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창작

행복

관계의 정의 / 홍유일 개인 로그 / 2022.02.18 업로드

검은 머리의 소녀가 가벼운 발소리를 내며 강당 입구로 들어섰다. 간단한 세수를 마친 뒤인지 앞머리가 조금 젖은 채다. 대부분 잠들어 있어 고요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은 합숙 첫날에 비해 많이 안정된 분위기다. 소녀는 입구에서 발을 떼지 않고 텐트 하나하나를 눈으로 훑는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아쉽다. 합숙도, 이 학교도.


졸업한 선배들은 벌써부터 연락이 뜸해지고, '되지 못한 것'은 늘어난다. 이 세상은 나의 것이며 현실 또한 나의 꿈이라. 그리하여 그 무엇도 나를 상처 줄 수 없는 세상에 사는 것은 일종의 방어기제이자 행복의 유지 장치였다. 그러니 누군가는 그리 말할 수밖에.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없노라고. 나는 그것이 철저히 맞는 말인 줄 알면서도 나를 들여다보기에 막상 부정하곤 했다. 아파야만 인생이라면 그런 것은 살기 싫어서, 아프지 않은 생을 나의 손으로 이뤄내려 했다. 아니, 지금도 결심은 변함없다. 나는 모든 것에 자유롭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제외한 모든 것 역시도 그러했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귀를 스친다. 종종 저리 웃었던가. 이 겨울의 칼바람에 흰 웃음을 내지르면 꽁꽁 묶은 목도리에 몇 가닥 삐져나온 털이 입술을 간질이곤 했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여 세상을 사랑하니 끝내 그 자연까지도 사랑했다. 거대한 것을 사랑한 자들의 비참한 최후를 익혔음에도 나는 신화 속 인물이 되려 했던가. 사랑으로 태어난 자이기에 사랑으로 숨 쉬어 끝내 사랑으로 죽어가려 했다. 철없을 적의 우둔함이라 해도 좋았다. 나 죽고 나면 저 태양만은 알아줄 테니, 그것 하나면 족하였다.

늘 남겨지는 이는 헤어짐에 면역이 있었다. 이 또한 나의 거품 구슬 중 하나이리라, 오히려 손 흔들어 주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잘난 사랑에는 면역이 없었나. 아무리 저 태양의 붉은 빛깔을 사랑함에 그것을 허리께에 눌러 새기고 다니어도 무엇하나 돌려 얻는 것 없었다. 생각해보면 꽤 익숙해 그런 사랑만이 슬펐고 또 기뻐 괜찮았다. 슬픈 인생이구나. 누군가 그리 속삭인다. 아니야. 나는 행복했어. 불행과 슬픈 것은 달라. 아니야. 행복했어.

물방울이 태양을 우러러보니 그는 곧 구름이 되고 또 비가 되어 다시 대지로 내려오더라. 그리하여 끝없는 순환을 반복하다 언젠가 땅 아래 나무뿌리에 잠들더라. 드넓은 하늘을 떠돌며 구경하다 모든 땅에 내려보더라. 모든 강에 섞이고, 바다를 건너보더라. 그리고 끝내 어느 한 소녀의 눈에 맺히니 그것이 곧 하늘과 땅, 사람을 골고루 비추더라.

행복해. 그래야만 해? 아니, 행복해. 사랑하니까.

미처 마르지 못한 머리카락에서 이마를 타고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소녀가 해사한 얼굴로 마저 수분기를 닦아낸다. 기지개로 시작해 일기 쓰기로 끝나는 하루가 오늘도 평온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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