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행복
청우문대, 하나하키AU
박문대가 이상을 느낀 것은 초겨울의 어느 맑은 날이었다.
과음의 대가로 찾아오는 지독한 토기와도 같은 느낌. 메슥거리는 속을 붙잡고 화장실의 문을 잠근 직후, 박문대는 치밀어오르는 토기에 한참 동안 변기를 붙잡았다. 눈을 감고 심호흡하며 쓰라린 속을 다스리던 박문대는, 입 안으로 시큼함이 올라오는 대신 달콤한 향이 난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을 떴다.
“이게 뭐냐.”
갈라진 목소리가 박문대의 심정을 대변했다. 수면에 둥둥 뜬 그것은, 연푸른 꽃잎이 겹겹이 피어난 작은 꽃이었다. 물을 내려 꽃들을 감춘 박문대는 결심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절대로, 멤버들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박문대가 그 꽃의 이름을 알게 된 건 며칠에 걸친 기나긴 서치의 결과였다. 수레국화. 특유의 달콤한 향 덕에 블렌딩 재료로도 쓰인다는 설명이 덧붙여진 채였다. 더불어 자신이 갑자기 꽃을 토해내게 된 이유를 찾아 헤매던 그는 자신과 비슷한 증상을 겪은 사람들을 금세 찾아냈다. 알아낸 것은 간단했다.
하나하키. 짝사랑하는 상대가 생기면 발병한다. 완치되려면 짝사랑을 이루거나, 짝사랑이 깨지거나. 더없이 비현실적인 일이지만 이미 그보다 훨씬 비현실적인 일들을 헤치고 여기까지 온 박문대였다. 이제 와서 새삼 당황하는 건 박문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상대가 누군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최근 새삼스럽게 감정이 동요하기 시작한 상대는 단 하나뿐이었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머리를 벽에 강하게 박은 뒤, 박문대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상대가 눈치채기 전에 마음을 접어야 한다고. 아이돌이 무슨 연애냐는 뿌리 깊은 직업정신이라고, 합리화는 완료됐다. 옆에서 지켜보던 룸메이트 김래빈이 안절부절못하며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을 박문대는 가볍게 별일 아니라며 일축했다.
연습, 연습, 연습. 컴백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앨범 준비 자체는 거의 완료된 상태였다. 지금 연습하는 건 무대에 들어가는 페어 안무의 호흡을 맞추는 것이었다. 원곡보다 박진감 있게 몰아치는 비트의 편곡 덕에 딴생각이 들 여유는 없었다는 게 개중 다행이었다. 박문대는 연습 중간에 짧게 주어진 귀한 휴식을 달게 받아들였다. 무슨 말이냐면, 휴식이 주어지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토악질을 해댔다는 뜻이다.
“흑, 컥.”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잔뜩 억누르는 뒷모습이 유독 작았다. 박문대는 푸른 꽃잎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꽃이 누구 때문에 튀어나온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아픈 명치께를 가볍게 누르며 박문대는 숨을 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급한 와중에도 잠가둔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박문대는 이 노크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도 알았다. 두 현상의 주인은 같았으니까.
온화하고 다정한, 누구보다도 강인한, 자신을 나락으로 떨구기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도 하는 유일한 사람.
“문대야, 괜찮아?”
낮게 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 걱정이 가득한 말. 주인은 류청우였다. 다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혼자 따라온 것 같았다. 평소였다면 평범하게 괜찮다고 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박문대는 그다지 괜찮지 않았다. 작디작은 다정에 숨이 막혀왔다. 대답하려고 입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다시 토기가 치밀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참아냈다.
“예, 괜찮습니다. 금방 돌아갈게요.”
들키면 X 된다. 박문대는 필사적으로 꽃을 억눌렀다. 문 너머에 서 있던 류청우가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걱정이 가득 묻은 목소리. 긴장한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의 끝이 살짝 눌렸다.
“... 그래, 문대야. 어디 안 좋으면 꼭 말해. 돌아오면 체온부터 재자.”
“네. 걱정 말고 먼저 가 계세요.”
점점 작아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박문대는 다시 변기에 머리를 박았다. 소리를 억누를 정신도 없었다. 직전보다도 많은 양의 꽃잎이 박문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해, 박문대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문에 머리를 기댔다. 달콤한 향기 탓에 입맛이 썼다.
-
어느 초가을이었다. 휴식기가 끝나고 다음 앨범 준비를 시작한 어느 맑은 날.
류청우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화장실로 달려갔다. 김래빈과 박문대는 편곡 작업을 위해 작업실에 가 있었고, 큰세진과 차유진, 선아현과 배세진은 안무 시안을 확인하기 위해 연습실로 내려간 상태였다. 숙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류청우의 평정을 깨뜨릴 만한 일은 없었다는 뜻이다. 물 위로 뜬 것이 연노랑 꽃잎만 아니었다면.
믿기 어려운 현상에 며칠간 경과를 지켜보던 류청우는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 폐기하며 사실들을 엮었다.
첫째, 그 현상은 류청우가 박문대를 생각했을 때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둘째, 그 현상은 특히 류청우가 박문대를 사랑한다고 느낄 때 주로 발생했다.
셋째, 박문대를 향한 류청우의 짝사랑이 깊어질수록 토해내는 꽃의 양이 많아졌다.
조합한 사실들을 토대로 류청우는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멤버 중 의료진과 누구보다도 친숙한 류청우였지만 드물게도 병원에 갈 자신이 없어 인터넷을 뒤졌다. 자신이 토해내는 꽃의 이름을 알아내고 비슷한 증상을 겪은 사람들을 찾아내는 데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류청우는 낯선 어감의 이름을 혀 안으로 굴렸다. 그건 영화에나 나올 법한 소재였지만, 이미 박문대 덕분에 비현실적인 일을 몇 번이나 체감한 그에게는 그럭저럭 있을 법한 일이었다.
“청우 형, 시간 괜찮으세요?”
“응, 문대야. 금방 갈게.”
다시 튀어나온 연노랑 헬레보러스를 태연히 내려보내며, 류청우는 숙소를 나섰다.
앨범 준비를 위한 강행군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페어 안무의 동작을 맞추는 멤버들이 눈에 띄었다. 막바지 안무 연습에 주어진 달콤한 휴식 시간. 박문대가 조용히 연습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류청우는 습관적으로 멤버들을 챙겼다. 말을 할 체력조차 없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얌전히 생수를 입에 붓는 배세진, 겨우 고맙다며 인사하고는 마찬가지로 생수병을 입에 꽂아버린 큰세진, 드러누운 채로도 투닥거리는 차유진과 김래빈, 긴장된 근육을 풀어내다 기꺼이 물을 받는 선아현. 류청우의 손에는 여전히 생수 두 병이 들려 있었다. 박문대가 어디로 가는지는 확인했다. 류청우의 마음이 급해졌다. 기다리면 곧 올 테지만, 따라가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잠깐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
“어어, 갔다와…”
다 죽어가는 배세진의 인사를 뒤로한 채, 류청우는 화장실로 향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박문대가 저렇게 서두를 때 좋은 일이 일어났던 적은 드물었다. 부디 몸에 이상이 생겨서 그런 건 아니기만을 바라면서 류청우가 문을 열었다.
“흑, 컥.”
박문대의 목소리. 작게 억눌린 소리다. 이어 무언가 후드득, 물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 익숙한 소리다. 어딘가 안 좋은 건 아닐지 걱정하던 류청우는 초조해지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잠긴 칸의 문을 살짝 노크했다.
“문대야, 괜찮아?”
떨리는 목소리가 들키지는 않을까. 류청우는 조심스레 물었다. 칸 안에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마른침이 넘어가는 소리와 작게 고르는 숨소리가 류청우의 귓가에 닿았다.
“예, 괜찮습니다. 금방 돌아갈게요.”
억누른 숨소리가 커진다. 박문대가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다. 숨통을 틀어막는 불안 속에서 류청우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 그래, 문대야. 어디 안 좋으면 꼭 말해. 돌아오면 체온부터 재자.”
“네. 걱정 말고 먼저 가 계세요.”
귓가를 맴도는 거친 숨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친 것은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이대로 가선 안 된다는 신호가 댕댕 울렸다. 문 앞까지 가서 멈춰선 류청우는 그대로 숨을 죽였다.
숨길 수도 없이 거칠어지는 구역질, 그 뒤로 이어지는 달콤한 향기.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덜커덩 움직이는 칸막이. 순간적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류청우를 덮쳤다. 아무래도 박문대는, 또다시 제 몸에 대한 무언가를 숨긴 모양이었다.
-
“문대야. 잠깐 괜찮을까?”
박문대는 잠시 의중을 파악하는 눈으로 류청우를 탐색했다. 그 얼굴이 제법 큰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 같은 얼굴이어서 류청우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넘어오려는 꽃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눌러두고, 류청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박문대를 베란다로 이끌었다.
“무슨 일이세요?”
불러놓고도 오랫동안 아무 말 없는 류청우를 보다 못한 박문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원래였다면 그냥 류청우가 입을 열 때까지 누가 이기나 해보자며 조용히 있었을 것인데. 류청우는 그런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잠시 말을 고른 류청우는,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다.
“문대야, 혹시 내가 뭔가 도와줄 일이 있을까?”
“예?”
“어딘가 아프다거나, 고민이 있다거나.”
박문대는 무표정하게 류청우를 바라보았다. 손끝이 조금씩 떨리고, 이따금 어깨가 움찔거렸다. 류청우는 그 모든 반응을 주의 깊게 살폈다. 제법 오랫동안 아무 대답 없이 박문대의 동공이 흔들릴 즈음, 류청우는 하나의 이상 증세를 발견했다. 류청우가 다급히 박문대를 부축했다.
“문대야!”
박문대가 입을 가린 채 헛구역질을 참아냈다. 까득, 이를 악무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소름이 쭈뼛 올라왔다.
“정말로, 별것 아니에요.”
박문대를 붙든 류청우의 팔에 힘이 실렸다. 박문대도 말하면서 알고 있었다. 류청우는 박문대의 거짓말에 속아줄지언정, 거짓말을 한다는 건 테스타의 그 누구보다 더 능하게 눈치채는 사람이었으니까.
“저만 조용히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 그래, 형.”
“나이를 그렇게 처먹었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류청우는 참담한 기분에 어설프게 떨어진 박문대를 제 품에 집어넣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두근거리는 박동이 빠르게 느껴졌다. 익숙해진 토기가 깊은 곳에서 치밀어올랐다. 그때, 등 뒤에서 달콤한 향이 느껴졌다. 박문대가 황급히 류청우를 밀쳐내며 두 손을 들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우웁, 큭!”
차마 막지 못한 탓에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그것은 분명히 꽃이었다. 옅은 푸른 빛이 아름다운 자그마한 꽃송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현실적이었다.
“뭘, 보고 있는 거예요.”
류청우는 이 현상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연했다. 자신도 겪고 있으니까. 겨우 억누르고 있던 구토감이 다시 치밀어올랐다.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는지 입을 틀어막은 박문대가 놀라 다가오려는 모습이 보였다. 노란색 꽃잎이 쏟아지듯 흘렀다.
“청우 형?”
“문대야, 잠깐만, 미안한데 오지 마.”
입을 가린 채 뒤돌아선 류청우가 손에 떨어진 꽃잎을 꽉 쥐었다. 타박이는 소리와 함께 박문대가 다시 류청우의 눈앞에 나타났다.
“형이야말로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어…”
“아픈 건 아니야. 정말로.”
그리고 박문대 역시 꽃을 보았다. 자신이 토해내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연한 노란색의 어여쁜 꽃을. 박문대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있던 류청우가 입을 열었다. 지극히도 충동적인, 그럼에도 준비했던 짧은 말. 좋은 상황이냐고 묻는다면 명백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상황이었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말이었다.
“문대야.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
짧은 침묵이었다. 류청우는 오히려 홀가분해 보였다. 박문대만이 손에 든 꽃잎을 뭉개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상황이 스쳤다. 항상 최악을 가정하고 시작하는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류청우가 비어있는 한쪽 손을 뻗어 박문대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강요하지 않아. … 하지만 네가 참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다정한 말 한마디. 그토록 꽃을 피워놓고도 제 마음을 인정할 한 톨의 용기를 내지 못해서, 혹은 내리쳐 뭉개버릴 모진 마음조차 갖지 못해서 양손에 가득 꽃을 쥔 채 주저앉은 박문대에게, 그 말은 너무도 잔인하고도 따뜻했다.
“바로 답해줄 필요도 없어. 그냥, 문대 네가 괜찮아지면 말해줘.”
언젠가의 일이 떠올랐다. 정상에 올라 피할 수 없는 질문을 하던 류청우가, 대답을 회피하던 박문대가. 박문대의 입술이 달싹였다. 류청우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박문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무 기대도 없는 다정한 눈길에 박문대는 괜히 울 것 같아져서, 류청우의 손목을 붙잡았다.
“응, 문대야. 나 여기 있어.”
“... 네.”
박문대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추가 하나의 선택지로 기울어간다. 부족했던 한 톨의 용기, 류청우를 선택했을 때 행복해질 수 있을지 몰라 두려웠던 그 작은 용기. 손을 통해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이 박문대를 부추겼다. 충동적이었으나 준비되어 있었던 한마디.
“... 나도.”
고백의 답이었지만,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류청우는 그 한마디에 올라오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감겨드는 체온이, 맞부딪히는 시선이 깊은 만족감을 선사했다. 잔뜩 달아오른 얼굴이 류청우를 살아 숨 쉬게 했고, 불규칙하게 날뛰는 심장 박동이 박문대를 행복하게 했다. 그들은 그렇게, 한겨울의 베란다에서 한참 동안 서로를 품에 안았다.
-
꽃망울이 터지던 어느 봄, 소파에 앉은 박문대의 옆으로 류청우가 다가왔다. 슬쩍 옆으로 비켜 류청우의 자리를 내어주던 박문대는 무언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형 꽃은 헬레보러스, 제 꽃은 수레국화였죠.”
“음, 그런 것 같았어. 왜, 문대야?”
박문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류청우가 자연스럽게 박문대의 어깨를 감싸며 기대었다. 그런 류청우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박문대는 웃었다. 존재 이유와 행복, 그래.
너의 행복이 곧 나의 존재 이유일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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