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문대

흔적의 온도

청우문대, 슽청문

티온랩실 by 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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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어 류청우’.

‘테스타 류청우’와 다른 수식어는 단 하나뿐이었지만, 그 하나는 수많은 갈림길을 만들었다. 이를테면 무책임한 회사에 아무 대응도 할 수 없었던 것이나 같은 팀의 멤버조차 신뢰하지 못하는 것, 또는 멤버를 지키지 못한 것, 그 결과 길고도 잔인하게 침몰해버리는 것.

류청우는 생각한다. 자신은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없었을 거라고. 박문대에게 묻는다면 ‘지키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라며 일축하겠지만, 스티어의 류청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게 되는 거다. 나에게도 당신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지.

  “형.”

침대에 파묻혀 조용히 모니터링하던 류청우는 박문대의 영상을 보았다. 알고리즘을 타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게 된 영상이었다. 영상 속의 박문대는, 좀 전에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던 친척 형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그 차이를 생각하며, 류청우는 박문대를 생각했다.

‘스티어’가 있던 시간에서, 박문대가 살아갔을 류건우를 더듬었다.

룸메이트라는 차유진은 조용했다. 굳이 말을 걸 필요도, 욕구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류청우는 이제껏 ‘차유진’과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건 물어보고 싶었다. 류청우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차유진.”

잠시간의 정적 후 차유진이 대답했다. 류청우는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했다.

  “Yep.”

  “뭐가 달라진 걸까.”

차유진도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 질문에서 류청우가 원하는 답은 명쾌하다.

  “문대 형이 있어요.”

그래, 그것뿐이다. 류청우도 알고 있었다. 차유진의 대답은 확신만 심어주는 것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겨누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류청우의 화살 끝이 움직였다.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글쎄요.”

차유진이 천천히 말했다. 이곳의 ‘차유진’은 제법 활발하고 쾌활했던 것 같은데. 류청우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다. 류청우는 또 생각했다.

  “하나는 확실하죠. 청우 형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 말을 끝으로 차유진은 잘 자라며 손을 흔들었지만, 류청우는 잠들지 못했다. 의미 없는 가정이 가득 들어차 답을 내지 못한 머리가 어지러웠다. 

-

  “청우 형,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그래?”

류청우는 대충 표정을 관리했다. 사실 표정이 어떻든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제 얼굴 때문에 멤버들이 성가시게 구는 건 사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박문대는 류청우를 가만히 보았다.

  “뭔가 문제라도?”

  “아뇨.”

박문대가 입을 열었다. ‘류건우’의 말투였다.

  “스케줄도 없는데, 쉬지 그래.”

류청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할 의욕도 들지 않았다.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는 류청우의 뒷모습을 박문대의 시선이 쫓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 밖에서 누군가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곧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던 류청우를 방해한 것은 의외로 박문대였다.

  “룸메이트 잠깐 바꿨어. 래빈이는 차유진을 더 편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아. … 그래, 그렇겠네.”

  “... 그래.”

박문대는 차유진의 침대에 몸을 뉘었다. 낯선 긴장감이 방 안을 맴돌아, 류청우는 몸을 일으켜 박문대를 보았다. 한쪽 팔로 머리를 괸 채 다른 쪽 팔을 들어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그에게 류청우가 말했다.

  “궁금한 점이 있어요.”

박문대가 고개를 돌렸다.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뭐가.”

  “스티어를 알고 있었어요?”

박문대는 입을 다물었다. 머리를 괴던 손이 슬금슬금 내려가더니 목을 쓸어댔다. 조금 민망한 것 같았다.

  “어. 조금이지만.”

류청우는 조금 더 질문하기로 했다. 미지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스티어를 봤어요?”

박문대가 조금 망설였다.

  “... 궁금하냐?”

  “네.”

류청우는 가만히 박문대를 보았다. 그는 한참을 고민했다. 스마트폰을 침대 위에 대충 내려놓고는 목을 주무르기도 하고, 눈을 감기도 하고, 종국에는 팔짱을 꼈다.

  “그냥, 너희가 열심히 하는 모습이 눈에 밟혀서.”

오랫동안 말을 고른 그가 덤덤하게 대답을 내었다. 류청우는 그 행간을 읽으려 박문대를, 류건우를 관찰했다. 언뜻 보기에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분위기지만, 움찔거리는 입가, 반쯤 감긴 눈, 살짝 피한 시선은 한때 류청우가 자주 보았던 것이었다. 숨기는 것이 있다는, 일찍이 활동을 중단한 멤버가 자주 보이던 행동. 류청우가 입을 열었다.

  “어땠어요?”

  “잘하더라.”

방금 전 대답은 진심인 것 같았다. 류청우는 조용히 그의 답을 곱씹었다. 그래, 열심히 했었다. 무관심과 무책임을 일관하던 회사, 제멋대로 튀며 논란을 생산했던 일부 멤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룹 활동에 끝까지 임했던 아이들. 그리고 자신, 끝의 끝까지 부러질 수도 휘어질 수도 없었던 그때까지. 류청우는 다시 질문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었다.

  “잘했나요?”

중의적인 질문을 던지는, 언뜻 들으면 소름마저 돋는 차가운 목소리. 일부러 온기를 뺀 건지, 작은 온기조차 불어넣을 수 없을 정도로 지친 건지는 목소리의 주인도 몰랐다. 그 목소리에 박문대의 눈이 류청우를 향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갈색 눈이 일렁이는 푸른 빛이 담긴 눈을 향했다. 툭 치면 우수수 쏟아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게 어깨를 내리누르는 그 짙은 푸른색에 박문대는 결국 눈을 감았다.

박문대는 그대로 조금 긴 침묵을 유지했다. 박문대가, 류건우가 스티어를 보게 되었던 이유, 그게 스티어였던 이유를 알려달라는 것처럼 들려서. 하지만 이건 자신만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리라. 생각을 정리한 그는 가만히 눈을 내리떴다. 류청우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류건우를 응시했다.

지금 눈앞의 류청우가 정말로 ‘스티어’에 대한 것을 묻는 것이라고 해도 류건우가 생각한 질문의 본의는 류청우가 가졌던 지독한 압박과 괴로움이 있어야만 했던 이유였다. 나아질 길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어 달렸던 스티어를 인정할 수 있는 근거. ‘테스타 류청우’라면 갖지 않았을, 폭력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자신을 향한 압박. 그래, 다르게 말하자면 ‘스티어 류청우’가 가졌던, 질식할 정도로 무거운 책임감이 가진 의미. 그 모든 것을 감안할 정도로 누군가에게 제 활동이 의미가 있었느냐는 비명과도 같은 물음. 더불어,

“그래.”

적어도 류청우가 보낸, 류건우가 보냈던 그 시간이, 그 압박이, 그 괴로움이 무용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인정을. 저도 모르게 둘을 동일시한 결과로 떨리는 손끝을, 내뱉는 쓴웃음을, 느리게 올라오는 눈꺼풀을 본 류청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류청우도, 류건우도 알고 있다. 그렇다는 대답 하나로 류청우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약속된 보상 없이 끝없이 이어진 추락은 쉬이 없어질 수 있는 종류의 기억이 아니다. 한 번 과녁을 잃어 흔들린 화살의 끝이 다시 제 궤도를 되찾기까지는 지독히도 오래 걸리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류청우는 생각했다. 그 끝에 당신이 있었다면, 이런 대답을 해줄 당신이 있었더라면 어쩌면 자신은 궤도를 잃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일전에 차유진과 나누었던 대화에서 얻었던 대답과는 다른 묵직한 무게의 결론이었다. 그럼에도 그 무게가 달갑다고 류청우는 생각했다. 자신이 보호했던 사람과, 자신을 지키려는 사람의 차이인 건지도 모르겠다. 단 한 명이 인정해줬을 뿐인데도 칠흑에 묻혔던 제 화살의 궤도에 빛이 비친다는 착각이 들어서, 그래서 류청우는 선명하게 바라보는 갈색 눈이 성큼 제게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만은, 자신의 흔적에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오늘만큼은, 어울리지도 않는 강압을 벗어던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충동 때문이었다.

그 충동이 저를 완전히 과거에 묻어버릴 함정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류청우는 쏟아지는 따스함에 아이처럼 매달렸다. 이것만큼은, 온전히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이 온기만큼은 나누고 싶지 않아서. 적어도 기억을 되찾는 순간까지는, 이 온기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었다.

류청우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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