"맞아. 보니까 서로 같은 학교 온 거 몰랐던 거 같던데?"
"연락 끊긴 지 좀 됐었나 본데. 류청우 이거이거, 괜히 친한 척한 거 아니야?"
"....."
나는 아무 말없이 술을 따라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당연하지. 너와의 기억은 모두, 그 학교에 버려두고. 너와의 마음은 그 교복과 함께 고이 접어두고 왔으니까. 그마저도 너는, 내게 1년밖에 허락하지 않은 듯했지만.
"어? 문대야! 오랜만이다."
갑자기 강의 하나가 휴강이 잡혀 다음 강의까지 시간이 붕 뜨게 되어 향한 동방에 네가 있었다.
"뭐야, 박문대. 너 여기 올 거였으면서 왜 말도 안 했어? 연락도 갑자기 안 되고... 음, 뭐 그런 건가? 입시에 집중하려고 모든 걸 끊어내고 공부에만 집중한?"
우리 사이에 존재했던 세월이 무색하게도 너는, 그대로였다. 너무나도 그대로여서, 버거웠다.
"...음, 하하. 미안. 그, 문대도 이 동아리야?"
"..아, 네. 그러니까,"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한 채로 굳어버렸다. 복도를 시끄럽게 울리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어? 뭐야, 문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아! 류청우!! 복학하면 복학한다 말을 했어야지!"
"아, 문대 청우 형 처음 보는구나? 도둑 아니야. 괜찮아, 긴장 풀어."
장난 섞인 말에 류청우는 크게 웃었다.
"문대 나 알거든? 내가 너희보다 친해."
억지로 끊어냈던 관계를 다시 마주한다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 학교에도 오지 않았을 것이고, 이 동아리에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너를, 다시 만날 줄 알았다면.
..아마, 아니었겠지. 너와 했던 대화를 떠올려 네가 이 학교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온갖 핑계를 대며 이 학교에 다시 왔을 것이고, 너와의 추억 속에서 너를 떠올려, 다시 이 동아리에 들어왔을 것이다.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봐. 또다시 반복했겠지. 억지로 끊어냈던 관계를 다시 이어붙이고 싶어서. 버려두고 온 기억과 접어둔 마음을 꺼내 펼치고 싶은 마음이 일어서. 힘든 것보다, 네가 먼저여서.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술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그냥, ...입시에 전념했거든요."
입이 썼다.
***
[문대야, 형 학교 왔는데 ㅎㅎ]
류청우는 졸업 후에도 가끔 학교로 놀러 왔다.
"문대랑 놀려고 왔지."
학교를 마치고 난 후에도 놀러 왔고,
"보고 싶어서, 문대."
점심시간에 찾아와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어디신데요?]
[선도부실. 잡혀왔어 (땀 흘리는 이모티콘)]
[ㅋㅋㅋ갈게요.]
빠르게 발을 옮겨 선도부실로 향했다. 두근거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이 느낌이, 뛰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너로 인한 것인지는 몰라도. 두근거렸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선도부실 앞에 도착해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지고 숨을 골랐다.
"청ㅇ..!"
두근거리던 마음이 변질했다.
"아니 글쎄, 내 동생이 BL웹툰을 보고 있더라고. 게이 이야기 뭐 좋다고."
"게이? 윽. 더럽다 진짜."
"왜, 그게 잘못된 것도 아니고."
"그럼, 남자가 너 좋다고 하면 괜찮다고?"
초조했다.
"...하하, 글쎄... 내가 게이가 아니라서 그런가. 당황스럽긴 할 것 같다."
발을 돌렸다. 차마 들어갈 수 없었다. 저 질문이 내게도 돌아올 것 같아서.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알 수 없었다. 또, ...류청우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기껏 인정했던 내 마음이, 감당하기 힘들어서.
너를 좋아하면 안 됐다. 너와 영화도 보면 안 됐다.
그 말도, 하면 안 됐다.
***
영화관 불이 꺼지고, 스크린이 환해졌다. 영화사 로고 아트 필름이 지나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 새로운 교복과 새로운 길, 새로운 학교, 새로운 교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는 그 처음. 그 처음의 낯선 두려움을 감싸 안아준 것은, 선배의 다정함이었다. ]
주인공은 한 선배에게 끌리게 된다. 그 선배는 굉장히 다정했고, 그 다정함은 주인공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 마음을 알지 못했다.
[ 알 수 있었다. 내가, 선배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게 되고, 그 이름이 사랑이란 걸 알게 된 주인공은
[ 선배의 행동 하나하나가 심장을 툭 툭 건드렸다. 그 울림이 떨림이 되었다. ]
그 선배를 향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대책 없이 설렜고, 무턱대고 두근댔다.
[ 이 마음을 계속 담아두기엔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
그 두근댐을 고백하려 하지만,
그 선배에게 만나는 사람이 생긴다.
[ 여동생 같다. 이게 선배가 나에게 내린 정의였다. ]
주인공은 그저, 귀여운 후배였을 뿐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거기까지였다.
[ 선배는 모두에게 다정했다. 한없이 다정했다. 다정하고, 또 다정했다. ]
그의 다정함은, 주인공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의 사랑은 실패했다.
주인공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지독히도 아플 뿐이었다.
스크린의 빛이 사라지고, 은은한 조명등이 켜졌다.
"문대야, 영화 어땠어?"
영화가 어땠냐면. 한 마디로,
"별로였어요."
"하하, 문대 진짜 솔직하다니까. 왜?"
"너무 뻔하잖아요. 클리셰 범벅에."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주인공처럼 나는, 다정한 너에게 끌렸다. 대책 없이 설레고 무턱대고 두근대는 마음이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다. 분명, 그랬었다. 너의 말 한마디에 나는 밑바닥까지 꺼졌고, 너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도망쳤다. 주인공의 사랑은 실패했다. 그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처절한 슬픔뿐이었다.
나 또한, 내 사랑 또한 실패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저, 지독히도 아플 뿐이어서.
나는 너로 인해,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클리셰잖아, 뻔해 따위의 말을 할 수 없어서. 그 뻔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여서.
가을 내음 품고 온 저릿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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