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과 누설
614 기반 날조
박문대는, 곪아버린 상처를 홀로 끌어안은 채 침몰해가는 류청우를 보며 이젠 제법 오래된 과거를 떠올렸다. 이제는 십 년도 넘게 지나버린, 그가 돌이킬 수 있었던 마지막 시간을.
독서실에 앉아 책과 노트를 펼치고 펜으로 사각거리며 외울 것들을 정리한다. 한참동안 외우고 나면 제대로 외웠는지 확인하기 위해 문제를 푼다. 풀고, 채점하고, 오답을 확인하고, 다시 공부하고, 다시, 다시, 다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압박과 압박이 사라진 자리에 밀려오는 자기비하는 류건우를 끝없이 갉아먹는 것들이었다. 살결이 파이고 뼈를 깎아내는 고통은 무뎌지는 게 아니라 그저 익숙해질 따름이어서, 류건우는 그저 통각에 움찔거리는 몸을 작게 웅크리고 숨을 몰아쉬며 그것들이 지나가기만을 오래도록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아주 자연스러웠다, 수많은 영어 단어 중 그런 단어가 류건우의 눈에 들어온 것은. 7급 시험에는 영어가 포함되지 않지만, 9급 시험에서 나온 킬러 문제라고는 하지만, 아무튼. 인터넷과 연을 끊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원서 접수는 해야 할 것 아닌가. 류건우에게도 그 정도의 정보는 들어왔다. 잠깐 머리도 식힐 겸, 류건우는 실검에까지 오른 그 단어를 인터넷에 검색했다. 뜻은 의외로 별것 아니었다. 예전에 공인영어를 준비하며 비슷한 숙어들을 설핏 봤던 기억이 났을 정도였으니까. 류건우는 그 숙어의 뜻을 눈에 담았다. Let on, 누설하다. 그리고 류건우는 같은 단어에서 유래한 또 다른 숙어를 기억해냈다.
Let go of.
박문대는 컨트롤프릭이다. 스스로 그걸 부정할 마음도 없었다. 천성도 그랬고, 직업까지 통틀어 생각한다면 실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 박문대가 류청우의 형이자 그룹의 실질적인 집행자로서 류청우가 숨기고 있는 것을 드러내려 시도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돌아온 것이, X발, 희대의 사태일 것은 알지도 못하고. 스케줄을 끝낸 직후 다른 멤버들은 일찌감치 숙소를 비우고 김래빈의 작업실로 빠진 채였다. 눈치껏 자리를 비켜준 멤버들에게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표한 박문대는 잠겨버린 류청우의 방 앞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일부러 가라앉힌 것을 끌어올리려다 도리어 역효과가 났으니, 박문대, 아니 류건우는 류청우가 그것을 스스로 끌어올리기 전까지 조용히 기다릴 작정이었다.
얼마나 지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숙소로 복귀할 때만 해도 밝던 해가 벌써 뉘엿뉘엿 지고 있다는 것 정도. 침대 헤드에 기대 앉은 채 무릎을 끌어안고 머리를 묻었던 류청우가 아주 작게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건우 형.”
어떤 이름은 부르는 것만으로도 꽤나 큰 심력이 소모된다. 평소에는 어떻게 그리도 편하게 불러댔는지 모르겠다고, 류청우는 생각했다. 사실 이유는 알고 있다. 그에게서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숨기고 싶었고, 드러내고 싶지 않았고, 사라질 때까지 억누르려고 했던 무언가를 들켰기 때문이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이름을 부른 것이 후회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어, 청우야.”
더없이 맑고, 또렷하고, 아름다운 소년의 목소리. 예전에는 저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더없이 행복했다. 아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랬으니 예전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 그러나 류청우는 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자신이 대답하지 않으니 불안해졌는지, 밖에서 부스럭거리며 다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류청우. 괜찮아?”
가라앉은 어조가 머리를 두드린다. 류청우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서 형이 언짢아하면 어떡하지, 나를 믿지 못하겠다며 등을 돌리면 어떡하지, 저 햇살같이 쏟아지는 부드러운 다정이 사라지면 어떡하지, 내가 이렇게 된 이유를 듣고 형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어떡하지. 이기적이라고 비난받아도 할 말은 없었다. 류청우는 더 이상 무언가를 잃는 고통을 견디고 싶지 않았다.
류청우라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류청우였기에 더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데뷔 초에 촬영했던 썸머 패키지 때의 일 같은. 류청우가 사고로 크게 다치는 바람에 그의 부모님이 살아남아서, 그게 일생 최대의 불행이라는 게 너무도 부러워서 피했다는 그 말을. 나중에 류건우가 그 사고에서 이어진 화재로 부모님을 잃었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야 류청우는 그때의 박문대가 품었을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수 있었다. 그때 자신이 뭐라고 했더라, 그 말 그대로 형이 돌려줬던 건 기억이 나는데. 정작 자신이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상했다. 분명 그때 일은 다 기억한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떠올리려고 하면 떠오르지 않는 것이. 류청우는 명백히 무너지고 있었고, 그는 그것을 아주 천천히 자각했다.
“류청우, 들어간다.”
“아,”
창백해진 얼굴엔 걱정이 가득하다. 류청우는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으로 형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형의 표정이 점점 나빠지는 걸 보면 썩 좋은 얼굴은 아닌 것 같았다. 류청우는 애써 가면을 덮었다. 그러나 흔들리는 가면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는지, 그의 형은 순식간에 류청우가 품은 불안을 꿰뚫어보았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 내가 너 싫어하게 될까봐?”
정곡을 찔렸는지 움찔거리는 손이 보였다. 박문대는 예민한 시선으로 어린 동생을 살폈다. 입은 이상할 정도로 꽉 다물었고, 눈동자는 미약하게 흔들리고, 속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있다. 손에는 얼마나 세게 힘을 줬는지 마디마디가 시허옇다. 그걸 본 류건우는 다른 것보다도, 동생의 두 손을 낚아챘다. 차갑게 식은 손이 류청우가 얼마나 긴장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너는.”
이마에 작은 충격이 전해졌다. 갑작스런 접촉에 류청우가 깜짝 놀라 상대를 보니 박문대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혼자 다 끌어안고 가라앉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냐.”
“... 형.”
류건우는 그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따스한 품 안에서 즐겁게 세상을 탐험하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잃는 그 순간이 얼마나 시리고 아픈지는, 류건우만큼 잘 아는 사람이 드물었으니까. 그래서, 그 고통에 익숙해진 끝에 결국 자신을 잃었던 류건우라면,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해 기어이 이곳에 서게 된 박문대라면, 적어도 지금 류청우가 억누르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는 알 수 있었다.
“난 내 동생이 그렇게 되는 건 싫다.”
박문대는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한 발 물러났다. 짙은 눈빛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네가 어떤 이유로 그런다고 해도 내가 너 싫어하게 될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류청우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류청우에게 다시 다가간 박문대는 손을 들어 아직 어리디어린 동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기고, 따끈한 체온이 손바닥으로 전해진다. 눈물은 없었지만 꼭 우는 것 같은 얼굴을 한 류청우를 보며 박문대는 하염없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때로는 한 마디 말보다도 작은 체온이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그는 이제 알았다. 그래도 류청우는 언젠가 말로 털어놓아야 할 것이었다. 자신을 이루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었다는 절망, 막연하게 덮쳐오는 불안, 두려움, 괴로움, 분노, 무력감, 그런 건 무릇 언어로 구체화되어야 사라질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말하고 싶어지면 그때 말해.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고. 부모님께 말씀드려도 좋고, 다른 멤버나 상담사여도 상관없고.”
“... 그래, 형.”
“네가 뭐 때문에 그러더라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혼자 끌어안고 있지 마.”
류청우는 천천히 팔을 올려 형을 끌어안았다. 든든한 어깨에 얼굴을 묻고 넓은 품에 온몸을 던졌다. 품에 들어차는 온기는 너무도 그리웠던 것이었다.
몸을 옥죄는 팔이 제법 묵직했지만, 박문대는 아무 저항 없이 그저 그 포옹을 받아주었다. 작게 떨리는 동생의 몸은 이 순간 너무도 작아보였다. 이 작은 행동이 류청우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낫게 해줄 수 있다면, 그래서 잠시라도 그의 동생이 모든 것을 쥐어짜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류청우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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