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못죽] Cliché

[유진문대] Cliché

강렬하게 일렁이는 여름날의,

2열 by 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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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문대 형. 벌써 오셨어요? 저도 일찍 온다고 일찍 온 건데."

"습관이 돼서."

"하긴... 1학년 때부터 매일 오전 교칙 검사하셨다고 했었죠?"

1학년 내내 오전 교칙 검사를 자처해서 한 탓인지 몸에 익어버린 탓에 그 후로도 매일 오전 교칙 검사를 자처해서 했다. 2인 체제로, 나를 제외한 다른 선도부원들은 돌아가면서 오전 교칙 검사 당번을 맡았다. 다른 당번보다도 특히나 일찍 도착해서 준비하는 것 또한 습관이 되어버렸다.

"나갈까?"

같이 당번을 맡은 후배와 함께 교문으로 향했다. 5월임에도 이른 아침은 제법 쌀쌀했다.

벌써 개학 날로부터 두 달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교복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는 학생들이 많았다.

"명찰 안 했네요. 학번, 이름."

명찰을 안 한 건 애교 수준이었다.

"넥타이 왜 안 했어요. 학번, 이름."

넥타이를 안 한 것도... 뭐, 애교 수준이었다.

"...와이셔츠 잠그고. 넥타이도 하셔야 하고. 조끼도 당연히, 안 입었고. 학번, 이름."

..이것도 대부분의 학생이 그런 탓인가 타격감이 없었다.

"넥타이를 하긴... 했는데. 이거 옆 학교 넥타이 아닌가요? 알아서 대세요."

이건, 뭐라고 해야 해.

뭐 이렇게 교복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는 학생들은 정말 많았다.

"....? 저건 뭐야."

우리 학교는 빡빡하신 2학년 학생주임 선생님 즉, 선도부 담당 선생님으로 인해 교칙이 다른 학교에 비해 빡세게 지켜지고 있는 편이다. 명찰 하나까지 세세하게 잡는 것은 물론이고, 귀걸이, 염색, 파마 등 많은 것을 잡았다. 두발 자유화된 지가 언젠데..

그런 우리 학교에,

"내 눈이 잘못된 거냐, 저게 지금. ...빨간 머리 맞지?"

적색경보가 떴다.

빨간 머리는 정말,

'머리도 그렇고... 피어싱에, 명찰도 없고 넥타이도, 없고. 조끼, 없고. 하다 하다 와이셔츠까지 안 입은 새끼가 떴네?'

총체적 난국이었다.

"...학번, 이름 대세요."

"차유진이에요!"

명단에 이름과 교칙 위반 사유를 적으려는데, 옆에 있던 후배가 입을 열었다.

"그, 선배. 제가 얘랑 같은 반인데... 어제 전학 왔어요.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왔대요. 그래서 교칙 같은 거에 어려움을 느끼나 보더라고요. 오늘은 넘어가 주고, 다음에..."

"거긴 교칙 없대? 규칙도 없고? 혹시 법도 없어?"

"그건... 아니지만..."

"그리고. 이런 건 초장에 빡세게 잡아야, 안 되는 거구나 하고 깨닫는다, 주의라서 내가. 학번도 대세요."

와, 이 새끼 이거... 대단한 놈이네.

"머리는 당장 염색하기 힘들다 치고. 그래도 체크할 겁니다. 안 한다는 건 아니고. 명찰, 없고. 와이셔츠는 잠그긴 했는데 반만... 하. 넥타이도 하긴 했는데 ...후배님께선 울대가 되게 아래 달려있으시구나. 배에 있네. 조끼도, 없고. 학번, 이름."

다음 날도.

"와이셔츠... 어디 팔아 먹었어요?"

"No! 나 안 먹었어요!"

"...학번, 이름."

그다음 날도.

"학번, 이름."

그다음 주도.

"학번, 이름."

그 다다음 주도.

"학번, 이름."

그렇게 이 캘리보이놈이 교복을 제대로 갖춰 입는 걸 본 적도 없이 하복 혼용기간이 되었다.

"안녕! 나 차유진이에요!"

"알고. 하복은... 갖춰 입을 것도 없는데, 참 야무지게도 내다 버리셨네. 참, 대단해. 응."

이젠 녀석의 학번과 이름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10618 차유진. 명단에 다 적었는데도 가지 않고 계속 내 앞에 서서 멀뚱히 나를 보고 있었다.

"나 바꿨어요!"

"뭘 바꿨... 아."

이젠 흑색경보라고 불러줘야 하나.

"머리는 지울게요. 들어가세요."

이쯤 되면 저거, 나 귀찮게 하겠다고 일부러 교칙 어기는 거 아니야? ...그치, 너무 갔지.

그렇게 단 하루도, 차유진이 제대로 교복을 갖춰 입은 모습은 보지 못한 채 학기가 끝났다.

***

교칙 검사로 쌓인 벌점은 1년에 단 한 번, 탕감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교내 봉사. 이러다 이거 유급하는 거 아니야? 싶은 학생들이 너무 많은 나머지 만든 제도라나 뭐라나. 근데 그걸, 선도부원들이 지도한다. 굳이, 여름방학에. 왜 벌점이 있는 것도 아닌 내가. 이 땡볕에. 이 찌는 더위에. 같이 개고생을 해야 하냐고. 하필, 올여름 최고 기온일 때.

바닥의 열이 너무 센 탓에 아지랑이가 크게 일었다.

"아씨..."

"괜찮아요?"

바닥에 엎어지는 꼴은 면했다.

"문대 형, 열 약해요?"

이젠 이 어눌한 한국말도 그냥 평범하게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 탓인지, 자꾸만 다정하게 걱정해주던 누가 겹쳐 보였다.

"하... 쉬면 돼. 괜찮아. 고맙다."

차유진의 손을 밀어내고 일어나 수돗가로 향했다. ...다정한 사람은, 위험하다. 더는, 싫다.

옆에서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 따라온 거야.

"끝났대요! 우리 아이스크림 먹어요."

내가 사요! 하며 해맑게 웃는 차유진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뭐, 이 땡볕에 고생했는데 차가운 게 좀 들어가 줘야겠지. ...정신도 차려야겠고.

"...이렇게 비싼 걸 얻어먹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앞에 놓인 초코 젤라또를 보며 중얼거렸다. 애 같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확실히 애는 애인가 보다. 초코맛이라니...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게 젤라또를 먹는 차유진은 새로운 감상이었다.

'교칙 어기는 건 쥐어박고 싶었는데.'

"근데,"

차유진이 먹다 말고 입을 열었다. ...아니, 정정한다. 다 먹은 모양인지 입을 열었다.

"교복 그거 꼭 다 해야 해요?"

이 캘리보이를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나.

"뭐, 보기 좋잖아. 단정하고."

"단정? 형 단정한 사람 싫댔어요."

"응? 그게 무슨... 아."

피식 웃음이 났다. 들었구나.

"단정한 사람 좋아. 왜 안 좋겠어."

내 말을 가만히 들으며 나무스푼을 지분거렸다. 그러더니 뭔가 깨달았다는 듯 입에서 스푼을 빼고 씩 웃었다.

"OK. I got it."

차유진과는 그날을 마지막으로 볼 수 없었다. 방학인 것도 있었지만,

"아 오빠! 정시로 가신다면서요!"

"형, 괜찮아요. 괜찮아. 1학년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오전 교칙 검사하셨다는 거 다 들었어요. 이제 좀 쉬세요!"

선도부 후배들 때문이 가장 컸다. 방학이 끝나고 돌아왔더니 아예 자체적으로 당번 명단에서 내 이름을 지웠다. 이거 한다고 그렇게 뭐가 크게 달라지진 않을 텐데 말이지. 작게 웃고 답했다.

"알았어. 그럼, 수능 끝나면 졸업 전에 한 번쯤은 다시 하게 해줘. 매일 하던 일이라 그런지... 안 하는 게 이상해서."

"좋아요. 대신 딱 한 번이에요."

"나 없다고 설렁설렁하지 마시고."

"아 당연하죠!!"

"나 간다. 잘하고."

아쉬웠다. 이젠 그 악명높은 차유진이 교복을 제대로 입었을까 싶었는데. 뭐, 그냥 궁금했던 거겠지. 계절이 다시 바뀌어도 너는 그대로일지.

***

"안녕!"

"어, 그래. 알아. 너 차유ㅈ... ?"

오늘은 왜 나 차유진이에요 안 하지. 거의 시그니처 인사 아니었나. 고개를 들어 본 차유진은

"..단정하네."

교복 와이셔츠도 단추도 야무지게 잠가서 입고, 넥타이도 제대로 했다. 조끼에 마의까지 챙겨입은 차유진은 생각보다 더 낯설었다. 심지어 가슴팍에 달린 노란 명찰. ...웬일로 명찰이 대신 '나 차유진이에요!'를 외쳐주고 있었다. 마지막에야 다 챙겨입은 차유진을 보네 하며 흔한 감상에 빠져있었다. 차유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명단 속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였다.

"내 이름!"

그러더니 내 손에 들려있던 명단을 쏙 하고 가져갔다.

"아, 그거 내가 지워줄게. 미안."

하지만 명단은 돌아오지 않았다. 명단 위에 펜으로 뭔가 쓰는 듯하더니 그제야 돌려줬다.

"나중에 봐요!"

차유진은 그대로 건물 안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미친."

명단 속 차유진의 이름은 그대로였다. 그 옆엔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박문대.

쌀쌀한 날씨임에도 얼굴은 그 날씨를 시원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차유진은 그날을 기점으로 아침마다 교실로 와 출석 도장을 찍고 갔다.

"나 단정해요!"

그다음 날도.

"단정한 사람!"

그 다다음 날도.

"단정하죠?"

다음 주에도.

"좋아요!"

다다음 주에도.

"멋져요!"

졸업 전 마지막 등교하는 날까지도.

"ㅎ...!"

차유진의 입을 틀어 막고 교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반에선 '유진이가 이제 문대가 검사 안 한다는 게 많이 아쉽나 보다~', '박문대가 얼마나 잡았으면 애가 자진해서 오냐!' 식의 농담이 들려왔다.

"하... 야, 차유진. 그만해. 너 단정한 거 알겠어."

"좋아요?"

"그래, 좋아."

"그럼, 사귈래요?"

차유진에게 고백을 받았고,

"...안 돼."

거절했다.

"그럼 연락해요."

"어?"

"번호. 갖고 싶어요."

다음 날, 나는 졸업했지만.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 알 수 있었다. 거의 일기를 쓰듯 연락하는 차유진 때문에.

***

해가 바뀔 때까지도 차유진과의 연락은 끊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해가 바뀌었을 때도, 차유진은 여전했다. 어쩌면, 덕분에 견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다시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 오늘 형 학교 가요. 구경해요!]

설마 했는데 정말, 차유진이 학교에 찾아왔다. 교복을 입고.

"너 교복 잘 입고 다닌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다? 아니, 오늘만 입은 거 아니야?"

"아니에요! 매일 입어요!"

알겠어 하면서 웃고 뒤돌았다. 이거... 가뜩이나 튀는 애가 교복까지 입고 있으니 은근히 쳐다보네. 그래도 후배님께서 이 대학에 오고 싶으시다는데... 구경시켜드려야지, 또.

차유진은 체육특기생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쿼터백이랬던가...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한다고 들었던 것 같다. 워낙 운동신경이 좋은 탓에 대학도 큰 문제 없이 잘 들어올 것 같았지만, 그래도 삐끗할 수도 있으니까. 사기충전을 위해 성심성의껏 캠퍼스 구경을 시켜줬다.

차유진은 워낙 모든 것에 신기해하고 즐거워해서 어딜 데려가든, 무엇을 하든 즐거워했다. 하지만 역시..

"여기가, 체육과가 사용하는 운동장."

운동장에는 덥지도 않은지 쏟아지는 햇빛 아래 땀을 흘리며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차유진의 표정이 마치, 저기서 같이 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역시 여기를 제일 좋아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 보인 반응과는 차원이 달랐다. 개 같네. 아니, 그러니까, 대형견.

"꼭 여기 와요! 약속해요!"

"그래, 꼭 와."

옆에서 계속 재잘거릴 줄 알았던 차유진이, 조용했다. 뭐지 하며 옆을 보자, 나를 빤히 보고 있는 차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형."

"..?"

"형 만났을 때 형 나이, 내 나이였어요. 나, 형 나이 됐어요."

"....."

"새로운 처음으로 적절한 나이예요."

차유진이 씩 웃었다.

"사귈래요?"

***

"나, 약속 지켰어요."

"?"

"꼭 여기 와요! 약속해요!"

"그래, 꼭 와."

아. 그때.

'귀엽네.'

차유진은, 정말 나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다음 해, 같은 대학에 진학했다. 그 덕에,

"우리 그거네요? Campus couple."

남들이 다 뜯어말린다는, CC가 되었다.

[ 네 사랑이 실패했다고 누가 그래? ]

잊고 있었다.

[ 실패한 사랑이란 건 없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건 실패한 거야? ]

사랑에 실패했던 주인공이,

[ 아픈 사랑도 사랑이야. 너는 그걸 알게 됐어. ]

영화가 다 끝나고, 검은 바탕에 하얀 글씨가 빼곡히 한참을 흘러간 후,

[ 얼마든지 다시 사랑이 찾아올 거야. ]

새로운 사랑이 찾아와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지는 것을.

나 또한, 내 사랑 또한 실패했었다. 아니, 실패인 줄 알았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저, 지독히도 아플 뿐이어서.

그 주인공처럼 나는, 다시 한번. 사랑에 빠졌다.

여느 영화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클리셰처럼, 사랑하게 되었다. 내가, 너를.

강렬하게 일렁이는 여름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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